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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편 도둑마을

2017.03.24 15:1903.24

도둑마을




그냥 지나가는 길이었다. 특별한 볼일이 없이 지나가는 길이었으므로 그저 한눈으로 보고 스쳐 지나가도 붙잡거나 섭섭해 하지 않을 마을이 분명했다. 그런데 한가운데를 지날 즈음 마을 이름과 동시에 한 사람의 얼굴이 머리에 떠올랐던 것이다. 십 수 년 전 군대에서 만나 꼬박 3년을 같이 보낸 친구였다. 군에서 3년쯤 동기로 같이 지내다 보면 아무리 싫어도 형제 간과 같은 관계가 생기기 마련이다. 물론 언제나 돈독하고 우애가 넘친다는 얘기는 아니다. 매일 싸우고 평생을 미워하며 살아가는 형제도 있는 법이니까. 요컨대 그 기간만큼은 애증의 진폭이 여느 형제 못지않게 깊었다는 말이다. 3년이란 제한된 기간이지만 휴가 때를 제외하고 부대에서 매일 옆자리에서 자고 같이 밥 먹고 참호 파고 눈 치우고 점호 받고 훈련받고 행군하고 똥 누고 지냈으니 그 기간만큼은 형제보다 가까이 지낸 셈이다. 그러는 동안에 그 친구에게서 자주 들었던 마을 이름이 도말리였다. 그가 태어나고 자란 고향이었다. 특이한 내용은 없었던 것 같다. 그저 평화롭고 살기 좋은 시골 마을에 대한 묘사였다. 대개 외지에 나가 오래 지낸 사람이 고향에 대해 갖고 있는 이상향적 그리움의 심상, 그게 재현적이든 창의적이든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살인자들의 마을이든 쓰레기 마을처럼 특이한 게 아닌 한 그 이미지는 엇비슷하게 아름답고, 당연히 진부하며 추상적이었다. 도시에서 나고 자란 나에게는 동서의 유명 화가들이 제공한 고향 이미지의 목록에 그 친구의 고향 도말리도 끼워넣은 것이다. 그러니 어느 시골마을을 보아도 알아보지 못할 것은 당연했다. 다만 하도 많이 들어서 인이 박히듯 머릿속에 새겨진 도말리라는 이름은 세상 어딘가 있을 어느 한 마을에 대한 표지가 되었다.

제대한 지 십오 년이 지나고 나서 그저 지나가다 발견한 마을 도말리. 마을이 속한 도나 군이 동기에게서 들은 기억과 크게 어긋나지 않으니 오래된 친구의 고향이라고 일단 점찍어 두어도 될 듯 싶었다. 그러자 제대하던 날 술집에서 언제 한번 찾아오라고 신신당부하던 친구의 모습과 그 앞에서 크게 고개를 끄덕이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그저 술에 취해 머리를 흔들흔들 한 것인지 그의 고향을 방문해 보겠다는 생각이 조금은 있었는지 알 수 없으나 약속은 약속이었다. 물론 약속에도 급이 있는 까닭에 막연한 약속에 구애되어 그 동안의 삶에 금이 가거나 앙금이 가라앉아 있을 리는 없었다. 15년이나 지난 후에 새삼 떠올렸어도 말이다. 하지만 그토록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 그 이름을 접하자 슬그머니 오랜 약속이 떠올랐으니 그 약속이란 깃털처럼 가벼운 것인가, 잠재의식 속에서도 꿈틀거릴 만큼 질긴 것인가.

어쨌거나 나는 원래 스쳐 지나가는 마을이 그렇듯 다시 찾아올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판단 때문에 오래되고 가볍고 질긴 약속을 지키기로 마음먹었다. 조금만 노력하면 사람 하나쯤 찾는 일은 문제도 되지 않을 듯한 마을의 규모도 그런 결심을 하는데 한몫 했다. 하지만 아뿔싸! 아무리 생각해도 그 친구의 이름을 기억할 수가 없었다. 혀끝에서 맴도는데 좀처럼 떠오르지 않는 아슬아슬하고 간당간당한 그런 이름이 아니라 아예 처음부터 몰랐던 것 같은 새카만 이름을 눈앞에 두고 나는 친구를 방문해 봐야겠다는 결심을 십초 만에 번복해야 할지 망설였다. 이름이 기억나지 않더라도 주소나 연락처, 또는 그 일부라도, 그게 없으면 마을에서 그가 사는 집의 대략적인 위치나 쉽게 알아볼 수 있는 건물, 평범하지 않은 언덕 혹은 나이 많은 나무에 대한 스케치라도 있었다면 금방 결심을 뒤집네 마네 하는 마음의 시계추를 흔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역시 애초의 생각대로 그냥 지나쳐버리는 게 상책일까. 그 친구가 아직 고향 마을에 살고 있는지도 알 수 없고 말이지. 하지만 역시 나로 하여금 망설이게 한 요인은 마을의 규모였다. 이삼백호 가량 되는 마을이라면 주민들이 대개 조금씩은 서로 알고 지내지 않던가. 이름을 모르면 얼굴이라도, 얼굴을 모르면 집안이라도 한 조각쯤은 알고 있기 마련이리라. 적어도 마주치는 사람들 셋 중 하나는. 그렇게 점점 많은 사람을 만나 대화를 나눌수록 옛 친구에 대한 정보를 모을 수 있고 점점 더 가까이 갈 수 있으리라. 하지만 나는 친구에 대한 단서를 얼마나 내 놓을 수 있는가. 이름은 모르니 당연히 말할 수 없고 나이는 나와 거의 같을 터이니 사십은 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중요한 체격이나 생김새는……. 저절로 떠올랐을 때는 알 듯도 싶었는데 일부러 환기시키려 하자 맹점인 듯 모든 이미지가 뭉개져버렸다.

어이가 없는 기억이요 약속이었다.

그렇게 막막했지만 운이 없지는 않았다.

한적한 공터에 차를 세워두고 마침 지나가는 사람을 불러 세우려는 찰라 그 사람과 나는 눈이 마주쳤고 순간적으로 눈빛이 의아해졌다가 휘둥그레졌고 동시에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 절로 안으로부터 끌려 왔다. 그와 나는 서로의 표정과 행동을 거울처럼 재현했다. 그건 둘이 동시에 같은 느낌에 사로잡혔다는 뜻일 것이다. 우리는 서로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어 어, 했다가 다시 여, 여! 했다. 그러다 결국은 손을 거두어들이지 못한 채 악수를 하고 말았다.

"정말 오랜만이군."

"그래, 오랜만일세."

그 친구였다. 한데 이건 십 수 년 만에 처음 옛 친구를 (또는 애인을) 떠올린 순간 그 친구가 눈앞에 나타났다는 기막히고 그레이트하게 우연한 설정을 한 잘 팔리는 소설의 플롯과 흡사하지 않은가.

"이게 얼마만이지?"

"십오 년이 넘은 것 같은데?"

"그렇지?"

"그런데 어떻게 여길?"

"이곳은 우연히 지나게 된 거고 지나다 보니 생각이 나서."

"아 그렇군. 하기야 우리 마을은 일부러 찾아올 만한 곳은 못되지."

"여기도 나름대로 괜찮군."

"사람이 모여 사는 곳이란 각기 괜찮은 구석이 있다네."

"그래. 그 때 고향으로 내려간다고 했던 거 같은데 죽 여기 있었나?"

"웬걸. 잠시 내려와 있다가 타지에서 몇 년 보내고 또 내려와 지내고 그렇게 몇 번을 반복하다 오 년 전 처자식 다 데리고 내려와 정착했네."

"그 동안 고생이 많았나 보군."

"다들 하는 일이니 고생이랄 것도 없지."

"그럼 아이들은?"

"열두 살, 열한 살, 여덟 살 이렇게 셋이라네. 막내가 아들이고 위의 연년생 둘은 계집애들이지."

"그렇군."

"그래 어디 가는 길인가?"

"아, 남쪽으로 가는 길이었지."

"남쪽이라면, 바다?"

"뭐 그런 셈이지."

"중요한 일인가?"

"꼭 그렇지는 않아. 중요하다면 중요할 수도 있지만……."

"생각하기에 따라 다르다는 얘긴가?"

"그렇게 되는군. 떠나올 때는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했거든."

"그럼 지금은 어떤가?"

"지금은 덜 중요하게 여겨지는군."

"그래? 그럼 우리 집에서 좀 쉬었다 가도 되겠네. 나눌 이야기도 적잖을 텐데."

"폐가 되지 않는다면."

"폐라니 그 무슨 섭섭한 소린가? 우리가 그런 사이였던가."

"그렇지."

즉각 대답하고는 '그런 사이'란 도대체 어떤 사이를 말하는 건지 잠시 헷갈렸다.

그 자리에 서서 셔틀콕을 토스하듯 툭툭 대화를 나누는 동안 나는 그의 이름을 떠올리기 위해 머릿속 구석구석을 다 뒤적였다. 그럼에도 그의 이름은 여전히 안개 속에 있었다. 나는 어째 이런 일이, 하고 당황스레 연신 생각의 바늘 끝으로 측두엽을 두드리고 편도체를 쿡쿡 찔렀지만 표정은 태연했다. 내 표정이 태연했는지 어떻게 알 수 있느냐고? 그건 오랜 세월 후에 해후한 옛 친구의 표정을 보면 알 수 있는 일이었다. 대개의 감정이란 거울과 같아서 마주보고 있으면 거의 같은 표정을 보여주기 마련이다. 옛 친구의 표정이 태연했기에 그를 보고 있는 내 표정도 태연했다. 마찬가지로 내가 친구의 이름을 떠올리지 못해 초조해 있었듯 친구 역시 내 이름을 기억해내지 못했음이 분명했다. 성이라도 알게 되면 대화 분위기가 좀 더 나아질까? 김일병, 최상병, 오병장 등 여러 경우의 조합을 떠올리며 머릿속에서 굴려 보았지만 눈앞의 인물과 매치되는 게 없었다. 오히려 엉뚱한 얼굴과 몸뚱이들이 불쑥불쑥 튀어나왔다 눈을 흘기고 사라져갔다.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희성인가, 이를테면 알씨 같은. 아니 알, 씨도 방금 생각해 버렸으니 그보다 더 심한, 흑씨? 이것도 아니구나. 멍씨? 떫씨? 쫤씨? 그만 하자.

불현듯 우리는 서로의 이름을 끝까지 모른 채 다시 헤어지는 게 아닐까 하는 예감이 들었다. 대놓고 물어보지 않는다면 말이지. 하지만 그가 먼저, 미안한데 자네 이름이 뭐였더라? 하고 물으면 미안하긴, 나 아무개일세. 하도 오랫동안 보지 못해 잊은 모양이군. 그러는 자네는? 이렇게 실마리를 풀어나가는 게 자연스러워 보였으므로 내가 먼저 물어볼 일은 없을 것이다, 아마.

"그럼 이제 우리 집으로 가지."

"집이 여기서 먼가?"

"그렇게 멀지는 않아. 한 10분 정도만 걸으면 돼. 왜?"

"차가 있어. 오래된 놈이긴 해도 이왕이면 가까이 두는 게 나을 거 같아서."

"그야 당연한 말이지. 눈에서 오래 떨어져 있으며 잃어버리기 십상이네. 그럼 내가 앞서 갈 터이니 자네는 천천히 따라오게."

"그보다는 같이 타고 가며 자네가 방향과 위치를 알려주는 게 낫지 않겠나?"

"그럴까?"

우리는 차를 타고 그의 집으로 향했다.

그의 집은 도말리의 중심부에서 남서쪽으로 10분 거리에 있었다. 중심부라고 해 봐야 차가 다닐 수 있는 도로 주변에 가옥이 밀집해 있을 뿐 특별히 번화가라고 할 만한 곳은 아니었다. 밀집해 있다는 것 또한 양쪽 길 가에 집들이 한두 줄 이 빠진 듯 늘어서 있는 것이 전부였다. 그곳을 벗어나면 역시 집들이 띄엄띄엄 제 있고 싶은 곳에 서 있는 듯 보였고 그 중의 하나가 친구의 집이었다. 띄엄띄엄 서 있었으므로 당연히 그 주변은 잡초나 자라는 공터이거나 고추와 깨, 호박 따위를 심어놓은 작은 텃밭이었다.

친구의 집까지 가는데 걸린 시간은 걸어가는 것만큼이나 오래 걸렸는데 그것은 운전해 가면서 뭐 사들고 갈만한 가게를 찾기 위해서였다. 마을 규모가 그리 크지 않으니 큰 점포나 공판장은 없다 해도 슈퍼나 구멍가게 정도는 있지 않을까 싶었다. 하지만 어떤 가게도 발견하지 못한 나는 답답한 마음에 물었다.

"이 마을에는 슈퍼 같은 거 없나?"

"없는데."

너무나 쉽게 나온 대답에 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정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불편하지 않나? 필요한 게 있으면 어디서 사나?"

"대개는 다 갖춰져 있고 필요한 걸 구하는 방법이야 여러 가지가 있으니까."

"그런가?"

가게에서 물건을 사는 방법 말고 필요한 걸 구하는 수단이 뭐가 있을까 싶었지만 굳이 말하려는 기색이 아니어서 고개만 끄덕이고 말았다.

"그래도 이발소는 있네. 작지만 술집도 있고."

"다행이군."

그러나 그 가게들을 이용할 기회는 없을 거 같았다.

"아무래도 빈손으로 방문하기가 미안해서 그렇지."

"우리 사이에 뭐 그런 걸 따지나? 원래 오려고 했던 것도 아니잖나?"

"그래도……."

"정 손이 허전하면 집사람을 위해 저기 꽃이라도 좀 꺾어가지 그래. 아이들에게는 자잘한 돌멩이나 벽돌이 괜찮을 것 같네."

"정말인가?"

내가 정색을 하고 물어보자 그 역시 멀뚱한 눈으로 마주보았다. 정말이구나! 하기야 아주 빈손인 것보다야 뭐라도 들고 방문하는 게 덜 어색하긴 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의구심이 들었다.

"정말 들꽃과 돌멩이면 될까?"

"내가 본인들이 아니니 확언할 수 없지만 틀림없이 모두 좋아할 것이라 믿네."

"그렇군."

나는 차에서 내려 길가를 벗어나 평평하지 않은 들판으로 향했다. 마침 늦은 봄이어서 강아지풀, 국화, 개느삼, 투구꽃 등과 그 외 이름을 모르는 여러 색깔의 꽃들이 자라고 있었다. 나는 여기저기 군락을 이루며 자라고 있는 색색의 꽃들을 꺾기 시작했다. 한손에 꽉 찰 만큼 되자 허리를 폈더니 차에서 내려 지켜보고 있던 친구가 손을 뻗어 한 곳을 가리키며 저기도 있네, 그가 가리킨 꽃을 꺾어들자 또 저기도 있네, 하고 말했다.

뭐하자는 건지.

나는 묵묵히 꽃들을 모아 꽤 큰 다발을 만들어 묶었다. 이왕 하는 거 성의를 양념처럼 곁들이니 양재동 꽃시장에서 만원에 파는 꽃다발보다는 근사해 보였다. 그곳에 내다 팔면 이삼만 원은 받지 않을까.

나는 뿌듯한 눈으로 친구를 올려다보았다.

이제 됐나?

됐을 리가 없었다. 아이들 몫이 남았으니.

"애들한테 돌멩이나 벽돌을 갖다 주면 뭘 하나? 집을 짓는가?"

"설마. 놀잇감이지 뭐."

"아, 그렇군."

깜박했다. 모든 장난감은 백화점이나 마트에서 사는 건 줄 알았는데. 내가 어릴 때만 해도 구슬과 딱지 정도만 문방구에서 사고 나머지는 주변에서 구하거나 직접 만들어 가지고 놀았다. 그런데 요즘 아이들도 구슬치기나 딱지치기를 하고 노나? 최소한 이 마을에서는 그럴 것 같다. 마을 분위기가 딱 팔십 년대에서 성장을 멈추고 변화를 거부해버린 듯했으니까. 그리고 구슬과 딱지만큼 보편성 있는 놀잇감이 또 있을까.

내가 근처의 개울까지 내려가 자잘한 조약돌이라도 집어오려 하자 그가 말했다.

"아무래도 일의 순서를 잘못 잡은 듯하네."

무슨 말인가 싶어 나는 그의 다음 말을 기다리며 멀뚱히 바라보았다.

"꽃을 먼저 꺾은 후 다른 걸 하면 꽃이 시들어버리지."

그래서 어쩌라고.

나는 그런 눈빛으로 그에게 말했다. 내 강렬한 눈빛을 알아챘는지 그는 꼬리를 마는 목소리로 말했다.

"애써 얻은 꽃을 시들게 할 수 없으니 이제 대충 하고 가자고."

"그럴까?"

나는 손을 털고 일어섰다.

"그래도 하던 건 대충이라도 끝내야 하지 않겠나?"

"하던 거라니?"

정색을 하고 묻는 내게 그는 얼버무리듯 대답했다.

"뭐 조약돌이라도 몇 개 집어가잔 말이지."

"조약돌이라, 뭐에 쓰라고?"

"애들 심심할 때 공기놀이나 하게 말이야. 사실 공기는 어른도 재미있지. 나는 작년에 사십 년까지 넘어 봤다네."

"그런가? 난 할 줄 모르는데."

"쉬워. 내가 가르쳐 줄게. 한 십 분이면 배울 수 있을 거야."

"그거 고맙군. 근데 여기서 계속 이러고 있으면 언제 집에 가나?"

"앗! 역시 옛 친구를 만나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니까."

그러면서 그는 내가 있는 개울로 내려와 졸졸 흐르는 개천의 바닥을 훑기 시작했다. 물에 발을 담그지 않은 상태에서도 그는 순식간에 십여 개의 돌멩이를 모았다. 모두 손가락 한 마디 크기의 일정한 조약돌이었다.

"여기 있네."

그는 조약돌들을 내 손에 쥐어 주었다. 손 안에서 자글거리는 젖은 조약돌의 감촉이 그리 나쁘지 않았다.

진작 그럴 것이지.

그렇게 한 시간 가까이 나부대며 지체한 후에 우리는 그의 집에 도착했다. 친구의 집은 도로에서 밭이 펼쳐져 있는 곳으로 몇십 미터 들어간 곳에 있었다. 장소는 시골이었지만 집은 시골스럽지 않았다. 이층짜리 양옥이면 아무래도 시골집이라고 보기는 어렵지 않은가.

"여기가 우리 집인데 어떤가?"

친구의 얼굴이 칭찬을 받고 싶은 소년의 표정을 담고 있어서 나는 돈 안 드는 덕담을 건네주었다.

"좋구먼."

눈치를 보니 좀 부족한 듯 싶어 한 마디 더 했다.

"성공했구나!"

그제야 친구가 환하게 웃으며 대문을 밀고 집 안으로 들어섰다.

"얘들아! 나 왔다. 모두 나오너라."

잠시 그리 넓지 않은 마당에 정적이 감돌았다. 친구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나를 보며 원래 이래, 하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물론, 원래 그렇겠지, 하는 눈길을 되돌려 주었다.

얼마간 우리는 조용한 마당을 툭툭 차며 서성거렸다. 이럴 때 개라도 한 마리 있었다면 어색한 마당 대기조로 있진 않을 텐데. 물론 개나 개를 닮은 장난감 따위는 없었다.

"개는 없군."

없는 개를 가지고 약간의 무료함을 달래려다 보니 그런 말밖에 할 수 없었다.

"뭐 당장 필요한 게 아니다 보니."

"그렇군."

평생 한 번 찾아올까 말까 한 친구를 맞기 위해 새삼 개를 기를 필요는 없을 것이다. 게다가 도둑도 거의 없나 보다.

그 때 현관문이 살며시 열렸다. 그 문 사이로 작은 얼굴 하나가 탐색하는 눈길을 내보냈다.

"우리 공주님, 왜 이제 나오는 거야?"

"아빠……."

열 두어 살쯤 된 여자아이가 문을 열고 뛰어나왔다. 그리고 우리 서너 걸음 앞에 멈춰서서는 허리를 깊이 숙이며 인사했다.

"다녀오셨어요?"

공손하기도 하지.

"그래. 다들 어디 있냐, 엄마와 동생, 언니는?"

"아빠!"

갑자기 계집애가 빽 소리를 질렀다.

"내가 언니라구. 아빤 왜 번번이 틀려?"

"그럼 네가 수련이니, 목련이 아니고?"

"그럼. 도대체 몇 번을 얘기해야 제대로 알아볼 거야?"

"어, 미안하구나. 너희 둘이 똑 같이 생겼으니 아빠가 착각하는 거지."

"흥!"

아이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코웃음을 치고는 현관문으로 다가갔다. 그 사이에 친구가 귀에 입을 갖다 대고 속삭였다.

"실은 저 아이가 업둥이야. 이렇게 분간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면 아이 입장에서도 차별받는다는 생각을 안 하게 되지."

과연 그럴까?

"아빠! 다 들리거든."

아이가 소리치자 친구는 움찔하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연년생인 두 딸을 혼동하는 게 얼마나 억지스러운지 곧 모습을 드러낸 나머지 한 딸의 모습을 보고 알 수 있었다. 둘을 나란히 두고 보지 않아도 자매는 확연히 구분할 수 있을 만큼 달랐다. 가족이 아닌 타인, 더해 먼 도시에 살고 있는 도둑고양이나 남으로 수백 킬로 떨어진 바닷가의 괭이갈매기의 눈으로 보았어도 충분히 구별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친구가 일부러 두 딸을 구별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는 게 맞는 것 같았다. 어설프기는 하지만 두 딸을 차별하지 않고 키우려는 노력이 가상해 보였다. 그런 노력을 할 필요가 있는지는 차치하고라도.

"여보, 같이 온 분은 누구에요?"

둘째 딸의 뒤에서 얼굴을 내밀었던 중년의 여인이 물었다.

"어, 옛 친구인데, 저 시내 사거리에서 우연히 만났지 뭐야. 참 별난 일이 다 있지 뭐야."

"정말이에요?"

친구의 부인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친구와 나를 번갈아 보았다. 그 바람에 우리는 교대로 고개를 끄덕였다.

"음 그렇군요. 그럼 안으로 모시지 않고 거기서 뭐하는 거예요?"

"그게 말이지, 이 친구가 빈손으로 올 수가 없다고 해서 뭐 좀 준비해 오느라고."

그렇게 말하고 친구는 팔꿈치로 내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친구의 부인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나는 깜짝 놀라 손에 들고 있던 꽃다발을 떨어뜨릴 뻔했다. 그녀는 시골이든 도회지든 어디서고 쉽게 보지 못할 정도의 미인이었다. 나는 꽃이라도 꺾어 가라는 친구의 말이 이런 미인 아내를 염두에 둔 까닭이 아니었나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그 이유가 타당하게 여겨졌다. 나는 꽃다발을 그녀에게 내밀며 말했다.

"미리 말도 없이 갑작스레 방문해서 준비한 게 없습니다. 오는 길에 들에서 꺾은 꽃입니다."

"어머!"

그녀는 발그레 얼굴을 붉히며 꽃다발을 안아 들었다.

"이런 거 안 해 오셔도 되는데."

하면서도 두 손으로 받아들고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 내 마음도 덩달아 즐거워졌다.

"그리고 이건 공주님들 거."

나는 내친 김에 개울가에서 친구와 함께 모은 조약돌을 딸들에게 주었다. 내심 도시의 아이들과 비교하곤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이게 뭐야? 이딴 거 필요 없어, 하고 내던지면 내 꼴이나 친구의 꼴이 뭐가 되겠는가. 하지만 그건 기우에 불과했다. 두 딸은 각기 십여 개의 조약돌을 받아들고는 환하게 웃으면서 고맙습니다! 합창하듯 말했다.

애들이 교육을 잘 받은 건지 본래 소박한 건지 알 수 없었으나 내겐 아무래도 좋은 일이었다. 나는 세상의 모든 소박한 마음들에게 마음속으로 축복을 보냈다.

부인의 안내에 따라 집 안으로 들어섰다. 집은 온 가족이 모일 수 있는 거실이 있고 부엌이 있고 침실이 있었다. 그리고 이층으로 올라갈 수 있는 층계가 서쪽 구석에 있었는데 이층에는 아이들의 방이 있는 모양이었다. 일반적인 현대 가옥 구조와 큰 차이가 없어 보였다.

"여보, 이층에 있는 당신 서재 좀 치워 두세요."

"아, 그래야겠군."

부인이 말하자 친구가 대답했다.

"이보게. 혹시 나 때문에 그러는 건가?"

"그래."

"그럴 필요 없네."

"아니지. 자네와 내가 아무리 허물없는 사이라 해도 우리 집에 온 손님인 건 분명하네. 손님을 손님으로 대접하지 않는다면 그건 삼강오륜에도 어긋나는 일일세."

"삼강오륜은 모르겠지만 손님을 대접해야 하는 건 아이들 아빠가 맞는 것 같아요."

부인까지 나서자 나는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그럼 잠시나마 실례하겠습니다."

"그럼 방을 치울 동안 잠시만 기다리게. 아니, 자네가 지낼 곳이니 자네도 같이 치우는 게 낫지 않을까?"

얼마나 지낸다고.

그렇지만 친구를 따라 2층으로 올라가 그의 서재를 치웠다. 작은 방에 책상과 책들이 있으니 서재가 아니라고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방 구석구석엔 난로와 선풍기, 돗자리 등 철과 용도가 맞지 않는 물건들이 잔뜩 쌓여있기 때문에 이 친구가 과연 이 방을 서재로 이용하긴 하는 걸까 의구심이 들었다.

어쨌거나 누워있는 물건은 세워놓고 흩어진 것들은 모아놓고 떨어진 것은 쌓아 놓으니 한두 명이 누울 수 있는 공간이 생겼다. 땀이 좀 배어나도록 힘을 써 물건들을 치웠더니 바닥에 엎드려 있는 매트리스도 보였다.

"여기서 잠도 잤던 모양이지?"

"어, 그래. 지금은 우리가 금슬이 좋아 안 쓰지만 한때 많이도 애용했지."

"그렇구먼."

부부싸움을 하고 난 뒤의 피난처였던 모양이다.

"보기엔 창고 같아도 치워 놓으니 말끔하고 훤하지?"

창고 같은 게 아니라 이런 걸 창고라고 하는 거야.

"못 있을 곳은 아니군."

내 말이 시큰둥했던지 그는 좀 당황스런 표정을 하며 급히 말했다.

"그럼 먼 길을 와서 피곤할 테니 좀 쉬고 있게. 있다 저녁 되면 부르지."

"그래, 고맙군."

친구가 방을 나가자 나는 잠시 창고인지 서재인지 헷갈리는 방을 둘러보았다. 창 밑의 책장에 책이 이삼백 권 정도 있었다. 책들은 시와 소설이 삼분의 일쯤 되었고 나머지는 철학과 과학, 음악, 미술, 컴퓨터, 농업에 관한 것들이 고르게 있어 어느 누구도 주인의 전공이나 취향을 알 수 없을 것 같았다.

나는 그 중 몇몇 책들을 뽑아 뒤적여 보고는 낡은 매트리스에 벌렁 누웠다. 눈에 반쯤 열린 창이 보였고 창밖의 하늘은 조금씩 불그스름하게 변하고 있었다.

머리가 바닥에 닿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눈이 감기기 시작했고 꿈인 듯 생시인 듯한 시간이 후다닥 지나갔다. 나는 깊이 잠들지 않는 이상 외부의 소리를 모조리 듣는 편인데 늦은 오후에서 저녁으로 넘어가는 그 시간은 너무 조용했다. 사실 예기치 않은 손님인 까닭에 거한 대접을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밥 한 끼는 먹여줄 수 있지 않겠느냐는 기대는 있었다. 가정집에서 밥을 하려면 약간의 부산스러움은 있기 마련인데 아래층은 조용해도 너무 조용해 차라리 적막하다 할 정도였다. 너무 조용한 나머지 스르르 들던 잠도 화들짝 깰 정도였다.

나는 기다리다 지쳐 이 집은 저녁을 안 먹는 모양이군, 하며 포기했고 그러자 자리가 편안해졌는데, 갑자기 누군가 흔드는 바람에 깨어났다.

"어서 일어나게. 무슨 잠을 그리 곤하게 자나?"

친구의 말에 나는 부스스 일어나 잠시 여기가 어딘가 생각했다. 내가 어디서 뭘 하고 있었는지조차 금방 생각하지 못한 걸 보니 꽤 깊이 잠들었던 모양이다.

"잠시 쉰다는 게 그만 잠들었나 보군."

"먼 길을 왔으니 피곤했던 게지. 어서 일어나게. 배고플 텐데 내려가지."

나는 친구의 뒤를 따라 일 층으로 내려갔다. 거실을 지나 부엌으로 가니 식탁에 친구의 식구들이 모여앉아 있었다. 부인과 두 딸, 그리고 아들. 식탁엔 먹음직스런 음식들이 많이 차려져 있었다. 밥과 국은 물론 전골과 수육 등이 즐비했다.

"어서 와 드세요."

부인이 권하는 빈자리에 앉았다.

"차린 건 없지만 많이 드세요."

친구의 부인이 말했다. 차린 게 없다면 많이 먹을 수가 없는 노릇이지만 전통적이고 후덕한 관용어를 걸고 넘어갈 까닭이 없었다.

"차린 게 없다니요. 상다리가 부러지겠는 걸요."

나 역시 관용어로 대답하면서 혹시 상다리가 휘어지는 게 맞는 거 아닌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렇다고 빈말은 아니었던 것이 겨우 한 시간 남짓한 시간에 이렇게 푸짐한 상을 차릴 수 있었다는 것에 정녕 감탄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며 식사를 했다. 내가 이 마을을 오게 된 경위며 우연히 옛 친구를 만나서 집까지 온 과정에 대한 이야기는, 너무 듬성듬성하고 짧았다. 그러다 보니 친구의 처와 아이들이 내 얘기를 제대로 들었는지 의심스러워졌다.

"우연히 지나다가 오랜 친구를 만나게 되었다니 정말 소설 같은 운명이네요."

부인이 내 의심을 말끔히 지워주는 동시에 깔끔하게 요점까지 정리해 주었다. 학교에 다닐 때 노트 정리를 잘 하는 여학생이었을 것 같았다. 물론 시험을 잘 보지는 않았겠지만. 그래도 그녀의 노트를 빌려 본 친구들은 점수를 잘 받았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얘기했더니 족집게처럼 맞췄다며 웃었다. 그러면서 혹시 족집게 강사가 아니냐고, 맞는다면 아이들 공부나 좀 봐 줬으면 좋겠다고 했다. 나는 족집게 강사는 아니지만 아이들 공부 정도는 봐 줄 수 있다고 했다. 그건 맛있는 식사 대접에 대한 대가인 셈이었다.

주거니 받거니 하는 대화가 그녀와 나 사이에만 오가자 친구는 약간 불편한 기색을 보였다. 나 역시 조금 불편해졌다. 혹시 서재를 내 놓으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고도 남을 성격인지는 모르겠으나 아무래도 친구의 부인과 너무 친하게 얘기를 나눈 게 아닌가 하는 생각과 그 정도는 보통 아닌가, 어떤 곳에서는 친구와 자기 부인의 동침하는 것까지 허용하는데, 하는 생각이 교차했다. 물론 내가 친구의 부인과 자고 싶다는 건 아니고, 물론 상당히 미인이기는 하지만.

최근에는 밖에서는 물론 집 안에서도 먹어보지 못한 만찬을 들고 나니 꽤 만족스러워졌다.

"준비할 시간도 별로 없었을 텐데 이렇게 푸짐하게 차리다니 정말 대단한데요."

내 사례에 친구 부부는 쑥스러운 듯 엷게 웃었다. 그 웃음 뒤에서 사내아이의 목소리가 튀어 나왔다.

"모두 훔쳐 와서 그래요."

분명히 그렇게 들었지만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내용이어서 내 표정은 금방 물음표로 뒤덮였다. 내 눈길을 받은 부부는 어색하게 웃기만 할 뿐이었다. 아무래도 어린 아이가 헛소리를 한 모양이다.

"이건 저 뒤의 경식이네서 훔쳐 왔고 저건 그 아랫집인 수해 누나네서 훔쳐 왔거든요."

아이가 자랑스러운 표정을 한 채 손가락으로 푸짐한 요리들을 하나하나 가리키면서 말했다. 저게 사실일까. 나는 어안이 벙벙해 친구와 부인을 다시 살폈지만 둘은 같은 표정으로 얇은 웃음만 비쳤다.

"자자, 맛있게 먹었으니 됐다. 그런데 아들은 숙제 다 했니?"

"……아니요."

"학교 끝난 지가 언젠데 아직 숙제를 안 했어? 저녁 먹기 전에 숙제는 다 끝내라고 했어 안 했어?"

친구가 돌연 언성을 높였다.

"안, 한 거 같은데? 그치 누나?"

"응, 숙제하라고는 했어도 밥 먹기 전에 끝내라고는 안 했거든요."

큰딸인 수련이 대답했다.

"그, 그러냐? 그럼 이제부터 그렇게 하도록 해. 학교 갔다 오면 무조건 숙제부터 하는 거다."

"근데 아빠, 난 한 번도 숙제가 없었는데?"

아들이 이상하다는 얼굴로 말했다.

"그럴 리가 있냐. 학교는 숙제가 생명인데, 숙제 없는 학교를 학교라고 할 수 있나?"

"여보, 그 말은 좀 심했고, 금동이는 이제 입학한 지 한 달밖에 안 됐는데 숙제가 있을 리 없잖아요."

"어 그런가? 어쨌든 이제부터 그렇게 하기로 하는 거다. 자, 악속."

친구가 손을 내밀자 금동이는 그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 보다 말했다.

"숙제 없으면 어떻게 해?"

"없으면 안 하는 거지 설마 일부러 만들어서 할 거니?"

아들이 도리질을 했다. 한 번도 해 보지 않은 거지만 충분히 진절머리가 난다는 표정이었다. 그런 모습을 보니 인간은 선천적 숙제거부증이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니면 이 친구네 집안만 그런가, 아니면 이 아들 녀석만 그런가?

저녁 식사를 끝내고 공기놀이를 했다. 저녁 시간에 온 가족이 모여앉아 텔레비전을 보지 않는 게 좀 이상하고 불만이었지만 흑산도에 가면 흑산도의 풍습을 따르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그들이 하는 대로 하기로 했다. 공기놀이는 어릴 때 여자애들 하는 것만 봤지 직접 해 보기는 처음이었다. 친구의 딸들이 거의 선수급이었는데 그 애들이 하는 걸 보고 따라서 해 보니 얼마 지나지 않아 서툴게나마 할 수 있었다. 십여 차례 연습을 한 뒤에는 금동이보다 더 잘 할 수 있었다. 그래도 공깃돌 두 알을 잡는 이단까지는 쉽게 되는데 삼단 이상으로는 좀처럼 넘어갈 수 없었다.

어른과 아이들이 각기 팀을 이뤄 경기를 벌이는 팀 대항과 개인전을 이어서 했는데 팀 대항전에서는 아이들이 이겼고 개인전에서는 첫째 딸, 둘째 딸, 친구 아내, 친구, 나, 아들의 순으로 결과가 났다. 그렇게 땀깨나 흘리며 놀이에 열중하다 보니 어느새 두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놀이를 하는 동안 저녁 간식으로 찐고구마와 땅콩, 계란 등을 먹었는데 음식이 눈에 들어가는지 코에 들어가는지도 모를 정도였다. 그 얼마 후 아이들은 잠자리에 들었다. 아이들이 자러 갈 때 나도 함께 일어섰는데 친구가 잡았다.

"아직 잠들기엔 시간이 있으니 좀 더 앉았다 가지."

"왜?"

"우리는 손님이 오면 밤늦도록 같이 놀아주는 게 관습이네."

"그런 건 안 해 줘도 되는데……."

하면서 부인을 보니 꽤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게 아닌가. 뿌리치고 일어났다가는 주르륵 눈물이라도 흘릴 듯한 표정이어서 얼떨결에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그래 뭘 하게?"

"아무래도 전국민이 다 아는 걸 하는 게 좋겠지. 고스톱 어떤가?"

"뭐 나쁘지 않군."

"사실 멤버가 갖춰지지 않아 제대로 해 본 적이 별로 없다네."

"맞고를 치면 되지 않나?"

"셋보다는 훨씬 재미가 적지."

"그야 그렇지."

그래서 셋이 판을 돌렸다. 처음 쌀 때의 보상이나 따닥, 멍텅구리 등 지역별로 상이한 규칙을 확인하고 시작한 지 순식간에 몇 판이 돌았다. 처음엔 이런저런 얘기도 하며 화투를 쳤는데 십여 판을 넘기자 다들 말이 없이 자기 점수 올리는데 열중했다. 판이 끝날 때마다 에누리 없이 동전이 오고갔다. 시작할 때부터 두 시간이 지날 때까지 거의 자세를 흐트러트리지 않고 게임을 하는 부부를 보고 이 사람들이 처음부터 내 돈을 따먹으려 작정을 했나 싶었다. 하지만 그런 의심을 품기에는 내 돈이 별로 줄어들지 않았고 둘 사이의 관계도 별로 친밀해 보이지 않았다. 그저 오랫동안 화투에 굶주렸거니 생각하는 게 옳을 듯 싶었다.

그렇게 세 시간 가까이 되자 눈이 침침하고 하품이 자주 났다. 그런 내 모습을 봤는지 부인이 벽시계를 올려다보고는 말했다.

"어머,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시간이 한 시를 넘기고 있었다.

"친구분께서 피곤하실 텐데 쉬지도 못하고……."

"오늘은 그만해야겠네. 자네도 올라가 자지."

"그래야겠군."

셋 다 피로에 찌든 모습을 한 채 자러 갔다. 화투와 같은 놀이를 하다 보면 오래 대화를 나누지 않았는데도 부쩍 친해진 느낌이 들 때가 많다. 그만큼 상대의 흐트러지고 방심한 모습을 쉽게 보기 때문일 터인데 설마 친구 부부가 그걸 노리고 게임을 하자고 한 건 아닐 테지.

온몸이 저리고 찌뿌둥했는데도 쉽게 잠에 빠져들지는 못했다. 쾌적한 수면에 들기 위해서는 적당한 피로가 요구되는데 내 심신은 그 적당한 선을 넘어버렸던 것이다. 게다가 낯선 곳에서의 뜻밖의 잠자리였고 오후엔 얼마간 자기도 했지 않은가. 온 몸이 두드려 맞은 듯 욱신거리는 통에 낮은 소리로 신음하면서도 그렇게 잠들지 못하는 사유들을 하나하나 꺼내보는 바람에 더욱 머리만 말똥거렸다. 어쩌다가 낯선 마을에 들러 옛 친구 같은 건 만나 가지고, 밤이 깊도록 잠들지도 못하면서, 그렇다고 고향 생각에 빠져 있는 것도 아니고. 아직도 친구의 이름을 생각해내지 못하다니 이게 대체 무슨 조화인가. 부인인 김선영은 알았으면서. 그런데 김선영이라니, 친구의 아내 이름이 김선영이라는 건 도대체 어떻게 알아낸 거지? 본인이 스스로 말했나? 안녕하세요, 아무개씨 아내 김선영이에요. 그녀가 이렇게 말했다면 그 사실이 기억나지 않는 건 둘째 치고 아무개라는 게 뭐였지? 하지만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시골 아낙이 저런 식으로 자기소개를 했을 것 같지 않다. 그렇다면 누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나? 이름을 부를 수 있는 사람이야 고작 남편일 터인데, 여보 김선영씨, 그렇게 많이 싸 놓으면 도대체 누구보고 치우라는 거요? 이랬을까. 설마. 아니면 아이들 중 누군가가 김선영이라는 이름의 엄마, 오늘은 고기반찬을 해 주세요? 이것도 설마. 한데 그녀의 이름이 김선영이라는 건 확실한 걸까. 오랫동안 머릿속에 맴돌고 있던 아주 익은 이름이 제 꽃잎을 찾은 나비처럼 날아와 앉아버린 걸까. 딱 맞는 수나사와 암나사처럼 자연스럽게 끼워진 걸까. 그래서 그녀의 이름이 너무나 어울리는 김선영이 된 걸까. 도대체 알 수가 없군. 자신도 모르게 혀를 차는 사이에 창문으로 쓸쓸한 달빛이 흘러 들어왔다. 계속해서 맴도는 생각이란 빨리 잠들어야 일찍 일어나 떠날 준비를 하지, 그런데 급히 떠날 이유도 없으므로 친구가 하룻밤 더 묵고 가라며 잡으면 어떡하지? 하루 더 눌러앉게 된다면 굳이 일찍 일어날 필요는 없잖아. 그래도 손님 입장에서 게으름을 피울 수야, 애들 보기에도 민망하고. 어쨌건 남의 집에서 잔다는 건 여러 모로 피곤한 일이지. 그래서 편히 잠들지 못하기도 하고 말이야. 한데 이러다 날 새는 거 아닌지 모르겠군.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그런 어느 순간 어디선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내가 잠귀가 밝은 편은 아니었지만 지금은 잠에 빠져 몽롱한 때가 아니었으므로 그 소리는 분명 내 귀로 들었다고 할 수 있었다. 쥐가 있나? 충분히 그럴 수 있는 환경이긴 했으나 왠지 느낌이 이상했다. 좀더 있으니 부스럭거리는 소리뿐 아니라 살금살금 걷는 소리, 낮게 속삭이는 소리까지 들렸다. 위치는 1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참이 아닌가 싶었다. 바로 문 밖이다. 쥐가 이 정도로 다양한 소리를 낸다고 믿기는 어려웠다. 미키 마우스라면 몰라도. 그렇다면 밤에 남의 집에 몰래 들어온 사람일 가능성이 컸다. 도둑인가? 도둑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나. 남의 집에 하룻밤 보내다가 도둑을 잡아도 되나. 아니라면 그냥 소리쳐 주인을 깨우고 밤손님은 쫓아내야 하나. 나는 매트리스에 시체처럼 누워 이런 갈등만 연신 되풀이했다. 동시에 여러 소리가 나는 걸 보니 최소한 두 명 이상인데 괜히 나섰다가 잘 알지도 못하는 옛 친구 집에서 비명횡사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가만, 도둑이라면 물건을 훔치기 위해 들어왔다는 얘긴데 내가 있는 곳이야말로 온갖 물건들의 집합처 아닌가? 물론 값나가는 것들이야 이런 창고 같은 곳에 둘 리가 없겠지만. 물론 상식의 허를 찌른다고 허름한 창고 같은 곳에 귀중품을 숨겨놓을 수도 있다. 도둑 또한 그걸 예상하고 있다면, 충분히 이런 곳에 들어올 수 있지. 맞지 않아도 될 나의 추론은 영락없이 적중했다. 스르르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기분 나쁜 옷깃 스치는 소리가 났다. 이어 두 명 이상이 몰고 다니는 공기의 기척이 느껴졌다. 나는 온몸이 오싹해졌다. 차라리 아무것도 모른 채 잠들었으면 나았을까. 아니 그게 더 끔찍한가? 어쨌거나 나는 숨죽인 상태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내가 잠결인 듯 뒤척인다면 이들은 놀라서 숨을 죽일까, 내 입을 틀어막을까, 내 목을 조를까? 내가 일어나 누구냐고 묻는다면 이들은 친절하게 대답해 줄까, 쉿! 할까? 아니면 내 목을 꺾을까? 내가 도둑이야 소리를 지른다면 이들은 후다닥 달아날까, 얼떨결에 내 뒤통수를 갈길까, 아니면 내 가슴에 식칼을 쑤셔 넣을까? 나는 생각만 하고 그 외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두 명인지 세 명인지의 침입자는 조심스러우면서도 거침없이 할 일을 했다. 내가 누워있는 주변의 물건들을 뒤적였던 것이다. 그러다가 이불에 덮여 누워있는 내 모습을 발견했는지 일순 싸늘한 정적이 감돌았다. 나는 모두의 시선이 내게 집중되고 있다고 느꼈다. 세상모르게 잠들어 있다고 보이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생각하는 순간 나는 새근새근 안정되고 고른 숨소리를 흘려냈다. 물론 원래부터 그러고 있었던 것처럼. 이게 통할까. 물론 통했다. 사실 통할 수밖에 없는 것이 내가 깨어 있는 걸 그들이 의심한다고 해서 나아가 확실히 알고 있다고 해서 더 이상 뭘 어떻게 하겠는가. 흔들어 깨우기라도 할까. 자고 있다고 서로 믿는 판에 긁어 부스럼 만들 일이 뭐 있을까. 이런 내 생각과 별개로 그들은 잠시 후 움직이기 시작했다, 입을.

ㄹ아저씨 여기서 자는데요?

아주 낮게 소곤거리는 소리여서 30cm 이내에서나 겨우 들을까 말까 했다. 그렇다는 건 말하는 사람의 입이 내 귀에서 30cm 정도밖에 떨어지지 않았다는 얘긴데, 이 사람들이 도대체 정신이 있는 건가? 그건 그렇고 ㄹ아저씨라니 그건 집 주인인 내 친구를 말하는 것 같은데 친구의 이름이 ㄹ로 끝나던가? 대길, 수길, 중길, 한길……. 아니 꼭 길이란 말은 아니잖아. 돌, 왈, 철, 걸, 질, 술……. 이것도 역시 오리무중이다. 나는 귀가 근질거려 참을 수가 없었다. 이왕 가까이서 얘기할 거면 좀더 또박또박 말하지.

"이 사람, 제수씨하고 사이 좋다더니 다 뻥이었구먼."

"쉿, 아버지. 소리가 너무 커요."

"괜찮다. 이 친구는 한번 잠들면 호랑이가 물어가도 몰라."

"정말로 잠든 게 아닌지도 모르잖아요."

"새벽 세 시나 된 이 밤에? 한번 확인해 볼까?"

"아서요. 그러다 정말 깨울라."

"내가 정말 그럴 것 같냐? 내가 여기 뭐 하러 온 건지도 모르는 줄 아냐?"

"아 됐고요. 빨리 챙겨서 나가자고요. 잠자야 할 시간에 이런 일이나 하고 있으니 키가 안 자라는 거잖아요."

"녀석이 엉뚱한 핑계는. 네 나이에 160이면 적당한 거다."

도둑 부자의 대화가 한없이 이어질 것 같았는데 바깥쪽에서 재촉하는 소리가 들렸다. 멀뿐만 아니라 힘없이 바람 빠지는 소리 같아서 무슨 내용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아마 밖에서 망을 보다가 초조해서 부르는 모양이었다.

"일단 어서 챙겨서 나가자."

아버지의 말을 끝으로 다시 부산하게 움직이는 기척만 났다. 아예 내 존재 같은 건 신경도 안 쓴다는 의사 같았다. 나는 아예 없는 사람 취급받는 게 다행인지 아닌지 쉽게 분간하기 어려웠다. 대신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걸 훔쳐가려고 사내들이 셋이나 몰려 왔는지 궁금했다. 물론 일부러 확인하는 수고를 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멀리서부터 내 주변까지 뒤적이며 오더니 찾았다, 하고는 약간의 끙끙 소리와 함께 물건을 나르기 시작했다. 책상일까 아니면 벽장일까. 셋이 낑낑거리며 한 걸음 한 걸음 문으로 향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모습을 감췄다. 이들의 행동이 노골적으로 나를 무시하는 것 같아 벌떡 일어설 뻔했다. 그나저나 그들이 가져간 건 뭘까. 벽에 세워둔 것이라면, 돗자리? 설마. 휑하니 빈자리에 있던 게 뭐였더라. 무슨 천 같은 걸로 덮여 있어서 미처 알아보지 못했다. 창고에 책임감 없이 놓여있던 게 분명하니 그리 값나가는 거 아니리라. 하지만 도둑맞고 있는 걸 알면서도 그냥 방관한 나는 뭐란 말인가. 나는 조금 부끄러움을 느꼈다. 집을 지키기 위해 머문 건 아니지만 내가 자는 곳에서 아직 눈뜨고 있는 동안에 도둑이 들었다는 건, 그 도둑을 막기 위해 아무 행동도 하지 않았다는 건 1할쯤 문제가 있어 보였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적어도 누가 무엇을 훔쳐갔는지 정도는 알아 놓아야 하지 않겠는가. 이런 생각에 이끌려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그들이 닫아놓은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오랫동안 어둠에 암순응되어 있던 눈이어서 검은 그림자들의 움직임이 꽤 선명했다. 그들은 거실을 지나 현관을 나서고 있었다. 다시 현관문이 닫히자 나는 살금살금 계단을 내려가 현관문을 빠끔히 열었다. 그들은 이제 마당을 지나 대문을 나서고 있었다. 그들이 문 밖을 나서고 20초쯤 후 뒤따라 문을 나섰다. 그리고 계속 그 간격을 유지하며 뒤를 따랐다. 세 명의 그림자는 그들의 키보다 큰 장방형의 물건을 들고 어둠에 잠긴 골목을 지나갔는데 한 명이 앞에서 인도하고 나머지 둘이 훔친 물건을 앞뒤고 같이 들고 걸어갔다. 크기만 클 뿐 그리 힘들어 보이지 않았다. 어쨌거나 미로 같은 길과 골목을 따라가다 보니 돌아갈 일이 걱정이 되었다. 차가 다닐 수 있는 큰길 두 개에 골목 서넛을 지나면서 내 머릿속은 헝클어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나는 눈에 불을 켜고 도둑들을 뒤따르면서도 머릿속에는 지나온 길의 궤적을 그려 넣기 바빴다. 잠시 생각해 보니 대충 돌아갈 방향만 알면 집 앞에 주차되어 있는 내 차를 찾을 수 있을 터이니 그리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십여 미터 폭의 개울에 놓인 다리를 건너 3분쯤 더 간 후에 그들은 멈췄다. 친구의 집과는 달리 여러 채의 가옥이 붙어있는 곳의 한 집이었다. 대문 앞에 이른 도둑들은 주변을 둘러보지도 않은 채 문을 활짝 열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곧 문이 닫혔다. 나는 잠시 기다리다가 그 집 앞으로 다가갔다. 집 자체는 친구의 집이나 주변에 있는 다른 집과 별 차이가 없었다. 그저 단층에 대문과 마당이 있고 그 안에 현관이 보였는데 마당 한편에 있는 창고 같은 건물이나 그 앞의 개집, 응? 개집이라면 개가 있어야 하고 그럼 당연히 인기척에 작은 반응이라도 해야 정상인데 왜 조용하지? 깊이 잠들었거나 집에 없거나 마당을 오간 인기척이 주인이어서 신경 끄고 있었거나……. 어쨌거나 나로서는 다행스러운 일이고. 집의 규모는 좀 컸다.

문 앞에서 서성거리고 있자니 집의 오른쪽에서 서두르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내가 도둑들을 따라 온 방향과는 다른 쪽에서 몇 명이 다가오고 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재빨리 문간에서 물러나 이웃집의 기둥 뒤로 숨었다. 바로 그 순간 그 집의 담장 모서리를 돌아 또 다른 두 명이 양손에 뭔가를 들고 문을 들어서는 것이었다. 이쪽도 도둑인가? 부자(父子) 도둑이 이어 한 집안이 다 도둑이란 말인가.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이번에는 다시 왼쪽에서 한 명이 나타나 합류했다. 심야에 문간에서 조우한 그들은 서로 짧은 대화를 속삭였는데 형님, 아제 하는 호칭과 훔치는데 어렵지 않았느냐는 인사치레가 오갔다. 헐, 도둑의 소굴이 맞는구나. 실체를 알아가자 내 가슴이 쿵덕쿵덕 천둥치듯 울렸다. 이 일을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모든 인기척이 집 안으로 사라지고 나자 나는 모든 사람이 대부분 할 수 있는 가장 중용적인 선택을 하기로 했다. 1. 혼자 쳐들어가 일망타진한다. 이건 물론 아니고, 2. 가까운 경찰서나 파출소에 신고한다. 이건 고려할 사항이지만 남의 동네라 좀 그렇고, 3. 모른 척하고 들어가 잔다. 이건 약간 양심에 걸리고, 4. 집을 알아둔 다음 친구에게 알린다. 친구도 역시 피해자 중의 하나니까. 그런데 집들이 다 비슷비슷한 데다 남의 동네다 보니 어디가 어딘지 몰라 낮에 와 보면 알아보지 못할 것 같았다. 그렇다면 집에 표시를 해 놓아야 되겠는데……. 나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뭔가 표시할 만한 도구가 없나 찾아보았다. 얼마간 헤매다가 길가에서 석회석 같은 돌을 집어 벽에 문질러 보았다. 돌이 부스러지며 희끗희끗하게 묻어났다. 나는 그걸 가지고 도둑들의 집 앞으로 가 대문 한쪽 구석에 나만의 표시를 해 두었다. 쉽게 눈에 띄지 않는 곳에 한 것은 집안에 총명한 며느리가 있어 이상하게 생각한 나머지 다른 집들에도 같은 표시를 해 놓을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일을 마친 나는 어렵지 않게 친구의 집으로 돌아와 자리에 누웠다. 여전히 가슴이 두근거려 쉽게 잠들지 못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한계를 넘긴 몸이 견디지 못했는지 곧 잠에 빠져들었다.

나는 친구가 흔들어 깨우는 바람에 눈을 떴다. 잠든 지 얼마나 됐다고 이러는 거냐는 말이 입 안에 맴돌았다. 환하게 비치는 햇살을 받은 채 눈을 껌벅거리자 친구가 말했다.

"자네, 몹시 피곤했던 모양이군. 한낮이 되도록 일어나지 못하다니."

"한낮이라고?"

"그래."

"몇 신데?"

"한 시가 넘었네."

"왜 진작 깨우지 않았나?"

"당연히 자네가 피곤할까봐 그랬지. 어젯밤 늦게까지 놀지 않았나. 보기엔 그래도 고스톱이란 게 상당한 체력을 소모하지 않나?"

"그야 그렇지."

"하지만 덕분에 잘 잤지? 이제 일어나게. 점심 준비됐네."

밝은 표정의 친구 얼굴을 보면서 나는 간밤에 도둑이 들었다는 얘기를 어떻게 꺼내야 할지 망설였다. 어제 십수년 만에 만났을 때부터 친구는 매우 기쁜 모습이었다. 그게 벗이 먼 곳에서 찾아오니 그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하는 공자의 말씀을 실천하는 것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 불청객인 나로서는 안 좋을 수가 없었다. 이런 친구를 불쾌하게 만드는 말은 조금이라도 미루고 싶은 게 역시 친구 아니던가.

그를 따라 부엌으로 가 역시 잘 차려진 밥에 입을 대었지만 간밤의 도둑들 생각에 식사에 성의를 보이지 않았던 것 같다.

"왜 입맛이 없나?"

"그러고 보니 좀 초췌해진 것 같아요."

친구와 부인이 번갈아 말했다.

"아니 맛있는데요."

나는 일부러 쩝쩝거렸다. 역시 시골 음식은 언제 먹어도 맛있어. 이렇게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면서 부지런히 여러 반찬에 젓가락을 대었다. 부부는 그런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런데 아이들은…… 학교에 갔나 보지?"

두 사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참 부지런하군. 아이들 이름이 수련과 목련이라고 했던가?"

"그래, 기억하고 있었군."

"막내는, 금동이였던가?"

"자네 앞에서 별로 얘기하지도 않은 것 같은데 잘 아네. 정말 대단한 기억력이네."

친구의 말에 부인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기 자식들 이름을 기억해 줘서 싫어할 사람은 없다. 적어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내친 김에,

"그리고 제수씨 성함은 김선영?"

내 말에 두 사람은 입을 딱 벌리고 나를 보았다.

"당신 이 친구에게 정식으로 자기소개한 적 있어?"

"아니, 당신이 말했겠지."

"나도 안 했는데."

두 사람은 어떻게 본인의, 그리고 마누라의 이름을 여기에 온 지 하루도 안 된 사람이 알 수 있느냐는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그렇게 잠시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던 친구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서재에 있던 우리 앨범이나 뭐 그런 걸 들쳐 봤나 보군."

그 말에 아무런 변명거리도 마련해 두지 못한 나는 대충 고개를 끄덕였고 부인은 약간 부끄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 그렇군. 서재면 일반 책뿐만 아니라 앨범과 일기와 같은 가족의 기록이 있을 터이니 거기서 친구의 이름을 찾아보면 되겠군. 하여튼 나는 졸지에 뛰어난 기억력의 소유자에서 경우 없이 남의 사생활이나 들쳐보는 인간이 되었다.

점심을 먹은 후 친구 부부와 나는 앞으로의 일정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마을을 방문한 목적이 분명하지 않은 만큼, 아니 우연히 들렀으니까 목적 자체가 없는 셈인데, 어쨌건 아주 오래된 옛 친구를 만났고, 만나서는 수삼 일을 풀 만큼 쌓인 회포 따위는 없었으므로 하루쯤 더 있다가 떠나기로 합의했다. 합의란 것은 고락을 같이 했던 옛 친구를 만났으니 이제 됐고 그만 가 봐야겠네, 하는 인사치레에 달랑 하루 있다가 가면 섭섭하니 하루만 더 있다가 가지? 하루나 이틀이나, 또는 사흘이나 닷새나 얼마나 차이가 있을까마는 너무 짧은 만남이 주는 허전함과 같이 있다 보면 서로 지겨워지는 사이의 적당한 기간이란 게 있으므로 좋은 게 좋은 거다 하는 만고의 진리에 따라 도의적인 상거래처럼 맺은 말이었다. 그리하여 아직 떠날 시간이 남았으므로 술잔을 기울이며 지난 세월의 얘기를 할까 아니면 동네 산책이나 할까 하는 친구의 제안에 나는 후자를 선택했다. 아무리 과거에 아무리 친했다고 해도 이름 석자조차 모르는 친구와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다가는 또 어떤 일을 겪을지 모르니 가벼운 산책이나 하자는 계산이 끼어들었다. 아직 마음의 짐이라 할 수 있는 도둑들에 대한 처리, 혹은 최소한의 언급이 남아있었다.

친구의 안내에 따라 마을을 둘러보았다. 마을은 낮은 뒷산을 배경으로 한가운데를 대충 구불거리며 가로지르는 개울을 끼고 형성되어 있었다. 외부로 이어진 찻길 외의 모든 골목길은 포장이 되지 않았고 그 때문에 길이 꺾이거나 구부러지는 곳에서는 오래된 나무들이 주민처럼 자리를 잡고 있었다. 집들은 낡은 것과 새것이 극명하게 구분되었는데 낡은 집들 가운데는 노는 여자들이 방심한 채 흐트러진 몸을 그대로 드러내듯 마구 방치되었다는 티를 풀풀 풍기는 것들이 여러 채 있었다. 옛날식 나무 대문이며 장지문, 창이 멋대로 열려서는 이따금 부는 바람에 삐걱이는 모습이 주인이 살지 않는 것 같았다. 새로 지은 집들은 대개 네모반듯한 양옥이었는데 대개 단층 아니면 2층으로 되어 있었고 옥상에는 태양열 집열판이 설치되어 있었다.

친구는 나와 나란히 걸으며, 길이 좁아질 때면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면서 학교와 교회며 마을 회관을 손으로 가리켜 알려 주었는데 사실 그럴 필요까지는 없는 일이었다. 내가 이 동네에 이틀 정도 있으면서 교회나 회관에 갈 일이 뭐가 있겠는가. 하지만 나는 친구가 알려주는 대로 고개를 끄덕이며 어젯밤 내가 왔던 집을 찾아보았다. 작은 돌다리를 건너가 골목 두어 개를 지나자 익숙한 대문이 눈에 들어왔다. 그 대문에는 내가 표시해 둔 것도 남아 있었다. 어차피 해야 할 말이라면 이렇게 증거가 있는 곳에서 하는 것도 좋겠다고 생각한 것은 단순한 충동은 아니었다.

"보기엔 평화로운 마을인 것 같은데 여기 도둑이 살고 있네. 그것도 한 집안 모두가 도둑이더군."

듣기에 따라선 모함일 수도 있고 사실이라 해도 분란의 여지가 농후한 말을 듣고도 친구는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알고 있었나?"

내가 물었다.

"그렇게 확신을 갖고 말하는 걸 보니 실제 현장을 본 모양이군."

그는 내 물음에 대답하는 대신 그렇게 말했다.

"맞아."

그리고 나는 지난 밤 내가 보고 들은 것을 이야기했다. 마지막으로는 맞은편의 대문에 표시된 사인을 가리키며 이 집이 바로 도둑들의 소굴이라고 했다. 조용히 서서 끝까지 듣고 있던 친구가 말했다.

"자네가 알지 못하게 그토록 신경을 썼는데 다 헛수고였군."

마치 자기가 도둑질한 걸 들켰다는 표정이었다.

"신경을 썼다니?"

"먼 여행길에 피곤한 손님을 밤늦도록 잡아놓고 놀이를 한 것이 설마 자네를 대접하기 위해서나 우리 부부가 즐기기 위해서였겠나?"

"뭔가 이상하다고는 생각했지만…… 그럼 내가 세상모르게 잠들도록 하기 위해서였단 말인가?"

"그렇다고 손님에게 약을 먹일 수야 없지 않은가."

"그렇게까지 날 재워야 했다는 건 어젯밤 자네 집에 도둑이 들 거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인가?"

"뭐 그런 셈이지."

"그렇다 해도 나로선 이해하기가 어렵군."

"그렇겠지."

"내가 이해하길 바라나?"

"자네가 원한다면."

"물론 나야 이해하고 싶지."

"그렇다면 나를 따라오게."

그렇게 말하고 그는 뒤돌아섰다. 나는 그의 뒤를 따라 가며 생각해 보았다. 아무리 이해하기 어려운 일도 진상을 파악하면 대부분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이번 경우는 어떨지.

그가 나를 데리고 간 곳은 마을회관이었다. 여긴 뭔 일로, 하며 쭈뼛거리자 그는 그냥 들어와, 하고 팔을 잡아끌었다. 마당을 지나 현관 안으로 들어서자 짧은 복도와 넓은 거실이 나왔다. 거실에는 십여 명의 노소가 둘러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대부분이 남자였고 두어 명만 여자였다. 그 중 하나가 친구의 부인 김선영 씨였다.

"어서 와."

"이리 오세요."

앉아 있던 사람들 가운데 젊은 남녀가 우리를 향해 말했다.

"일단 앉지."

친구가 나에게 권했다. 나는 내게 시선들을 모은 사람들을 향해 짧게 목례를 한 후 그들과 마주보는 자리에 앉았다. 방석이라고도 할 수 있고 돗자리라고도 할 수 있는 바닥이었다. 그런 나를 친구는 십 수 년 만에 우연히 만난 친구라고 소개했고 나에게는 이장, 청년회장, 부녀회장, 노인회장 등이라고 주민들을 하나하나 소개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제 친구에 의해 희대의 가족도적단 우두머리로 지명된 양세팔 형님은 우리 마을의 치안을 책임진 파출소장이기도 하지요."

그러면서 친구가 손바닥을 펴서 가리킨 오십대의 건장한 아저씨는 쑥스러운 듯 머리를 긁적이며 일어나 손을 내 밀었다. 나는 그 손을 잡으면서 살짝 고개를 숙였는데 얼핏 본 모습이 눈에 익은 듯도 했다. 정황상 그가 친구의 집에서 큰 물건을 훔친 일당의 우두머리인 모양이었다.

"이거 참 우리 마을의 귀한 손님에게 못 볼 꼴을 보이고 말았군 그래."

양세팔 씨가 껄껄 웃으면서 말했다. 그러자 곁의 주민들도 가볍게 웃었다. 나는 이게 웃을 일인가 싶었지만 친구와 그의 부인까지 웃자 어쩌면 이게 당연한 듯하기도 했다. 도둑이 파출소장이라, 그런 경우는 큰 도시에는 얼마든지 있지 않던가.

"본의 아니게 이런 자리가 마련되었습니다."

친구가 나를 한번 보고 마을 사람들을 향해 이아기하기 시작했다.

"우리 마을의 독특한 점을 누군가 알았다고 해서 장차 마을에 화가 닥친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제 친구가 워낙 특별해서 이번엔 해명이나 설명 같은 게 필요하다고 판단해서 여러분을 모이게 했습니다."

친구의 말에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할까? 자네가 의심하는 부분에 대해 질문을 하면 우리가 대답하는 식으로 할까, 아니면 우리끼리 자유토론 식으로 할까?"

무엇을 어떻게 한다고? 나는 쉽게 대답을 못했다.

"아우님 친구 분이 갈피를 잡기 어려운 모양인데 일단 우리끼리 얘기해 보는 게 어떨까?"

양세팔 씨가 말했다.

"그보다는 제가 개괄적인 설명을 하고 그 다음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누지요."

"그게 좋겠네."

이장이 대답하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친구는 내게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우선 사실을 이야기해야겠지. 우리 마을 사람은 모두가 도둑이네. 아이들 일부를 제외하고는 거의 다 남의 집에 들어가 물건을 훔친 적이 있다는 말일세. 그러니 어느 누구도 남을 비난하거나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뜻이지."

그의 말에 마을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어느 정도 짐작했던 바라 크게 놀라지는 않았으나 어쩔 수 없이 약간의 동요가 일기는 했다.

"어제 저녁 식사 때 자네 아들이 음식들을 다른 집에서 훔쳐왔다는 것도 사실이었군."

친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다양한 음식들이 맛이 있으면서도 제각각 달랐던 것이다.

"하지만 그걸로 다 해명이 되었다고 보지는 않는데?"

"그럴 거야. 어느 마을이든 나름의 특색과 전통이 있는 법인데 그게 다 외부 사람들에게 이해된다고 보기는 어렵지."

"이게 단순히 이해의 문젠가?"

"일단은 그렇지."

"마을 전체에서 이루어지는 절도가 마을의 특색이나 전통이라고?"

내가 의혹에 찬 목소리로 말하자 이장이 입을 열었다. 그는 육십 대쯤 되어 보였는데 상당히 깊이가 있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처음엔 우리에게도 상당한 저항이 있었지. 세상의 모든 행위를 옳은 일과 옳지 않은 일로 구분한다면 도둑질은 옳지 않은 일이었으니까."

"전통이라 하는 걸 보니 그게 오래 되었나 봅니다?"

내가 물었다.

"내가 젊었을 때 시작되었으니 얼추 삼사십 년은 되었군."

"처음에 어떻게 시작되었다고 했던가요?"

친구가 물었다.

"그게 분명하지 않은 게, 어떤 일이든 시작될 때는 그게 시작되는 것인 줄 모르다가 어느 정도 확산된 후에야 전통이든 인습이든 하는 것으로 굳어져 가게 되는데 그러고도 한참이 지난 뒤 비로소 기원에 관심을 갖게 되지. 그때는 이미 시작된 부분에 대한 기억이 희미해지고 그런 까닭에 여러 가지 설들이 만들어지기도 하지."

"기원은 전통을 정당화하기 위해 마지막에 만들어지는군요."

친구가 말했다.

"과학이 아니니까 꼭 그렇다고 하기는 어렵지."

"제가 듣기로는 집에 먹을 것이 없어 일가족이 다 굶어죽은 어느 선비로부터 시작되었다던데요."

친구의 부인 김선영씨가 이야기에 끼어드는 걸 시작으로 좌중의 남녀노소가 다들 한마디씩 했다. 친구와 그의 부인을 비롯한 젊은 측이 주로 질문을 하고 이장 등 나이든 사람들은 대답하는 편이었다. 간혹 나도 끼어들었다.

"그것도 여러 가설의 하나지. 가난한데 집안에 쌀 한 톨도 없고 그렇다고 구걸을 하기에는 자존심이 강한 그 문인 일가의 비참한 말로를 보고 사람들이 일제히 말했다고 하더군. 그렇게 처자식 다 굶겨죽일 바엔 차라리 도적질을 하지."

"빌어먹는 방법도 있지 않았습니까?"

"한 동안은 부인이 이웃집들을 다니면서 얻어다 먹였던 모양이야. 그러다 그 사실을 안 남편이 호통을 쳤고 마을 안에서도 소문이 나 더 이상 주려고 하지 않았지."

"마을의 가장 부잣집을 털었던 사람을 단순히 먹을 것만 훔쳤다는 이유로 불문에 붙였다는 얘기도 있었죠."

"그건 굶어죽은 일가의 일보다 몇 년 뒤에 생겼어."

"최부잣집이던가?"

"그깟 도둑질 한번 봐 줬다는 이유로 그런 관습이 생겼다는 건 좀……."

"물론 한 번이 아니었지. 그 이후로 계속해서 비슷한 일이 반복되었다더군."

"그건 아무래도 최씨 쪽에서 흘러나온 얘기가 아니었던가 해."

"저는 다른 말을 들은 게 있는데 아이들이 장난감을 갖고 놀잖아요. 그런데 시골이다 보니 딱지나 구슬 같은 흔한 거 말고는 아이들 몇몇만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아요."

"그야 그렇지."

"예를 들면 도시에서 사 온 자동차라든가 인형 따위는 마을에서 한두 명만 갖고 있기 마련이고요. 그럼 다른 아이들 누군가가 한번만 만져보게 해 달라거나 심하면 하루만 빌려달라고 하기도 하고. 물론 대개는 거절당하는데 그럼 어떻게 되느냐, 그 희귀 장난감이 없어지는 거예요. 욕심을 부린 누군가 가져간 거죠. 그게 몰래 가져간 아이에서 끝나지 않고 며칠 후엔 또 다른 아이의 집에서 발견되거든요. 그러다 보면 어떤 것은 마을 모든 아이들의 손을 거치기도 하고요."

"그런 일은 최근에도 있다고 할 수 있지."

"그러니까 어른들도 필요한 물건을 남의 집에서 가져다 쓰는데 쓰고 나서 돌려주지 않게 되었고 그걸 또 다른 사람이 가져다 쓴 게 이 관습의 기원이 되었다?"

"말하자면 장난감 기원설이군요."

친구의 말에 모두 가볍게 웃었다. 그러니까 굶어죽는 것보다는 도둑질이 낫고 너도 나도 서로의 물건을 훔치다 보니까 마을의 관습이 되고 전통이 되었다 이거군. 그렇다면 다음 이야기는 어쩌다가 이런 행위가 용인되고 마을 전체로 퍼지기까지 했느냐는 것이다.

"그게 왜 관습이 되었죠?"

내가 물었다. 이후로 질문은 거의 내 몫이었다. 왜냐하면 실제로 가장 많은 의혹을 품고 있었으니까.

"우선 한 동네 사람이니까 서로 고발하고 잡고 하는 일이 맘처럼 쉽게 되지는 않는다는 게 문제였지. 도둑맞은 건 별로 값나가지 않는 물건인데 평소에 친구요 또는 아저씨라 불렀던 사람을 경찰에 고발하기가 쉽겠어? 그렇다고 그냥 넘어가자니 속만 썩고. 그러니 범인의 집에 가서 잃어버린 것을 다시 훔쳐 오거나 범인을 모르면 다른 집에서 비슷한 것을 훔쳐오는 행위가 이루어진 거야. 서로 알고 지나다 보니 이웃들 집에 가는 일도 잦고 그러다 보면 그 집의 물건이 아닌 남의 것이 눈에 띄거든. 근데 집 주인에게 대놓고 그거 어느 집에서 훔쳐온 거 아니냐 그렇게 묻기는 어렵단 말야. 하니 어쩌겠어. 다른 집에 가서 그 이야기를 하거나 자신도 남의 집에서 훔쳐올 생각을 하지. 그게 이삼 년 되자 온 마을이 같은 처지가 된 거야. 법률 용어로 말하면 모두가 가해자이자 피해자가 되었으니 이제 아무도 남을 비난할 수 없어졌다고."

이장의 설명이 길게 계속되었다.

"그렇다고 해도 도둑질은 옳지 않은 일이니 타파하자고 하는 의견도 있었을 텐데요?"

"당연히 여러 번 있었지. 하지만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도 계속 손해만 보다 보면 자기 고집만 되풀이할 수가 없지. 아까도 말했듯이 읍내의 파출소에 고발을 하기에는 같은 마을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끈끈함 때문에 섣불리 나설 수는 없는 노릇이고. 그래도 몇 년마다 등장하는 고지식하고 강경한 주장 때문에 몇 차례 위기는 있었어."

"도둑질의 관습이 사라지는 게 위기라니 말이 좀 이상한데요?"

"그건 관점에 따라 다른 법이야. 인간이란 애초에 경제적 동물이라서 스스로에게 만족한 상태를 선으로 규정했거든. 자신이 편하고 만족하면 그것이 최상의 선이다 이거야. 물론 혼자 있을 때 얘기지. 여럿이 어울려 살다 보면 이익이 충돌하는데 그걸 조정한 것이 법이요 도덕이 되는 거지."

"도덕과 법이 이익에서 나왔다고요?"

"그래, 법과 도덕이 정의에서 나왔다는 건 거짓말이야. 각자의 이익을 조정하는 가장 좋은 도구가 공평이지. 같이 사냥한 고기를 똑 같이 나눈다. 이게 정의의 시작이야. 눈에 확 보이거든. 그로부터 일의 질, 역할의 분담에 대한 평가가 생겼고 그게 법과 도덕을 만든 거야."

"이장님 말씀은 너무 원론으로 나가셨는데요, 그에 대한 가부는 뒤로 미루고 우리 관습에 대한 거나 말씀하시죠."

"그러니까 내 말은 마을에 좍 퍼진 도둑질이 결과적으로 모두에게 이익이 되었다 이거지."

"그게 어떻게 가능했죠?"

"그게 이렇게 되지. 이를테면 어떤 사람이 무언가 꼭 필요해서 그게 있는 집을 알아봐. 그리고는 그 집에 들어가 훔치지. 물론 도둑맞은 집에서는 꼭 필요한 물건이 아니야. 필요하다고 해도 훔쳐간 사람보다는 덜하거든. 도둑맞은 쪽이 그게 필요해지면 다시 또 훔쳐오면 되고. 그럼 어떻게 되나, 잃어버린 사람은 없어진 것에 대한 아쉬움이 그리 크지 않은 반면에 훔쳐간 사람은 꼭 필요한 것을 취했기 때문에 대단히 만족스럽지. 누군가는 잃고 누군가는 얻었지만 양쪽을 더한 효용은 대단히 커지지 않나? 이게 마을 전체에서 벌어져 봐. 효용가치는 극대화된단 말이야."

"도둑질을 하는데 드는 수고를 빼면 말이죠."

약간 비꼬듯 던진 내 말을 힐끗 바라본 이장이 말을 이었다.

"뭐 최소한의 노력은 있어야 하니까."

"서로 남의 것을 훔치기만 하다 보면 언젠간 모든 물건이 다 없어지지 않겠어요? 그리고 일하는 것보다 도둑질이 낫다고 생각하면 애써 일하려고도 하지 않을 테고. 공산주의가 몰락한 게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잖아요."

"그래서 중용과 조절이 필요한 거 아닌가. 적당한 선에서 멈출 수 있는 절제가 없이는 세상 어느 제도도 성공할 수 없어."

"그렇다고 그걸 강요할 수는 없잖아요."

"강요가 아니지. 어느 누구도 강요하지 않았어. 그게 강제로 이루어졌다면 지금까지 유지되지도 않았겠지. 다만 마을 사람들 스스로 깨닫게 된 거야. 자신에게 꼭 필요한 것만 훔치고 그렇지 않을 때는 직접 일을 해야 서로에게 도움이 된다는 것을. 그리고 사실 언제든 내 것처럼 훔칠 수 있다면 남들도 그게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사실을 누구나 알 수 있지. 그럼 어떻게 되느냐 하면, 내가 애써 훔쳐왔는데 바로 다음날 누군가 훔쳐갈 수 있지. 당장 쓸 필요가 없는 것까지 훔쳐다 쌓아 놓을 필요가 없어지는 거야. 쌓아놔 봤자 다른 사람들이 다 훔쳐갈 테니까. 대신 남의 집에 있는 것이라도 내가 필요하면 언제든 훔쳐올 수 있으니까 결국……."

"마을의 모든 재산은 공유된다는 개념이군요."

"그래. 일종의 공산주의지. 물론 사유권을 보장하면서도 실질적으로는 공산주의고 빈부의 격차도 없는 셈이지."

헐, 얘기가 이렇게 되는구나.

"이건 말이야, 러시아 혁명에서 비롯한 공산주의보다 훨씬 효율성이 뛰어나. 인간적이기도 하고. 일단 재화의 낭비가 없어지지. 내구성이 있고 개인이 자주 사용하지 않는 것은 여럿이 공유해서 닳아 없어질 때까지 사용할 수 있거든. 옷이나 음식물 같은 것도 지금 내가 입고 먹지 않으면 이웃의 누군가 입고 먹으니 버려지는 법이 거의 없다네. 또한 아무리 가난해도 굶주릴 걱정이 없으니 최소한의 생존 기반은 마련되어 있는 셈이지. 자기가 필요한 물건이 어느 집에 있는지 알아야 하니 평소에 이웃들에 대한 관심을 갖지 않을 수도 없고."

그래서 가게 같은 게 전혀 없었구나. 기가 막혔다. 이쯤 되면 하나의 경제체제, 곧 절도경제라고 불러도 될 법하다.

"도둑질에 대한 윤리적 저항은 아주 희석되었다고 해도 남의 집에 들어가 훔치다가 들키는 경우도 있을 텐데."

이번에는 양세팔 씨가 대답했다.

"일단은 주인이 없을 때나 모두 잠들었을 때 도둑질을 시작하지. 하지만 아무리 신중하게 훔친다고 해도 절대 들키지 않을 수는 없지. 주인이 자고 있었다면 계속 자는척하면 그만이지만 현장에서 딱 마주친 경우라면 둘 다 어색해지지. 그럴 경우 집 주인 쪽이 슬쩍 피하거나 도둑이 훔친 물건을 가만히 놓고 가거나, 둘 중의 하나요."

"양쪽이 싸우지는 않습니까?"

"그럴 리가 있나? 이미 합의된 사항인데."

"합의라니요?"

"손님께서는 구두로 약속한 것만 합의라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세상엔 말없이 합의한 게 얼마나 많소?"

"그거야 그렇습니다만, 사실 그런 합의들은 대부분 어릴 때부터 유형무형으로 학습되고 주입된 결과이지 않습니까? 때리지 마라, 거짓말하지 마라, 약속은 지켜야 한다, 사이좋게 지내야 한다 등등."

"이것도 그런 경우라 할 수 있지. 우리는 남의 것을 훔칠지언정 싸우거나 강제로 빼앗지는 않으니까.'"

얼핏 궤변처럼 느껴졌지만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사실 사회적 합의라고 하는 것들도 내용을 뜯어보면 학습되고 주입되고 강요된 것들이 얼마나 많은가.

"돈은 훔치지 않는가요?"

"거의 그래요. 왜냐하면 돈이란 당장 필요한 게 아니거든. 사실 마을 안에서는 전혀 쓸모없는 것 중 하나가 돈이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죄다 훔쳐서 쓰니 무얼 어디서 산단 말인가.

"그렇다고 아주 쓸모가 없다는 건 아니고, 마을 밖의 읍내나 시장에 나가 물건을 얻으려면 돈이 필요하지. 돈을 얻기 위해서는 당연히 마을에서 생산한 물건을 내다 팔아야 하고."

이번엔 친구가 대답했다.

"돈이란 외부와의 교류에만 필요한 거군."

내 말에 친구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마을에 산다면 돈이 필요 없고 필요 없는 만큼 많이 갖고 있지도 않지. 오랜 기간에 걸쳐 조금씩 모아 두었으면 모를까. 그런 연후에야 돈을 갖고 대처에 나가 지낼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을에 피해가 큰 건 아니야."

“훔치는 것보다 남의 집에 가서 필요한 것을 달라고 하면 그냥 내주는 일이 반복돼 관습이 되었으면 훨씬 좋지 않았을까요? 미풍양속이라 할 수도 있겠고.”

“얼핏 생각하면 그게 자연스러울 것 같은데 또 그렇지 않아요. 물론 한두 번이야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지. 어느 마을이나 마찬가지로. 근데 그게 반복되지 못하는 까닭은 공평하지 않기 때문이지.”

“공평이라, 훔치는 것과 어떻게 다른가요?”

“일단 생각해 봅시다. 누가 자기 것도 아닌데 남의 집에 가서 당당하게 달라고 요구할 수 있겠는가. 주는 입장에서 보면 이웃 간의 화목을 위해서는 주는 게 좋다고 생각하지만 흔쾌히 주려는 마음이 바로 생기는 건 아니거든. 마음의 갈등이 자란다는 얘기지. 괜히 손해 본다는 느낌에 바로 그 집에 가서 가져간 걸 달라고 하면 어떻게 되나. 당장 싸움이 나겠지. 반면 훔치는 건 다르지. 내 것을 다른 사람이 훔쳐갔다고 해 봐. 물론 꼭 필요해서 훔쳐간 거지. 그건 훔쳐간 것을 지금 사용하고 있거나 다 써버렸다는 뜻이지. 그러니 훔쳐간 사람에게서 도로 훔쳐오기 어렵고 다른 제삼자에게서 훔쳐올 수밖에 없는 거지. 그런 식으로 돌아가다 보면 다른 사람들에게 미안해 할 필요도 없고 재화는 공평하게 나누어지지.”

이번엔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만족스런 얼굴을 한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이제 어느 정도 의혹이 풀렸나 보군."

나는 대답을 망설였고 그 사이를 여전히 어색한 침묵이 땅거미처럼 기어 다녔다.

"이장님 우리가 이 전통에 대해 이 정도로 얘기를 나눠본 적이 얼마 만이지요?"

"얼마고 자시고 제대로 입 밖에 꺼내놓기나 했나?"

"사실 좋은 관습이고 전통인데 입 밖에 내 놓기는 좀 껄끄러웠지요. 이 사람 친구 분이 와서 제 절도 행각이 드러나는 바람에 속 시원히 까발려졌네요."

양세팔 씨가 너스레를 떨자 모두 껄껄 웃었다.

"무의식에 잠재된 오랜 편견 때문이지. 차라리 잘 된 거야. 우리끼리만 불문율로 해 오던 걸 이렇게 드러내 놓고 공론화시키니 사태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되지 않았나."

도대체 뭐가 객관적으로 본 건지 알 수가 없었지만 나는 그대로 있었다. 잠시 후 보지 못했던 젊은 사람들이 몇 가지 음식을 날라 왔다. 김이 풀풀 나는 수육과 편육, 김치, 그리고 막걸리와 전통주들이었다. 그들은 나이든 순서로 수저와 잔을 돌린 후 잔에 술을 따라 올렸다. 물론 친구와 내게도 차례가 왔다.

"손님이라고 모셔 놓고 변변한 대접 한번 못했는데. 잔 한 잔 드슈."

그 동안 직접 얘기를 나누지 못한 나이 지긋한 양반이 술을 권했다.

"이거 보기엔 이래도 우리 고장의 특산 명주라네. 인근 도시에 나가면 없어서 못 팔 지경이지."

"아, 그런가?"

나는 대꾸하고 술잔을 마을 사람들에게 들어 보인 후 죽 들이켰다. 내가 관록 있는 주당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맛을 볼 줄은 아는데 친구의 말대로 썩 괜찮았다. 물론 술맛의 나머지 절반은 깰 때 드러나기 마련이므로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엑설런트! 라고 할 수는 없지만 지역의 명주라 불려도 괜찮을 듯 싶었다.

가볍게 웃고 떠드는 동안에 몇 순배 돌았다. 잠시 후 친구가 말했다.

"우리 마을의 치부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다 까발려 놨으니 이제 자네에 대해서 얘기해 보세."

"나? 나에 대해서는 자네도 잘 알고 있지 않은가?"

갑작스런 친구의 도전적인 말에 나는 당황해서 되물었다.

"아니, 잘 몰라. 그래서 묻는 건데, 자네는 도대체 누군가?"

"내가 누구냐니, 우연히 만난 옛 친구 아닌가."

"그래. 우연히 만났다고 치고 그럼 전에는 어디서 만났던가?"

"대략 15년쯤 전에 군대에서 동기로 3년이나 근무하지 않았나."

"군대라고? 나는 삼대독자라서 군대에 간 적이 없는데?"

"그럴 리가? 그럼 어제 봤을 때는 왜 아는 척을 했, 나?"

나는 이제 당황을 넘어 혼란을 느꼈다.

"15년쯤 전에는 나도 외지에 있었지. 그런데 군대가 아니라 꽤 이름 있는 영화사에 있었다네. 거기서 세 번째나 네 번째 조감독으로 2, 3년 지냈어. 서너 번째면 국내 최고의 거장 밑에 있다 해도 완전한 시다바리, 심부름꾼인 거라. 제대로 배우지도 못하면서 온갖 구박에 혹사를 다 당했지. 그게 내 복이라면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하지만, 그 힘들고 더러운 꼴을 견딜 수 있었던 건 거기 있는 내내 친하게 지냈던 동료가 있었기 때문이지. 그 친구는 조명도 하고 장치도 하는 전천후였는데 바쁜 와중에도 내 일을 많이 도와줬어. 어제 자네를 만나기 전에 그 친구를 생각했고 바로 그 순간에 자네가 나타난 거야. 반가워 죽는 줄 알았네. 한데 아무리 생각해도 자네, 아니 그 친구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 거야."

"그런가? 그 친구가 나와 많이 닮았나?"

"닮은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똑 같았지."

"나도 그런데. 세상에 이런 우연이 다 있을까."

하루를 꼬박 옛 친구라고 생각했던 사람을 보며 나는 당혹스러웠다. 한 사람이 너무 생긴 게 비슷해서 상대가 옛 친구라고 착각할 수가 있다. 그러나 둘이 동시에 착각할 수는 있을까.

"우연이라, 우연이라면 정말 대단한 우연이겠군. 천 년에 한번 있을까 말까 한. 이런 걸 천재일우라고 하던가?"

"비꼬는 걸 보니 자네는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하나 보군."

"완벽한 우연이란 필연의 다른 이름이다. 어디서 들은 말 같은데 실은 지금 우리의 경우를 보고 생각난 말일세."

옛 친구가 아니란 사실이 드러났음에도 우리는 친구인 양 터놓고 대화를 주고받았다. 그만큼 각자의 과거에서 헤어나지 못하는지도 모르겠다.

"자네는 지금까지의 상황이 우연이 아니라고 보는군."

"맞아. 일단 내 가설을 들어보지. 소문에 도둑마을이라고 알려진 곳이 있었어. 자네는 소문을 듣고 그곳을 수소문했지. 꽤 시간과 노력을 들인 끝에 그 마을의 이름과 위치를 확인할 수 있었지. 하지만 여전히 도둑마을이라는 의미의 실체는 오리무중이었어. 자네는 그 마을 출신 사람들을 만나보기도 하고 주민들의 면면을 확인하기도 했어. 물론 쉽게 실체에 접근하기는 어려웠어. 그러다가 마을 주민 가운데 자네와 동년배인 나를 주목했네. 내가 15년쯤 전에 한 동안 외지에 있었다는 걸 확인하고 나의 옛 친구로 위장하기로 했네. 그 정도의 세월이면 기억이 가물가물하면서도 특정 사건이나 인물에 대해서는 오히려 선명하게 남아있으니까. 기억의 부침과 왜곡이 심하기 때문에 특정 시기와 장소, 그리고 인물에 대한 단서만 던져 놓으면 얼마든지 오랜만에 만난 옛 친구 행세를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 그래서 내가 일했던 영화사에서 15년 전쯤에 있었던 관계자와 스텝들을 만나 나에 대해 알아봤겠지. 마침 나와 친하게 지냈던 동료가 있었어. 자네가 그 친구를 만났는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자네는 그 친구 행세를 하며 우리 마을에 들어와 나를 만나게 되었지. 물론 그 전에 그 친구의 모습과 특징을 그대로 재현할 수 있는 행동거지와 표정, 버릇 그리고 적당한 변장은 꼭 필요했겠지. 이를테면 자네가 쓰고 있는 안경과 있는 듯 없는 듯한 수염 말일세. 자, 어떤가?"

"좀 황당하군."

"원래 가설이란 황당한 구석이 있지. 왜냐하면 가설이란 항상 처음 등장하는 까닭에 낯설고 어색한 법이거든."

"그보다 자네의 이야기에는 동기가 결여되어 있네. 또 내가 기억하고 있는 군대에서의 이야기는 대체 뭐란 말인가?"

"자네의 군대 기억에 대해서 먼저 말하자면 이렇게 볼 수 있지. 적을 속이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부터 속여라. 자네는 나와의 친구 관계를 확실히 하기 위해 익숙하지 않은 영화사보다는 과거 가장 절절했던 시간과 장소인 군대 시절에 묶어 두었다, 이렇게 말하긴 하지만 좀 설득력이 떨어지는군. 도대체 왜 그렇게 기억한 거지? 내가 정신과 의사가 아니니 무슨 말을 해도 타당성이 없기는 마찬가지겠지만. 자네의 동기에 대해서는 단순한 호기심 때문이라고 한다면 꽤 치밀한 준비가 좀 안 맞더군. 우리 마을의 어떤 위법 행위에 대한 적발이 목적이라면 어떨까. 자네는 정부의 어떤 기관에서 왔나?"

"아니."

"그럴 거야. 사실 감찰을 목적으로 왔다고 해도 우리는 크게 걱정하지 않네. 이게 약간의 스캔들이 될지언정 범법행위라고 생각하지는 아니니까. 집단적인 절도 행위가 이루어졌다? 어떤 증거나 증인도 없을 거야. 왜냐하면 우리 모두 부인할 테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이장님?"

"응. 베드로도 주인을 부인했는데 우리가 무슨 통뼈라고 신념을 고집하겠는가. 우린 그런 거 없어. 마을이 잘 돌아가고 주민들이 행복하면 그걸로 되는 거야."

"물론 자네가 우리 마을을 염탐하거나 감찰할 의도가 아니라니 그건 다행인데 그럼 도대체 뭘까. 자네 말대로 단순한 우연일까? 여기에 대해 하나의 단서가 있네."

그러면서 친구는, 아니 옛 친구라고 착각했던 사내는 품에서 책 한 권을 꺼냈다.

"우리가 가장 잘 하는 게 뭔가. 바로 훔치는 일이지. 오늘 오전에 자네 차를 좀 뒤져 봤네. 물론 애초의 의도는 나쁜 게 아니었어. 도무지 자네의 이름이 생각나지 않아 무슨 단서가 없나 싶어서였으니까. 한데 차에서 이걸 발견했네. 세계 마을 기행. 평범한 제목이어서 그냥 넘겨버렸지. 저자도 낯설고. 한데 자꾸 눈길이 가더군. 나온 지 1, 2년쯤 되어 겉은 약간 바랬는데 거의 들쳐본 일이 없을 정도로 새 책인 거야. 이상하지 않은가? 겉이 바랠 정도면 햇빛을 많이 받았다는 얘기고 그만큼 차 안에 오래 있었다는 뜻인데 차 안에 그 정도로 오래 있었다면 제대로 보지 않더라도 들쳐보기는 할 거라고. 재미가 없었다면 어디 치우거나 버렸겠지. 그럼 왜 자네는 이 책을 보지도 않으면서 차에 놓고 다니는 걸까. 그건 자네가 이 책에 대해서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지. 그래서 나는 이 책을 자네가 썼을 것이라고 생각했네. 그렇다면 도무지 생소한 저자의 이름은 무엇일까? 필명? 어쨌든 그래서 흥미가 생긴 나는 내용을 살펴보았지. 제목과 달리 내용은 평범한 게 아니었어. 살인자들의 마을, 원숭이 마을, 사라지는 마을, 죽은 자들의 마을 등 이색적인 내용들뿐이더군. 내가 다른 상황에서 이 책을 봤다면 그저 재미있는 소설이나 이야기책으로 읽었겠지. 한데 이 책의 한 챕터로 우리 마을, 곧 도둑마을이 들어가도 크게 어색하지 않을 것 같았어. 그래서 묻겠는데 자네, 도둑마을이라는 챕터를 쓸 작정인가?"

정면으로 나를 응시하는 그 친구의 눈이 너무 진지해서 나도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하지만 그 생각은 지금 들었네. 자네는 내가 도둑마을이라는 소설을 쓰기 위해 모든 상황을 의도했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정반대일세. 순서가 거꾸로란 얘기지. 여기 와서 도둑마을의 실체를 알고 써 보면 좋겠다고 생각한 거야. 바로 지금."

"그런가? 하지만 내가 소설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자네 말과 내 가설 중 어느 쪽이 더 소설적으로 적절하다고 생각하나? 어느 정도 인과관계가 갖추어진 내 가설이 더 옳지 않은가?"

"자네 가설이 옳다면 그건 내 말을 입증하는 증거가 되네. 소설은 앞뒤의 연관성과 인과관계를 잘 짜야 하지만 현실은 토막토막 끊어지고 지리멸렬한 것이니까."

"하하, 그런가?"

그는 한 방 먹었다는 듯 웃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어쨌든 소설은 자네가 쓰지만 그 원천은 바로 우리일세. 우리는 우리의 이야기가 어떤 식으로 알려질지, 아니 그 이전에 알려져야 할지 말아야 할지 결정할 권리가 있네."

"내가 도둑마을이라는 소설을 쓰지 않았으면 하는 건가?"

"쓰지 말란다면 안 쓸 건가?"

"그럴 수야 없지."

"그렇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적어도 집필 방향과 한계를 정해줄 수는 있지 않을까?"

"어떻게 말인가?"

"일단 자네의 소설과 우리 마을이 직접적인 관계가 없어야겠지. 공권력은 무섭지 않지만 스캔들은 그리 간단한 게 아니거든. 인터넷에 회자되거나 자네 소설을 보고 방송국에서 카메라를 들고 와 보기라도 하면 우리 마을은 단번에 끝장이야. 그래서 소설에 등장한 마을이 현실을 유추하게 해서도 안 되겠고 말야. 그러려면 자넨 이야기를 가능한 황당하게 꾸며야 할 거야."

그리고 그는 술잔에 술을 따라서는 그 안에 흰 가루를 뿌렸다.

"자, 한 잔 들지."

"그건 뭔가?"

"별 거 아닐세."

"별 거 아니라면 거절해도 되는 건가?"

"그건 아니고. 그리 걱정할 건 없네. 자네를 죽이거나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깡그리 잊게 만드는 건 아니니까. 그저 잠시 기분 좋게 잠들었다가 다른 곳에서 깨어날 수 있게 할 뿐이지. 말하자면 이 자리에서 자네와 우리는 헤어지는 거고 이 술잔에 포함된 것은 자네의 소설에 대해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최소한의 의사표시이지. 이걸 받아들인다면 가볍게 들지."

잔을 받아든 나는 친구라 착각한 낯익은 사내와 동네 사람들을 하나하나 둘러보았다. 그리 감회가 깊은 것은 아니었기에 그가 건넨 술잔을 한 번에 들이켰다.

나는 넓고 푸른 들판에 서 있는 차 안에서 아침 햇살을 받고 깨어났다. 그리고 어떤 마을에서 만 하루 동안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이제 황당한 소설을 써야지. 스스로를 리얼리스트라고 생각하는 나로서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데 끝내 생각해 낼 수 없었던 친구로 착각한 인물의 이름을 마지막에도 물어보지 못했다. 이름을 물어봤다면 새로 친구가 될 수 있었을까? 소설 속의 인물에게는 어떤 이름을 붙여야 할까. 그게 가장 고민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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