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자오랑은 숨을 죽였다. 저택과 기업의 거리 밑으로 잘게 나누어진 두더지 굴이 있을 줄은 상상도 못하였다. 허 씨 집안의 공중정원 밑으로 파인 굴들 중 하나. 희미한 빛은 조용히 전자음을 내고 있었다. 컴퓨터 한 대와 책들, 지도와 지저분한 종이들. 전선들이 얽혀 발을 감는 바닥과 한 쪽 벽을 덮고 있는 천막 하나. 자오랑이 천막을 들춘다.

 

[诸吉]

(젠장!)

 

코를 막아 숨을 참았다. 역한 냄새. 손전등을 비춘다.

 

[我的天]

(맙소사.)

 

드디어 찾았다. Well Life 사의 안드로이드. 허 씨 집안의 저택에서 사라진 안드로이드. 인간처럼 만들어지고 의식이 덧입혀진 시제품.

 

괴...로...워...요....

 

삐걱거리는 관절과 머리가 없는 바이오로이드 몸체 하나. 그녀의 척추에 남겨진 연산 장치의 부품들이 간신히 그녀의 마지막 남은 의식을 출력 단말기로 글자를 찍어 보내고 있었다. 온 몸의 곳곳이 분해되고 재조립된 나노하 가문의 아가씨가 수술용 의자에 묶이고 감겨 있다. 자오랑은 그녀의 앞에 설치된 통신용 단말기를 두고 말을 걸었다.

 

[陽子先生,是你吗?]

(요코 씨인가요?)

 

살....려....

 

자오랑은 제 귀를 두드려 통역 장치를 작동시킨다. 그의 입에서 일본어가 튀어나온다.

 

[陽子さん?]

(요코 씨?)

 

.........

 

살려줘살려줘살려줘살려줘살려줘살려줘살려줘살려줘살려줘살려줘살려줘살려줘살려줘살려줘살려줘살려줘살려줘살려줘살려줘살려줘살려줘살려줘살려줘살려줘살려줘살려줘살려줘살려줘살려줘살려줘살려줘살려줘살려줘살려줘살려줘살려줘살려줘살려줘살려줘살려줘살려줘살려줘살려줘살려줘살려줘살려줘살려줘살려줘살려줘살려줘살려줘살려줘살려줘살려줘살려줘살려줘살려줘살려줘살려줘살려줘살려줘살려줘살려줘살려줘살려줘살려줘살려줘

 

자오랑은 단말에서 눈을 떼어 주위를 빠르게 두리번거렸다. 호출기를 눌러 선배가 자신을 찾아주기를 바랐다. 혼자의 힘으로는 무리이다. 자오랑은 땀이 베어 옷자락으로 손을 닦았다. 주위로 떨어진 책과 종이들을 들춘다.

 

‘인간에 대하여.’

 

‘의식과 인지’

 

‘인지학개론’

 

‘의식이란 무엇인가’

 

자오랑은 이마에서 흐르는 땀을 닦으며 굴속의 모든 정보들을 기억하려하였다. 누군가 이곳에서 요코를 두고 의식에 대해 연구하였다. 종이들. 펜과 어지럽혀진 글자들. 자오랑이 그림처럼 휘갈겨진 글들을 훑어보았다.

 

‘인간과 안드로이드.’

 

땡그랑.

 

손전등의 불빛을 정면으로 비춘다. 어두운 굴속으로 희미한 전자음만이 한쪽에서 얌전히 굴러가고 있다. 자오랑은 다시 종이들을 훑고 바지춤으로 쑤셔 넣었다. 연구의 흔적이 보인 글들이 공통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 공통적으로 원하고 있는 것.

 

[어머.]

 

자오랑의 몸이 굳는다. 서있는 자세 그대로 그 기괴한 안드로이드에게로 몸을 돌렸다. 남청색 치마에 삐뚤어지게 쓰인 넓은 챙의 모자. 얼룩들이 진 소매와 거꾸로 뒤집힌 채 끼어진 하얀 장갑.

 

[인간이 여기 올 거라고는 생각을 못했는데요.]

 

자오랑이 떠보았다.

 

[ここでは何をしても見付かりません, そうですよね?]

(여기서는 무얼 해도 들키지 않을 테지.)

(안 그래?)

 

통역 장치가 그대로 켜져 있었다. 자오랑이 당황한 얼굴로 귀를 매만지고 있자 단이가 답한다.

 

[そうです]

(그럴 테죠.)

 

[日本語もできるんですね。]

(일본어도 할 줄 아나보지.)

 

[あの方のおかげです]

(저 분 덕분에요.)

 

흉측하게 분해되고 껍데기들이 여러 조각으로 분해된 Well Life 사의 시제품. 그녀의 단말기에는 소리도 없이, 아직까지 비명소리가 찍히고 있었다.

 

[廃棄されます。]

(폐기될 거야.)

 

[私ですか?]

(저 말인가요?)

 

[Well Lifeの会社のアンドロイドは人間......]

(Well Life 사의 안드로이드는 인간으로.....)

 

[人間として扱われています, 知っています。]

(인간으로 취급되죠.)

(알아요.)

 

단이가 품으로 안아들고 있던 허 백을 벽으로 기대어 눕힌다. 자오랑은 백을 보며 머리를 굴렸다. 빠져나가야 한다. 살아야 한다. 호출기의 버튼을 연신 딸칵 거렸다. 선배가 알아채야 한다. 그가 자신을 구하러 올 때까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アンドロイドは感情や意識を持つことができません。]

(안드로이드는 감정이나 의식을 가질 수 없어요.)

[残念ながら全て決められた通りに動くだけです。]

(안타깝게도 모두 정해진 시스템대로 움직일 뿐이죠.)

 

[今も決まった通りに行動しているんですか。]

(이 행동도 정해진 시스템인가?)

 

[あら。]

(어머.)

 

단이의 정원용 가위가 자오랑에게로 향한다.

 

[住みたいようですね]

(살고 싶으신가 보군요.)

 

자오랑이 뒤로 감추어 달칵거렸던 호출기 단추에서 손가락을 떼었다. 그는 여유를 가지려 애를 썼다.

 

[生存は人間の原始的な本能だからです。]

(생존은 인간의 원초적인 본능이라서 말이야.)

 

[うらやましいですね]

(부러워요.)

 

단이의 가위는 내려가지 않는다. 그녀가 자오랑에게로 걸음을 옮긴다. 가윗날이 다가온다.

 

[私たちもそのような本能と意識を持つことができたらどれだけよかったでしょうか。]

(저희도 그런 본능과 의식을 가질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자오랑이 뒷걸음질 치며 주변으로 고개를 돌린다. 살아야한다. 수술대 위의 요코가 몸을 비튼다. 팔다리가 없어 애벌레처럼 꿈틀대는 그녀를 보며 자오랑은 품에 감추었던 종이들을 앞으로 꺼내 보인다.

 

[この研究!]

(이 연구!)

 

연구가 말하고자 하는 것. 연구가 원하는 것.

 

[人間になるためにこんなことを企んでるんですか。]

(인간이 되기 위해서 이런 짓을 꾸미는 거야?)

 

단이가 활짝 웃어 보인다.

 

[それは重要ではありません。]

(그건 부차적 인거예요.)

 

가윗날이 자오랑의 목덜미를 감싸고 잠시 멈춘다. 숨이 막힌다. 단이가 말한다.

 

[私の目標は恋をすることです。]

(제 목표는 사랑을 하는 거예요.)

[分かりましたか?]

(알겠나요?)

 

그녀가 띄운 미소가 그치질 않는다. 고장 난 테잎의 반복처럼, 고장 난 레코드판의 반복처럼.

 

[彼を愛したいです, 心をつくして。]

(그를 사랑하고 싶어요, 마음을 다해서.)

 

 

 

 

한거정은 연신 깜빡이는 호출기의 불을 내려놓고 남자의 눈을 노려보았다. 팔이 꺾인 채 자신의 다리 밑에서 저항하는 그에게 한거정이 묻는다.

 

[这是干什么的地方?]

(시에라 클럽은 뭘 하는 곳이지?)

 

한거정의 무릎에 짓눌려 괴로워하는 남자가 숨을 토해내었다.

 

[통역장치나 켜!]

 

한거정이 제 귀를 두드렸다.

 

[여기서 무얼 하고 있는 거지?]

 

[그냥 사교 모임이야, 그게 다라고!]

 

남자의 꺾인 팔을 무릎으로 짓누르고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한거정은 남자의 위에서 담배를 말아 불을 피웠다.

 

[젠장, 이럴 권리는 없어!]

[영장 가져와!]

 

[누구라고?]

 

[LT기업의 한서, 무례하게 굴지 말고 내려가!]

 

연기를 뿜으며 한거정은 토로하듯 불평어린 목으로 중얼거렸다.

 

[나노하 기업의 회장이 죽은 건 알고 있나?]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지?]

 

[因为这和我们的关系有关]

(상관이 있으니 왔지.)

 

[뭐라는 거야.]

 

팔이 꺾인 채 버둥거리는 사내를 눕히고서 한거정은 클럽의 탁하고 노랗게 물든 원색의 내부를 눈으로 훑었다. 시대에 맞지 않는 가스등에 라디오, 골동품들과 지난 세대의 물건들. 허 씨 저택에서 자오랑이 해주었던 말을 떠올렸다.

 

[没有植物啊 ]

 

[뭐?]

 

한거정이 귀를 두드린다.

 

[식물학자들의 클럽이라고 하지 않았나?]

 

청년은 비아냥 거렸다.

 

[왜, 이젠 가입 원서도 넣고 싶어졌나?]

 

한거정이 청년의 팔을 짓누르고 있던 엉덩이로 무게를 실었다.

 

끄아아악.

 

나노하 가의 기업 내 살인사건은 기업 경찰들의 일이었다. 그런 그들이 기업의 잡역부나 다름없는 안드로이드 전담 현장 보고 팀들에게 연락을 두루 넣었다. 자세하게 말해주지는 않았다. 다만 나와 연이 닿은 기업 내의 연락책이 정보를 몇 개 넘겨주었다. 회장을 살해한 건 안드로이드다. 누군가가 사주하거나 조종한 것으로 조사하고 있으나 수상해 보이는 증거들이 몇 개 있다.

 

그녀는 정보를 넘겨주며 공생에 대해 말해주었다. 물론이다. 밥 정도는 살 수 있겠지. 한거정은 단도직입으로 입을 열었다.

 

[재키라는 게 뭔가?]

 

[뭐?]

 

한거정이 몸을 돌려 그의 머리맡으로 허리를 숙였다. 청년은 밑에 깔린 채 연신 비명만을 질러대었다.

 

[살인 현장에서 안드로이드들이 재키를 찾더군.]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군.]

 

익숙하다. 마치 영화나 만화의 한 편, 한 장면처럼. 자신이 소설 속의 주인공으로 생각하지는 않는다. 한거정은 그저 맡은 일을 처리하고 싶을 뿐이었다.

 

기업 경찰들이 안드로이드들을 찾고 있다. 재키를 찾고 있다. 그리고 재키가 한 기업의 거리에서부터 흘러나온 괴담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출처가.

 

[여기야.]

 

[뭐?]

 

한거정은 폭주한 안드로이드들을 제압할 때 쓰는 진압봉을 펼쳐 들었다.

 

[앞으로 뭐, 왜, 몰라와 같은 대답을 쓸 때마다 한 대 씩 가격할 거야.]

 

[뭐?]

 

퍽.

 

윽.

 

[자, 말해.]

 

[젠장!]

 

[재키라는 게 뭐지?]

 

[모른다고!]

 

퍽.

 

[정말이야.....]

 

[좋아, 질문을 바꾸지.]

 

지루한 싸움에는 소질이 있었다. 끈질기게 달라붙어 상대의 진이 먼저 빠지기를 기다릴 수 도 있다. 하지만.

 

[干!]

(젠장!)

 

호출기의 불이 쉴 새 없이 반짝거린다. 빛이 바지춤에서 빛을 점멸하여 정신이 사나왔다. 한거정은 마지막 질문을 할 기세로 호통을 쳤다.

 

[극단적인 인권단체 시에라 클럽, 여기서 테러를 감행 한 건.]

[이번 한 번이 아니지?]

 

청년이 입가로 침 거품을 흘리며 허파로 공기를 빼었다.

 

[지랄.]

 

한거정의 손이 올라가나 멀리로 웅성거리는 소리가 다가온다. 분명 LT기업의 기업 경찰들일 것이다. 신음을 흘리는 그를 내팽겨 치고 클럽의 밖으로 달음질 쳤다. 호출기의 빛이 점멸하지 않는다. 골목과 기업 거리를 내달리며 한거정은 성을 낸다. 그의 숨이 가프다.

 

[会发生什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야!)

 

한거정이 지난 안드로이드 실종 건이 있던 허 씨 집안의 저택으로 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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