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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 꿈속의 숲 -1. 만남

2020.04.01 21:0904.01

1. 만남

오랜만에 깊은 숲속에서 노숙하며 타오르는 장작을 바라보고 있으라니, 어렸을 때 읽었던 소설책이 생각났다. 어두운 밤이라 잘 보이지도 않는 작은 벌레들이 시도 때도 없이 몸 위로 기어오르려는 일만 아니었다면 나머지는 참을 만했다. 새카만 하늘에 박힌 보석 같은 별들, 건조된 식량과 따뜻한 차, 장작 타는 소리에 기분이 몽글몽글했다. 모닥불을 뒤적거리며 찾은 다 탄 장작을 적당한 크기로 잘라 물통에 넣고 물과 같이 갈아 먹 대용으로 삼아 글을 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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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버지의 세책방엔 아직 내가 읽을 수 없는 문자만 빼곡한 책들도 있었지만, 주를 이루는 것은 부인들에게 인기가 많은 화책이다. 아버지가 책을 팔러 가시면 내가 손님들을 응대했다. 그 덕에 손님이 없을 땐 몰래 그림책들을 빼 읽을 수 있었다.

 그러다 손님들이 오는 것을 잊고 푹 빠져버린 적도 있었다. 그땐 손님들이 큰 소리로 주인장을 찾아 아버지께 손님을 제대로 보지 않는다고 꾸지람도 듣곤 했다. 운이 좋으면 지식을 뽐내고 싶은지, 어린 애가 책을 가까이하는 것이 신기한지 화책 위에 간단한 글자를 알려주고 가시는 선비님도 있었다. 그런 날은 온종일 그 글자만을 들여다보며 뜻을 잊어버리지 않으려고 용을 썼다. 

 꼬박꼬박 책을 읽고, 날이 갈수록 쉬운 소설책 정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어려운 단어들이 나오면 수 좋게 손님네들에게 물어보는 비결도 생겼다. 단골손님들은 허허 웃으며 알려주고 짓궂은 손님들은 자기도 읽어보았는데 결말은 이렇더라, 하고 쏙 내빼기도 하였다. 몇 번의 경험으로 소설책을 싫어할 것 같은 선비님들에게는 점잖은 책에서 똑같은 글자를 찾아 물어보다가 서책에 얽힌 역사에 대해 길고 긴 일장 연설을 들었다.

 많은 책 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했던 책은 떠돌이 무사들이 정의를 구현한다던가, 뛰어난 두뇌로 억울한 사람들의 누명을 벗겨주기도 하고, 괴물들을 잡는 등의 이야기였다. 읽었던 책이더라도 몇 번씩 읽기도 하고 장터에서 이야기꾼이 같은 책을 읽어 준다 하면 가게를 빠져나가 꾼의 이야기 솜씨를 경청하였다.

 그러다 보니 저절로 장터에 모여있는 떠돌이 무사들을 동경했다. 그 뒤로 장터에 나가 떠돌이 무사들이 하는 양을 관찰하기도 하고, 그들이 하는 허풍 섞인 이야기를 귀담아들으며 상상을 키워나갔다. 무사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소설 속 이야기가 대부분 과장인 경우가 많았지만 아예 없는 얘기도 아니라서 상상에 살을 붙일 수 있었다.
 
 계절이 돌고 돌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시고 나서는 내가 세책방을 물려받았다. 세책방을 위해 더욱 다양한 책을 보아야 했다. 그러다 다른 나라들의 책에도 관심을 가졌고 어릴 적 내가 글을 배웠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외국어도 배우기 시작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책을 필사하고 이곳저곳을 방문하여 책을 팔거나 대여하는 하루가 반복됐다. 점점 어릴 적 상상은 옅어져 가고 힘겨운 세상에 부딪히며 살아야 했다. 

“여기 주인장 계십니까.”

 흔치 않은 듣기 좋은 중저음의 목소리에 멍한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는 엉거주춤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갔다. 찾아온 손님은 이국적인 외모에 떠돌이 무사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칼이나 옷가지 등이 고급스러워 벌이가 썩 괜찮은 무사처럼 보였다.

“아, 예! 어떤 책을 보러 오셨는지요?”

“책도 책이지만, 부탁드릴 것이 있어서 왔소.”

“부탁이라면?”

 세책방에서 책보다 부탁이라니? 떠돌이 무사가 세책방을 찾을 때부터 이상하다고 생각은 했지만, 이상한 용건에 새로운 잡상인인가 싶어 저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내 염려가 얼굴에 다 드러났는지 손님이 빙긋 웃었다.

“별건 아니고, 근처 주막에서 아침을 먹는데 여기 세책방 주인이 모르는 언어가 없는 수재라 던데.”

“아휴, 몇 가지 간단하게 하는 정도이지. 장터 사람들이 원래 과장된 말을 좋아합니다.”

 갑자기 들어온 칭찬에 괜히 어깨가 으쓱했다. 부탁이라는 것이 외국어를 물어보는 것이라니 마음도 누그러졌다. 알면 아는 것이고 모르면 모른다고 답하면 될 일 아닌가.

 나는 무사를 안으로 들여 우선 자리에 앉으라 권했다. 무사는 앉은 자리에서 주위를 휘 둘러보았다.

“조금 둘러보니 과연 여러 나라의 책들도 보이고. 헛소문은 아니군요.”

 무사는 옷 품 안에서 비단 주머니를 꺼내더니 그 안에서 작은 쪽지를 하나 건네주었다.

“꼭 해석하진 않아도 좋으니 어느 나라 언어인지 정도 추측해볼 수 있겠소?”

“흠.”

 나는 무사가 준 쪽지를 들여다보았다. 낡긴 했지만 생전 처음 보는 질 좋은 종이었다. 앞면에는 두 줄 정도의 짧은 글이 쓰여 있고 뒷면엔 화려하고 이국적인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생소하면서도 어디서 본 듯도 한 글자였다. 혹시나 해 책을 쌓아두었던 궤 속을 한참을 뒤적거렸다.

“아, 여기 있네.”

”뭔가 찾은 게 있소?“

 그자는 정말 큰 기대 없이 왔는지 내 말에 놀란 표정으로 나와 내가 든 책을 번갈아 보았다. 

”너무 기대는 하지 마십시오. 그저 비슷하게 생긴 글자라 도움이 될까 싶어 들고 온 겁니다.“

”좀 볼 수 있겠소?“

 나는 무사에게 책을 내밀자 무사는 책과 쪽지를 휙 채가더니 황급히 둘을 비교해 보기 시작했다.

”상당 부분 같은 것으로 보이는데. 그대가 보기엔 어떻소?“

 책을 살펴본 무사는 흥분한 듯이 몸을 내 쪽으로 바짝 당겨 물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뒤로 몸을 당겼다. 이 사람은 원래 이렇게 감정이 시도 때도 없이 바뀌는 사람인가, 나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답했다.

”일개 책 장수가 이렇다, 저렇다 할 수 없지만 제가 볼 때도 같아 보입니다.“ 

”그럼, 이 쪽지를 해석할 수 있겠소?“

”자료만 충분히 있다면야 해석이야 할 수 있겠습니다만. 근데 이런 건 저보다 뛰어난 학자님네들이 있을 것이고 손님 같은 분이라면 쉽게 그런 분들을 뵐 수 있을 것 같은데.“

 내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그자는 서둘러 말을 자르고 들어왔다.

”장사꾼이 그 정도 보았으면 뒷말은 삼가야지. 그래서, 언제쯤 되겠소? 값은 충분히 치르겠소.“

 그 말을 들으니 섬뜩했다. 이 쪽지가 무엇이길래 쉬운 길을 두고 빙빙 돌아 이 장터까지 왔을까, 소설에서만 보던 일들이 벌어지는 것일까. 흥미진진하기보다 다 꿈이었으면 싶어졌다. 나는 아무것도 없는 장사치일 뿐인데.

”쪽지는 한 두 줄 정도니 쪽지만 해석한다면 해석 자체는 금방 하겠지만 자료가 없다면 다 헛일이지요. 이 작은 마을에서는 자료를 찾기 힘들 것 같습니다.“ 

 나는 잔뜩 긴장하면서도 끝까지 할 말을 뱉어냈다. 그자는 한참 고민하는 듯 책과 쪽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나를 쳐다보았다.

”이 책을 샀다는 것은 주인장은 해석할 자료가 있다는 거 아니오?“

”아쉽지만 저도 해석할 자료를 구하지 못한 책입니다. 이 책을 판 상인이 말하기로 사라진 나라들의 신화를 모은 책이라 하여 저도 흥미가 동해서 산 책입니다만. 저도 살길을 찾다 보니 잊어버렸지요.“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자 그 무사는 내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한참 책을 쳐다보며 아무 말이 없었다. 긴장감이 감도는 침묵 속에서 나는 어서 이 자가 다른 방도를 찾으러 떠나거나 이 책만 가지고서 가주었으면, 하고 바랐다.

 내 기대와는 달리 무사는 난데없이 빙긋 웃으며 일어났다. 아까까지 난처한 얼굴로 고민하던 얼굴이 삽시간에 티 없이 펴지고 망설임 없이 문간으로 다가가는 무사를 멍하게 쳐다보았다.

”얘기가 길어질 것 같으니 점심이라도 먹으면서 얘기하는 건 어떻소?“

 머뭇거리는 나를 보더니 무사는 씩 웃고는 문고리를 잡아 열었다. 문 사이로 비집고 들어오는 여름 햇빛은 강렬했다. 나는 갑자기 들어온 빛에 눈을 저절로 찌푸렸다. 무사는 미적거리며 움직이지 않는 나를 보고는 픽 웃더니 말했다.

”안 잡아먹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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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로 본론에 들어갈 줄 알았더니 음식을 먹으면서 본인이 겪었던 해괴하고 웃긴 이야기들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술이 한두 모금 들어가니 나도 긴장이 풀려 이젠 그자의 손짓 한 번에 뒤로 넘어갈 듯이 웃기 시작했다.

”이런, 동생이 많이 취했구려.“

”아휴, 술이 오랜만이라. 부끄럽습니다.“

 어느새 언니, 동생 사이를 맺어 돈독해졌다. 술이 한 두잔 더 들어가니 진중한 이야기를 하는 것 같은데 귀에 들어오지가 않았다. 누가 어떤 말을 하던 스스로 몸을 가눌 수가 없었다.

 나는 주체할 수 없이 무거워진 머리를 푹 숙이고 뭐에 홀리기라도 한 듯 입이 저절로 움직여 속마음을 웅얼거리기 시작했다. 언니는 이제야 내 상태를 알아챘는지 내가 술을 마시는 것을 제지했다. 내가 술을 더 마시면 큰일 난다며 내 어깨를 부축해 다시 세책방으로 돌아갔다.

 언니는 세책방에 나를 눕혔다. 나는 자리에 눕자마자 휘몰아치는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잠에 빠져들었다.

”깼는가? 이거, 원. 동생은 영 장사꾼과는 하나도 안 어울리는먼.“

 언니는 어디서 찾아 만들었는지도 모를 꿀물을 타와서는 나에게 한 잔 내밀었다. 울렁거리는 속과 찢어질 듯한 두통에 앓는 소리를 내며 꿀물을 들이켰다.

”감사합니다.“

 죽다 살아난 사람처럼 겨우 목소리를 쥐어짜 중얼거렸다. 언니는 호탕하게 웃더니 내 어깨를 세게 탁탁 치며 말했다. 꿀물로 진정된 줄 알았던 속이 다시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미안하네. 그저 긴장을 풀고 대화하려고 한 것이었는데 그렇게 취할 줄은.“

”웩!“

 나는 언니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뒷간으로 달려가 어지러운 속을 다 게워내었다. 언니는 허둥지둥 나를 따라와서는 혀를 끌끌 차며 내 등을 두드려 주었다.

”참, 죄송합니다.“

 속을 비워내고 나니 서서히 정신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지금 몸 상태로는 죄송하다는 말밖에 할 수가 없었다.

”됐으니 좀 쉬게. 사람이 쓸데없이.“

 힘없이 걸어가느라 언니와 간격이 벌어져 뒷말을 듣지 못했다. 무슨 말을 했는지 물어보려 고개를 살짝 들었다가 그럴 힘도 없어 다시 들어가 쓰러지듯이 누웠다.

il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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