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판타스틱 엔딩

2021.04.02 13:5804.02

1
『민구야, 생일 축하해! 못 본지 오래 됐는데 우리 언제 한 번 보자.』
3월 1일 민구 생일날, 톡으로 짤막한 생일 축하 메시지가 왔다. 등록이 안되어있는 아이디로부터 온 톡이다. 오랜 시간 연락하지 않은 전화번호도 모르는 누군가가 문득 생각이 나서 뜬금없이 생일축하 메시지를 보낸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럴만한 사람은 없다. 축하해 줄 만한 몇 안 되는 사람은 이미 다 메시지를 보내왔다. 스팸이나 피싱 같은 메시지임에 분명하다. 기억이 정확하지 않지만 작년 생일에도 이런 비슷한 톡을 받았던 것 같다. 민구는 메시지를 차단하려다 생각을 바꿔 그냥 삭제만 했다. 공휴일이면서 생일인 날, 회사에 나온 것만으로도 짜증나는데 이런 이상한 메시지까지 받으니 기분이 별로이다. 요즘 따라 유난히 스팸 메시지를 많이 받는다. 한 눈에 봐도 수상해 보이는 도박, 주식, 대출 같은 홍보 메시지는 스팸으로 등록해도 종종 온다. 며칠 전에는 서울지검 사이버 수사대라고 하면서 전화가 왔다.
“서울지검 사이버 수사대입니다. 이민구씨 전화 맞죠?”
“네 맞는데요. 어떤 일로?”
“혹시 통영에 사는 이철호씨라고 아시나요?”
“아니요. 처음 들어봤는데요. 누구길래 서울지검에서 저한테 물어 보는 거죠?”
“뚜 뚜 뚜” 모른다고 하니 상대가 전화를 끊었다.
전화가 끊기기 전까지 민구는 정말 서울지검에서 온 전화인 줄 알았다.
‘보이스피싱을 저렇게 허술하게 해도 걸려드는 사람이 있나 보네. 분명 통영 어딘가에 이철호라는 사람이 있을 거고, 누군가는 그 사람을 알 수도 있을 테니..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무작위로 전화해서 걸려 드는 사람이 있나? 민구라는 이름이 좀 예스러워서 통영에 사는 이철호라는 사람을 알 수도 있다고 생각한 걸까?’
최근 안 좋은 일이 많은 민구는 별거 아닌 일에도 짜증이 나고 예민해진다. 어떻게 된 게 삶에 좋은 소식이라고는 하나도 없다.

민구는 오후까지 회사에 남아있고 싶지 않아 새벽같이 사무실에 나왔다. 일찍부터 부지런을 떠는 바람에 바랬던 대로 해야 할 모든 업무를 오전에 마무리했다. 민구 말고도 출근해서 일하는 사람이 몇 명 더 있다. 그들을 뒤로 하고 먼저 퇴근하니 그나마 휴일에 일한 우울함이 위로가 된다. 회사를 나서면서 ‘혹시 실수한 건 없을까?’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내일 일찍 출근해 팀장 보고 전에 다시 한 번 검토하기로 하고 그냥 나왔다. 민구는 집으로 바로 가지 않고 회사 근처 대형 쇼핑몰에 왔다. 쇼핑몰은 사람들로 가득하다. 휴일이어서 그런지 혼자인 사람은 잘 눈에 띄지 않고 대부분 가족, 연인, 친구와 함께 다니고 있다. 모두들 표정이 밝다.
‘표정만큼이나 저 사람들의 실제 삶도 밝을까? 겉으로 다정해 보이는 저 커플은 얼마나 서로에 대한 확신이 있을까? 둘 중 한 명은 바람 피우고 있을 수도 있다. 엄청 친해 보이는 저 친구들 중 몇몇은 언젠가 소원한 관계로 변할 것이다. 유모차를 함께 끌고 가는 부부는 어젯밤에 서로를 죽일 듯이 싸웠을 수도 있다. 양손 가득 쇼핑백을 들고 가는 저 청년은 카드 빚에 허덕일 수 있다. 보이는 것이 전부 실재하는 건 아니다. 이 쇼핑몰 안은 사람의 뇌 신경망에 침투해 판타지를 불러 일으키는 무색무취의 가스로 가득 차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고서 여기 있는 모든 사람들의 표정이 저렇게 한결같을 수 없다.’
민구는 수많은 환한 미소 속에 섞여 홀로 표정 없는 얼굴로 의류 매장이 늘어서 있는 긴 쇼핑몰 길을 걷고 있다. 여기저기 둘러보다 한 SPA 브랜드 매장에 들어왔다. 남성 의류 코너 한 쪽에 걸려있는 다양한 디자인의 셔츠를 하나하나 꼼꼼하게 본다. 지금 가지고 있는 셔츠는 대부분 패턴이 있어 단색 셔츠에 관심이 간다. 입고 있는 셔츠도 검은색 깅엄체크 패턴이다. 흰색과 옅은 파란색 셔츠를 골라 피팅룸에서 입어 본다. 둘 다 민구 몸에 핏이 딱 맞고 색도 잘 어울린다. 매장에 진열 되어있는 블레이저 몇 벌을 위에 걸쳐 본다. 기본 색상 셔츠이다 보니 어떠한 디자인과도 매치가 잘 된다. 가격 대비 원단도 꽤 좋아 보인다. 비싼 브랜드가 아니어서 부담 없이 편하게 입을 수 있다는 생각에 셔츠 두 개 다 사기로 결정했다. 계산을 하고 매장을 나오는데 여성 의류 코너에 눈길이 간다. 매혹적인 표정을 지으며 멋진 포즈를 취하고 있는 세 명의 여성 모델 사진이 한 쪽 벽면 전체를 메우고 있다. 대중의 인지도가 어느 정도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누구나 다 아는 모델들은 아니다. 세 명 중 가장 유명한 모델인 반수겸은 민구의 친구이다. K대학교 컴퓨터공학과 동기이고 대학원도 같이 다녔다. 민구는 매장 밖으로 나가면서 사진 속에서 누군가를 유혹하는 듯한 눈빛을 쏘는 친구를 쳐다본다.
수겸과 마지막으로 연락한지 한 8년 정도 되었다. 지금은 연락하고 지내지 않지만 대학 다닐 때는 꽤 친했다. 수업도 같이 듣고 친구들과 어울려 함께 술도 자주 먹었다. 수겸은 남자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는 공대생이었다. 모델을 할 만큼 큰 키에 얼굴도 매력적이고 예뻐서 눈에 확 띄는 외모였다. 같은 과에서 수겸을 좋아하지 않는 남자를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로 인기가 많았다. 물론 인기는 같은 과에서만 그치지 않았다. 민구도 수겸을 보고 매우 매력적이라고 느꼈지만, 친구 이상으로 생각해본 적은 한 번도 없다. 아마 호감이 순간적으로 잠시 스치고 지나간 정도는 있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수겸은 뭐든지 잘하고 열심히 하는 친구였다. 공부도 열심히, 놀기도 열심히, 연애도 열심히 했다. 민구에게 이런 수겸은 판타지 영화 속에 나올 법한 인물처럼 보였고, 평범한 자신이 다가 갈 수 없는 상대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요즘 모델이 된 수겸을 다양한 매체를 통해서 볼 때면 전혀 환상 속 인물 같다는 생각이 안 든다. 모델이 되어 실제 환상 속으로 들어가버리니, 수겸이 갖고 있던 환상적 이미지가 오히려 사라졌다. 수겸은 민구보다 대학원을 먼저 졸업했고 그 이후로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두 세 번 정도 연락을 주고받은 것이 전부다. 학교를 졸업하고 1년 정도 지났을 무렵 수겸한테서 갑자기 연락이 왔다. 수겸은 뜬금없이 민구에게 소개팅 할 생각이 있냐고 물었다. 수겸은 자신이 직접 아는 사람은 아니고 한 다리 건너 아는 사이라고 했다. 그렇게 소개팅을 했고 민구는 그때 소개받은 사람과 결혼했다. 결혼 전에 수겸에게 연락도 하고 청첩장도 보냈다. 수겸은 축하한다는 말과 함께 꼭 가겠노라고 했지만 결혼식에 오지 않았다. 그게 마지막 연락이었다. 마지막으로 연락이 닿았을 때만해도 회사를 다니고 있었는데 어떻게 된 건지 지금은 꽤 유명한 모델이 되었다.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하지만, 너무 오래 연락을 하지 않아서 불쑥 전화할 용기가 나지 않는다. 수겸이가 소개해준 지금의 아내와는 이혼을 앞두고 있다.

2
민구는 한 손에 방금 산 셔츠가 들어있는 쇼핑백을 들고 다른 의류 매장을 둘러 보고 있다. 쇼핑을 더 할 생각은 없고 시간도 때울 겸 그냥 구경하는 중이다. 한참 옷을 구경하고 있는데 누군가 뒤에서 확신 없는 말투로 민구를 부른다. “혹시 민구?”
뒤를 돌아보니 키가 크고 검은색 오버핏 스웻셔츠에 벙거지 모자를 눌러 쓴 여자가 서있다. 누군지 모르겠다.
“민구 맞네.”
목소리가 매우 낯익다. 모자 밑에 가려진 얼굴을 자세히 보니 수겸이다.
“어! 수겸아.”
“긴가 민가 했는데 맞네 맞아. 야, 진짜 오랜만이다. 너 잘 지내는지 궁금했는데 어떻게 이렇게 만나냐?” 수겸은 반가움에 민구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린다.
“그러게. 이게 얼마만이야? 나 방금 네 생각했었어. 진짜 너무 신기하다. 네 생각했는데 바로 이렇게 우연히 만나다니..”
“에이 거짓말. 방금 내 생각했다고?”
민구는 들고 있던 쇼핑백을 들어 수겸이에게 보여준다. “응. 나 방금 여기서 셔츠 샀거든. 매장 안에 네 사진 엄청 크게 붙어있던데. 사진 보니까 네 생각이 나더라고.”
“야, 그건 내 생각을 한 게 아니라 그냥 내 사진이 보인 거잖아. 내 생각한 거랑은 완전히 다른 거지.
“뭐.. 그렇긴 하지만, 사진 보고 이런저런 네 생각을 했어.”
“어쨌든 민구야 우리 오랜만에 봤는데 어디 가서 차라도 한 잔 할까? 시간 괜찮아?”
“당연히 시간 괜찮지. 같이 차 한 잔 하자. 그리고 나 가끔 네 생각해.”
수겸이 손바닥으로 민구의 어깨를 치며 말한다. “뻥 치지마.”
민구와 수겸은 의류 매장에서 나와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카페로 들어갔다. 따뜻한 아메리카노 두 잔과 티라미수 조각 케이크 하나를 시켰다.
“민구야, 진짜 반갑다. 너 멋있어 졌다. 예전에는 청바지에 후드티만 입고 다녔는데, 셔츠랑 코트 입으니까 완전 세련돼 보여. 그리고 학교 다닐 때보다 살도 빠져서 날렵해 보인다.”
민구가 어색하게 웃으면서 말한다. “하하 고마워.”
“아까 네가 쇼핑했다는 옷 봐도 될까?”
민구가 쇼핑백을 건넨다. “그럼.”
수겸이 반듯하게 직사각형으로 접혀 폴리백에 들어있는 셔츠 두 벌을 쇼핑백에서 꺼낸다. “단색 화이트랑 블루 셔츠네. 꺼내서 봐도 되지?”
“응? 그럼 당연히 꺼내도 되지. 그냥 기본 셔츠야.”
수겸이 흰색 셔츠를 꺼내서 펼쳐 본다. “깔끔하고 예쁘다. 지금 입고 있는 깅엄체크도 너랑 잘 어울리는데, 요즘 같은 봄 날씨에는 이런 밝은 색의 기본 셔츠가 더 잘 맞을 거 같아. 음.. 내 생각에 너는 얼굴이 하얘서 화이트 보다 블루가 더 잘 어울릴 거야. 둘 다 잘 샀네.”
수겸이 흰색 셔츠를 잘 접어서 다시 폴리백에 넣었다.
“잘 나가는 모델이 잘 샀다고 하니까 기분 좋다.” 민구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야, 잘 나가는 모델 아니거든.”
“아까 너 봤을 때 모델이라는 것을 직관적으로 알겠더라고. 누가 봐도 한 눈에 모델임을 알아 볼 수 있는 분위기가 보이더라.
“나인 줄은 못 알아보고, 그냥 모델이구나 한 거야? 난 너 보자마자 바로 알아봤는데 말이지.”
“응. 너무 오랜만이라서 바로는 못 알아 봤어. 내가 눈썰미가 좀 없어. 그나저나 대학원 졸업하고 회사에 들어 갔었는데 어떻게 모델이 된 거야?”
“나 M전자에 들어갔던 거는 알고 있지?”
“응. AI 개발하는 일 한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마시며 민구가 대답했다.
“맞아. 가전사업부에서 AI 개발 업무를 했지. 그때는 매일 코딩만 했던 것 같아. 입사하고 1년 정도 됐을 때 사내 모델 선발이 있었어. TV 광고 모델인 연예인과 함께 직원을 같이 출연시키는 프로젝트가 있었거든. 사실 그때는 정신 없이 바빠서 사내 모델 선발이 있는 줄도 몰랐는데 같이 일하던 책임연구원님이 나를 추천했었더라고. 키가 커서 그랬는지 내가 여러 후보 중에 최종적으로 사내 모델로 선발이 됐어. 그렇게 우연한 기회에 M전자 제품 광고에 나오게 된 거야.”
“그 광고 기억나. 네가 나와서 깜짝 놀랬었는데 그때는 회사를 다니고 있었구나.”
“응. 그때만해도 회사에 다니고 있었어. 그 이후에 광고를 보고 모델 에이전시에서 연락이 와서 본격적으로 모델 일을 하게 된 거지.”
“그랬구나. 광고나 화보에서 너 보면 어떻게 모델이 됐는지 궁금했거든. 어때, 일은 재미있어? 수입은 어떤가, 회사 다니는 거 보다 나은가?”
“야, 뭐가 그렇게 궁금한 게 많아?”
“내가 아는 모델이라고는 너 밖에 없는데, 너 말고 누구한테 이런 거 물어보냐?”
“일단 수입은 회사 다니는 거보다 훨씬 괜찮아.”
“그렇구나. 부럽다.”
“야 부럽기는.. 난 다시 회사로 돌아가서 컴퓨터 앞에 앉아서 코딩하고 싶다. 모델은 일만 놓고 보면 재미있고 좋은데.. 정신적으로 힘든 게 많아. 외모로 뽐내야 하고 경쟁도 너무 치열하다 보니까 시기, 질투, 모함 이런 게 너무 심해 이 바닥은. 그리고 언제까지 모델 일을 할 수 있을 지도 불투명하고. 아주 아주 잘 나가는 거 아니면 엄청 큰 돈을 버는 것도 아니고 말이지. 미래가 많이 불안한 직업이야.”
“그런 점이 있구나. 화려한 만큼 어두운 면도 있나 보네. 정말 세상에 쉬운 게 하나도 없다.”
“아 맞다. 오늘 너 생일이잖아. 축하해! 그런데 생일날 쇼핑몰에서 혼자 뭐 하는 거야?”
“어? 내 생일인지 어떻게 알았어?”
“어떻게 알기는.. 너는 내 생일 까먹었어? 네 생일이 삼일절이고, 내 생일은 광복절이잖아. 그래서 대학 때 네가 우리는 전생에 독립투사였을지도 모른다고 그러고. 우리는 특별한 인연이라면서 농담하고 그랬잖아.”
“아! 맞다. 기억난다. 네 생일은 광복절이지.”
“민구 너 완전 섭섭하다. 그리고 너 왜 내 톡 씹어?”
“톡? 무슨 톡?”
“내가 오늘 오전에 생일 축하 톡 보냈는데. 못 받았어?”
“뭐? 그게 네가 보낸 거였어?”
스팸이라고 생각한 톡이 수겸이가 보낸 것이었다니. 민구는 수겸이가 자신의 생일까지 기억하고 있다는 것에 놀랬다. 민구도 수겸의 생일이 광복절인 것은 알고 있었지만, 광복절마다 수겸이가 생각나거나 하지는 않았다.
“야! 너 진짜 너무 한다. 나 작년에도 보냈거든. 그것도 아마 씹었던 것 같은데. 그러면 너는 내 번호도 모르는 거야?”
“작년에도 너였어? 네 번호 알고 있는데 어떻게 된 거지.”
민구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전화번호를 검색한다. “반.. 수.. 겸.. 네 번호 여기 있네. 010-785..”
“야야, 그거 옛날 번호야. 몇 년 전에 번호 바꿨어. 내 번호 저장도 안 한 거야?” 수겸은 포크로 케이크 한 부분을 잘라서 입에 넣었다.
“번호 바꿨어? 바뀐 번호 나한테 알려준 거 맞아?”
“당연하지. 친한 사람들한테 다 보냈어.”
“그럼 내가 번호를 입력 안 했을 리가 없는데.”
수겸은 민구의 전화기를 가로채서 자신의 번호를 입력하고 저장 버튼을 눌렀다.
“너 진짜 두고 봐. 내가 제대로 복수할거니까.”
“미안해 수겸아.”
“됐고 이미 나 맘 상했어. 그나저나 너는 요즘 어떻게 지내?”
“얘기 들었는지 모르겠데 나 지우랑 이혼하려고 해.”
“이혼한다는 얘기는 들었어. 아직 완전히 법적으로 끝난 건 아니야?”
“응. 그거는 아직. 지금 소송 중에 있어.”
“괜찮다면 왜 이혼하는지 물어봐도 될까?”
“그럼 괜찮아. 지우가 바람을 피웠어.”
수겸이 놀란 표정을 지으며 말한다. “어머, 진짜? 바람을 피웠다고?”
민구가 고개를 끄덕인다. “응. 몰랐구나?”
“그거는 몰랐어. 그래서 이혼하는 거구나. 괜히 내가 미안하다.”
“네가 왜 미안해?”
“내가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너한테 소개시켜준 거 같아서 말이야. 정아는 좋은 친구인데 그래서.. 정아 친구인 네 와이프도.. 괜찮은 사람인 줄 알았지. 내 책임도 있는 거 같아서 미안한 마음이 드네.”
“네가 미안해할 거 전혀 없어.”
“그런데 지우가 바람 피우는 거는 어떻게 알았어?”
“뭔가 이상하다고 의심은 하고 있었는데, 자기가 먼저 얘기하더라고 다른 남자 생겼다고.”
“어머, 네가 묻지도 않았는데 먼저 말을 했다고? 자기가 바람 피우고 있다는 걸? 말도 안돼. 그 얘기 들었을 때 충격 엄청 컸겠다.”
“그렇지. 그 말 듣고 충격 엄청 컸지. 상처도 많이 받았고. 태어나서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충격이었고 말로는 표현이 안 될 정도로 이상한 감정이 들더라고. 요즘 병원 다니면서 우울증 치료하는 중이야.”
“그러게 정신적인 충격이 이만 저만이 아닐 텐데, 상담도 받고 치료도 필요할 거 같아.”
“그래도 다행히 최근에는 많이 좋아졌어. 그런데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
수겸이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묻는다.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니 뭘? 설마 바람 피운걸?”
“응. 꽤 오래 전부터 사이가 안 좋았어. 이혼하자는 말이 오고 가지는 않았지만, 서로 관계가 끝나가고 있다는 것은 직감을 하고 있었어. 사실상 끝난 관계에서 새로운 사람을 만난다는 건 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어. 법적으로 이혼을 하자마자 만나는 거는 되고 그 전에는 안 되고.. 그런 게 더 이상하잖아?”
수겸은 잠시 생각한 후 말을 이어간다. “음.. 뭐.. 논리적으로는 그렇게 틀린 얘기가 아닐 수 있지만, 사람 마음이라는 게 그렇지 않잖아. 관계가 사실상 끝났더라도 배우자가 바람을 피운 걸 알면 분노가 치밀고 배심감도 많이 들 거잖아. 엄청나게 큰 상처를 주는 건데, 그건 상대에 대한 예의가 아니지.”
“같이 사네 못 사네 싸우는 사이에서 그런 예의가 의미가 있을까? 사실상의 관계도 끝났고 꼴도 보기 싫을 정도로 미운 상황에서 각자 자기 살길 찾아가는 것이 잘못된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분노나 배신감은 들지만 그것은 어쩔 수 없이 내가 오롯이 감당해야 할 몫이라고 생각해.”
“그럼 너도 사이가 안 좋은 상태에서 누군가를 만날 기회가 있었다면 만났겠네?”
“단순히 사이가 안 좋은 거 말고, 관계가 사실상 끝난 거나 다름 없을 때.. 그런 경우에 기회가 있다면 나도 누군가를 만났을 것 같아. 오히려 이혼하는 상황에서 아무도 만나지 않는 나보다 누군가를 만나고 있는 지우가 결혼의 마무리를 더 잘하는 거라고 생각해.”
“음..” 수겸이는 커피 한 모금 마시면서 민구가 한 말을 곱씹는다. “그렇게는 전혀 생각 해 본적이 없어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어떻게 보면 지우는 환상적인 마무리를 하고 있는 거야.”
“환상적인 마무리라고? 이혼하기 전에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게?”
“응”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이해가 안돼.”
“평생 연애도 안 하고 혼자 살 거 아니라면 이혼하면서 누군가를 만날 수 있다면 좋은 거 아닌가?”
“뭐.. 논리적으로야 맞는다고도 할 수 있겠지. 그런데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잖아. 모든 상황에서 논리가 감정보다 우선시 될 수는 없지 않나? 너 진짜 감정적이지 않고 냉정하다. 마치 남의 일처럼 자기객관화를 잘 하네. 그래도 한 사람은 너무 큰 상처를 받으니까 그게 좋은 건지는 모르겠어.”
“누구든 상처를 전혀 안주고, 전혀 안받고 살 수는 없어. 너도 연애를 하면서 상처를 주기도 또 받기도 했을 거잖아.”
“그렇기는 하지. 그래도.. 그건 좀.. 상처 받은 사람이 그렇게 말하니까 딱히 할 말이 떠오르지 않네.”
“수겸아, 넌 결혼의 완성이 뭐라고 생각해?”
“결혼의 완성? 그런 생각은 전혀 해본 적 없어. 뭔데?”
“내 개인적인 생각인데.. 결혼의 완성은 이혼이야.”
“이건 또 무슨 괴변이야! 너 충격이 너무 큰 거 아니야?”
“잘 생각해봐. 인류의 역사가 수백만 년 됐는데 80세가 넘도록 살게 된 거는 불과 100년도 안됐잖아. 옛날에는 대부분 40대에 죽었다고. 나만해도 작년에 폐렴에 걸렸었거든. 폐렴은 항생제만 먹으면 나을 수 있지만, 항생제 안 먹으면 그냥 죽는 병이야. 내가 만약 100년 전에 태어났다면 항생제를 먹을 수 있었을까? 그냥 서른 셋에 죽었을 거야. 내가 지금 살아서 너랑 마주보고 얘기할 수 있는 건 항생제를 먹고 내 수명 이상 살고 있기 때문이야.”
“그거랑 결혼의 완성이 이혼인 거랑 무슨 상관이야?”
“30대 초반이나 중반에 결혼해서 이혼하지 않는다면, 한 사람과 결혼 생활을 50년 정도 해야 하는 거잖아. 인간의 평균 수명이 이렇게 길어진 게 불과 100년도 안 됐으니까, 40년, 50년 이상을 한 사람이랑 결혼해서 사는 것도 불과 얼마 안된 거지. 인류 역사 대부분은 이렇게 오랜 기간 한 사람과 결혼 상태를 유지 해본 경험이 없어. 우리 DNA에 코딩 자체가 되어 있지 않은 생활방식일지도 몰라. 그렇기 때문에 첫 결혼 상대와 이혼하는 것은 너무 자연스러운 거라고 보여져. 그래서 나는 결혼의 완성은 이혼이라고 생각해. 더 나은 삶을 찾아가는 과정 중 하나지.”
“하하. 그다지 과학적 논리 전개는 아니지만,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는 알겠어. 결혼의 완성은 이혼이라.. 일정 부분 동의 하는 게 인간은 동일한 자극이 반복되면 그 자극에 무감각해지잖아. 연애도, 결혼도 마찬가지고. 그런 차원에서 보면 네 말이 아주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그럼 이혼하지 않고 평생 결혼생활을 유지하면 오히려 결혼을 실패한 건가?”
“아니, 실패는 아니지.”
“그럼 뭐야?”
“미완성이지. 우리가 살면서 모든 걸 완성하면서 살 수는 없잖아. 많은 것들을 완성하지 않은 채 내버려 두기도 하잖아. 여러 가지 이유에서 완성하지 못 할 수 있는 거지.”
“결혼의 완성은 이혼이고 이혼하는 타이밍에 새로운 사람과의 만남은 환상적인 마무리이다. 재미있네. 이상하게 설득이 되기도 하고. 하기는 우리 부모님만 해도 오래 전에 이혼하고 지금은 각자 결혼해서 잘 살고 있으니까. 민구 너의 부모님은 어떠셔?”
“우리 부모님은 아직 미완성이야.”
“아직? 언젠가 완성될 수도 있다는 거야?”
“나는 그렇다고 생각해. 엄마를 위해서 완성하는 게 좋다고 생각하거든.”
“그렇구나. 이런 생각은 결혼 생활을 하면서 하게 된 거야?”
“응. 결혼하면서 또 이혼하는 과정에서 이런 생각을 갖게 됐어.”
“충격이 너무 커서 판단력이 흐려진 건 아니지?”
“절대 아니야. 큰 충격으로 오히려 세상을 바로 보게 됐어.”
“그래 알았어.”
두 사람은 잠시 아무 말 없이 케이크를 먹고 커피를 마신다. 민구가 먼저 입을 연다.
“수겸아, 너 남자친구 있어?”
“응. 있어.”
“그렇구나. 남자 친구는 어떤 일 해?”
“자기 아버지 회사에서 일해.”
“부잣집 아들인가 보네?”
“응. 집에 돈은 많은 것 같더라고.”
“사귄 지 얼마나 됐어?”
“2년 정도 됐어.”
“2년 정도 됐으면 결혼 생각도 하겠네?”
“아니. 아직 결혼 생각은 없어.”
“진짜? 2년이나 됐는데? 우리 나이에 그 정도 만나면 결혼 생각 당연히 하잖아.”
“이민구! 결혼의 완성은 이혼이라며? 뭔가 네 말에 앞뒤가 안 맞는다.”
“그건 어디까지나 내 개인적인 생각이고 대부분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 안 하니까 그렇지.”
“결혼은 아직 잘 모르겠어.”
“왜? 혹시 결혼은 안하고 연애만 하자는 주의?”
“아니. 그런 건 전혀 아니야. 남자친구는 좋은 사람이야. 결혼하기도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어. 착하고, 성실하고, 외모도 준수하고, 나한테 잘 해주고, 거기다 집에 돈도 있고. 생각해 보니까 어디 하나 빠지는 데가 없네.”
“그러게. 다 좋은데 뭐가 문제야?”
“그런데 문제가.. 같이 있으면 재미가 없어.”
“2년이나 만났는데 처음 만날 때처럼 계속 설레고, 만날 때마다 재미있을 수는 없지.”
“그걸 모르는 게 아니라, 처음 만날 때부터 재미가 없었어.”
“진짜? 처음부터 재미없었는데 왜 사귄 거야?”
“사람은 좋으니까. 처음 만났을 때 좋은 사람이라는 게 좋았어. 그래서 재미없고 잘 안 맞아도 괜찮다고 생각했어.”
“사람만 좋아도 괜찮은 거지. 도대체 얼마나 재미없길래 그러는지 궁금하다. 유머 감각이 완전 꽝이야? 맨날 썰렁한 개그만 하는 스타일?”
“아니 그런 식의 재미가 아니라 같이 대화를 하면 재미가 없고 지겨워. 공통 관심사도 없고 정서적인 교감도 잘 안돼. 그래도 편안하긴 해. 너는 어떻게 생각해? 이런 상황인데 남자 친구랑 결혼 해도 될까?”
“네가 평생 결혼할 생각이 없는 게 아니라면 남자친구와 결혼해도 괜찮을 것 같아.”
“어째서?”
“착하고, 성실하고, 너한테 잘 해주고, 같이 있으면 편하고, 돈도 많고, 보아하니 앞으로도 계속 많을 것 같고. 그것보다 좋은 조건이 있나?”
“야, 같이 있으면 재미가 없다고 했잖아!” 수겸이 조금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다.
“같이 있을 때 재미있는 사람이랑 결혼하면 결혼해서도 계속 재미있을 거 같아?”
“아니, 꼭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니지만..”
“네가 아까 얘기했잖아. 인간은 동일한 자극이 반복되면 그 자극에 무뎌진다며? 결혼도 마찬가지야. 계속 좋을 수도 없고, 계속 재미있을 수도 없어. 결혼 생활에서 정서적 유대감과 성적 만족감이 평생 지속될 것이라는 기대는 판타지야. 연애의 재미를 계속 느끼고 싶다면 결혼하지 않고 일정기간 누군가와 만나고 재미없을 때쯤 헤어지고 또 새로운 사람을 만나야지. 결혼을 했다면 아까 말한 환상적인 마무리를 해야 하고. 그런데 평생 그렇게 살 수 있으면 좋겠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 하잖아. 그래서 네 남자친구가 좋은 사람이고, 너한테 잘 해주고, 돈까지 많다면 결혼해도 괜찮을 거 같다는 거야. 단 네가 언젠가 결혼할 마음이 있을 경우에. 사랑하는 감정, 함께하는 즐거움. 이런 거는 휘발성이 너무 강해서 그런 것만 보고 결혼할 수는 없어. 결혼도 일종의 비즈니스 관계야. 돈이 많으면 나중에 이혼을 하게 되더라도 경제적 이득을 좀 더 얻을 수 있는 장점도 있어. 아무래도 나눌 수 있는 파이가 커지니까. 어쨌든 네 남자친구는 결혼하기 좋은 사람으로 보여.”
“이혼까지 고려해서 결혼해도 괜찮을 사람이라는 거네. 정말 결혼에 대한 환상을 완전히 무너뜨리는 얘기네. 현실적이어도 너무 현실적인 말이다. 너 같이 생각하면 세상에 결혼할 사람 아무도 없겠다.”
“그건 네가 몰라서 하는 말이야. 세상에는 비즈니스 목적으로 결혼하는 사람이 꽤 많아. 그런 사람이 더 많을 수도 있어. 내 생각에는 비즈니스 목적으로 하면서 사랑 때문에 결혼한다고 스스로를 속이는 경우가 대부분일 걸. 비즈니스 목적으로 결혼하는 게 나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말이지. 그냥 선택에 불과한 건데 말이야.”
“다들 자기기만을 하면서 결혼한다 이거네?”
“모두 다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 어쨌든 인간은 현실을 살아야 하고, 다른 사람 시선도 신경을 쓰고, 자기 스스로에게도 멋진 사람이고 싶으니까.”
“네 말대로라면 내 남자친구는 확실히 결혼 상대로 이상적인 사람이네. 결혼을 끝낼 때 얻을 수 있는 경제적 이득까지 고려해서 말이지. 하하”
민구는 매우 진지하게 말한다. “나는 그렇다고 생각해.”
“하하 재미있네. 그럼 너는 재산 분할을 어떻게 할 건데?”
“지금 재산분할이랑 위자료 소송 중에 있어.”
“재산분할 합의가 잘 안돼?”
“응. 나는 재산분할을 8:2나 7:3 정도가 적당하다고 생각하는데 지우는 5:5를 원해. 지우가 재산분할 소송을 걸어서 나는 위자료 소송을 냈어.”
“네가 7이나 8을 가져야 한다는 거지?”
“응. 재산이 많지 않지만 그래도 재산을 모으는데 기여도가 내가 더 크기 때문에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해.”
“재산 분할도 쉬운 게 아니네. 그런데 아내가 바람 피운 거를 이해한다면서, 환상적인 마무리라는 얘기까지 하면서 위자료 소송은 왜 하는 거야?”
“걔가 재산분할 소송을 먼저 내서, 거기에 화도 좀 나고 그렇다면 나도 내 몫을 최대한 챙겨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그래서 하는 거야.”
“네 말대로 철저하게 비즈니스네. 처음 만났을 때 감정은 전혀 남아 있지 않아?”
민구는 카페 밖을 쳐다보며 잠시 머뭇거리다 말한다. “좋았을 때 생각하면 많이 아쉽기는 한데 그렇다고 옛날 감정이 남아 있거나 하지는 않아.”
“그럼 관계를 회복할 마음은 전혀 없는 거네?”
“당연히 전혀 없지. 조금이라도 있다면 여기까지 안 왔지. 나도 빨리 이혼 마무리하고 마음 추스르고 나서 다른 사람 만나고 싶어.”
“그렇구나. 그런데 궁금한 게 지우의 어떤 점이 좋아서 결혼까지 한 거야?”
민구는 또 잠시 머뭇거리다 말한다. “음.. 처음 만났을 때부터 마음에 들지는 않았어. 그런데 이상하게 처음 만났을 때 나랑 잘 맞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그 예감이 틀리긴 했지만.”
“어떤 면에서?”
“나는 내가 엄청 평범하다고 생각을 하거든. 잘 생긴 것도 아니고, 별로 똑똑하지도 않고, 말을 잘하거나 유머감각이 뛰어나지도 않고, 옷을 잘 입거나 스타일이 좋은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네 남자친구처럼 집에 돈이 많은 것도 아니잖아. 딱히 모자란 부분이 있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여자들이 좋아할만한 스타일도 아니니까. 그리고 나는 내가 호감을 갖고 있는 사람에게 아주 적극적으로 다가가는 편도 아니거든. 이런 나의 평범함과 소심함이 지우와 잘 맞는다고 생각했어. 평범한 미모에 적당히 옷을 잘 입고, 별거 아닌 내 말을 재미있게 들어주고, 자기 일도 열심히 하고, 화려함을 쫓거나 허영심이 많지도 않고. 이런 지우의 무난해 보이는 모습이 나랑 잘 맞아 보였어. 그리고 적극적이지 않은 성향인 내가 연락하면 빨리 답을 하고, 만남이 쉽게 이루어지는 것도 편하고 좋았어. 그렇게 만나다 보니까 좋아하는 마음이 점점 커졌고 결혼까지 하게 된 거야.”
“그랬구나. 난 사실 내가 소개시켜 줬지만 너랑 잘 안 될 거 같았어.”
“정말? 안 될 것 같은데 왜 소개해준 거야?”
수겸이는 남아있는 마지막 케이크 한 조각을 입에 넣고 말한다. “내 친구이자 네 와이프 친구이기도 한 소연이랑 나랑 둘이 술을 마시고 있었어. 한창 술 마시는 중에 지우한테 연락이 와서 같이 합류해서 셋이 마시기 시작했어. 난 그날 지우를 처음 봤고. 이런저런 얘기하다가 소연이가 괜찮은 사람 있으면 지우 좀 소개시켜 주라고 하는 거야. 그래서 내가 어떤 스타일 좋아하냐고 물어 봤지. 지우가 자기는 지적이고 재미있는 사람 좋아한다고 하더라고. 그 얘기 듣는 순간 네가 딱 떠올랐어. 그 자리에서 너한테 바로 연락을 했고. 네가 소개팅 하겠다고 해서 지우한테 번호 받아서 너한테 전달해준 거였어. 느낌에 너랑 잘 될 것 같지는 않았어.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 모르겠는데 네가 좋아하기에 너무 평범해 보였어. 물론 첫인상에서 오는 선입견이었겠지. 그런데 너는 그런 평범함에 매력을 느꼈다니. 나는 네가 화려하고 감각적인 스타일의 여자를 좋아할 거라고 생각했나 봐.”
“그랬구나. 나는 지적이지도 않고 재미있지도 않은데.. 왜 나를? 친구들은 나보고 엄청 재미없다고 그래.”
“그래? 남자 애들이 보기에 재미없을 수도 있지만, 여자인 내가 볼 때는 너 재미있어.”
“내가?”
“응 난 오늘도 재미있는데. 결혼의 완성은 이혼이라든지. 사이가 안 좋은 부부관계에서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에 대한 견해도 그렇고. 이혼과 동시에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건 환상적인 마무리이다. 이런 얘기 너무 재미있어. 엉뚱해 보이기도 하고 괴변 같기도 하면서 여러 경험과 많은 고민 끝에 도달한 결론일 거잖아. 물론 네 말에 다 동의하지는 않지만. 어쨌든 남자친구 만나면 재미없는 얘기만 하는데 오랜만에 너 만나서 이런 얘기하니까 좋아.”
“남자친구랑은 주로 어떤 얘기하는데?”
“주식, 정치, 게임, 스포츠. 이런 얘기 주로 해. 재미있을 때도 있지만 내가 관심 있는 분야는 아니거든.”
“너는 뭐에 관심이 있는데?”
“오늘 같이 내가 생각 못 해본 거에 대해서 얘기하는 것도 재미있지. 그리고 나는 패션, 문화, 예술 이런 쪽에 관심이 많아.”
“지금 나랑 얘기하는 게 재미있다면 아마 오랜만에 만나서 그럴 거야. 맨날 보면 아무리 관심 분야가 같다고 해도 언젠가는 재미없어지는 날이 올 걸. 계속 새로운 얘기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이지.”
수겸이 민구를 빤히 쳐다보며 묻는다. “그렇겠지?”
민구가 고개를 끄덕인다. “응. 난 그렇다고 생각해.”
“어렵네. 그런데 민구야, 나 궁금한 거 있어. 궁금하면서 섭섭한 거야.”
“궁금하면서 섭섭하다고? 뭔데?”

3
12년 전.
화창한 봄날, 수겸은 학교 도서관에 가고 있다. 맑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햇살이 따사롭다. 어딘가로 놀러 가고 싶지 도서관에 갇혀 공부하기 싫은 날씨이다. ‘오늘 같은 날 도서관에 가는 건 날씨에 대한 예의가 아닌데.’ 수겸은 잠시 도서관에 가지 말까도 생각했지만 이내 마음을 고쳐먹는다. 대신에 햇살이 주는 즐거움을 조금 더 느끼기 위해 잠시 벤치에 앉았다 가기로 한다. 주위를 둘러보니 평소보다 학생들이 훨씬 많다. 날씨가 너무 좋아서 다들 수업을 빼먹고 방황하고 있나 보다. 다소 무거운 표정의 학생들도 간간이 눈에 띄지만, 대부분은 밝고 활력이 넘쳐 보인다. 학생들의 옷도 날씨만큼이나 밝고 화사하다. 이유 없이 괜히 들뜨고 설레는 날이다. 수겸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본다. 파란 하늘에 손으로 아무렇게나 뭉쳐놓은 듯한 작은 솜뭉치 같은 구름 하나가 떠 있다. 저 위에는 바람이 살랑살랑 부나 보다. 구름이 바람에 실려 아주 아주 느리게 움직이고 있다. 계속 보고 있지 않았다면 마치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으로 착각할 정도로 느리게 움직이고 있다. 따뜻한 햇볕 아래에서 느리게 움직이는 구름을 계속 보고 있으니 마치 술에 취한 듯, 최면에 걸린 듯 나른하고 노곤해 진다. ‘따뜻하고 평화롭다. 도서관에 가기 싫다. 계속 여기 앉아 있고 싶다. 혼자 도서관에 가기 진짜 싫은 날이다.’ 이때 누군가 수겸이의 이마를 가볍게 툭 쳤다. 수겸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너 뭐하냐?” 민구가 고개를 들어 수겸이가 쳐다보던 구름을 본다.
“어! 민구구나.”
하늘을 계속 보면서 민구가 말한다. “뭘 보고 있던 거야? UFO라도 봤어? 내가 저 위에서 내려오다 너 봤는데 벤치에 앉아서 계속 하늘을 보더라.”
“도서관 가는 길에 햇살이 너무 좋아서 잠시 앉아서 하늘 보고 있었어. 수업 갔다 오는 거야?
”응, 지금 막 수업 끝나고 나오는 길이야.”
“그렇구나. 민구야, 너 혹시 약속 있어?”
“약속은 없고 영화 보러 갈 거야.”
“지금? 누구랑 가는데?”
“나 혼자.”
“혼자 영화 본다고?”
“응 나는 주로 영화관에 혼자 가.”
“혼자 봐도 재미있어?”
“영화가 혼자 보면 재미없고, 둘이 보면 재미있고 그런 거는 아니잖아.”
“그렇기는 하지만 같이 보면 더 좋잖아.”
“혼자 보면 집중이 더 잘 되는 장점도 있어. 너는 도서관 간다고 그랬나? 난 가봐야 돼서. 가 볼게. 다음에 보자.”
“그래. 영화 재미있게 봐.”
민구가 정문을 향해 빠르게 걸어간다. 수겸은 민구의 뒷모습을 보고 있다.
“민구야!” 수겸이 꽤 멀어진 민구를 향해 큰 소리로 부른다.
민구가 멈추어 서서 뒤돌아본다. “응? 수겸아 왜?”
“민구야, 영화 다음에 보고 나랑 도서관 같이 가지 않을래?”
“도서관에? 나는 지금 공부할 거 없는데.”
“어떻게 학생이 공부할 게 없을 수가 있어? 평소에 미리미리 해야지.”
“그렇기는 한데 굳이 오늘은 안 해도 돼. 그런데 도서관에는 왜 같이 가자는 거야?”
“그냥 오늘 왠지 혼자 공부하는 게 싫어서. 영화 다음에 봐도 되는 거 아니야?”
“안돼. 자주 상영하는 영화가 아니어서 기회 있을 때 봐야 돼. 난 그럼 갈게. 공부 열심히 해.”
민구는 망설임 없이 뒤돌아서 다시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수겸이도 도서관을 향해 걸어간다. 도서관을 가는 동안 따사로운 햇살이 수겸의 어깨 위로 계속 떨어진다.

1주일 후.
지난주와 같은 시간, 수겸은 학교 도서관을 가고 있다. 지난 주와 달리 하늘은 먹구름으로 뒤덮여 있다. 비가 바로 쏟아져도 하나도 이상할 것 없는 하늘의 모습이다. 수겸은 ‘비 예보가 있었나?’하는 생각을 한다. 아니나 다를까 학교 정문을 지나자마자 비 한 방울이 이마에 떨어졌다. 잠시 후 본격적으로 한 두 방울 떨어지기 시작한다. 비가 쏟아지지 않을까 하는 걱정스러운 마음에 발걸음을 재촉한다. 빗방울이 점점 굵어지면서 비 오는 양도 조금씩 늘어난다. 도서관까지 가려면 적어도 5분 이상은 걸린다. 비를 피하기 위해 주위 사람들의 발걸음도 빨라졌다. 수겸은 가방을 머리위로 들고 뛰기 시작했다. 비가 점점 더 많이 온다. 이대로 도서관까지 갔다가는 옷이 흠뻑 젖을게 뻔하다. 수겸은 일단 바로 옆 인문대 건물로 가서 비가 잦아들기를 기다려야겠다고 생각한다. 방향을 틀어 인문대 건물로 가려는 순간 저 멀리서 우산을 쓰고 오는 민구가 보인다. 수겸은 민구를 향해 빠르게 달려가 민구의 우산 속으로 들어갔다. 우산을 쓰고 걸어가던 민구는 수겸이 갑자기 뛰어들어오는 바람에 놀라서 그 자리에 멈추었다. 민구는 최대한 비를 맞지 않게 하기 위해 우산을 수겸의 몸 쪽으로 가져갔다. 비가 더 많이 오기 시작한다. 우산 위로 “투둑 투둑 투둑”하고 굵은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수겸아.”
수겸과 민구는 몸이 닿을 듯 말 듯 가까이 붙어 마주보고 있다. 한참을 뛰어온 수겸은 가쁘게 숨을 쉰다. 거친 날숨에 섞인 수증기의 온도가 민구에게 그대로 전달된다.
수겸이 흐트러진 호흡으로 말한다. “야, 어떻게 비가 오자마자.. 네가 우산을 쓰고.. 딱 나타나냐? 우연히도..”
“뭐가 우연이야? 우리 지난주에도 만났잖아. 나는 매주 이 시간이면 수업 끝나고 나오는데.”
“그러네. 지난주에도 만났구나. 너야 같은 요일 같은 시간에 수업이 있지만, 내가 이 시간에 또 여길 지나가는 건 우연이지. 그런데 오늘 비 예보 있었어?”
“아니.”
“비 예보 없었는데 어떻게 우산을 가지고 온 거야?”
“집에서 나오는데 하늘을 보니까 왠지 비가 올 것 같아서 가지고 왔어.”
“그랬구나. 잘 했네.”
“오늘은 어디 가는 거야?”
“오늘도 도서관.”
“너 공부 진짜 열심히 하는구나. 생긴 건 그렇지 않아가지고.”
“내가 생긴 게 뭐 어때서? 나 공부 열심히 안 하게 생겼어?”
“응 날티 나게 생겨서 공부랑은 거리가 멀어 보여. 외모에서 풍기는 거는 노는 것만 좋아할 것 같은데, 생긴 거랑은 다르게 공부뿐만 아니라 뭐든지 열심히 하는 것 같아.”
“하하 칭찬이야, 욕이야?”
“그냥 보이는 대로 얘기한 거야. 내 느낌이야.”
“날티 나게 생겼다는 건 예쁘다는 거지?”
“날티 난다고 다 예쁜 건 아니지 않나?”
수겸이 웃으면서 말한다. “하하 그래? 나는 그냥 내 마음대로 생각할래.”
“그래. 네 마음대로 생각해.”
“민구야, 오늘은 나랑 같이 도서관에 같이 가지 않을래?”
“도서관에? 같이 밥을 먹자거나 차를 마시자는 것도 아니고 도서관에 자꾸 같이 가자고 하는 건 뭐야?”
“도서관 갈 때마다 너를 우연히 만나니까 그렇지. 공부하다가 잠깐 쉴 때 같이 커피도 마시고 담배도 피우고 하면 좋잖아.”
“나는 오늘도 공부할 거 없는데. 그리고 나 담배 안 피우는 거 알잖아.”
“야, 너는 어떻게 맥락을 이해 못 하냐? 꼭 담배를 같이 피우자는 게 아니라, 공부하다 머리도 식힐 겸 같이 얘기도 하고 그러자는 거지.”
“무슨 얘기인지는 알겠어. 그래도 미리 약속을 한 것도 아니고 지나가다가 만났는데 도서관을 같이 가자는 거는 좀 황당하지 않아?”
“음.. 그렇기는 하지. 맞는 말이기는 한데 꼭 그렇게 따져야겠냐? 오늘도 어디 갈 데 있는 거야?”
두 사람이 함께 우산을 쓰고 얘기하는 동안 비가 많이 잦아들고 있다.
“오늘은 독서모임이 있어.”
“독서모임? 그런 것도 해?”
“응”
“오늘 꼭 가야 해? 도서관 가서 책 읽으면 안 돼?”
“한 달에 한 번 하는 모임이어서 빠지기가 좀 그래. 그리고 학교 도서관은 공부하는 곳이지, 독서할만한 공간은 아닌 것 같아. 그런 생각 안 해봤어?”
“그런 생각은 전혀 안 해봤어. 공부도 책 읽는 거잖아. 도서관이 독서 할만한 공간이 아니라는 거는 너무 이상하게 들리네.”
“너 학교 도서관에 다들 공부하러 가지, 독서하러 간다는 사람 본 적 있어?”
“음.. 그러게 독서하러 간다는 사람은 못 본 거 같긴 하네. 말 장난 같은데 묘하게 설득된다.”
“어쨌든 나 아니어도 네가 도서관에 가자고 하면 같이 갈 남자들 줄을 설 텐데.”
“야야, 네가 편한 친구니까 같이 가자고 하는 거지. 아무한테나 그러겠냐?”
“그럼 다음에 미리 약속 잡고 같이 가자.”
“됐거든. 나 도서관 앞에까지 데려다 줘.”
“수겸아, 이 우산 손잡이 잡아 봐.”
“손잡이는 왜?”
수겸은 우산 손잡이를 잡았고, 민구는 잡고 있던 손잡이를 놓았다.
민구가 수겸의 어깨를 토닥거리며 말한다. “나 늦어서 그러는데 먼저 가볼게.”
말을 마치자마자 민구가 우산 밖으로 나와 정문 방향으로 뛰어간다. 비가 오는 양이 줄기는 했지만 여전히 우산을 써야 할 정도로 내리고 있다.
“민구야! 비 맞으면서 가면 어떻게? 머리랑 옷이랑 젖잖아.”
뛰어가던 민구가 뒤돌아보며 말한다. “많이 안 와서 괜찮아. 공부 열심히 해. 우산 나중에 꼭 돌려줘.”
“우산이야, 당연히 돌려주지.” 수겸이 혼잣말을 했다.
수겸은 뛰어가는 민구의 뒷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다가 도서관으로 갔다.

4
“너 기억나?” 수겸이 물었다.
“음..” 민구가 커피 한 모금을 마시며 생각한다. “그런 일이 있었나?”
“넌 기억도 못하는 구나! 나 그때 너무 섭섭했어. 도서관 같이 가주는 게 그렇게 힘든가?”
“내가 두 번이나 거절했다는 거지?”
“응. 그것도 2주 연속으로.”
“네가 도서관 같이 가자고 한 거까지는 기억이 안 나고. 같은 수업 마치고 나오면서 우연히 몇 번 만났던 거는 기억나.”
“도서관 가자고 한 거는 전혀 기억이 안 나?”
“응, 그거는 기억이 안 나. 비 오는 날 만나서 너한테 우산 준거는 기억나. 그때가 독서 모임이 있었구나.”
“맞아. 독서모임. 그래도 기억을 전혀 못하는 건 아니네.”
“그리고 그 다음주에 또 같은 시간에 만나서 네가 우산 돌려줬던 것 같은데, 맞지?”
“응, 맞아.”
“완전 잊고 있었던 일인데 너랑 얘기하다 보니 기억이 조금씩 나네. 그럼 우산 돌려줄 때도 도서관 같이 가자고 했어?”
“아니.”
“그때는 왜 도서관 같이 가자고 안 했어?”
“그때는 도서관 가는 길이 아니었어.”
“그럼 어디 가는 거였어?”
“그러게 어디 가는 길이었을까? 너무 오래 돼서 그거까지는 기억이 안나.”
“섭섭했다면 미안해. 그때 내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네. 도서관에 같이 갈 수도 있었을 텐데 말이지.”
“그러니까, 너 너무했어.”
“지금 생각해 보니까 당시에 우리학교에서 제일 잘 나가는 반수겸이 가자고 하는 거였는데. 미래의 잘 나가는 모델이 될 친구가 가자고 한 걸 내가 거절한 거였네. 다른 남자 애들은 같이 가고 싶어도 못 가는 거였을 텐데.”
“야, 이민구! 너 지금 나 놀리는 거야 뭐야?”
“놀리는 거 아니야. 진짜로 그런 생각이 들어서 그래.”
“넌 학교 다닐 때 다른 공대 남자애들하고 좀 달랐어. 남자 애들은 보통 게임 하느라 정신이 없는데 너는 영화랑 책 좋아했었잖아.”
“각자 취향이 있는 거지.”
“너 때문에 나도 영화에 관심을 가지게 된 거 알아?”
“아니. 전혀 몰랐는데. 그랬어?”
“응 너랑 우연히 영화 얘기를 했는데, 네가 나한테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그녀에게’를 강력하게 추천해줬었어.”
“그랬었나? 전혀 기억이 안 나네. ‘그녀에게’ 내가 엄청 좋아하는 영화야. 거기에 나오는 음악도 좋아하고.”
“맞아. ‘쿠쿠루쿠쿠 팔로마’라는 노래. 그때도 네가 너무 좋다고 말했어. 네가 이 영화 좋다고 열정적으로 설명하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해. 너 덕분에 ‘그녀에게’를 보게 됐지.”
“그랬구나. 너랑 그런 얘기한 게 전혀 기억이 안나. 그때 ‘그녀에게’ 재미있게 봤어?”
“그럼 완전 재미있게 봤지. 처음 봤을 때 이런 영화도 있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어. 좋은데 왜 좋은지를 모르겠더라고. 그래서 여러 번 봤어. 다시 봐도 좋았어.”
“또 봐도 재미있지. 좋은 영화는 다시 볼 때 새로운 장면이 보이잖아.”
“맞아. 그리고 너 혹시 ‘쿠쿠루쿠쿠 팔로마’가 다른 어떤 영화에 삽입곡으로 쓰였는지 알아?”
“아마 왕가위 ‘해피 투게더’에도 나오지?”
“오! 역시. 너랑은 대화가 되네.”
“영화 좋아하면 남자친구랑 영화 자주 보면 되겠네.”
“가끔 보기는 하는데 남자친구는 영화를 나만큼 좋아하지 않고, 보는 취향도 좀 달라.” 수겸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네가 좋아하는 영화 같이 보자고 해 봐.”
“그래 봤지. 영화 보고 영화에 대해서 같이 얘기도 하고 싶은데 그런 게 전혀 안 돼. 그냥 재미없어하더라고.”
“그래서 아까 남자친구랑 얘기하면 재미없다고 했구나.”
“응, 맞아.”
“또 반복해서 얘기하지만 처음에는 재미있더라도 언젠가는 재미없어 지는 순간이 온다니까. 그건 연애도 결혼도 마찬가지야.”
“그건 네 말이 맞아. 그런데 재미도 재미지만, 내가 진짜 남자친구를 사랑하고 있는..” 수겸이 손목 시계를 보며 말하다 화제를 바꾼다. “민구야, 우리 지금 여기서 4시간 동안이나 얘기했어. 시간가는 줄도 몰랐네.”
“진짜? 4시간이나 됐다고? 시간 엄청 빨리 갔다.”
수겸이 서두르면서 말한다. “그러게 얘기하다 보니까 시간이 후딱 갔다. 나 남자친구랑 저녁 약속 있어서 가봐야 돼. 지금 일어나지 않으면 늦을 것 같아.”
수겸과 민구는 카페에서 나왔다.
“민구야, 너 뭐 타고 왔어?’
“나는 지하철 타고 왔어.”
“그렇구나. 나는 차를 가지고 와서 주차장으로 가야 해. 민구야 오랜만에 봐서 반가웠고 얘기도 너무 재미있었어. 그럼 또 연락하고 다음에 보자.”
“그래 나도 반가웠어. 다음에 보자. 수겸아.”
수겸과 민구는 헤어졌다.

5
수겸과 헤어지고 나서 민구는 바로 지하철을 타러 가려다 쇼핑몰에 온 김에 저녁까지 해결하기로 했다. 혼자 먹을만한 식당을 둘러보다 돈가스 전문점에 들어왔다. 안심 돈가스 세트를 시켰다. 식당에는 혼자 밥을 먹는 사람이 민구밖에 없다. 평일이면 혼자 먹는 사람이 꽤 있었을 텐데 휴일이어서 없는 것 같다. 남자친구랑 저녁 약속이 있다고 했는데 수겸이는 저녁으로 무엇을 먹을지 궁금하다. 식사를 마치고 집으로 가기 위해 지하철을 탔다. 지하철에 있는 사람들은 쇼핑몰에 있는 사람들처럼 표정이 밝지 않다. 쇼핑몰 안에 판타지를 일으키는 가스를 누군가 살포해 놓았던 게 분명하다. 그렇지 않고서 어떻게 사람들의 표정이 이렇게까지 다를 수 있단 말인가? 그런데 그 가스는 우리 삶에 반드시 필요해 보인다. 현실적인 것만 보고 살아가기에 너무 힘든 세상이다. 민구는 자신이 살고 있는 아파트에 도착했다. 1층에서 엘리베이터를 혼자 탔다. 19층 버튼을 누르고 문이 닫히자 엘리베이터는 “위이이잉”하는 묵직하면서도 매끈한 기계음을 내며 올라가기 시작한다. 오늘따라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린다. 엘리베이터 소리가 민구의 마음에 이상한 적막함을 만들어 낸다. 19층이 가까워지자 엘리베이터는 더욱 묵직한 기계음을 내며 속도를 늦추다, “딩동”하는 경쾌한 벨소리와 함께 완전히 멈추었다. 문이 열렸고 민구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현관문의 비밀번호를 누르고 집으로 들어갔다. 불을 켜니 마치 아무도 살고 있지 않을 것 같은 휑한 거실이 드러난다. 거실에는 TV, 소파, 테이블, 에어컨, 액자, 커튼 같은 보통의 집이라면 꼭 있어야만 할 것들이 하나도 없다. 벽지에는 물건들이 있었던 흔적들만 묻어 있다. 소파의 흔적과 TV를 걸어 놓았던 흔적이 가장 눈에 띈다. 얼마 전 아직까지는 법적으로 아내인 지우가 이삿짐 센터를 불러 혼수로 해왔던 물건을 모두 가지고 갔다. 집에서 쾌쾌한 냄새가 나는 것 같아 환기를 시키기 위해 베란다로 나갔다. 베란다의 유리문을 옆으로 당겨 열었다. 문을 여니 시원한 바람이 밀고 들어온다. 민구는 아래를 내려다 본다. 학원을 가는 학생, 개와 함께 산책하는 노인, 근무 중인 보안 요원, 벤치에 앉아서 얘기를 나누는 가족이 눈에 들어온다. 여유로워 보이는 휴일 저녁이다. 시선을 좀 더 당겨 수직 방향으로 내려본다. 아파트 건물 앞 화단에 있는 나무와 풀이 보인다.
‘여기에서 뛰어 내리면 바닥에 닿는 순간 고통이 느껴질까?’
‘만약에 뛰어 내린다면 지금 보다 편안해질까?’
‘19층이라도 순식간에 떨어지겠지?’
민구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베란다의 문을 닫는다. 이런 생각은 환상적인 마무리와 거리가 멀다. 샤워를 하고 편안 옷으로 갈아입었다. 민구는 서재로 갔다. 거실, 부엌, 다른 방에 있는 대부분의 물건들은 사리지고 없지만, 서재만은 모든 것이 그대로 남아있다. 긴 나무 책상, 3단 서랍장, 회전 의자, 최신형 노트북, 메모지, 각종 필기구, 스탠드, 탁상용 달력, 한 쪽 벽 전체를 막고 있는 책장, 그리고 그 책장에 가득 꽂혀 있는 책들. 모두 그대로이다. 집안 다른 모든 곳은 얇고 평면적으로 변했는데, 여기만은 깊이와 입체감을 유지하고 있다. 민구는 접혀 있던 노트북을 열고 전원 버튼을 눌렀다. 책상을 만진 손에 하얀 먼지가 묻었다. 민구는 물티슈 한 장을 꺼내 책상 위를 가볍고 길게 한 번 문질렀다. 의외로 먼지가 많다. 생각을 해보니 청소를 안 한지 꽤 됐다. 물티슈 몇 장을 더 꺼내 본격적으로 닦기 시작한다. 책상, 의자, 서랍장, 노트북, 마우스, 책장 선반 구석구석을 깨끗하게 닦았다. 책을 읽을까 하다 생각이 바뀌어 물티슈를 몇 장 더 꺼내어 바닥을 닦는다. 먼지가 엄청 묻어 나온다. 꽤 많은 물티슈를 사용해서 바닥 전체를 깨끗이 닦았다. 바닥에 발을 디딜 때마다 깨끗해진 느낌이 발바닥에 그대로 전해진다. 책상 앞에 앉아 책상 위에 놓여 있는 작은 스탠드 등을 켰다. 백열등 불빛이 책상 위를 비추니 분위기가 조금 화사해 졌다. 물티슈로 차갑게 변한 나무의 질감이 불빛으로 따뜻해진 느낌이다. 작은 등 하나가 이상한 힘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민구는 잠시 인터넷을 하다가 책을 읽는다. 한참 읽다가 우울증 약을 깜박하고 안 먹은 것이 생각났다. 읽던 페이지에 책갈피를 낀 후 책을 덮었다. 책을 덮자마자 스마트폰 벨이 울린다. 발신자를 확인하니 수겸이다. ‘지금 한창 남자친구 만나고 있을 시간 같은데, 무슨 일이지?’ 벨이 여러 번 울린 후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수겸아!”
“민구야! 집에 잘 들어갔어?”
“그럼 나야 잘 들어왔지. 너 남자친구 만난다고 했잖아.”
“만났지. 오늘 좀 일찍 헤어졌어.”
“벌써? 지금 몇 시인가?” 민구가 노트북으로 시간을 확인한다. “아직 10시도 안 됐네. 진짜 일찍 헤어졌구나. 저녁은 먹었어?”
“그럼 먹었지. 남자친구하고 먹었어.”
“너는 저녁 먹었어?”
“나는 집 근처에서 친구랑..” 민구가 고개를 흔든다. “아니 헷갈렸다. 너랑 헤어지고 쇼핑몰에서 혼자서 간단하게 먹고 집에 왔어. 그나저나 어쩐 일이야?”
“생일인데 저녁 혼자 먹었어?”
“응. 생일이 뭐 중요한가? 나한테는 그냥 365일 중 하루일 뿐이야.”
“나 사실 궁금한 게 있었는데. 아까 약속 때문에 급하게 나오느라고 시간이 없어서 미처 못 물어봤어.”
“궁금한 게 뭔데?”
“오랜만에 만났는데 너 어떤 일 하는 지도 못 물어봐서.. 궁금했는데 말이지.”
“그거 물어보려고 전화 한 거야?”
“응. 그것 때문에 전화한 건데. 왜 전화로 물어보면 안 되는 거야?”
“당연히 물어봐도 되지. 난 갑자기 전화가 와서 뭔가 급한 일이 있나 싶었지. 나 바이오테크 기업에 다니는 거 알고 있어?”
“그건 알고 있지. 거기서 어떤 일 해?”
“나는 의료 진단 AI 시스템을 개발하는 부서에서 일하고 있어.”
“AI가 질병을 진단하는 거야?”
“응, 그런 거야. 병을 검사하는 다양한 방법이 있잖아. 유전자 검사, 항원항체 반응 검사, 조직 검사, CT, X-Ray 같은 영상 검사. 이런 검사 결과 데이터를 분석해서 질병을 진단하는 AI를 개발하는 부서야. 나는 수집한 데이터를 토대로 분석하고 진단까지 내리는 AI 알고리즘을 개발하고 있어.”
“양성, 음성 정도 판단하는 것도 아니고, 질병 진단에는 고도의 전문성과 경험이 반드시 필요하잖아. 그걸 AI가 할 수 있나?”
“당연히 병을 진단하는 건 의사만이 할 수 있는 고유 영역이지. 회사에서는 세상이 어떻게 바뀔지 모르니 먼 미래를 보고 투자하는 것 같아. 의사도 잘못된 판단으로 오진을 하는 경우도 있으니까. 언젠가 AI가 더 정확한 진단을 내릴 수 있게 되고, 세상은 그걸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는 날이 온다고 생각하나 봐.”
“당장의 이익보다 언제 열릴지 모를 미래를 준비하는 거네. 대기업이니까 가능한 개발 같은데? 법적인 문제도 많을 텐데 말이지.”
“내 생각에도 그런 것 같아. 나는 그냥 빅데이터 기반으로 분석하는 툴을 만들고 있을 뿐이야. 의학적인 거나 법적인 거는 잘 몰라. 내가 맡은 일만 열심히 하고 있는 중이야.”
“일이 쉽지 않을 것 같아.”
“아무래도 내가 모르던 분야도 공부를 하면서 해야 하니까 처음에는 어려운 게 많았지. 그래도 계속하다 보니까 많이 익숙해지더라고.”
“그런데 나는 질병 검사랑 진단까지 AI에게 받고 싶지는 않아. 너무 기계적이잖아. 사람은 아프면 따뜻함을 더 원하게 되는데 말이지.”
“맞아. 인공지능이 따뜻함까지 줄 수는 없을 테니까. 매우 중요한 문제야. 개발에 참여하고 있지만, 나도 이게 현실적으로 실현이 될지는 의문이야.”
“그럼 궁금한 게 정신질환이나 심리상태도 AI가 진단 할 수 있나?”
“글쎄. 그거는 모르겠어. 우리 회사에서 그런 걸 개발하고 있지는 않아.”
“지금 막 생각났는데 미래에는 피 검사 같은 걸 해서 정신 질환이나 심리 상태를 진단 할 수 있지 않을까?”
“하하 수겸아, 너 의외로 엉뚱한 생각도 하는구나.”
“우리 감정이나 기분도 다 화학작용이라고 하잖아. 그러면 언젠가는 가능할 것도 같은데, 네 생각은 어때?”
“음.. 글쎄 모르겠네.”
“만약에 그런 검사가 있다면 난 한 번 해보고 싶어.”
“정말? 난 별로 하고 싶지 않아. 나의 심리적인 문제까지 AI가 판단해준다면 왠지 삶이 너무 서글플 것 같아.”
“그렇긴 해도 내가 내 자신의 마음을 잘 모르는 경우도 있잖아.”
“뭐.. 그럴 때 많지.”
“내가 지금 사랑을 하고 있는지 알고 싶어. 미래에는 그런 것도 알 수 있겠지?”
“글쎄. 그런 검사가 개발될지는 모르겠네. 그런데 그걸 굳이 검사를 해봐야 알 수 있는 건 아니잖아. 지금 네 남자친구를 사랑하고 있는지 아닌지 스스로 모르는 거야? 꼭 검사를 해서 확인할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사랑에 대해서 고민하고 있는 거라면 솔직함이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해. 자신의 마음을 솔직히 들여다보면 되지 않을까?”
“너 쇼핑몰에서 만났을 때는 이런 얘기 안 했잖아. 남자친구가 사람이 좋고 돈 많으면 그것만으로도 괜찮다고 했잖아. 낮에 한 얘기랑 앞뒤가 안 맞는 거 같은데? ”
“아까는 사랑에 대해서 얘기한 게 아니라, 결혼과 이혼에 대해서 얘기했었잖아. 관계를 맺고 함께 살아가는 건 지극히 비즈니스적이지만, 누군가를 사랑하는 마음은 비즈니스 차원에서 설명이 안 되는 현실을 초월하는 무언가가 있는 것 같아.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면 가장 좋은데 그러기 쉽지 않은 세상이니까 그렇지.”
“그러게 사랑에 대해서 얘기하지는 않았네. 그래도 환상적인 마무리를 할 때의 새로운 만남은 사랑 아닌가?”
민구가 잠시 생각하다 말한다. “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 누군가와 연애를 하거나 결혼할 때 사랑 없이 필요에 의해서 할 수도 있으니까. 사랑은 다른 차원의 문제인 거 같아.”
“그래, 사랑이 아닐 수도 있겠다. 그래도 관계는 비즈니스이고, 사랑은 비즈니스를 넘어서는 무엇이다. 내가 이해를 못하는 건가? 네가 하는 말 뭔가 좀 앞뒤가 안 맞는 거 같아.”
“그런가?”
“응. 그래 보여. 관계를 비즈니스라고 생각하는 거 혹시 다시 상처 받기 두려워서 스스로를 보호하려는 방어기제가 아닐까?”
“뭐.. 그럴 수도..” 민구는 딱히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어쨌든 네 의견은 사랑에 대해서 고민하는 거라면 이런저런 생각 많이 할 필요 없이 내 자신에게 솔직해지면 된다는 거지?”
“응. 나는 그렇다고 생각해.”
“사실 나 저녁에 남자친구 만나서 헤어지자고 말했어.”
민구는 수겸의 갑작스러운 말에 깜짝 놀랜다. “아니 왜? 낮에 얘기 들어보니까 남자친구 좋은 사람 같던데.”
“내가 얘기했잖아. 같이 있으면 별로 재미없다고.”
“재미가 좀 없다고 헤어지는 건 아니지 않아?”
“그렇긴 한데.. 나 그냥 결심했어.”
“뭘 결심해?”
“내 연애 사업을 환상적으로 마무리하기로.. 판타스틱 엔딩.”
민구가 조금 당황한 투로 말한다. “판타스틱 엔딩?”
“응 네가 말했잖아. 환상적인 마무리를 할 수 있으면 좋은 거라고. 그래서 지금 네 와이프도 다 이해한다며?”
“응. 그렇게 말하긴 했지.”
“어쨌든 그건 그렇게 됐으니까 더 이상 묻지마. 그나저나 민구야, 너 이번 주말에 뭐해?”
“이번 주말? 아무 계획 없는데.”
“그래? 잘 됐다. 나는 이번 주 토요일에는 화보촬영이 있어서 시간이 안 되거든. 일요일에 같이 영화 보러 가자.”
“영화? 갑자기?”
“뭐가 갑자기야? 내일 보자는 것도 아니고 주말에 보자고 하는 건데. 이번에는 미리 얘기하는 거니까 너 거절하면 안 된다. 무조건 나랑 같이 봐야 돼. 알았지?”
“그그그.. 그래. 영화 좋지.”
이제서야 민구는 연애사업을 환상적으로 마무리하겠다는 수겸이의 말이 이해가 된다.
“내가 영화 예매해서 연락할게. 일요일에 볼 영화는 내 마음대로 고를 테니까 그렇게 알고 있어.”
“그래 알았어.”
“그럼 전화 끊을게. 잘자고 내일 출근 잘 하고.”
“그래 너도 자알..”
수겸이 갑자기 민구의 말을 끊는다. “아 참, 그리고 너 일요일에 만날 때 오늘 산 흰색 셔츠 입고 와.”
“흰색 셔츠?”
“응, 그냥 그거 입고 와. 나도 하얀색 옷 입을 거니까. 알았지?”
“그래 알았어.”
“진짜 끊는다. 안녕.”
“그래 안녕.”
민구는 전화를 끊었고 머릿속이 멍하다.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인가 싶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판타스틱 엔딩이 찾아왔다.

민구는 토요일에 소송 중인 아내를 만나 재산을 자신이 6, 아내가 4로 나누기로 최종 합의했고 위자료 소송도 취하하기로 결정했다.

일요일이 되었다. 수겸과 민구는 영화관 근처 작은 카페에서 만나기로 했다. 수겸은 가슴에 파란색 큰 하트가 그려진 흰색 니트를 입었다. 민구와 만나기로 한 카페에 거의 다 와간다. 가슴이 조금 두근거린다. 민구는 이미 도착해서 창가에 자리를 잡았다. 수겸도 카페에 도착했다. 카페 유리창 너머 흰색 셔츠를 입고 있는 민구가 보인다. 햇살은 사선으로 유리창을 뚫고 들어가 민구가 앉아있는 자리를 환하게 비추고 있다. 민구도 밖을 둘러보다 카페 입구로 걸어오는 수겸을 발견했다. 민구는 자리에서 일어나 수겸에게 반가운 손짓을 한다. 수겸은 걸음을 멈추었고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민구와 마주본다. 카페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민구와 겹쳐 보인다. 민구 가슴에도 파란색 하트가 새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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