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습격

2004.04.22 13:2904.22

  그 날 아침, 난 우울의 습격을 받았다.
  습격은 언제나 예기치 못한 때 일어난다.
  길을 걷고 있을 때, 영화를 보고 있을 때, 혹은 친구들과 술을  마시다가, 아니면 우연찮게 마주친 거울 속에서….  습격은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다.
  그 것은 무척 다양한 이름으로 나타난다.  때로는 소외감이란 이름으로, 때로는 열등감으로, 때로는 공허와 무력이라는 지원군과 함께.
  그리고 그 날처럼 아무 이유 없이. 아니, 정말로 이유가 없을까?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갈망하고 있는 것이 없다는 이유로 종종 난 견디기 힘든 자괴감에 빠지곤 했다.
  우울은 생각보다 오래 지속되었다.  술은 즐거울 때 마셔야  제 맛이 난다. 어쨌든 단지 우울을 달래기 위한 이유로 마시는 술은 더욱 우울하게 만들 뿐이었다.
  여행을 가보기로 했다. 얼마 되지 않은 돈을 탈탈 털었다. 이  때가 아니면 언제 이렇게 훌쩍 떠나보랴.
  아무 계획도 세우지 않았다. 여행을 다녀본 적이 없었기에 어떻게 계획을 짜야 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속초에 가서 바다를 보자.  그것이 내가 생각한 전부였다. 나머진, 어떻게든 되겠지.
  처음엔 창 밖의 풍경을 보는 것만도 재미있었다. 불행히도 창가 자리가 아니긴 했지만 말이다. 창가에 앉은 사람은 코를 박고 정신없이 자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기차를 타본 것이 워낙 어릴 때의 일이라 기억 속의 내부와 그다지 바뀌지 않은 기차에 엉거주춤 앉아서 자는 사람의 어깨 너머로 계속 바깥 풍경을 쳐다봤다. 그 외엔 별달리 할 일도  없었다. 도시에서 시골로 바뀌어간다. 들판이며 작은 산등성이들이 신기했지만 나중엔 모든 풍경이 다 똑같게 느껴졌다. 계속  고개를 돌리고 있는 것도 불편했다.
  창가에 앉을 수 없다는 것도 생각해 봤어야 하는데…. 옆자리에서 자던 사람이 갑자기 고개를 치켜들더니 커텐을 소리도 요란하게 치곤 다시 잠이 들었다.
  풍경에도 지겨워지고 있었긴 하지만, 묻지도 않고 커텐을 쳐버린 것도 기분이 나빴다. 괜히 돈만 쓰고 기분만 더 버리는 거 아냐? 담배를 한 대 피우기 위해 통로로 나갔다.
  통로에서 서자 유리창도 없이 바로 풍경이 빠르게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차라리 여기가 훨씬 낫군.
  좌석에 앉아서 보는 풍경은 멀어서 실감을 못했었는데 통로에서는 기차의 속도가 실감이 났다. 나무며 풀이 순식간에 멀어져갔다.
  확 뛰어내려 버려?
  바보같은 생각이라며 피식 웃었다. 죽어야할 만큼 절박한 고통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꼭 살아야할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 듯이….
  덜커덩- 덜커덩-
  기차는 계속 움직였다. 충동적으로 바깥으로 머리를 내밀어  보았다. 강한 바람이 머리에 맞았다. 갑자기 유쾌해졌다.
  난 손잡이를 단단히 붙들고 밖으로 상체를 내밀었다.  점점 대담해졌다. 난 아예 계단으로 내려가서 다리와 손에 힘을 주고 몸을 바깥으로 뺐다.
  어떤 아슬아슬함이 날 즐겁게 했다. 스트레스 해소란 더 강한 스트레스를 주어 약한 스트레스를 잊게 해주는 것이라고 했다.  놀이기구를 타는 것은  엄청난 스트레스다. 그걸 통해 일상의 스트레스를 해소하게 되는 거다.
  이보다 더 스릴 있는 놀이기구가 있을까?  난 기차가 가는  방향에서 고개를 돌리고 맞바람을 맞았다. 옷자락이 펄럭거렸다.  나무가  휙휙 지나간다.
  누가 보면 꽤나 웃긴 모습이었을 것이다. 달려가는 기차에서 몸을 빼고 있는 사람이라니….  자살하고 싶어하는 것처럼 보일까?
  이대로 손을 다 놓아 버리면?
  죽음이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다가올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지금 내 삶을 지속하느냐 마느냐를 선택할  수 있는 기로에 있다는 것이었다. 손을 놔 버린다. 그것으로 모든 것은 끝이었다.
그럼 죽는다, 정말일까? 정말로 죽음이 이렇게 가까이에 있을 수 있을까? 언제든, 내가 원하기만 하면, 난 내 삶을 끝장낼 수 있는 것인가?
  난 쓴웃음을 지으며 반동을 이용해 가뿐히 기차 안으로 다시 몸을 집어넣었다. 역무원이 보면 한 소리 해댈게 뻔했다. 그런 소리를 들으며 모처럼 들뜬 기분을 망칠 생각은 없었다.
  열차에 다시 제대로 올라온 순간 주위에 새까만 어둠이 밀려왔다.
  덜커덩- 덜커덩- 덜커덩-
  기차 소리에 맞춰 심장이 같이 움직였다. 내 머릿속도 기차 안의 어둠만큼이나 시커매졌다.
  얼마나 지났을까? 기차가 터널을 빠져 나오고 나서도 난 한 동안  꼼짝도 못하고 그렇게 서 있었다.  주먹을 너무 꽉 쥐어서 하얗게  질려 있었다.
  맙소사- 당장이라도 쓰러져버릴 것 같아서 비틀비틀 객실로 들어갔다. 아직도 심장이 거칠게 뛰고 있었다.
  5초만 늦게 들어왔어도, 난 어떻게 되는 거였지?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다리를 올리고 머리를 묻었다.
  기차는 계속 움직이고 있었다. 빌어먹을 난 죽을 뻔 했다구! 죽을 뻔 한 거야! …죽을 뻔?
  "…하? 쿡쿡- 아하하하하-"
  갑자기 웃음이 터져나왔다.
  옆에 있는 사람이 자다 깨서  별 사람 다 보겠다는 듯 날  쳐다봤다. 난 아무 것에도 신경쓰지 않고 웃어젖혔다. 배가 아프고 눈물이 날 정도로 웃었다.
  리어카를 밀며 과자와 음료수를 파는 사람이 지나갔다. 어릴 적 단지 저 리어카가 신기하다는 이유로 아버지를 졸라대곤 했었다.
  콜라를 사서 마셨다. 아까 흘린 진땀이 식으며 온 몸이 시원해졌다.
  우울의 습격은 언제나 불시에 일어난다. 마찬가지로, 내가 삶에 가진 본능적인 애정을 깨닫게 되는 것도 한 순간이다. 비록, 해결된 일은 아무 것도 없다해도….
memories
댓글 0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추천 수
공지 2024년 독자우수단편 심사위원 공고 mirror 2024.02.26 1
공지 단편 ★(필독) 독자단편우수작 심사방식 변경 공지★5 mirror 2015.12.18 1
공지 독자 우수 단편 선정 규정 (3기 심사단 선정)4 mirror 2009.07.01 3
319 단편 [엽편]『고양이』1 K.kun 2006.10.19 0
318 단편 [꽁트?]어느 연구실의 풍경 - 카이미라2 미소짓는독사 2006.10.18 0
317 단편 실제가 환상이 되는 때 루나 2006.10.18 0
316 단편 『도깨비 검사』 K.kun 2006.10.16 0
315 단편 『죽어야 하는가, 언제, 사람은』 K.kun 2006.10.16 0
314 단편 단순한 요청1 異衆燐 2006.10.13 0
313 단편 예언 이야기 wj 2006.10.07 0
312 단편 [엽편]작은 문학도의 이야기 - 꿈2 미소짓는독사 2006.10.01 0
311 단편 시간 정지자(Time Stopper ) Enigma 2006.09.22 0
310 단편 반역자(The Traitor) 나길글길 2006.09.18 0
309 단편 버추얼 월드(Virtual world) 나길글길 2006.09.05 0
308 단편 그것이 돌아왔다3 감상칼자 2006.08.27 0
307 단편 왕국의 방패, 민초의 검. 그리고 고약한 무장6 JustJun 2006.08.23 0
306 단편 아르실의 마녀 포가튼엘프 2006.08.17 0
305 단편 B급 망상극장 : 무뢰도 - 아미파 최후의 날8 異衆燐 2006.08.16 0
304 단편 영웅의 꿈.1 2006.08.13 0
303 단편 내가 그대를 부르고 있어요. 뤼세르 2006.07.25 0
302 단편 그녀가 원했던 것1 감상칼자 2006.07.22 0
301 단편 뱀파이어 앤솔러지 2차 수록작 발표 mirror 2006.05.17 0
300 단편 뱀파이어 앤솔러지 수록작 발표 mirror 2006.04.15 0
Prev 1 ... 90 91 92 93 94 95 96 97 98 99 ... 110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