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장편 학교의 살인자(4)

2014.06.28 14:2306.28

4

 

걔는 무슨 처음부터 상식이 없어요.”

경화는 철제 캐비닛에 앉은 먼지를 털면서 K담임에게 말했다. 먼지를 터는 일은 매주 금요일마다 하는 일이었다.

어제 만나서 얘기했는데, 나 교무실 청소해야 하니까 기다리라고 했죠.”

승표는 기다리지 않았다. 서울대가 아니라 아이비 리그를 노려라를 손에 든 채 교무실 청소를 하는 경화 뒤를 졸졸 쫓아다니면서 하고 싶은 말을 늘어놓았다.

선거 일정을 누가 짰는지 모르지만 너무 늦어. 중간고사 공부할 시간이 없다구. 선거 공고는 내일이고, 입후보 등록 기간은 내일부터 다음주 목요일까지, 선거 운동 기간은 그 다음날부터 그 다음주 금요일까지 일주일, 투표일은 바로 그 다음주 월요일이야. 그런데 투표일 다음주가 바로 중간고사란 말야.”

시간이 없는데 어떻게 해? 그리고 일정은 내가 짠 게 아냐. 이거 좀 들고 있어.”

경화는 쓰레기통을 내밀었다. 승표는 얼른 책을 경화 얼굴에 내밀었다. 경화는 책을 빼앗아 창밖 화단에 던져버렸다. 승표는 화도 내지 않고 책을 주우러 부리나케 바깥으로 뛰어나갔다.

두 사람은 교문 앞에 서서 학원 버스를 기다렸다.

선거 끝나도 중간고사까지 공부할 시간이 일주일 있어. 별로 늦은 게 아냐.”

경화가 말했다.

그렇지 않아. 세계사가 이번엔 주관식으로 나온단 말이야.”

주관식 문제라도 답만 쓰면 되잖아.”

그렇지 않아.”

흙먼지를 털어낸 서울대가 아니라 아이비 리그를 노려라를 들고 있던 승표는 큰 소리를 쳤다.

들어온 정보에 따르면 말이야. 그냥 답만 적으면 되는 게 아냐. 백지 답안지를 다섯 장이나 내주고 그걸 다 꽉 채우라고 한대. 그걸 다 채울 때까지 집에 못 간다는 거야.”

화장실도 못 가고?”

당연하지.”

그거 문제있는데.”

경화는 그제서야 고개를 까닥거렸다.

그렇다고 해도, 선생님이 그러시는데 지금 짠 일정도 빡빡한 거래. 더 당길 수는 없다구.”

그녀는 일정표를 승표 코 앞에 대고 흔들면서 말했다.

공부는 틈틈이 하면서 선거 운동 어떻게 할지나 생각해 둬.”

그건 문제 없어. 우리 엄마가 알아서 할 거니까.”

뭐야?”

경화가 제일 싫어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엄마라는 단어를 입에 담는 남자였다.

그건 안 돼.”

?”

학칙상 학부모는 학교 요청이 없는 한 학교 내부 행사에 참여할 수 없어.”

경화는 재빨리 거짓말을 했다. 정말 그런지는 모르지만. 제발 그랬으면 싶었다. 아줌마들이 학교에 들어와서 설치는 꼴은 보기 싫었다.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선거관리위원장이니까. 내가 선거관리위원장이니까, 부정선거운동이 적발되면 넌 자동 낙선이야.”

그녀는 손가락으로 목을 자르는 시늉을 했다.

후보는 나밖에 없는데 어떻게 낙선이야?”

후보 등록은 시작도 안 했어. 너 말고 학생회장 하고 싶어하는 애가 또 있을지 어떻게 알아?”

흐음.”

승표는 책을 옆구리에 꼈다.

그래도 아이비 리그에 가고 싶어하는 애는 나밖에 없을 거야.”

그건 그럴지도 모르지.”

승표는 길바닥을 발로 툭툭 찼다.

네가 중앙선거관리위원장이라고?”

그래.”

그럼 너도 하버드나 예일, 프린스턴에 갈 수 있겠네?”

?”

승표는 서울대가 아니라 아이비 리그를 노려라를 펼쳤다.

아이비 리그 대학은 모두 학생회장 경력을 요구하거든.”

난 그런 데 안 가. 그냥 한국이 좋아.”

난 미국이 좋아.”

승표는 진지하게 책을 접었다.

넌 날 낙선시킬 수 있으니까, 아이비 리그에 갈 수 있을거야.”

승표는 방긋 웃었다. 경화는 눈을 찌푸리고 뒷걸음질쳤다. 봉고차가 도착하자 승표가 먼저 올라탔다.

나 먼저 갈게. 안녕.”

승표는 문을 닫으면서 손을 흔들었다.

미친 놈.

오래 서 있어 무릎이 아파졌다. 경화는 휴대폰으로 학원에 전화를 걸었다. 차를 보낼테니 조금만 걸어와달라며 학원에서 미안해했다. 경화는 걷기 시작했다. 중간고사까지 저 멍청한 녀석과 매일 지내야 한다. 선거가 끝나도 뒷정리를 하다보면 1주일은 금방 갈 것이다. 어쩌면 세계사 공부를 같이 하자고 조를지도 모른다. 최악의 경우는 승표가 학생회 간부를 해달라고 조르는 것이다. 선생님까지 그녀를 학생회에 밀어넣을지도 모른다.

맙소사, 잘난 척 하지 말걸.

빨간 블록으로 포장된 학교 앞길을 걸어내려가자 길이 세 갈래로 갈라졌다. 왼편에 학원 봉고가 서 있었다. 경화는 훌쩍 올라타고 문을 닫았다. 차 안에는 그녀 혼자였다. 그녀는 가방을 벗어 옆자리에 밀어놓고 머리를 기대었다. 그리고 곧 잠들어버렸다.

눈을 떴지만 차는 여전히 달리고 있었다. 언뜻 피로한 눈에도 차창은 어두컴컴했다. 경화는 눈을 비비며 물었다.

아저씨, 여기 어디에요?”

대답이 없었다. 경화는 창밖을 보았다. 이미 해가 져 있었다. 경화는 운전석으로 몸을 내밀었다. 야구 모자를 쓴 남자가 핸들을 잡고 있었다.

아저씨 누구세요?”

대답이 없었다. 경화는 자리에 미끄러지듯 앉았다. 긴장한 와중에서도 피로가 어깨를 짓눌렀다.

야구 모자를 쓴 남자가 옆자리 시트를 톡톡 쳤다.

학생, 조수석으로 와서 앉아.”

경화가 가방을 앞자리에 던지고 등받이를 타넘어가려 하자 남자는 손으로 그녀를 밀쳐냈다.

가방은 뒤에 두고, 몸만 와서 앉아.”

경화는 가방을 다시 뒷자리에 집어던지고 조수석으로 넘어갔다. 교복 치마가 걸리적거리자 경화는 치마를 허벅지까지 아무렇게나 걷어 올렸다. 그녀가 앞좌석 시트 위로 뛰어내리자 차가 쿵 하고 흔들렸다. 남자는 핸들을 꺾어 균형을 잡았다. 경화는 휴대폰을 꺼내 학원 전화번호를 눌렀다. 차량용 핸즈프리에 달린 남자의 휴대폰이 진동하면서 파란 네온 빛을 발하자 경화는 전화를 끊었다.

남자는 경화를 쳐다보지도 않고 계속 차를 몰았다. 경화는 남자의 옆얼굴을 노려보았지만 차안이 어두침침해서 옆얼굴만 희미하게 보였다. 경화는 차 시트 위에 웅크리고 앉았다. 남자는 침묵을 지킨 채 운전을 계속했다.

전화 받는 남자인 것 같은데.

경화는 생각했다. 어떻게 남자친구나 학원에 건 전화를 전화 받는 남자가 받게 되는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수업이 끝난 여자애들이 학교 앞에서 전화를 걸면 어떤 남자가 차를 몰고 와서 전화를 받았다면서 데려갔다. 어떤 아이는 벌벌 떨면서 운전사 얼굴도 보지 못하고 뒷자리에 처박힌 채 드라이브만 하다 왔고, 한 아이는 차에 타자마자 잠이 들었는데 깨어 보니 집 앞 벤치에 누워 있었다고 했다. 가방은 간 곳이 없었다. 두세 명의 여학생들이 학원에서 온 봉고차에 올라타는 모습을 마지막으로 남기고는 완전히 사라진 적도 있었다. 전화 받는 남자가 몰고 다니는 차도 빨간 페라리에서 푸르뎅뎅한 용달 트럭까지 다양했다. 돌아온 여자애들의 말은 조금씩 달랐지만 전화받는 남자에 대해 일치하는 한 가지가 있었다.

모르는 사람 차는 왜 탔는데?”

학원 차인 줄 알았다니까. 그리고 알아차렸어도 안 내렸을 걸?”

?”

잘생겨서.”

학원에 가지 않는 수요일과 금요일마다, 학교 수업이 끝난 뒤 경화는 승표와 단 둘이 교무실에 앉아 연필 끝으로 승표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면서 선거 일정을 짜는 틈틈이 전화 받는 남자에 대해 조사한 결과를 정리하는 일에 흥미를 느꼈다. 100명이 넘는 여학생이 전화 받는 남자에 대해 알고 있었고, 53명의 여학생이 전화 받는 남자와 통화를 했고, 그 중 30명의 여학생이 실제로 차에 올라탔으며 그 중 무려 17명의 여학생이 뭔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고도 내리지 않았다. 그녀들은 전화 받는 남자가 검은 야구 모자를 눌러쓰고 작업용 잠바를 입고 있었지만 남자다운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고, 이목구비가 또렷하며 여학생의 마음을 빼앗을만큼 잘생겼다고 주장했다.

조사를 마친 경화는 떽떽거렸다.

한밤중에 가로등 아래도 아니고 차안에서 모자쓰고 잠바떼기 입고 있는데 어떻게 잘생겼는지 아냐구. 웬만하면 다 멋있어 보이겠지. 남자에 굶주린 것들. 쯧쯧.”

왜 여학생만 태워주고 남학생은 안 태우는 거야?”

너라면 남자애들 태워주겠냐.”

K담임은 경화보다 훨씬 오래 전부터 전화 받는 남자를 알고 있었다. 교문 앞에서 연예인들이나 탈 법한 반짝반짝한 시커먼 밴을 타고 사라졌다가 며칠 뒤 홍조 띤 얼굴로 돌아오는 여학생들이 하나 둘씩 늘어나자 안되겠다고 생각한 K선생은 여학생 납치 대책 회의를 소집할 것을 교장에게 건의했지만, 결제서류 형태의 제안서를 작성하지 않은 탓에 깨끗이 묵살당했다. K담임은 좌절감을 느끼면서도 여학생들을 보호하겠다는 사명감에 불탄 나머지 다시 교감과 학생부장 선생에게 문제를 제기했다(이번에는 서류를 만들지 않아도 되었다). 교감과 학생부장은 K담임을 빼놓은 채 오 분 정도 상의를 한 다음, 원인은 수신이 잘못 걸리는 휴대폰 때문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학교에서 엉망으로 만든 휴대폰 문제까지 해결할 수는 없기 때문에 두 사람은 교내 휴대폰 반입을 금지하는 방안을 내놓았다. 그러므로 K담임은, 제일 먼저 문제제기를 한 책임을 지고 매일 아침 교문 앞에서 학생들의 휴대폰을 압수하여 커다란 바구니에 한데 모았다가 수업이 끝난 뒤 교무실 문 앞에서 다시 나누어 주게 되었다.

일주일 뒤 K담임은 여자아이들이 교문 앞에서 휴대폰을 켜고 여기저기 전화를 걸고 온갖 종류의 스포츠카부터 택배 트럭까지 학교 앞으로 오가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매일매일 휴대폰을 모았다 나눠주는 이 중노동을 계속해야 하는지, 아니면 여자애들이 학교 안에서 전화를 하지 못하게 된 것만으로도 다행으로 생각해야 되는지, 그도 아니면 여자애들이 학교 밖에서 납치되는 게 안에서 납치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인지, 양심의 문 앞에서 처절하게 노크를 시작할 무렵 다행히 그의 사역은 끝이 났다. 학교에 있는 동안 아이들과 통화를 할 수 없게 된 학부모들이 교장에게 항의전화를 걸어댔기 때문이었다. 교감과 학생부장의 조처는 철회되었고, 일주일동안 잠잠해진 수업 시간은 다시 온통 벨소리와 진동 소리, 문자 메시지 소리로 덜덜 떨었다. 당시 의자를 집어던지는 데 체력을 낭비하기 싫어진 추기경은 애들 휴대폰을 뺏아 부술까도 생각했지만, 그러면 목공실에서 시간을 보낼 건덕지가 없어지기 때문에 관두었다. 다시 전화가 사방에서 걸려 왔다. 하얀 얼굴에 사슴처럼 예쁜 소녀들이 교문 앞에서 전화를 걸면, 광택 세차로 반짝반짝 빛나는 와인색 투스카니가 도착해서 냉큼 하나씩 빨아들였다. 이삼 일 후 돌아온 소녀들은 무엇인가 인생에서 중요한 일을 치른 것처럼 한결 숙성한 표정을 지은 채 돌아와 책상 앞에 앉았다.

나 인제 공부해야 돼. 좋은 대학 갈 거야.”

K담임은 여학생들이 성실하게 공부를 하게 만들 수만 있다면, 생판 처음 보는 남자 차를 타고 드라이브라도 하면서, 인생에는 무엇인가 숨겨진 비밀이 있고, 여자는 남자보다 열 배는 더 손쉽게 그 비밀을 풀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으며, 그로 인해 인생의 급상승하는 엘리베이터를 탈 수도 있지만 동시에 바닥 아래의 지하실까지 떨어질 수도 있다는 사실를 깨닫고 오는 것도 괜찮은 거 아닌가라는, 또다시 그로 하여금 양심의 문고리를 잡고 늘어지게 만드는 문제에 봉착했다. 다행히도 문고리 틀이 K담임의 몸무게를 못 이겨 빠지려는 찰나 승표가 찾아와 또다른 문제를 던져주었다. 승표는 너덜너덜해진 문고리와는 별로 상관이 없는 문제였고, 경화 또한 그 문에서 100킬로미터쯤 떨어진 존재였다. , 괜찮지 않겠어? 그까짓 여자애들이 잠깐 놀러갔다 온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겠어?! 한창 애들인데, 안그래(K담임은 사실 이렇게 생각할 시간도 없이 승표 문제에 말려들어갔다)?

 

경화와 남자는 강변 휴게소 파라솔 밑에 앉아 있었다. 배가 고파진 경화는 남자에게 소금을 뿌린 통감자와 커피를 졸라댔다. 새까만 하늘빛을 받은 검은 강물은 꿈틀거리며 누워 있었고 은색 달은 바로 구름을 찢어발긴 직후였다.

이거, 전화는 어떻게 하는 거예요?”

제일 간단한 방법은 착신전환이지만, 그거 말고도 여러 가지가 있지.”

가령 뭐?”

남자는 자기 휴대폰을 꺼내 경화의 것과 나란히 놓았다. 경화는 지켜보았다. 남자가 경화의 휴대폰 1번 버튼과 통화 버튼을 차례로 눌렀다. 몇 초 후 남자의 휴대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신호를 끊고 다시 남자가 자기 휴대폰의 0번 버튼과 통화 버튼을 누르자, 다시 경화의 휴대폰이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경화는 자기 휴대폰을 집어들고 전원을 꺼버렸다. 남자는 커피를 마셨다. 경화는 남자의 휴대폰과 자신의 것을 번갈아 보다가 자기 휴대폰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남자가 말했다.

교장은 뭘 하구 있나. 요새.”

교장은 왜요?”

네가 제일 잘 아는 것 같았어. 학생 중에서는. 그동안 50명이 넘는 여자애들한테 물어봤는데, 교장이 학교에서 뭘 하고 자빠져 있는지 아무도 모르더군.”

그런 건 선생들한테 물어봐야죠.”

선생들이 날 만나면 어떡하겠어? 바로 경찰서에 신고하겠지.”

하긴, 그렇군요.”

네가 선거관리위원장이지?”

경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선거가 언제지?”

아직 안 정해졌어요. 그런데 그런 건 왜 물어봐요?”

입이 가볍나?”

난 친구가 별로 없어서 수다떨 상대가 없어요.”

남자는 끄덕였다.

경화는 생각했다. 애들이 잘생겼다고 난리를 치더니, 뭐 별로 잘생긴 것도 아니잖아. 제법 선이 굵고 남자답게 생긴 건 사실이었다. 나이는 스무 살 안팎으로 보였다. 하지만 어렸을 때부터 힘든 일을 한 사람처럼 고생한 흔적이 얼굴에 있었다. 때가 밴 피부는 거칠고 눈자위가 누르스름했다. 만약 나이대로 대학에 다니거나 손에 때 안 묻히는 일을 하고 있었다면 지금보다 훨씬 어려 보였을 것 같았다.

교장이 요새 뭘 하고 있는지 궁금한데. 알고 있니.”

교장이요? 요새 그 인간이 뭘 하더라? 모르죠. 내가 교무실에 자주 오락가락하긴 하지만 교장이 특별히 뭔가 하고있는 걸 본 적이 없는걸요.”

원래 일 안하고 월급 받는 밥벌레라는 건 알아. 내가 궁금한 건 요샌 무슨 생각을 하는지, 뭘 중요하게 생각하고 무서워하는게 뭔지, 밥은 어디서 먹는지, 같이 다니는 사람은 누군지 그런 것들 말이야.”

경화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 건 왜요?”

왜냐구?”

남자는 의외의 질문을 받은 모양이었다.

누군가에 대해 자세히 알고 싶을 땐 두 가지야. 사랑하거나 증오하거나.”

교장이 미운가봐요.”

난 교장을 죽일 거야. 그래서 정보를 모으고 있어.”

그래요? 잘 생각했네요? 어떻게 죽일 건데요? 재미있겠네요?”

경화는 생각나는대로 내뱉어놓고 바로 후회했다. 남자의 표정이 해괴하게 일그러졌기 때문이었다. 경화는 바로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남자의 얼굴이 조금 풀어졌다.

교장을 죽여서 학교 운동장에 파묻을 건가요?”

그건 아직 모르지만 쓰레기 소각로에 집어넣는 게 더 빠를 것 같은데.”

학교에 소각장 없어요. 그리고 온 동네에 냄새 피우려구요? 그만둬요. 그냥 화단이나 오리 사육장 밑 흙이 부드러우니까 거기에다 묻는 게 나을 걸요.”

교장이 집에 들어가고 나면 죽이기 힘들어. 학교에서 죽여야 돼. 그러니까 말해봐. 학교에서 누굴 만나고, 뭘 먹고 뭘 하면서 지내는지.”

얘기해주면요?”

집까지 태워줄게.”

뭐라구요?”

뭐야, 여기서 집까지 걸어가고 싶어? 차로 두 시간이나 왔는데?”

경화는 머리를 내저었다.

아저씨가 이제까지, 학교 앞에서 납치해간 여자애들 얘기 해주면 나도 교장에 대해 얘기해줄게요. 난 교장이 점심으로 뭘 처먹는지도 다 아니까.”

남자는 야구모자를 벗더니 눈을 또록또록 굴렸다.

난 여자애들 납치해간 적 없어.”

거짓말 말아요. 아저씨 차 타고 사라진 애들이 50명은 넘어요.”

무슨 소리야. 난 그런 적 없어. 기집애들이 내 차를 타고 싶어했지. 별로 좋은 차는 아니었는데도, 여자애들은 차 유리창에 적어둔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어서는 말했지. ‘아저씨 차에 타 봐도 돼요?’ 여자애들은 드라이브를 시켜주면 교장 얘기를 해주겠다고 약속했어. 네가 말한대로 50명 넘게 드라이브를 시켜줬지만 알아낸 건 하나도 없었어.”

정말이에요?”

진짜야.”

경화는 고개를 흔들었다.

남자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는 교장을 죽이고 싶어했고, 정보를 모으기 위해 여학생들을 밴에 태우고 엔진이 닳도록 드라이브를 시켜주었지만 소득은 없었다. 단지 교장은 남자애들의 머리카락 길이를 재는 일 따위는 부장교사들에게 맡겨두고 교장실에 처박힌 채 혼자 점심으로 초밥을 시켜먹으며 지낸다는 것 말고는 소득이 없었다. 교장에 대해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한 남자는 여자애들을 길거리에 내팽개쳤고, 혼자 집으로 터덜터덜 걸어가던 소녀들은 전화 받는 남자보다 훨씬 잘생기고 인생에 대해 몇 수 더 배운 남자를 만나 로맨틱한 모험을 즐기고 온 것 같았다. 경화는 스스로 생각해보았지만 집까지 걸어가다가 엉뚱한 차를 얻어타고 원하지 않는 모험을 즐기는 건 훨씬 재미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먼저 선수를 치기로 했다.

그냥 걸어갈래요.”

?”

걸어간다구요.”

걸어간다구?”

뭐 할 건지 말 안 해주면 걸어간다구요.”

경화는 이렇게 말하면서 머릿속으로 기억의 쓰레기통을 뒤집어서 미친 듯이 흔들기 시작했다. 뭐가 있지? 뭘 말해주면 되지? 전화 받는 남자가 말했다.

내가 뭘 할 건지 말해주면 걸어간다구?”

말 안해주면 걸어간다구요.”

이제까지 태운 애들은 집까지 잘만 걸어갔다구.”

걔네들은 아무것도 몰라요. 그러니까 걸어간 거라구요.”

너도 걸어간다면서?”

난 안 걸어가도 돼요! 왜냐면 뭔가 아니까.”

전화 받는 남자는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그리고 일어섰다.

좋아. 집까지 태워줄게. 당분간 너한테 무슨 일 일어나면 내가 곤란해질 테니까.”

경화는 가방을 끌어안고 일어섰다. 정말로 전화 받는 남자는 경화를 집까지 태워다주었다. 학교 앞에서 태운 여자애를 집까지 고이 모셔다준 건 경화가 처음이었다. 차에서 내리자 밤 열두 시가 넘어 있었고, 휴대폰에는 학원에서 걸려온 부재중 전화가 수도 없이 찍혀 있었다. 너무 피곤해서 알아서는 안 될 것을 알게 되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경화는 휴대폰 배터리를 뽑아버리고 교장 암살 계획을 세운 전화 받는 남자가 연락하길 기다리며 잠이 들어버렸다.

댓글 0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추천 수
공지 2024년 독자우수단편 심사위원 공고 mirror 2024.02.26 1
공지 단편 ★(필독) 독자단편우수작 심사방식 변경 공지★5 mirror 2015.12.18 1
공지 독자 우수 단편 선정 규정 (3기 심사단 선정)4 mirror 2009.07.01 3
406 장편 학교의 살인자(9) 썬펀 2014.06.28 0
405 장편 학교의 살인자(8) 썬펀 2014.06.28 0
404 장편 학교의 살인자(7) 썬펀 2014.06.28 0
403 장편 학교의 살인자(6) 썬펀 2014.06.28 0
402 장편 학교의 살인자(5) 썬펀 2014.06.28 0
장편 학교의 살인자(4) 썬펀 2014.06.28 0
400 장편 학교의 살인자(3) 썬펀 2014.06.28 0
399 장편 학교의 살인자(2) 썬펀 2014.06.28 0
398 장편 학교의 살인자(1) 썬펀 2014.06.28 0
397 장편 네크로포비아 _ 20 (완) 회색기사 2014.05.23 0
396 장편 네크로포비아 _ 19 회색기사 2014.05.23 0
395 장편 네크로포비아 _ 18 회색기사 2014.05.23 0
394 장편 네크로포비아 _ 17 회색기사 2014.05.23 0
393 장편 네크로포비아 _ 16 회색기사 2014.05.23 0
392 장편 네크로포비아 _ 15 회색기사 2014.05.23 0
391 장편 네크로포비아 _ 14 회색기사 2014.05.23 0
390 장편 네크로포비아 _ 13 회색기사 2014.05.23 0
389 장편 네크로포비아 _ 12 회색기사 2014.05.23 0
388 장편 네크로포비아 _ 11 회색기사 2014.05.23 0
387 장편 네크로포비아 _ 10 회색기사 2014.05.23 0
Prev 1 2 3 4 5 6 7 8 9 10 ... 26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