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던져진 길들 위에서

2003.09.11 01:0509.11

던져진 길들 위에서





고야는 길들은 던져진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던져지고 제자리를 찾지 못한 채 돌이 된  아틀라스처럼 돌이 되었다. 길은 용암에
서부터, 화산에서부터 나왔을지도 모른다. 공룡의 오래된 배설물에서 나왔을지도 모른다.
쌓인 길은 오르막이 된다. 길 너머에는 천국이 있다.
먼 하늘. 북소리같은 숲길. 숲자락이 어깨 양쪽으로 추켜오른다.  하늘로 올라가는 그 곳
에서 숲들은 하늘과 맞닿아 멍한 소리를 쓸고 있었다. 눈을 돌리면, 숲의, 눈을 마주칠 것  
같은 어둠. 고개를 똑바로 하면 하늘과 숲과 천국.
고야는 자신이 걷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발걸음을 멈췄다.
조용히, 가슴이 무너져내렸다.


                                                      *


타르같은 밤바다를 보고 있었다.
"고야는 왜 안 온 거야?"
현이 재차 물었다.
"돈이 없어서."
"걔가 그래? 우리가 낸다고 안 했어?"
"자격지심도 있겠지."
륜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민영은 입을 다물었다. 더 말할 필요는 없다.
타르같은 밤바다를 보고 있었다. 객실에는 열 몇 명의 모르는 사람들이 더 있었다. 넷은 속
삭여서 말하고, 소리없이 멀미하고, 더러워진 입술을 닦으며  다시 밤바다를 보았다. 밤바다
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저기 배 하나 있다."
민영이 말했다. 어디? 하고 현이 눈길을 돌렸다. 지수가 망원경을 꺼내들고 안경을 닦기 시
작했다. 민영이 다시 한번 가리키려고 했지만 배는 금방 사라졌다.
"뭐야. 어디 있는데요?"
지수가 물었지만 민영은 고개를 저으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배 따위가 둥둥  떠다녀서
어쨌다는 건가 하는 생각이 막 들었기에. 배가 있거나 없거나 아무 쓸모없다. 밤바다라는 것
도 도대체 아무 쓸모없다.
쓸모없는 것들을 딱히 좋아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웬종일 나는 쓸모있어야 한
다고 말하려는 노력들을 보고 있는 것보다는 낫다. 그렇게 생각한다. 살아가고 있는  것들을
보고 있는 것보다는 낫다. 사라진 줄 알았던 마음에서 재같은 것이 흘러나온다. 욕구까지 연
결되지 못하는 감정. 이건 아첨이다. 허구헌날 뻔뻔한 증상만 일으키는 환자처럼. 민영은 담
배 한 가치를 꺼내들었다. 륜이 노려보았다. 민영은 물고만 있겠다는 신호를 보냈다.
창 틈으로 밤바다를 보고 있었다. 기름투성이 어둠이 장소를 못 가리고 아무데나 떠다녔다.
민영은 담배를 놓고 일어섰다. 요의를 느낀 터다.
객실 뒤편에 있는 화장실로 향하는데 반대쪽 객실의 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불쑥 튀어나온
다. 민영은 깜짝 놀랐다. 고야다.
촌스러운 체크 남방이 고야의 몸을 헐렁하게 감싸고 있었다.  민영이 묻는 듯한 얼굴로 고
야를 보는데 문득 고야의 얼굴  안에서 기운 하나가 눈에 띈다.  아, 그것은, 욕구뿐인 듯한
그 감정. 민영은 순간 몇 가지를 이해한다.
민영이 미소짓자 고야가 올려다본다. 키가 작은 어리둥절한 몸. 머리에 달린 그 눈으로  고
야는 참으로 어리석게 민영을 올려다본다.  아까 그 기운은 꼬리 잘린  용처럼 체면 떨어진
의심처럼 남아있을 뿐이다. 그나마 깊이 사라지면서 고야는 머리를 숙이고 민영에게 인사를
했다.
"안녕."
"그래."
"륜이들도 저기 있어?"
"응."
"그래, 그럼."
고야는 손을 흔들어 보이고 다시 반대쪽 객실로 통하는 문을 연다. 고야가 문을 닫고 사라
진 후에야 민영은 화장실에 들어갔다. 화장실에서는 퀴퀴한 냄새가 났다. 민영은 품을  뒤적
여서 담배 한가치를 꺼내들었다.
배가 선착장에 닿고 나서도 얼마쯤 시간이 지나서야 현과  륜은 민영을 찾기 시작했다. 민
영은 화장실에서 천천히 걸어나왔다. 청자켓 주머니에 양손을 밀어넣은 채였다. 륜이 입  끝
을 비틀어 말했다.
"뭐냐. 자위라도 했냐?"
"입심 하고는... 담배폈다, 왜."
"저런 더 죽일 놈."
출렁거리는 배에서 출렁거리는 선착장에 내려서 현은 끝내 한번  더 멀미를 했다. 륜이 그
모습을 멀뚱히 보고 있다가 깔깔대고  웃기 시작했다. 지수가 다가가서 등을  두드려주었다.
민영은 양손을 주머니에 넣고 입술로 담배를 오물짝거렸다.
  

    
배가 닿은 시간이 열한시 반이었다. 아침부터 등반을 하고  밤배를 탔던 애들은 금방 아무
데나 고꾸라져 잤다. 민영과 륜이 깔아놓은 이부자리였다.
륜이 먼저 이를 닦고 잠자리에 엎어졌다. 민영은 불을 꺼 주고  칫솔을 챙겨 방 밖으로 나
왔다. 이를 오분 넘게 닦으면서 창 밖을 보고 있었다. 핸드폰에 문자가 왔다.
자냐? 고야가 보낸 문장 전부다. 싫어, 라고 답을 보내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발 아래에 깔
린 바다를 보면서 계속 생각한다. 싫다면, 그리고 고야처럼 부모님이 없다면, 할 수 있는 일
은 모두 할 수 있다. 좋아한다면- 보다는 훨씬 낫다. 하나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 모든 쓸모
없는 것까지 싫어할 수 있다면.
그런 열정이 자신에게서는 고갈되어버린 것을 민영은 안다.  입안을 헹구고 들어와서 아까
입고 걸어놓은 청자켓 품을 뒤진다. 다섯 개비 남은  담배갑이 있다. 라이터도 있다. 라이터
가 가로등 빛을 받아 형광색으로 빛난다.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민영은 담배에 불을 붙
여 입에 문다. 민영은 무심코 반소매 옷의 어깨를 걷어올린다.
문이 열리고 륜이 기어나온다. "야, 냄새난단 말이야..."
"하나만 피울게."
"금방 잘 거지?"
"응."
륜은 그러려니 하고 도로 기어들어간다. 민영은 걷어붙였던 소매를 도로 내리고 잠시 담배
를 물고 있다. 이를 다시 닦아야한다는 생각을 하자 귀찮아진다. 손으로 적당히 접어 담배를
칙 꺼버린다. 핸드폰을 연다. 고야는 다시 문자를 보내지 않았다. 민영은 핸드폰과 담배갑과
라이터를 다시 청자켓 주머니에 넣어놓고 방으로 들어가 잠이 들었다.



누군가 자신의 맨 어깨를 만지는 꿈을 꾼 것 같았다. 그게  어머니가 아니길 숨이 콱콱 막
히도록 바라던 도중에 잠이 깨었다. 현이 자기 어깨를 짚고 일어나고 있었다.
"벌써 일어나?"
"그럼. 체크아웃 열시야. 짐 안 쌀거야?"
민영은 찌뿌둥하니 기지개를 켰다. 륜은 아직 뒹굴거리고 있었다. 륜을 현이랑 둘이서 발로
밀어 치우고 이불을 갰다.
서울로 올라가는 기차 안에서 민영은 또 담배가 고파졌다. "병이다, 병"  하고 내놓고 속살
거리는 륜을 뒤로하고 차간으로 나갔다.
자갈바닥이 드글드글 흘러가는 꼴이 제일 잘 보이는 곳에 앉아 담배를 찾다가 문득 핸드폰
을 꺼내보는데, 부재중 전화가 한통  있었다. 새벽 네시쯤에 고야로부터다.  이 녀석은 잠도
안 자나 생각하다가 핸드폰을 놓쳤다. 애기 손바닥만한 은색 기기가 굴러떨어진다. 자갈  바
닥에 한번 튕겨서 액정이 깨지는 것까지는 본 것 같다.  실없이 뭐라 중얼거릴 기분도 나지
않아서 말없이 담배나 피웠다. 라이터 연료가 거의 다 되어간다. 기차가 수많은 침묵처럼 덜
그덕거렸다.



                                                        *


"너 며칠 남았냐?"
"9월까지는 돌아가야지요."
하고 망설이는 듯 하더니 지수는 덧붙였다.
"미국은 학기 시작이니까."
지수가 미국에 돌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김에 다시 한번 만나기로 했다. 그들은 지수에
게 밥을 사 주기로 했다. 그들은 과외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고 지수는 수입이 없다.  지수는
핸드폰도 없다. 집에 전화를 해도 받지 않는다. 음성을 남겨두었다.
지수의 집에 다같이 가 본 적이 있다. 컴퓨터가 한 대 있었다.
만으로 열 여덟살짜리 지수는 보스턴으로 간다. 그 근처에 지수가 다니는 공대가 있다.  지
수는 물리학을 전공한다. 지수가 물리학을 좋아하는지는, 잘 모른다.
그들은 결국 지수의 집에서 만나기로 했다. 지수의 집은 넓지도 볼만한 것이 있지도  않다.
어쨌거나 그들은 지수의 집에 갔고 방 하나만한 공간에 세  개의 몸을 올려놓았다. 방이 꽉
찼다.
셋 사이에만 술이 몇 순배 돌고 현이 말했다.  "나도 어릴 때는 바이올린 전공하고 싶었는
데."
"그런데 왜 못했어?"
"여기, 손목에 혹 같은 게 생기길래..."
륜이 또 웃으면서 말한다. "나는 작가하려고 했었어."
"언제까지?"
"원서 내기 직전까지. 그러다가 아버지가 아무래도 돈벌이 생각을 하래서..."
"너답다."
민영은 가만히 있다. 이 쓸데없는 맞장구와 쓸데없는 대화와 쓸데없는 술잔을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할지 모르겠다. 민영은 성격대로 슬슬 눈치만 본다. 지수의 눈치, 다른 애들의  눈치.
지수가 가만히 보고 있다가 마침내 말한다.
"내가 앞에 있으면 그런 얘기를 하죠. 바이올린이라든가 예전에는, 이라든가. 바이올린은 예
쁘죠. 그래서 뭐 어쨌다는 거예요. 다들 술 안 좋아하는 거 알아요. 꼭 내가 앞에 있으면 술
을 마셔. 그래서 뭐 어쨌다는 거예요."
지수가 위태로울 정도로 오만하게 웃어보이며 말한다.
"정작 나는 술을 마시지 못해도 이런 얘기 할 수 있어요."
"이런 얘기? 어떤 얘기?"
"내가 내 논문 얘기 하고 있어요? 내가 이번 학기 장학금 얘기라도 하고 있어요? 뭐  말하
자면 이번 학기 장학금 못 받았지만. 내가 그런 얘기 하고 있어요? 나는 그런 얘기 하고 있
지 않아요. 하지만 정말로 말을 하고 있다고요. 술 같은 거 입에 대지 않고. 더 나보다 열등
해지고 싶으면 계속 마시든지."
현이 지그시 술잔을 내려놓으면서 웃었다. 민영은 슬슬 말려야 하지 않나 생각했다. 그  전
에 현이 먼저 제법 매섭게 쏜다.
"어린 나이에 뭐가 잘 풀리면 다 저렇게되나. 완전히 망상증이야. 지 잘나서 미치는 병에라
도 걸렸나."
"야, 현아."
"그렇잖아!"
민영이 말리자 현은 더 기세 등등해진다. 그러나 현은 모른다, 민영이 왜 현을 말리는지를,
가르쳐주지 않은 소리까지 다 내뱉고 있는 현을 속타게 쳐다보는지를. 지수가 씁쓸한 듯 오
만한 듯 얕보는 웃음을 짓고 내려다본다. 현도 지수의 얼굴을 눈치채고는 낯이 확 붉어져서
는 술잔을 도로 꽉 쥔다. 한 모금 넘기면서 시간을 벌 생각이다. 그새 륜이 찬찬히 말한다.
"그래, 지수야. 그럴 수도 있잖아. 하지만 안 그럴 수도 있고. 나는,  분명히 말하건데, 아무
생각도 없었거든? 네 기분이 이런 것 때문에 상해왔다면 미안하고. 그러면 말해줘. 그때그때
고칠 테니까. 하지만 방금 네 말은 심했다."
"고쳐서 되는 일도 기분의 문제도 아니예요. 당신은 아무 생각이 없다니 더 심한거야. 그게
내가 제일... 아무튼, 나는 당신들이 나에 대해  어떤지 알아요. 내가 알고싶어하고 느끼고싶
어하는 것만큼은 정확히 알아요."
"어떻게 알아?"
륜이 다시 차분하게 묻는다.
"전혀 사랑받지 못하고 있으니까 알겠지."
고야가 대답하면서 합석한다. 고야, 못생긴  고야. 헐렁한 체크 남방을 깨끗이  빨아입었다.
여자처럼 화장해서 예뻐질 수도 없는 고야, 라고 민영은 생각했다. 순간 생각이 이상하게 선
명해지면서 머릿속을 휘감았다.
지수가 조금 상기되고 슬픈 얼굴을  하는 것을 민영은 곁눈질로  보았다. 지수가 비스듬히
흘러내려와서 자리에 앉았다. 륜과 고야가  조금씩 자리를 내어준다. 민영은 지수와  고야의
옆얼굴을 번갈아본다. 지수는 볼과 콧날이 부드럽고, 아이같은 하늘색 눈에 어른같은 속눈썹
을 드리고 있다. 지수는 고야의 옆얼굴을 보려는 듯 한쪽으로 고개를 움직이다가 민영과 눈
이 마주친다.
지수는 한참동안 민영의 눈을 들여다본다. 그렇다기보다 둘이 자석처럼 마주쳐서는 풀려날
줄을 모른다. 지수는 눈을 조금 크게 뜨고 있다. 민영은 자신이 차분하게 눈을 뜨고  있다고
생각한다. 다 이해하듯이 다시 한번 그렇게 웃어야할까,  그날 객실에서 고야에게처럼, 민영
은 생각하지만 싫다. 마음이 갑자기 부글부글 끓어오르면서 정말로 지긋지긋해졌다.  민영은
성난 개처럼 눈을 뜨고 지수를 쳐다보았다. 그럴 수 있었던 것은 몇 년만에 처음이였다.  지
수는 눈에 띄게 움찔하며 한참 더 민영을 보았다. 민영이  눈을 돌리자 비로소 지수도 눈을
돌렸다.
고야는 그새 륜과 현과 내놓고 얘기하고 있었다. 뭐, 어린애란 건 사랑받아야 하는거야. 그
리고 사랑받지 못하면 살이 에이는 것처럼 아프다잖아.  속속들이 아프다구. 정말이야, 육체
적으로 아프다잖아. 지수는 그게 제일 무서운거야. 그런 게 운명같은 걸로 결정되어 있을까
봐. 모두들 역할 수행자에 불과한거지.
"그럼 우린 어떻게 해야 되는데?"
현이 어줍잖게, 아직도 조금 싸늘해져있는 티를 내려 애쓰며 물었다. 고야가 말했다.
"아무것도 안 해도 돼."
"그런게 말이 되냐."
륜이 말했다. 고야가 과자봉지를 뜯으면서 말을 받았다.
"너희들은 어차피 바보야. 그걸로 됐어."
"그럼 이야기는 어디로 흘러가는데."
"너희들은 바보고, 지수는 평생 사랑받지 못해."
민영은 지수의 눈이 반짝 생기를 띄는 것을 보면서 기분이 지독스레 나빠졌다.
그러나 그 눈이 영 먼 곳, 공기를 통한 다른 곳을 보고 있어서 민영은 안도했다. 지수는 손
끝 하나 움직이지 않았다. 지수는 물리학을 좋아하는 것이 틀림없다.



고야. 못생긴 고야. 입술은 색깔이 하나도 없고 눈은 눈꺼풀에 밀려 아래로 처져버렸다. 사
지는 날씬한데 배에만 쫀쫀하게 살이 붙었다. 그 아랫배와 눅눅하게 뚫린 배꼽을 지금 민영
은 어루만지고 있었다. 네 맨 어깨를 보려는데에 연인이 되는  게 제일 쉽다면 연인이 되어
도 상관없다고, 고야가 아까 말했기 때문이다. 민영은 조금 눈을 감고 있다가 그 제안을  받
아들였다.
성기를 빳빳이 세워서 이 밑의 어딘가에 집어넣고 무언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자 민영은
귀찮아졌다. 그런 게 아닐거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고야가 알아서 해 주겠지 생각한다. 민영
은 어느새 침대머리에 기대어 가만히 앉아있다. 고야가 민영의  청자켓을 벗기고 어깨에 손
을 댄다. 간지럽고 아프고 쓰린 느낌이 점점 강해지면서 옷이 벗겨져나간다. 런닝만 걸친 몸
에 고야가 입술을 댄다. 어깨가 아프다. 점점 더 아프다. 타고 있고, 얼고 있고, 하얗게 표백
되고 있다. 순결할 정도로 고통스러워지면서 민영은 견딜 수 없어서 고야를 안는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허탈해지고, 고야의 못생긴 얼굴이 그저 못생겨보인다. 민영은  저
것이 고야의 얼굴이 아니라고 생각하려 애쓴다. 나는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거니까. 어쨌거나
몸에서 고통이 빠져나간다. 벼락이 쳐서 날 죽여줬으면 좋겠다고 민영은 생각한다. 저  못생
긴 얼굴도 물론 내가 죽기 전에 태워버려야 한다.



잠에서 깨어나서 민영은 자신의 성기가 불끈 서 있음을  알았다. 가라앉을 때 까지 기다릴
수 없을만한 분명한 욕구였다. 화장실에 들어가서 해결해보려 했지만 누구를 떠올리고 싶은
건지 얼른 알 수가 없어서 곤란해졌다. 그동안 성기는 대강 식어버렸기 때문에 민영은 손을
씻고 나왔다.



                                                            *


누군가를 떠올려야 한다는 것부터가 이상하다.
어쨌거나 륜과 현과 영화를 보기로 한 날이다. 16관짜리 영화관에서 아무거나 하나 꼽아서
봤는데, 표를 사는데 삼십분을 기다려야 했다.
영화는 재미가 없었다. 영화가 얼마나 재미없었는지 얘기하기  위해서 현은 조용하고 분위
기있는 스파게티 집에 가야만 했고, 영화의 재미없음을 보상하기  위해 스파게티와 피자 하
나를 먹어치워야만 했고, 덕분에 민영은 카드를 긁어야했고, 모두들 입으로 떠들면서 한시간
을 소비해야 했다. 민영은 간혹 시선을  먼 데로 돌리거나 시계를 보면서 고야가  있었으면,
생각했곤 했다.
그건 이상한 일이었다. 그런 꿈을 꾸고 성기가 식어버린 이후 고야를 생각해본 적이  없다.
되새기자니 마음 밑에서 거칠거칠한 혐오가 만져졌다. 호감에서 어느새 갑작스레 혐오로 바
뀌어버린 것이다.
꿈일 뿐인데 마음이 조절되지 않는다. 그 꿈에 대한 기억은 선명하다. 조금씩 허구가  기억
으로 행세하듯이. 민영은 진저리를 치듯 머리를 흔든다. 현과 륜이 쳐다본다.
"갑자기 왜 그래?"
"아니..." 하다가 민영은 륜을 본다. 륜이 특유의 묘한 웃음을 지으며 말한다.
"자못..."
그리고 말을 끊는다. 민영이 기다리지 않고 묻는다.
"자못?"
"아니 뭐, 자못... 흔든다고."
해놓고는 깔깔대고 웃는다. 민영은 그 자못... 하는 단어에 숨겨진 순진한 비웃음에 대해 슬
그머니 짜증이 난다. 륜은 언제나 그렇다.
현이 잠깐 화장실에 간다고 나선다. 륜과 둘이 남았다.
"야, 민영아."
"왜."
륜이 자신의 이름을 불러가며 말을 거는 건 흔한  일은 아니다. 민영은 불려나온 사람처럼
고개를 들고 륜을 보았다.
"지수 괜찮겠어? 고야도 그렇고."
"뭐가?"
"지수 똑똑하니까 알아서 잘 할 줄 알았는데 저번에도 그렇고, 많이 외로운가봐? 너 걔 미
국에 있을 때 편지같은 건 좀 보내고 그랬냐? 네 성격에 그랬을 리가 없지?"
"어. 앞으로 신경쓰지 뭐."
"고야도 그래. 지금 많이 불안하지 않겠어? 할아버지 돌아가시면 장손은 따로 있으니까, 받
을 몫도 없고, 받아봤자 제대로 관리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고. 걔 성격이 강하니까 멀쩡해
보이기는 하지만 말이야. 걘 너무 둔한 것 같아서 반대로 또 불안하고."
민영은 손을 내저었다. "그만 해. 네 얘기도 아닌 거. 네 얘기나 좀 해 봐."
귀찮아서 그렇게 말했던 것도 그렇게 말해놓고 바로 륜의 눈을 들여다보았던 것도 순전히
우연이었다. 륜의 눈이라든가 얼굴이 그  쯤 위치에 있는 줄 알았다면  그렇게 턱을 치들지
않았을거다. 턱을 들면서 민영은 륜과 눈이  마주쳤고, 륜이 놀란 듯이 눈동자를 떠는  것을
보았고, 이런 하고 정신을 차렸을 때 즈음에는 륜의 얼굴에  슬프고 기쁜 듯한 기색이 번지
는 것을 보았다.
민영은 뜨끔했지만 모른 척 륜을 계속 바라보았다, 마치  정말로 륜 자신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는 듯이. 륜이 입을 열었다.
"난 뭐, 요즘..."
민영이 턱을 괴고 앉아있는 사이 충분한 시간이 흘렀다. 륜은 입을 다물고 픽 웃었다.
"됐네. 너한테 뭔 소릴 해."
아 그래, 하고 민영은 오븐 스파게티에 얹힌 치즈를 파헤치기 시작했다. 포크로 치즈를  돌
돌 돌리는데 갑자기 고야가 번득 나타나서 그 입술로 병신, 하고 말했다. 민영을 향한  건지
아닌건지 분명치 않은 말이었다. 당연하지,  그 꿈에서나 마찬가지로 이번엔 백일몽  속에서
튀어나온 건데 알 게 뭐겠는가. 하지만 그 병신 소릴 듣고나서 느끼자니 륜의 너한테 뭔 소
릴 하냐는 말이 억울한 모멸처럼 느껴졌다. 민영은 이건 자신의 착각일 수도 있다고 인정하면
서도, 륜과 자신은 잘 안 맞는 게 아닐까 하고 잠시 생각해보았다.
현이 돌아왔다. 셋은 오븐스파게티까지를 다  먹어치웠다. 현이 소다를 마시면서  테이블을
샅샅이 훑어보고 있길래 물었다.
"고야가 잘 생긴 편인가?"
"응."
민영은 어리둥절해 있다가 깜짝 놀랐다. 륜도 고개를 끄덕거렸다.
"정말?"
"그렇게 잘생긴 건 아니지만 분위기 있잖아. 눈도 쭉 째진 게 중국애같지 않냐?"
"중국애들 사실은 눈 커. 일본 사무라이 극의 조연이라고 해 주지."
"그것도 좀 이상한데..."
"지수. 지수는 어때?"
민영은 급히 물었다. 륜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걘 진짜 이쁘게 생겼지."
"그럼 그럼."
"디즈니에서 만든 호모영화에 리얼 재패니스 버진 하룻밤 이백 달러로 나올 놈."
"바로 그거야."
민영은 하, 하고 체한 듯이 맞장구치다가, 왠지 뒤로 나가떨어졌다.



                                                               *



힘이 들어서 나가떨어진 것이다. 힘이 들었고 아래쪽에는 힘이 들어갔다. 가슴  위쪽에다가
는 추 하나를 매단 것처럼  쿡쿡 당기면서도 가슴 아래쪽에는 저절로  피가 몰려들었다. 갈
곳을 찾는 정자들처럼.
정자들이라는 낱말에 마음이 편해졌다. 그날 민영은 지수를 찾아갔다. 지수는 방에서 뭘 하
고 있었던지 늦게사 문을 열어주었다. 어린 팔과 어린 다리를 드러내놓고 반소매를 입고 있
었다. 민영은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나누다가 지수의 어깨에 손을 댔다. 지수는 가만히  있었
고, 그 어깨와 손이 맞닿은 틈새에 의미를 일깨우듯이  가만히 쳐다보았고, 눈을 감았다. 누
군가를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사무라이 영화에 나오는 사람을 말이다. 민영은 몸을  한차례
부르르 떨었다. 민영도 같은 사람을 생각하고 있다.
민영은 지수를 곱게 눕혀놓고 곱게 안았다. 안으로 부드럽게 밀어넣고 될 수 있는 한 부드
러운 섹스를 했다. 그 얼굴, 그 배, 그 성기. 지수를 흔들면서 민영은 비로소  끊임없이 고야
의 얼굴과 배에 붙은 살점을, 창백한 입술과 입 속을 떠올렸다. 민영은 성공적으로 분출했고
지수는 반쯤 고통스런 얼굴로 민영을 꽉 안았다. 남자라서 그 팔은 힘이 셌다.



안겨있느라 답답해서 민영은 잠에서 깨어났다. 몽정을 마친 참이였다. 정액이 팬티  안감에
우악스럽게 엉겨 있었다.
선뜻 고야가 다시 머릿속에 나타나 병신, 지껄일 것 같기도 했다. 사정도 했겠다, 지금이라
면 시끄러워! 하고 쫓아낼 수 있다. 그렇게 농담처럼, 혹은 생각해놓고서야 농담이였다고 우
기면서, 민영은 혼란스러워져서 끝까지 우기기로 했다. 즉, 덜깬 정신으로 낄낄 웃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베개에 코를 박고 자고  있는 중이였는데, 전화벨도 계속 울리고  있었다.
민영은 기다시피해서 전화를 받았다. 민영에게 아침 시간은 최악이다.
"민영씨?"
"응. 지수냐." 민영은 뜨끔해서 얼른 말을 받았다.
"고야가 죽었어요."
지수는 단숨에 말했다. 지수는 민영을 대단히 잘 알고 있다. 오늘의 꿈은 딱히 민영의 내부
가 썩어있기 때문만은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내일 십팔시 이후에 삼성병원 영안실로 오래요. 검은 옷 입고와야 해요."
"자살이지?"
"네."
넌지시 확신하면서 물었고 지수도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민영이 코 끝에 남은 하품을
애써 삼키면서 알았다고 말했더니만 전화가 끊어졌다. 민영은 누워서 뒤척거리다가 결국 일
어나서 세수도 하지 않은 채 한참동안 먼 창밖을 바보았다.

    

                                                             *


영안실, 넷이 만났다. 륜이 속살속살 이야기했다.
"죽을 거라고 생각했어. 그래서인지 솔직히 생각보다 쇼크는 없어. 서른 전에는  죽을 거라
고 생각했고, 글쎄, 잘 모르겠네."
현이 이야기했다.
"응. 죽을 거라고 생각했어. 언젠가는, 그러니까 어느 때라도. 한 십년 지나봐야  진짜로 죽
었다는 걸 실감할 수 있겠지만, 지금은, 그냥 모르겠어."
지수가 이야기했다.
"끝났다고 생각했어요. 7월에 민영씨 여행갔을 때 우리 넷 끼리만 만난 적 있어요. 내가 있
었고 - 아무튼 또 술  마시고 있었으니까. 고야는 술 안  하잖아요. 그런데 그 날 스리슬쩍
한잔 들면서. 뭐라고 하더라. 세상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고. 광기를 품으면 자신의 정당
성을 의심하는 사람과 광기를 품으면 세계의 정당성을 의심하는  사람이 있다. 전자는 광기
를 실수로 본다. 분명히 결론적으로 닿은 것인데 실수로  본다. 난 그놈들이 싫다, 진저리나
게 싫다 - 고야가 그놈들이라고 진지하게 말하는 것도 처음 봤고, 싫다니, 진저리나게 싫다
니.
거기서 현이 화를 내거나 륜이 비웃어줘야 했는데 아무도 해 주지 않았어. 둘 다 놀랐거든.
고야가 미쳤나하고. 고야는 고개를 들고 현과 륜을 번갈아서 봤어. 분명히 그렇게 보고 있었
다구요. 무서운 표정을 하고.
그새 고야는 술잔을 내려놓고 물을 조금 마시더라구요. 그렇게 시작해서 물을 굉장히 많이
마셨어요. 막을 잃은 후에 샤워하듯이 그렇게. 난 실은 고야가 우는 걸 봤어요. 눈물을 흘리
다가 다 끝났다는 듯이 천천히 눈을 닫는 것을 봤어요. 나도 고야는 이제 죽는 수밖에 없겠
구나 생각했지요."
지수는 입을 다물었다. 민영이 천천히 말했다.
"그래서, 어쩌라고?"
입술을 짓눌러가며 말했기 때문에 다른 셋은 눈을 빠듯하게 뜨고 이쪽을 쳐다보았다.
"넌 또 왜 그래. 너도 죽을거냐?"
"내가 그럴 수 있을 것 같냐."
"없겠지."
륜이 말했다. 민영이 거의 아무 생각없이 내뱉았다. 닥쳐. 민영은 주머니에 두었던 칼을 꺼
내서 어깨를 잘랐다. 날이 깊이 파고들면서 무지하게 아팠다. 현이 쳐다보았다. 륜도 지수도
쳐다보았다. 그 누구의 눈도 민영은 바라보려 하지 않았다. 민영은 눈을 천천히 내리감았다.
모든 것이 끝났다니, 거짓말하지 마라. 가장 썩어빠진 거짓말을. 사람이 눈을 내리감을 때라
면 죽어도 아무것도 끝나지 않을 때지. 민영은 손뼉을 딱 쳐서 문을 딱 닫고 싶어졌다. 륜이
민영의 손에서 칼을 채어가려 했다. 민영은  거의 본능적인 분노를 느꼈다. 그건 내  발톱이
다. 그건 내 손톱이다. 내 눈이다. 내 다리다. 내 입이다. 내 창자다. 십이지장부터  위장까지
모두 다. 아니 대장 항문까지, 내 똥덩어리로 가득 찬  부분까지도 모두 다. 민영은 부러 목
숨을 걸고 그렇게 주장했다. 륜은 주춤 물러나 칼을 내어주면서 중얼거렸다.
"미친 자식. 마음대로 해."
민영은 다시 한번 어깨를 잘랐다. 몇십  몇백 번이나 담뱃불로 지져대곤 했던,  좋아하지도
않던 담배맛을 열기로만 눌러 퍼부었던, 왼쪽 어깨를 몇 번이나 잘랐다. 화상 자국을 지우고
싶다는 생각이고 뭐고가 있었던 건  아니다. 그러느라고 머릿속이 캄캄해져  있었는데 문득
고야의 얼굴이 파고들었다. 몇몇 꿈들도 파고들었다.
그러니까, 륜에게 닥치라고 말하는 대신 고야의 이름을 불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좋아해,
따위로 끝없이 중얼거렸다면. 사랑했다고 말했다면. 이렇듯 쉬운 말로 네 입도 내 입도 봉해
버렸다면.
륜이 다시 때를 보아 칼을 채어갔다. 민영은 이번에는 견디지 못하고 칼을 내어주면서,  털
썩 고꾸라졌다.


                                                             *


서른 세 바늘을 꿰메고 붕대를 붙였다. 집에서 누워서 책이나 보고 있는데 벨이 울리고 륜
이 서 있었다. 륜은 케익 두 조각을 싸왔다.
륜이 병문안이나 올 녀석이 아닌데, 생각하면서 불러들였더니 대뜸 앉아서 말한다.
"고야 대학 안 다녔던 거 알아?"
"그래?"
"고등학교 이학년때 중퇴했다는군."
"몇년간 뭐 했대 그럼?"
"알아서 했겠지."
민영은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륜이 사온 케익을 한숟갈 떠먹었다. 륜이 빙긋 웃었다.
"너, 실망했지. 고야가 대학 안 들어간 거. 하릴없이 지낸 거."
"그런 것 같아."
민영은 솔직해지려고 노력하면서 대답했다.
"조금 덜 좋아하게까지 되어버린 거야?"
"언제는 좋아했었나?"
륜은 빙긋 웃다가 순식간에 표정을 굳혔다. 그녀는 그저 진지하게 말했다.
"더러운 놈. 난 네 녀석이 싫어."
그때 민영은 자신의 표정이 륜의 그때 그것과 같았으리라고 확신했다. 수많은 말하고 싶은
것들이 머릿속을 휘감았다가 나무 둥치를 껴안고 쓰러졌다. 륜이  물끄러미 눈을 뜨고 이쪽
을 보고 있었다.
륜이 뚜벅뚜벅 걸어나갔다. 민영은 몸과 마음에 남은 간절함을 모두 끌어올려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지만 말은 끝까지 나와주지 않았다. 왜 살고있지?  - 말은 언제나 발을 멈춘다. 내
리감은 눈의 안쪽, 새하얗게 빛나는 숲길 위에서.


----------------------------------------------------------------------------------

뭐라고 주절주절 하는데 사건이랄 만한 건 없는-_- 전형적인 금계왕표 텍스트(...)
..지만 뭐 어쩌겠어요. 천성이겠거니 하고...(...;;) 언젠간 사건투성이도 써 보고 싶어-_-;;;
댓글 0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추천 수
공지 2024년 독자우수단편 심사위원 공고 mirror 2024.02.26 1
공지 단편 ★(필독) 독자단편우수작 심사방식 변경 공지★5 mirror 2015.12.18 1
공지 독자 우수 단편 선정 규정 (3기 심사단 선정)4 mirror 2009.07.01 3
236 단편 <font color="blue"><b>뱀파이어 앤솔러지에 들어갈 단편 공모합니다.</b></font> mirror 2006.01.19 0
235 단편 잃어버린 낙원2 청람 2006.01.24 0
234 단편 호문클러스3 리안 2006.01.24 0
233 단편 인디언 유령2 청람 2006.01.22 0
232 단편 어느 그믐2 미소짓는독사 2006.01.19 0
231 단편 괴물 청람 2006.01.15 0
230 단편 플라스틱 프린세스11 유서하 2006.01.11 0
229 단편 구렁이2 두꺼비 2006.01.10 0
228 단편 raison d'etre2 가명 2006.01.03 0
227 단편 관찰자2 땅콩샌드 2005.12.23 0
226 단편 사막으로6 땅콩샌드 2005.12.21 0
225 단편 자살방조를 거부하기1 황당무계 2005.12.20 0
224 단편 달걀2 soulskate 2005.12.17 0
223 단편 세상에 남겨진 사람들2 roland 2005.12.16 0
222 단편 유리병 속의 정체1 뭉그리 2005.12.14 0
221 단편 베타테스터2 날개 2005.12.13 0
220 단편 악어 생포하기4 황당무계 2005.12.12 0
219 단편 로망스2 제이 2005.12.08 0
218 단편 가면3 날개 2005.12.01 0
217 단편 어느 한 속어의 유래2 azuretears 2005.11.27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