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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편 엘리제를 위하여(PART. A)

2016.04.29 08:3004.29

 
 여자가 남자의 검에 찔려 죽었다는 소식은 왕의 귀에까지 닿았다.
 왕은 천지가 뒤흔들릴 정도로 큰 소리로 통곡했다.
 어머니.
 
 A. 마녀의 수기
 
 "루트비히. 세계관이라는 건 세계가 온전할 때만 성립한다는 거 알아? 불완전한 세계 속에서의 세계관이라는 건 무척 부서지기 쉬운 물건이니까. 섬세하기 짝이 없어서 간수를 잘해야 하지. 안 그러면 내 꼴이 나 버리거든.
 그러니까 앞서 네가 읽었던 내 세계관은 이미 부서지다 못해 가루가 되어버린 나의 이야기인 셈이지. 누가 읽고 누가 어떤 감상을 품었든 간에 이제 나와는 상관없는 이야기고 이번에 쓰는 글도 어쩌면 무용지물이 될지도 몰라. 그런 건 한참 전에 각오했으니까 괜찮아. ……괜찮을 거야.
 나는 이미 망가질 대로 망가졌어. 돌이킬 수 없는 지점을 아득히 넘어왔지.
 그러니까. 철저하게 너를 이용하려는 나를 마음껏 경멸하도록 해.
 모든 것은 엘리제를 구하기 위해서야.
 
 원래 짜인 세계관대로라면 나는 네게 죽는 모양이야. 그리고 내 죽음에 대해 전해 들은 마왕은 화가 날 데로 화가 나서 전력으로 너와 싸우게 된다는 거지. 그렇게 싸워서 마왕이 이기면 마왕이 엘리제를 갖고, 네가 이기면 네가 엘리제를 갖고.
 참나. 엘리제가 무슨 물건인 줄 아는가 보지? 웃기고 있어.
 아. 마왕이 화를 내는 이유가 궁금한가?
 원래 나는 끝까지 모르도록 설정된 사실이지만, 이왕 알게 되어 버렸으니 죄다 폭로해 버릴까.
 마왕이라는 녀석. 모든 삿된 것들의 왕이라는 그럴듯한 말을 뱉던데, 그건 그저 이름이 없다는 걸 얼버무리는 말일 뿐이야.
 루트비히는 호문클루스가 뭔지 알고 있어?
 호문클루스는 마력이 인체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알아볼 수 있게 만든 실험용 인체 모형이었는데, 이게 이상한 방향으로 발전하는 바람에 인조 생명체를 뜻하게 됐어. 실현되지는 못했지만 현대의 호문클루스는 모두 이 뜻으로 쓰이지.
 내가 살인에 눈뜨기 전에 몸을 의탁한 곳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한창 관련된 연구와 실험이 진행 중이었어. 그러던 중 실험체 하나가 폭주했고 현장에 있던 여자 하나가 죽었지. 그 이후로 연구는 전면 중단됐고 나는 실패한 실험체를 거두어 기르다가 방생시켜 버렸어.
 자, 마왕의 정체야. 마왕은 그때의 일을 근거로 나를 어머니라고 생각하게 됐나 봐. 내게 이름을 받고 싶어서 오랜 시간 끝에 나를 찾아 온거지. 마왕이라는 어정쩡한 호칭을 내보이면서.
 물론 그 녀석의 겉모습은 이별했을 때와 무척이나 달라져 있었고, 무엇보다도 나는 그 녀석에 관련된 일을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어. 마왕은 그걸 깨닫고 실망했지.
 그리고는 질투하기 시작한 거야. 내 머릿속을 꽉 채운 엘리제라는 이름을. 마왕은 엘리제를 납치하기로 결심했고, 그 결심을 실행했고, 신과의 전쟁을 선포했어. 나 좀 알아주세요, 하는 시위를 그런 식으로 가볍게 저지른 거야. 멍청하고 어리석은 놈. 그래 봐야 나는 죽을 때까지 녀석의 정체를 깨닫지도 못하는데.
 그런 세계인데, 또 이어지는 게 있어. 베티나라는 마법사 말이야. 알고 보니 호문클루스 폭주 사건 때 죽은 여자의 딸이더라고. 그러고 보면 그녀는 원래 너를 돕는 보조자의 역할을 할 운명이었지.
 운명, 빌어먹을 운명.
 그래서 그녀는 나와 마주하고 어떤 직감을 하게 돼. 베티나는 어쩌면 과거의 트라우마와 마주 보아야 할지도 모른다고. 나는 그녀를 알아보지 못 했지만, 베티나는 나를 알아보았고, 이어서 마왕의 정체를 꿰뚫어보게 되지. 그리고 그것이 너의 승리로 이어지는 큰 열쇠가 되고.
 어때, 웃기지? 모두 연결되어 있었어. 연출되어 있었다고!
 차라리 모르고 싶었어.
 내가 이 사실을 알게 된 건 검은 방의 존재를 발견하고부터야.
 
 검은 방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곳이야. 적어도 이 세계에서는. 왜냐하면 그곳은 이곳보다 한 차원 높은 곳이니까.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신계라는 이미지일까?
 내가 그곳을 발견하게 된 건 순전히 세계의 오류 때문이었는데, 세계가 한 번 암전했던 일이 있었어. 그때 나는 엘리제가 갇힌 수정 앞에 있었고, 발견해 버린 거야. 일그러진 수정의 아랫부분을.
 의구심을 가지고 손으로 허공을 휘저으니 그대로 빨려 들어가더라. 그리고는 내 앞에 나타난 거야.
 검은 방이.
 말 그대로 그곳은 검은 방이었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기에 아무것도 없을 수도 있고, 그 어떤 것도 있을 수 있는 공간.
 그곳에는 정말이지 모든 전말이 있었어.
 내가 알 수 없는 채로 끝나야 했던 모든 이야기가 있었지.
 검은 방은, 세계였던 거야. 창조주와 피조물을 연결해주는.
 
 루트비히, 너는 신을 믿으니까 창조론자겠지? 웃기는 건 네가 믿는 그 신조차 만들어진 존재라는 거야.
 진짜 신은 에프리스 따위가 아니야. 진짜 신은 에프리스를 포함한 이 세계 자체를 만들어냈어. 모든 것은 자신들의 유희를 위해서였지. 우리가 행동하는 것을 지켜보며 쾌감을 느끼는 거야. 믿지 못하겠지만, 그들은 정말 관음증 변태들이라고.
 거기에서 그쳤으면 나는 이렇게까지 하지 않았을지도 몰라.
 말했었지?
 나는 이 세상이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싫고 이 세상을 창조해 낸 무책임하고 불공평한 신을 죽이고 싶을 정도로 증오하고 있다고.
 루트비히, 이 세계를 봐. 너는 이 세계가 자연스럽다고 생각해? 생각해 보면 허술한 데가 많아. 마물의 정체는 무엇이며, 마법은 무엇이며, 검기는 또 무엇인지 정확히 규명이 안 된 게 너무나도 많지. 규명이 안 된 게 아니야. '설정'되지 않았을 뿐. 이 세계는 철저히 신의 유희를 위해 만들어진 곳. 그런 귀찮은 부분은 얼렁뚱땅 넘어가 버린 거라고.
 내가 정말로 절망한 건 그 때문만이 아니야. 그것만이라면 나는 이 세계 안에서 노력할 거야. 노력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 근데 이 세계는 그렇게 설계되어 있지 않더라고.
 저기, 루트비히. 너는 너의 여신님을 구출하고 나면 무엇을 할 거야? 갖은 고생 끝에 엘리제를 구하는 데에 성공하면 어떤 표정을 지을 거야? 결혼은 할 거야? 아이는 몇 명 정도 낳을래? 어떤 집에서 살고 싶어? 어떤 가정을 꾸릴 건데?
  상상했어? 상상해 봤어? 그 상상, 정말로 의미가 없을 거야. 왜냐하면 그 뒤는 없거든.
 네가 엘리제를 구하거나 못 구하거나 세계는 그것으로 끝. 신들이 원하는 건 뒷이야기가 아니라 용사가 여신을 구하는 과정, 그뿐이니까. 세계는 여신이 수정 속에 갇힌 그때로 되돌아가서 다시 반복돼. 언제까지 그러느냐고? 당연히 신이 질릴 때까지지. 신이 질리면 반복이 멈추느냐고? 반복도 멈추겠지. 세계가 멈추어 버릴 테니. 우리는 그대로 방치되다가 사라질 운명일 테고.
 하하. 내가 지금 농담하는 거라 생각해?
 너는 그래도 나아. 이 세계의 주인공이니까. 너는 순간이나마 엘리제를 구할 수 있으니까.
 난 안 돼. 나는 어떻게 해도 엘리제를 구할 수 없어. 이 세계에서 엘리제를 제일 생각해주고, 제일 구하고 싶어 하는 것은 나인데, 내가 엘리제를 구하는 장면은 '설정'되어 있지 않아.
 이 얼마나 허무하고, 허탈하고, 어이없는 세계야?
 이 얼마나 말도 안 되고, 모순투성이고, 부수어버리고 싶은 세계냐고.
 이 세계는 네가 마왕을 무찌르느냐, 무찌르지 못하느냐에 초점을 두고 만들어졌으니까.
 나는 탈락이 예정된 조연 배우일 뿐.
 그래서 결심한 거야.
 부수어 버리자. 이 세계.
 
 나는 검은 방에서 최초의 시간, 엘리제가 수정에 갇힌 장면으로 돌아갔어. 최초라는 것은 말 그대로 최초야. 세계의 맨 끝자락. 그 이전은 없어. 그 이전은 '설정'만 되어 있거든. 심지어 너와 나의 만남조차 말이야.
 어쨌든 나는 계획했던 데로 움직였어. 에프리스 측에서 베티나에게 찾아가기 전에 내가 먼저 그녀를 찾아갔지. 그녀를 죽이고 왜곡 마법을 사용했어. 베티나로 변장해서 그녀의 역할을 빼앗은 거야.
 나는 베티나가 됐어. 베티나처럼 원소 마법은 못 사용하지만 소환 마법만 사용했는데도 넌 전혀 의심하지 않더라. 나는 긴 시간 동안 너와 여행을 하며 매우 긴 저주를 만들어 내는 데에 성공했어. 결정적인 순간은 그거였지. 동료인 줄 알았던 베티나가, 실은 자신을 절망케 했던 마녀가 변장했었던 모습이었다니. 그 충격이 네 정신을 흐트러뜨리고 내 저주는 성공적으로 네게 걸렸지. 아마 신들도 즐겁게 보지 않았을까? 동료의 배신이라는 거 이야기의 클리셰잖아.
 그 저주는 네가 알다시피, 네가 내 배 한가운데를 뚫어버리면서, 내가 탈을 벗어 움직이지 못하는 네 얼굴에 씌움으로써 성립되었지.
 그 통곡엔 말이야, 두 가지 저주가 걸려 있어. 절대로 벗겨지지 않는다는 저주와, 마녀 테레제의 원혼이 깃들어있다는 저주 말이야. 네가 찔렀던 나는 그야말로 껍데기에 불과했던 거야. 본체는 탈이었지.
 앗. 방금 생각했지. 내가 네 역할을 가로채서 엘리제를 구하려 한다고 말이야. 뭐, 반은 맞았고 반은 틀렸어. 생각해 봐, 네가 생각한 대로라면 세계는 또다시 과거로 돌아갈 뿐이라고?
 나는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을 실행할 생각이야. 이 세계가 과거로 회귀하는 것을 멈추기 위해서 말이야. 세계가 회귀하는 조건은 두 가지. 용사가 마왕을 무찌르고 여신을 구한다. 혹은, 마왕이 용사를 죽이고 여신을 차지한다.
 그렇다면 루트비히, 회귀를 멈추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정답이야. 공통되는 조건을 없애버리면 간단하지.
 진심이냐고?
 물론.
 나는 엘리제를 죽일 거야.
 엘리제를 위하여."
 
 
 초고 완성 2016/3/14
 최종 퇴고 2016/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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