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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편 하늘의 탑

2015.11.02 12:1311.02

하늘의 탑


내가 찾아갔을 때, 산 중턱에 사는 형은 여러 가지 약초 냄새가 자욱한 마당에서 왠 나무통을 줄에 메달아 빙빙 돌리고 있었다. 다가오는 나를 발견한 형은 하던 일을 멈추고 환하게 웃으며 나에게 다가왔다. 우리 형제는 함께 자라 온 지난 세월의 깊은 무게가 담긴 단단한 포옹을 나누었다. 가녀린 술집 여자를 안는 정도의 부피감이 팔 안쪽에 느껴졌다. 글쟁이의 길을 선택한 형은 나와 키는 비슷했지만 몸무게는 훨씬 가벼웠다.

오랜만이다.

그러게. 뭐하고 있던 거야?

아, 이거? 옆 집 종이꾼 주려고 현호색으로 진통약을 만들고 있었다. 이렇게 하면 바깥쪽으로 당기는 힘 때문에 나무통 바닥으로 주약 성분이 가라앉거든. 그럼 위쪽의 찌꺼기는 버려주는 거지. 자, 이렇게!

그러더니 조그만 아기에게 뭔가 보여주려는 꼬마 형 같은 표정으로, 그 여린 팔에 힘을 주어 나무통을 아까보다도 더욱 빠르게 돌리기 시작했다. 줄은 더 버틸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팽팽해져, 공기를 가르며 비명 소리를 내지르기 시작했다.

이런 힘을 원심력이라고 불러.

하지만 나는 한낱 나무통 따위에 더 이상 관심을 가질 수 없었다.

오를 거야. 날짜가 정해졌어.

툭 던진 내 말에 형은 미소를 거두고 내 쪽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는 나무통을 마루 위에 가만히 내려놓으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바람이 불어와 선비의 흰색 두루마기를 휘날렸다. 마치 산도 따라 한숨을 내쉬는 것처럼.

그렇구나. 언제?

나는 손을 꼽아 날을 세어 보았다. 이틀에 한 번 열리는 탑의 문이 어제 열렸고, 내 앞에는 다섯 명의 대기자들이 남아있다.

열 하루 뒤.

그래도 많이 남았구나.

형이 미소 지었다. 나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고개를 가로저어 머리칼 속에 눈빛을 숨겼다. 

주변을 정리하기엔 그다지 넉넉하진 않지. 오늘은 작별 인사를 하러 찾아왔어.

“…그래, 잘 왔다. 오늘은 자고 가.

해 지기 전에 가 볼 데가 있어.

형의 눈에 피만큼 진한 아쉬움이 번진다. 그럴 만 하다. 탑에 오르게 되면 아마 우리 형제는 다시는 만나지 못할 테니까. 나는 형의 시선을 애써 뒤로 하고, 가져온 칼과 활 따위를 마당 구석에 기대어 놓았다. 어쩐지 뒤통수가 아려 온다. 손을 들어 벅벅 긁었다.

형수님은?

아이들하고 물 뜨러 갔다. 곧 돌아올 거야.

그래.

형이 가죽 칼집 속에 들어 있는 칼을 쓰다듬다가, 미소를 지으며 나를 돌아보았다.

정말 멋지구나. 아버님께서 살아계셨으면 자랑스러워 하셨을 거다.

“…뭐 그러셨겠지.

마루에 앉으며 별 관심 없다는 투로 중얼거렸다. 형이 다가와서는 내 눈치를 살폈다.

아직도 아버님에게 서운한 거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형은 열 여덟이 되었을 때 글을 선택했다는 이유로 집에서 쫓겨났다. 그런 형이, 마치 자신은 조금도 서운한 감정이 없다는 듯 나에게 이렇게 묻다니. 생각조차 하지 못한 질문에 당황하여 대답을 찾지 못하고 있는데, 형이 내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을 이었다.

넌 할 수 있어. 나는 너처럼 단단하고 강한 용사는 여태껏 본 적이 없다. 진지한 눈길을 마주 바라보던 나는 시선을 천천히 칼로 돌렸다.

아버지의 강요로 택한 길일 뿐이야. 나는 붓이 잡고 싶었어.

말하면서도 내가 하는 말을 믿을 수가 없다. 번데기 앞에서 주름이 많다고 징징대는 꼴이다. 하지만 형, 그러니까 나보다 훨씬 심한 강요를 견뎌내야 했던 이 가련한 번데기는 그 당시의 상처는 다 잊은 것처럼 놀랍도록 차분한 어조로 대답했다.

수련원에서도 성적이 좋았다며? 어머님께 들었어. 사내가 이름을 날리려면, 하고 싶은 일보다는 잘 하는 일을 해야 하는 법이다.

이젠 형이 아버지처럼 말하네.

형은 입가에 다정한 미소를 띄웠다.

그럼. 나도 이제 내 아이들의 아버지니까.

나는 한숨이 나왔다. 형은 집에서 쫓겨난 이후로 여러 해 동안 이곳 저곳을 전전하다, 결국 어떤 하급 벼슬아치 선비의 도움을 받아 이 곳에 정착했다. 그런 생고생을 하고도, 저런 말을 저렇게나 태평하게 웃으면서 입에 올릴 수 있다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럼 형은 과거의 선택을 후회해?

과거의 선택?

나는 수련원 대신 여기로 온 거 말야 라고 말하는 대신, 턱으로 형의 이 집 주변을 주욱 둘러쳤다. 형이 무슨 말인지 알겠다는 듯 후후 웃으며 대답했다.

난 오히려 내가 잘 하는 일을 선택한 쪽이지. 싸움을 잘하지 못했지만 머리는 좋았잖냐. 어렸을 때, 못된 놈들이 시비를 걸면 항상 내가 꾀를 내고 네가 힘을 써서 그 애들을 곯려주곤 했으니까. 기억 나지?

나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속으로 동의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런 삶을 겪어내고도 이렇게 말해 줄 수 있는 사내라면, 비록 몸은 여릴지언정 정신은 무쇠처럼 단단할 것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칼 대신 붓을 잡는 것이 당연하다. 형은 조용히 말을 이었다.

사랑하는 동생아. 네가 탑에 올라 영웅이 되고 훗날 전쟁에서 이 나라를 구해내는 날, 사람들이 너의 이름을 얼마나 칭송하게 될지 생각해 봐! 열 해 전 맥구루에서 쳐들어 왔을 때, 탑의 영웅들이 내려와서 포위된 서울을 구해낸 거 기억하지? 네가 그 전설의 다음 주인공이 되는 거야! 조카들은 서당에서 널 자랑하느라 정신이 없을걸?

그래, 그래, 알았어.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슬며시 내려앉았다. 아마도 갑작스레 떠오른 과거의 추억들, 그리고 앞으로 내가 이루고자 하는 목표가, 내게 전해져 온 형의 진심과 함께 내 안에서 촘촘하게 바느질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그 실을 타고 불쑥 들어온 형의 제안도 나는 차마 거절할 수 없었다.

자고 가. 영웅이 되기 전에 마지막으로 옛날처럼 한 방에서 자 보자. 마누라는 애들하고 자라고 할게.

알았어.

무심코 대답하고 나서야 아차 싶었다. 아, 젠장. 꽃방에서 구슬이가 기다릴 텐데. 하지만 밝게 웃는 형님의 얼굴을 보니 다시 말을 바꿀 수도 없다. 에라 모르겠다. 내가 늦게까지 가지 않으면 어차피 다른 손님을 받겠지 뭐. 


경쾌한 악기 소리가 굿판을 울린다. 탑으로 들어가는 용사들을 관리하는 등탑관리청의 앞마당은 소원을 빌러 온 사람들이나 굿판을 구경 온 사람들로 언제나 만원이었다. 이승과 하늘을 이어주는 탑은 그 자체로 숭배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했을 뿐만 아니라, 우리 온바라기를 수호하는 영웅들이 있는 곳이었기에 그 영험함을 최고로 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굿판으로 다가갔다. 탑을 우러러 굿을 벌이는 주인은 도전하는 용사들에게 인색하지 않기 마련이다. 주인은 내 행색을 알아보고 국밥을 내주면서, 자신의 조상 중에 탑의 끝에 도달한 영웅이 있다고 자랑했다. 나는 대충 장단을 맞춰주고 고개를 끄덕이면서 이승에서의 마지막 식사를 마무리했다.


탑은 강 한 가운데 외로이 떠 있는 섬 위에 그 뿌리를 박고 있었다. 등탑관리청에 들어선 나는 벼슬아치에게 명패를 받았다. 나무로 만들어진 손바닥 크기의 네모난 명패에는 내 이름과 오늘 날짜가 적혀 있었다. 뒷마당에 있는 나루에서 기다리던 사공에게 명패를 보여주자 배에 태워주었다.

몇살이우?

스물입니다.

온바라기 사람이지? 수련원을 나오고 바로 올라가는 겐가?

.

사공은 혀를 찼다.

여자도 안아보지 못했겠군.

혼례는 치르지 못했지만, 어차피 탑에 오를 거라면 홀몸으로 오르는 게 낫죠.

나이 많은 사공은 껄껄 웃었다.

요즘 보기 드문 순박하고 착한 친구구만? 그래, 어차피 탑을 끝까지 올라 선녀님을 만나면 이승 여자는 생각도 나지 않을 게야.

나는 구슬이 얘기를 꺼낼까 하다가 그만두고 탑을 향해 눈길을 돌렸다. 탑의 끝자락을 쫓던 시선은, 구름 한 점 없는 창공을 뚫고 그 너머까지 아득하게 솟은 그 높이를 따라잡지 못했다. 올려다 보는 목이 뻐근해져 왔다. 나는 현기증을 느끼기 전에 얼른 고개를 내렸다.


섬에 내려주고 돌아가는 사공을 향해 손을 흔들고 나서, 나는 탑의 벽으로 다가갔다. 통째로 연마된 흑요석마냥, 거대한 탑의 짙푸른 피부는 아무 이음새도 없이 매끈했다. 산에서 깎아낸 돌을 쌓아 건설한 성벽만 보아온 나에겐 대단히 이질적일 수 밖에 없는 자태였다.

반질반질한 벽면을 따라가다 보니 네모꼴로 빨려 들어가듯 푹 패인 곳이 나타났다. 그 안에 도사린 시꺼먼 어둠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 탑의 입구인 것이 분명했다. 그 위에는 저 유명한 글귀, 수 많은 용사들을 이 탑으로 끌어들인 바로 그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적들을 물리치고 이 탑의 꼭대기에 닿는 영웅은 이 세상의 마지막까지 살리라

 

주문처럼 나직이 읊조리는 동안, 어둠은 맞은편에서 차분히 나를 마주보았다. 그 까마득함은 어서 들어오라고 유혹하는 것 같기도 하고, 들어오면 가만 두지 않겠다고 위협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나는, 나를 살며시 잡아 끄는 보이지 않는 힘을 느꼈다. 대단히 미약하지만 분명 존재해서, 갑자기 이성을 잃고 쓰러진다면 왠지 하필 저 입구 쪽으로 넘어지게 할 것 같은, 애매하고 신비로운 힘이다. 어쩌면 필멸의 존재인 인간으로서 가질 수 밖에 없는 영생에 대한 어쩔 수 없는 욕심일지도.

시선을 돌려 입구의 옆면에 새겨진 손톱만한 글씨들을 눈에 담았다. 아름다운 글씨체로 음각된 수많은 사람들의 이름들이, 햇빛 아래서도 분명하지만 은은한 초록빛으로 빛나고 있다. 그 중에는 선우, 도신타, 아난길을 비롯하여 수 세대 전에 탑으로 들어갔다고 전해지는 유명한 영웅의 이름들도 있었다. 손가락 끝으로 그 이름들을 쓰다듬고, 다시 어둠을 바라보았다.

이 안으로 한번 들어가면 다시는 나올 수 없다. 돌이킬 수 없는 일을 할 때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듯이, 나는 잠시 고개를 뒤로 돌려 이승의 풍경을 눈에 담아 보았다. 꽥꽥거리며 강 수면을 치고 날아오르는 새들과 그 너머 펼쳐진 싱그러운 초록빛 들판과 나무들. 큰 어깨로 지평선을 가리고 선 푸른 산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짜릿하게 내리쬐는 한여름의 햇살이라. 마지막 풍경으로 나쁘지 않다.

가족들과 친구들의 얼굴을 하나씩 되새긴 후, 나는 심호흡을 했다. 이제 들어갈 때다. 지금까지 수도 없이 담금질해 온 각오를 되새기며 칼을 뽑았다. 전투 자세를 잡았다. 익숙하다. 마치 잃어버렸던 삶의 뿌리를 되찾은 것처럼 마음이 평안해지며 자신감이 솟는다. 나는 어둠 속으로 뛰어들었다.



눈은 곧 어둠 속에 적응했지만, 다리와 허파는 생전 처음 보는 길이의 계단에 적응하지 못했다. 나라에서 가장 큰 사원인 온조델의 계단도 이 탑의 계단에 비하면 한낱 산책 나온 수준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끝이 보이지 않는 긴 계단을 살아서 오르기 위해 나는 몇 차례나 휴식을 취해야 했다. 다행히 계단 중간 중간에는 작은 약수터가 설치되어 있었다. 온 몸의 피가 전부 땀으로 빠져나간 것처럼 목이 말랐기 때문에, 약수터를 마주칠 때마다 물을 양껏 들이켰다.

이윽고 계단이 끝나고 돌로 만들어진 육중한 문을 마주하게 되었다. 나는 다리에 힘이 풀려 바닥에 드러누운 채 가쁜 숨을 몰아 쉬었다. 기분이, 오히려 개운하다. 나의 다리와 허파는 오늘의 고통이 진할수록 한층 더 강해질 것임을 스스로 알고 있는 듯, 통증을 즐기고 있었다. 수련원을 졸업한 이래 이렇게 지칠 정도로 몸을 움직인 것이 얼마만이었던가. 어쩌면 내 몸은 성장을 위한 극한의 소진을 기다려 왔던 것일지도 모른다.

한참을 찬 바닥에서 몸을 식히고 나서 가만히 몸을 일으켜 문으로 다가갔다. 수련원에서 몸이 부서져라 칼을 휘두르고 활을 쏜 것은 이 탑에서의 싸움을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이 문은 아마도 그 전장으로 통하는 문이고, 저 너머에서는 첫 상대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나는 마른 침을 삼키며 발을 내디뎠다. 그 때였다. 갑자기 문이 드르륵 돌 갈리는 소리를 내며 옆으로 열리기 시작했다. 나는 화들짝 놀라 급히 칼을 꺼내 들었다. 누가 안에서 열고 있는 것이다. 전투를 대비해야 했다. 갑작스러운 급습을 받고 허무하게 끝날 수는 없다!

그러나 문 뒤에 펼쳐진 것은 그저 빈 공간이었다. 한 평 남짓한 좁은 방을 미약한 등불 하나만이 밝히고 있다. 벽도 바닥도 천장도 푸르스름하고 매끈한 재질로 되어 있었다. 나는 언제라도 방어할 수 있도록 칼을 비스듬히 든 채 조심스럽게 안쪽을 살폈다. 정말 아무것도 없다.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이 탑에 들어온 이상 전투를 치러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준비되지 않은 상태로 적을 맞고 싶지는 않았다. 두근대던 심장이 안정적으로 잦아들자, 나는 문 너머 좁은 공간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다음 순간, 뒤에 있던 문이 쾅 소리를 내며 닫혔다. 놀란 심장이 다시 빠르게 진동하기 시작한다. 앞쪽의 문 위에 마치 누군가 날카로운 손톱으로 할퀸 상처처럼 보이는 길다란 자국 다섯 개가 푸르스름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곧이어 그 중 제일 오른쪽에 있던 자국의 불빛이 꺼지고, 오른쪽에서 두 번째 자국의 불빛도 연달아 꺼졌다. 다섯을 세는 것이었다. 나는 불빛이 다 꺼지는 순간 저 문이 열릴 것임을 직감했다. 불이 두 개 남았을 때 화살을 활시위에 메겼다. 눈동자가 불빛과 닫혀진 문을 빠르게 번갈아 보았다. 마지막 불빛이 꺼지기 직전, 나는 팽팽하게 활시위를 당기고 문을 겨누었다. 그리고 곧이어, 문이 열렸다.

저 너머의 방은 비교적 넓고 밝아 보였다. 놀랍게도 바닥은 흙으로 되어 있었고, 나이 지긋한 어르신의 반쯤 벗겨진 머리처럼 군데군데 풀과 나무까지 심어져 있었다. 그 한가운데에는 나티 한 마리가 서 있었다. 복숭아처럼 생긴 두 개의 머리가 길다란 목을 통해 연결되어 있다. 웅가시라고 불리는 흔한 녀석이다. 양 쪽의 머리에는 네 개의 갈고리가 대칭형으로 손가락처럼 튀어나와 있었고, 머리 한가운데에는 날카로운 가시가 튀어나와 있다. 한 쪽 머리를 들고 있는 동안 다른 머리는 땅에 박혀서 목과 반대쪽 머리를 지탱한다. 녀석은 나를 발견한 듯, 땅에 박혀 있는 쪽 머리를 축으로 하여, 목이 움직여 반대쪽 머리를 위협적으로 휘둘렀다. 이 녀석은 상대하는 것이 간단하다. 그냥 몸을 지탱하느라 고정되어 있는 바닥 쪽 머리를 쏴 주면 끝이다. 나는 화살로 바닥에 있는 머리를 겨누었고, 활시위를 놓았다.

휙 하는 소리가 울리고 화살이 날아갔다. 순간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땅에 박혀 있던 머리가 튀어 올랐다. 화살은 머리가 있던 빈 공간을 훑고 지나가 바닥에 박혔다. 그와 동시에, 반대쪽 머리, 그러니까 위쪽에서 위협적으로 휘두르던 쪽이 바닥에 내려와 땅을 붙잡았다. 평범한 웅가시는 안정적인 움직임을 위해 항상 한 쪽 머리는 바닥에 붙인 채 움직인다. 쉽게 생각한 것은 오산이었다. 나는 조금 당황했지만 바로 숨을 고르며 다시 활을 겨눴다. 이번에는 위쪽 머리를 조준했다.

퍽!

화살을 날린 순간 나는 깜짝 놀랐다. 문 위쪽에 숨어있던 또 다른 웅가시가 날카로운 가시를 앞세워 내가 서 있는 좁은 방으로 들어오다 마침 내가 날린 화살에 관통 당한 것이다. 기괴한 비명소리와 함께, 녀석은 샛노란 피를 흘리며 땅에 털썩 쓰러졌다. 이어서 문 위쪽에 박혀 있던 반대쪽 머리도 힘없이 땅으로 무너져 내렸다. 배설물 냄새가 코를 찔러왔다. 나는 침을 삼키며 칼을 뽑아 들었다. 적은 하나가 아니었다. 문 근처에 다른 녀석들이 있다면, 방어가 어려운 활은 아무래도 불리한 무기다. 문으로 다가가, 웅가시 시체에서 살점을 썰어 내고는 시체 위쪽으로 그것을 던져 보았다. 아무 반응이 없다. 나를 마주하고 있는 웅가시만 빤히 주둥이를 흔들거리며 쉬식거릴 뿐이었다. 다행히도 이제 남은 녀석은 저 녀석 정도인 것 같다. 죽은 웅가시 위쪽으로 고개를 살짝 내밀어 주변에 다른 나티가 없다는 것을 확인한 나는, 양손으로 칼을 든 채 조심스럽게 방 안으로 발을 내디뎠다. 그리고 나를 기다리는 저 웅가시를 마주 보았다.

잠시 내 기척을 살피던 녀석은 갑자기 머리를 날려 이 쪽으로 굴러오기 시작했다. 양 주둥이가 번갈아 땅을 짚으며 쿵쾅거리는 소리를 냈다. 나는 몸을 왼쪽으로 굴려 녀석을 피했다. 목을 이리저리 휘저으며 공격해 오는 녀석의 가시를 칼로 몇 차례 막아냈다. 방향을 바꾸기 위해 크게 도는 틈을 노려 칼을 그었지만, 그 때마다 녀석은 목을 기상천외하게 휘어서 공격을 피했다. 한 차례 실랑이가 끝나고 나서, 나는 잠시 거리를 두고 숨을 골랐다. 녀석은 쉬식거리며 나를 마주보았다. 칼의 끝을 겨누고 상대를 노려보던 나는 문득 웅가시의 약점을 떠올렸다. 수련원 선배에게 듣긴 했지만, 웅가시 자체가 상대하기 너무 쉬워서 지금까지는 이용할 필요가 없었던 약점. 나는 입을 둥글게 모아, 그 녀석이 내는 소리를 따라 쉬 하는 소리를 흘렸다. 그러자 녀석이 부르르 떨며 두리번거린다. 뺨에 흘러 내리는 땀 사이로 나는 씨익 미소를 지었다. 

칼을 세워 돌진한 나는 그 녀석의 코 앞에서 아까의 쉬식거리는 소리를 내며 칼을 휘둘렀다. 순간 움찔한 녀석의 목이 칼날에 잘리며, 샛노란 피가 뿜어져 나왔다.


다음의 다섯 개 관문에서 나는 분홍색 근육덩어리 나티 마랄과, 수십 개의 검은 막대기들을 이어 붙인 듯한 모습의 가굴을 상대했다. 전장에서 승리한 후 건너편의 문을 지나면, 다시 꽤 긴 계단이 나타났고 그 끝에는 다음 좁은 방과 전장이 이어졌다. 새로운 종의 나티를 만날 때마다, 먼저 두 마리와 싸우고 다음으로는 세 마리를 상대하는 패턴이 반복되었다.

마랄은 접근했다간 예상하지 못한 형태로 휘감겨 버릴 수 있기 때문에 이리저리 도망 다니면서 원거리에서 공격하여 화살로 고슴도치를 만들어 주었다. 그리고 가굴은 단단한 막대기들을 휘둘러 왔는데, 칼로 관절에 해당하는 부분을 끊어서 해체해야 했다.

다섯 번째 전장을 지나니 이미 체력의 한계가 느껴졌다. 다음 방에서 세 마리의 가굴들을 상대하려면 아무래도 일단 이번 계단에서 잠을 자야겠다고 생각하며 나는 계단으로 통하는 문을 열었다.

검은 옷을 입고 검은 삿갓을 깊이 눌러쓴 사내가 서 있었다. 예상치 못한 존재의 등장에 나는 놀라 움찔하며 칼을 빼 들었다. 그가 손을 들어 무기가 없음을 보이곤 말했다.

나는 길잡이다. 그대와 같은 도전자들이 탑을 오르는 것을 돕기 위해, 다섯 개의 방을 지날 때마다 한 번씩 필요한 물건을 제공해 줄 것이다. 먹을 것이 필요하다면 먹을 것을 주고, 무기를 다듬을 도구나 화살이 필요하다면 그 또한 제공해 준다. 무엇이 필요한지 말해라.

음식을 준다구요?

필요하다면.

그렇군. 역시 이런 탑을 밥도 안 주고 오르라고 하진 않겠지. 가져온 떡이 사흘치는 있지만, 지금으로선 달리 필요한 것도 없다.

다른 도전자들은 보통 무엇을 달라고 하던가요?

보통은 음식이지.

 그럼 저도 음식으로 하겠어요.

길잡이라는 사람은 품에서 뭔가를 꺼내 내밀었다. 주먹만한 크기의 작은 호리병이었다.

물이 아니라 음식 말입니다.

마셔보기나 해라. 한번에 다 먹지는 말고.

호리병을 눈 바로 앞까지 들이대는 통에 얼결에 그것을 받아 든 나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뚜껑을 열어 내용물을 입에 털어 넣었다. 끈적한 액체가 입으로 들어왔다. 처음 맛보는 맛이었는데 그다지 감미롭지는 않았고, 식감은 죽과 비슷했다. 꿀꺽 삼켰다. 놀랍게도 고작 한 모금 먹었을 뿐인데 허기가 가신다. 나는 길잡이에게 고개를 끄덕여 답례했다. 

고맙군요. 이 안에서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거라곤 생각 못했어요.

“…”

호리병을 다시 그에게 내밀자, 그는 손을 내저었다.

네게 준 거야. 가져라. 벌레즙이라는 건데 한 병이면 나흘은 족히 버틸 것이다.

벌레즙이요?

머릿속을 송충이, 지렁이 따위의 절지동물들이 우르르 몰려와 꾸물럭대며 지나갔다. 갑자기 구역질이 난다. 위장 속에 내려앉은 역겨운 액체를 끄집어내려고 몸을 들썩이는데 길잡이가 제지했다.

네가 생각하는 그런 건 아니다. 이건 하늘님이 아득한 옛날에 사람을 만드실 때 사용한 원료야.

근데 대체 왜 벌레즙이라고 부르는데요?

사람은 벌레로 만들어졌어. 무당들한테 못 들었냐. 어쨌든 걱정 마라. 이것만 한 해 내내 먹어도 활동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을 거니까.

울먹거리는 위장을 애써 달랜다.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심호흡을 하자 토할 기미가 조금씩 사라져 갔다.

한 해 내내 먹는다면 이 탑의 끝까지 오르는 데 한 해가 넘는 시간이 걸린다는 건가요?

그건 사람마다 다르지. 궁금하면 네가 직접 알아봐라.

그는 퉁명스럽게 대답하더니, 볼 일이 끝났다는 듯 어둠 속으로 서서히 사라져 버렸다.


다음 날 아침 일어난 나는 계단 중간에 있는 구멍을 통해 용변을 보았다. 이 탑은 생각보다 사람의 생활에 대한 배려가 갖추어져 있었다. 형님이 챙겨준 떡을 한 움큼 집어 입에 넣고 우물거렸다. 처음에는 아껴 먹으려고 했지만, 다섯 층 마다 먹을 것이 제공된다는 것을 알았으니 이제 그럴 필요가 없었다.

푹 잔 덕분에 피로가 풀리고 힘이 넘친다. 근육에는 최상의 활기가 돌아 어서 빨리 움직이고 싶다고 아우성이었다. 몸이 근질근질했다. 단숨에 계단을 뛰어올라간 나는 가굴 세 마리를 빠르게 훑어버렸다. 그 다음으로 친네라고 불리는 녀석을 상대했다. 몸통 앞뒤로 난 작은 돌기들로 붙어 길다란 군체를 이루다가, 위급할 땐 뿔뿔이 흩어지는 녀석이었다. 일일이 한 개체씩 묵사발을 내 주는 게 귀찮긴 했지만, 그다지 어려운 상대는 아니었다.

길잡이는 자신이 말한 대로 다섯 방을 지날 때마다 나타났다. 그는 긴 검은색 망토를 걸치고 챙이 넓은 삿갓을 쓰고 있었다. 입맛 떨어지는 이름이었지만, 그가 제공하는 벌레즙은 아주 조금만 먹어도 충분히 배가 불렀기에 휴대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효율적인 음식이었다. 게다가 길잡이에 의하면, 벌레즙은 상처에도 효과적이라고 했다.

나는 그에게 벌레즙 말고도 칼을 갈기 위한 숫돌, 화살 따위를 공급받으며 계속 올라갔다. 올라가면서 상대하는 나티들은 점점 더 강해졌지만, 나 또한 전투를 겪으면서 더 강해졌다. 마치 탑 전체가 하나의 수련원처럼 도전자들을 단련시키는 것 같았다.


하루는 전장을 나오니 처음 보는 커다란 문이 보였다. 지금까지와 달리 은색으로 빛나는 문이었다. 내 키의 두 배 정도 되는 웅장한 높이의 문 표면에는 좌우대칭으로 새겨진 화려한 곡선 문양이 가운데 놓인 도깨비 모양 문고리로 수렴하고 있었고, 문 양쪽의 기둥에 새겨진 나선형의 계단 무늬 위에는 탑을 오르는 용사들의 모습이 표현되어 있었다. 가슴이 뛰었다. 이것이 하늘나라의 문일까? 드디어 탑의 끝에 도달한 것일까? 하지만 그렇다기엔 지금까지의 여정이 생각보다 너무 쉬웠던 것 같아, 나는 반신반의하며 문으로 다가갔다.

그 때 보급품을 제공하기 위해 길잡이가 나타났다. 인기척에 돌아본 나는 급히 물었다.

저 문이 하늘의 문인가요?

그러자 길잡이가 피식 웃었다.

끝은 한참 멀었다. 저건 구역의 경계를 나타내는 문이다.

혹시나 하던 마음이 실망으로 식어버리고 있는데 길잡이가 더 자세한 설명으로 쐐기를 박았다.

탑은 크게 17개 구역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가장 아래쪽은 준비 구역이라고 한다. 지금까지 네가 올라온 구역이지. 여기는 준비 구역과 그 다음 구역인 첫 번째 구역의 경계다.

지금까지 올라온 것의 16배를 더 가야 한다구요?

나는 경악했다. 대체 이 탑은 얼마나 높은 거야?

그런 셈이지. 각오를 단단히 하는 게 좋을 거다. 준비 구역은 사실 말 그대로 준비 운동을 하는 단계이니까.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길잡이가 다가왔다. 아래에서 올려다 보니, 항상 삿갓 아래 가려져 있던 얼굴이 눈에 들어온다. 저승사자마냥 창백한 그 얼굴이 입을 열었다.

왜, 벌써 포기냐?

라는 말이 차 오르려 했지만 억지로 밀어 넣었다. 사실, 탑을 정복하는 것이 쉬울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어찌 되었든, 영생을 얻는 길이다. 처음 수련원에 들어선 것은 아버지의 강요 때문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희미한 각오로 탑에 들어온 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달리 생각하면, 이제 지금까지 한 것을 16번 반복하면 되는 것이다. 적어도 끝이 있다는 것 아닌가? 나는 천천히 일어섰다.

아뇨. 그럴 리가요.

“…그래. 잘 해 봐라.

검은 삿갓의 사내는 그 말과 함께 사라져 버렸다.


다음날 나는 첫 번째 구역에서, 탑에 들어온 이래 처음으로 상처를 입었다. 상대는 바다쑤라는 놈이었다. 휘어진 콩 모양의 몸체 위에 머리가 얹어져 있고, 아래쪽에는 뾰족한 검은색 가시가 달린 녀석이었다. 놈의 머리가 울렁울렁 소리를 내면, 가시가 튀어나와 공격해 왔다. 계속된 승리에 도취되어 방심하고 다가가다가 허벅지를 긁힌 것이다. 칼로 가시와 머리를 잘라주고 전장을 벗어났다. 계단에 걸터앉아 상처에 벌레즙을 뿌렸다. 챙겨온 흰 천을 꺼내 상처 주변을 강하게 묶었다.

하얀 천에 피와 벌레즙이 뒤섞여 스며들면서 붉은 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떡과 벌레즙을 삼키며 고독을 씹었다. 목숨을 걸고 도전하고 있다는 사실이 이제서야 피부로 느껴진다. 갑작스런 오한에 잠시 몸을 떨었다. 배가 차오르자, 나는 하릴없이 모로 누웠다. 한동안 어둠 속에서 이승에서의 삶을 그리다 잠이 들었다.


벌레즙의 효과는 뛰어났다. 다음 날 일어나니 고통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가뿐하게 올라가, 나를 맞이하는 바다쑤 세 마리에게 사이 좋게 화살 한 방씩을 선사해 주었다.

계단을 오르고 나티를 제압하는 것을 반복하다 보니 내 몸이 나날이 강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어느 새 탑에 오르는 것을 즐기게 되었다. 나는 중독된 것처럼, 그러면서도 방심하다 다치지 않게 주의를 기울이면서 계속 위로 올라갔다.


무엇이 필요한가.

하루는 전투를 마치고 나오니, 귀에 익지 않은 목소리가 나를 맞이했다. 길잡이를 본 나는 조금 당황했다. 무심코 물음이 먼저 튀어나왔다.

누구십니까?

보면 몰라? 길잡이다.

“…지금까지 날 인도해 주었던 길잡이는 어디 가고?

쓸데없는 질문은 그만해라. 무엇이 필요한지나 말 해.

“…화살을 주시오.

그는 품 속에서 튼튼한 화살들을 꺼내 내밀었다. 그리고는 내가 그것들을 받아 들자마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라져 버렸다.


그 후로도 길잡이는 종종 바뀌어서 나타났다. 길잡이들 중에는 차가운 사람도, 비교적 따듯한 사람도, 쾌활한 사람도, 어수룩한 사람도 있었다. 나는 그런 변화에도 곧 익숙해졌다.


구역을 나누는 문을 몇 차례 지났다. 어느 날 인가부터 계단을 오르는 것이 더 이상 버겁지 않았다. 심장은 더 빠르게 피를 돌리고, 허파는 더 빠르게 공기를 받아들인다. 칼은 더 날카롭게 상처를 파고들고 화살은 더 정확하게 급소를 꿰뚫었다. 두 다리는 세상에서 가장 높다는 산, 하야뫼를 수십 번 올랐을 만한 높이를 견디면서 근육으로 차 올랐고, 내 머리는 유사 이래 이승에서 치러진 전쟁의 횟수보다 더 많은 싸움 경험이 누적되어 짧은 시간 내에 가장 효과적인 전략을 찾아내게 되었다. 마치 수백 명이 일사불란하게 호흡을 맞춰 선보이는 잘 짜여진 군무처럼, 나의 몸은 빠르고 정교하게 움직였다.


온 힘을 다해 뛰어올라, 내 키보다도 높은 높이에서 칼을 세로로 세워 들었다. 떨어지는 기세를 그대로 줄거윈이라는 나티에게 때려 박는다. 나티의 거친 피부 속에 숨어 있던 뼈가 부스러지는 촉감이 칼을 통해 울려온다. 튀긴 피를 녀석의 맨 살에 문질러 닦고, 밖으로 나가는 문을 열었다. 이제 나는 여섯 번째 구역의 끝자락에 있었다. 계단을 한 번에 다섯 단씩 밟고 뛰어올랐다.


몸이 가뿐하군요. 탑을 오르면서 저절로 수련도 되네.

벌레즙을 받으며 혼자 중얼거리듯 한 말에, 새 길잡이는 뒤틀린 비웃음을 흘렸다.

이 곳은 이승에서 멀기 때문에, 땅의 힘이 약해진 것 뿐이다. 누구든 높이 뛰어오를 수 있지.

이승에서 멀다구요? 그렇다면 하늘나라까지는 얼마 남지 않은 겁니까?

검은 삿갓을 쓴 사내는 얼굴을 찌푸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여긴 여섯 번째 구역일 뿐이다. 탑은 모두 열 여덟 개 구역으로 되어 있고. 못 들었나?

아, 그랬었지, 젠장. 나는 그의 핀잔에 입을 다물었다.


그로부터 얼마 후였다. 전장을 나와 올라오다 보니 문득 계단이 끝나고 한 짐 넓이의 공간이 펼쳐졌다. 바닥은 대궐의 조정처럼 매끈한 흰 돌들로 채워져 있었다. 벽은 언제나처럼 푸르스름한 검은색이었다. 그 밖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냥 빈 공간이었다.

두리번거리던 나는 나타날 때가 되었음에도 길잡이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혹시 길잡이가 거짓말을 한 것일 뿐, 사실은 이 곳이 탑의 꼭대기인 건가? 하지만 그가 내게 거짓말을 할 이유는 없었다. 그럼 이게 어떻게 된 거지? 나는 불안감 속에서도, 땅의 힘이 극도로 약해진 덕분에 가벼워진 몸을 팔닥거리며 길잡이가 나타나길 기다렸다.

잠시 후, 뭔가가 무너지는 소리가 바닥 멀리로부터 들려오기 시작했다. 탑 전체가 뒤흔들릴 정도로 큰 진동은 아니었다. 그러나 아주 천천히, 그러면서도 분명하게 이 쪽으로 뭔가가 다가오고 있었다. 

저 멀리 계단의 한 단, 한 단이 차례대로 무너져 내리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천천히 계단을 집어삼킨 붕괴는 이윽고 내가 서 있는 층 바닥의 하얀 돌들을 끌어내리기 시작했다. 바닥의 돌들이 물 속으로 헤엄쳐 들어가는 하얀 쥐 떼처럼 천천히 침몰하면서, 각 돌판의 치밀한 틈 사이에 끼어 있던 먼지들이 터져 나왔다. 나는 재빨리 계단에서 가장 먼 쪽으로 몸을 피했다. 돌판들은 느리게 살아가는 삶의 가치를 깨달은 노인들처럼, 내려가는 발걸음을 서두르지 않았다. 아마도 땅의 힘이 약하기 때문인 것 같다. 그 이색적인 모습은 시간이 느려진 것 같은, 혹은 거대한 대신전이 무너지는 모습을 멀리서 내려다보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 일으켰다.

위쪽을 쳐다보았다. 한 짐 정도 되는 바닥을 둥글게 둘러싼 벽면이 마치 끝이 없는 우물마냥 아득한 깊이를 드리우고 있었다. 그 너머 까마득한 위에 마치 거울 속의 상처럼 이 쪽 바닥의 모습과 대칭되는 천장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저 곳 까지는 어림 잡아도 몇 백여 길은 되어 보였다.

다시 바닥을 바라본다. 붕괴는 이미 바닥의 반 이상을 집어삼키며 다가오고 있었다. 저 소란에 휘말려 같이 떨어지다 보면 거대한 돌판들의 틈에 깔려 돌무더기를 무덤 삼아 이승과 작별을 고하게 될지도 모른다. 바닥은 점차 좁아져 오고 있었다. 필사적으로 매달릴 곳을 찾던 내 눈에, 철로 만든 듯한 길다란 관이 벽면을 따라 이어져 있는 것이 들어왔다. 그 관은 대략 내 키의 예닐곱 배는 되어 보이는 높이서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나는 숨을 고르고, 무릎을 굽혔다. 그리고 온 힘을 종아리와 허벅지에 집중하여, 바닥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내가 서 있던 돌판이 그 힘 때문에 아래로 밀려나는 것이 느껴졌다.

내 몸은 던져 올려진 공기알처럼 위로 날아갔다. 나는 벽면이 가까워지자 재빨리 철제 관을 붙잡았다. 놀랍게도, 바닥으로 나를 끌어내리는 힘이 거의 없어져, 매달려 있는 것이 전혀 힘이 들지 않았다. 고개를 돌리니, 방금까지 내가 서 있던 바닥의 돌판들은 짙은 먼지 구름에 묻혀 보이지 않았다. 돌과 돌이 부딪히는 소리가 아직 붕괴가 진행 중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나는 팔을 움직여 위쪽으로 올라갔다.

관을 따라 한참을 올라가다 보니 나를 천천히 위로 밀어 올리는 어떤 힘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신기한 기분이었다. 땅의 힘과 반대되는 하늘의 힘인 것일까? 그렇다면, 두 힘이 이렇게 미묘한 평형을 이루고 있는 이 곳은 이승과 하늘의 중간 지점일까?

가다 보니 피가 머리로 쏠리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기에, 나는 몸을 뒤집었다. 이제는 탑을 오르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내려가는 모양새였다. 나는 너무 빨리 가속되어 떨어지지 않도록 관을 붙잡았다 놓았다 하며 천천히 이동했다.

잠시 후 내 두 다리가 천장 위에 안정적으로 내려섰다. 옆에 계단이 보인다. 방금 무너진 계단과 같은 모양새이다. 유일하게 다른 점은, 지금까지는 계단을 올라왔지만 이제부터는 내리막길이라는 것이다.

계단을 내려가니, 구역의 경계를 나타내는 거대한 문이 나타났다.

오래 걸렸군.

느닷없는 목소리에 깜짝 놀라 움츠려 들었다. 문 옆에 앉아 있던 그림자가 벌떡 일어나 다가왔다. 그는 내가 입은 것과 비슷하게 생긴 붉으스름한 전투복을 입고, 키의 절반은 될 듯한 길다란 칼을 차고 있었다. 등불에 사내의 이목구비가 드러났다. 나는 그를 알아볼 수 있었다.

외욱 형님! 

그는 나보다 한 달 쯤 전에 탑에 올랐던 수련원 선배였다. 그가 입가에 시원한 미소를 띄우며 말했다.

여. 잘 지냈냐.

예, 오랜만입니다. 다행히 살아 계셨군요. 뭐 하고 계셨어요? 여기서.

여기 아래부터는 두 명이 짝지어서 도전해야 한다더군. 그래서 다음 사람이 올라오길 기다리고 있었지. 병신 같은 벌레즙을 쳐먹고 저기 똥통에다 똥을 싸대면서. 아, 기다리다 벽에 똥칠하는 줄 알았네.

그럼 스무 날 동안 계속 기다리신 거에요?

글쎄, 얼마나 됐는지는 모르겠다. 여긴 햇빛이 없으니 시간 관념이 없잖냐. 뭐 꽤 오래 기다리긴 했지. 그 동안 한 놈도 올라오지 않았어.

외욱은 숙연해진 표정으로 말을 멈추었다. 나도 말을 잇지 못했다. 그와 나 사이에는 열 명이 넘는 도전자가 더 있었다. 수련원에서 생사고락을 함께 해 온 그 많은 형제들 중에, 여기까지 도달한 사람은 없는 것이다.

정말 가차없구만. 미쳤나 보다, 이 탑을 만든 놈은.

외욱이 중얼거렸다. 이 탑을 만든 것이 하늘님이라는 걸 생각하면 불경의 극치였지만 나는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길잡이의 설명에 의하면, 일곱 번째 구역인 이곳에서부터 아홉 번째 구역까지는 가운데 구역이라고도 하는데, 두 명이 함께 도전하게 되어 있다고 한다. 우리는 그에게 벌레즙 두 통을 받아 들고, 이 구역의 첫 번째 전장으로 들어섰다.


전장은 지금까지에 비해 훨씬 넓었다. 사람 키의 예닐곱 배는 될 정도로 키가 큰, 모래시계처럼 생긴 나티 두 마리가 풀밭 위에서 석상처럼 서 있었다. 내 시선은 자연스레 그 거대한 나티의 허리로 향했다. 몸에 비하면 가늘긴 했지만, 그래도 허리 지름이 사람 키 정도는 되는 것 같았다. 우리는 나무 뒤에 몸을 숨겼다. 외욱이 작게 속삭였다.

신수부뇌다. 허리를 계속 두 동강 내야 해. 그럼 상반신 쪽에서 다시 하반신이 돋아나면서 크기가 작아질 거다. 그럼 다시 허리를 자르고 그걸 반복하면 돼. 처음이 어렵지, 나중엔 쉬울 거야.

저 두께를 자르라고? 하지만 외욱은 빠르게 설명을 계속했다.

둘이서 함께 한 녀석을 완전히 조져 놓은 다음, 남은 녀석을 조지기 시작하는 게 좋겠군.

난 고개를 끄덕이고 신수부뇌 쪽을 돌아보았다. 녀석들은 우리가 들어온 것도 눈치채지 못한 듯, 하릴없이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외욱이 먼저 번개처럼 달려나갔다. 그 모습을 본 나도 이를 악물고 따라 달렸다. 앞서 가던 외욱은 문에 가까운 쪽 신수부뇌 근처에서 높이 뛰어오르며 그 큰 칼을 휘둘렀다. 아직 하늘의 힘은 그다지 세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자기 키의 서너 배 정도는 거뜬히 뛰어오를 수 있었다. 공기를 가르며 날아간 대도는 콰직 하는 소리를 내며 허리의 3분의 1 지점까지 박혀 들어갔다. 

쿠우우우우우!

급습에 놀란 신수부뇌가 섬뜩한 비명을 내질렀다. 머리까지 울리는 소리에 나는 귀를 막아버렸다. 그러나 외욱은 아랑곳하지 않고, 녀석의 허벅지에 발을 대고 박힌 칼을 뽑아냈다. 피가 뿜어져 나온다. 신수부뇌가 거대한 팔을 휘둘러 외욱을 후려쳤다. 외욱은 칼날을 세워 공격을 막아냈지만, 힘을 이기지 못하고 문 쪽으로 날아가 버렸다. 덩치가 워낙 크다 보니, 공격은 느리지만 힘이 압도적이다. 입술을 깨물면서 칼을 바로잡았다. 나는 나티가 보지 못하는 등 쪽에서 뛰어올라, 외욱이 만들어 준 상처 자리를 향해 칼을 휘둘렀다. 더 깊이 박힌다. 신수부뇌가 고통에 울부짖으며 몸을 뒤로 돌렸지만, 칼을 붙들고 있는 나도 그에 따라 뒤쪽으로 돌아갔다. 나를 털어내기 위해 신수부뇌가 등 쪽으로 팔을 들어올리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재빨리 칼을 빼내고 거리를 두었다. 그 틈을 타, 외욱이 다시 달려왔다. 마치 나무를 향해 도끼질하는 나무꾼처럼, 우리는 정신 없이 칼로 나티의 허리를 반복해서 찍어댔다. 그 모습을 본 다른 녀석이 동료를 돕기 위해 다가왔다. 외욱은 허리에 꽂아둔 자신의 칼 위에 서 있다가, 도우러 온 신수부뇌의 주먹이 날아올 때에 맞추어 칼을 지지대 삼아 바닥으로 재빨리 몸을 날렸다. 주먹은 허공을 가르고 날아가, 허리가 너덜너덜해진 그의 동료에게 명중했다. 상처가 벌어지더니, 결국 신음소리와 함께 녀석의 상체가 하체로부터 굴러 떨어져버린다. 녀석의 허리에 박혀 있던 나와 외욱의 칼들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외욱이 칼을 집어 들며 외쳤다.

저 놈의 공격은 피하기만 해! 계속 이 녀석을 친다!

알고 있어요!

땅에 떨어진 신수부뇌의 상체가 꿈틀거리더니, 허리 부분이 조여지면서 원래보다 반 정도 작은 신수부뇌의 모습으로 변한다. 하반신이었던 부분은 둥글둥글한 거대한 구슬처럼 변해버렸다. 외욱과 나는 반절이 된 신수부뇌가 일어나기도 전에 달려들어,  허리를 가차 없이 쳐 대 시작했다.

치르르릉!

몸이 온전한 신수부뇌가 구슬이 된 동료의 하반신을 들더니 우리 쪽으로 집어 던졌다. 우리는 높이 뛰어올라 그 어마어마한 크기의 구슬을 피했다. 구슬은 자신의 상반신이었던 물체에 부딪혔다. 고통에 찬 비명이 내질러졌다.


클 때도 상대하기 번거로웠지만, 작아진 신수부뇌라고 만만한 것은 아니었다. 작은 만큼 행동이 민첩해졌기 때문이다. 하도 잘라서 어린아이 크기가 된 녀석까지 벤 후에야, 하체와 상체가 모두 구슬로 변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다른 한 마리도 같은 방식으로 처리했다. 우리는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다양한 크기의 구슬들을 뒤로하고 전장을 벗어날 수 있었다. 내려가는 계단에 걸터앉아 이곳 저곳 입은 찰과상들에 벌레즙을 발랐다. 그러더니 외욱은 제자리에서 몇 번 폴짝거리며 몸 상태를 확인했다. 움직임에 큰 문제가 없는지 만족스러운 표정이다.

갑자기 어려워지네요.

“‘일곱 번째 구역부터가 진짜로군. 지금까지 상대한 건 잔챙이들이었어.

이래서야 하루에 한 층 이상 전진하기가 쉽지 않겠는데요?

천만에. 그 동안 낭비한 시간이 너무 아까워. 너 상처는 어때? 심하냐?

피식 웃음이 나온다. 수련원에 있을 때부터, 외욱은 이런 사내였다. 타고난 용사다 보니, 그 동안 몸을 쓰지 못해 좀이 쑤셨겠지. 나는 몸 이곳 저곳을 움직여 보았다. 벌레즙이 금새 상처들에 깊이 스며들어, 고통이 사그라들고 있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뇨, 뭐 이 정도는 별 거 아니네요.


다음으로 상대하게 된 것은 벌두사라는 나티였다. 크기는 다 자란 개 정도 되고 모양은 벌과 비슷했다. 몇 번의 시행착오 끝에, 우리는 그 녀석이 상대의 수에 따라 공격하는 패턴을 바꾸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상대하는 자가 한 사람이면 이리 저리 날아다니면서 천천히 틈을 노렸지만, 둘 이상이 되면 그야말로 미친듯이 날아다녔다. 그래서 우리는 각자 한 마리씩만 맡아서 상대하기로 했다. 

녀석의 침을 아슬아슬하게 막아내면서 곁눈질로 외욱 쪽을 살폈다. 외욱은 가만히 떠 있는 벌두사 앞에서 이리 저리 칼을 휘두르고 있었다. 나는 외쳤다.

형님, 뭐해요? 지금 가만히 있는 녀석 앞에서 뭘 그리 긴장하는 거에요?

무슨 소리야? 힘들어 죽겠는데! 나 정신 없으니까 말 시키지 마!

이 녀석은 상대하고 있지 않은 쪽에는 그저 얌전히 공중에 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모양이었다. 희한한 일이었다. 나는 외욱 쪽으로 뒷걸음질 치며 말했다.

형, 제가 형님 앞에 있는 놈을 죽이겠습니다.

안 돼! 둘이 상대하면 또 폭주할거다!

그러나 외욱의 절규에도 불구하고 나는 외욱이 상대하는 벌두사 바로 옆까지 다가갔다. 나는 그 녀석이 떠 있는 공간으로 빠르게 칼을 찔러 넣으며 외쳤다.

그 전에 깨끗하게 죽이면 되죠!

칼날이 나티의 갑피를 뚫고 안쪽까지 푸욱 박히는 느낌이 칼자루를 통해 전해져 왔다. 하지만 내 앞에 있는 녀석이 나를 향해 침을 찔러 들어오는 바람에, 바로 칼을 회수해서 방어해야 했다. 눈치 빠른 외욱의 칼날이 내 앞의 녀석을 꿰뚫은 건 그 직후였다.

제법인걸?

외욱이 낄낄거리며 내 어깨에 손을 얹었다. 나도 긴장이 풀려 그를 마주보며 웃었다.


그와 함께 탑을 오르는 것은 분명 혼자서 오르는 것보다는 훨씬 즐거운 일이었다. 두 개의 구역을 돌파하는 동안, 우리는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너, 혼례도 안 치르고 올라왔다고 했지. 그럼 이승에는 가족이 없나?

형과 형수님, 조카들이 있습니다.

그래? 형님은 뭐하신댔지?

선비입니다.

선비라 좋겠구만.

네? 왜요?

외욱은 말이 없었다. 한참 후 그는 다른 말을 꺼냈다.

나는 이승에 아내가 있어.

알고 있습니다.

씨가 끊긴다고 어머니가 급하게 시킨 결혼이었지. 한 여자를 애 딸린 생과부로 만들다니, 못할 짓이야.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형이 없었다면, 수련원을 나온 후 바로 탑으로 들어오지 못했을 것이다. 집안의 대를 이어야 한다면, 아내가 최소한 아들 하나를 낳고 그 다음 아이를 가졌을 때 비로소 등탑하는 것이 일반적이니까.

단순히 전쟁에 끌려간 거라면, 돌아올 가능성이라도 있지 얼마나 외롭겠는가. 그리고 내 아이 그 어린 녀석…”

소서노델에서 잘 챙겨줄 겁니다.

소서노델은 온바라기를 세운 국조인 온조 어라하의 어머니, 소서노를 위해 지어진 사원이다. 그 곳에서는 탑에 도전한 용사의 부양가족들이 걱정 없이 살 수 있도록 돌보아 준다. 조부가 탑에 오르신 후, 할머니와 아버지도 그 곳에서 지내셨다.

사실 소서노델에 들어가서 평생을 편히 지낼 수 있다는 점 때문에, 결혼 생활을 기껏해야 3년 정도 밖에 누릴 수 없다는 흠에도 불구하고 탑에 오를 용사에게 시집을 가고 싶어하는 여성들이 많았다. 그런 용렬한 마음을 가진 여성들 중에는 남편을 탑으로 보낸 후 소서노델에 다른 남자를 끌어들이는 음탕한 부인도 있었다. 한창 격렬할 때 소서노델의 내시 관리자들에게 발각되어 처형당했지만.

외욱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 힐끔 돌아보니, 외욱의 초점 흐린 시선이 벽면에 닿기 전의 허공 속으로 흩어지고 있었다. 빛을 박탈당한, 장님의 눈동자처럼. 세상을 초월하여,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무언가를 마주하고 있는 것처럼.

혹시 마누라가 다른 남자와 놀아났을까 걱정하는 건가 싶어, 조용히 덧붙였다. 

소서노델의 부인들은 내시들이 철저히 돌보고 있다고 합니다.

“…사람은 먹을 것만으로 살 순 없어.

혼잣말인지 내게 하는 말인지 알 수 없는 대답이 외욱의 입에서 힘없이 흘러내렸다.


등불이 잔잔히 퍼지는 계단 중간의 넓은 평지에 누운 채, 나는 이승에 있는 피붙이들을 생각했다. 조카들은 건강하게 자라고 있을까? 적어도 내가 영웅이 되면 탑에 새겨질 그 이름을 읽을 수는 있을 만큼 컸겠지? 누가 뭐래도, 글쟁이의 아이들이니까.

사실 조카들을 실제로 본 것은 형 집을 찾았을 때를 비롯해 손에 꼽는다. 만난 횟수에 비해 유독 친근하게 느껴지는 것은 아무래도 피로 얽힌 관계이기 때문이리라. 갑자기 스스로가 바보 같아져 어둠 속에서 홀로 미소 지었다. 그 아이들은 나를 기억조차 못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렇게 추억해 봐야 의미가 있을까.

사고는 이윽고 다른 궁금증들로 옮아갔다. 형은 목표로 하던 시험에 합격하여 벼슬아치가 되었을까? 형수님과의 사이에서 아이는 더 낳았을까? 대답을 들을 길 없는 다른 무의미한 질문들이 연달아 일어났다. 그리고 질문들의 행렬은 어느 순간 새로운 의문으로 이어졌다. 

대체 이 탑은 뭘까? 탑을 지은 사람은 왜 용사들이 이 탑을 오르길 바라는 걸까? 영생이라는 엄청난 선물을 주면서까지 사람들을 끌어 모으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아버지의 강요에 따라 이 탑에 들어온 건 잘 한 일이었을까?

생각이 이어지면서 잠은 더 아득히 도망갔다. 그래도 간신히 잠들 수 있었던 것은, 잠들락 말락 할 때면 곧잘 들려와 잠드는 것을 방해하던 외욱의 코 고는 소리가 오늘은 늦게까지 들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홉 번째 구역에 들어서니 나티들의 배치는 더욱 다양해져서, 이제는 이미 상대한 적이 있는 두 종류의 나티가 함께 나오기도 했다. 그들의 조합에서 나오는 새로운 싸움 전술 때문에 애를 먹기도 했지만, 나와 이회는 계속해서 그것을 극복하며 막힘 없이 내려갔다. 몸을 짓누르는 하늘의 힘이 점점 더 강해짐에 따라, 우리의 역량도 나날이 발전해 갔다.


어느덧 외욱과 나는 아홉 번째 구역을 통과하고 열 번째 구역으로 들어갔다. 여기서부터 열두 번째 구역까지는 높은 구역이라고 불리었으며, 네 명의 패거리를 이루어 내려갈 수 있었다. 그 입구에서 우리는 다음 도전자를 기다리고 있던 이회와 겨이산이라는 두 사내를 만나 패를 이루었다. 가락에서 왔다는 이회는 활 위에 칼날을 덧붙여 방어에도 사용할 수 있게 한 독특한 무기와 화살들을 들고 있었다. 겨이산은 서라에서 온 사내로, 등 뒤에 기다란 창을 메고 있었다.

반갑소. 나는 겨이산이라고 합니다. 서라에서 왔지.

이회입니다. 가락에서 왔구요.

두 사람이 우리보다 탑에 먼저 올랐으므로, 그들이 우리에게 말을 놓기로 했다. 우리 넷은 패를 이루어 다음 전장으로 나아갔다.


열 번째 구역에서 만난 첫 상대는 노구라는 나티였다. 생김새 자체는 위협적이지 않았지만, 죽으면 갑자기 부풀어 올라 상대를 깔아뭉개는 녀석이었다.

으랴!

문이 열리자 외욱이 가장 먼저 뛰어들었다. 긴 칼을 휘두르다 보니 아무래도 시신에 깔릴 일도 없어, 짧은 칼을 쓰는 나보다는 유리했다. 나는 활을 꺼내 들어, 이회와 함께 뒤쪽에서 어슬렁거리는 녀석들을 노렸다. 겨이산은 창으로 멀찌감치 서서 노구들을 푹푹 찔러대고 있었다.

신이 나서 녀석들을 죽여대던 외욱은 어느 새 구름처럼 뭉게뭉게 불어난 시체들에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온 힘을 다해 달리던 그는 결국 시체 더미의 아래쪽에 깔려 버렸다.

전투가 끝난 후, 이회가 발로 노구의 시체를 밀어냈다. 외욱이 막혀 있던 숨을 몰아 쉬며 일어나 몸에 묻은 흙을 털었다.

용감한 건 알겠는데, 너무 무모한 거 아니냐?

“…”

사실상 이번 전투에서 한 일이 없는 겨이산의 핀잔에 외욱은 굳은 표정으로 칼을 챙겼다. 나는 외욱에게 다가가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이회라는 사내는 아는 것이 많았다. 그는 전투가 끝나고 계단에서 정비하는 시간이 될 때면 별의별 얘기를 다 해주고는 했다.

그거 알아? 나티들도 자기들의 신을 숭배한대. 우리가 하늘님께 제사를 올리는 것처럼.

희한하네요. 그들에게 뭔가를 숭배할만한 지능이 있는 줄은 몰랐는데.

그러니까 말이야. 아마 그 신은 이렇게 말했겠지? 널리 나티들을 이롭게 하라.’”

이회가 나티 특유의 위협적인 중저음대 울음소리로 어설픈 흉내를 내자, 우리 세 사람은 피식 웃음기를 띄웠다. 그러고 나서 이회는 두 신 사이에 벌어진 전쟁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엄청나게 오래 전에, 이승의 지배권을 두고 나티들이 숭배하는 신과 사람이 숭배하는 하늘님 사이에 다툼이 있었는데, 땅을 뒤집고 바다를 가르는 싸움 끝에 둘 다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다고 한다. 그래서 두 신은 결국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기로 합의했지. 그 평화 조약 덕분에, 지금과 같은 평화로운 시대가 열린 것이고!

외욱이 …’하는 탄성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옆에서 맞장구를 치긴 했지만, 사실 나는 글쟁이인 형에게 들어서 알고 있던 이야기였다.


나중에 단 둘이 대화를 나누면서 알았지만, 이회는 글쟁이 집안 출신이라고 한다.

하지만 오비골 전쟁에서 날개옷을 입은 용사들이 내려오는 걸 보셨던 아버지는 내가 글을 하길 원치 않으셨어. 영웅이 되려면 칼을 잡아야 한다며 날 가락의 수련원에 밀어 넣었지.

저도 글을 하고 싶었지만, 아버지의 강요로 어쩔 수 없이 수련원에 들어갔습니다.

나는 깊은 동질감을 느끼며, 활에 달린 칼날을 손질하고 있는 이회를 바라보았다. 이회도 마찬가지였는지 나를 향해 빙긋 미소 지었다.

뭐, 자신이 하고 싶었으나 미처 하지 못한 것을 자식들은 이루어주었으면 하는 것도 아버지들의 소망이겠지. 아니면 세상을 살다 보니, 아, 이렇게 살았어야 더 잘 살았겠구나 싶은 부분을 자식들에게 알려주고 싶으신 걸지도 몰라. 

그의 말에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아버지는 젊은 시절 탑에 오르지 못한 것을 두고두고 후회하셨다. 자신처럼 글쟁이가 되겠다는 형을 집안에서 내쫓기까지 한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다.

“…수련원에 오지 않았다면, 우리도 선비가 될 수 있었을까요?

글쎄 뭐 쉬운 길은 아니었겠지. 시험에 떨어지면 나와서 뭘 할지도 모르고.

피식 웃었다. 이회의 나라인 가락은 대장 기술로 유명하지만, 그것은 사실 옛 문헌들을 해독하여 잊혀졌던 기술들을 되살려 준 선비들 덕분이었다. 그래서 글쟁이를 겁쟁이와 비슷하게 보는 내 조국과 대조적으로, 가락에서는 글쟁이와 선비들이 상당히 대우를 받는 편이다. 그런 나라에서 온 사람이 글쟁이가 되면 뭘 하고 살지 걱정하다니. 나는 어둠이 출렁이는 계단 아래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쉬운 길이 아닌 건 이쪽도 마찬가지겠지요.

이회는 동의하는 듯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병신아! 글쟁이도 그것보단 낫겠다!

겨이산의 외침이 울려 퍼졌다. 나무에 부딪힌 외욱은, 아파할 새도 없이 곧바로 상대하던 나티에게 달려들었다. 칼과 가시가 맞부딪친다. 힘을 주느라 그런 건지 겨이산의 말에 분노가 치민 건지 외욱의 눈에 핏발이 섰다. 그는 온 힘을 다해 세모하수를 밀쳐 낸 후 뒤쪽으로 뛰어 거리를 두며 소리 질렀다.

아 씨, 안 닥치냐? 너부터 조져버린다.

뭐? 조질 수 있으면 조져 봐! 이 좆만한 새끼가!

욕설을 퍼붓긴 했지만 겨이산도 자기 앞에 있는 세모하수가 온 힘을 실어 날리는 공격을 가까스로 막아내고 있었다. 방금 그는 외욱이 잠시 쓰러졌을 때 일시적으로 두 마리의 세모하수에게 동시에 공격을 받으면서 죽을 뻔 했다.

내가 굳이 힘 뺄 거 있나? 그렇게 실력이 떨어지니 곧 알아서 뒤지겠지! 내가 돌격하면 잘 좀 따라와!

외욱이 외쳤으나 겨이산은 대답할 여유가 없었다. 나는 내 앞에 있는 세모하수를 바라보았다. 이 녀석의 피부에는 이회가 이리저리 몸을 날리면서 쏘아댄 화살들이 잔뜩 박혀 있었고, 그 덕분에 놈의 움직임이 제일 둔했다. 죽을 힘을 다해 몰아붙인 끝에, 나는 칼을 녀석의 몸에 박아 넣을 수 있었다. 그리고 나서 외욱을 돕기 위해 그 쪽으로 달려갔다. 그는 겨이산 근처에 있는 나무 아래에서 꽤나 고전하고 있었다. 외욱이 1대1로 상대하기 버거울 정도라면 보통 놈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런 녀석도 뒤에서 갑작스럽게 찔러 들어오는 칼까지 피할 재간은 없다.

잘했다. 저승 갈 뻔했네.

괴성과 함께 쓰러지는 나티의 시신을 밟고 넘어오며 외욱이 말했다. 우리는 겨이산 쪽을 돌아보았다. 이회가 화살을 날려준 덕에 그 쪽도 어느 정도 정리되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두 사람의 다툼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모양이다. 

건방진 새끼가!

창을 내려두고 성큼성큼 외욱에게 다가온 겨이산이 그의 멱살을 붙잡았다.

이거 안 놔?

외욱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회가 달려오더니 두 사람 사이로 뛰어들어 두 사람을 떼어놓았다.

진정해요들. 다행히 아무도 안 다치고 이겼잖아.

저 놈이 멍청하게 혼자 나대다가 나까지 죽게 만들 뻔 했어!

겨이산이 외친 말에, 외욱이 옷섶을 정리하며 비아냥거렸다.

창을 들었으면 그 값을 하시지? 목숨이 아까우면 아예 탑에 들어오지 말았어야지.

그만 해. 온바라기에서는 선배에 대한 예의도 없나?

이회가 냉정한 표정으로 외욱을 노려보았다. 한마디만 더 하면, 등 뒤의 성난 짐승이 그에게 달려들도록 내버려 두겠다는 표정이었다. 네 사람 중 막내인 나는 뭐라고 끼어들지는 못하고 그저 외욱의 뒤에 서 있었다. 목숨을 걸고 싸우다 보니 아무래도 신경이 날카로워 질 수 밖에 없는 모양이다. 이회에게 가로막힌 겨이산이 외욱을 손가락질하며 말했다.

저 녀석하고 더는 같이 못 싸우겠다.

나야말로.

그럼 패를 이룰 수 있는 다른 녀석들이 여기까지 내려오길 기다려야 할 겁니다. 아니면 도로 위로 올라가거나.

이회가 말했지만 겨이산은 외쳤다.

상관 없어! 이 놈이랑 같이 가다 보면 나도 제 명에 못 죽어! 길잡이 어른! 나타나시오! 패를 깨야겠소!

겨이산의 외침에 길잡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길잡이가 반가움에 가득 찬 표정의 창잡이에게 한 말은 그의 기대를 완전히 져버리는 것이었다.

패를 깨면, 너희들 넷은 모두 포기한 것으로 간주된다.”

씩씩대던 외욱과 겨이산은 할 말을 잃었다. 외욱은 바닥에 침을 뱉으며 전장의 문을 지나 계단 쪽으로 내려가 버렸다. 겨이산은 자신의 가슴을 부숴져라 쾅쾅 두들겼다. 어지간한 고함보다도 큰 북소리가 전장을 울렸다.


두 사람은 하루 잠을 자고 나서야 진정되었다. 하지만 전투에 대한 두 사람의 견해 차이는 좀처럼 줄어들지 않았다. 자신의 실력에 대한 자신감이 넘치는 외욱은 저돌적이고 즉흥적인 전투를 주장했지만, 겨이산은 안정되고 수비적인 전투를 선호했다. 외욱이 함성을 내지르며 홀로 돌진하고 나면, 다수의 나티들에게 둘러싸여 고전하기 십상이었고, 그는 그것을 항상 겨이산이 충분히 따라오지 않은 탓으로 돌렸다. 결국 한동안 우리는 마치 두 명씩으로 이루어진 별개의 패처럼 움직여야 했다. 나와 외욱으로 이루어진 패가 하나, 겨이산과 이회로 이루어진 패가 하나였다.

창잡이나 칼잡이의 역할은, 활잡이들이 방해 받지 않고 화살을 날릴 수 있도록 앞에서 받쳐 주는 거다.

외욱의 신조였다. 그럴 때마다 겨이산은 멀리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중얼거렸다.

미친 소리. 저러다 단명하지.


며칠이 지나자, 겨이산과 외욱은 길잡이 앞에서도 그들의 친분이 얼마나 바닥인지 숨기지 않게 되었다.

칼이 멀쩡한데 왜 숫돌을 받고 앉았냐? 벌레즙이나 받아서 나눌 것이지, 하여간 머리가 있는 거냐 없는 거냐?

아껴먹으면 벌레즙은 남아 돕니다. 돼지처럼 쳐먹어 대니까 모자라는 게 당연하죠.

이회가 잔소리를 한 것 때문에 외욱은 겨이산에게 존대를 하기는 했다. 하지만 존대인 것은 말꼬리 뿐이었다. 내용은 욕설이나 진배 없었다.

이 새끼가 너 때문에 무리하다 다친 상처를 치료하느라 쓴 거야!

누군 상처도 안 나는 줄 아시나? 그리고 보쇼. 이 칼이 무뎌져서, 나티에게 잘 안 들어서, 형씨 목이 썰리면? 그때서야 후회하겠소?

난장판이었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시선을 반대쪽으로 돌려버렸다. 이회에게 벌레즙을 주고 있는 길잡이가 눈에 들어왔다. 본래 겨이산과 이회를 담당하고 있었다가, 열 번째 구역에서 외욱과 내가 합류한 이후부터 줄곧 우리 네 명의 패를 인도해 온 사내였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는 길잡이가 꽤나 자주 바뀐 것 같았는데 저 사내를 만난 후부터는 바뀌지 않고 있었다. 

잠시 후, 그가 나를 향해 다가왔다. 삿갓이 드리우는 그림자를 뒤집어 쓴 채, 지친 눈빛이 나를 내려다보았다. 어서 필요한 것을 말하라는 무언의 독촉이 나를 떠밀고 있었다. 무심코 입을 열었다.

길잡이 어른은 꽤 오래 우리 패를 인도해 주시는군요.

사내가 얼굴을 찌푸렸다.

무슨 말이지?

다른 길잡이들은 자주 바뀌더라구요. 짧으면 오 일, 길어 봤자 스무 일? 그런데 길잡이 어른은 그에 비해 오래 계시는 것 같아서요. 열 번째 구역 입구에서부터 계속 인도를 해 주고 계시니까.

그러자 그는 피식 웃었다.

길잡이는 종신직이다. 맡고 있는 패가 전멸하거나, 다른 패에 흡수되거나, 탑의 끝에 닿을 때까지 계속 인도하게 되어 있어.

네? 그럼 바뀐 길잡이들은…”

아마 죽은 거겠지.

그래요? 길잡이들도 나티들과 싸워야 하나요?

“…아니. 그들이 싸운 건 아마 자기 자신들일 거다.

…”

길잡이는 삿갓 아래로 얼굴을 감추었다. 나는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어 말꼬리만 흘릴 수 밖에 없었다. 더 자세히 설명해 달라고 하고 싶었지만, 길잡이의 분위기를 보건대 대답해줄 것 같지도 않았다. 나는 화살을 보급받았다. 뒤에서 겨이산이 외욱에게 고함을 지르고는 계단 저 편으로 가 버리는 것이 들려왔다. 이회가 다가왔다.

자, 가자구.



며칠 후 우리는 열두 번째 구역에 들어섰다. 큰 상처 없이 모두가 올 수 있었던 건 그나마 네 명의 기량이 각자 뛰어났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구역 입구를 앞에 두고서, 외욱과 겨이산은 서로 자신의 덕이라며 설전을 벌였다. 나와 이회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없이 앞장서곤 했다.


그러나 열두 번째 구역에서의 두 사람의 다툼은 그다지 오래가지 않았다.


 끄아악!

짧은 비명소리에 외욱 쪽을 돌아보았다. 손톱들 수십 개가 천장의 강렬한 불빛을 받아 반짝였다. 장인이 심혈을 기울여 벼려낸 칼날처럼 날카로운 그것들은, 외욱의 오른쪽 옆구리부터 어깨에 이르는 팔 전체를 막 훑고 지나가는 중이었다. 한번 할퀴는 것만으로 바위도 당근처럼 채 썰어 버린다는 나티, 미불이다. 너덜너덜해진 육신에서 나온 피가 순식간에 투박한 붉은 옷을 물들였다. 보기만 해도 그 끔찍한 고통이 전달되는 듯, 오른팔을 짜릿한 감각이 훑고 지나갔다. 나는 외욱의 이름을 외치기에도 너무 늦었다는 것을 알았다. 저 정도 상처라면 이미 그는 정신을 잃고 죽었을 것이다. 

시신이 힘없이 앞으로 쓰러졌다. 겨이산의 욕설이 들려왔다. 외욱을 쓰러뜨린 미불은 내 쪽을 바라보았다. 겨이산이 창을 크게 휘둘러, 그 녀석이 내 쪽으로 다가오지 못하게 막았다. 이회와 나는 정신 없이 화살을 날렸다.

미불이 화살로 된 옷을 입은 모양새가 되어 바닥에 쓰러지자마자, 나는 벌레즙 통을 들고 외욱에게 달려갔다. 무릎을 꿇고 그의  잘리지 않은 왼손을 붙잡았다. 온기가 천천히 사그라들고 있었다. 맥을 짚을 필요도 없었다. 그의 몸은 이미 명백한 시신이었다. 벌레즙 통을 땅에 떨어뜨렸다. 시신을 바르게 돌려 놓으려 했지만, 머리칼 사이로 고통에 일그러진 그의 얼굴이 살짝 드러나는 것을 보고 그만두었다. 피바다의 한가운데서, 나는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 없이 그렇게 앉아 있었다.

잠시 후 겨이산이 다가와 말했다.

어차피 탑에 들어온 이들 중 극히 일부만 끝까지 다다를 수 있다. 영웅이 되는 것이 이렇게 어렵기 때문에 그들이 더욱 위대한 거지.

 “…”

낙오자를 동정하는 건 그 정도면 충분해. 이제 일어나.

낙오자라고? 되묻고 싶은 말을 간신히 삼켰다. 나는 천천히 일어났다. 이회와 겨이산이 계단으로 나가는 문 쪽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흘깃 외욱의 시신을 바라보았다.

묻어줘야 하는 것 아닙니까?

길잡이들이 알아서 해 줄 거다.

홀린 듯이 외욱을 바라보았다. 수련원에서는 함께 자라왔고 탑에서는 등을 맞대왔던 동료가, 몸의 반이 잘게 썰린 잔인한 시체가 되어 널브러져 있었다. 여전히 받아들이기 힘든 현실이었다. 그리고 더욱 오금이 저리는 사실은 저 시체가 언제든지 내 모습일 수도 있었다는 것이다. 나는 나와 외욱 사이에 탑에 도전했던 열 명의 동료들, 첫 번째에서 여섯 번째 구역 사이에서 아무도 모르게 죽어갔을 이들을 다시 한 번 떠올렸다.

정말 가차없구만. 미쳤나 보다, 이 탑을 만든 놈은.

이 탑은 원래 그런 곳이었다. 처음부터 차갑고 비정했지만, 운 좋게 실력자들과 패가 짜여진 행운에 파묻혀 잊고 있었을 뿐이다. 나는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묻어줘야겠습니다.

그럴 여유 따윈 없어.

주먹에 불끈 힘이 들어갔다가, 다시 풀어졌다.

겨이산 씨, 내일은 당신이 저렇게 쓰러질 수도 있습니다.

내가 쓰러지면 너희들도 그냥 버리고 가. 너희들이 쓰러지더라도 난 그렇게 할거니까. 지금까지 수많은 동료가 쓰러졌지만 그 중 묻어준 사람은 한 명도 없고, 앞으로도 그럴 거야. 이 탑에 들어온 이상, 우리의 운명은 둘 뿐이야. 계속 내려가서 끝에 닿거나, 그러지 못하고 죽거나. 후자가 되고 싶지 않다면, 그렇게 뒤치다꺼리 잡일까지 도맡아 하기보단 앞으로 나아가는 데에나 신경 쓰는 게 좋을 거다.

잠깐이면 됩니다. 어차피 셋이서는 내려갈 수 없잖습니까.

그 때 겨이산의 뒤에서 검은 옷의 사내가 나타났다. 길잡이었다. 처음 보는 회색빛 천을 들고 있었다. 그가 공허한 목소리로 물었다.

세 명 남은 건가?

.

겨이산이 대답했다. 길잡이는 빠르게 말했다.

방법은 두 가지다. 위로 서른 층을 되돌아가서 인원을 조율하던지, 아래에서 한 명 남은 패가 생기길 기다리던지. 그런데 너희는 열두 번째 구역의 끝자락에 있어서, 이 아래에는 몇 층 남지 않았어. 거길 진행 중인 패거리는 하나 뿐인데, 다들 실력이 좋아서 사상자가 발생하길 기대하는 건 무리다.

서른 층이나 올라가야 한다구요?

그래. 거기서 두 명의 전사자가 발생했다. 둘 밖에 안 남아서 짝이 안 맞긴 한데, 가서 얘기를 해서 패를 짤 수 있겠지. 아니면 좀 더 가까운 곳에서 다른 전사자가 또 생기길 기다리던가. 열세 번째 구역에서 생긴 사상자가 이 곳까지 올라오길 기다릴 수도 있겠지. 그렇게 구역을 넘어서까지 올라오는 건 흔한 경우는 아니지만.

서른 층은 너무 많아요. 기다리죠.

내가 끼어들었다. 겨이산이 근심 어린 표정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일단 기다리겠습니다. 또 다른 사상자가 생기면 알려주십시오.

겨이산의 말에 길잡이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가져온 천으로 외욱의 시신을 감싸 들어올렸다. 기다릴 동안 그의 시신을 묻어줄 생각이었던 나는 당황했다.

어디로 데려가는 겁니까?

알 거 없다.

다음 질문을 할 틈도 없이, 길잡이는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겨이산과 나, 이회는 멍하니 그가 사라진 쪽을 바라보았다. 외욱이 떨어뜨린 긴 칼만이 피바다 위에 유일한 유산처럼 누워있었다.



새로운 패거리를 기다릴 동안 제약 없이 벌레즙을 소비할 수 있었다. 대신 기다림이 끝나는 순간, 처음에 들고 있던 것 만큼의 벌레즙만 남기고 초과분은 길잡이가 회수해 갈 것이라고 했다. 푹 쉬면서 자잘한 상처들을 회복할 기회였다. 나는 겨이산, 이회와 함께 계단에서 대화를 나누거나 잠을 자거나 하며 시간을 죽였다.

하루는 겨이산이 말했다.

서라에 가 본 적 있나?

아니요.

그래? 한 번 가보지 그랬나. 여행하기 좋아. 새로 오르신 거슬한께서 태평성대를 여신 덕분에 민심이 넉넉하거든!

나는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현재 서라의 밝은나래 거슬한이 등극한 것은 적어도 7 년은 된 일이다. 아무리 시간 개념이 주관적이라 해도, 7년 전의 일을 새로라고 표현하는 것은 위화감이 느껴졌다. 게다가 밝은나래 거슬한은 집권 초기에나 성군 소리를 들었지, 내가 탑에 오를 때 즈음만 해도 주색에 빠져 나랏일을 돌보지 않는다고 들었다.

나는 이회의 반응을 살폈다. 그 또한 고개를 갸우뚱하고 있었다.

겨이산 선배, 명패를 한 번 보여주시겠습니까?

그러고 보니 우리는 지금까지 서로의 명패를 확인한 적이 없었다. 나와 외욱은 거꾸로 되돌아간 적이 한 번도 없었으므로, 우리 쪽이 후배임이 명백했기 때문이다. 명패는 보통 선후배를 가릴 때 유용하게 쓰이는데, 우리는 그 과정이 불필요했다. 

응? 왜?

그냥요. 한 번 보고 싶어서요.

겨이산은 별 말 없이 내게 명패를 건네주었다. 찬찬히 등탑 날짜를 확인하던 나는 깜짝 놀랐다. 그의 등탑은 나보다 무려 5년이나 앞서 있었다.

5년이라고? 그럴 리가!

겨이산이 놀라서 자신의 명패와 내 명패를 가져다가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럴 리가 없어! 벌써 5년이나 지났을 리가 없는데?

제가 등탑한 게 지금으로부터 얼마나 이전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반 년은 된 것 같습니다. 그렇게 따지면 선배가 탑에 오른 건 거의 6년 전의 일일 것입니다.

나와 이회도 서로의 명패를 확인해 보았다. 이회와 나의 등탑은 2년의 차이가 있었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겨이산이 허공에 던진 질문은 대답해 주는 이 없이 부질 없게 흩어져 갔다. 



새로운 패거리를 오래 기다릴 필요는 없었다. 하룻밤을 자고 나니, 열세 번째 구역에서 한 사람이 올라온 것이다. 특이하게도, 맥구루에서 온 사람이었다. 전쟁 이후엔 맥구루 놈들이 탑으로는 안 오는 줄 알았는데.

지만이라고 한다. 맥구루에서 왔고, 열세 번째 구역의 일곱 번째 층에서 돌아왔다.

고집스럽게 튀어나온 이마 아래 움푹 들어간 눈이 빛을 내며 우리를 둘러보았다. 삐딱하게 내려앉은 코에는 코털이 삐죽 빼죽 튀어나와 있었다. 당나귀만한 키에 왜소한 등 뒤에는 겨이산처럼 창을 메고 있었다. 창은 말을 타고 벌판을 달리는 맥구루 사람들이 즐겨 사용하는 무기다.

자기소개가 다 끝나자, 겨이산은 지만에게 명패를 달라고 해 자신의 것과 비교했다. 지만의 등탑은 겨이산이 등탑하기 17년 전의 일이었다. 그렇다는 건, 이 자는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탑에 올랐다는 소리다. 어이가 없었다. 어떻게 내가 갓 태어났을 때 탑에 오른 사람을, 여기서 이렇게 비슷한 나이대의 모습으로 만날 수 있다는 말인가? 하지만 지만은 이미 이런 현상에 익숙한 것 같았다.

뭐 그럴 수도 있지. 여긴 하늘님의 탑이야. 무슨 일이 일어나든 이상하지 않지. 그렇다곤 해도 17년이나 차이 나는 녀석들은 처음 보는군. 지금까진 기껏해야 10년 차이였는데.

지만은 크응 하고 코를 풀었다. 그리고는 이 작은 사내는 팔짱을 끼고 고개를 쳐들며 거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지금부터 내가 우두머리다. 이 아래쪽에 대해서는 내가 빠삭하게 알고 있으니까.

겨이산은 이 왜소한 사내에게 영 믿음이 가지 않는 표정이었다. 사실 이회와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어쨌든 이 사내가 우리 중 가장 선배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고, 목숨을 걸고 매 전장을 진행해야 하는 이 탑에서 앞의 전장에 무엇이 있는지 알고 있다는 것은 상당한 강점이었다. 우리가 동의하자, 그가 거들먹거리며 입을 열었다.

자, 다음 전투에서 뭐가 나올지 내가 알려주지. 위추벌새라라는 놈이다. 투명해지는 능력이 있는 녀석이야. 한 번 투명해지면 모든 상처를 회복해서 다시 나타나니까, 사라지기 전에 빠르게 죽여버려야 해. 내 말만 들으면, 쉽게 돌파할 수 있을 거다.


하지만 다음 전장에서 나온 나티는 위추벌새라가 아니었다. 비추굴저라는 녀석으로, 둥그런 방패처럼 생긴 본체의 중심부 위 아래에 여러 개의 가시가 달린 나티였다. 본체 아래에 있는 가시 하나가 위에 달린 가시 하나와 짝을 맞춰 움직였는데, 다리 역할을 겸하는 아래쪽 가시의 움직임에 따라 위쪽의 가시가 공격해 오는 방향이 달라졌다.

화살을 쏴, 화살을!

지만의 외침에 겨이산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 녀석은 화살로 상대하기 힘듭니다. 위쪽의 가시들을 칼이나 창으로 잘라내야 합니다.

누가 뭐랬나? 우리는 그렇게 하더라도, 뒤에서 계속 화살을 쏴서 견제하라는 거지! 너희 둘은 화살을 계속 쏴!

이회와 나는 열심히 화살을 날렸다. 하지만 녀석의 방패 같은 몸에 부딪친 화살은 박히지 못하고 튕겨져 나왔다. 몇 개의 화살들이 가시에 박혀 일부를 무력화시키긴 했지만, 그다지 큰 영향을 주지는 못했다.

아 씨, 뭐하는 거야!

튕겨져 나온 화살을 피하며 지만이 소리질렀다. 보다 못한 겨이산이 내게 칼을 들라고 외쳤다. 나는 즉시 활을 내려놓고 칼을 빼 들었다. 외욱이 남기고 간 길다란 칼이었다. 앞으로 나선 나에게, 겨이산이 제일 오른쪽에 있는 비추굴저 한 마리를 가리켰다.

조심하고! 가자!

겨이산과 나는 함께 앞으로 달려들었다. 녀석의 가시가 기다렸다는 듯 찔러 들어왔다. 내가 그것을 막아내는 동안, 겨이산의 창이 가시가 뻗어 나오는 녀석의 중심부를 파고들었다.



선배가 있던 패거리가 박살 난 이유를 알 만 하군. 우린 당신을 따를 수 없습니다.

전투가 끝나자 겨이산이 말했다. 지만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변했다. 

계집애 같은 서라 놈 주제에. 넌 전투 중엔 숨어 있다가 끝나면 나와서 엉덩이나 대는 게 어울려! 맥구루에서는 매일 국경 곳곳에서 나티들과 전투가 벌어진다! 나는 그런 곳에서 왔어!

겨이산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패를 깨려 들면, 다 같이 포기하는 것으로 간주되는 상황이다. 무례한 말에 이회가 발끈하여 자신의 활에 손을 가져다 댔지만, 오히려 당사자인 겨이산은 침착하게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의 비쩍 마른 몸을 보면 뒷구멍도 필요 없소. 다음 전장에서 방해되지 않게 찌그러져 있기나 하시죠.

찌그러져 있을 건 네 놈이다! 방금 전 순서를 헷갈려서 틀리긴 했지만, 어쨌든 내 머리 속에는 앞으로 상대해야 할 녀석들의 정보가 다 들어 있어. 이 두 사람은 너같이 위 아래 없는 놈을 따르느니 내 말을 들을걸?

지만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나와 이회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우리 둘은 냉랭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방금 전의 전장에서 본 바, 그는 창잡이로서의 실력도 기껏해야 보통 수준인 데다가 판단력이라고 할 만한 것은 그 깊이가 어린애 오줌에 살짝 패인 땅과 같았다. 이런 자를 따르는 것은 자살행위다.

이런 멍청이들! 탑의 끝까지 닿을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걷어찰 셈이냐?

지만은 우리 셋을 번갈아 노려보며 씩씩거렸다. 겨이산이 천천히 대답했다.

선배님의 경험은 존중하지만, 믿을 만한 지도력을 가졌는지는 다른 얘기오. 

“…”

분위기가 수세에 몰린 것을 깨달았는지, 지만은 곧 표정을 풀고는 선심 쓰듯 말했다.

크, 좋아. 우두머리가 하고 싶다는 거지? 알았어, 너 해라, 너 해. 너희들의 우정을 존중해 줄 테니.

겨이산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이회에게 다가가 작게 물었다.

다음 구역 입구에 가면 여덟 명씩 패를 새로 짜게 되어 있으니, 거기서 패를 바꾸는 건 문제가 되지 않겠죠?

그럴 거라고 기대하고 있어.

이회가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사람이 된 우리 패거리가 남은 세 개의 층을 돌파하는 동안, 지만은 기껏해야 보조 역할 밖에 하지 못했다. 열세 번째 구역의 입구에 다다랐을 때 겨이산이 지만에게 선언했다.

당신과 더는 같이 못하겠소. 여기는 패를 새로 구성할 수 있으니, 이 곳에서 헤어지기로 하죠.

좋다.

지만은 퉁명스레 대답했다. 우리 세 사람은 성큼성큼 걸어 내려갔다.

열세 번째 구역부터는 큰 구역이라고 불리었다. 이제 여덟 명이 정원이었다. 우리는 입구 앞의 광장에서 먼저 기다리고 있던 일곱 명의 사내들을 만났다. 그들 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두 사람이 우리를 보고 일어나 다가왔다. 겨이산과 지만이 나아가 그들과 얘기하기 시작했다. 이회와 나는 광장 한 구석에 가서 편히 앉았다. 

그들 중 활잡이 셋을 포함해서 도합 네 명의 패를 이끌고 있는 창잡이가 겨이산에게 적극적으로 말을 걸고 있었다. 세 명을 이끄는 우두머리는 말을 거의 듣고만 있다가, 곧 포기한다는 듯 자리로 돌아가 버렸다. 잠시 후 겨이산이 창잡이를 향해 머리를 깊이 숙이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창잡이는 손을 뻗어 겨이산의 어깨를 다독였다. 그 모습을 보고, 지만은 내게 다가와 투덜댔다.

나한테는 안 그러더니, 저 사람한테는 순순히 우두머리 자리를 넘기네.

이런 머저리 같은 놈.

창잡이 혼자서 활잡이 셋을 이끌고 올라왔다면 우두머리로서의 능력이야 보증된 거나 다름 없죠.

속으로 혀를 차면서도 나는 내색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하지만 그는 건방진 태도를 버리지 않았다.

우두머리가 별 거 있나. 나에게 기회를 줬었어도 충분히 잘 했을 거라고.

무심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마침 겨이산이 저쪽에서 나와 이회를 불렀다. 지만을 더 상대하기가 싫었던 나는 냉큼 자리에서 일어나며, 다시는 보지 말자는 마음을 꾹꾹 눌러 담아 내뱉었다.

우두머리가 별 거 있냐고 말한 시점에서 이미 당신은 그 자질을 드러낸 거야.

그가 나를 노려보았다. 내가 반말을 하는 것이 불쾌한가 보다. 뭐 어쩔 테냐. 나로서는 그와 말을 나누는 것조차 불쾌했다.

우리가 다가가자 겨이산과 저쪽 우두머리가 서로의 패거리들을 소개했다. 그 창잡이의 이름은 기언험이었고, 그를 따르는 활잡이 셋은 창우, 사웅사, 자우치라고 했다. 기언험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반갑네. 기다리느라 힘들었어. 자, 이제 가자구.

아, 아직 한 명이 더 필요합니다.

음?

저 지만이라는 사내는 저희와 함께 하지 않을 것입니다.

겨이산의 설명에 기언험의 표정이 찌푸려졌다. 조금 뒤에서 팔짱을 끼고 듣고 있던 지만이 그것을 놓치지 않고 끼어들었다.

이들은 나보다 탑에 늦게 들어온 자들이오. 기껏 도로 올라가서 도와줬더니, 이제 와서 이런 말을 하고 있군.

도로 올라왔다? 그럼 어디까지 다녀온 거요?

글쎄 열네 번째 구역 가까이?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명패를 봅시다.

기언험의 말에 지만이 명패를 꺼내주었다. 두 사람은 서로의 명패에 적힌 날짜를 확인했다. 기언험이 말했다.

나보다는 후배로군.

선배님도 이 앞에 다녀오셨습니까?

겨이산의 질문에 기언험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는, 지만을 가리켰다.

어째서 이 자와 함께 하지 않으려는 거지?

실력이 너무 떨어집니다. 선배라는 이유로 제 지휘에도 잘 맞춰주지 않구요.

네가 우두머리였나? 저 자가 더 선배였는데도?

.

잠시 생각하던 기언험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그럼 문제가 없겠구만. 내가 선배니까 내 명령은 따르겠지.

겨이산은 할 말을 잃고 기언험과 지만을 바라보았다. 기언험이 여덟 사람을 쭉 훑어보며 타이르듯 말했다.

이렇게 여덟 명이 딱 맞게 갖추어지기가 쉬운 일이 아니야. 지금 당장 도전을 계속할 수 있는데, 굳이 이 기회를 버리는 건 어리석은 짓이네. 여기까지 내려오는 건 보통 네 명으로 된 패거리들이고, 그들은 자신들의 패를 쉬이 깨려 하지 않아서 한 명이나 두 명만 데려오긴 쉽지 않아. 아니면 저 아래 내려갔다 온 패잔병들을 그러모아서 패를 꾸릴 수 밖에 없네. 뭐 사실, 우리 패도 솔직히 그런 패잔병들이긴 하네만 어쨌든, 자네가 정 저쪽 세 명 패거리랑 함께 하겠다면 할 수 없지만, 거기서 패를 채우는 것도 금방 되지는 않을 거야.

이치에 맞는 설득이었기에, 겨이산과 이회는 똥이라도 씹은 표정으로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나 또한 크게 다른 표정은 아니었을 것이다. 게다가 입가에 비웃음 같은 것을 씨익 띄우는 지만을 보니, 속이 역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다행히, 기언험의 지도력은 일곱 용사와 한 명의 머저리를 이끌고도 무리 없이 전장들을 돌파할 수 있을 만큼 훌륭했다. 우리는 파죽지세로 나티들을 베어 넘기며 열세 번째 구역을 정복해 내려갔다. 지만 또한 그럭저럭 기언험의 지휘를 따르긴 했다. 그러나 그의 모자란 실력도 실력이지만, 패의 사람들마다 붙잡고 별의별 불만을 토로하는 통에 그를 좋아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어느덧 열네 번째 구역에 들어섰다. 이제 앞으로 세 구역만 나아가면 탑의 끝에 다다를 수 있을 것이다. 잿빛 일색이던 용사들의 얼굴에 조금씩 희망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첫 전장에 들어가기에 앞서, 기언험은 패거리들에게 각자 무기를 다듬으라고 명령했다. 나는 활 시위를 새 것으로 갈아줄 요량으로 활을 꺼내서 무릎 위에 부려놓았다. 활 상태를 찬찬히 살피는데 이회가 조용히 다가왔다.

이 탑은 대체 우리에게 뭘 요구하는 걸까.

요구한다뇨?

모든 시험은 시험자에게 요구하는 능력이 있지. 과거시험은 선비로서의 지식을 요구하고, 수련원 시험은 체력을 요구하지. 그럼 이 탑에 오르는 시험자에게는 탑이 요구하는 게 뭘까?

나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나티 잡는 능력이겠죠, 뭐.

“…하지만 단순히 그렇게 말하기엔 좀 이상해. 나티들과의 전쟁은 이미 전설 속 옛날 이야기일 뿐이야. 각 나라의 수련원에서 기르고 있는 몇몇 수준 낮은 나티들이나, 맥구루의 국경에 어쩌다 출몰하는 녀석들만 제외하면, 이승의 사람들이 나티를 접할 일은 거의 없다구. 이를 테면, 이건 멸망한 나라의 언어로 시험을 치는 것과 비슷한 기분이야.

그렇다고 사람과 사람이 싸우게 할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내 말에 이회는 의아한 표정이었다가, 곧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티와 싸우게 하나, 사람끼리 싸워서 이긴 자가 올라오게 하나 사상자의 수는 비슷할 거다. 이 탑에서 나티들과 싸우다  죽는 사람은 수두룩해.

아뇨, 그런 말이 아니라, 하늘님께서 그러실 것 같지는 않다는 말이에요. 널리 사람들을 이롭게 하라고 하신 분이, 자신이 만든 탑에서 사람들끼리 싸우게 하지는 않았을 것 아닙니까. 싸우는 행위 자체가, 하늘님께서 내린 가장 중대한 명령을 스스로 거스르는 건데요.

그건 그렇군.

이회가 고개를 끄덕이며 홀로 사색에 빠져들었다. 다시 활을 손질하기 시작했다. 몇 주 동안 거칠게 다뤘는데도 활은 자잘한 생채기만 났을 뿐 튼튼했다. 줄을 걸어 활시위를 당겨 보는데, 이회가 생각을 정리한 듯 말을 이었다.

“…그래도 이상해. 단순히 강한 자를 골라내 상을 주려는 거라면, 굳이 나티들과 싸우게 할 필요도 없어. 어쨌든 사망자가 쏟아져 나온다는 점에서 홍익인간의 뜻을 거스르는 건 마찬가지다. 격파술을 본다거나 그 밖의 다른 시험 방법들도 많아. 탑이 우리에게 나티들과 싸우는 기술을 요구하는 이유는 대체 뭘까?

나는 그의 질문이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떠올렸던 비슷한 질문이 생각났다. 갑작스레 느껴진 동질감 속에서, 나는 대답 대신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그것도 아마 탑의 끝에 다다르면 알게 되겠지요.

“…그렇군. 끝까지 가야 할 이유가 또 하나 늘었구만.

우리는 마주보며 웃었다. 까칠하게 낱낱이 따지고 드는, 글쟁이들이나 할 법한 류의 대화를 나누었음에도 오히려 만족하면서.


열네 번째 구역 전장에서였다. 하루는 패거리들의 괄시에 약이 올랐는지, 지만이 자신의 용맹함을 증명하기 위해 기언험의 지휘를 무시하고 무리하게 나서기 시작했다. 결국 기언험은 지만에 대한 관용을 거두었다. 그 멍청이를 엄호하다가 활잡이 창우가 습격을 당해 전사했기 때문이다.

지만, 너와는 더 이상 함께 내려갈 수 없다. 패거리를 나가.

지만이 그 못난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싫소.

네 선택을 물은 게 아니다, 애송아.

기언험의 말에 지만이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언제 보아도 구토가 올라오는 모습이다.

그래서 어쩌시려고? 여기서 패거리를 깨면, 전원이 포기하는 것으로 간주되는데?

그 말에 기언험은 슬쩍 옆에 있던 길잡이와 눈짓을 주고받았다. 갑자기 그는 지만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리고 다음 순간, 기언험의 칼이 뽑히더니, 설마 하는 표정으로 방어할 생각조차 못하고 멍하니 서 있던 지만의 팔을 베어버렸다. 뼈가 끊어지는 소리가 먼저 울렸고, 다음으로 피와 함께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끄아아아악!!!

말릴 새도 없이 일어난 일이었다. 모두가 석상처럼 굳어졌다. 지만의 애처로운 비명소리만이 울리는 가운데, 기언험은 칼에 묻은 피를 지만의 행장에 문질러 닦고는 칼을 칼집에 집어넣으며 길잡이를 향해 침착하게 말했다.

저 사내는 전투 중 부상을 입었다. 어쩔 수 없이 포기시켜야겠군. 저 친구를 잘 부탁하네.

길잡이 두 명이 나타나더니, 바닥을 구르며 고통스러워 하는 지만을 붙들어 일으켰다. 지만은 정신이 나간 것 같았다. 말다운 말도 하지 못하고, 꺽꺽거리며 울음소리 비슷한 것만을 뱉어대고 있었다. 나는 조용히 우리를 이끄는 길잡이에게 다가가 물었다.

어디로 데려가는  겁니까?

이 친구는 탑을 더 오르는 것을 포기했으니, 길잡이가 될 거다.

길잡이가 된다구요?!

그래. 몰랐나? 포기한 용사는 길잡이가 되어 평생을 탑을 위해 봉사해야 해.

나는 다시 지만을 바라보았다. 두 길잡이가 그를 데리고 조용히 사라지고 있었다. 기언험은 다른 사람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패거리의 분위기는 차갑게 내려앉아 있었다. 기언험은 얼굴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냉정하게 말했다.

이해해 주시게들. 실력이 모자라는 건 안고 갈 수 있지만, 패의 호흡을 깨는 것은 용납할 수 없으니.

그리고는 창우에게 다가가 무릎을 꿇었다. 눈을 감고서 시신을 매만지며, 우리의 우두머리는 한동안 깊은 침묵에 빠져 있었다. 패거리 중 몇몇은 고개를 끄덕였고 몇몇은 과했다는 듯 씁쓸한 표정으로 가로저었다. 그러나 어쨌든 그의 선택이 패 전체에는 약이 될 것이라는 데는 다들 동의하는 기색이었다. 특히 겨이산은 깊은 감동이라도 받은 표정이었다.


창우와 지만의 빈 자리를 채우기 위해, 우리는 두 명의 용사가 나타나길 기다려야 했다.

요새 이승에 별 일은 없었나?

벌레즙을 주던 길잡이가 물었다. 열 번째 구역부터 우리를 인도해 온 바로 그 길잡이였다. 길잡이가 먼저 뭔가를 물어온 것은 처음이라, 나는 잠시 당황하여 무의미한 음파를 흘리다가 말했다.

아, 음 네, 뭐 별 거 없었습니다. 스무 해 전 쯤 맥구루와 온바라기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던 이후로는 한동안 평화로웠습니다.

맥구루와 온바라기 사이에 전쟁이 있었나?

길잡이가 근심을 가득 눌러 담아 눈살을 찌푸렸다. 나는 조심스럽게 그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고 보니 이 길잡이도 한 때는 이 탑에 도전한 용사였을 것이다. 이승 어딘가에 그의 가족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 길잡이가 친근하면서도 어쩐지 안쓰러운 기분이 들었다. 나는 서둘러 덧붙였다.

, 걱정 마세요. 소서노델에는 아무런 피해도 없었습니다.

길잡이는 허망하게 미소 지었다.

내 아들은 나이가 차서 이미 소서노델을 나왔을 터. 전쟁에 휩쓸렸을 것이 걱정이다.

하긴. 이 길잡이는 적어도 지만보다는 먼저 등탑했을 테니, 그 아들뻘 되는 인물도 스무 해 전에 이미 어른이었을 만도 하다.

아드님의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내가 물었지만, 그는 씁쓸하게 미소 지으며 힘 없는 목소리를 흘렸다.

길잡이에게는 개인사를 말하는 게 금지되어 있다.

왜요?

친분에 따라서 도전자들에게 불공정한 대우를 하게 될 수도 있으니까.

그렇군요…”

중얼거리며 고개를 끄덕이는 나를 뒤로 하고, 길잡이는 조용히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갔다.


한나절을 기다리니, 아래쪽에서 연율이라는 창잡이와 처시율이라는 활잡이가 올라왔다. 둘 다 맥구루 사람이었다. 여덟 명의 패거리에서 가장 선배인 연율이 새로운 우두머리를 맡게 되었다.

연율은 창 솜씨가 너무나도 뛰어났다. 홀로 칼잡이 세 명 분은 손쉽게 해 내는 그 근접전 능력 덕분에, 나는 활만 전담하게 되었다. 그의 지휘 또한 깔끔하고 기민하여, 처음에 우두머리를 넘겨주고 다소 긴장한 기색이던 기언험도 서너 차례 전투가 끝난 후 연율을 완전히 신뢰하게 되었다.

반면 처시율이라는 사내는 전투가 시작될 때마다 구석에 숨어 있기만 했다. 그는 몸이 호리호리하고 얼굴은 기생오라비처럼 창백해 아무리 봐도 영웅이 될 만한 자질이 있다고는 보이지 않았다. 겉으로는 활잡이이긴 했지만, 몇 개의 전장을 지나는 동안 실제로 그가 나티에게 화살을 적중시키는 모습을 단 한번도 볼 수 없었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다른 이들에게는 엄격하게 지시하는 연율도 유독 그에게는 너그럽다는 사실이었다.

한 번은 전투가 끝나고 나자 겨이산이 다가와 속삭였다.

저 처시율이라는 사내는 정말 도움이 안 되는군. 도대체 저런 자를 왜 활잡이랍시고 데리고 다니는 건지 몰라.

나는 지만을 대하던 겨이산의 태도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가 처시율 같은 어설픈 용사를 눈엣가시처럼 볼 것은 자명한 일이다. 문득 지만의 팔을 잘라 길잡이로 만들어 버린 기언험이 생각났다.

기언험님은 저 사람에 대해 별 말 안 하시던가요?

기언험님도 당연히 불만이 많지. 아마 그 분이 우두머리였다면 저 놈도 진작에 지만 꼴이 났을 거다. 아닌 게 아니라 기언험님도 연율께 몇 번 불만을 표현하긴 했다는군. 하지만 그를 두둔하기만 할 뿐 별다른 말이 없었대. 이전 패에서 같이 살아남은 친분 때문인가 보지. 쳇, 우두머리면 모든 패거리에게 공평해야 하는 거 아닌가? 저 놈이 무슨 지 마누라라도 돼?

나는 그의 넋두리에 동조하며 함께 툴툴거렸다.


그리고 취침 시간에 목이 말라 잠에서 깬 나는 의도치 않게 겨이산의 말을 확인하고 말았다. 비몽사몽 간에 약수터를 찾아 물을 들이키는데, 문득 계단 반대편에서 어떤 소리가 들려왔다. 살과 살이 부딪히는 소리였다. 일정한 간격으로 울려오는, 가죽이 빚어내는 찰진 노래. 하지만 그것은 남자들만 있는 이 탑에서는 오랫동안 듣지 못한 소리였다. 그래서 나는 그것을 잘못 들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곧바로 자리로 돌아가 누웠다. 물을 마셔서 그런지 어느새 정신이 맑아져 있었다. 눈을 감자, 용사들의 코고는 소음들 사이로 가죽 박수 소리가 더욱 선명하게 귀 속으로 파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한참 뒤척이던 나는 결국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다시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소리가 들려오는 쪽을 따라, 몸을 낮추고 계단을 올라갔다. 그리고 그 끝에서 보고 싶지 않았던 모습을 보고야 말았다.

연율과 처시율이 한 몸이 되어 있었다. 마치 짝짓기에 전념하는 수캐처럼, 패거리의 우두머리는 온 힘을 다해 자신의 몸을 연약한 상대에게 쑤셔 넣고 있었다. 질퍽한 냄새가 공간을 가로질러 와 기분이 더러웠다. 나는 슬그머니 계단을 도로 내려왔다.

자리에 누웠지만 오랫동안 잠들 수가 없었다. 연약한 처시율이 이렇게 높이까지 올라올 수 있었던 비결은 몸을 내주는 것이었다. 그 추잡한 영상이 눈 앞에서 사라지지 않아, 나는 손등으로 눈을 가린 채 한참이나 누워 있었다.


다음 날, 처시율은 이번에도 특유의 얼빠진 표정으로 전장 구석에 숨어 있었다. 분명 활은 맥구루의 품질 좋은 맥궁이었지만, 그는 화살을 쏘는 둥 마는 둥하며 전장에서의 시간을 흘려 보냈다. 그 모습에 새삼 화가 치밀어, 나는 전투가 끝나자마자 겨이산에게 다가갔다.

처시율이 연율의 마누라 맞더군요.

엉, 그렇겠지. 내가 봐도 그래. 기생오라비 같은 새끼.

겨이산이 낄낄댄다. 나는 목소리를 낮추었다.

진짜입니다. 지난 밤에 두 사람이 비역질하는 걸 봤어요. 계단 구석에서.

내 말에 그는 웃음을 거두었다.

씨발.

이대로 괜찮을까요? 우두머리가 남색가라니.

“…”

겨이산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복잡한 표정으로 처시율 쪽을 바라보며 한동안 고민에 빠져 있었다. 잠시 후 그가 입을 열었다.

사실 이 탑에 들어오면 몇 년 동안 여자를 구경도 할 수 없으니 남색에 빠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겠지 어차피 대안이 없어. 우두머리가 전투에서 혼자 두 명 어치는 하고 있으니, 그냥 이대로 따르는 게 최선일 것 같네.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기야, 두 사람이 남들에게 방해가 된 것도 아니다. 연율이 내 엉덩이를 탐하지 않는 이상, 두 사람의 취향을 뭐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며칠 후, 나는 적어도 처시율은 그 비역질을 즐기고 있는 게 아니었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열다섯 번째 구역의 전장에서 고아지를 상대하고 있을 때였다. 연율의 탄탄한 지휘 아래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던 우리들의 귀에, 느닷없는 우두머리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아악!

모두가 일시에 연율을 바라보았다. 그의 넓고 단단한 등가죽에 깊이 박힌 화살 한 발이 보인다. 연율이 눈에 불을 켜고 화살이 날아온 쪽을 노려보았다. 나무 위에 올라선 처시율이 활을 들어 연율을 겨누고 있었다. 연약한 활잡이의 분노에 찬 얼굴에 다른 이들은 할 말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고아지의 거대한 뿔이 날아들어왔기에, 사람들은 처시율에게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다.

너 이놈!!!!

연율이 고함을 질렀다. 처시율은 그에 아랑곳없이,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에게 다시 한 번 자유를 허락했다. 화살이 엄청난 속도로 순식간에 날아와, 이번에는 연율의 가슴팍에 꽂혔다. 피가 튄다. 백발백중의 뛰어난 실력이었다. 그는 생명과 직결되는 급소만 정확히 노리고 있었다. 옆에 있던 겨이산과 기언험이 방패로 연율의 몸을 가렸지만, 처시율은 여전히 방패 사이로 살짝 보이는 틈을 노리고 화살을 계속해서 쏘아 댔다. 네 발의 화살이 몸에 박힌 연율은 허파에 구멍이 났는지 더 이상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그저 고통에 찬 얼굴로 피를 토할 뿐이었다.

그 와중에 연율을 지키느라 고아지에게 등을 돌리고 있던 기언험이, 나티의 뿔에 꿰뚫려 비명을 지를 새도 없이 죽었다. 그 충격에 밀려 화살 범벅이 된 연율은 땅에 쓰러졌다. 이미 두 사람을 구하기엔 늦었다는 것을 깨달은 겨이산은 기언험의 피로 범벅이 된 자신의 방패를 급히 주워들었다. 그 직후, 고아지의 팔이 겨이산에게 쇄도해 들어왔다. 서라에서 온 용맹한 창잡이는 방패째로 멀찌감치 날아가 버렸다.

뒤쪽에서 나와 이회, 사웅사, 자우치 네 명의 활잡이가 죽을 힘을 다해 고아지에게 화살을 쏘아댔다. 그 와중에도 처시율은 만면에 섬뜩한 미소를 띄운 채 계속해서 연율의 시신에 화살을 꽂아 넣고 있었다. 하지만 처참한 몰골이 된 우두머리의 몸은 날아와 박히는 화살에도 이제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고아지가, 나무 위에서 화살을 쏘고 있는 사웅사와 자우치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나티의 몸에 가려 보이지 않았던 겨이산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그를 돕기 위해 칼을 빼어 들고 그를 향해 달려갔다. 급히 꺼내든 벌레즙 통을 한 손에 쥐고 다른 손으로 쓰러진 겨이산의 목에서 맥을 짚었다. 하지만 박동은 느껴지지 않았다. 겨이산의 눈이 이미 하늘을 향해 돌아가 있었다.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니 사웅사와 자우치가 있던 나무가 뿌리째 뽑히고 있었다. 고아지의 손아귀에서 함께 짓이겨진 두 활잡이의 잔해가 바닥으로 던져졌다. 이제 놈은 이회를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나는 내게 등을 보인 나티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외욱이 남긴 칼을 움켜쥐었고, 놈의 등을 향해 뛰어올랐다.


“…놈을 죽일 수 있었다니 기적이군.

우리가 죽지 않은 거야말로 기적이죠.

나와 이회는 전장을 돌아보았다. 거대한 고아지의 시체 주변에, 치열한 피로 시뻘겋게 장식된 다섯 구의 참담한 시신들이 흩어져 있다.

저 미친 새끼 때문에 전멸할 뻔했어.

이회가 처시율을 가리켰다. 톳쟁이 녀석은 그 목이 덩굴줄기에 휘감긴 채, 나무 아래 도롱이벌레처럼 매달려 천천히 좌우로 흔들렸다. 뭐가 그리도 만족스러운지, 만면에 미소가 가득하다. 그가 죽기 직전 보여준 신들린 활 솜씨를 떠올렸다. 어째서 이런 선택을 했는지는 몰라도, 그 실력을 나티들을 향해 발휘했으면 일이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물론 죽은 자의 비밀 따위에는 관심이 가지 않았지만.

이회가 온갖 욕설을 쏟아내며 처시율의 시체에 화풀이를 할 동안, 나는 겨이산의 시신에 다가갔다. 그의 흰자위가 터질 듯이 번뜩이고 있었다. 손을 들어 천천히 눈꺼풀을 감겨 주며 중얼거렸다.

쉬어요. 묻어주진 않을 거지만.

맙소사. 너 그거 아직까지 담아두고 있었냐.

활잡이들의 화살통에서 화살을 챙기던 이회가 애써 웃으며 말했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여섯 층 위에 두 사람 충원이 필요한 패거리가 있다. 합류할 테냐.

길잡이의 말에 이회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섯 층만 올라가면 되니, 마다할 이유가 없다. 기다릴 필요가 없다는 점에서 오히려 운이 좋은 편이었다.

패에 합류하기 위해 위로 돌아갈 때는 걸어갈 필요가 없었다. 나와 이회는 길잡이를 따라 어둠 속으로 들어섰다. 덜컹거리는 소리가 들리며, 우리가 있는 공간 전체가 위쪽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와는 여기까지군.

두 패가 합쳐질 때는, 그 중 큰 쪽 패의 길잡이가 통합된 패의 인도를 맡게 된다. 그러니 열 번째 구역에서부터 오랫동안 함께 해 온 이 길잡이는 이제 다른 패를 인도하게 될 것이다. 나는 어쩐지 정이 가는 이 길잡이에게 왠지 모를 아쉬움을 느끼며 작별 인사를 건넸다.

그 동안 감사했습니다.

“… 내 아들 이름 말이야. 서태기라고 하네. 온바라기에 살 텐데 혹시 아는가.

서태기라구요?

아는가?

“…제 아버지의 성함이 서태기입니다.

길잡이가 놀란 듯 말을 잃었다. 하지만 동명이인일 수도 있다. 나는 어릴 적 들었던 할아버지의 성함을 어렵사리 떠올렸다.

 “혹시 길잡이 어른의 성함은 재누 이십니까? 큰주두 어라하 16년에 등탑하셨다는?

“…맞다.

혈연 관계를 확인한 우리는 잠시 말이 없었다. 묻고 싶은 것이 많았지만, 정작 그것이 말의 형태로 떠오르질 않았다. 나는 반가움과, 곧 다가올 이별에 대한 아쉬움으로 몹시 혼란스러웠다. 더군다나 기껏해야 한두 살 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 외모의 사내가 알고 보니 할아버지였으니.

서태기는 탑에 올랐냐?

먼저 입을 연 것은 재누 쪽이었다. 나는 서둘러 대답했다.

아니요, 그 분은 선비가 되셨습니다.

그래? 마누라가 기어이 그 아이를 글쟁이의 길로 인도했구나. 그렇게 내가 탑에 오르는 걸 반대하더니…”

할머님이 그러셨어요?

그랬었지. 내 기억 속에는 아직 젊은 아낙인데 할머니라니 이상하구만. 그러고 보니 내 마누라는 잘 살아 있냐?

나는 잠시 주저하다 입을 열었다.

“…아니오. 제가 열 살 쯤 되었을 때 돌아가셨습니다.

“…그런가…”

재누의 목소리가 아련하게 잦아들었다.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은 했다만…”

“…”

“…그럼 네 아비는? 서태기는 잘 지내고?

“…제 아버지도 제가 수련원에 있을 때 병으로 돌아가셨습니다.

“…”

길잡이 재누는 한 동안 말이 없었다. 자신의 아내와 자식이 이미 모두 죽었다는 말을 들으면 얼마나 참담할 것인가. 그 기분을 도저히 가늠할 수 없어, 나는 감히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침을 삼키는 습기 찬 소리가 몇 번 들려왔다. 잠시 후 나의 조부는 다시 입을 열었다.

네 아비는 자식을 얼마나 낳았냐?

아들 둘입니다. 저는 둘째입니다. 형님도 글쟁이가 되었습니다.

그래? 네 아비가 선비가 되라고 시키든?

아니오, 아버지는 저를 꼭 할아버님처럼 탑에 오르는 용사로 만들고 싶어하셨습니다. 형님은 글쟁이를 한다고 했다가 집에서 쫓겨났습니다.

하하, 그랬군. 정작 나는 이렇게 실패해서 길잡이나 하고 있거늘 니 아비가 이런 내 꼴을 본다면 많이 실망하겠어.

“…”

나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재누가 따듯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래도 죽지 않고 길잡이가 된 덕분에, 이렇게 손주도 만나고 좋구나.

어둠 속에서 그가 나를 끌어안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말없이 팔을 마주 들어 그의 어깨 위에 손을 얹었다. 이승에서 형과 나누었던 포옹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그를 바라보고 싶었지만, 이 움직이는 방은 완전한 어둠 속에 갇혀 시야를 가로막고 있었다.

잠시 후 할아버지의 몸이 떨어져 나갔다. 어느새 방이 움직이는 소리가 잦아들어 있었다. 그가 말했다.

너라도 포기하지 않아서 다행이다. 꼭 탑의 끝까지 올라서 내 한을 풀어줬으면 좋겠구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둠 속에서 재누가 그것을 보았는지는 모르겠지만, 복잡한 마음에 도저히 입을 열어 말로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자, 이제 가라.

길잡이의 손이 내 등을 떠밀었다. 부드럽지만 강한 힘에 밀려 발을 내딛자, 주변을 맴돌던 어둠이 갑자기 걷혀 사라지고 나와 이회는 여섯 명의 사내를 마주했다. 서둘러 뒤돌아 보았지만, 어느새 벽이었다. 이회가 저들에게 다가가 말을 걸 동안 나는 차갑게 가로막힌 벽만 황망히 바라보고 서 있었다.


명패를 확인한 후 가장 선배인 이회가 우두머리를 맡았다. 각 패거리들의 주무기와 특기 등을 파악한 후, 그는 전장에 들어가기 앞서 마지막 정비를 명령하고는 조용히 나에게 다가와 물었다.

일부러 거짓으로 손주인 척 한 거냐?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분은 제 할아버지가 확실합니다.

그래. 뭐 아니었다고 해도, 탓할 생각은 없다. 길잡이에게 그런 식으로 안도의 말을 해 주는 건 후배로서 해 줄 수 있는 좋은 선물인 것 같아.

그도 그렇겠다 싶어 고개를 끄덕였다. 이회가 내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럼 이제 감상에서 깨어났으면 한다. 전장에 들어가야 하거든. 이 앞에는 기오앙이 있어. 전에 싸웠던 기억 나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회가 떠난 후, 나는 활을 꺼내 시위를 당겨보며 그 탄력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어느 새 우리는 고아지 녀석까지 처리하고 그 아래의 층에 진입했다. 몇 층이나 더 내려왔는지 모르겠다. 내려가는 것은 올라가는 것보다야 훨씬 쉬운 일이었지만, 층을 내려갈수록 하늘의 힘도 점점 더 강하게 느껴졌다. 뛰어오르는 것은커녕 서 있는 것조차 힘겨웠다. 그나마 계속 나아갈 수 있는 건 상대하는 나티들도 조금만 후려쳐 주면 짓밟힌 개똥 마냥 바닥에 늘러붙어 버렸기 때문이다.


선배님, 잠시 칼을 봐도 되겠습니까?

하루는 패거리 막내가 내게 다가왔다. 아무기라는 이름의 그는 긴 칼을 쓰는 사내였다.

왜?

저와 비슷한 칼을 쓰시는 것 같아서요.

청년이 미소 지었다. 귀찮긴 했지만, 나는 그에게 칼을 넘겨주었다. 청년은 받아 든 칼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칼자루와 칼날을 세심히 쓰다듬으며 그가 입을 열었다.

이 칼, 어디서 나셨나요?

이 탑을 함께 올랐던 형님께 받았다.

그래요? 그 분은 지금 어디 계십니까?

나는 얼굴에서 미소를 지우며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차가운 계단 바닥을 내려다보며, 나는 무덤조차 만들어주지 못했던 그 날을 떠올렸다.

“…그 분과 친하셨나요?

사내가 질문해 왔다. 나는 살짝 미소를 띄우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탑에서는 제일 친한 사람이었지. 수련원 시절부터 함께 해 왔으니.

내 쪽으로 몸을 굽히고 있던 아무기는 미소를 지으며 계단 벽에 편히 등을 기댔다. 그는 눈을 감고 말했다.

저는 소서노델에서 자랐습니다.

아버님도 등탑하셨나 보군.

네. 전 아버지가 자랑스럽습니다. 그래서 그 분을 따라 이 탑에 들어왔죠. 탑의 끝에서 만날 수 있을 거라고 믿으면서요.

그래.

“…제 칼은 아버지의 것과 똑같이 만들었습니다. 탑에서 아버지를 만난다면 바로 알아볼 수 있도록, 아버지의 칼을 담금질한 대장간을 찾아가 완전히 똑같은 칼을 만들어 달라고 했죠. 그리고 여기 와서 그 칼을 찾았습니다. 하지만 그 칼의 주인은 이름이 아버지와 다르군요.

나는 청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크고 날렵한 코와 부리부리한 눈매. 뚜렷한 턱선. 그러고 보니 그 사람과 많이 닮은 얼굴이었다.

외욱 형님의 아들이냐?

아무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이제는 놀랍지도 않았다. 며칠 전 할아버지도 만난 마당이니.

제 아버지는 어떻게 돌아가셨습니까?

“…나티에게 당하셨다.

물론 그렇겠지요. 더 자세히 말씀해 주십시오.

아무기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형님은 항상 전투에서 앞장서셨다. 용감하셨지만 그만큼 무모하셨지. 그러다가 미불에게 당하셨다.

그렇군요 마지막으로 남기신 말씀은 없으셨나요.

나는 그것이 끄아악이었다고는 차마 말할 수 없었다. 그저 고개를 가로저을 뿐이었다.

그렇습니까…”

아무기가 고개를 천천히 떨구었다. 나는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언제나 너와 네 어머니를 생각하셨어, 그 분은.

“…”

사내는 대답이 없었다. 나도 더 말하지 않았다. 어차피 더 해줄 만한 말도 없었지만.


어느새 동료의 죽음이 아무렇지도 않게 여겨졌다. 몇 명이 죽어나가더라도 그 빈 자리는 또 다시 누군가 다시 채웠다. 이회의 지휘 아래, 우리는 그렇게 계속해서 나아갔다. 이 잔혹한 세계에서는, 살아있는 한 계속 나아가는 수 밖에 없었다.

그런 끝에, 드디어 우리는 마지막 전장에 이르렀다.


이제 마지막 관문이다. 여길 통과하면 너희들은 이전의 위대한 영웅들과 함께 하늘의 전당 발할라에서 세상의 마지막 날까지 살게 될 것이다.

길잡이의 말에 용사들의 얼굴이 기대감으로 차 올랐다. 이승에서 여기까지 질질 끌어온 의문들이, 이 곳만 정복하면 확신으로 바뀔 것이다. 이회는 최후의 전투에 앞서 하루 종일 쉬며 피로와 상처를 회복하게 했다. 남는 벌레즙은 각자 온몸에 발랐다. 다음 날, 만전의 태세를 갖춘 우리는 전장에 들어섰다.


전장의 입구가 열렸다. 기세 좋게 문 안으로 날아든 여덟 명의 용사들은 어마어마한 몸집의 적을 마주하고 굳어버렸다.

집채만한 몸집에 우락부락하게 불끈대는 무자비한 근육 위로 지렁이 굵기만한 두꺼운 핏줄이 꿈틀거린다. 게다가 그 큼직한 어깨 위에 올라앉은 네 개의 철로 만든 듯한 머리. 얼구라비다. 그 중에서도 최소한 우두머리 급의 녀석이다. 이 녀석을 상대하는 시험이라니, 하늘님은 미친 것이 틀림없다. 아, 이런 불경을. 하늘님 죄송합니다.

얼구라비의 어른 몸통만한 육중한 주먹이 꾸드득거리는 소리를 내며 쥐었다가 펴졌고, 곧이어 앞쪽에 서 있던 용사를 향해 날아들었다. 마치 신호에 반응하는 것처럼, 우리들은 동시에 뛰어올랐다. 



천천히 열리는 문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빛에, 어둠에 익숙해 왔던 눈이 시리다. 오랫동안 본 적이 없는, 대낮과도 같은 빛. 손으로 가려 간신히 뜨고 있는 눈으로, 넓고 푸르른 하늘과 그 아래 펼쳐진 익숙하지 않은 풍경이 들어온다. 몇몇 이들은 긴장이 풀려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얼마나 오랜 기간 동안 탑을 오르면서 이 순간을 얼마나 고대해 왔던가. 방황하듯이 탑을 헤집던 시절이, 8명의 사내들에게 종말을 고하고 있었다.

우리는 문 밖으로 걸어 나왔다. 넓은 길거리가 눈부신 햇빛 아래 펼쳐져 있었다. 제각기 다른 복색을 하고 거리를 거니는 수많은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뒤를 돌아보니, 우리가 방금 걸어 내려온 탑이 보인다. 나는 짙푸른 색 거대한 탑의 모습에 잠시 기시감을 느꼈다. 그래, 이승에서 처음 오르기 시작한 탑도 딱 저런 모습이었다.

영원의 탑을 정복한 것을 축하합니다, 용사님.

파란 옷을 입은 아름다운 여성이 다가왔다. 강한 하늘의 힘에 이끌려 직선으로 곧게 뻗은 검은 생머리와, 그와 대조되는 뚜렷한 이목구비의 새하얀 얼굴이 돋보인다. 미소를 지으면 반달처럼 곱게 휘어지는 눈은 그 눈동자에 오직 순수만을 담은 듯 맑게 반짝였다. 나는 이승의 미인들을 전부 데려오더라도 이 사람의 아름다움에 대적할 수 있는 인물은 없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녀의 달콤한 음성이 우리들의 귓가에 계속해서 울려 퍼졌다.

발할라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저는 월구비라고 합니다. 여기는 위대한 영웅들이 세상의 마지막 날까지 전투를 즐길 수 있는 장소입니다.

그녀의 뒤에서 선녀들이 하늘거리는 천 조각들을 한아름씩 들고 나타났다. 하나같이 빼어난 미모를 자랑하는 여성들이었다.

이것은 날개옷입니다. 이걸 목에 두르고 팔을 벌리면, 목의 움직임에 따라 공중을 자유자재로 움직이실 수 있습니다.

그들이 내민 날개옷은 언뜻 보기엔 길다란 천처럼 보였다. 선녀의 설명에 따라 그것을 걸치자, 마치 땅의 힘이 약해졌을 때처럼 몸과 옷이 가벼워졌다. 날개옷의 가운데 부분은 붕 떠올라 목 위에서 아치형을 이루었고, 양쪽 부분은 겨드랑이 아래로 흘러내리며 우아하게 하늘거렸다. 우리가 날개옷을 입어볼 동안, 선녀 월구비가 설명을 계속했다.

아주 오래 전, 인간과 나티와의 전쟁에서 하늘님께서는 나티의 신과 만 년의 휴전 협정을 맺었습니다. 종의 운명을 걸고 결판을 내는 시점을 만 년 동안 유예한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그 평화 협정이 끝나는 날을 위해 하늘님이 준비하신 인류 최고의 무기로써 발탁되었습니다. 세상의 마지막 날에, 여러분은 나티와의 대전쟁에 참가하여 용맹을 떨치게 될 것입니다!

나는 어이가 없었다. 그리고 더 어이 없는 것은, 다른 용사들이 그녀의 말에 환호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창으로 바닥을 쿵쿵 치고, 칼을 방패에 부딪혀 소리를 내며 하늘님의 선택을 받은 걸 자축하느라 난리였다.

하늘의 힘 때문에, 이 곳에서는 시간이 이승보다 빠르게 흘러갑니다. 여기서의 1년은 지상에서의 천 년과 비슷하므로, 앞으로 7년이 지나면 세상의 마지막 날이 올 것입니다. 부디 그 날까지, 무한히 준비된 쾌락을 즐기며 최상의 상태를 유지하시기 바랍니다. 우선 여기 서 있는 선녀들 중에서 마음에 드시는 분과 짝을 지으시면 됩니다.

사람들이 열광적으로 아우성치며 앞에 다소곳이 서 있는 선녀들에게 달려들었다. 못 볼 꼬락서니였다. 한 선녀를 두고 주먹질을 벌이는 두 사내도 있었고, 벌써부터 선녀의 뺨을 핥으며 옷을 벗기려 드는 이도 있었다. 월구비가 웃으며 외쳤다.

아, 사랑을 나누시는 건 댁에서 천천히 해 주시기 바랍니다.

미친 것 같은 난장판 속에서, 나는 이회에게 다가가 속삭였다.

지금 좋아하는 사람들은 제정신인가요? 저 탑에서 죽을 고비를 몇 번이고 넘기면서 이렇게 올라왔는데, 앞으로도 계속해서 싸워야 한다뇨?

“…항상 이 탑의 목적이 궁금했는데 바로 이거였군. 뭐, 그만한 대가를 준다면야 문제될 건 없지. 우리의 특기가 바로 나티 잡는 거니까.

네?

내가 말문이 막힌 사이 이회는 이미 한 선녀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가고 있었다.

빨리 안 고르면 새 선녀는 못 고른다~!

그녀를 끌어안으며 이회가 외쳤다. 이미 다른 용사들은 한 사람씩 옆에 끼고 있는 참이었다. 나는 고개를 가로저으면서도, 아직 짝이 없는 선녀들을 향해 시선을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상황이 아무리 불합리하더라도, 그 동안 풀 길이 없었던 본능은 어쩔 수가 없었으니까.


날개옷을 입고 싸우는 것은 지금까지의 싸움과 전혀 달랐다. 버티고 설 수 있는 땅이 없으므로 칼이나 활을 잡는 자세도 조금씩 바꾸어야 했다. 우리는 하루에 여덟 시간 이상 훈련을 했다. 날아다니면서 활 쏘기, 움직이는 허수아비를 상대로 칼 휘두르기 같은 간단한 훈련도 있었고, 나티들을 상대하는 실전 수련도 마음대로 선택해서 할 수 있었다. 가끔 이승에서 벌어지는 전쟁에 관여하는 것도 수련 시간으로 인정되었다. 우리는 하늘나라의 용사로서 거듭나기 위한 싸움을 계속해 갔다.

정해진 시간을 채우면 나는 즉시 집으로 돌아와, 나의 짝 향기에게 달려들었다. 그녀는 아름답고 단아했다. 이 끝나지 않는 전투에서, 오직 그녀만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거친 숨소리가 귀를 자극해왔다. 거짓말처럼 풍만한 젖이 나의 움직임에 따라 출렁거린다. 난 향기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다. 내 전부가 그녀에게 빨려 들어 갔다. 모든 것을 쏟아내고, 그녀를 끌어안았다. 짜릿한 기분을 오래오래 느끼고 싶다. 그녀의 머리칼에서 흘러나오는 향에 취해, 나는 한참을 그렇게 누워 있었다.

잠시 후 나는 몸을 일으키며 부드럽게 말했다.

같이 산책이나 할까?

“…”

나의 짝, 향기는 아무런 대답 없이 신비로운 미소를 지으며 나를 올려다 보았다. 그녀는 남자를 기쁘게 하는 능력만큼은 뛰어났지만, 그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꼭두각시 같았다. 그리고 그 그녀가 할 수 없는 일에는 일상적인 대화도 포함되어 있었다. 몇 번 더 물었지만, 그녀는 조용히 상체를 들어올려 내 입술에 입을 맞출 뿐이었다. 너무나 귀여운 그 모습에, 나는 웃으며 그녀의 흠 잡을 데 없는 매끈한 몸을 마음껏 사랑해 주었다.

일어나 옷을 챙겨 입었다. 문을 나서기 전 침대 쪽을 돌아보니, 나의 짝이 다소곳하게 앉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손을 흔들었다. 그녀가 미소 지었다. 밖으로 나왔다. 하릴없이 밖으로 나와 거리를 돌아다녔다. 그녀의 안쪽을 채울수록, 내 속은 어쩐지 점점 비어가는 것 같았다.


맛있는 음식들로 배를 불리고, 최고의 안주거리인 추억을 곱씹으며 옛 동료들과 정신이 나가도록 술잔을 들이켜도 기분이 나아지지 않았다. 발할라의 대장간에서 새 무기와 갑옷을 맞추어도 마찬가지였다. 어차피 말만 하면 무엇이든 가질 수 있는 곳이다. 소유에서 얻는 만족감은 오히려 거의 없다시피 했다. 허무함이 내 마음을 잠식해 들어왔다.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이승 땅의 모든 전사들이 부러워하는 위치에 올라왔는데, 어째서 이다지도 공허할까.


이건 말도 안됩니다! 탑의 끝에 도착하면 원하는 대로 행복한 삶을 살면 될 것이라고 믿고 이렇게 개고생을 해서 왔는데, 앞으로도 계속 싸워야 한다구요?!

이승에서도 귀하다는 서라의 벌꿀술을 들이마시며 한탄했다. 하지만 맞은편에 앉은 이회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행복한 삶? 지금 즐기고 있잖아? 이승에 있는 모든 술과 음식들이 여기에 다 준비되어 있잖아? 몸이 근질근질하면 싸움도 마음껏 할 수 있고. 그리고 너, 이승에서 저런 계집들을 안아 본 적 있어?

혀 꼬인 발음으로 주절주절 늘어놓더니, 이회는 술집에까지 끌고 온 짝의 목에 팔을 둘렀다.

여기야말로 천국이지!

그러더니 선녀의 목덜미에 입을 맞추었다. 나는 그 모습이 보기 싫어 이마에 손을 짚었다. 옆 방에서 절정에 이른 여자의 교성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오호! 옆 방에서 또 다른 천국으로 승천하고 계신 분이 있구만!

이회가 옷을 벗기 시작하는 것을 보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집으로 향했다.

천국. 천국이라 나는 그의 말을 몇 번이고 속으로 되뇌었다. 이회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용사들은 어쨌든 이 곳이 천국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상한 것은, 오히려 나였다.


나는 그 날 밤 향기를 안지 않았다. 새근거리는 그녀를 옆에 둔 채, 나는 내 삶에 대해 생각했다. 처음 수련원에 들어갔던 것은 영생을 위해서였다. 인고의 시간을 견디고 탑의 끝에만 닿으면, 남은 인생은 내가 원하는 대로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순진하게 믿었다. 그래서 많은 것을 잃으면서도 잔인하고 비정한 탑의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싸움의 길은 내 인생을 조금씩 침식해 들어와서는, 어느새 완전히 무감각해진 알맹이를 달콤한 쾌락 속에 파묻어 버리고 그 껍데기를 차지했다. 행복하게 살기 위해 싸웠지만, 어느새 싸우기 위해 행복하게 살고 있는 꼴이다. 세상의 마지막 날까지 싸워야 한다고? 내게 이건 천국이 아니라 지옥이다. 전쟁에서 살아남더라도, 그 다음은? 내가 사랑하는 모든 것이 사라진 폐허 위에서, 그 무엇으로 인생의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

되돌려야 해.

내 머릿속은 오직 하나의 생각으로 가득 찼다. 


온바라기와 맥구루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이승으로의 파견이 결정되었으니, 내려갈 분은 1분 안에 출정소로 모여주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번 말씀 드립니다…”

선녀의 낭랑한 목소리가 길거리에 울려 퍼졌다. 오랜 친구들의 얼굴을 볼 새도 없이, 나는 전력으로 출정소를 향해 달렸다.

매번 파견을 이렇게 급하게 진행하는 이유를 나는 알고 있다. 여기서 1분이 지나면, 지상에서는 17시간이 흘러 버린다. 5분만 지체되더라도 사나흘이 지날 것이며, 만약 10분을 기다린다면, 그 사이에 이승에서 온바라기라는 나라가 아예 사라져 버릴지도 모른다. 

출정소에 도착한 영웅들은 각자 취향대로 차려 입은 갑주 위에 날개옷을 걸치고 방 안에 들어섰다. 매끈한 칼날처럼 반짝거리는 쇠 의자에 걸터앉자, 머리 위에서 푹신한 재질의 지지대가 내려와 일어나지 못하도록 어깨 위를 눌렀다. 

덜컹거리는 소리가 났다. 방이 위쪽으로 가속되면서 몸을 짓누르는 힘이 점점 강해졌다. 거대한 나티-이를테면 얼구라비 같은-가 붙잡고 뒤흔드는 듯, 온 방이 격렬하게 진동했다. 궤도 위의 이음새를 지나면서 생기는 마찰음의 간격이 급속하게 짧아져 갔다.

어느 순간 압력이 사라졌다. 붕 뜬 느낌 속에서, 의자 전체가 천천히 회전하여 천장 쪽으로 붙었다. 그러더니 이번에는 갑자기 방이 급정거를 하는 듯, 이제는 바닥이 된 천장 쪽으로 찍어 누르는 듯한 힘이 가해지기 시작했다. 엄청난 진동이 방을 뒤흔들었고 그에 맞추어 심장을 울리는 듯한 육중한 소음이 끝나지 않을 것처럼 이어졌다. 얼굴에 힘을 주지 않으면 눈알이 튀어나갈 것 같아,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소리가 멈춘 것은 한참 후였다. 어깨를 압박하던 지지대가 다시 위로 올라갔고,  방의 한 쪽 면 전체를 차지하던 문이 열리면서 밝은 빛이 눈에 들어왔다. 저 편에는 아주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산과 나무, 잡초들, 새 떼, 좀 더 멀리 보이는 논과 밭, 오밀조밀 붙어있는 허름한 농가들.

이승이었다. 그토록 그리워 했던 곳이 거짓말처럼 눈 앞에 펼쳐져 있었다. 용사들의 웅성거림 사이로 낭랑한 선녀의 목소리가 울렸다.

이승에 도착하였습니다. 전투는 남서쪽에서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번 강림의 지휘관이신 해모수 님과 함께, 온바라기를 구원하고 돌아와 주세요. 두 시간 후에 뵙겠습니다.

용사들이 하나 둘 몸을 일으켰다. 발할라에서 느껴지는 어마어마한 압력에 익숙해져 있던 몸에게, 이승에서의 땅의 힘은 아이들 장난처럼 느껴졌다. 몸이 너무나도 가벼웠다. 마치 무거운 모래주머니를 풀어낸 수련생처럼, 영웅들은 넓은 방의 곳곳을 가볍게 뛰어다녔다. 지휘관이 외쳤다.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다. 다들 날개옷 입었지? 가자!

그러더니 별다른 설명도 없이, 가장 먼저 이승의 풍경 속으로 뛰어들었다. 다른 이들도 재빨리 그의 뒤를 따랐다. 우리는 태양이 떠 있는 쪽으로 엄청난 속도로 날았다. 날아가는 새 떼 무리를 수 차례 추월한 끝에, 아흔 명의 용사들은 곧 전장에 도착했다.


얼마나 벤 건지 모르겠다. 하늘의 대장간에서 담금질된 나의 칼은, 수많은 맥구루 사내들의 칼과 방패와 뼈와 살을 갈라낸 뒤에도 날이 무디어지지 않았고 나의 호흡 또한 수백 번 칼을 휘두른 뒤에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근육은 아직 운동량이 부족하다는 듯 간질간질한 느낌을 호소해 왔다. 어느 새 적들이 울리는 공포 서린 퇴각의 뿔나팔이 여기저기서 들려오고 있었다. 나는 전장 구석의 거대한 모래 먼지 속에 멈추어 서서, 활을 빼어 들고 도주하는 적들을 쏘기 시작했다.

귀환을 명하는 해모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히 영웅이라는 칭호에 걸맞는, 범 같이 우렁찬 목소리였다. 모래 먼지 속에서 싸우느라 전체적인 상황을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어느 정도 승기가 확실해진 모양이다. 나는 천천히 활을 내려뜨렸다. 그리고 어깨 위로 손을 들어올려, 날개옷을 움켜쥐었다. 마치 생명이 있는 것처럼, 천이 파르르 떨렸다. 온갖 무기를 다루면서 우락부락 굳은 살이 박힌 내 손아귀는 우악스럽게 천을 잡아당겼다. 가냘프게 저항하던 날개옷이 끝내 촤아아악 찢어져 버린다. 그와 동시에 몸이 일순 무거워졌다. 갑작스러운 무게감에 무릎이 살짝 굽혔다가 펴진다. 한낱 천 쪼가리로 전락한 날개옷을 내려다보았다. 탑에서 챙겨 온 평범한 기념품이 되어, 이제 그것은 신비로운 하늘거림을 잃고 거친 손 위에 축 늘어져 있었다. 

고개를 들었다. 나를 발견한 온바라기 병사들이 다가와, 내 주변에 하나 둘 무릎을 꿇기 시작했다. 피로한 눈이 석양을 피해 동북쪽으로 향한다. 저 멀리 전투를 마치고 탑 쪽으로 돌아가는 오랜 동료들의 행렬이, 황혼을 받아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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