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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신의 목소리

2020.10.03 02:0310.03

내가 이곳으로 들어오게 된 것은 단순히 비를 피하기 위함이었다. 길에서 떨어진 후미진 장소. 좁은 골목의 벽으로 음푹 들어간 공간. 어딘가에서 버린 오물들이 흐르는 수도가 아가리를 크게 벌리고 있는 곳. 버려진 공간이 필요했다. 숨고 숨죽이고 숨을 막을 존재가 되고 싶었다. 들키지 않기 위해 부서진 판자와 녹슨 철근을 끌어 덮어두었다. 

누구도 모르는 존재가 되고 싶다.

 

 

[여기서 뭘 더 어떻게 해야하는 거야.]

 

남성의 앳된 목소리. 나는 소리하나 내지 않고서 숨어 있었다.

 

[죽고 싶어.]

왜 죽고 싶은 것이냐.

 

고개를 돌렸다. 소리하나 내지 않기로 했는데.

 

[누구시죠?]

왜 죽고 싶은 것이냐.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아야 하는데.

 

[제가 아는 여자가 절 협박해요.]

그래서?

[아시잖아요.]

그래서?

[벗어나고 싶어요.]

그래서?

[죽이고 싶어요.]

 

제발, 입 좀 닫아. 조용히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데. 제발.

 

 [저기요?]

하거라.

[네?]

네가 원하는 바를 이루거라.

내가 허락하였노니.

 

나는 허리를 숙여 빌었다. 어떤 소리도 움직임도 보이지 않기로 맹세했다. 아버지시여, 있다면 저를 구해주소서. 손을 비벼 가죽이 벗겨질 때까지. 오수가 머리를 덮는다. 대화는 그치었고 그는 말하지 않았다. 제발, 아버지시여.

 

[아빠를 죽이고 싶어요.]

왜 죽이고 싶은 것이냐.

[돈이 필요해요. 그는 늙었고 전 젊어요.]

 

[그렇게 해도 되죠?]

그리하거라.

[좋아.]

내가 허락하였노니.

 

절반 쯤 부서져 금이 간 판자가 신음을 낸다. 좋지 않아. 누군가가 찾아 오는 건 유쾌한 일이 아니다. 두 손을 모았지만 기도를 받을 누군가가 없다. 나는 누구에게 빌고 숙여야 하지. 세상의 탄생이 폭발하듯 그 자신에게 죄를 덮는다. 그는 재가 되었고 계속해서 도망쳤다. 아니, 나는. 그래, 내가 바로 내가.

 

[정말 소원을 이루어주십니까?]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

[제가 돈을 조금 얻는 건 큰 일이 아니잖습니까. 그렇죠?]

그래서?

[그 돈에 의해 죽어가더라도 그건 그들의 안일함 때문이지

제 탓이 아니잖습니까?]

그래서?

[제가 그 돈을 가져가도 되겠습니까?]

 

[저기요?]

그리하도록 하거라.

 

발자욱이 멀리로 달아난다. 신이라도 나는 듯.

 

내가 허락하였노니.

 

나는 빌었다. 살려달라 빌었다. 내가 온 몸으로 받아온 땅이 말을 하니. 그 손가락질들은 나를 향한 것이라 했다. 오수가 다시 쏟아진다. 머리가 푹 젖어들었고 한기로 뼈가 부서질 듯이 금이 간다. 이를 물었다. 말을 해야하나 해야할 말들이 저들에게로 넘어 갔다. 살고 싶다. 나는 진실을 말하겠노라 말한 포주들을 알고 있었다. 그들이 어디로 갔나. 그들이 어디로 사라졌나. 멀건 눈으로 사방을 둘러 본다. 고요함이 메아리 친다.

 

[내가 시장이 될 것이오.]

그래서?

[시장이 되어 이 썩은 곳을 모조리 부술 것이오.]

그래서?

[모두가 찬양을 하지 않소?

당신은 모르나 축복 받은 이는 안다오.

이곳은 새로 건설되어야 해.]

그래서?

[내가 많은 이들을 몰아내어 신전을 지어도 되겠소?]

 

[말해.]

그리하도록 하거라.

 

내가 허락하였노니.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 난 이 단어의 의미가 가진 빛을 모른다. 이끌어가야할 북두칠성이 꺼지지 않듯. 나는 영원토록 모를 것이다. 제발. 난 소리를 죽였다. 하얗게 빛으로 먼 눈을 들어 입을 벌리었다. 노예들의 발자국이 세겨진 모래들을 뱉으며 숨을 쉬는 언덕으로 얕게 허우적 거렸다.

어디였지. 그곳이 어디였지. 내가 누구였지.

 

 

[선포하노라. 새로운 왕이 이곳으로 들어 그대들에게 물으니

이제 이곳은 Traum의 땅이 됨을 알리노라.]

그래서?

[왕이시여 이곳을 보필하여 땅을 풍요롭게 하소서.]

그래서?

[후손들이 장차 이곳에서 제국을 세울 것이니.]

그래서?

[이단을 모조리 목 메달게 할 것이옵니다.]

 

수이 많은 자들의 자욱들이 발로, 발로 굴려진다. 어디론가 가고 있다. 멈추지 않고서.

 

그래 그리하도록 하거라.

내가 허락하였노니.

 

나는 비명을 모른다. 젖과 꿀로 침대를 적시는 건 꼭 그들의 몫이었다. 그들은 긴 꼬리의 몸으로 늘어뜨리어 죄를 달게 하고자 하나 나는 그런 수를 알 수 없었다. 빛으로 멀고 자욱들로 메마른 혀 끝이. 나는 창대하게 노래하니. 지르는 저들의 목을 안식으로 거두어가게 해주소서. 나는 빌었으나. 그것이 얼마나 헛된 망상인지 알고 있다. 나는 기도를 할 수 없다. 손으로 가죽이 벗겨져 온 곳들이 물들어도 그것을 붉다고 얘기할 수 없음이라.

 

[들으시오. 내가 저들에게 기나 긴 가뭄을 주고

넘치도록 비를 내리게 한다면 막을 것이오?]

그래서?

[저들은 부를 것이오. 죽는 그 순간까지 부르겠지.]

그래서?

[그럼에도 누군가는 살아남을 것이오.]

그래서?

[아무 생각도 들지 않으시오?]

그래서?

[저들이 부르는 것들이 들리지 않으시오?]

그래서?

[그대는 들어주는 것으로 모든 것들을 덮으려 하오?]

그래서?

[되었소. 꼭 둘은 살아남을 테니.]

그래서?

[그들은 꼭 그들로서 살아남을 것이오.]

 

모든 것이 잠긴다. 젖고 빠져드는 땅으로 기나 긴 침묵이 자리한다. 마시는 자가 없고 배부른 자가 없다. 말하는 자가, 보려는 자가, 들으려는 자가. 이제는 없으니. 나는, 아니 그는. 이제는 없으니. 그 숨을 죽여 제 몸을 감추던 그는 그것이 스스로는 죽음이라 하나 혹여는 죽지 않음이라. 채워지는 것들이 잠기어 가라앉으니. 이제는 숨지 않음이라. 그는 그토록 갈망하였음을. 이제는 아는 자가 더는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그는 날아갔다. 더는 없고 없을 것인 그의 고통을. 온전히 제 것이 되어. 그는 찬미하였으라. 그때에서야 그는 풀려 나온 것이라. 남은 자들은 그의 자욱을 도통 알 길이 없다. 불리지도,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는다. 온전히 그로서 존재하여 저들 역시 저들로서 존재할 수 있게 됨이라.

 

그래, 그리하도록 하거라.

 

내가 그리 허락하였노니.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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