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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편 엘리제를 위하여(PART. C)

2016.05.01 19:0805.01

 
 C. 용사의 일지
 
 "검은 방.
 새로 하기.
 
 [URS1037FELS]
 
 부정할 수 없는 운명적인 만남이었다. 광대는 여신과 만나버렸다.
 언제나 웃음을 갈구하는 광대에게, 언제나 웃는 여신이라는 존재는 용납할 수 없었다. 언제나 웃고 있다니, 그럼 광대가 존재하는 이유가 없지 않은가.
 광대는 여신을 미워했다.
 '여신님은 왜 언제나 웃고 있죠?'
 그렇게 물어보자 여신은 대답했다. 환하게 웃으며.
 '그러는 당신은 왜 웃고 있지 않죠?'
 광대는 언짢은 기색으로 말했다.
 '멀리서 보세요. 웃고 있다고요. 확실히.'
 멀리서 보니 확실히 광대는 웃고 있었다. 정확하게는, 광대 분장이 붉은 입술 끝을 올리고 있었다.
 광대는 몰랐겠지만, 여신은 그 모습을 보고 마치 자신과 같다고 여겨버렸다. 겉으로 보이는 웃음은 위장이고. 속으로는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는.
 광대도 얼마 지나지 않아 여신의 웃음이 자연스러운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언제나 남의 감정을 의식해 온 광대이기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광대는 생각했다.
 여신의 웃음은 광대에 대한 도전이었다. 여신이 진심으로 웃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만 했다. 그런 의식이 저변에 깔린 것은 이것이 일종의 결투라는 강박 때문이었다. 광대와 여신이 웃음을 두고 벌이는 결투 같은 것.
 광대에게 주어진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일주일에 한 번, 한 시간 남짓. 에프리스는 여신에게 웃음을 주기 위해 여러 가지를 시도하는 듯했고, 광대는 그 방안의 일부일 따름이었다.
 광대는 난감했다. 한 시간. 공연하기에는 턱없이 모자란 시간이었다. 그래서 광대가 선택한 것은 대화였다.
 본디 어릿광대의 역할은 몸짓이다. 멍청하고 어리석고 꼴불견인 몸짓으로 웃음을 준다. 따라서 광대는 입으로 떠들 필요는 없었으며, 자연스레 말수가 적었다.
 그러나 지금은 이야기할 때다. 이야기해야만 한다.
 처음 여신과 만났을 때 거의 모든 시간이 침묵으로 뒤덮였다.
 두 번째 때는 몇 마디 오간 이후 어색함에 짓눌렸다.
 세 번째 때는 다시 침묵이었다.
 네 번째에는 드문드문 이야기할 수 있게 됐다.
 다섯 번째, 말수를 잃어도 어색하지 않게 됐다.
 여섯, 담소를 나누던 중 여신이 환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을 보고 광대의 심장이 크게 요동쳤다. 위화감에 가슴께에 손을 얹어 볼 정도였다. 뭐야, 그런 표정도 지을 수 있었잖아, 하고 생각했다. 여신이 평소에 짓는 웃음 따위 이에 비하면 웃음도 아니었다. 따뜻함과 기쁨을 온전히 표현할 수 있는 아름다운 미소. 아, 그래. 아름다웠다. 그것은 그 미소를 표현하기에 꼭 맞는 표현이었다. 달리 어울리는 말이 또 있을까.
 그러나 여신은 이내 미소를 거두고 울상을 지었다. 광대는 당황했다. 우는 여신이라니,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광경이었다. 여신은 금방 우는 표정을 거두었지만 웃는 와중에도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부탁이니…….'
 여신이 광대에게 말했다.
 '비밀로 해 주세요.'
 광대는 깨달았다. 광대는 이것이 광대와 여신의 결투라고 생각했지만, 실은 아니었던 것이다. 여신 만의 결투. 진심으로 웃지도, 울지도 않겠다는 마음과 진정 웃고 울고 싶다는 마음의 결투.
 주고받은 것은 시시껄렁한 농담뿐이었지만, 광대는 여신의 마음을 엿보았다고 생각했다.
 그 이후 여신은 결코 진심으로 웃지 않게 되었고, 광대는 그 웃음을 다시 보기를 바랐다. 그래, 광대는 그렇게 웃는 여신에게 반해 버렸다. 어찌할 도리도 없이 사랑에 빠져 버린 것이다. 그 웃음은 지금껏 광대가 보아온 웃음 중에서 가장 매력 있는 웃음이었다. 진정 갈구하고픈 웃음이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어느 날 갑자기 무너져 버렸다.
 '엘리제는 내가 데리고 있어요.'
 여신의 얼굴을 한 무언가가 탈을 뒤집어쓴 그 날. 모든 것이 붕괴했다.
 '어디 한 번 구해보시지. 나는 통곡의 마녀, 테레제다.'
 그날. 광대의 뇌리에 많은 것들이 각인되었다.
 울고 있는 듯한 표정이 새겨진 탈이라든가.
 탈을 쓴 누군가가 수많은 사람들을 도려내는 광경이라든가.
 죽은 사람이 일어나 산 사람을 죽이고, 그렇게 죽은 사람이 다시 일어나는 지옥도 같은 모습이라든가.
 귀를 떼어내 버리고 싶을 정도로 울려대는 수많은 비명이라든가.
 그 아비규환의 혼란 속에서 홀로 유유히 서 있는 통곡이 광대를 향해 지껄였던 말들이라든가.
 그러니까, 분명 여신을 구하러 오라고 했었다.
 용사니까 멋지게 구해내라고 했다.
 그런 게 가능하겠냐고, 광대는 생각했다. 광대는 웃음을 갈구할 뿐이다. 광대가 구해야만 하고, 광대가 구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웃음뿐이다. 여신을 구하라고 해도 어찌할 도리가 없다.
 아, 하고 광대는 문득 깨달았다. 어쩌면 그것은 하나의 해답이자, 광대의 결론이었을 것이다.
 여신의 진심 어린 웃음을 구하자.
 그렇게 생각한 순간,
 광대는 용사가 되었다.
 
 용사는 꿈을 꾸었다. 용사는 얼굴과 마주 보고 있었다. 그 얼굴은 행운과 웃음을 가져다준다는 여신의 미소 같기도 했고, 마녀가 쓰고 있던 울고 있는 표정의 탈 같기도 했으며, 광대 분장으로 가린 무표정 같기도 했으며,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마주 본 얼굴이 어떤 이의 얼굴로 어떤 표정을 짓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가슴 언저리가 찢어질 듯이 괴롭다.
 웃고 싶은가 하면 눈물을 흘리고, 기쁘다고 생각하다가도 화가 나고, 편안한 듯하면서 불쾌하며, 포근하면서도 아프고…… 인간이 느낄 수 없는, 방향성이 어긋난 감각이 용사의 몸 내부를 좀먹는다. 심장조차 역류하려는 듯이 요동을 쳐 괴롭다.
 한동안은 그렇게 괴로워했다. 이대로 있으면 먼지처럼 조각조각 마모되어 사라져버리는 것은 아닐까, 하고 무심코 생각해버릴 정도의 시간이 지나고, 그런 생각조차 하지 못할 정도로 여유가 없어질 만큼의 시간이 또 지났다. 그러다가 별안간 심신이 편안해진다. 용사는 몸이 마침내 사라져버렸구나, 하고 생각해버렸다. 어떠한 전조도 없었기에.
 용사는 의식을 되찾으며 자신에게 머리가 있었음을 깨달았다.
 용사는 약간 흐릿한 시야를 인지하며 자신에게 눈이 있었음을 깨달았다. 초점이 되돌아오면서 사람의 형체가 뚜렷해진다. 왠지 모르게 그 얼굴에 떠오른 표정이 무의식중에 마주 보던 얼굴과 비슷하다고 생각해버렸다.
 그리고 용사는 자신에게 귀가 있었음을 깨닫게 된다.
 '베티나라고 해요. 우리 함께 여신님을 구출하도록 하죠.'
 
 마법사는 음침한 표정으로 늘 시선을 땅에 두고 있었다. 주로 사용하는 마법은 골렘 따위를 소환하는 마법. 마물과의 전투 경험이 전무한 용사에게는 큰 전력이었다.
 세계는 혼란에 빠졌다. 여신을 납치한 마왕은 전 세계를 향해 적의를 드러냈고 신과 마는 전쟁을 시작했다. 전쟁에 휘말리기도 하고 전쟁의 중심이 되기도 하면서 용사와 마법사는 전진했다.
 마녀의 단서를 찾아낸 일행은 인적 드문 폐촌에 다다랐다. 늘 땅을 보고 있던 마법사의 두 눈은 용사를 향했다.
 순간 지진이 일어난 줄 알았다. 땅에서 무언가가 격하게 요동친다. 용사는 이 광경을 알고 있었다. 뇌리에 똑똑히 새겨진 죽음의 풍경.
 마법사는 자기 자신에게 걸어 놓았던 왜곡 마법을 해제했다. 그리고 수많은 시체들의 위에 군림했다, 마녀로서.
 네크로맨시. 인간의 생명을 무시하고 짓밟는 마법. 금기. 금지.
 고약한 마법.
 용사는 죽음 앞에서 죽음을 각오했다.
 마녀는 이미 통곡을 뒤집어썼다.
 그리고 마녀의 저주는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수많은 시체를 베어 넘기고 도달한 길의 끝. 마녀는 여전히 탈을 쓰고 있다.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용사로서는 짐작도 할 수 없다.
 용사는 마녀의 배에 자신의 검을 찔러 넣었다. 이겼다, 고 생각했다. 칼을 도로 빼려 했지만, 마녀의 가느다란 왼손이 용사의 손목을 틀어잡는다. 다른 한 손은 탈 위에 얹고, 나지막이 소리를 낸다. 우는 건지 웃는 건지 종잡을 수 없다. 탈을 벗는다. 드러나는 건 익히 알고 있는 얼굴.
 용사는 묻는다. 왜 아직까지도 그 얼굴을 하고 있느냐고.
 마녀는 대답 대신 꼼짝도 못 하는 용사의 얼굴 위에 탈을 씌워 주었다. 마치 그걸로 할 말은 끝이라 고하듯이.
 마녀의 숨은 끊어졌고, 마녀의 저주는 이루어졌다. 탈 안쪽에 빼곡히 적힌 마녀의 수기가 영상처럼 펼쳐지며 용사의 이성에 침투하기 시작했다.
 용사는 해일처럼 펼쳐지는 진상에 경악하고, 또한 마녀가 내린 결단에 한 번 더 경악한다.
 여신을 위해 여신을 죽이겠다니 이게 무슨 소리인가?
 광대도 아니면서 웃기려 들지 마. 그건 내 일이다.
 용사는 마녀를 전면 부정했다. 마녀의 작전에는 어울려 줄 수 없다. 지금의 나는 지금까지 해 온 그대로로 좋다. 이대로 마왕을 무찌르고 여신을 구해내겠다.
 애석하게도 마녀의 탈을 쓰고 용사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때의 용사는 아직 탈의 의미를 모르고 있었다.
 
 마왕은 전에 없이 분노하고 있었다. 용사는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마녀의 말을 전적으로 믿는다면 마왕은 마녀의 자식, 마녀는 마왕의 어머니다. 이성을 잃은 마왕에게 칼을 겨눈다. 마왕 또한 뾰족한 창을 용사에게 겨눈다. 그러나 진실로 겨눈 것은 서로의 마음.
 용사는 여신에게 진정한 웃음을 주기 위해 여기에 있다.
 마왕은 마녀에게 자신의 이름을 받기 위해 여기에 있었다.
 용사는 마녀를 죽였다. 마왕에게 이름을 줄 사람은 이제 어디에도 없다. 그런데 마왕은 왜 이렇게 필사적으로 용사를 죽이려 드는 걸까? 의미 없는 짓일 텐데.
 '애도하는 거야.'
 마왕이 낮게 읊조리는 분노를 용사는 이해하지 못했다. 그리고 마침내 용사는 마왕을 이겼다. 여신을 구속하던 수정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소리가 났다. 용사는 여신을 향해 다가가다가 멈추었다.
 그리고는 빠르게 몸의 통제권을 잃어갔다.
 쓰고 있는 탈이 용사의 귀 가까이에 언어를 속삭였다.
 '말했잖아.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을 실행할 거라고.'
 울고 있는 것도 같고 웃고 있는 것도 같은, 목소리로.
 용사의 안광이 붉게 빛났다. 버서크. 광기라고도 불리는 후광 상태.
 용사의 검은 무참히 여신의 몸을 꿰뚫어버렸다. 용사는 비명을 질러댔으나 입 밖으로 튀어나오지 않았다. 어쩌면 탈 속에 갇혀 메아리치고 있을 뿐인지도 모른다.
 기존의 세계를, 마녀는 그렇게 박살 내 버렸다.
 있을 수 없는 세계. 용사가 여신을 죽여버린 세계.
 그런 세계로 뒤바꾸어서.
 
 영혼이 사라져버린 걸까? 용사에게 의지라는 의지는 깡그리 증발해 버린 듯 했다. 몸을 움직일 수 있게 됐는데도 용사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저 탈이 속삭이는 대로 움직일 뿐. 광대 시절에 친숙했던 꼭두각시 극장의 인형처럼.
 용사는 걸어서 검은 방에 들어서게 되고.
 그렇게 기존의 세계와 작별했다.
 
 [URS1038FELS]
 [URS1039FELS]
 [URS1040FELS]
 …….
 많은 세계를 거쳐 용사는 그저 싸우는 인형이 되었다. 어느 세계에도 마왕과 용사가 있었다. 인형은 더 이상 여신을 위해 싸우지 않았기에 용사라고 불릴 수 없었다.
 의미 없는 싸움이 이어져가고, 처음에는 이기지 못할 것 같이 강대하게 보이던 마왕도 간단히 이길 정도로 성장했다. 수많은 세계에서 마녀를 죽이고 마왕을 죽였다.
 마왕은 질리지도 않고, 단 한 번의 예외도 없이 화를 내며 인형에게 달려들었다. 인형은 문득 마왕이 그 입에 담았던 단어를 떠올렸다.
 애도.
 의미 없는 싸움에도 의미를 부여하는 단어.
 그때에는 이해할 수 없었던 무언가가 인형의 심장을 요동치게 했다.
 이 의미 없는 나날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면, 좀 더 발버둥 쳐도 괜찮지 않을까. 싸우더라도 의미가 없는 건 아니지 않을까. 애도하기 위해서라면 싸워도 되지 않을까. 나를 조종하는 마녀와 싸울 수 있지 않을까. 그래, 따지고 보면 모든 원흉은 마녀였다. 마녀 때문에 나는 여신을 죽인 것이다.
 복수.
 그 또한 의미 없는 싸움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단어.
 인형은 마녀의 탈에 저항하기 시작했다. 당장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곧 알 수 있었다. 마녀가 초조해하는 것을.
 그리고 한 가지 알아낸 것이 있다. 마녀의 계획에 필수 불가결한 요소.
 검은 방.
 인형은 검은 방을 부수어버렸다.
 차원이 뒤틀렸다.
 
 [URSERROR]
 
 인형은 마법사를 만났다. 외관은 익숙하지만, 실제로는 만나본 적이 없는 인물이다. 마녀의 말로는 본디 마녀 대신 용사와 동행했을 운명이었던 여자. 그런 사람을 이제 두 명 만났다.
 마법사들을 가만히 지켜보며, 인형은 마녀와 이야기해 보기로 했다. 당장 화가 나서 검은 방을 부수어 버렸지만, 냉정하게 생각해보니 자신은 아직 마녀의 진의를 모른다. 어떤 마법사가 질문 하나로 일생이 크게 갈라졌듯이, 자신 또한 그러할지도 모른다.
 지금 하고 있는 다른 차원의 여신 구출이 과연 의미가 있는 일인지. 그동안 자신이 얼마나 박탈감을 느꼈는지.
 여신을 구해 봐야 수정은 깨지지 않는다. 인형은 용사가 아니다. 그 세계의 용사는 따로 있었다. 따라서 인형은 다시 다른 세계로 떠난다. 그 순환이 지금까지 무한히 반복되었다.
 마녀가 대답했다.
 '나를 믿어. 나는 구할 수 있어.'
 인형은 믿어 보기로 했다. 마녀를 믿기로 했다.
 사랑해 마지않는 동생을 죽여야 할 정도로 절박했던 마녀를, 자신의 혼을 탈에 담아 목숨을 바칠 정도로 동생을 구하고 싶어 한 마녀를 믿어보기로 했다.
 그렇게 인형은 다시 용사가 되었다.
 '엘리제를 위하여.'
 누군가의 물음에 그렇게 대답하며.
 
 [URS--------]
 
 수많은 여신을 구했다. 그러기 위해 자신의 여신을 죽였다. 자신의 여신만은 구원하지 못한다. 얼마나 많은 시간이 지났을까. 얼마나 많은 여신을 구했을까. 기억은 아득하고 멀다. 그런데도 명확한 것이 있다. 여신을 구한다는 사명. 그걸 또렷이 뇌리에 각인하고 있기에 그는 여전히 용사일 수 있었다.
 외부 세계에서 흘러들어온 용사는 신이 만들어낸 순환을 깨부수었다. 용사가 마왕을 죽이는 순간, 순환은 끝나고, 천신만고 끝에 마왕의 앞에 도달해야 할 다른 용사는 마왕과 대면하지 않고 여신과 만나 행복해질 수 있다. 그리고, 여신을 구하지 못하고 수많은 마왕을 물리친 용사는 끊임없이 강해진다.
 용사는 계속해서 구원한다.
 문득 생각한다. 모든 여신을 구원한 용사는, 나는, 어떻게 되는 걸까. 모든 여신을 구원하면, 그 이후에는 무엇이 있을까.
 무한히 시간은 흐르고, 시간에 따라 마모된 마녀의 탈은 부서졌다. 탈에 걸린 저주에 비하면 어이없을 정도로 간단히 부서졌지만, 탈이 존재했던 시간을 생각해보면 당연한지도 모른다.
 용사는 당황해서 말을 걸어보았지만 마녀는 답하지 않았다.
 물건에는 내구도가 있다. 사람이 언젠가 죽듯, 물건도 언젠가 망가진다.
 용사는 망연자실했다. 마녀를 믿고 지금까지 따라온 게 잘못이었던 걸까?
 터벅터벅.
 얼마나 디뎠는지 모를 정도로 수없이 밟은 검은 방의 바닥. 차원값을 조정해주던 탈이 사라졌다. 그렇다는 것은.
 [URS1037FELS]
 자신의 세계. 마녀가 부순 세계. 일탈한 세계.
 용사는 돌아왔다. 자신이 여신의 생명을 빼앗은 시점에서 시간이 멈춰버린 그곳으로.
 어떡할까. 용사는 여신의 주검 앞에서 생각했다.
 사랑의 증명.
 이제는 추억이 되어버린 마녀는 그렇게 말했었다.
 사랑하기 때문에 죽는 것이고 죽었기 때문에 사랑을 증명했노라고.
 뭐였더라. 용사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었다.
 지금 행하고 있는 마녀의 행동이 신이 '설정'한 것이 아니라고 확신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 대한.
 죽음이 가깝다. 용사는 여신을 따라 죽음을 밟고 그녀의 곁에 가기로 했다.
 그 직전.
 용사의 몸이 황금색으로 빛났다. 용사는 자신의 몸에 새로운 힘이 흘러들어오는 것을 느꼈다.
 통상적으로 반복되는 세계에서는 있을 수 없는 수치. 있어서는 안 되는 수치. 그렇기에 신은 전용 스킬의 습득조건으로 설정해 놓았다.
 용사의 레벨 999.
 습득한 스킬.
 창조. 소멸. 즉사. 소환. 환원. …….
 소생."
 
 ……에 발매되었다가 매우 심각한 버그로 인해 다음 날 전량 회수되어버린 전설의 패키지 게임. 지금 구매하려면 정가의 다섯 배 정도를 지불해야 한다고. 그나마도 시장에 도는 물량이 없어 사실상 부르는 게 가격이다.
 베토벤의 유명한 곡인 「엘리제를 위하여」를 모티프로 하여 그 진행 형식도 A-B-A-C-A인 론도를 연상케 하는 구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사실 구성이나 등장인물의 이름을 제외하고 보면 원곡과 크게 관련이 있어 보이지는 않는다.
 장르는 JWRPG(Just Watching Role Playing Game)를 표방하고 있는데, 진행 방법이 그냥 지켜보기다. 진짜로. 별다른 조작체계 없이 정해진 확률에 따라 분기를 나누고 인공지능을 접목하여 분기 가짓수가 5,000만 가지 이상으로 나뉘는, 그야말로 지옥의 플레이타임을 요구하는 게임이다.
 물론 어디까지나 정상 발매되었을 때의 이야기로, 라스트 보스인 마왕이 게임상에서 사라져버리는 버그 때문에 결국 빛을 보지 못했다. 한 편 게임 정보 사이트의 한 유저가 이를 소재로 짤막한 소설을 쓰기도 했는데……
 -G 위키, 「엘리제의 용사」 항목에서
 
 
초고 완성 2016/4/13
최종 퇴고 2016/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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