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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편 바이칼 Baby - 4

2017.08.21 11:5708.21

 

엄청난 추위 속에서도 아기를 낳고야만 끈질긴 모성에 감동한 코사크 병사들이

나서서 매장을 도왔다. 모닥불에 녹은 대지에 타냐를 묻은 삐에르는

얼어붙은 바이칼호수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호수의 인상은 사신이 지배하는 저승의 입구마냥 불길했다.

‘호수가 뿜는 음습한 냉기를 아기가 어찌 견디겠는가?

힘들더라도 바이칼을 우회하자.’

타냐를 잃은 마당에 아기까지 잃을 수는 없었다.

결국 그 동물적 본능이 아기를 지켜냈다.

 

모닥불에 몸을 녹이며 한 줌의 용기를 되찾은 사람들은

이르쿠츠크로 가는 지름길이라는 말에 혹해 얼음호수로 들어섰다.

호면은 반짝반짝 빛나고 두터운 얼음은 마차도 견딜 만큼 단단하다.

건너편 호안까지는 80km 정도.

 

그러나 얼음 위를 조심조심 걷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도 않아

머리가 빠직 쪼개질 것만 같은 독한 한파가 덮쳐왔다.

이어서 눈보라 섞인 광풍이 얼음 벌을 맹습하면서 얼음지옥의 문이 열렸다.

영하 69도...!

그건 모피를 제아무리 껴입어도 당할 수 없는 저승의 냉기였다.

호수를 반도 건너기 전에 몸이 굳어진 사람들은 제 자리에 멈추기 시작했다.

강한 바람에 떠밀려 미끄러운 빙판에 쓰러진 사람들은

다시 일어서지 못했다. 이윽고 얼음 벌판 위의 모든 것이 얼어붙었다.

더 이상 아무 것도 움직이지 않았다.

비정한 눈 폭풍만이 끝없이 이어진 주검들 위를 떠돌며

천지간을 휩쓸고 있었다.

이미 겪은 험난한 고통보다 더 심한 고난이 설마 있으랴

믿었던 그들이었건만 그 설마는 끝내 현실이 되고 말았다.

 

 - 옴스크를 탈출했던 피난민 백만 명이 동사했다!

 - 바이칼까지 왔던 마지막 20여만 명 역시 호수복판에서 죽었다!

 

며칠 뒤 이르쿠츠크에 이 끔찍한 소식이 알려졌다.

충격으로 우왕좌왕 하는 옴스크의 고위관리들을 묵묵히 지켜보던

체코군단의 청년장교가 뚜벅 말했다.

“ 우선 생존자를 구출할 수색대부터 보내야합니다.”

옳은 말이었다.

콜챠크를 비롯한 연합국 수뇌부들 역시 끄덕였다.

 

그러나 막상 콜챠크의 신경은 온통 다른 문제에 쏠려 있었다.

'피난민들과 함께 떠난 황금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것만 있으면 옴스크 정부는 언제라도 재기할 수 있다.

황실 금화의 규모는 그만큼 엄청났다.

그러나 그 존재를 아는 극소수의 측근 장교들은

호송대로 차출한 코사크부대와 함께 모두 떠났다.

'만일 연합국 측이 먼저 그것을 발견한다면...?'

황금이 자기에게 다시 돌아올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봐야 했다.

 

콜챠크는 체코군단의 청년장교를 자기 방으로 불렀다.

“관등 성명은?”

“체코 군단 참모장 라둘라 가이다 대령입니다.”

절도 있게 경례를 붙인 장교가 말했다.

“가이다 대령, 수색대는 자네가 지휘할 예정인가?”

“그렇습니다만...?”

의아한 시선의 가이다 대령에게 콜챠크는 은근한 표정을 지었다.

“조국 독립을 열망하는 체코군단을 평소부터 높이 평가해왔다네.

가이다 대령. 돌아가 조국의 적들과 싸우려면 자네들도 군자금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그야 그렇습니다만...?”

여전히 어리둥절한 표정의 가이다에게 콜챠크는 거액의 군자금 지원을 약속했다.

수색대가 황실금화를 회수해오는 조건으로...

그러나 피난민 구조에 대해서는 단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저것이 백군의 진면목이고 정체인가?’

면담을 마치고 나온 가이다의 표정은 어두웠다.

28살의 청년, 가이다의 눈에 비친 콜챠크는

빵을 구하는 굶주린 군중에게 기관총을 난사했다는 인간백정 짜르의 모습 그대로였다.

 

이르쿠츠크 시내의 마차와 짐수레들을 징발한

가이다의 수색대가 바이칼로 떠났다.

빙판은 미끄럽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마차꾼들은 말굽 짚신을 준비하고 있었고

자신들도 짚으로 엮은 덧신을 신고 있었다.

고역을 치르는 것은 가이다의 체코병사들 뿐이었다.

호수로 들어서자마자 굽이 미끄러진 말들은 네 활개를 쫙 펴고

빙판에 퍼져버렸다. 마차꾼들은 머리를 흔들었다.

“말 짚신 없이는 호수를 건너지 못합네다.”

결국 말을 기슭에 남겨두고 얼음벌판으로 들어가야 했다.

한복판쯤 이르자 주검이 드문드문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맞은 편 기슭으로 다가가면서 무더기로 발견되었다.

하나 같이 굶주림과 고통을 호소하는 애절한 표정의 주검들.

 

처음에는 활기 있게 걸으며 두런두런 잡담도 나누던 장병들은

차츰 말을 잃어갔다. 그리고 동작이 굼떠가며 표정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빙판 위를 떠도는 바람이 음산한 소리를 내며 여기저기에 눈보라를 일으키고 있었다.

“옴스크 종자들은 인간도 아냐.”

아이들과 부녀자가 뒤엉킨 주검을 바라보던 소위 한 명이 내뱉았다.

분노에 찬 그 말은 수색대 병사들 심정을 대변하고 있었다.

그건 가이다 대령 역시 마찬가지였다.

‘ 믿고 따라온 인민들은 이 지경이 되었는데 뭐? 황금...!’

 

“혹시 모른다. 살아남은 사람이 있을 런지, 한사람 한 사람 철저히 살피도록.”

그러나 가이다 스스로도 그 명령이 공허함을 느끼고 있었다.

굶주리고 지친 인간이 이 얼음지옥 속에서 어찌 살아남는단 말인가?

수색의 초점은 차츰 짐마차 쪽으로 모아졌다.

기슭으로 다가가던 수색대 병사들은 빙판 여기저기에 흩어진

노란 금속쪼가리들을 발견했다.

“대령님, 금화들인데요. 진짜 같습니다”

시커먼 이빨로 깨물어 본 병사가 흥분했다.

가이다는 갸우뚱 했다.

‘왜 이런 곳에 금화가..? 혹시 이게 콜챠크가 말하던 황실금화인가?’

납득하기 어려운 사태였다.

궤짝에 담겨있을 금화가 왜 빙판에 흩어져 있단 말인가?

 

금화가 발견된 주변의 주검은 코사크 병사들이었다.

퍼질러져 죽은 말안장의 혁낭과 병사들의 외투 주머니는 금화로 불룩했다.

가이다는 끄덕였다.

‘말을 잃은 그들에게 금화는 버거웠을 것이다. 가볍게 하려고 주머니를 비웠겠지.’

그러나 욕심을 완전히 비우지 못한 그들은

끝내 금화의 무게에 짓눌려 죽어갔다.

 

금화를 지닌 것은 코사크 병사들뿐이었다.

말과 외투에서 금화를 찾아낸 병사들은 민간인 동사자들 품에서

지갑과 귀금속을 찾아냈다. 그 모습을 본 다른 병사들 역시

동사자들을 뒤지기 시작했다.

참혹한 주검들의 옷이 하나씩 벗겨지며 얼음지옥 속에 또 다른 지옥이 겹쳐지고 있었다.

 

갑자기 총성이 울렸다.

놀라 돌아본 병사들은 격분한 가이다 대령의 총을 빼든 모습을 보았다.

“수색은 이것으로 끝낸다.”

버럭 소리 지른 가이다는 분노로 거칠어진 호흡을 고르며 잠시 뜸을 들였다.

“우린 비적이 아니다. 불쌍한 사람들을 더 이상 욕보이지 마라.”

 

움찔한 병사들은 뒤지던 손길을 멈추었다. 그러나 아쉬운 표정.

가이다에게 그들의 심리는 유리알처럼 빤히 보인다.

가난한 농민의 자식들이 눈앞에 버려진 재물을 탐내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하지만 이건...

‘얼어 죽은 시체를 뒤지다니...!’

 

“좋다. 다 털어놓겠다. 오늘의 수색목적은 생존자만이 아니다.

옴스크 정부의 금화도 찾는 중이다. 상황으로 미루어

아마 근처 어딘가에서 곧 발견될 것이다.”

말을 끊고 병사들을 훑어보았다.

동사자들을 동정하며 분개하던 순박한 얼굴들은 이제 물욕에 사로 잡혀 있었다.

‘아, 불쌍한 녀석들...!’

고국에 돌아가 본들 기다리는 것은 움막에서 가난에 찌든 가족들뿐일 것이다.

가이다는 어금니를 악물었다.

“하지만... 봐라! 믿고 따라온 인민들을 이 지경으로 만든 자들에게

찾은 금화를 갖다 바쳐야하는가?

아니다!! 그렇게는 못하겠다.

차라리 우리가 갖자. 공평하게 나누어 갖자.

천 상자도 넘는 금화다.

그러니 그만둬라. 더 이상 저 불쌍한 주검들을 모독하지 마라.

나, 라둘라 가이다의 명예를 걸고 이 약속은 반드시 지키겠다.“

 

어리둥절하던 병사들은 이윽고 가이다의 말을 이해했다.

동시에 자신들이 저지르려 했던 행위가 얼마나 불경스럽고 파렴치한 짓인지도 깨달았다.

“우우~라아, 우리 참모장님, 우라”

병사들은 일제히 환호했다.

이미 찾아낸 금화만 해도 엄청난 분량이다. 그런데 무려 천 상자라니...!

뒤지려던 주검들에서 찾아낼 재물 따위와는 비교도 안될 만큼 많지 않겠는가?

 

재물에 잠시 눈이 멀었던 병사들은

차츰 가이다의 분노를 이해했고 이윽고 함께 울분을 토하기 시작했다.

“이건 도저히 인간으로서 할 짓이 아냐.”

“맞아, 콜챠크는 몇 번 죽어도 이 죄를 용서받기 어려워.”

그들의 분노는 차츰 콜챠크라는 구체적인 목표로 모아지고 있었다.

“그 자식을 잡아서 볼셰비키에게 넘겨버리자.”

“옳소”

“옳소”

“꼭 그렇게 하자”

수색현장은 순식간에 볼셰비키식의 인민재판장으로 변해갔다.

 

이윽고 호수기슭에 도착한 선발대 쪽에서 탄성이 들려왔다.

“오, 세상에... !”

“이럴 수가...!

수십 개의 모닥불 흔적. 그 흔적마다 하나씩 큼직한 금속덩어리들이

노란색으로 번쩍이는 광경은 실로 장관이었다.

뒤이어 도착한 가이다와 병사들도 그 장엄한 장면 앞에서 말을 잃었다.

저게 모두 금인가?

무슨 일이 일어났단 말인가?

 

모닥불 흔적의 중심에 개머리판에 십자가를 새긴 소총이 거꾸로 꽂혀있다.

타티아나 로스토바라는 이름도 새겨져 있었다.

돌아온 수색대는 일본군 특무대를 습격했다.

본대는 진즉 철수하고 소수만 남은 일본군은

수천 명의 체코군단 병력이 밀고 들어오자 콜챠크를 넘겨줄 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를 순순히 넘겨준 배경에는

백만 명 넘는 피난민들을 얼어 죽게 만든 사태의 책임을

누군가는 져야한다는 쪽으로 의견을 모은 연합군 수뇌부의

암묵적인 합의가 깔려있었다.

 

다음 날부터 체코군단과 프룬제의 붉은 군대사이로 전령들이 오가기 시작했다.

콜챠크와 황금 일부를 넘기는 조건으로

체코군단의 블라디보스톡 이동에 대한 보장을 요구하는 협상이 시작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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