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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 학교의 살인자(18)

2014.06.28 14:3306.28

18

 

선거운동이 시작되었다. 승표는 자신의 말대로 모든 선거운동을 자기 어머니의 손에 맡겼다. 승표의 어머니는 아들이 선거에 전혀 신경쓰지 않고 학교생활에 몰두할 수 있도록 철저히 배려했다. 경화는 K선생에게 저 여자를 학교에 들어오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주장은 절반만 옳았다.

그녀는 사실상 선거를 지휘했다. 선거 운동이 있었던 지난 일주일동안 K선생이 내내 자신의 상식을 점검하는 일을 반복해야 할만큼, 승표의 어머니는 이제까지 학부모가 교내에서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들을 모두 해냈다. 선거에 입후보하는 학생은 없었다. 승표 단독 후보였다. 한동안 잠잠하던 경화의 신경질은 다시 작두에 탄 무당처럼 튀어올랐다. 동료 교사들의 아무런 도움 없이 혼자서 선거를 꾸려가야 하는 K담임은 단 하나의 조력자인 경화가 줄곧 승표를 괴롭히고 못살게 굴 때마다 쫓아가서 때려주고 싶을 지경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화는 선거 기간동안 상당한 역할을 해냈다.

승표의 어머니는 매일 아침 K담임에게 찾아왔다. 정확하게는 K담임 자리를 찾아왔다. 그리고 그날 진행할 선거운동에 대해 상세한 메모를 남겼다. K담임은 승표의 어머니가 자신의 자리에 찾아온 첫날 책상에 붙여 둔 개인 시간표가 없어진 것을 발견하고는 공강 시간마다 다시 목공실로 숨어들었다. 그녀는 상관하지 않고 고급스러운 무역회사 로고가 새겨진 메모지를 매일 그의 책상에 남겼다. 처음에는 교장을 피하기 위해 시작된 K담임의 교내 도피생활이 승표의 어머니 때문에 계속 이어졌다.

그녀는 학교에 올 때마다 다른 옷을 입고 왔다. 그리고 칼라 코팅지로 만든 포스터와 갖가지 공약과 사진이 인쇄된 3단 팜플렛을 학교에 가득 뿌렸다. 게다가 파란색 홍보 배지와 캔디가 가득 든 투명 플라스틱 항아리를 들고 다니면서 아이들에게 캔디와 배지를 하나씩 나눠주었다. 고용된 선거 운동원과 운전기사가 학교에 드나드는 걸 막아낸 사람은 K담임이 아니라 경화였다.

경화는 승표의 어머니를 면전에서 노골적으로 비웃었다.

돈이 남아 도나 보죠.”

K담임은 달랐다. 그는 생각 외로 승표네 살림이 궁핍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가난하기 때문에 오히려 아이에게 돈을 아끼지 않는 것이라고.

경화에게는 비웃을만한 이유가 따로 있었다. 선거 운동이 시작되기 바로 전날 승표의 어머니는 교무실에 출현했다. 어안이 벙벙해진 K담임과 추기경은 그녀에게 악수를 당해야 했다. 승표의 어머니는 교무실에서 뭉개적거리고 있던 선생들의 손을 하나씩 붙들고 공손히 인사를 나누었다. 승표는 그런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경화의 손을 잡고 학교 뒷문으로 도망쳤다. 경화는 공포를 느끼고 반대로 승표의 손을 나꿔챘다.

승표는 비틀린 손목을 빼내려고 요동치면서 말했다.

저 여자, 우리 엄마가 아냐.”

맞아. 우리 엄마가 아냐. 니 엄마야.”

경화는 대답했다.

저 여자는 내 엄마가 아냐. 날 낳은 사람이 아니라구.”

그래서? 새엄마야?”

아니.”

그럼 따로 살아?“

아니.”

그러면, 도대체 누구야?”

승표는 침을 삼켰다.

아버지가 저 여자한테 선거운동을 시켰어.”

저 여자가 누군데 그런 걸 시켜?”

아버지 회사 직원이야.”

애인은 아니고?”

그건 몰라.”

설마, 애인도 아니고 그냥 직원이면 저렇게 하겠어?”

어쨌든 돈 받으니까 하는 거야. 특수 근무야.”

승표는 고개를 끄덕이고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경화가 물었다.

여자가 대신 와서 엄마 행세하는 거 넌 몰랐어?”

몰랐어. 부모님은 나한테 말씀 안 하셨거든.”

하실 시간이 없었던 게 아니고?”

승표는 가만히 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말이 맞는 거 같아. 최근에 뵌 적이 없거든.”

경화는 승표의 손을 놓았다.

승표의 어머니가 선거운동을 하는 동안 K담임은 계속 그녀를 피해다니다가 여지껏 알지 못했던 학교의 새로운 장소와 아름다움을 찾아내기 시작했다. 목공실은 천장이 좀 높았는데, 해질 무렵이 되면 창문에서 루벤스 그림에 나오는 듯한 빛이 들어오는 것도 처음 알았다. 닭과 토끼와 오리를 치는 뒤편에서는 흐르는 조그마한 시냇물을 발견했고, 그 수원이 빗물과 닭장 옆의 오래된 수돗가에서 새는 물방울이라는 것도 알아냈다. 또한 배고픈 도둑고양이가 새끼들의 저녁을 챙기는 구멍도 찾아냈다. K담임은 고양이들의 처소를 내버려두는 대신 토끼들을 안전한 곳으로 옮기고 자신의 공평한 처사에 만족했다. 새로 지어진 체육관 뒤쪽에는 건축 폐자재들이 아무렇게나 쌓여 모던 미술 같은 풍경을 자아내고 있었는데, K담임은 거기서 엄마를 잃은 또다른 새끼 고양이 세 마리를 발견해 목공실로 데리고 갔다.

거기서 그는 다시 추기경을 만났다.

고양이 드릴까요?”

K담임은 추기경의 코앞에 몽클거리며 손에 감기는 고양이를 내밀었다. 추기경이 새끼 고양이의 뒷덜미를 잡고 들자 고양이는 어미의 입매를 기억하고 몸을 바짝 긴장시키는 특유의 자세를 취했다.

승표의 엄마인지, 계모인지 회사 직원인지 정체모를 여자가 학교를 휘젓고 다니는 동안 K담임과 추기경은 목공실에 꼭꼭 숨어 나오지 않았다. 용식은 평소대로 의자를 뚝딱거렸다. 찬조연설 준비는 몇 달 전에 끝났다. 얼마 전부터 용식은 의자뿐만 아니라 책상과 교단, 칠판 등 학교에서 사용되는 물건을 도맡아 만들었다. 못이나 철판도 필요없었다. 나무조각을 자르고 다듬어서 레고처럼 끼워맞추면 완성되었다. K담임은 작업을 지켜보면서 경탄했다. 그러나 추기경은 조금이라도 마음에 안 들면 도자기 깨듯 가차없이 벽에 집어던져 부숴버렸다. 보다못한 K담임은, 용식이 불쌍하기도 하고 아깝기도 해서 몰래 몇 개를 훔쳐내려다가 추기경이 집에까지 쫓아올지도 모른다는 노파심에 아쉽게 포기했다.

선거를 며칠 남긴 날 K담임은 새벽 학교 운동장을 산책하다가 건물 뒤편에서 야구 모자를 쓰고 죽어있는 젊은 남자를 발견했다. 옥상에서 추락해 죽은 것 같았다. K담임은 남자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다가 용식을 부르지도 않고 혼자서 시체를 소각장으로 옮겼다. 그리고 교실들을 돌아다니면서 쓰레기를 모아 불태웠다. 오랫동안 연기가 하늘을 어지럽혔다. 그날 그는 출석을 부르면서 교장의 집에서 한동안 살았다는 소문이 돌았던 여학생이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방학식 날씨는 축축하고 회색이었다. 추기경은 평소보다 일찍 나와 학교를 거닐었다. 며칠동안 학교를 뒤덮었던 포스터와 뱃지 나부랭이들은 싹 사라지고 없었다. 특수 근무가 끝난 모양이었다. 깔끔해진 학교를 보고 추기경은 만족했다. 오후가 되면 다시 지저분해지겠지만, 그러면 애들을 불러 먼지 한 톨도 남지 않도록 빠짐없이 문지르고 닦게 할 생각이었다.

교무 회의도 추기경의 주재 하에 짧게 끝났다. 결재서류가 추기경의 책상으로 모두 옮겨졌다. K담임은 자리에 없었다. 추기경은 K담임을 찾아 학교를 돌아다녔지만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추기경은 포기하지 않고 학기 마지막 수업이 진행되고 있는 교실과 수돗가, 운동장과 매점, 심지어는 닭장과 오리장까지 뒤졌다. 먼지가 나도록 학교를 뒤집어 털 각오를 한 순간, 추기경은 목공실에서 의자를 들고 나오는 K담임을 발견했다.

추기경을 본 K담임은 활짝 웃었다.

보시겠습니까? 제가 만든 첫 번째 의자입니다. 밤새 만들었지요.”

회의에는 왜 안 나오셨습니까?”

, 알고 있었는데, 굳이 제가 필요할 것 같진 않아서요. 그보다 이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거든요.”

추기경은 K담임이 만든 의자를 집어들고 살펴보았다. 등받이와 엉덩이가 닿는 판, 네 다리와 이음새와 마무리까지 꼼꼼하게 뜯어보았다. 어디를 보나 용식이 만들어내는 의자와 빼닮아 있었다. 추기경은 샅샅이 훝어본 다음, 그대로 의자를 목공실 벽에다 내리쳐 박살을 냈다.

다시 한 번 만드세요.”

그 말은 한참 세월이 지나, 추기경이 K담임이 만든 의자를 부수지 않고 제자리에 내려놓을 때까지 의자에 대하여 건넨 유일한 말이었다. K담임은 부서진 잔해를 주섬주섬 주워 모아 들고 목공실로 들어갔다.

경화도 그날 일찍 일어났다. 정확히 말하자면 깨었다. 눈을 뜨고 우울한 습기를 느끼자 경화는 기분이 좋아졌는데, 왜냐하면 그녀는 그날처럼 빗방울을 잔뜩 입속에 머금은 채 우물거리기는 날씨를 좋아했기 때문이었다. 경화는 승표의 연락이 올 때까지 침대에 몸을 비비대며 뒹굴거렸다.

학교를 돌아다니며 행사 준비를 하던 추기경은 K담임도 경화도 보이지 않자 울화통을 터뜨렸다. K담임은 행사에 나가지 않으려고 용식이 떠난 목공실 문짝을 끌어안고 버텼지만, 추기경이 목공실에까지 불을 싸질러버리겠다고 협박을 해대자 만들던 의자들을 싸안고 교무실로 가야 했다. 비슷한 시간에 어슬렁대며 나타난 경화는 추기경의 표정을 보자마자 사태를 파악하고 일할 준비에 나섰다.

원래 중간고사가 끝나고 치르기로 한 선거를 방학식날로 미루기로 한 결정에 가장 기뻐한 사람은 교장도 교감도 아닌 바로 근복이었다. 선거 기간 내내 승표 엄마가 온갖 잡다한 물건을 뿌리고 다니며 학교를 들었다 놓는 바람에 덩달아 매점 장사도 호황을 누렸던 것이었다. 근복은 너무나 좋아서, 이왕이면 선거 운동 기간이 학기 내내 아니 1년 내내 계속되기를 바랬다. 근복은 선거운동을 1년 내내 할 수 있도록 부탁하기 위해 교장을 찾았지만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교감도 찾을 수 없기에는 마찬가지였다. 방학식날이 다가올수록 조바심이 난 근복은 아예 밤마다 교장의 집 앞에 두꺼운 잠바를 뒤집어쓰고 기다렸다. 그러던 중 근복의 앞에 한 소녀가 다가와 섰다. 그때 근복은 만약 방학때 선거운동을 할 수 없다면 적어도 밤에도 수업을 해서 학생들이 모두 학교에 머물러 있는 동안 선거운동을 할 수 있도록 부탁을 해보는 게 어떨까 하고 생각하고 있었다.

여기서 뭐해?”

소녀가 물었다. 근복은 올려다보았다. 키가 크고 머리를 졸라맨 소녀였다. 하얀 얼굴에 눈썹에는 면도한 칼자국이 나 있었다.

교장을 만나려고. 너는?”

알 거 없잖아. 넌 매점에 있는 애 아니야?”

매점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어.”

그게 뭔데?”

알 거 없잖아.”

대화가 끊어졌다. 두 사람은 한동안 침묵을 지켰다.

소녀가 말했다.

여기서 아무리 기다려도 교장은 안 올거야.”

그래? 그럼 너는 여기 왜 왔는데?”

찾아볼 사람이 있어. 너 이 사람 혹시 본 적 있니?”

소녀는 근복에게 사진 한 장을 내밀었다. 디지털 카메라로 찍은 사진을 프린터로 인쇄한 것이었는데 질이 조야해서 윤곽만 겨우 구별할 정도였다. 근복은 자세히 보기 귀찮아서 고개를 저었다. 소녀는 사진을 집어넣었다.

근복이 물었다.

그 사람 찾으면 사례할거야?”

.”

다시 줘 봐.”

소녀는 다시 사진을 꺼내 근복에게 건넸다. 근복은 인상을 쓰면서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남자였다. 야구모자에 얼굴이 반쯤 가려져 있었다. 뚫어지게 쳐다보았지만 누군지 알 수 없었다. 그래도 근복은 사진을 쥐고 놓지 않았다.

못 알아보면 이리 줘.”

알아볼 수 있을거야.”

소녀가 사진 귀퉁이를 잡았지만 근복은 놓지 않았다. 소녀가 힘을 주자 근복도 양손으로 사진을 꼭 잡았다. 사진이 찢어질까봐 겁이 난 소녀가 손을 놓자 근복은 잽싸게 사진을 안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소녀가 말했다.

내 놔.”

교장이 어디 있는지 가르쳐주면 줄게.”

교장은 죽었어. 저기에서 떨어졌어.”

네가 찾는 사람은 누구야?”

이리 내 놔.”

소녀는 어디서 가져왔는지 야구배트를 들고 근복의 머리통을 노렸다. 근복은 일어서서 도망쳤다. 배트가 빙글빙글 돌며 날아와서 근복의 머리를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땅에 푹 박혔다. 근복은 배트를 제끼고 죽을 힘을 다해 뛰었다. 그 와중에서 근복의 머릿속에는 야구모자를 쓴 남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놈이다. 그놈인 모양이다. 누군지 알 것 같다. 그런데 찾으면 어디서 사례를 받지? 이렇게 생각한 순간 야구배트가 부메랑처럼 빙글빙글 돌면서 이번에는 땅이 아니라 뒤통수에 정확히 꽂혔다. !

 

운동장에 전교생이 거의 다 모였다. 바람이 차갑고 조용하게 학교를 쓸었다. 추기경은 구령대 위 의자에 앉아 있었고, 담배 선생은 예의 한 대 피우면서 운동장을 어슬렁거렸다. 아이들은 제각기 발장난을 하거나 귓속말을 하며 운동장에 서서 기다렸다. 축구부원들도 달리기를 멈추고 운동장 뒤편 땅바닥에 가지런히 앉아 있었다. 움직이는 사람은 K담임과 경화뿐이었다. 경화는 학생들이 도열한 틈새를 뚫고 다니면서 투표 용지를 나눠주었다. K담임이 제일 바빴다. 아이들을 불러내어 줄을 세우는 것은 물론 마이크를 설치하고 선생들이 걸터앉을 의자를 까는 일까지 모두 K담임의 몫이었다. 예전 같으면 모두 소사 역할을 하는 용식이 할 일이었다. 그러나 용식은 그날 잡일을 하지 않았다. 대신 추기경 옆에 앉아서 준비가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K담임이 마이크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자 학교 전체에 음향이 퍼졌다. 용식이 앞으로 나와 마이크 앞에 서서 바짓주머니에서 구겨진 종이를 끄집어내었다. 종이는 그동안 더 낡아서 흐물거렸다. 용식은 그래도 1분간에 걸쳐 엉덩이를 이리저리 비틀면서 연설문을 바지에서 분리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땅속에서 막 파낸 귀한 뼛조각이라도 다루듯 손가락 끝으로 조심스럽게 펼쳤다.

경화는 투표함 위치를 옮기는 척하면서 연설문에 뭐라고 적혀 있나 훔쳐보았다.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은 것 같았다. 조금 가까이 보려고 슬금슬금 다가가는데 갑자기 담배 냄새 나는 커다란 손이 경화의 뒷덜미를 잡아챘다. 소리지를 새도 없이 경화는 전교생 앞에서 구령대 뒤로 질질 끌려가서 그대로 체육 기구를 쌓아놓는 창고에 내던져졌다. 등뒤에서 문이 요란하게 닫히자 전동이 달랑달랑 흔들리면서 내부를 비췄다. 매캐한 흙먼지가 코와 눈을 동시에 자극했다.

경화는 몸부림을 쳤다.

왜 이래요? 이거 놔요.”

학생회장을 옥상에서 떨어뜨려 죽인 게 너냐?”

담배 선생이 말했다.

뭐라구요?”

네가 옥상에서 떨어뜨려 죽인 게 학생회장이냐는 말이다.”

무슨 소리예요? 전화 받는 남자 말이에요?”

그래. 김윤수 말이다.”

경화는 다시 한 번 도망치려고 애썼지만 담배 연기에 눈이 매워 움직일 수가 없었다.

네가 죽인 게 맞지?”

무슨 소리예요. 난 그 사람 등에 손도 안 댔다구요.”

그럼 매점 주인을 죽였구나.”

뭐라구요? 걔는 왜 또 죽었대요?”

경화는 담배 선생이 뒷덜미를 놓아주고 나서야 매트 위에 놓인 물체가 무엇인지 판별할 수 있었다. 시커먼 사람 모양의 물체였다. 담배 선생이 말했다.

소각장에서 찾아낸 거다.”

경화는 목 뒤가 차가워지면서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소각장이요?”

오늘 새벽에.”

난 안 죽였어요.”

경화는 부정했다.

그럼 네가 죽인 게 교장이냐?”

교장이라구요! 교장도 죽은 건가요?”

담배 선생은 경화를 떠밀고 근복과 윤수가 놓인 매트 뒤쪽에 놓인 뜀틀로 다가갔다. 뜀틀에도 두 사람이 엎어져 있었다. 늙은 사내와 열 살 정도 되보이는 여자애였다. 몸 위에 하얀 가루 같은 것이 뿌려져 있었는데 거기서 강한 약품 냄새가 났다. 경화는 손으로 입과 코를 막았다.

전화 받는 남자가 교장을 죽였나요?”

네가 죽인 게 아니라면 그놈이겠지.”

난 아무도 안 죽였다니까요!”

매점 주인도 네가 죽인 게 아냐?”

근복이야 죽이고 싶은 적은 있었죠! 그런데 이 학교에서 걔 안 죽이고 싶은 사람이 있나요? 선생님도 근복이 때린 적 있잖아요! 전교생 다 모여 있으니까 아무나 잡고 물어보세요. 걔 죽이고 싶은적이 있나 없나.”

담배 선생은 근복의 시체로 다가가서 머리를 잡고 뒤통수가 보이게 돌렸다. 딱딱하고 기다란 것에 맞아 터진 자국이 남아 있었다. 전등이 흔들리면서 죽음을 일으킨 흔적을 비췄다. 경화는 눈을 떨면서 고개를 돌렸지만 근복의 터져나간 머리 대신 그을린 윤수의 시체가 눈에 들어왔다. 시선을 아무리 돌려도 시체가 아닌 것을 볼 수 없었다. 경화는 눈을 꽉 감았지만 시체가 흘리는 기운을 피할 수는 없었다. 머리가 터진 채 누워있는 근복, 어떻게 죽었는지는 몰라도 소각장에서 시커멓게 그을린 채 누워있는 학생회장. 그리고 학생회장이 쫓아다니며 죽이려 했던 교장과 여자아이. 그들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니었다. 너덜거리는 인간의 잔해와 부조리함의 실체물이 부패와 약품과 공포의 냄새를 풍기며 누워 있었다.

여기서 네 손이 가지 않은 사람이 없어? 정말로 없어?”

경화는 감았던 눈을 뜨고는 경악했다. 담배 선생의 큼지막하고 마디 굵은 손이 그녀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이건 죽은 사람보다 더 무섭잖아. 경화는 다시 눈을 꽉 감고 하나, 둘까지 센 다음 셋! 하면서 오른손을 휘둘렀다. 날아간 손은 정확하게 담배 선생 코에 명중했다. 경화는 눈을 뜨고 담배 선생의 코가 부러져서 피가 나는 것을 확인한 다음 망설이지 않고 창고 문을 박차고 튀어나와 바깥에서 잠가버렸다. (그 뒤로 방학이 계속되는 두 달 동안 아무도 학교에 오지 않았다.)

연설이 다 끝났는지 운동장이 텅 비어 있었다. 무릎을 짚고 잠시 숨을 고르려니까 K담임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다가왔다.

어디 있었니? 한참 찾았단다.”

연설 다 끝났어요?”

그럼.”

K담임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훌륭한 연설이었단다. 못 들었니? 다들 박수까지 쳤어.”

그래요?”

경화는 허리를 천천히 펴고 일어섰다. 구령대 위의 의자도 마이크도 치워지고 없었다. 운동장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남기고 간 발자국들만 어지럽게 남아 있었다.

연설한 사람은 어디 갔어요?”

학교 안으로 들어가려던 K담임이 떨어진 투표 용지를 주우려고 허리를 굽히면서 대답했다.

졸업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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