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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 학교의 살인자(16)

2014.06.28 14:3106.28

16

 

교장은 눈을 떴다.

눈을 뜨자 회색을 띤 창백한 색깔이 제일 먼저 보였다. 교장은 눈꺼풀을 깜박거리면서 시선을 회색 색깔에 고정시켰다. 눈에 보이는 건 온통 회색이었다. 거대한 회색 판에서 물방울이 떨어졌다. 도대체 뭘 보고 있는지 알아채기도 전에 신 맛이 나는 물방울들이 볼을 때리고 입술 사이로 스며들고, 이어서 눈동자를 아플 정도로 때렸다. 교장은 본능적으로 고개를 저어 물방울들의 공격을 피한 뒤에야 비로소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이 하늘이고, 얼굴 위에 떨어지는 물은 빗방울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하늘은 교장의 얼굴뿐만 아니라 온몸 전체에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교장의 몸 위로 계속 신 맛이 나는 물을 뿌리고 있었다. 교장은 잠시 눈을 감고 몸 위로 뿌려지는 차가운 물방울의 감촉을 즐겼다. 찔끔찔끔 떨어지지 말고 샤워처럼 한꺼번에 쏟아져 주면 훨씬 시원하고 기분이 좋을텐데. 샤워하는 듯한 느낌을 만끽하던 교장의 코에서 빗방울의 신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교장은 다시 불쾌해졌다.

일어나서 따뜻하게 몸을 말리고 싶었지만 일단 그대로 누워서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먼저 생각해야 될 것 같았다. 교장은 조심스럽게 두 활개를 쳐 보았다. 손 끝에 닿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지만 소매에 거칠거칠한 감촉이 들었다. 다리를 움직여도 마찬가지였다. 교장은 눈동자에 떨어지는 빗방울에도 불구하고 눈을 크게 떠서 하늘을 응시하고, 머리 위에 무언가 위험한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신했다. 그러고 나서도 교장은 몇 분 동안 마음을 더 다잡고 나서야 조심스럽게 일어나 앉을 수 있었다. 자신있고 편안하고 똑바른 자세로 앉은 건 아니지만 어쨌든 일어나 앉은 건 사실이었다.

일어나 앉자 맨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빛이 나는 금속으로 만들어진 알루미늄 환기통 같은 것이었다. 그것은 가만히 있는 게 아니라 식당 선풍기처럼 양쪽으로 고개를 계속 돌리며 후텁지근한 바람을 내보내고 있었다. 교장은 눈썹에 힘을 주며 그 물체를 바라보다가, 눈동자를 돌려도 안전하다는 사실을 확인한 다음, 비로소 고개를 돌려 보았다.

고개를 돌리자 하늘이 보였다. 회색을 띤, 하얀 빛깔의 하늘이었다.

빗방울도 함께 뿌리고 있었다.

시선을 다시 앞으로 돌리자 알루미늄 환기통이 들어왔다.

자세히 보자 알루미늄 환기통이 흰색 콘크리트에 얹혀 있는 것도 보였다.

고개를 숙이자 시멘트 바닥이 보였다. 빗방울에 젖어 어두운 색깔이 되어 있었다.

다시 고개를 들자 하늘이 보였다. 여전히 빗방울을 뿌리는 하얀 하늘이었다.

교장은 이제까지 얻은 시각적 정보를 취합한 결과 자신은 아파트 옥상에 누워 있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천천히 네 활개를 쳐 보았다. 비 오는 날 길강아지처럼 흠뻑 젖어 있기는 하지만 특별히 다친 곳은 없었다.

그렇다면 아파트 옥상에 올라오기 전에 어디에 있었는지 생각해 내야 했다. 그러나 생각이...나지 않았다. 전날 밤에 일어난 일을 기억하기에는 너무 춥고 배고팠고, 빗방울에 얻어맞은 눈알이 알알하게 아팠다.

교장은 자신이 어떻게 해서 비 오는 날 아파트 옥상에 내팽개쳐 있는지 생각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그의 다리는 먼저 무언가 따뜻하고 부드러운 것을 찾는 목적에 더 매력을 느끼는 것 같았다. 일단 교장은 일어섰다. 탐험 정신을 위해서든 귀소 본능이든 일어설 수 있다는 사실이 다행이었다. 밤새 얼어 있던 무릎과 발목에서 끼익 소리가 났다. 교장은 무릎을 후덜덜덜 떨면서 계단을 내려갔다. 내려가면서 몸이 점점 얼고 귀와 손가락에 느낌이 없어졌다.

주머니속엔 아무것도 없었지만 다행히 집 현관문이 열려 있었다. 모두들 출근하면서 잠그는 걸 깜박 잊어버린 모양이었다. 교장은 현관문을 열기 전에 잠시 여기가 과연 내가 살던 집인가 의구심이 들었다. 기역자 문고리 앞에서 잠시 고민하던 교장은 결단을 내렸고, 손잡이를 돌렸다. 손잡이는 참기름 친 면발이 목구멍을 넘어가듯 돌아갔다.

그러나 집안 풍경은 익숙하지 않았다.

베란다 바닥은 붉은빛이 나는 나무로 바뀌어 있었고, 천정에는 붉은색 크리스털이 매달린 샹들리에가 달려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소파도 다른 것이었다. 갈색 가죽 소파 대신 베이지색 면 커버를 씌운 네모난 소파가 놓여 있었다. 식탁도 자리는 같았지만 원래 사용하던 직사각형 모양에 수저 넣는 서랍이 달린 식탁 대신 포도나무 조각을 한 흑단 식탁이 놓여 있었다.

교장은 언제 내 허락도 없이 가구를 바꾸었지 싶어져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나중에 따져묻기로 하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변기에도 새 빨간 커버가 씌워져 있었지만 교장은 알아채지 못했다. 일단 씻는 게 우선이었다.

뜨거운 샤워물을 뒤집어쓰자 교장은 뒤바뀐 가구를 기꺼이 용서해주고 싶을 만큼 기분이 좋아졌다. 화장실을 나가기 전 입을 옷이 없어 잠시 멈칫거렸지만 집안에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상기하고 당당하게 알몸으로 나와 부엌에서 따뜻한 물을 마셨다. 올누드로 집안을 돌아다니자 이색적인 기분이 들면서 재미있어졌다. 갑자기 혼자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안방의 침대 커버도 바뀌어 있었지만 교장은 상관하지 않고 자개 장롱문을 열고 속옷을 꺼내 입었다. 옷이 어디에 들어 있는지 알 수 없어 한참을 뒤적거려야 했지만.

트렁크와 러닝 셔츠를 꿰입고 침대에 던져져 있던 새 실크 파자마를 걸치자 교장은 졸음이 왔다. 그는 침대 속으로 들어갔다. 누우면서 교장은 어젯밤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하려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기억 대신 수면이 교장의 뇌를 덮쳤다.

 

교장은 다시 눈을 떴다. 아니, 정확히는 눈꺼풀 근육을 움직였다.

위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아예 눈을 안 뜨시네.”

교장은 고개를 저었다. 아냐. 눈을 떴는데. 그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면서 다시 눈을 떴다. 평평하고 희끄무레한 것이 눈에 들어왔다. 낯익은 천정이었다. 그런데 천정에서 물방울들이 후두둑 떨어졌다. 천정이 아니라 하늘인가? 아까처럼 허연 하늘이 비를 뿌리는 건가? 교장의 얼굴 위로 계속 물방울들이 후두둑 떨어졌다.

다시 목소리가 들렸다.

눈을 안 뜨시네.”

낯선 목소리였다. 교장은 고개를 흔들어댔다. 차가운 물방울이 계속 얼굴을 적시고 있었다. 비가 계속 오고 있다...교장은 이렇게 중얼거리면서 눈을 뜨려 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양의 물이 폭포수처럼 교장의 얼굴 위로 쏟아져내렸다. 촤아악!

짜증스럽게 혀를 차는 소리가 곳곳에서 들려왔다.

교장은 눈을 떴다.

눈을 뜨자 다른 오감들이 제대로 작동하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작동한 감각은 촉각이었다. 촉각은 교장에게 지금 그가 침대 속이 아닌 딱딱한 마룻바닥에 누워 있으며 온몸이 차가운 물로 흠뻑 젖어 있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

두 번째는 시각이었다. 교장의 시각은 물을 퍼붓는 용도로 사용한 게 틀림없는 플라스틱 바구니를 들고 쭈그려 앉아 교장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는 만만찮은 덩치의 남자 두 명의 얼굴을 그의 뇌에 전달했다.

뒤늦게 도착한 청각은, 교장에게서 몇 미터 떨어진 곳에서 신경질적인 중년 여자 목소리를 전달했다. 누구지? 마누라는 아닌 것 같은데...

여자가 뭐라고 떠들고 있는지 알아듣기 전에 플라스틱 바구니를 든 남자가 교장을 툭툭 쳐서, 그를 비로소 의식의 세계로 끌어넣어 주었다.

아저씨, 일어나요. 남의 집에서 뭐 하고 있는 거예요? 신고 들어왔잖아요.”

 

경찰서로 오기 전에 교장은 입고 있던 실크 파자마를 벗어야만 했다. 경찰은 속옷 바람으로 교장을 끌고 가기 난처해했지만, 교장을 발견한 집주인 여자도 한 달 전 남편 생일선물로 준 파자마를 그대로 입혀 보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교장은 샤워하기 전에 벗어 놓았던 양복을 다시 입어야만 했다. 화장실 앞에 놓여 있던 젖은 양복에서는 마르다 만 곰팡이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그에게 물을 끼얹는 것으로 정상적인 세계로 돌아오는 길을 마련해 준 경찰과의 대화를 통해 교장은 자신이 잘못된 층에 내렸고, 우연히 열려 있던 현관문으로 들어간 것뿐이라는 결론을 얻게 되었다. 바뀐 것으로 착각한 가구는 2년 전부터 놓여 있었고, 교장이 착각한 이유는 밤새 바깥에서 별을 보느라 춥고 배고픈 나머지 뇌의 일부가 활동을 정지해버린 탓일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더구나 아파트란 물건이 죄다 구조가 똑같이 생겨먹은지라 교장 같은 노인네는 착각을 일으키기 딱 좋기 때문이다.

교장은 배고픔을 호소했다. 배고프다. 더구나 젖은 옷을 입고 있어서 춥다. 설렁탕 한 그릇만 시켜주면 은혜 잊지 않겠다다. 40대로 보이는 경찰은 식당 전화번호를 돌리면서 웃었다.

은혜 안 잊으면 뭐 어쩌시려구요?”

경찰서 문을 나서자 교장은 다시 걸어서 집을 찾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짜증 섞인 울화통이 치솟았다. 망할 경찰 새끼. 집에서 끌어냈으면 다시 집까지 데려다주어야지! 그러나 설렁탕을 시켜준 친절한 경찰은 단 3분간의 대화를 통해 교장의 주민번호와 집 주소와 전화번호는 물론 잃어버린 휴대폰 번호를 모두 알아냈기 때문에 굳이 그를 집까지 태워다 줄 이유가 없었다. 집 전화는 집에 아무도 없는지 받지 않았고 휴대폰은 꺼져 있었다. 사비로 설렁탕까지 시켜주었으면 민중의 지팡이 노릇은 훌륭히 완수한 게 아닌가.

교장은 집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10분이 지나자 비도 함께 내리기 시작했다. 자동차로 10분밖에 걸리지 않는 거리였지만 춥고 배고픈 늙은이에게는 한나절 거리였다. 비 때문에 일찍 땅거미가 지더니 이내 어두워졌다. 춥고 배고픈데다 눈도 침침해서 잘 보이지 않았다. 허위허위 걷던 교장은 너무 힘들어서 길 한켠에 세워진 우체통에 기대 주저앉았다. 눈앞에 돈까스 몇 조각이 날아다니다가 비가 내리는 하늘 위로 빙글빙글 돌면서 승천하듯이 사라졌다.

 

교장, 일어나 봐.”

어둠 속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교장은 반사적으로 머리를 흔들어 떨어지는 물방울을 피하려 했다. 물방울은 떨어지지 않는다. 대신 눈앞에 보이는 것도 없었다. 교장은 고개를 저어 보다가 눈에 천이 감겨져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뒤통수에 손을 가져가려고 했지만 손목이 테이프 같은 걸로 묶여 있었다. 교장은 볼을 스치는 시원하고 강한 바람과 신선한 공기를 느꼈다. 들이마시려고 심호흡을 하자 공기 대신 입 속에 천 뭉치 냄새가 잔뜩 들어왔다. 재갈이 물려 있었다.

부드러운 감촉을 가진 두 개의 손이 뒤통수로 오더니 눈을 가린 천을 풀어주었다. 천이 눈에서 떨어져나간 후에도 교장은 두려움에 눈을 꼭 감고 있었다.

몇 초가 지나도 위협적인 느낌은 없었다. 교장은 눈을 떴다.

석양이 지려는 듯 불그스레한 하늘을 배경으로 눈앞에는 검은 야구 모자를 쓴 남자가 의자 등받이를 껴안은 채 앉아 있었다. 검은 윗도리와 티셔츠에 하얀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야구 방망이라도 하나 들면 조승희처럼 보일 것 같았다. 남자가 빙긋이 웃자, 손에 들린 휴대폰이 답을 하듯 파랗게 빛났다.

남자는 윗도리의 안주머니에 두 번 접은 A4 종이를 꺼냈다. 말이 접은 것이지 구겨지고 옷감에 비벼져 거무스레하게 물이 들어 있었다. 종이를 펼치자 가장자리가 조금 찢어졌다. 남자는 졸업 답사라도 하듯 양손에 종이를 진지하게 쥐고 교장을 보았다. 교장은 머리를 끄덕였다. 그러나 남자는 어린애가 마음에 들지 않는 그림을 구기듯 양손 사이에 종이를 구겨넣은 다음 주머니 속에 집어넣어 버렸다.

교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는 교장을 바라보았다. 교장은 다시 고개를 마구 끄덕여 보였다. 뭐라고 적혀 있는지 내용이 궁금했다. 남자는 교장을 보더니 주머니에 쑤셔넣은 종이를 천천히 꺼내 펼쳤다.

 

안녕. 교장.

내가 어떻게 돌아올 수 있었는지 궁금하지? 당신이 생각하는대로 원장에게 몸을 팔았으면 좋았겠지만 그건 불가능했어. 원장은 통통한 엉덩이를 좋아했는데 병원 밥이 너무 적었거든. 병원을 나오고나서 한참 후에 알게 됐지. 병원 밥이 그렇게 형편없는 이유는 다 환자 아이들을 원장에게 보호하기 위해서란 걸…….

난 돌아올 준비를 했어. 언제부터냐고? 어느 날,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가던 날 추기경이 병원으로 날 찾아왔거든. 선거가 있을 거라고. 후보를 지지해줄 연설자도 찾고 있다고. 추기경이 의미하는 건 그거였지. 내가 병원에서 탈출하면, 당신은 학교에서 도망칠 거고, 그러면 선거를 무사히 할 수 있을 거라는 걸……. 그날부터 난 약을 열심히 먹기 시작했어. 약을 제대로 안 먹었다면, 내 돈까스를 뺏어가는 그 놈 머리통에 식판을 꽂을 수 없었을 거야. 사람이 어떻게 맨정신으로 그런 짓을 해? 안 그래? 당신이 나한테 한 거 말이야. 제정신이 몸에서 도망칠 정도로 때리는 거 말이야.

 

교장이 머리를 앞뒤로 흔들면서 끙끙거렸다. 남자는 읽다 말고 교장을 쳐다보았다. 교장은 남자와 눈을 맞추면서 신음소리를 내며 미친 듯이 몸을 흔들었다. 남자는 잠시 망설이다가 주머니에서 면장갑 한 켤레를 꺼내 손에 끼었다. 그리고 교장에게 다가가 살며시 재갈을 잡고 단숨에 턱 아래로 잡아당겼다. 교장은 토하는 듯한 소리를 냈다. 재갈을 너무 심하게 잡아빼서 아랫이빨이 다 빠지는 것처럼 아팠다.

뭐야? 이게!”

미안, 빼다가 손가락 물릴까봐 그랬어.”

개 같은 놈.”

교장은 욕을 하고 이를 갈면서 침을 뱉었다.

다시 한 번 말해봐. 추기경놈이 뭐랬다고? 그게 언제야?”

남자는 종이를 교장 눈앞에 내밀었다. 교장은 눈알을 움직이며 추기경이 나온 부분을 읽었다. 교장이 머리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추기경놈이 다 짠거구나. 이번에 선거에 나온, 그 골빈 놈이랑, 너랑.”

으응, . 추기경이 짰다고 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

남자는 읽기 시작했다.

 

당신은 기억나? 나를 때렸을 때. 원래 때린 사람은 별로 기억을 못 하지. 아님 거짓말하거나. 세게 때린 적 없다거나, 때린 적 없다고. 아님 맞을 만 했다고. 당신은 어느 쪽이야?

누군가에게 맞았다고 하면 대개 경찰에 신고하지. 그럼 경찰이 처리해줄거라고 다들 생각하잖아. 그런데 꼭 그래야 되는 건 아니잖아. 그냥, 내가, 맞은 사람이, 직접 처리해도 괜찮잖아. 그럼 굳이 경찰을 안 불러도 되잖아.

추기경은 나한테 기회를 준 거고, 그래서 난 내가 꼭 하고 싶었어. 내가. 꼭 교장을 죽이고 싶었어. 테러는 노예의 마지막 자유니까.

 

다 읽은 남자는 종이를 교장의 양복 앞주머니에 쑤셔넣었다. 교장은 고개를 좌우로 마구 흔들었다. 그러나 남자는 교장을 보지 않았다. 교장을 보는 대신 옥상 난간에 몸을 기대고 아래를 내려다보면서 가스 파이프를 타고 내려가는 시간을 계산하고 있었다.

배고픈 나머지 교장은 헉헉 숨을 몰아쉬기 시작했다. 그의 얼굴에 추위와 배고픔이 새겨져 있었다. 의자에 테이프로 묶인 손은 피가 통하지 않아 하얗게 부어 있었다. 몸 주변의 공기가 교장의 몸에서 온기를 빨아먹는 것 같았다. 교장은 부들부들 떨다가 배고픈 나머지 떨 힘도 빠져나가는 걸 느꼈다. 숨이 차서 심호흡이라도 하려고 했지만 너무 배가 고파서 위장이 뒤집어지는 것 같았다.

남자는 교장이 묶인 의자 등받이 부분을 잡고 질질 끌고 가기 시작했다. 거친 시멘트 바닥에 의자 다리가 끌렸다. 남자의 검은 등 뒤로 석양이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타는 듯한 불빛이 교장의 귀에 의자 다리가 갈려나가는 거친 소음으로 들려왔다. 교장이 자신이 돌고 돌아 다시 아파트 옥상으로 돌아왔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남자는 의자와 교장을 한데 묶은 덩어리를 빗물이 배인 땅 위로 밀어 던졌다. 교장과 의자가 한데 엉켜 빙글빙글 돌며 석양으로부터 점점 멀어졌다. 남자는 교장이 떨어지는 모습을 확인한 다음 옥상 반대편으로 전속력으로 달려가 가스 파이프에 바로 달라붙었다. 퍽 하는 소리가 날 때 이미 남자는 절반쯤 내려가 있었고,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할 때 남자는 이미 차에 올라타 시동을 건 상태였다.

떨어진 교장 주변에 경찰이 모여들었고, 그중 한 순경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남의 집에서 설렁탕 먹었던 할아버지 아냐!”

교장이 들었다면 억울했을 것이다. 난 설렁탕을 먹은 건 경찰서에서였고, 남의 집에서는 샤워하고 잠만 잤다구.

한 경비는 혀를 찼다.

이 할아버지, 베란다에서 자기 손녀 떨어뜨려 죽이고 도망쳐 다니던 그 할아버지 아냐.”

교장이 들었다면 죽을 정도로 억울했을 것이다. 난 도망치던 게 아니라 납치당한 거였다구. 그리고 그 애는 손녀가 아니라 내 딸이란 말이다. 내 딸.

아파트 옥상에서 떨어진 교장의 안주머니에서 남자가 읽은 글이 나오자 경화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왜냐하면 그 글은 경화가 썼기 때문이었다. 어느 날 오후 수업시간, 너무 졸려서 책상에 머리를 부딪치다가 구멍을 낼 지경이었던 경화는 몰래 목공실로 도망쳤다. 목공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용식이 담배 심부름을 갔기 때문이었다. 책상에 엎드려 졸던 경화는 전화 받는 남자를 떠올리고는, 재미삼아 교장에게 가짜 협박 편지를 보낼 생각을 했다. 그리고 노트를 꺼내 그 글을 되는대로 써갈겼다. 써놓고 보니 사실 너무 유치해서 전화 받는 남자가 거들떠보지도 않을 것 같았다. 경화는 노트를 던져놓고 잠이 들었다가 한밤중이 되서야 눈을 떴다. 혼비백산한 경화가 노트를 깜박 빼놓고 집에 간 그 날이 바로 윤수가 담배 선생의 저금통에서 자장면을 사 먹고 화학책을 보다가 쫓겨나서 학교에 들렀다가 교장의 얼굴을 보고 기절한 다음 용식의 간호를 받으며 목공실에서 잠들면서 교장 암살을 다짐한 날이었다. 결과적으로 경화가 쓴 글이 윤수의 살의에 불꽃을 던진 셈이었다. 경화는 자신이 쓴 글이 뉴스에 나길 기다렸지만 아무것도 나지 않았다. 대신 손녀를 밀어 떨어뜨려 죽인 교장이 쫓기던 끝에 자살했다는 기사만 조그맣게 났다. 경화는 날짜를 계산해본 다음 교장 암살에 자신이 몇 퍼센트나 기여했는지 알고 싶었지만 산출 공식을 알 수 없었다.

교장은 죽었다. 그러나 학교가 변한 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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