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장편 학교의 살인자(5)

2014.06.28 14:2406.28

5

 

전화 받는 남자는 거의 매일 교문 앞에서 기다렸다. 그러던 중 남자는 교문에서 120미터 정도 떨어진 빨간 벽돌길 모퉁이에서 자신을 기다리는 한 소녀를 알게 되었고, 교장 암살계획과 별 상관은 없긴 했지만 어쨌든 그 소녀를 자주 차에 태우게 되었다. 남자도 학교 앞에 선생들 눈을 피해가며 차를 끌고 게처럼 기어다니는 일이 항상 재미있지 않았다. 그리고 교복 치마를 짧게 줄여 입은 그 여자애의 꼬라지가 썩 마음에 들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교장 암살 계획을 수립하려면 정보가 필요했고, 정보를 얻기 위해선 인내가 필요했는데, 그 인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심심풀이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가끔씩 그 소녀는 교장에 대한 소식을 가지고 왔다. 남자는 학교에서 교장의 차가 빠져나오는 시간을 계산하여 소녀를 그쪽으로 보냈다. 소녀는 남자가 지켜보는 가운데 교장의 차를 타고 어디론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한동안 소녀는 교장과 남자 사이를 오락가락했다. 문제는 그 와중에 말라죽어가는 한 여자애가 더 있었다는 것이었다.

전화 받는 남자가 교장 차에 보낸 소녀는 경화 친구의 외사촌 언니였다. 그녀도 A고등학교의 학생으로, 한 살 어린 여학생과 사귀고 있었다. 그녀들의 로맨스를 아는 사람은 연인인 두 사람과 외사촌 언니의 동생이자 경화의 친구, 그리고 그녀들의 섹스에 관심이 많은 경화 네 사람 뿐이었다.

소녀 연인들은 수업이 끝난 뒤 매일 학교에서 버스로 열 정거장 떨어진 번화가 골목 속에 숨어 있는 손바닥만한 이층 까페에서 만났다. 까페의 주인은 외사촌 언니의 고모이자 레즈비언이었다. 레즈비언 고모는 그녀들에게 에로틱한 에너지를 불어넣어 주었다. 올 때마다 두 사람은 담배를 피울 수 있는 테이블로 안내되었다. 침목을 잘라 이어붙여 만든 문짝을 열고 들어가면 거미줄 같은 레이스 커튼이 쳐져 있었다. 테이블에는 향기나는 오일이 올려진 향로와 촛불이 놓여 있었고, 두 사람이 겨우 끼어 앉을 수 있는 푹신한 의자가 있었다. 두 여학생은 서로 치맛자락을 만지작거리거나 살짝 키스를 하거나 아니면 같이 공부를 하면서 밤이 될 때까지 까페에서 놀았다.

그러던 중 외사촌 언니가 결별을 선언했다.

나 인제 고3이야.”

? 3은 연애하면 안 돼?”

안 돼.”

? 내가 공부에 방해라도 된다는 말이야?”

.”

외사촌 언니를 미친 듯이 사랑하는 어린 레즈비언 소녀는 그녀에게 남자친구가 생겼다고 결론을 내렸다. 경화의 친구 말에 의하면 - 외사촌 언니는 소녀와 헤어지기 전 색조 화장을 시작했다고 했다. 우연히 집에 놀러갔다가 서랍에서 손거울과 립스틱, 아이섀도우와 눈썹 연필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경화의 친구는 외사촌 언니가 메이크업을 하기 시작한 게 분명해,라고 단언지었다.

경화가 물었다.

그걸 어떻게 알아?”

메이크업을 했다면서 못 만나겠다고 했대.”

왜 화장을 하면 못 만나는데?”

남자가 생겼다고 의심한다는 거야.”

매일 까페에서 자신의 매끈한 피부를 만져주던 그 언니의 피부를 만지는 다른 남자가 생겼는지 궁금해진 그녀는 언니의 뒤를 밟았다. 그날은 데이트 약속이 없었다. 배신당한 고통보다 훔쳐보고 싶은 욕망이 더 강했다. 방과 후 흐릿한 스모그가 운동장에 내려 있었다. 언니는 텅 빈 화장실로 들어가 화장을 했다. 한참 후에 나온 언니의 속눈썹은 두텁고 검고 길게 자라 있었다. 소녀는 계속 뒤를 밟았다.

남자가 생긴 게 틀림없어.”

소녀는 중얼거렸다.

언니는 화장을 한 채 한산한 교문을 빠져나왔다.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 끝에 서자 언니는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뽑아 버튼을 눌렀다. 휴대폰 빛이 멀리서도 소녀의 눈에 보였다. 반짝이는 까만 세단이 와서 멈추자 언니는 망설이지 않고 올라탔다. 자동차에는 '4XXX'라고 번호가 쓰여 있었다. 소녀는 깜짝 놀랐다. 그것은 교장 차의 번호판이었다.

다음날 외사촌 언니와 교장의 로맨스에 대해 소문이 퍼졌다. 여학생들의 입술과 귓가에서 따라 조용하게 퍼지는 말이었지만 골조는 명확했다. 3학년 모양과 교장 사이에 스킨쉽이 있다는 것이었다. 경화는 코웃음을 쳤다.

이 학교 선생들 치고 여자애들 따먹기 싫은 사람 나와보라고 해.”

K담임은 그 말을 들으면서 못생긴 게! 라고 외치며 경화의 뒤통수를 갈기고 싶은 충동을 꾹 참았다.

소녀는 학교에서 열 정거장 떨어진 까페에서 매일 언니를 기다렸다. 만약 언니가 온다면 사과의 키스와 함께 직접 만든 카드와 샌드위치를 주고 싶었다. 그러나 언니는 소문이 퍼진 날부터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까페 주인조차도 행방을 몰랐다. 집으로 찾아갔지만 부모가 경찰에 실종신고를 한 모양인지 집 앞에 형사들이 차를 세워놓고 잠들어 있었다. 레즈비언 소녀는 교장한테 찾아가보세요라고 쓴 포스트잇을 차 창문에 붙여놓았다.

그 다음날 소녀는 아침 조회시간에 담임이 신경질적으로 흔들어대는 손에서 그 포스트잇을 발견했다.

이거 쓴 사람, 빨랑 자수해라. ?”

아무도 손을 들지 않자 담임은 포스트잇을 들고 다음 반으로 수색하러 가버렸다. 그러나 범인을 찾아내지 못했다. 포스트잇 글씨를 왼손으로 썼기 때문이었다. 언니를 제외한 레즈비언 소녀, 경화의 친구, 경화 세 소녀는 다시 까페에 모였다. 테이블에는 향로도 촛불도 없었다. 레즈비언 소녀가 말했다.

교장이 뭔가 알고 있나봐.”

경화의 친구가 물었다.

그런데 왜 형사들은 교장을 조사하지 않았을까?”

비밀리에 조사했을거야.”

그런데 담임이 어떻게 포스트잇을 가져왔지?”

두 여자애는 마주보았다. 옆에서 커피와 쿠키를 시켜 먹고있던 경화가 우물거리며 말했다.

병신 같은 형사 새끼들. 그 새끼들이 교장한테 준거지.”

두 소녀는 눈썹을 찡그리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경화는 어깨를 으쓱했다. 경화는 교무실에 항상 드나들기 때문에 정보가 가장 많았다. 두 소녀는 쿠키를 사준다고 한참 유혹한 끝에야 경화를 까페로 데려올 수 있었다. 레즈비언 소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언니는 어디로 갔을까?”

경화 친구가 말했다.

다치진 않았을거야. 아직 시체도 안 나왔잖아.”

바보들, 너희들이 소문을 내지 말았어야 했어. 부끄러워서 가출을 해버렸을지도 모르잖아.”

레즈비언 소녀는 이렇게 외치면서 희고 여린 팔뚝에 얼굴을 묻었다. 경화 친구가 물었다.

정말 교장 차가 맞아?”

분명 교장 차였어. 교장 차였다구.”

그래? 그러면 둘이 언제부터 만난 거지?”

커피와 쿠키 한 접시를 추가시키면서 경화가 말했다.

둘이 사귄다는 데 볶음자장 한 접시 걸게. 안 사귀면 쏜다.”

볶음자장은 안 먹어.”

레즈비언 소녀가 말했다.

경화 네 말은 못 믿겠어. 네가 만약 자장면을 건다고 하면 믿었겠지만, 볶음자장을 걸겠다고 하니 못 믿겠어.”

자장면은 믿고 볶음자장은 못 믿는 이유가 뭔데?”

자장면은 믿을 수 있어.”

레즈비언 소녀는 눈물을 닦고 말을 이었다.

싼 거니까. 학생 돈으로 얼마든지 살 수 있는 거니까. 하지만 볶음자장은 학생 돈으로 많이 못 사먹는 거잖아. 쉽게 먹을 수 없는 걸 거는 걸 봐서 넌 거짓말을 하는 게 분명해.”

나도 그렇게 생각해.”

경화 친구도 끼어들어 고개를 끄덕였다. 경화는 새 쿠키를 집어들었다.

교장은 아닐거야. 내가 다른 포스트잇을 써서 교장실 문에 붙여놓았는데 아무 일도 없잖아. 네가 붙인 것도 아무것도 아니라고 치부하는 게 분명해.”

포스트잇 소동이 난 뒤 경화는 청소를 하는 척 하면서 교장실 문에 교장 집을 뒤집어봐라는 포스트잇을 써서 살짝 붙여놓았다. 그러나 형사들은 이번에도 낚이지 않았다.

이 말을 들은 레즈비언 소녀가 말했다.

뭐라고 썼는데?”

교장 집을 뒤져보라고.”

그럼 교장이 납치를 했다는 말이야?”

뭐라구?”

사귀는 건 아니라면서. 그럼 납치를 해갔다는 뜻이잖아.”

경화는 머리를 저었다.

아니라니까. 교장과는 관계가 없어. 형사들이 포스트잇을 다 무시했잖아.”

이해를 못 하겠어. 그럼 어떻게 된 걸까? 그냥 교장 집에 가서 살고 있는 걸까?”

레즈비언 소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녀는 다시 하얗고 여린 팔뚝에 얼굴을 묻었다. 그녀는 진심으로 연인이 보고 싶었다. 다시 좁은 까페에서 촛불로 장난을 치며 키스를 하고 싶었다. 언니가 교장과 교제한다는 소문을 퍼뜨린 자신이 잘못했다고 느꼈다. 다시 연인이 돌아온다면 얼굴을 새빨갛게 칠하고 남자를 만나고 다녀도 용서해줄 수 있었다. 상대가 아무리 바람을 피우고 다닌다 한들 그녀는 죽을 때까지 순결을 지키며 신을 그리는 수녀처럼 살 자신이 있었다.

까페 회합 이틀 뒤 외사촌 언니는 돌아왔다. 스타일이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머리를 바짝 위로 올려 잡아맨 채 눈썹 면도를 했고, 손가락에 연기를 피우는 담배를 끼고 있었다. 하얀 피부와 마른 몸매에 걸친 교복이 잘 어울려서 신인배우처럼 섹시해 보였다. 그녀는 돌아온 뒤 담배를 멋있게 드는 포즈를 선보여 친구들에게 경탄과 빈축을 동시에 샀다. 소녀는 처음에는 다시 만나게 되어 너무 좋아서 울었고, 나중에는 언니가 죽도록 멋있어 보여서 울었다.

어딜 갔다 온 거야?”

경화 친구가 물었다.

외사촌 언니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손을 들어 가리켰다. 세 소녀는 그녀가 가리키는 방향을 보았다. 버스 정류장 방향이었다. 레즈비언 소녀는 교장 집을 생각했고, 경화 친구는 둘이 곧잘 다니던 까페를 떠올렸다. 경화는 까페 쿠키 생각이 났다. 레즈비언 소녀는 언니의 손을 잡으려고 했지만 손을 내미는 순간 언니가 담배를 바꿔 드는 바람에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세 소녀는 버스 정류장 방향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녀는 강 너머를 가리킨 것이었다. , 아무래도 좋았다. 어차피 조무래기들은 갈 수 없는 곳이었다. 그녀는 그림을 그려 넣은 두 쪽의 조가비처럼 영혼이 꼭 들어맞는 남자를 만났고, 며칠 동안 아주 행복하게 지냈었다. 공부를 마치고 나면 남자는 그녀를 데리러 올 것이었다. 약속을 한 건 아니지만 그녀는 그렇게 믿었다. 귀찮은 아기 애인 따위는 이제 작별이다. 가벼운 키스도 허벅지를 손가락으로 살살 쓰다듬는 소심한 애무도 안녕! 잠깐 얼굴을 보인 그녀는 증발해버렸다.

레즈비언 소녀는 거의 돌기 직전이었다. 그동안 소녀는 그동안 공부를 팽개치고 고3 교실 앞만 맴돌고 있었다. 소녀의 눈에 그녀는 섹시한 성모 마리아 같았다. 경화는 전화 받는 남자에게 언니의 행방을 물었다.

, 난 모르겠는데.”

전화 받는 남자는 머리를 저었다.

모를 리가 있어요? 학교에 아저씨 얘길 떠들고 다녔다구요. 다시 만나러 갈 거라구요.”

난 몰라.”

잡아떼지 말아요.”

경화는 전화 받는 남자의 수염을 잡아떼려고 손을 뻗쳤다. 전화 받는 남자는 경화의 손을 피해 차 뒷좌석으로 도망쳤다.

전화 받는 남자의 차에 모인 경화, 레즈비언 소녀, 그리고 경화의 친구 세 소녀는 머리를 맞대고 밤새도록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끝내 외사촌 언니가 사라진 동안의 행적을 추적해낼 수 없었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남자와 같이 있었다는 것 이상의 결론 이상이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넷이 머리를 모으는 동안 레즈비언 소녀는 다섯 번이나 울음을 터뜨렸고 경화 친구는 그때마다 손수건과 휴지, 생수를 가져와서 그녀를 달랬다. 경화는 두 번째까지는 참다가 세 번째 눈물방울이 흐르는 순간 짜증을 폭발시켰다. 다행히도 경화의 짜증은 세 번을 넘지 못했는데, 왜냐하면 전화 받는 남자가 경화의 세 번째 짜증에 자신의 분노를 폭발시켰기 때문이었다. 전화 받는 남자가 분노를 폭발시키는 방법은 차 밖으로 모두를 내쫓는 것이었다.

네 사람 모두 아직 어린터라 외사촌 언니의 행방을 추리하기에는 상상력이 모자랐다. 먼저 레즈비언 소녀의 추측은 옳았다. 교장과 외사촌 언니 사이에는 관계가 있었다. 네 사람의 상상력이 닿지 못한 또 하나의 영역은 다름아닌 외사촌 언니의 나이였다. 그녀는 당시 열아홉 살이 아니라 무려 스물아홉 살이었다. 몇십 년 동안 아귀가 맞지 않는 조각을 붙들고 매달리던 경화는 이 사실을 알고 무릎을 탁 칠 수 밖에 없었다(나중에 전화 받는 남자가 영문도 모르고 죽었던 이유도 바로 이것이었다). 이 사실을 알고 난 레즈비언 소녀는 어쩐지 유혹하는 솜씨나 테크닉이 열아홉 살짜리라고는 믿을 수 없는 수준이었다며 경탄을 금치 못했다. 경화 친구는 좀 억울해했는데, 왜냐하면 그럴 줄 알았다면 진작 따라다녀보면서 인생 경험이나 좀 해볼걸 싶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녀는 아줌마로 쪼글쪼글 늙을때까지 우습게도 연애 한 번 제대로 못해본 채 마흔을 넘겼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차에서 모임을 가진 날 레즈비언 소녀는 눈알이 빠지도록 울었다. 그녀는 차 밖으로 쫓겨나고 나서도 녹슨 수도꼭지처럼 눈물을 멈추지 않았다. 이미 인내심은 바닥난데다, 레즈비언 소녀 때문에 차 밖으로 쫓겨났다고 생각한 경화는 친구를 이끌고 집으로 가버렸다.

레즈비언 소녀는 미칠 것 같았다. 사라진 연인은 천 배나 멋있어져서 자기 앞에 나타났는데, 딱 한 가지 달라진 것은 연인의 사랑이었다. 소녀는 매일 울었다. 볼 때마다 그녀가 너무 멋있는데다 그에 비하면 자신은 너무 초라했다. 그녀는 자신의 슬픔을 예전에 두 사람이 같이 썼던, 그러나 지금은 혼자 쓰는 다이어리에 적었다. 이전에는 요일마다 색깔이 다른 펜을 썼지만, 지금은 슬픔과 광기를 상징하는 보랏빛 펜으로만 적었다. 우울한 기분이 강해지면 진보라색으로, 조금 기분이 나아지면 반짝거리는 보라색 펄이 든 펜으로 썼다. 죽고 싶어지는 날이면 검은 붓펜으로 오늘은 언니와 함께 죽고 싶다. 사랑해요라고 쓴 뒤 다이어리를 껴안고 베개에 얼굴을 묻은 뒤 물기가 베개에 통과해 시트까지 적실 때까지 울었다. 그녀는 보라색이 마음에 들었다. 우울과 슬픔에 싸인 자신의 마음을 가장 잘 상징해주는 고맙고 아름다운 색깔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사랑이 피를 흘린다면 붉은색이 아니라 진주빛을 띤 보라색일 것 같았다. 그녀는 보라색 펜으로 다이어리를 적어내려가다 보면 자신이 죽음을 찬미하는 신비로운 낭만주의자로 여겨졌다. 그녀는 점점 다이어리에 집착했다. 예전에는 언니가 보고 싶을 때마다 교실에 가서 훔쳐보거나 몰래 휴대폰 카메라로 사진을 찍었지만, 지금은 그럴 수도 없어 고통은 더욱 심해졌다. 같이 놀던 까페에 가보았지만 주인은 소녀를 모른 척 했다. 주인도 조카를 따라 성정체성을 바꾸었던 것이다. 하늘하늘하던 레이스 커튼은 사라졌고 촛불과 향내과 쿠션도 없어졌다. 대신 유리 테이블과 청동 조각상이 넓은 창으로 들어오는 햇볕을 한껏 받으며 놓여 있었고, 캬라멜맛 코코아 대신 에소프레소가 팔렸다.

그녀는 말라갔고, 얼굴은 더욱 희어지고 초롱초롱한 검은 눈은 점점 깊어졌다. 이제는 고3 교실에 몰래 가지 않았다. 멀리서 볼 때마다 환희는커녕 고통만 심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문방구에 가서 보라색 펜들을 몽땅 사왔다. 자신이 가진 모든 사랑과 열정을 보라색 잉크에 담을 생각이었다. 그녀는 모든 것을 썼다. 먼저 처음 만난 날을 구체적으로 썼다. 언니가 입고 있던 옷과 머리모양도 적었다. 그리고 생각나는 모든 것들을 다이어리에 적었다. 얼굴색과 포즈와 만날 때마다 핑크빛으로 화하는 듯한 공기, 첫 번째 데이트와 줄곧 다니던 까페, 까페의 레이스 커텐과 쓰다 남은 크레용으로 만든 촛불 그리고 낡은 쿠션에 속속들이 배어 있던 향내에 대해 썼다. 치마를 들추는 손길을 기다리는 하얀 허벅지와 입술의 감촉, 그리고 역시 자기 치마 밑으로 살며시 들어오는 희고 긴 손에 대해 썼다. 치마 밑으로 살며시 들어오는 흰 손에 대해 쓰다가 그녀는, 지금 그 손을 떠나지 않는 길쭉한 담배를 생각하고 잠시 울었다. 그러나 그녀는 다시 마음을 다잡고는 자신이 경험한, 지금까지도 육체를 불태우고 있는 사랑에 대해 남김없이 쓸 때까지 다이어리를 놓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보라색 펜과 검정색 펜, 반짝이는 보라색 펄 펜이 부지런히 그녀의 손을 오갔다. 페이지마다 사랑스러운 사진과 그림을 붙였다. 다시 울지 않겠다고 수없이 마음을 다잡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별과 실종, 그리고 돌아온 연인의 아름다움과 냉담함을 쓰기 위해서 그녀는 다시 식염수처럼 맑은 눈물을 흘려야 했다.

드디어 다이어리를 끝마치자 날이 새어 있었다. 그녀는 두툼하고 손때가 묻고 알록달록하며 작은 다이어리의 표지를 덮고, 책상과 자신의 두 손을 보았다. 책상에는 잉크가 바닥난 펜이 여남은 개 쌓여 있었다. 손은 보라색 잉크에 물들어 있었다. 가족들을 깨우지 않기 위해 조심스럽게 일어나 화장실로 가서 손을 씻었다. 밤을 새운 그녀의 두 눈 밑에는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다음날은 일요일이었다. 그녀는 잠을 푹 자고 일어났다. 충분한 수면 덕분에 눈밑 그림자는 사라져 있었다. 묘하게 마음이 가벼웠다. 그녀는 미소짓고는 스스로 놀랐다. 미소라니! 도대체 얼마만에 웃어본단 말인가? 그녀는 화장실로 들어가 세수를 했다. 배가 고파서 빨리 아침을 먹고 싶었다.

식탁 앞에 앉자 엄마가 눈을 휘둥글하게 뜨고 소리를 쳤다.

얘 좀 보게! 얼굴 하얘진 것 좀 봐? 눈도 아주 커지고. 시집 보내야겠네?”

실제로 그녀는 점점 예뻐지고 있었다. 수면 부족으로 피부가 점점 희어졌고 식사를 자주 거른 나머지 젖살이 쏙 빠져버린 것이다. 눈은 커지고 깊어졌고 살이 빠져서 뾰족하고 고양이 같은 얼굴선이 훨씬 두드러져 보였다. 몸도 성인다운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볼에는 희미한 홍조가 떠올라 있었다.

식사를 하고 나서 그녀는 방에서 거울을 보았다. 그녀는 자신이 급속도로 예뻐졌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사실 그녀가 예뻐지고 있다는 사실은 가족들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녀만 몰랐던 것이다. 그녀는 그녀가 그토록 흠모했던 언니 못지않게 아름다워졌다. 때가 되면 자연스럽게 젊음이 주는 선물이었다.

그녀는 신기한 나머지 거울을 보고 이리저리 얼굴을 들여다보다가 교실 문앞에서 어정거리는 남자애들을 떠올렸다. 그녀가 교실에 혼자 앉아 있으면 창문으로 힐끔거리며 들여다보다가 가깝다 싶으면 팔을 내밀어 사진을 찍던 녀석들이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그때 아무것도 신경쓰지 않았지만, 사실 그놈들은 학교에 갑자기 명성을 떨치기 시작한 미소녀를 찾아 여학생 반까지 탐험하러 온 것이었다.

그녀는 새삼스럽게 놀라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젖살이 빠진 얼굴이 날렵하여 보기가 좋았다. 코를 바싹 대고 들여다보자 매끈하고 윤이 나는 하얀 피부결이 보였다. 광채가 나는 듯했다. 얼굴을 멀리 떼자 매혹적인 눈동자가 들어왔다. 입술은 붉고 도톰했고 양 뺨은 살짝 분홍색이 떠올라 있었다. 일부러 블러셔를 바를 필요도 없어 보였다. 몇 걸음 물러서자 돌고래처럼 유연한 곡선을 그리는 전신이 비쳤다. 그녀는 한동안 눈으로 처음 보는 것인양 자신의 몸을 이루는 곡선을 즐기다가 가슴과 허리에 손을 얹고 골반에서 허벅지로 떨어지는 선을 직접 느꼈다. 교실 문앞에 어정거리는 녀석들 마음이 이해될 듯도 싶었다.

그녀는 고무줄을 찾아 머리를 위로 바싹 올려 잡아맸다. 면도칼을 찾아 눈썹 끝을 날렵하게 올려 깎자 얼굴에서 소녀티가 사라졌다. 그녀는 만족했다. 섹시하고 위험하게까지 느껴졌다. 그녀는 다이어리를 책상에 팽개쳐 둔 채 탱크 톱과 스키니진을 찾아 입었다. 손에는 휴대폰밖에 들고 있지 않았다. 그날은 일요일이었다.

한 달 뒤 그녀는 동거를 시작했다. 상대는 볶음자장을 배달하는 스무 살 된 소년이었다.

두 달 뒤 그녀는 임신을 했고, 수술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술집에 나가기 시작했다. 상대 소년은 도망친 뒤 오래였다.

석 달 뒤 그녀는 교장만큼 나이 많은 남자의 애인이 되었다. 두 번째 임신을 하자 그녀는 남자 몰래 수술을 받았다. 수술비를 위해 선물받은 옷과 보석을 팔았다.

다섯 달 뒤 그녀는 남자가 마련해준 집에서 쫓겨났다. 나이 많은 남자가 죽었기 때문이었다. 나이 많은 남자의 두 번째 아내는 그녀보다 열 살 많았다. 미망인은 나이 많은 남자의 재산을 조사하다가 그녀의 존재를 알았다. 그땐 세 번째 임신을 한 상태였다. 수술할 때를 놓친 나머지 아이를 낳아야 했다.

1년 뒤 그녀는 아이를 입양시킨 뒤 집으로 돌아갔지만 부모는 말없이 이사를 간 뒤였다. 그녀는 일하던 술집에 갔다. 일하면서 다시 시작하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뭘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러다 다이어리를 떠올렸다. 그러나 부모의 집을 찾지 않으면 다이어리도 찾을 수 없었다.

그 뒤 5년 동안 그녀는 자신이 다이어리에 썼던 바이런도 찜쪄먹을 만한 아름다운 이야기와 문체를 떠올렸다. 그것은 사랑의 신에 들린 무녀만이 쓸 수 있는 기막힌 작품이었다. 그녀는 술집을 옮겨다니며 계속 일했지만 머릿속에서 다이어리가 떠나지 않았다. 세상 그 어떤 글쟁이들도 쓸 수 없는 아름답고 풍요로우며 절망과 환희에 가득 찬 글이었다. 잠자리에 누워 눈을 감으면 눈앞에 진주빛을 띤 검은 보라색 바다가 출렁거렸다.

6개월 뒤 그녀는 서점에서 책 한 권을 발견했다. 제목은 보랏빛 사랑의 다이어리 : 소녀들이여 여인이 되어라였다. 그녀는 책을 펼쳤다. 자신이 다이어리에 썼던 글이 고스란히 적혀 있었다. 만남과 데이트는 물론, 키스와 애무에 대한 섬세하고도 폭발적인 묘사까지 모두 적혀 있었다. 에로틱하고 아름다운 문장과 이미지는 전문가의 윤문을 거쳐 더욱 훌륭해졌다. 책 표지에는 저자 이름 대신 편집부라고 적혀 있었다.

그녀는 책을 사갖고 집에 들어왔다.

다시 3년이 지난 뒤 그녀는 볶음자장을 배달하던 소년을 만났다. 소년은 무척 그녀에게 미안해했다. 소년은 그녀를 버린 죄값을 갚기 위해 결혼하고 싶어했다. 그녀는 받아들였다.

경화는 의문에 잠겼다. 레즈비언 소녀가 출판사로 연락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아무 접촉도 없었다. 다시 세 소녀가 연락이 닿은 것은 좀더 시간이 흘러 경화가 대부분의 사건을 끝까지 추적해낸 뒤였다. 그러나 교장과 전화 받는 남자 사이를 오가던 비밀을 쥔 소녀도, 사랑의 환희와 고통에 가득 찼던 아름다운 레즈비언 소녀도 오래 전에 사라지고 없었다. 그녀들은 도대체 어디로 간 것일까? 그녀의 영혼과 육체를 불태웠던 천국의 쾌락은 어디로 간 것일까? 경화는 책을 품에 꼭 안았다. 경화가 직접 편집했던 이 책은 더 이상 사랑에 대해 말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완벽했다.

레즈비언 소녀는 아이를 셋이나 더 낳았다. 하지만 사업 자금이 달리는 남편 때문에 종종 고통을 받았다. 생활이 나아진 뒤 입양한 아이를 만나고 싶었지만 찾아내지 못했다. 결혼 생활은 대체로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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