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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 학교의 살인자(12)

2014.06.28 14:2806.28

12

매일 수업이 끝나면 경화는 승표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목공실로 갔다. 목공실에는 용식이 의자를 만들고 있거나, 책상을 만들거나 아니면 직접 만든 책상과 의자에 앉아 있었다. 책상에 찬조 연설문이 적힌 종이가 펼쳐져 있었지만 단 한 줄도 추가되지 않았다. 경화가 연설문 종이를 들춰볼 때마다 용식은 아무것도 추가될 필요가 없다고 설명했다. 누군가 승표의 당선을 바라고 있다는 점, 그것을 위해 쪽팔림을 무릅쓰고 전교생 앞에 설 용기를 낸 사람이 있다는 점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것이었다. 경화는 용식의 뜻을 이해한 증거로 승표가 산 간식을 내놓았다. 용식은 맛있게 먹었다.

경화는 두 사람에게 전대 학생회장이자 전화 받는 남자이면서 교장 암살자인 윤수 이야기를 꺼냈다.

뭐하러 교장을 죽이려고 하는데?”

이유는 나도 모르지만, 교장한테 좀 나쁜 짓을 당했나봐. 수시로 찾아가서 밥 얻어먹고 용돈 뜯어내고, 지난번엔 중고차 살 돈까지 받아냈다고 하니까.”

승표가 물었다.

몇 살인데?”

한 스물 하나쯤 됐나? 근데 고생을 많이 해서 삭았어.”

경화가 대답했다. 용식이 물었다.

우리 학교 학생이에요?”

아니, 지금은 학교는 안 다녀. 하지만 다녔었던 것 같아. 학교 건물이 어떻게 생겼는지, 교무실이나 교장실이 몇 층에 있는지 다 알거든. 목공실도 알고.”

졸업생인가?”

경화는 고개를 저었다.

졸업앨범에는 없었어.”

저기, 난 돈이 없어서 졸업 사진을 못 찍었어요.”

용식이 말했다.

단체사진에도 없었어. 그리고 졸업사진은 돈이 없어도 찍을 수 있어. 앨범만 못 사는 거지.”

용식이 형, 몇 살이죠?”

? 스물하나.”

경화가 물었다.

그럼 아는 사람일수도 있겠네. 동기잖아. 혹시 생각 안나? 김윤수라고 학생회장.”

잘 모르겠어요. 혹시 그 사람 제 커텐 훔쳐간 사람인가요?”

그건 몰라. 어쨌든 그땐 다들 누군가한테 돈을 주고서라도 교장을 몽둥이로 두들겨 패주고 싶어했다고 들었어.”

그 사람, 교장한테 뭘 받았다면서?”

승표가 말하자 경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 진짠지는 모르겠지만 돈이나 차를 좀 받은 것 같아. 아마 협박해서 뜯어냈겠지.”

학생회장이었을까? 학생회장이니까 주는 거 아닐까?”

전대 학생회장이었겠죠. 지금은 학생회장이 없잖아요.”

그럼 전대 학생회장이니까 주는 건가.”

경화는 화를 눌렀다.

그게 아니라, 그 사람이 학교에 다닐 때 뭔가 교장에게 나쁜 일을 당한 게 틀림없어.”

학생회장이 되면 교장한테 나쁜 일을 당하게 되는 거야?”

승표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경화가 용식에게 고개를 돌렸다.

당신은 기억나는 거 없어? 3년 전부터 학교에 있었잖아. 그땐 학생회가 있었다던데. 무슨 일 없었어?”

난 계속 여기 있었어요. 여기서 의자랑 책상을 만들고, 세계사 선생님 수업에 들어갔죠.”

용식이 대답했다. 경화는 추궁을 관두었다. 승표가 말했다.

추기경은 뭔가 알고 있을지도 몰라.”

그래?”

추기경은 이 학교에 제일 오래 있었거든.”

아니예요.”

용식이 부정했다.

지금 우리 학교에 제일 오래 있었던 사람은 담배 선생이라구요.”

그 골초?”

. 여러 번 담배 심부름을 갔었거든요.”

경화는 교무실 곳곳에 놓여 있는 침과 재로 얼룩진 재떨이를 떠올렸다.

뭐야. 이상한 인간이네. 미성년자한테 담배 심부름이나 시키고.”

그게 아니라, 난 아직 미성년자이기 때문에 담배를 살 수 없다는 걸 잊어먹지 않게 해주려고 심부름을 보내는 거래요.”

너 스무 살 넘었잖아?”

경화가 반문했다.

. 하지만 고등학교 졸업하기 전까지는 미성년자래요. 진짜 어른이 되려면, 이번에 연설을 하고 멋지게 졸업하는 거죠. 그러면 담배도 살 수 있다구요.”

형 담배 피워요?”

승표가 다시 눈을 휘둥그레 떴다. 용식이 미소를 띠며 말했다.

아니. 하지만 돈 주고 직접 사 보고 싶어요.”

세 사람은 조용하고 볕이 잘 드는 목공실에서 공부를 했다. 경화는 내일 있을 세계사 시험 준비를 했고, 용식은 미리 만들어 둔 연설 연단에 서서 단 한 마디도 존재하지 않는 찬조 연설을 연습했다. 승표는 경화와 용식의 자리를 오가면서 세계사 책을 들여다보았다가, 다시 텅 비어 있는 용식의 연설 용지를 들여다보았다. 경화는 되도록 교과서와 참고서에만 코를 박고 세계사 답안 준비에만 몰두하려고 애썼다. 문제는 어려울 것 같다는 게 중론이었다. 근대 유럽이 형성된 배경과 원인, 결과에 대해 순차적이고 논리적이면서도 전체적인 그림을 그려내야만 적절한 점수를 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요즘처럼 내신에 금쪽 같은 시간과 체력을 올인해야 하는 마당에 이따위 주관식 시험이 떨어지다니, 맷돌이 머리를 짓누르는 것 같았다.

승표는 아무 걱정이 없어 보였다. 그는 점수를 잘 받기보다는 버라이어티한 학교 생활의 경력을 만들어 하버드에 무사 입학하는 것만이 목표로 보였다. 멍청한 건 사실이지만 승표는 영어만큼은 꽤 잘했고 (본인 말에 따르면)미국에서 공부하는 데 아무 지장이 없다고 했다. (도대체 무슨 공부를 하러 가는지 모르겠지만)경화는 승표가 부디 아이비 리그에 들어가서 거기에서 절대 나오지 않기를 빌었다. 담쟁이 덩굴로 뒤덮인 오래된 도서관이나 튀긴 햄버거 조각이 나오는 학생 식당에 되도록이면, 자신이 얼마나 세상에 쓸모가 없는지 깨닫는 날까지 한국에는 영원히 돌아오지 않길 빌었다. 경화가 보기에 승표는 그냥 쓰레기였다. 좋은 재료와 기술로 깨끗하게 잘 만들었지만 아무런 쓸모가 없어 책상 위에서 이리저리 밀려다니다가 결국 쓰레기통, 혹 운이 좋으면 타인의 손에 선물 따위로 건네져 다시 이리저리 밀려다니게 되는 물건. 그런 물건은 박물관에 들어가면 딱 알맞았다. 생존을 위한 혈투가 벌어지는 한국에 승표는 어울리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빨리 뛰기 위해 무게가 많이 나가는 것들, 가령 품위같은 것. 그런 장소에는 어울리지 않았다.

해가 졌고, 용식은 스탠드를 몇 개 더 가져와 켰다. 승표는 다른 책상에 앉아 연설 문구를 연구하고 있었다. 경화는 책갈피 속으로 코를 박다 못해 그 사이로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 되었지만 애써 절망을 억누르고 노트를 폈다. 모범답안을 써야 할 시간이 됐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하기 위해 예상되는 문제를 굵은 글씨로 적어 넣었다.

 

근대 유럽이 태동하고 발전하여 현재에 이르는 20세기를 낳기까지의 배경과 정치 경제 사회적인 원인과 변화 과정, 그 결과에 대해 서술하시오.’

 

머릿속에는 교과서의 문장들, 참고서와 문제집에 나왔던 요점들과 따로 읽은 자료 그리고 (, 그런 게 있다면)그녀 스스로의 생각들이 세탁기 속 빨래처럼 꼬여 있었다. 한 글자도 써지지 않았다. 평소 같으면 노트를 덮어버리고 다른 공부를 했겠지만, 펜을 쥔 손은 흰 종이 위에서 떨리는 채 움직이지 않았다. 몇 번 심호흡을 하고 손목을 털어 긴장을 푼 다음에야 답안을 쓸 수 있었다.

 

중세 유럽이 근대로 발전할 수 있었던 원인 중 하나는 부르주아 계급의 경제적 성공이었다. 부르주아의 경제적 성공은 정치적 발언 기회를 확보할 수 있는 발판을 만들었다. 그리고...’

 

일단 달리기 시작한 손은 알아서 빈 노트를 채워갔고, 경화는 잠시 절망을 잊었다. 그러나 답안을 다 쓰고 나서 마침표까지 찍고 나자 어깨부터 피로가 몰려왔다.

경화는 슬며시 책상 위에 엎드렸던 몸을 일으켜 옆자리를 훔쳐보았다. 용식은 의자라도 만드는 모양인지 모습은 보이지 않은 채 드릴 소리만 간간이 들렸고, 승표는 책상에 엎드려 자고 있었다. 얼굴 밑에는 선거 유세 연설문을 적은 종이가 깔려 있었다. 경화는 고개를 숙여 자신이 쓴 답안을 다시 처음부터 끝까지 읽었다.

‘...그러므로 근대 유럽은 전세계를 지배할 수 있는 군사력과 경제력, 지성적 능력을 갖추게 되었다마침표.

 

이 정도면 꽤 괜찮은 답안 같았다. 경화의 짧은 생각에는 감히 추기경이라 할지라도 아이들로 하여금 20세기에 대해 쓰라고 시킬 것 같진 않았다. 만약 그런 걸 시킨다면 교장에게 투서라도 쓸 생각이었다.

승표는 여전히 퍼져 자고 있었다. 의자 더미 뒤로는 합판 목재와 니스 냄새가 났다. 용식이 학생용 의자 하나를 들고 나와 경화 옆에 턱 내려놓았다.

새 의자에요. 앉아봐도 괜찮아요.”

경화는 고개를 저었다. 니스가 다 말랐을 것 같지 않았다.

근데, 저기, 있잖아요.”

?”

언제부터 우리 학교에 있었어요?”

용식은 손가락을 들어 꼽았다.

하나, , , , 다섯 해요.”

“5년이나요?”

.”

그럼 학생회가 있었는지 없었는지 알고 있겠네요?”

용식은 눈썹을 찌푸렸다.

...있었던가? 없었던가? 있었던 것 같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아닌가? 없었나? 없었을 수도 있었고...없지 않았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았던 것 같구...”

언제 입학했는데요?”

“1996년에서 1998년 사인 것 같아요.”

그땐 학생회가 있었어요?”

, 글쎄요? 세계사 수업은 확실히 있었던 것 같아요, 아니, 있었어요! 학생회는...저어, 학생회가 만약 따로 수업을 했다면, 기억이 날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그땐 수업을 자주 빼먹었으니까 기억 못할 수도 있구요.”

경화는 노트를 펼쳐서 ‘1996, 학생회 있었음이라고 적어 넣었다.

올해가 몇 년이죠?”

“2002년이죠.”

용식은 활짝 웃었다.

경화는 노트 다음 칸에 ‘1997~현재 학생회 없음이라고 적어 넣었다. 그리고 잠시 망설인 다음 두 칸 사이에 용식 학교 다님이라고 써넣었다. 그리고 몇 분 후 망설인 다음 용식 학교 다님뒤에다 한 구절을 더 써넣었다. ‘교장 암살자도 학교에 있었음.’ 그렇게 써놓고 나서 한참 동안 들여다 보았지만 이 닦으러 갔다가 물로 헹구고 나온 것처럼 기분이 객쩍었다.

한밤중 학교는 지독할 정도로 고요했다. 승표의 코 고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천정에 난 창문을 바라보았다. 빛 한 점 없이 컴컴했다.

 

‘1996~현재, 담배 선생과 추기경 학교에 있었음. K담임 있었음.

 

경화는 이렇게 쓰고 나서 다시 노트를 들여다보다가, 이윽고 다시 한 줄을 더 썼다.

 

‘1996~1998. 학생회 있었음. 용식과 교장 암살자, 학교 다님.

교장 학교에 있었음.‘

 

용식은 경화의 노트를 들여다 보았다. 표정은 활짝 핀 그대로였다.

다음날은 세계사 시험이었다. 늦게 자서 잠이 부족했지만, 경화는 자신이 있었다. 학생들은 문제지를 받자마자 밀린 잠부터 잘 표정들이었다. 그러나 경화는 문제지를 은근히 기다렸다.

추기경이 낸 문제는 다음과 같았다.

 

근대 유럽이 태동하고 발전하여 현재에 이르는 20세기를 낳기까지의 배경과 정치 경제 사회적인 원인과 변화 과정, 그 결과가 도대체 너 자신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 구체적으로 서술하시오(교과서나 참고서에 나오는 문장 베껴서 쓰거나, 근대 유럽이 태동하고 발전하여 현재에 이르는 20세기를 낳기까지의 배경과 정치 경제 사회적인 원인과 변화 과정, 그 결과만 써놓고, 근대 유럽이 태동하고 발전하여 현재에 이르는 20세기를 낳기까지의 배경과 정치 경제 사회적인 원인과 변화 과정을 비롯한 결과가 도대체 너 자신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 구체적으로 쓰지 않으면 0점 처리한다. 이상.)’

 

경화는 잠시 넋을 잃고 몇 분 동안이나 멍하니 앉아 있었다. 대부분 철퍼덕 책상 위에 엎어졌지만 몇몇 학생들은 그래도 생각해온 답안이라도 있는지 부지런히 적어나가기 시작했다. 답안 적는 소리가 교실 안에 가득 차고 나서 몇 분이 흐른 뒤에도 경화는 아무것도 쓰지 않고 여전히 앉아 있었다. 그러나 이윽고 그녀는, 어제 혼자 공부하면서 쓴 답안을 답안지에 쓰기 시작했다. 답안 분량은 답안지 한 면을 빼곡히 채우고 뒷면을 넘어 절반 가까이 가득 찼다. 경화는 모범 답안의 마침표를 찍은 다음, 다음과 같이 한 문장을 더 써넣었다.

 

이상에 이르기까지, 근대 유럽이 태동하고 발전하여 현재에 이르는 20세기를 낳기까지의 배경과 정치 경제 사회적인 원인과 변화 과정, 그 결과와 나 자신과는, 구체적으로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0점 처리하고 싶으면 마음대로 해 보시지)’

 

추기경은 점수를 공개하지 않았다. 그러나 경화는 그에게 전대 학생회장이자 전화 받는 남자이면서 교장 암살자인 윤수에 대해 물어보기로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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