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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이계인(異界人)

2003.09.05 16:2409.05

그가 정신병원에서 첫 외박을 나온 것은 입원한지 두달하고도 열흘만
의 일이었다. 병원을 나서는 그의 눈앞엔 뜨거운 열기 속에서 사람과
자동차가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는 그의 앞쪽에서 걸어가는 어머
니의 뒷모습을 쫓아 발걸음을 옮겼다. 왠지 두달 열흘만에 보는 바깥
세상은 너무나 현실감을 느낄 수 없었고 그는 자기가 걷는 이 거리의
풍경이 몽땅 허구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마치 꿈속을 걷는 듯한 기분
이었다. 지하철 역으로 들어가 집으로 가는 지하철을 탔을 때도 마
찬가지였다. 내 주위의 사람들. 그리고 그들의 말소리가 모두 딴 세
상의 이야기처럼 들렸다.

'이런 증상은 입원하기 전에도 없었던 것 같은데?'

외박을 나올 수 있었던 것은 증상이 호전되었다는 뜻일텐데 왜 이런
이상한 느낌을 받게 되는 건지 그는 알 수 없었다. 지하철에서 내려
그의 집에 도착해서도 그런 느낌은 여전했다. 자기가 있는 곳이 자기
집이라고 느껴지지 않았고 전혀 나와 상관없는 곳인 것 같았다. 그
의 아버지를 비롯한 가족들은 그를 따뜻하게 맞아 주었으나 그는 그
들에게서  '실재감' 혹은 '존재감'을 느낄 수가 없었기에 여전히 꿈
속에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마치 자기 혼자만 실재하는 것 같은
느낌. 자기를 제외한 모든 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는 느낌.
그 느낌이 계속되자 그는 피곤함을 느꼈다. 그는 자기 방으로 들어
가 좀 쉬겠다고 말하고 자기 방이라고 기억되는 그 곳으로 들어가
누웠다. 그리고 한시간쯤 흘렀을 때-그의 손목시계에 의하면- 그는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갔다. 좀 더 자신의 증상을 확인해 보고 싶어
져서 였다.

  그는 자기가 10년 이상 살아온 동네를 걷기 시작했다. 동네의 풍경
은 기억속에서 무척 익숙한 것이었다. 그러나 역시 그는 그 익숙한
풍경들에서 마저 '실재감'을 느끼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는

'사실 내가 실재라고 믿던 세상 그 자체가 허구였던 것은 아닐까?
허구가 아닌 세상은 없었던 게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이 곳은 허구고 내가 정신병원이라고 부른 그 안쪽
도 허구인 것이다. 내가 이 곳이 허구임을 느낄 수 있게 된 것은 두달
열흘동안 격리되어 다른 사람을 가질 수 없는 감각이 깨어났기 때
문인 것인지도 모른다. 결국 이 세상 자체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이 세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곧 나 역시도
존재하지 않는 다는 뜻이다. 오직 환상과 허구만이 존재할 뿐인 거야.
다른 것은 없어!' 그는 이런 자신의 생각에 골똘히 빠져들었다. 그리고
어느새 그는 자신이 발을 딛고 있는 이 세계가 존재하지 않는 곳이라
고 굳게 믿고 있었다. 아니 애초에 존재하는 것이라곤 없었다고 믿고
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는 그런 자신의 생각을 확신하며 집으
로 들어가 대뜸 마루에 앉아있는 그의 어머니를 향해 외쳤다.

"엄마! 난 알았어! 이 세계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거야! 모든
것이 그저 환상일 뿐이었어. 나도 엄마도 우리 가족 모두 아니 세
상 사람 모두가 원래 존재하지 않았던 거야! 우리는 모두 꿈일 뿐
이었어. 난 그걸 이제 알았어!"

  그의 어머니는 그의 뜻밖의 말을 들으면서 놀라지 않고 담담한 표
정을 유지하였다. 그리고 차분히 그의 말이 끝나길 기다렸다가 그에
게 이렇게 한마디를 던졌다.



"넌.... 아직도 내가 니 엄마로 보이니?"



그리고 그 말을 듣는 순간 그는 자기 눈앞에 거대한 반인반수처럼
보이는 무언가가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 괴물은 바로 그의 엄마
가 있던 그 자리에 존재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괴
물을 향해 소리를 지르며 정신을 잃었다.


***

그가 정신을 차렸을 때, 그는 집이 아닌 정신병원 침대에 누워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런 그를 유심히 쳐다보고 있는 누군가도
발견할 수 있었다. 바로 그의 담당 의사 선생님이셨다. 그 담당의사
선생님은 그가 정신을 차린 것을 확인하고 입을 열었다.

"이제 좀 정신이 드세요? 어머님 말로는 어머님과  얘기하던 도중
갑자기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고 하더군요. 가족들이 쓰러진 영수씨
를 차에 태워 이곳으로 다시 데리고 왔답니다. 음..그런데 어머님
말씀으론 쓰러지기 전에 뭔가에 크게 놀란듯 소리를 질렀다고 하던
데, 무엇에 그렇게 놀라신 건지 말씀해 주실 수 있을까요? 아니면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대한 전체적인 정황을 얘기해 주셔도 상관
없습니다."

"저.. 저는 괴물을 보았습니다."

입을 연 그-영수는 괴물을 보았다는 이야기부터 시작하여 그 전
에 자기가 한 말과 자기가 했던 생각들을 모두 털어놓았다. 그리고
바깥에서 너무나 '실재감'을 느끼지 못했으며 지금은 병원인데도
이 병원과 지금 자신과 얘기하는 의사 선생님도 예전과 달리 왠지
존재하지 않는 듯 느껴진다는 이야기까지 털어 놓았다. 의사선생님
은 그런 영수의 말을 처음부터 끝까지 고개를 끄덕이며 주의 깊게
들었고 모든 이야기를 듣고 나서 알 수 없는 웃음을 보이고는 영수
에게서 등을 돌린 채로 입을 열었다.

"영수씨, 저 창밖으로 뭐가 보이는지 한 번 보고 말해주시겠어요?"

"창밖이요?"

"네, 창밖을 내다보고 뭐가 보이는지 말해주시면 됩니다."

"네..."

  영수는 침대에서 일어나 창문쪽으로 다가갔다. 예전에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보이던 창밖 풍경이라야 그냥 뻔한 고층건물과
사람들, 자동차와 주차장 정도였기에 뭐가 더 있을까 싶었다. 그
런데 막상 창 밖을 내다 본 순간 그는 다시 한번 자신이 꿈속에 있
는 게 아닌가 하고 생각해야만 했다. 그곳엔 자동차도, 사람도,
건물도 존재하지 않았고 커다란 벌레 비슷 한 것들이 움직이고
동물인간이나 곤충인간이라고 해야 할 듯한 것들이 그 벌레들을
타고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고층건물이 있던 자리엔  너무나 커
다란 나무나 버섯같이 보이는 것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하늘은 푸르
지 않고 핑크빛을 띄었으며 구름이 보이긴 했는데, 그 구름 사이로
커다란 용이나 물고기 같은 것이 멀리서 날아다니고 있었다.
그는 이 광경에 대해 대체 뭐라 해야 할 지 알 수 없었다. 그저
너무 놀라 '실재감'과 '비실재감'에 대해 생각할 틈도 없이 펼쳐진
광경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리고 그런 영수의 어깨 위로 의사 선생
님의 손이 올려졌다. 몹시도 까끌까끌한 느낌을 주는 그런 손이었
다.

"어떻습니까 영수씨. 지금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 대해 어떤 느낌
을 받죠? 역시 실재하지 않는 것 같나요? 허구이고 꿈속인 것 같나
요? 한 번 말해보세요. 영수씨."

  "아, 솔직히 말해서 전 지금 보이는 광경들에 대해선 전혀 그런
느낌을 받지 못하겠습니다. 근데 의사 선생님에게는 지금 창 밖
의 풍경이 어떻게 보이시는 건가요? 저한테 어떻게 보이는지 아시
고 그렇게 물으시는 겁니까?"

  "네, 영수씨. 저는 영수씨가 무엇을 보고 있는지 정확히 알고 있
습니다. 여기엔 고층건물이나 자동차같은 것은 전혀 없고 커다란
버섯이나 나무와 하늘을 나는 거대한 물고기 같은 것들만 있지요.
그렇지 않나요?"

  "그.. 그렇다면 우리 둘 다 미친 건가요? 아님 지금까지 제가 알던
세상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고 이 세상이 진짜 세상이란 말인가요?
아, 그렇다면 저만 모르고 다른 모든 사람들이 다 알고 있었던 거군
요! 진짜 세상은 이런 모습이라는 걸. 저는 그것도 모르고.."

"그렇지 않습니다. 영수씨. 그건 영수씨가 생각하는 것과 전혀 다릅
니다. 아,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 지 모르겠군요. 일단 뒤를 돌아 저
를 보세요.(영수의 눈엔 거대한 사마귀 같은 것이 들어왔다.)하하 그
렇게 놀라실 필요는 없습니다. 전 영수씨를 해치지 않아요. 영수씨,
이곳은 사실 영수씨가 말하는 정신병원도 아닙니다. 그러나 병원이라
고 할 수는 있습니다. 무슨 병원이냐구요? 이곳은 영수씨의 세계에서
쓰는 말로 말해, '계간이동증후군' 이라고 할 수 있는 증상을 보이는
분들의 치료를 위해 만들어진 곳입니다. 언제부턴가 우리가 사는 세
계엔 이계에서 방문하는 분들이 늘어나 그 수가 눈에 띌 정도로 증가
했답니다. 그런데 그렇게 방문하는 분들 중에,  계간이동에 대한 사
전지식도 없는 분들이 우연히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우리 세계를
방문하게 되었다가 극심한 정신적 충격을 받고 특이한 증상을 보이
는 사례 역시 눈에 띄게 나타나게 된 것이죠. 우리는 그런 증상을
보이는 분들을 치료를 해서 정상적인 의식으로 돌아오게 해줘야 한
다는 데 의견을 같이 했고 그래서 이런 장소를 마련했고 오랫동안
많은 분들을 치료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비단 그분들에게만 도움이
되었던 것이 아니라  우리들로서도 이계인을 이해하는 데 있어
큰 도움이 되어왔던 것이죠. 영수씨같은 경우 그 증상이 무척 심
각한 상태였습니다. 영수씨는 자의가 아닌 계간이동을 통해 처음
우리 세계에 온 뒤 극심한 정신적 충격을 받고는 눈앞에 보이는 것
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는 증상을 보였습니다. 그리고 마치 자신
이 자신이 온 세계에 그대로 살고 있는 양 말하고 보고 행동했던
것이죠. 우리는 오랜 진료끝에 영수씨가 바깥출입을 할 때가 되었
다고 판단했고 결과적으로 영수씨의 병이 낫는데 그것이 도움이 된
것 같습니다. 영수씨의 병은 이제 나았고 우리는 좀 있다가 영수씨
에게 자신의 세계로 돌아갈지 아니면 여기서 더 머무를지를
결정할 수 있는 시간을 드릴 것입니다. 그때까지 좀 더 쉬시기 바랍
니다."

  의사선생님-사마귀인간은 이렇게 말하고는 멍한 표정으로 서 있는
영수의 어깨를 격려하듯 치며 마지막으로 한마디를 남겼다.

"드디어 진정한 이계인이 되신 것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루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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