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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 학교의 살인자(6)

2014.06.28 14:2506.28

6

 

어쨌든 경화는 승표의 선거를 돕기로 했다. 돕기로 한 가장 큰 이유는 별달리 재미있는 일이 없었고, 두 번째 이유는 승표가 매일 간식을 책임지기로 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세 번째이자 가장 작은 이유는 선거를 돕지 않으면 정학시켜버리겠다고 K선생이 협박했기 때문이었다.

경화는 K선생에게 승표가 자신의 간식을 책임져야 한다는 조건을 걸었고, K선생은 승표에게 간식을 살 돈을 주기로 약속했다. 경화는 K선생에게 승표와의 약속을 어길 것을 요구했고, K선생은 승표와의 약속을 지키지 않기로 했다. 경화는 K선생이 승표의 약속을 깨기로 한 약속을 받고 나서 승표를 돕기로 K선생과 다시 약속했다. 승표는 약속에 상관없이 신이 나서 매일 경화에게 초코 우유와 소세지, 냉동 떡볶이 따위를 사다 날랐다. 승표는 그녀에게 도움을 받기 위한 모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일주일 동안 승표의 정성 어린 시중을 받고 나자, 경화는 싫증이 나서 선거를 돕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러자 K선생은 그녀의 귀때기를 잡고 흔들면서 아침 6시 반까지 등교를 시켜버리겠다고 협박을 했다. 경화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선생들도 아침 6시 반까지 나오는 사람은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K담임은 최후 통첩장을 날렸다. 집에 전화를 걸어 아침마다 경화를 데리고 등교하겠다고 협박을 했다. 경화는 K담임이 가여워진 나머지 다시 승표의 서비스를 받기로 했다.

지난 일주일 동안 승표는 경화의 시중을 드는 한편 서울대가 아니라 아이비리그를 노려라를 들고 학교의 모든 교실을 돌면서 찬조연설을 해 줄 사람을 찾았다. K담임과 경화는 굳이 방해하지 않았다. 학교 건물을 거꾸로 들고 벌레 털듯 흔들어봤자 승표를 위해 전교생 앞에 1분 동안 서 있으면서 쪽을 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 부분에 있어서 K담임과 경화의 견해는 처음으로 일치했다. 예상도 들어맞았다.

그래도 승표는 좌절하지 않았다. 경화는 승표의 자리가 비어 있는 이유를 담당 과목 선생들에게 매 시간마다 설명해야 하는데 진력이 났다. 그래서 경화는 백지를 가져다 매직으로 커다랗게 써서 승표의 책상에 붙여놓았다. ‘찬조연설자 구하러 갔음. 더 이상 묻지 말기.’

종이를 붙여놓은 다음날 경화는 그 위에 아이들이 승표에 대해 온갖 욕설과 불평을 적은 포스트잇이 덕지덕지 붙은 꼴을 목격했다. 경화는 자신에 대한 욕설, K담임에 대한 욕설, 승표에 대한 욕설이 적힌 포스트잇을 각각 분류했다. 그리고 그 비율이 1 1 1이라는 사실에 놀라고 분격했다. 경화는 포스트잇을 모조리 찢어버린 다음 승표를 도와주기로 마음을 바꾸었다.

욕을 실컷 얻어먹은 덕에 경화의 마음은 바뀌었지만 아이들의 마음은 바뀌지 않았다는 게 문제였다. 승표가 들고 다니는 서울대가 아니라 아이비 리그를 노려라만 보여도 아이들은 화장실 쉬파리 피하듯 스르르 사라졌고, 파리채를 휘둘러 보고 싶은 짖궂은 몇몇 놈들만 남았다. 몇몇 녀석들이 책을 버리면 연설을 해주겠다고 꼬셨지만 승표는 강경하게 버텼다.

K담임은 잘 하면 선거가 엎어질 수도 있을 것 같아 은근히 기뻤다. 그러나 경화가 꾸준히 불평을 하자 찬조연설자에게 따르는 혜택을 찾아보기 시작했다(경화가 교무실 청소를 안 하겠다고 난리를 피워서였지, 포스트잇에 적힌 K담임에 대한 조롱 때문이 아니었다). 연설자의 혜택에 대한 규정은 없는 것 같았다. 경화의 입에서, K담임은 승표만큼이나 무능하고 멍청하다며 투덜거리는 소리가 나오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K담임은 수업이 끝나자마자 교무실에 들르지도 않은 채 복도 창문을 통해 주차장으로 내뺐다. 경화는 K담임을 욕한 포스트잇을 찢어버린 걸 통탄했다.

선거 일정은 다가오는데 연설자를 찾지 못하자 두 사람은 조바심이 났다. 생각다 못한 경화는 학생 명부까지 갖다가 뒤졌지만, 개중 들이밀어 보지 않은 사람이 없자 다시 한 번 절망한 나머지 승표가 가져온 간식마저 벽에 집어던져 그림을 그려버렸다.

지친 경화가 호소했다.

수업시간마다 모든 교실을 빠짐없이 돌아다녀서 이젠 가볼 데도 없어. 선생들이 이젠 내 말을 외울 정도가 됐단 말야. 수업 중에 잠깐 양해 구하고, 들어가서 연설을 해 줄...’이라고 말만 떼어도 옆에서 뒤에서 할 말을 중얼중얼 읊어내린다구. 어떤 선생은 아예 들어오지도 못하게 해. 이젠 할 만큼 했지 않느냐구. 그런데 아무것도 안 끝났잖아?”

승표는 묵묵히 책을 껴안은 채 앉아 있었다. 경화는 지쳐서 한숨을 쉬었다. 한숨이 어찌나 센지 텅 빈 학교를 날려버릴 듯 했다. 경화의 걱정과 상관없이 방과 후 학교는 평화로웠다. 주홍색 햇빛이 나리는 운동장에는 축구부가 타원을 그리면서 달리고 있었다.

경화는 홱 뒤돌아보았다. 그리고 승표를 보았다.

쟤네들 뭐야?”

쟤네들? 축구부야. 수업에도 안 들어오고 맨날 훈련 받다가 경기 나가구 그래.”

나가서 얘기해 봐.”

싫어. 네가 가 봐.”

경화는 승표를 운동장으로 떠미는 법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책을 재빨리 뺏어서 운동장으로 집어던졌다. 승표는 쥐새끼를 본 고양이처럼 뛰어나갔다. 경화는 오늘만은 집에서 죽은 듯이 늘어져 잠만 자겠다는 일념을 다해 학교에서 도망쳤다.

 

다음날 경화와 승표는 축구부가 달리는 운동장으로 나갔다. 주장이 대답했다.

니들 얘긴 알겠는데 찬조연설은 못 해.”

승표는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왜 못 하는데?”

경화가 물었다. 축구부 소년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질문의 의미를 알 듯 하면서도 잘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먼지나는 운동장 한 가운데 축구부원들이 반원을 그리고 서 있었고, 경화와 승표는 그 가운데 서 있는 모습이었다.

한참 동안 우물거리다가 주장이 입을 열었다.

우린 투표를 해 본적이 없어.”

?”

우린 투표를 해 본적이 없다고.”

경화가 눈을 희번덕거렸다.

너네 축구부는 투표를 한 적이 없다고?”

. 축구부가 생긴 이래로, 우린 투표한 적이 없어.”

주장이 대답했다. 승표가 물었다.

왜 투표를 못 하는데? 우리학교 학생이면 누구나 회장선거 투표를 해.”

미드필더가 말했다.

우리도 이유는 모르지만 투표는 못 해.”

이유를 모른다고? 이 병신아, 그러니까 네가 미드필더밖에 못 하는 거야.”

골키퍼가 퉁을 주자 승표가 말했다.

미드필더도 중요하잖아.”

미드필더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아. 왜냐면 공격수도 미드필더를 할 수 있고, 골키퍼도 미드필더를 할 수 있어. 급하면 감독이 미드필더를 해도 돼. 하지만 미드필더는 다른 포지션을 못 한단 말이야.”

왜 못하는데? 안 시켜주니까 못하잖아.”

미드필더가 항변했다.

넌 머리가 나쁘니까 미드필더를 하는거야. 이제 네가 머리가 나쁜 이유를 알겠냐?”

골키퍼가 말했다. 미드필더 소년은 잠깐 입을 벌리고 있다가 고개를 숙였고, 이어서 축구화를 질질 끌면서 수돗가로 가더니 물을 틀어놓고 그 아래 머리를 숙였다. 경화는 다시 눈을 희번덕거렸다.

뭐 하는 거야?”

물 떠오려나보지.”

승표가 다시 물었다.

아무튼, 그런데 미드필더는 그렇다 치고 니네들은 왜 다들 투표를 못 하는데?”

머리가 나쁘니까.”

머리가 나쁜 거랑 투표랑 무슨 상관이야?”

머리가 나쁘면 공부를 못 하고, 운동을 해야 돼. 운동을 하려면 수업에 못 들어가거든. 수업에 안 들어가면 학생이 아니잖아. 그래서 투표를 안 하는 거래.”

경화와 승표는 끄덕였다. 수돗가에서 물소리가 요란하게 들리자 윙백이 말했다.

그런데 저 놈은 뭐 하는 거야?”

골키퍼가 소리쳤다.

, 이 새끼야! 뭐 하고 있어?”

미드필더가 뭐라고 악을 썼지만 물소리가 세서 들리지 않았다. 수도꼭지의 물세례가 더욱 강해져서 경화의 치마에 물방울이 튈 지경이 되었다.

저 새끼 빠져 죽겠다.”

놔 둬. 미드필더는 많아. 빠져죽으면 다른 놈 시키지 뭐. 너 미드필더 할래?”

주장이 승표를 쳐다보며 묻자 미드필더가 악을 썼다.

그래! 나 여기서 빠져 죽는다 이 씨발놈들아!”

다 들이 마셔 이 새끼야!”

주장이 대답했다.

그런데, 투표 못 하는 거랑 찬조 연설 못 하는 거랑 무슨 상관이 있어?”

경화가 실오라기 붙잡는 심정으로 다시 물었다. 주장은 인상을 찡그리더니 대답했다.

우린 찬조 연설을 한 번도 못 해봤어. 축구부 생긴 이래로 선거에 나가보기는커녕 투표도 못해봤거든. 다른 애들 투표할 때 우린 오리걸음으로 체육관 돌고 있었던 말이야. 그러니까 우린 학생회 말만 들어도 기분이 나빠. 왜냐하면 학생회장 출마는 물론이고 찬조연설도 투표도 한 번도 못해봤거든.”

이번에 출마하면 되잖아.”

경화가 말하자 승표가 옆구리를 툭 건드렸다. 경화는 나중에 꼭 따귀를 때려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주장이 고개를 푹 수그렸다.

우린 못 해.”

?”

윙백이 대답했다.

찬조연설도 못 하면 출마 못 하는 게 당연하잖아.”

출마도 못 하고 찬조연설도 못 한다구?”

투표도 못 하는데 당연하잖아.”

경화와 승표는 급격히 실망했다.

너희들은 어쩌다 그렇게 된 거야?”

뭐가?”

어쩌다가 투표도 못 하게 된 거냐구.”

글쎄.”

주장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윙백이 대신 대답했다.

잘은 모르지만 선배들이 하지 말라고 한 것 같아.”

선배들이?”

. 여기 축구부 선배들이. 나도 들은 얘기지만 말야. 예전에는 운동하는 애들도 투표하고 출마도 하고 그랬었데. 인기 많았었대. 그런데 어느 날 선배들이 투표를 거부했어.”

경화는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거부했다구? ?”

그게...”

주장 소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윙백이 대신 말하기 시작했다.

지금은 안 들어가도 되지만 옛날에는 시험 시간에 들어가야 했거든. 그게 귀찮았던 거야. 그래서 선배들이 시험에 안 들어가기 시작했대. 시험을 치나 안 치나 결과야 똑같았으니까. 그런데 투표도 시험 같아서 안 들어간 거지. 시험도 안 보는데 투표야 안 해도 상관없잖아. 그래서 투표도 안 하기 시작한거지.”

그러다가 안 하게 된 거야? 누가 못 하게 한 게 아니구?”

. 그러다가 우리도 투표는 해볼까하는 생각은 들긴 했지만, 생각해보니 투표를 하면 시험 시간에도 들어가야 하잖아. 그래서 둘 다 안 하게 된 거지. 투표도 안 하고, 시험도 안 보고.”

그럼 너희는 아이비 리그엔 못 가겠구나. 그럼 우리가 괜히 온 거네. 투표도 안 하고 출마도 안 하고, 찬조연설도 안 하고.”

경화는 승표의 옆구리를 발로 찼다. 축구부 소년들이 승표를 걷어차는 것보단 직접 차는 게 나을 것 같아서였다. 그러나 축구부 소년들은 승표를 차는 대신 모두 고개를 푹 숙였다. 텅 빈 운동장에 미드필더가 고개를 들이민 물소리가 울렸다.

몇 분 후 축구부 소년들은 천천히 한 줄로 서서 달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모두 까만 축구복과 까만 양말, 까만 축구화를 신고 있었다. 피부가 햇볕에 그을어 다들 머리부터 발끝까지 시커멓게 보였다. 경화와 승표가 바라보는 동안 그들은 한 줄로 늘어서서 천천히 운동장을 달렸다. 뛰는 것처럼 보였지만 속도는 빠르게 걸음과 비슷했다. 흙먼지가 휘몰아쳤지만 그들은 눈 한 번 비비지 않고 계속 달렸다. 마치 학교가 무너져 덮쳐도 축구부 소년들은 우울하고 무지한 집념을 다해 영원히 운동장을 달릴 것 같았다.

다음날 미드필더 소년은 입 속에 물거품을 가득 문 채 죽어서 발견되었다. 축구부 소년들은 훈련을 쉬고 미드필더 모집 포스터를 붙이러 나갔다. 경화와 승표는 축구부에서 찬조연설자를 찾는 걸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학교를 뒤집어 터는 데 지친 승표는 이틀 동안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경화는 꼬박꼬박 간식을 공수해오던 승표가 나오지 않으니 불편했다. 그래서 입학 후 처음으로 매점에 갔다.

뒷문 옆에 있는 매점은 겉으로 보기에 먹을 것을 판다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삭막한 건물이었다. 경화는 회색 페인트를 칠한 철문을 열면서도 설마 여기가 매점일까 싶었다. 문이 열리자 어두컴컴한 내부로 한 줄기 빛이 새어들어가면서 두터운 먼지들이 흩날렸다. 이런 데서 먹을 걸 판다고 생각하니 절로 오만상이 찌그러졌다.

우유 있어요?”

경화는 걸어들어가서 돈을 계산대에 올려놓았다. 그러자 계산대 밑에서 털이 숭숭 나고 때가 낀 손이 불쑥 올라오더니 그녀의 손목을 왈칵 움켜잡았다. 경화는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질렀지만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았다.

 

경화와 승표의 입학동기 중 근복이라는 녀석이 있었다. 경화는 특히 이를 갈면서 근복을 기억하고 있었다.

으슬으슬하게 한기가 내린 작년 2월 어느 날,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 참가하러 온 아이들은 조그마한 키에 단발머리를 늘어뜨린 채 교실을 돌아다니면서 비닐에 끼운 명찰을 파는 남자와 마주쳤다. 그의 손은 새빨갛게 얼어 있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그날 있을 오리엔테이션에는 꼭 비닐에 든 명찰을 가슴에 꽂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명찰을 가슴에 달 수 있는 안전핀과 조그만 쇠줄을 팔았는데 명찰 값과 합치면 무려 캔 콜라를 네 개나 사먹을 수 있는 돈이 되었다. 경화는 코웃음쳤지만 아침 여섯 시부터 불도 안 피운 학교에 나와 오들오들 떨던 아이들은 심심하기도 했고, 남자의 부지런한 설득에 넘어가 하나씩 명찰을 사 달았다.

경화는 새삼 이를 갈았다.

그때 속아서 아침에 일찍 나온 것만 생각하면 지금도 분해.”

“2년이나 지난 일이잖아?”

나만 속은 게 아니잖아. 그 자식을 옥상으로 끌고 올라가서 던져버렸어야 하는 건데.”

그런데 그때 종이에다 사인펜으로 이름 크게 써서 가슴에다 붙이고 있던 여자애가 너였어?”

새벽에 일찍 일어나느니 밤을 꼴딱 새버리는 편을 택하는 경화는 그 일에 대해 근복에게 원한을 품고 있었다. 오리엔테이션 전날 근복은 신입생 절반에게 아침 여섯 시까지 학교로 집합하라는 가짜 공문을 만들어 돌렸다. 그리고 속아서 모인 아이들에게 일곱 시까지 명찰은 물론 음료수며 초콜릿까지 터무니없는 가격으로 팔았다. 경화를 포함해서 명찰을 단 아이들은 그 후로도 한 시간 동안이나 부들부들 떨며 행사가 시작되기를 기다렸다. 아홉 시에 오리엔테이션이 시작될 즈음에는 전원이 감기에 걸려 있었고, 그중 3분의 1이 잠깐 몸을 녹인다며 집에 가버렸다. 나머지 3분의 1은 추운 나머지 교실에 나뒹굴던 쓰레기를 모아 운동장에서 모닥불을 피우다가 놀란 주민들의 민원 전화가 걸려오기도 했다. 덕분에 신입생 전부 감기에 걸렸다. 감기 바이러스가 번지자 날씨가 따뜻해지는 4월까지 전교생이 독감에 걸려 콜록댔고, 선생들까지 감기에 옮아 크리넥스를 끼고 훌쩍거리면서 수업을 했다. 병에 걸릴까 두려운 교장은 교장실 문을 걸어잠근 채 교감이 넣어주는 소독약 뿌린 결재서류를 문 아래 틈으로 받았다.

교장도 두려워할 이유가 있었다. 왜냐하면 감기에 걸린 아이들 중 몸이 약한 한 소녀가 폐렴으로 발전했기 때문이었다. 학교에도 비상이 걸렸다. 폐렴에 걸린 여자애 말고도 무려 7명이나 되는 아이들이 각기 자신이 폐렴에 걸렸다며 결석을 요구했기 때문이었다. 규정상 성적에 마이너스 없이 하루에 5명이 넘는 결석은 용인해줄 수 없었다.

교무실에서 회의가 열리는 동안 소녀는 기침을 하고 땀을 흘리면서 참을성있게 결석 처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처리되면 바로 병원에서 가서 치료를 받을 예정이었다. 열이 나서 어지러워지기 시작할 무렵 반장이 와서 알렸다. 오늘 그녀는 결석 대상이 될 수 없으니 정상적으로 수업을 받은 뒤 내일 다시 학교에 오라는 통보였다.

수업 다 받구 가라구? 안 돼. 그럼 병원 문 닫을 시간이란 말이야. 주사도 못 맞고 약도 없다구.”

낸들.”

반정은 가버렸다.

별수없이 소녀는 기다렸다. 기다리면서 그녀는 멀쩡한 아이 다섯 명이 희희낙락하면서 책가방을 싸들고 집에 가는 모습을 보았다. 그중에는 근복도 끼어 있었다. 머리가 뜨겁고 어지러웠지만 참았다.

다음날 그녀는 학교에 나왔다. 몸이 힘들었지만 하루라도 무단 결석을 했다가는 가차없이 점수가 깎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담임에게 결석 신청을 하고 기다렸지만 집에 가도 좋다는 이야기는 없었다. 왜냐하면 그날도 결석 가능한 인원 다섯 명이 이미 이름을 올렸기 때문이었다. 근복 덕분이었다. 결석 처리를 원하는 아이 다섯 명이 전날 전화를 걸어 부탁했고, 근복은 입금을 확인하자마자 평소보다 두 시간이나 일찍 학교에 가서 이름을 올려 주었다. 다섯 명은 학교에 얼굴을 내밀지도 않고 무사히 결석 처리를 받았다.

근복은 옥상에서 변명했다.

내가 그걸 공짜로 해 준건 아냐.”

경화는 근복의 멱살을 잡고 흔들었다. 근복은 승표에게 애처로운 눈길을 보냈지만 효과없었다.

누가 공짜로 해 줬대? 많이도 처먹은 거 전교생이 다 알고 있어. 얼마나 받았어?”

, 무서워. 그때 약값을 다섯 배 밖에 안 받았다니까?”

폐렴에 걸린 소녀는 인내심있게 그날도 앉아서 기다렸다. 감기약을 아무리 먹어도 별 소용없었다. 결석 처리를 대신 해 주고 돈을 벌었던 근복은 그때까지 끝물 감기에 고생하는 아이들을 상대로 약과 커피를 팔았다. 감기약은 인기가 좋았다. 약을 사 먹은 아이들은 예외없이 책상에 엎어져 하루종일 자버렸기 때문이었다. 푹 자고 일어나면 감기가 나아서 좋았고, 선생들은 수업시간 내내 계속되는 기침소리와 코 훌쩍이는 소리에서 해방되어 좋았다. 효과가 좋다는 소문이 나자 감기가 떨어지지 않은 선생들까지 근복이 파는 약을 사먹었다. 약효과가 훌륭한 나머지 수업을 하다 졸음이 밀려와 칠판에 박치기를 하고 쓰러진 선생도 있었다.

경화가 멱살을 잡고 180도로 흔들어 댔지만 근복의 입장은 확고했다. 자신은 소녀가 폐렴에 걸렸다는 사실을 몰랐으며 알았다면 그 값에 결코 약을 주지 않았을 거란 것이었다. 더비싸게 팔았을 거란 게 근복의 주장이었다. 경화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결국 경화는 근복을 꽁꽁 묶은 다음 옥상 난간에 걸쳐놓았다. 아슬아슬하게 매달린 근복은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입속에 매점에서 팔던 떡볶이 포장지와 우유곽 따위를 구겨 넣어 놓아서 숨도 쉬기 힘들었다. 경화와 승표가 간식을 다 먹고 나자, 근복은 다른 아이들보다 약값을 다섯 배나 더 받고 소녀에게 약을 판 사실을 인정했다. 그뿐만 아니라 겁이 난 근복은 묻지도 않은 것들까지 주저리주저리 뱉어놓았다.

그날따라 창백해 보이던 소녀에게 약을 판 뒤 근복은 스스로를 결석처리한 뒤 학교를 떴다. 소녀는 약을 먹고 편안하게 잤다. 하루종일 책상에 엎드려 있는 그녀를 아무도 건드리려 하지 않았다. 담임 선생만이 쉬는 시간마다 지나다니면서 창문 너머로 그녀를 보고 혀를 찼다.

종례시간이 되었다. 책상에 여전히 달라붙은 소녀를 본 담임은 걸어가서 어깨를 잡고 일으켜세웠다. 소녀는 제 몸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입가에 토한 게 묻어 있었다. 진통제와 근복이 판 수면제가 서로 화학작용을 일으켜 죽음을 이끌어었던 것이다.

내 책임 아냐. 약을 그렇게 섞어 먹으니까 죽은거야.”

떨어뜨리자.”

살려줘!”

?”

나도 장사하느라 그랬단 말이야!”

무슨 소리야?”

내가 아무 방해도 안 받고 물건 팔러 다닌 줄 알았어?”

근복은 오리엔테이션 때 어리버리한 신입생들을 속여 만든 밑천의 절반을 교장실에 보냈다. 교장은 학생회장이 근복이 보낸 액수의 절반도 안 되던 돈을 가지고 따지던 생각이 나서 기분이 나빴지만, 어린 놈이 인사차리느라 애썼다 싶기도 하고, 한편으로 웃어른 알아주는 게 고맙다 싶어서 받아두었다. 근복은 그에 힘입어 쉬는 시간마다 과자를 팔거나 학부모들에게 가짜 교복을 만들어서 팔았다. K담임은 뭐라고 한마디 하려다가 교장이 베푸는 회식비 봉투의 출처를 알고 나서 주춤했다. 근복은 신이 나서 장사에 열을 올렸고 급기야 교무실까지 들어와서 물건을 들이밀다가 추기경이 던지는 의자 세례를 맞고 복도로 날아갈 때까지 장사행각을 계속했다.

그 뒤로 근복의 방침은 바뀌었다. 교실에서 행상을 하는 것보다 물건을 사러 오게 만드는 게 유리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그러니까, 너희들이 도와주면...”

?”

나 좀 풀어주면 안 돼? 머리에 피 쏠려서 말이 잘 안 나와. 이 정도면 너 그때 아침 일찍 일어난 분풀이는 다 했잖아? 그때 너 명찰도 안 샀잖아?”

경화가 묶은 줄을 풀려고 일어서자 승표가 말했다.

난 샀는데.”

매달린 근복이 코피를 흘리기 시작하자 축구부원들이 옥상에 올라왔다. 축구부 소년들도 근복에게 신발이며 유니폼을 터무니없는 가격에 사기당한 구원(久怨)이 있었다. 경화와 승표는 축구부 소년들이 화풀이 겸, 운동 겸, 그 외에 심심풀이도 두루두루 겸하여 온몸의 구멍으로 오물이 줄줄 흘러나올 때까지 근복을 두드려대는 꼴을 구경했다. 축구부 아이들이 손털고 내려간 다음 경화는 이제 화풀이는 충분히 했다 싶어 생각해온 제안을 하기 위해 근복을 흔들어 깨우려 했지만 이미 실신하고도 두 시간이 지난 차였다. 결국 두 사람은 깨어나면 먹을 수 있도록 근복이 팔던 약과 콜라를 옆에 놓아둔 채 집으로 향했다.

학생 명부를 마르고 닳도록 뒤져댔지만 결국 승표를 위해 전교생 앞에서 1분 동안 서 있어줄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다는 진실을 받아들인 뒤에야, 경화는 학교에서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는 단 한 사람을 기억해냈다. 근복이었다. 마주치지 않은 게 당연했다. 근복은 매일 여섯 시에 등교해서 스스로를 결석처리한 다음 학교를 빠져나갔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근복이 하루종일 일없이 헤매고 다니는 건 아니었다. 언제나 근복은 1교시가 끝나는 열 시쯤에 학교로 돌아와서 간식거리를 팔았다. 근복이 경화와 마주치지 않은 이유는 늘 승표가 경화의 간식을 사다 날랐기 때문이었다.

아이들이 비싼 값에 근복의 물건을 살 수 밖에 없는 이유는 매점 때문이었다. 아무도 매점에 가지 않았다. 그 사실을 모른 채 경화는 마침 주머니에 있던 볼펜을 정체모를 손등에 꽂아넣고 줄행랑을 놓아야 했다. (물론 우유는 챙겼다.)

교실로 돌아온 그녀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왜 아무도 나한테 얘기 안 했어? 매점에 변태 있다고!”

그걸 이제 알았어? 이제까지 너만 모른거야, 이 바보 등신아.”

포스트잇으로 욕을 실컷 먹고 나서 한동안 기분이 상했던 경화는 바보 소리를 듣자 꼭지가 돌아버렸다. 매점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어디에 붙어있는지도 몰랐고, 선거 일을 시작하기 전에는 가보지도 않았던 것이다.

다음날 승표는 학교에 오자마자 경화에게 다짜고짜 붙들려서 심문을 당했다.

, 이제까지 어디서 간식 사온 거야?”

학교 앞 가게에서 사왔는데. 그건 갑자기 왜?”

매점 가 봤어? 거기 변태 있는 거 알아?”

안 가봤는데, 근데 변태 있다는 건 얘기 들었어.”

뭐야, 왜 너까지 얘기 안 해준 거야?”

내가 간식 다 사오니까 넌 매점 갈 필요 없잖아.”

너라도 얘기해줬어야지! 매점에 변태 있단 말이야!”

K담임은 경화가 모르는 학교 일도 있다는 사실이 무척 신기했다. 추기경도 담배 선생도, 심지어는 교감과 교장도 변태 아저씨에 대해 알고 있었다. 언제부터 학교에 있었는지는 몰랐지만, 차라리 화끈하게 사고 한 번 치면 내쫓기라도 할 텐데 절대로 선을 넘지 않았다. 고작해야 여학생 손목을 잡거나 남학생들 엉덩이를 뚫어지게 쳐다보는 게 고작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태 아저씨의 행각은 양이 질을 압도하는 측면이 있었다. 전교생이 다 한 번씩 변태와 마주쳐서 입맛 더러운 경험이 있었던 것이다.

어느 날 남아도는 에너지를 어쩌지 못하던 남학생들이 5교시가 끝난 쉬는 시간에 매점에 들렀다. 우연찮게도 K담임도 퇴근길에 매점에 들렀다. 그날 K담임이 배가 고팠던 이유는 매점 바닥에 쓰러진 채 엉덩이에서 피를 철철 흘리는 변태를 발견하기 위해서였다고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었다.

그 뒤로 아이들은 절대 매점에 가지 않았고, 아무리 배가 고파도 도시락을 까먹거나 교장과 교감이 번갈아 순시하는 삼엄한 경비를 뚫고 교문을 타넘는 한이 있더라도 학교 앞 구멍가게에 갔다.

근복은 바로 그 매점이 탐이 났고 경화와 승표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승표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맞은 데는 좀 어때?”

아파.”

경화가 비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래? 아프면 나한테 약 좀 살래?”

근복은 그녀를 노려보다가 고개를 푹 숙였다. 눈치를 보던 승표가 입을 열었다.

매점을 네가 할 수 있게 되면 찬조연설 해줄래?”

꼭 내가 해야 하는 건 아니지?”

다른 사람 시켜도 돼. 없으면 학생회장이 될 수 없단 말이야.”

그건 쉬워.”

근복은 약속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고, 경화와 승표는 물러났다. 계속 노려보는 근복의 눈알이 빠지기라도 할까봐 걱정됐던 것이다.

그날 밤 매점에 불이 났다. 누군가 사제폭탄을 만들어 던졌던 것이다. K담임은 119에서 전화가 오자 무서운 나머지 선을 뽑아버리고 이불 속으로 대피했다. 그러나 아침에 출근하자 K담임은 추기경에게 주먹으로 맞지 않는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무지막지하게 욕을 얻어먹었다. 추기경은 새벽부터 학교를 지켰던 것이다.

담배 선생도 불이 나자마자 학교로 튀어나왔다. 다행히 매점은 따로 세워진 가건물이라 학교 건물에 아직 불이 옮겨 붙지 않았다. 담배 선생이 도착했을 때는 농구하던 남학생들과 옥상에서 담배피며 노닥대던 여학생들, 학교 앞 구멍가게 주인, 치킨가게 배달 소년, 근처 고깃집 반찬 아줌마들부터 지역 주민에 통장들까지 우르르 모여 매점 문 밖으로 기어나오는 불꽃과 연기를 구경하고 있었다.

뭐야? 119는 불렀어?”

아니요. 불 꺼야 돼요?”

담배 선생은 양동이를 들고 수돗가로 달려갔다. 수돗물을 틀자 그 아래에 거품을 물고 나자빠진 새 미드필더 소년이 눈에 띄었지만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구경하던 주민들이 뭐 다른게 있나 궁금해져 수돗가로 다가왔다. 담배 선생은 양동이를 든 채 주민들에게 깔려 넘어졌다. 불은 자연스럽게 꺼졌다.

다음날 K담임은 경찰서에 갔다. 매점 바닥에 시커멓게 불에 탄 시체 한 구가 발견된 것이었다. 한편 근복은 바로 가건물을 청소하고 미리 준비한 물건을 들여놓는 등 점령군 행세를 했다. 경화와 승표가 달려갔다.

너희들이 불낸 거 아니지?”

당연히 아니지! 혹시 너야?”

근복의 주장은, 매점에 불을 내서 변태를 제거해준 게 두 사람이 아닌 이상 약속대로 찬조 연설을 해 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승표는 매점에 불을 확 싸질러버리겠다고 덤벼드는 경화를 말려야 했다. 변태가 불타 죽었다는 소식은 날이 밝기도 전에 전교에 쫙 퍼져 있었다. 매점은 학생들로 미어터졌고 선생들도 기웃거리면서 먹을 것을 사갔다. 근복은 신이 난 나머지 매점에 의자와 테이블을 놓고 방과 후 술집을 열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경화는 불이 나서 연기에 눈이 맵다는 핑계로 며칠 학교에 나가지 않았다. 승표는 매점에서 간식을 사 날랐지만 교실에서 경화를 찾을 수 없어서 혼자 먹어야 했다.

경찰서에서 K담임을 한 번 더 불렀다. 시체 처리를 위해서였다. K담임은 무시해버릴까 고민하다가 경찰서로 갔다. 시체를 인수하기로 했지만 딱히 묻을 곳이 없었다. 고민하던 K담임은 축구부 소년들을 동원해 운동장 한 구석을 파고 시체를 넣어 묻었다. 작업은 한밤중에 은밀히 진행되었다. 묻은 자리에는 쓰레기 소각장이 설치되었다. 이후 학교가 문을 닫을 때까지 변태 아저씨의 몸 위에서는 불꽃이 끊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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