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짝짓기

2004.04.05 21:1004.05

  "헤에, 그 양동이, 그거 뭐야?"

  타미안의 질문에 라스는 싱긋 웃어 보였다.

  "아, 이거? 하늘에서 미소년이 떨어지면 받으려구."

  "…그거 들고 다니기 좀 벅차다고 생각하지 않아?"

  라스가 키가 작은 편은 아니었지만 커다란 양동이를 들고 있는 모습은 확실히 부담스러워 보였다.

  "그래도 눈앞에서 떨어질 때, 아무것도 없어봐. 미리미리 준비해야 하는 거라고."

  라스는 뭐가 즐거운지 양동이를 앞뒤로 흔들며 말했다. 양동이가 움직일 때마다 그녀의 길게 땋은 양쪽 머리도 같이 흔들렸다.

  "언제 올지 모르잖아."

  "하지만 곧 때가 될 거야."

  라스가 고른 치열이 잘 보이도록 활짝 웃으며 말했다 .

  그녀가 가장 절친한 타미안에게조차 말하지 않은 것이 있었다. 그녀는 며칠 전 밤 어른들이 아이들 모르게 버려진 물레방아간으로  가는 걸 보았다. 이제 얼마 남지 않은 것이다.

  "일하러 다닐 때, 불편하지 않겠어?"

  "감수해야지. 배란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고."

  "그런가…."

  "넌 준비 안해?"

  "양동이 들고 다니는 게 준비라면 사양할래."

  타미안이 거기까지 말했을 때, 뒤에서 누군가가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일하러들 가는 길이야?"

  "아아… 레미르."

  키가 작은 레미르는 두 사람을 올려다보니 수선스럽게 입을 열었다.

  "얘기 들었어?"

  "무슨 이야기?"

  레미르는 작은 얼굴이기에 더욱 커보이는 눈을 빛내며 말했다  

  "어제 말야, 로완느가 찾았대."

  "헤에?"

  "밭을 갈다가 잠시 쉬는데,  뭔가 이상한 게 비집고 나와 있더라는 거야. 처음엔 잡촌 줄 알고 낫으로 잘라버리려다가,  뭔가 이상해 손으로 조금씩 파봤더니…."

  "찾았구나! 로완느! 억세게 운이 좋잖아! 아직 배란기까진 며칠 남았는데!"

  라스가 분한 듯 외쳤다.

  "응, 땅에서 솟아 나왔다는 거야 . 바로 눈앞에서…."

  "난, 난 도대체 언제나, 헝… 나도 곧 배란기인데… 그래서 어떻게 했대?"

  라스가 레미르의 이야기를 독촉했다.

  "어쩌긴… 집에 데려다가 잘 씻겼대. 아주 잘 생겼다는 거야."

  "우엥~ 나도 폭포에나 가볼까?"

  폭포에 소년이 떨어지는 경우는 아주 드물지만, 그 곳에 떨어지는 소년이 언제나 가장 아름다웠다는 건 마을에서 잘 알려진 이야기였다.

  "밭이나 갈아. 열심히 일하다 보면, 다 돌아오는 거야."

  둘의 이야기에 별로 흥미를 두지 않던 타미안이 라스에게 타이르듯이 말했다.

  "응, 나도 폭포엔 갈 생각 없어. 내가 찾는 소년은 꼭 하늘에서 떨어질 거야, 봐! 이 양동이."

  라스가 레미르에게 양동이를 들어 보였다.

  "와, 그걸로 떨어지면 받으려고?"

  "응."

  "좀 작지 않을까?"

  "괜찮아, 잘 받으면 돼. 로완느의 소년은 어떻대? 말은 잘 한대?"

  "나도 아직 잘 몰라. 오늘 일 끝나면 보러 가려구. 같이 가겠어?"

  "남의 떡 보면 뭐하나."

  "그래도~ 궁금하지 않아?"

  레미르가 라스의 팔을 잡으며 졸랐다.

  "그래, 가자. 타미안도 갈테야?"

  "난 별로…."

  "가자, 타미안. 로완느가 자랑하고 싶어 안달이라고. 가서 축하해 주는 게 도리잖아."

  레미르도 거들었다. 타미안은 키도 크고 늘씬한데다가 시원스런 이마, 맑고 푸른 눈을 가진 마을에서도 보기 드문 미형이었다. 그녀 역시 배란기가 다가오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소년을 찾는 일에 별로 관심을 두고 있지 않았다 .

  "타미안, 그러다가 배란기를 놓치면 어쩌려고 그래?"

  라스가 걱정스레 말했다. 배란기가 얼마 남지 않은 지금, 하루의 반 정도는 소년을 찾으러 헤매며 돌아다니는 소녀들이 대부분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타미안은 늘 하듯, 강가에서 채집만 할 뿐이었다.

  "풋, 가끔 물에서 건지기도 한다잖아. 어른들 말씀이 맞나봐. 열심히 자기 일 하고 있으면, 눈앞에 나타난다는 말. 하지만… 가만히 일만하고 있기엔 불안하단 말야."

  레미르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말했다.

  "맞아, 로완느는 어떻게 된 거야 ? 일도 팽개치고 소년만 찾으러 돌아다니더만…."

  "그러다가 어머니에게  한 소리 들었나봐. 그래서 억지로 끌려나가 일하다가…."

  "정말 운이 좋잖아, 로완느는…!"

라스가 발을 굴렀다.

  "아, 난 이쪽으로…."

  갈림길에서 타미완이 발을 멈추며 말했다.

  "타미안, 이따가 올거지? 응?"

  라스가 타미안의 허리에 손을 두르며며 말했다. 타미완의 일은 물가에서 먹을 수 있는 것들을 채집하는 일이었다.  

  "알았어, 갈께."

  "그럼 일 끝나고 나 데리러 와야해?"

  "응, 라스."

  타미안이 간 후 라스와 레미르는 함께 걸었다. 둘은 바로 옆 밭에서 일하고 있었다.

  "타미안은… 언제나 말이 없구나."

"그런가?"

  "좋겠다, 라스는. 타미안이랑 친하고."

  "에?"

  "아까 내가 가자고 했을때는 대답 없다가 라스가 가자고 하니까 가겠다고 하잖아."

  레미르의 얼굴이 시무룩해졌다.

  "아깐 아직 결정을 못한 거였겠지. 그 앞에 내가 가자고 했을 때도 대답 없었다고."

  "타미안은 어딘지 모르게 말 붙이기가 어려워."

  "타미안이?"

  "라스는 타미안이랑 친하니까 못 느끼는 거야."

  라스는 약간 토라진듯한 레미르의 말에 뭐라 할 말을 못 찾고 애꿎은 양동이만 덜그럭거리고 있었다. 낮고도 허스키한 목소리, 가늘면서도 또렷한 선으로 마치 소년같은 인상을 주는 타미안은 은연 중 마을 소녀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런 걸로 받긴 힘들 거야."

  "에?"

  한참의 침묵 후, 불쑥 나온 레미르의 말에 라스가 되물었다.

  "오기 전 로완느의 집에 들렀었어. 보진 못하고, 말로만 들었는데, 꽤 크다고 하더라. 그런 양동이에 받긴 좀 힘들 걸."

  "그런가…."

  라스는 멍하니 양동이를 바라보았다. 음, 좀 작으려나….

  "그럼 이따 보자."

   레미르가 어느새 도착한 자신의 밭으로 들어가며 말했다.

  "아, 응, 으응. 이따가 갈 때 같이 가."

  "아냐, 난 로완느가 음식 차리는 걸 도와달라고 해서 좀 일찍 가야해."

  "그래, 그럼 로완느의 집에서 보자."

  "응…."

  라스는 쳐져있는 레미르의 등을 보며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타미안이 말이 없던가? 특별히 나하고만 말한 것 같지도 않은데….



  해가 저물자  하늘에서 별이 하나씩 보이기 시작했다.  라스가 가장 좋아하는 순간이었다. 조금씩 하늘이 어두워지면서, 별이 뜨는 것이 보이는…. 넋을 잃고 바라보다 보면 어느새, 하늘은 온통 별빛으로 가득차 있곤 했다. 라스가 자신의 소년은 하늘에서 떨어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지금 딱 떨어지면 좋을텐데…."

  "그러면 좋겠지."

  "타미안?"

  라스는 타미안이 온 줄도 모르고 누워서 별을 바라보고 있다가 벌떡 일어났다.

  "에? 옆에… 그건 뭐야?"

  "미안, 나 로완느의 집에 못 갈 거 같아."

  "설마…."

  타미안은 상체를 벗은 채로 옆구리에 자신의 상의로 감싸인 하얀 무언가를 끼고 있었다.  타미안의 어깨선과 가슴이 들어나 매끈한 곡선을 자랑하고 있었다.

  "옷이 없어서 급한데로 내 옷을 입혔어."

  축 늘어져 있는 그것은 타미안의 긴 상의로 미약하게나마 몸을 덮은 상태로 가늘게 움직이고 있었다.

  "망을 거두는데, 뭔가 걸렸는지 나오질 않는 거야 . 그래서 물에 들어가 보니…."

  "…그렇구나."

  "너, 괜찮은 거야?"

  "응? 그, 그럼, 괜찮지!"

  라스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웃으려 하며 말했다.

  "바보."

  타미완은 라스에게로 다가와 자신의 뺨을 그녀의 뺨에 갖다대었다. 안아주려 해도 한 손엔 소년이, 다른 한 손엔 도구들을 들고 있었기에 어쩔 수가 없었다.

  "배란기까지는 아직 시일이 있어. 너무 걱정하지마."

  "응…."

  "그럼 나 먼저 가볼께. 빨리 안가면, 감기 들 것 같아, 이 녀석."

  타미안은 턱짓으로 매달려 있는 소년을 가리켰다.

  "응, 빨리 가봐."

  라스는 타미안의 티 한점 없는 유연한 등을 넋놓고 바라보다가, 그녀가 완전히 사라진 후에야 짐을 챙겼다. 일부러 늑장을 부린 건데, 타미안이 오면, 챙기는 걸 도와달라고  배시시 웃을 생각이었는데, 레미르도 없는 곳에서 홀로 짐을 챙기며,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날 뻔한 것을 이를 악물고 참았다.


  로완느의 집에 도착한 건 덕분에 꽤 늦은 시간이었다. 집안은 이미 시끌벅적했다. 제일 먼저 소년을 찾아낸 로완느였기에 사람들의 호기심은 대단했다. 로완느의 소년은 잘 차려입은 채로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앉아 있었다.

  "예쁘구나, 소년이라는 것은…."

  라스는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눈이 별빛 같아…."

  로완느가 찾아낸 소년의 눈은, 정말로 밤하늘의 별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타미안의 소년의 눈도 저렇게 빛날까? 그녀의 팔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것밖에 보지 못했었기에, 눈을 보지 못했었다.

  "타미안도 찾았다면서?"

  로완느가 다가와 물었다. 라스는 공상에서 벗어나 로완느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오늘 강에서 건졌어."

  "흠… 언제쯤 소개시켜 줄 수 있을까?"

  "글쎄…물에서 건졌으니… 2, 3일이면 되지 않을까?"

  "타미안의 상대… 봤어?"

  로완느의 눈은 자신의 소년과 비교해 어느 쪽이 낫느냐고  묻고 있었다.

  "몰라, 처음엔 축 쳐져있잖아, 왜. 그리고 어두워서…."

  라스는 뭐라고도 대답하고 싶지 않아 말을 얼버무렸다. 그 것이 사실이기도 했다.

  "흐응… 그래?"

  로완느는 자신만만한 눈으로 자신의 소년을 바라보았다.

  "너도 곧 찾을 수 있을 거야."

  "그래, 고마워."

  로완느는 의례적인 말을 한 마디 던지더니 찾아온 다른 사람들에게도  인사를 하기 위해 자리를 떴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곳곳에서 소년을 찾아내는 소녀들이 늘어만 갔다. 누구는 밤에 돌아오다가 발길에 뭔가 차여 보니 있었다더라, 누구는 나무 열매를 따다가 나무에 걸린걸 따왔다더라, 누구는 자러 방에 들어가니 이불 안에서 나왔다고 하기까지 했다.


  "너무 초조해 하지마."

일을 끝내고 라스의 밭에 온 타미안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도, 그래도…."

  "레미르도 아직 못 찾았잖아. 너만 남은 게 아니야."

  "정말로 나만 남으면 어떡하지?"

  "바보같은 소리하지마 . 자, 다 된 거지?"

  타미안이 라스의 짐을 꾸려 넘기며 물었다.

  "응, 고마워."

  "별로…."



  "소년이랑 있으면 좋아?"

  거의 헤어질 무렵까지 말없이 걷던 라스가 물었다. 타미안은 대답대신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네게도 멋진 소년이 생길 거야."

  "배란기가 지날 때까지 못 찾으면 난…."

  "바보 …"

  라스는 타미안의 품에서 안겨 잠시 울었다.

  "이제 괜찮아, 가볼께."

  "바래다줄께."

  "아냐, 됐어. 정말이야. 혼자 걷고 싶어."

  타미안은 잠시 라스의 눈을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라스는 하늘의 별을 보며 걸었다. 하지만 전처럼 아름다워 보이지 않았다.


다음 날, 레미르가 일을 하러 오지 않았다.  라스는 레미르가 이제 일도 안하고 소년을 찾아다니나 걱정이 되어 레미르의 집에 가 보았다.

  "찾았어! 찾았다고!"

  "뭐어? 정말이야?"

  라스가 레미르가 있느냐고 그녀의 어머니에게 묻기 무섭게 그녀가 방에서 뛰쳐나오며 외쳤다.

  "응! 어젯밤, 별을 보며 걷는데, 하늘에서 뭔가 뚝 하고 떨어지는 거야. 얼결에 받았더니 … 세상에! 아직 보여줄 수 있는 상태가 아닌데, 너만 살짝 보여줄께."

  레미르는 얼굴에 홍조를 띄며 신나게 떠들었다.

  "하늘에서… 떨어졌다고?"

  라스가 멍하니 서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빨리 와봐!"

  레미르는 들떠서 그런 라스의 상태를 눈치채지 못했다. 라스는 레미르의 손에 이끌려 그녀가 연 소년의 방 - 곧 신방이 될 - 문틈을 통해 안을 들여다 보았다. 라스가 올해 내내 정성껏 짠 옷을 입고  조용히 앉아 있는 그는 늘어뜨린 검은 머리에, 빛나는 녹색 눈으로 인해 … 마치 밤하늘에 빛나고 있는 별 같은 느낌을 주었다.

  소년들은 모두, 저렇게 별처럼 생긴 걸까?

  "어때, 예쁘지? 로완느의 소년보다 훨씬 예쁘지? 그렇지?"

  "정말… 예쁘구나."

  그제서야 레미르는 자신만이 들떠서 라스의 기분을 전혀 생각지 못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이제 마을에서 유일하게 라스만이 소년을 찾지 못한 것이었다. 배란기는 코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마음에 들어, 라스?"

  "응. 정말 예뻐. 축하해, 레미르."

  라스는 애써 밝은 표정을 지으려 하며 말했다.

  "저기, 나 있잖아…."

  "응?"

  "저기,  내가 이 소년을 찾게 된건 다 네 덕이야. 네가 그랬잖아. 미소년은 꼭 하늘에서 떨어질 거라고. 어젯밤에 집에 가는데, 네 말이 떠올라서… 걷다가 멈춰서서 멍하니 하늘을 보고 있었어. 그렇게 한참을 보고 있는데, 갑자기 떨어지는거야. 네가 아니었으면, 난 그냥 지나쳐 버렸을 거야."

  그랬으면, 자신은 집에 돌아가다 떨어져 있던 저 소년을 줍게 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고, 순간 생각한 라스였다.

  "그래서 나…."

  레미르는 뭔가 꺼내기 어려운 말을 하려는 듯 머뭇머뭇하며 말했다.

  "네가 마음에 든다면… 저 소년, 가져도 좋아."

  "뭐라고?"

  "그러니까… 네가 배란기가 시작될때까지 소년을 찾지 못하면… 물론 내가 먼저겠지만… 그 후엔 너 줄께."

  "아니야, 그러지 않아도 돼!"

  라스는 자신도 모르게 큰 소리를 내고 말았다.

  "아, 미안, 라스… 난 단지…."

  레미르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녀는 황급히 뭔가를 설명하려는 몸짓을 했다. 하지만 라스는 그 말을 더 이상 듣고 있을 수가 없었다.

  "아냐, 괜찮아, 나 이만 가볼께."

  라스는 그대로 돌아서서 집으로 달려가버렸다.

  바보! 바보! 바보!

  눈에서 쉴새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제발, 집으로 가는 동안 아무도 마주치지 않기만을 간절히 바랬다.



  배란기가 시작되었다. 라스는 아직도 소년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괜찮겠어?"

  갈림길에서 타미안이 걱정스런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빨리가 봐.  집에서 기다리고 있을 소년에게 맛있는 걸 갖다 줘야지."

  라스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오늘은 땅을 열심히 파볼까봐. 하하"

  평소보다 쾌활하게 웃는 라스를 보는 타미안은 기분이 좋지 못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이 해줄 수 있는 것도 없었다. 타미안은 라스의 어깨를 한 번 감싸려했지만, 라스가 거부했다.

  "뭐야~ 징그럽게~"

  라스는 장난스런 몸짓으로 타미안을 밀어내고는 자신의 밭으로 갔다  

  "참, 나 오늘 좀 늦게까지 일하려고 하니까, 일이 좀 밀렸거든, 그러니까 먼저 돌아가."

  그녀는 그렇게 외치곤 종종 걸음으로 달려갔다. 라스는 타미안이 자신의 뒷모습을 보고 있는 걸 알았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그녀도 친구의 행복을 깨끗이 축복해 주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이 얼마나 치졸한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정말 계속 웃고 있을 자신이 없었다. 그녀는 그냥 밭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정말 열심히 일했다.

  해가 지는지 주위가 점점 짙은 남색으로 물들어갔다. 하지만 오늘은 별을 바라보지 않기로 했다. 그녀는 그렇게 한참을 일하다가 문득 어느새 땅이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두워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들 그동안 정성껏 준비해온 음식을 차리고, 옷을 갖춰입고,  멋진 밤을 보내고 있을터였다. 라스는 울지 않게 위해 이를 악물었다.

  녹초가 된 몸을 이끌고 집에 도착했다. 마당에 들어가보니 어머니의 방 앞에 신발이 하나 더 놓여 있었다.

  "촌장님이…."

  오래간만에 오셨군.  하긴 요즘은 배란기라 어른들도 아이들을 챙겨야 할 일이 많을테니 바쁘셨겠지.

촌장은 수를 놓는 솜씨가 뛰어났다.  그래서 그녀의 신발은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날렵한 사슴이 수놓아져 있는 신발. 문을 열고 인사하려던 라스는 들려오는 말에 멈칫했다.

  "문을 너무 조금 연 게 아닌가 싶어."

   촌장의 목소리였다.

  "아직 기한이 남았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

  어머니와 촌장은 아주 어릴 적부터 친구였다. 둘은 둘만이 있을 땐 경어를 쓰지 않았다.

  "하지만… 라스만 아직 못 찾았잖아."

  "내년도 있는 걸, 뭐."

  "네 딸이야."

  "내 딸이니까 하는 말이야."

  라스는 어머니의 냉정한 말에 표정이 샐쭉해졌다.

  "꼭 하늘에서 떨어질 것이라는 둥,  그런 말이나 해대며 넋놓고 별이나 쳐다보고 다니니 될 일도 안되지."

  너무해! 라스는 입술을 깨물었다.

  "조금만 더 열걸 그랬나봐."

  촌장은 40을 넘었는데도 아직 소녀처럼 맑은 음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어머니와 둘이 있을 때면 더욱 어린애 같아지곤 했다. 물론 다른 사람들은 그녀가 저런 목소리로 말한다는 건 상상도 못할 것이다.

  "다른 애들은 다 찾았잖아. 딱 맞게 연 거야."

  "정말 네 딸 맞아?"

  "아! 그런다고 사람을 때려?"

  "때리긴 무슨~ 어쨌든 너무하잖아, 라스 요새 축 쳐져 있던데. 위로라도 해줘야지, 너무 무심한 거 아냐?"

   촌장은 잠시 사이를 두고 말했다.

  "라스가 소년을 찾지 못한 건 이상한 일이야. 넌 셋이나 찾고 그 중에 골랐잖아. 나머지는 다른 사람들에게 주고."

  "넷이었어."

  "아, 그랬어?"

  대화가 끊겼다. 아마도 지금쯤 둘은 진한 입맞춤이라도 나누고 있으리라…. 라스는 돌아서서 달렸다.

다들, 내년이면 더 이상 소년을 찾을 필요가 없어지는데… 나만 매년 소년을 찾으러 돌아다녀야 하나? 언제까지? 기회는 다섯 번 밖에 없는데…. 5년이 지나도록 못 찾으면 어떡하지?

  라스는 숲을 향해 달렸다. 각 집마다 이루어지고 있을 일들을 상상하기 싫었다.

  "아야야!"

  어두워서 밤길을 잘 보지 못한 그녀는 그만 넘어지고 말았다. 무릎이 까졌는지 쓰라렸다.

  "치잇."

  해마다 단지 라스 하나만을 위해 문이 열릴 것이다. 너무 많이 나오면 안되니까 아주 조금만… 난 더욱 찾기 어려워지겠지.

  주위가 너무 어두웠다. 오늘밤은 달도 뜨지 않았다. 어디가 어딘지 알 수가 없었다. 달이 한 순간 구름을 젖히고 나왔을 때 라스는 산기슭에 자리잡은 버려진 물레방아간을 볼 수 있었다.

  어른들은 해마다 자연적으로 일어나는 일이라고 하지만, 그녀는 촌장과 어머니의 대화를 몇 번 우연찮게 엿들은 적이 있었다. 문은 어른들이 연다. 오래된 물레방아간에서….

  라스는 살금살금 안으로 들어갔다  심장이 너무 거세게 뛰어서 숨쉬기가 힘들었다.

  안은 바깥보다 훨씬 더 어두웠다.

  "불을 키는 게 있을텐데…."

  어른들은 아무도 불을 가지고 나가지 않았었다. 분명 이 안에 뭔가 있을 거다.

  그녀는 문 입구에서 바닥을 더듬었다. 어렵지 않게 문 옆에 있는 횃불과 부싯돌을 잡을 수 있었다.

  "그러면 그렇지!"

  그녀는 불을 키고 안을 둘러보았다. 한 번도 이 안에 들어와 본 적이 없었다. 이곳은 아이들에게는 금지된 구역이었다. 짝짓기를 마치고 성인이 된 자만이 들어올 수 있는 금지된 곳….

  횃불을 키고 둘러보자 물레방아간이라고 불렸지만 내부는 전혀 달랐다.

  "뭘 어떻게 해야 하는거지?"

  그녀는 눈쌀을 찌푸리고 조심스레 주위를 살폈다. 바닥의 중앙에 둥근 커다란 홈이 있었고, 그 홈을 따라 돌도록 되어 있는 기다란 막대가 있었다. 마치 거대한 맷돌을 보는 것 같았다. 그 주위에는 역시 맷돌과 비슷하지만 좀 다른 것들이 다양한 크기로 놓여 있었다. 얼핏 불규칙해 보였지만 분명히 뭔가를 의도해서 놓인 위치였다. 좀 더 가까이 가서 불을 비춰보자 맷돌마다 복잡한 도형이 새겨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날짜를 표시한 건가?"

  문은 16년마다 한 번씩 열린다. 16년에 한 번씩 배란기가 오면 소년이 나타난다. 소년을 찾아 짝짓기를 마치고 나면 얼마 되지 않아 소년들은 소멸하게 된다. 성인이 된 아이들이 아이를 낳고  그 아이들이 배란기를 맞을 무렵, 문은 다시 열리게 된다. 이제는 그 아이들의 부모가 된 자신들의 손으로….

  단순히 날짜를 표시한 거라고 보기엔 도형이 좀 복잡했다. 그 외에 다른 의미도 있는 듯 했다.

"에라, 어떻게 되겠지 "

  그녀는 바닥에 있는 가장 커다란 맷돌의 손잡이를 잡고 힘을 주었다. 꿈쩍도 하지 않았다.

  "에잇!"

  그녀는 다리에 힘을 주고 양손으로 온 몸의 무게를 실어 혼신의 힘을 다해 막대를 밀었다.

  "앗!"

  한 번 움직이기 시작한 막대는 멈추지 않았다.

  "안돼!"

  그녀는 멈추려고 해봤지만 소용없었다. 손잡이는 계속 돌았다. 그녀가 다시 힘을 쥐어짜내 버텨보려고 했지만 오히려 튕겨 나가고 말았다.

  "안돼, 안돼!"

  그녀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자신의 양동이를 손잡이의 앞부분에 밀어 넣었다.

  끼기기기기긱-

  듣기 싫은 비명을 토해내며 양동이를 완전히 찌그러트리고 나서야 겨우 막대는 멈췄다.

  "헉헉-"

  그녀는 가쁜 숨을 내쉬었다. 이게 도대체 얼마나 돌아간 거지?

  그녀는 어서 이 자리를 떠나야 한다는 생각에 서둘러 밖으로 튀어나갔다. 문을 나오자마자 뭔가에 발이 걸려 그만 넘어질 뻔했다.

  땅에 솟아 나와 있는 것은 사람의 손이었다.

  "맙소사…."

  그녀는 저 멀리 나무에도, 바로 앞 땅에서도, 돌 틈에서도 소년들이 튀어나오는 걸 볼 수 있었다 .

  "꺄아악-"

  하늘에서 뭔가가 그녀의 앞으로 떨어졌다. 땅에 떨어져 꿈틀거리고 있는 것은 분명 소년이었다.

  마을 쪽에 하나둘 불이 들어왔다. 사람들이 횃불을 들고 이 쪽으로 달려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

  그녀는 그대로 주저앉아 눈을 감아버렸다.



  촌장이 말렸지만 소용없었다. 그녀는 바닥에 쓰러졌다. 뺨의 아픔도, 입술이 찢어졌다는 것도 느끼지 못했다.

  그녀는 촌장의 집 마당에서 모든 어른들에게 둘러 쌓여 있었다.

  "리미카, 리미카, 제발 진정하시오!"

  촌장이 어머니의 손을 붙잡는 것이 어렴풋이 보였다.

  "진정하라고! 지금 진정하게 됐어!?"

  어머니는 흥분해서 제정신이 아니었다. 마을 사람들이 모두 모여 있는 곳에서 촌장을 마구 하대하고 있었다. 둘이 사귄다는 것은 마을의 공식적인 비밀이었다. 공식석상에서는 절대 경어를 사용하던 그녀였지만 지금은 그런 걸 따질 여유가 없어 보였다.

  "알겠소, 리미카, 리미카, 일단 진정하시오. 지금 중요한 건 이게 아니지 않소! 화는 나중에 내도 충분해요. 리미카, 제발!"

  사람들은 지금 놀라고 있을 것이다. 사람들 앞에서 리미카는 언제나 촌장에게 고분고분한 여인이었다. 하지만 둘만이 남으면 상황은 역전된다. 이걸 보며 어른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마을 사람들에게 어머니의 진짜 모습과 촌장의 진짜 모습 중, 어느 것이  더 충격일까? 사람들 앞에서의 촌장은 엄격한 사람이었다. 라스는 지금 이 순간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자신이 우스웠다.

  "리미카, 제발…."

  촌장이 그녀를 달랬다. 그녀는 촌장을 뿌리쳤다.

  "난 저녀석 꼴도 보기 싫으니 네가 알아서 해!"

  그녀는 등을 돌리고 아예 다른 곳을 쳐다보았다.

  "당신의 아이문제에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지? 제대로 지켜보지 못한 건 엄연히 당신의 잘못이야!"

  누군가가 어머니에게 큰 소리를 냈다.

  "뭐라…!"

  어머니의 항변보다는 촌장이 먼저였다.

  "리미카는 나의 연인이니, 라스의 일은 내 책임이기도 하오!"

  주위는 삽시간에 조용해졌다. 촌장은 마을일에 공평해야한다. 따라서 촌장은 연인을 만들면 안된다. 그런 상황에서 그녀는 마을 사람들에게 당당하게 공포한 것이 . 어머니의 눈이 커다래진 것이 보였다. 그녀도 이제야 자신의 상황이 눈에 들어온 모양이었다.

  "소년들이 필요한 숫자보다 더 나온 것은 늘 있는 일이오. 항상 어느 정도는 여유를 두고 문을 여니까. 너무 많이 나왔다는 것이 문제긴 하지만…. 어차피 모든 아이들이 이제 성인이 되었소. 그들도 이제 마을의 규칙을 알 때가 온 것이오. 이제 문제는 소년들을 원래 있던 곳으로 되돌리는 것. 혹시 그럴 일은 없겠지만, 모두들 아이들에게 이 후 나온 소년들을 절대 함부로 집으로 데리고 가지 말 것을 지시하시오. 어디서 나왔는지 일일이 체크를 한 후, 원 자리로 되돌려 보내야 할 것이오."

  촌장이 준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라스는요? 라스는 어떻게 할 거죠?"

  누군가가 싸늘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 모든 일은 라스의 잘못이오. 라스, 소년들을 무사히 돌려보내는 건 네 책임이다. 일이 어떻게 되든 간에…."

  촌장이 다음말을 하는 데 까지는 시간이 필요했다.

  "넌 절대로 소년을 가질 수 없다."

  사람들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날 밤부터 일이 시작되었다. 소년들은 공간을 역행해오느라 모두 완전히 지쳐있는 상태였다. 라스는 돌아다니며 소년들을 찾고 천에 소년들이 어디서 나왔는지를 적어 그 천을 소년의 목에 걸고 촌장의 집으로 데려가는 일을 계속했다. 물론 라스 혼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그대로 나온 장소에 내버려지고, 아무도 그 소년을 찾지 못할 경우, 소년들은 그 자리에서 소멸하게 된다. 어른들은 몇 명이 나왔고, 몇 명이 자연소멸 했는지를 물레방아간에서 계산했다. 새로 나온 소년은 다 오늘 밤 안에 나왔기에 아직은 괜찮지만 지금까지 네 명의 소년이 자연소멸 했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 넷은 어디 있었을까? 왜 내 앞에는 나타나주지 않았던 걸까?

  라스는 쓰게 웃었다. 그 중에 한 명이 자신의 밭에서 나왔다가 혼자 어딘가로 기어가서 사라졌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는 다시 한 번 쓴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모두들 라스를 피했다. 소년들을 처리하는 일을 돕긴 했지만 라스에게 말을 거는 사람들은 없었다. 어머니는 아예 라스에게 자신의 가까이에도 못 오게 하고 있었다.

  "집에 들어올 생각도 말라고 전해."

  자신을 앞에 두고 촌장에게 이야기했던 어머니였다.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라스는 어깨가 쑤시는 걸 느끼며 또 다른 소년을 찾아 촌장의 집으로 데려왔다. 촌장은 사람들을 지휘하며  소년들을 씻기고, 사람들 별로 적당한 수를 배분하고 있었다. 몸을 회복시킨 후 빨리 돌려보내면, 소년들은 무사할 수 있다.

  그래도 그 날 밤 안에 모든 소년을 다 찾을 수 있었던 건 리미카의 역할이 컸다. 그녀는 정말 소년을 찾는 것에는 탁월한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이제 다 찾은 것 같군."

  소년들의 수를 세고 한시름을 놓으며 촌장이 말했다. 촌장의 집은 꽉 차 있었다 .

  라스도 소년들을 씻기고 입히는 걸 도왔다. 옷은 턱없이 부족했다.

  "이건 내 소년을 주려고 만들어 뒀던 옷이란 말야."

  누군가가 라스에게 들으라는 듯이 투덜거렸다. 어른들은 모두 과거자신의 소년들에게 입혔던 옷을 꺼내왔다. 그래도 모자란 것은 남은 이불등을 둘둘 말아 어떻게 해서든지 처리했다. 소년들의 몸은 아주 약하기 때문에 조심해서 다루어야 했다.

  "이제 그만 집에 들어가거라. 소년들도 자야하니 한숨 돌리고 오후부터 돌려보내도록 하자."

  촌장이 말했다.

  "네…."

  "리미카도 받아줄 거다. 네 방에 가서 자거라."

  "거긴 벌써 소년들로 가득 차 있는 걸요."

  라스는 목이 메어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괜찮아요, 하루쯤 밖에서 자는 것.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라스, 리미카도… 곧 풀릴 거다."

  "네, 그럼요."

  라스는 웃으려고 했지만 울어버리고 말았다.

  "가볼께요…."

  꺼져 들어가는 듯 대답한 라스는 뒤돌아서서 나오다가 누군가와  부딪혔다.

  "…타미안."

  "우리 집으로 가자."

  "너희 집도 벌써…."

  "내 방에서 자면 돼."

  "…신방에서? 됐어, 타미안."

  라스는 웃으며 그녀 옆을 지나치려 했다. 타미안이 강하게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푹 쉬지 못하면, 오후에 일 제대로 못한다."

  그리고 타미안은 그녀를 잡아 자신의 집으로 데려 갔다.  라스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들어와."

  타미안의 신방은 간소했다. 온갖 화려한 치장을 해놓는 다른 아이들에 비해 꼭 필요한 것만이 깔끔하게 준비되어 있었다. 타미안의 소년은 그녀를 기다리느라 아직 자지 않고 있었다. 그는 뒤따라온 라스를 보더니 사슴처럼 부드러운 갈색눈이 잠시 커졌다가 곧 작아졌다.

  "추운가봐."

  이불을 둘둘 말고 앉아 있는 소년을 보며 라스가 말했다.

  "응, 원래 추위를 많이 탄다고 하잖아. 거기 누워. 피곤할텐데."

  "이름이 뭐야?"

  "응? 아, 이름? 안 지었어."

  "…왜?"

  "글쎄. 별로…."

  타미안은 어깨를 한 번 으쓱하더니 자신의 소년을 위해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라스는 타미안의 섬세한 손이 깎아 만든 예쁜 나무로  된 베게를 볼 수 있었다. 타미안은 소년의 머리를 살며시 들어 그 위에 얹어 주고는 라스의 옆에 누웠다.

  "타미안…"

  타미안이 라스에게 팔을 베라고 내밀어서 라스는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했다. 미안하다고 말하려고 했는데… 타미안은 마른 편이었다. 그녀의 품은 아주 따뜻하다곤 말할 수 없을지라도 편안했다. 라스는 어느 덧 잠이 들었다.



  "자아, 이 쪽이야, 이쪽."

  라스는 소년을 나무로 올려보냈다. 하지만 그의 가는 팔은 나무를 잡고 지탱하기에 역부족이었다.

  "사다리라도 가져올 걸…."

  라스는 안타까워 발을 동동 굴렀다.

  "라스! 이 아이는 물레방아간 앞에서 나온 아이다. 네가 데려다 줘라."

  어머니가 라스에게 한 명을 새로 맡기더니 다른 소년을 데리고 사라졌다. 어머니가 데려온 소년은 부축하지 않고도 걸을 수 있는 정도는 되는 것 같았다.

  "저 소년 먼저 하자. 괜찮겠어?"

  나무 위에 올라가려던 소년은 라스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진한 푸른 빛 눈동자…. 타미안과 같은 색이다.

  그녀는 살짝 웃으며 말했다.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 곧 돌아올께."

  그녀는 다른 소년을 감싸 안고 걸었다. 하지만 그 소년이 따라왔다.

  "힘들지 않아? 거기서 기다려."

  하지만 소년은 그녀가 멈춰 서자 가만히 서 있다가 그녀가 움직이자 다시 걸어왔다.

  "혼자 있기 싫은 거야? 할 수 없군."

  그녀는 아직도 비틀거리는 그 소년을 부축하고 다른 소년과 함께 물레방아간으로 갔다 . 물레방아간 앞에서 그 소년의 몸은 마치 빨려들어 가듯이 땅 속으로 사라졌다. 라스는 잠시 넋을 잃고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이상하지? 나타나는 모습보다, 사라질 때가 더 아름다워."

  라스는 먼젓번 소년을 팔을 자신의 어깨에 감았다.

"넌 아무래도 안되겠다. 아직 시공을 넘기엔 몸이 안따라줄 것 같아. 좀 더 쉬렴."

  

  소년들을 모두 돌려보내는 데에는 꼬박 일주일이 걸렸다. 몇몇 소년들이 아프기도 했었기 때문에 더 시간이 걸렸던 것이다.

"이제 몇 안남았군."

  촌장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돌려보내는 일은 그래도 생각보다는 잘 진행되어 가고 있었다.

  라스는 이 일주일 동안 완전히 야위어 있었다.


  슬슬 노을이 지고 있었다. 이마의 땀을 훔치며 노을을 바라보던 촌장이 라스에게 말했다.

  "네가 저 소년을 맡거라. 나머지는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

  "네…."

  촌장이 위로해주는 듯한 눈을 보내자 라스는 더 견디기 어려워졌다. 자신은 어떠한 흔적도 남기지 못하고 홀로 소멸해가야 하는 것이다. 자신이 아이를 낳지 못하고 소멸하면 누군가는 쌍둥이를 잉태할 것이다. 마을의 인원은 결코 변하는 법이 없으니까.

  괜찮아, 모든 것은 내 잘못으로 인한 대가인걸. 이제 배란기도 끝났어.

  그녀는 마지막으로 남은 소년을 바라보았다. 나무에 올려보내야 하는 소년이다. 이번엔 반드시 사다리를 준비해야겠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가자, 네가 마지막이야."

  소년은 라스의 손을 뿌리쳤다.

  "에? 내가 싫다고? 좋아, 촌장님, 촌장님이 이 소년을…"

  라스가 촌장을 부르려 몸을 돌린 순간 소년이 라스의 목을 뒤에서 끌어안았다. 라스는 놀라서 소년을 바라보았다. 소년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소년은 라스의 입술에 입맞췄다. 소년의 눈에 맺힌 눈물이 기어이 밑으로 떨어졌다.

  "너…."

  "네가 이름을 지어주길 바라는구나."

  촌장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전…."

  "그래, 소년들도 다 돌아갔으니…. 생각보다 일도 잘 되었고. 리미카만 용서해 준다면, 네가 신방을 꾸미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 같구나."

  "하지만 배란기가…."

  "오늘이 마지막이지."

  촌장이 싱긋 웃으며 리미카의 뺨을 어루만졌다. 리미카는 새초롬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촌장이 그녀의 뺨에 입맞췄다.

  "그만 용서해 줘, 리미카. 정말로 라스가 잉태하지 못하고 소멸하길 바라는 건 아니겠지?"

  몇몇 마을 사람들이 모르는 척 리미카의 표정을 살폈다.

  "하지만 촌장님 . 당신의 입으로 하신 말씀을 번복한다는 건…."

  "모든 법에 우선하는 마을의 법이 있지. 미소년을 울리면 안 된다."

  촌장이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와아~"

  마을의 어른들과 소녀들이 라스의 주위에 모여들어 축복의 박수를 쳤다.

  "하지만 전…."

  라스는 목이 메어 고개를 떨구었다.

  "라스, 이거 선물이야."

  촌장이 리미카를 달랠 무렵 어딘가로 달려갔던 레미르가 숨을 헐떡이며 돌아와 말했다.  그녀의 손에는 가느다란 나무를 엮은 화환이 걸려 있었다.

  "네게 말한 벌은 리미카님을 달래기 위해서였다고 촌장님이 말씀하셔서, 미리 널 위해 준비해 두었었어."

  "자아~ 네 신방도 이미 준비되어 있어. 네가 그동안 일하느라 제대로 못 준비했을까봐 다들 낮동안 미리 꾸며놓았어."

로완느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아이들 뒤쪽에서 팔짱을 끼고 엷게 웃고 있는 타미안의 모습이 보였다.

   "촌장님, 전…."

  그녀는 어머니에게로 시선을 돌렸다가 고개를 떨구었다.

  "아아, 괜찮아 . 리미카는 아까 일부러 집 가까이도 안가더라고. 그리고  넌 충분히 벌을 받았어 .  마을의 규칙을 어기면 어떻게 되는지 이제 잘 알았겠지?"

  "내가 뭐 일부러 배려하느라 안 간줄 알아?"

  리미카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알고 있지, 그럼그럼 . 자아, 라스, 마지막 밤이란다."

  "고, 고마워요, 모두들… 정말로…"

  레미르가 라스의 소년의 머리에 자신이 만든 화환을 걸쳐 주었다. 그것을 시작으로  사람들 모두가 뒤에 감추고 있던 것을 꺼내 소년과 라스를 치장해 주었다. 로완느는 멋진 겉옷을 만들어 라스의 소년의 평범한 옷을 벗기고 입혀 주었다.

  "내가 먼저 벗겨보는군."

  로완느가 라스에게 혀를 내밀며 말했다.  라스는 울면서 웃었다.

  "하지만, 나 정말로, 이래도 되는건지…."

  "글쎄, 걱정할 것 없대도 그러는구나. 꼭두새벽에 리미카가 네 신방을 청소하는 걸 봤거든. 아얏-"

  리미카가 촌장의 허리를 꼬집었다.

  "그리고 네가 빨리 들어가야지. 다들 오늘밤이 마지막이네. 저기 널 걱정해주는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친구들 말인데, 속으론 빨리 들어가라, 나도 신방 좀 가자 …라고 생각하고 있을 걸."

  "와하하~"

  사람들 사이에 유쾌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라스는 사람들에게 등을 떠밀려 신방으로 들어갔다 .

  "멋진 밤을 보내-"

  마을 사람들이 밝은 목소리로 웃으며 말했다 .

  "고마워요, 모두들- 정말 고마워요-"

  그녀는 인사하며 타미안을 찾았으나 타미안은 어느새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방에 들어갔을 때, 그녀는 필경 타미안의 솜씨일 물고기가 새겨진 두 쌍의 나무로 된 베게를 볼 수 있었다 . 그녀는 베게를 쓰다듬고 눈가를 닦았다 .

  소년은 그녀의 앞에서 수줍은 자태로 서 있었다.

  "피리스."

  라스가 속삭이듯이 말했다.

  "오늘밤이 마지막이겠지만, 그래도 난 이름을 지어줄래. 네 이름은 피리스야."

  "피… 리… 스…"

  소년은 천천히 그 이름을 따라했다.

  "난 라스야. 라스."

  "라… 스…"

  "네가 어디서 왔든지, 넌 내게 하늘이 준 선물이야."

  라스는 천천히 소년의 입술에 입맞췄다.

  하늘에서 마치 두 사람을 축복하듯 별이 빛나고 있었다.  


-------------
조금.. 오래 전에 쓴 글입니다..
민망. ^^;;
아진
댓글 0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추천 수
공지 2024년 독자우수단편 심사위원 공고 mirror 2024.02.26 1
공지 단편 ★(필독) 독자단편우수작 심사방식 변경 공지★5 mirror 2015.12.18 1
공지 독자 우수 단편 선정 규정 (3기 심사단 선정)4 mirror 2009.07.01 3
317 단편 실제가 환상이 되는 때 루나 2006.10.18 0
316 단편 『도깨비 검사』 K.kun 2006.10.16 0
315 단편 『죽어야 하는가, 언제, 사람은』 K.kun 2006.10.16 0
314 단편 단순한 요청1 異衆燐 2006.10.13 0
313 단편 예언 이야기 wj 2006.10.07 0
312 단편 [엽편]작은 문학도의 이야기 - 꿈2 미소짓는독사 2006.10.01 0
311 단편 시간 정지자(Time Stopper ) Enigma 2006.09.22 0
310 단편 반역자(The Traitor) 나길글길 2006.09.18 0
309 단편 버추얼 월드(Virtual world) 나길글길 2006.09.05 0
308 단편 그것이 돌아왔다3 감상칼자 2006.08.27 0
307 단편 왕국의 방패, 민초의 검. 그리고 고약한 무장6 JustJun 2006.08.23 0
306 단편 아르실의 마녀 포가튼엘프 2006.08.17 0
305 단편 B급 망상극장 : 무뢰도 - 아미파 최후의 날8 異衆燐 2006.08.16 0
304 단편 영웅의 꿈.1 2006.08.13 0
303 단편 내가 그대를 부르고 있어요. 뤼세르 2006.07.25 0
302 단편 그녀가 원했던 것1 감상칼자 2006.07.22 0
301 단편 뱀파이어 앤솔러지 2차 수록작 발표 mirror 2006.05.17 0
300 단편 뱀파이어 앤솔러지 수록작 발표 mirror 2006.04.15 0
299 단편 아네트 異衆燐 2006.07.20 0
298 단편 어느 겨울 밤에 찾아온 손님 異衆燐 2006.07.20 0
Prev 1 ... 90 91 92 93 94 95 96 97 98 99 ... 110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