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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 학교의 살인자(8)

2014.06.28 14:2606.28

8

 

너 좋은대로 됐지? 그러니까 저리 가. 귀찮아.”

안 돼. 도와줘.”

공부할 시간 많잖아. 투표일이 방학식날이니까 두 주일 전에 후보등록하고, 일주일 전부터 선거운동하면 되잖아. 그런데 왜 자꾸 귀찮게 따라다녀? 공부하고 싶으면 너 혼자 하란 말이야.”

월요일이었다. 경화는 승표의 가방을 빼앗아 운동장에 힘껏 집어던졌다. 승표는 잠시 경화의 얼굴을 쳐다보더니 아무 말 없이 운동장 가운데로 저벅저벅 걸어갔다. 그런 뒷모습을 보자 경화는 잠깐 미안해졌다. 승표는 가방 밖으로 튀어나온 샤프와 책을 집어넣고, 다시 그녀에게로 걸어왔다.

몰래 숨어서 공부하기 딱 좋은 데가 있어. 가자.”

경화는 승표의 뒷통수를 노려보다가 생각을 바꿨다. 마침 학원에 가기 싫었기 때문이었다. 학원의 손바닥만한 강의실에 들어갈 때마다 독한 마커 냄새로 머리가 아팠다. 여러 번 알코올 냄새가 난다고 얘기했지만 여전히 냄새가 코를 뚫고 머리까지 찔러댔다. 하루종일 학원 강의실에 앉아 있으면 밤에 잘 때까지 머리가 아팠다. 생각다 못한 경화는 일회용 방독면 마스크를 쓰고 강의실에 들어갔다. 한참 강의를 하던 선생이 글씨를 쓰던 마커를 내려놓고 그녀를 노려보았다. 경화가 공기로 감염되는 에이즈에 걸렸다고 말하자, 선생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경화에게 학원비를 돌려주라는 말을 하러 사무실로 갔다.

승표는 경화를 이끌고 체육관 뒤쪽 샛길로 들어섰다. 샛길은 학교를 둘러싼 강철 울타리 끝까지 이어져 있었다. 길 끝에 칙칙한 초록색 기와를 얹은 조그만 벽돌 건물이 아무도 오고 싶어하지 않는 쓰레기장처럼 처박혀 있었다. 초록색으로 칠해진 철문을 열자 안에서 신나 냄새와 나무 냄새가 뒤섞여 밀려나왔다. 경화는 들어가기 전 마스크를 꺼내려고 가방을 뒤적거리며 물었다.

이런 델 어떻게 알았어?”

세계사 선생이 가르쳐 줬어. 아무 때나 와서 공부해도 괜찮다고.”

두 사람은 철문 안으로 들어갔다.

목공소 안은 어두웠고, 벽 위쪽에 난 사각 창문에서만 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양쪽에는 나무와 니스칠 냄새를 풍기는 의자더미가 있었다. 바닥에는 갈아낸 톱밥이 깔렸다. 승표는 의자더미 뒤쪽으로 사라졌다. 경화는 발걸음을 멈추고 소리를 쳤다.

어디로 가는 거야?”

뒤쪽으로 들어와.”

경화는 한 걸음씩 내딛었다. 어두워서 불편했다.

의자더미 뒤쪽으로 들어가자 의자 몇 개가 놓여 있었고 가운데에는 둥근 탁자가 놓여 있었다. 탁자 위에는 금이 간 하얀 플라스틱 갓을 씌운 스탠드가 놓여 있었고, 곳곳에 부드러운 톱밥이 수북히 쌓여 있었다. 창문이라기보다는 벽을 뻥 뚫어놓은 듯한 구멍에서 햇빛이 들어왔다. 승표는 가방을 바닥에 놓고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운동화를 벗고 톱밥 속에 발을 푹 파묻었다. 경화는 주춤거리다가 의자를 끌어당겨 걸터앉았다.

의자더미 속에서 누군가 기어나왔다. 회색 티셔츠와 면바지를 입은 스무 살 정도의 남자였다. 머리는 약간 길고 삐죽삐죽 하늘을 향해 솟아 있었다. 머리카락과 옷에는 톱밥과 조그만 비늘 같은 나뭇조각이 잔뜩 묻어 있었다. 경화와 승표 쪽으로 가까이 다가오자 니스와 나무 냄새가 한데 뒤섞여 풍겼다.

승표가 그를 소개했다.

용식이 형이야. 찬조연설을 해 줄거야.”

찬조연설이라구?”

안녕하세요.”

용식이 공손하게 인사를 건네자 경화도 반사적으로 머리를 숙였다. 용식은 의자에 걸터앉더니 회색 면바지 주머니에서 꾸깃꾸깃하게 여러 번 접은 종이를 끄집어내기 위해 약 1분 동안 애를 썼다. 승표가 용식의 그런 동작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기 때문에, 경화도 입다무는 수 밖에 없었다. 종이가 찢어지지 않게 주머니에서 꺼내기 위해 골반을 이리저리 뒤튼 노력의 결과 그는 마침내 무사히 끄집어낼 수 있었다. 그리고 탁자 밑을 이리저리 더듬더니 스탠드 스위치를 눌렀다. 반짝 불이 켜졌다. 불이 켜지자 그는 종이를 테이블 위에 펼쳤다.

경화는 종이를 들여다보았다. 종이에는 글자 대신 세로로 번호가 주욱 적혀 있었다. 승표는 기쁜 듯이 종이를 바싹 들여다보고 용식에게 말했다.

, 고마워.”

용식은 들은 체도 않더니 경화 쪽을 쳐다보고 불쑥 말했다.

저기...의자는 편안해요?”

?”

의자가 편안하냐고요.”

. 괜찮은걸요.”

편안한가요?”

“...편안한데요.”

좋다면 집으로 하나 가져가도 돼요.”

“....”

정말 편안한가요?

.”

다행이군요.”

용식은 승표가 들여다보고 있는 종이를 슬며시 뺏더니 다시 꾸깃꾸깃한 모양으로 접었다. 경화는 다시 그가 1분여에 걸친 고통스러운 퍼포먼스를 보여주지 않을까 긴장했지만 다행히 그는 종이를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기쁜 듯이 웃었다.

세계사 선생님이 시키지 않았다면 이런 연설을 하지 않았을 거예요.”

추기경이 연설을 시켰어요?”

. 찬조 연설을 하면 졸업할 수 있다고 했어요.”

졸업이라니요? 아저씨 학생이예요?”

경화의 말이 떨어지자 승표는 가방에서 무엇인가 꺼냈다. 인조 가죽으로 만든 출석부였다. 표지를 열자 학생들 이름이 주욱 적힌 페이지가 나왔다. 맨 아래에 김용식이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날짜는 824, 2학기가 시작된 바로 다음날이었다.

이 아저씨가 우리 반이었어?”

아니, 추기경네 반이지.”

경화는 출석부를 들여다보았다. 글씨는 추기경이 자주 칠판에 써갈기던 필체 그대로였다. 승표는 출석부를 집어넣었다.

용식이 형은 5년째 이 학교 다니고 있어. 이번 학기가 마지막이야. 연설을 하면 졸업할거야. 넌 선거관리위원장이니까 연설을 할 수 없어서, 용식이 형이 하는거야.”

“K담임도 알고 있어?”

알겠지. 아마도.”

경화는 용식 앞으로 손을 내밀었다.

그 연설문 다시 줘 봐요.”

용식은 종이를 건네주었다. 경화는 꾸깃꾸깃한 종이를 펼쳤다. 종이에는 번호들이 세로로 쭉 적혀 있었다.

말할 것들의 번호를 적어놓은 거예요. 순서를 잊어버리면 안 되거든요. 순서가 바뀌어버리면 연설을 할 수 없게 되요.”

순서요?”

연설에서는 순서가 제일 중요하다고 선생님께서 말씀하셨거든요. 제일 먼저 말할 것은 제 이름이예요. 두 번째는 연단에 나온 목적이예요. 맨 마지막에는, 지금까지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게 다인가요?”

, 세계사 선생님이 말씀하시길, 네가 박승표란 놈이 왜 학생회장이 되어야 하는지 구구절절 설명할 필요가 전혀 없으니까 그냥 빨리 해치워버리래요. 중요한 건 그놈을 위해 누군가가가 많은 사람들 앞에 서 있다는 사실이 중요한 거라구요.”

경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선거일은 방학식이었다. 그런 금쪽같은 날 승표 같은 애를 학생회장으로 만들어 주기 위해 추운 바람을 견디며 운동장에 서 있을 생각만해도 짜증이 버럭 났다. 신입생 시절에도 감기 걸려서 죽을 뻔 했는데 방학식에도 겨울 바람에 오들오들 떠는 건 정말 싫었다. 이럴 땐 추기경이 미운 나머지 눈물이 다 나려고 했다.

넌 출마연설 어떻게 할 거야?”

난 이 책을 읽어줄거야.”

승표는 눈알을 굴려댔다. 그리고는 가방을 꺼내 서울대가 아니라 아이비 리그를 노려라를 꺼냈다. 낱장을 하나하나 테이프로 붙인 바로 그 책에는 연두색 포스트잇이 군데군데 붙어 있었다. 연설 때 읽을 내용인 모양이었다. 승표는 책을 소중히 탁자 위에 내려놓은 다음 노트 몇 권과 세계사 교과서를 꺼냈다.

시험공부 할래?”

경화는 고개를 젓고 가방을 집어들었다.

안 돼. 만날 사람이 있어.”

누군데요?

용식이 물었다. 경화는 용식을 돌아보았다.

아저씨라면 알지도 모르겠네.”

경화는 대답했다. 그리고 앉아 있던 세발 의자를 들고 목공실 밖으로 걸어나왔다. 뚜벅뚜벅, 구둣발 소리가 목공실 안에 잔향이 남아 울렸다. 운동장에서는 절반쯤 해가 지고 있었다. 그녀는 가방을 메고 한쪽 손에 의자를 든 채 마른 흙으로 덮인 운동장을 가로질러 교문을 빠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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