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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졸업

2004.03.14 19:5403.14




  나는 서울을 사랑한다. 파르스레 빛깔 바랜 건물 끝에 맞닿는 하늘, 그리고 순식간에 흉폭해지는 미친 세파를. 사랑해야 한다. 태양과 구름을 삼킨 밤의 도시, 달은 노란 눈동자처럼 나를 직시했다. 그것은 적의를 품은 위험하고도 낯선 존재다. 세파가 책상까지 치솟아오르거나 이 물길 한 오라기, 내 몸을 휘어감을 때면 아, 가슴이 두근거리는 그 순간 나 고개 들면 노란 눈이 노려보고 있다. 그 눈빛 가슴을 에워댄다. 무섬이 켜켜이 돋아난다. 교실은 더 이상 안전한 수용소가 될 수 없다. 이제 달은 한층 낯설고, 내 본성을 뒤흔들며 시민에게 부여된 숙명에 모순을 더한다. 노란 달 일렁이는 서울은 낮보다 더욱 푸르다, 음충맞다, 어느덧 아름다운 숨결 모두 다 빨아먹는다. 타오르던 가슴 바수며 휘어감기는 공기! 폐 안에 엉겁한다!
  선도자는 너에게 질문을 퍼붓는다. 이제 너는 신을 믿느냐!
  서울은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나는 홀연 쓰러진다. 의식을 잃었다. 그런데도 끊임없이, 바라봐야만 한다. 영예로운 미래를 위해 끝없이 시간을 낭비해야 한다. 일생에 한 번뿐인 기회다.
  너는 교과서를 끌어안고 잠을 기다린다. 선도자는 외친다, 의식을 잃지 마라!
  이제 너는 신을 아느냐! 선도자는 잇따라 질문 퍼붓는다.
  서울은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자장가다. 혼연의 질문이다. 노래는 한 오리의 잠도 허락하지 않는다. 입 안 가득 소금물이 들어찬 듯 아리다, 비리다, 갈증 샘솟는다. 서울은 내 가슴에 짠물을 퍼붓고 상상 속의 모든 여행길을 소금으로 뒤덮고, 바르릉 그릉거리며 신음하게 만든다. 서울의 밤이 거칠게, 울었다, 노래가 아니다! 울음소리다! 교실에 비린 물을 퍼부으며 울어대는 성난 서울이 내 머리를 뚜들겼다. 나를 흔들며 떨도록 종용한다.
  같은 가슴 부여안고 함께 신음한다, 우리는 함께 울었다.
  너는 한둘의 얇은 책장으로 가로막힌 물을 잊을 수 없다.
  울음소리 따라 교실 비스듬히, 눕는다, 쓰러진 채 신음한다.
  책가방이 쓰러진 네 곁으로 굴러왔다.
  섬뜩한 목소리! 나를 뒤덮는다! 서울의 비명이 등줄기 타고 흐른다.
  선도자가 외친다, 교실 안에서 형편없는 꿈이나 꾸고 있는 학생, 이봐 너 말야, 눈을 떠! 이제 깨어나! 아직도 신을 모른다면 너는 구제불능이다, 나가라!
  이제 너는 노출되고 발견되는 것을 두려워한다.
  노출된 모든 공간이 무섭다. 서울과 마주하는 순간 나는 속절없이 당황하는 어린 물고기가 된다. 너무 이른 여행으로 짠물을 만나 버린, 호흡하는 법을 더 배워야 하는 어린 물고기다. 이런 상황에 직면할 때 대부분의 학생들은 공황에 빠진다. 한순간 상황파악의 능력을 상실하고 고개 들 것을 거부하는 달팽이처럼 자신만의 껍질 안에 숨어 교실 밖을 상상하거나 나뭇잎 뒤의 도마뱀처럼 사지를 번갈아 딛으며 도망친다.
  벽이 늘 울울한 복도, 흐릿한 칠판 앞, 항상 어둑한 화장실, 여하간 어디서든 그렇다. 안전하던 교실이 모두, 일렁이는 불길, 끔찍한 눈으로 변해 학생을 노려보기 시작한다. 나는 좀 더 안전한 미로를 그리워한다, 거대한 학벌의 도표 어딘가에 표시된 나 자신의 성적을 확인하고, 교실 밖을 꿈꾸며 거리를 넘겨다보고 그 서울의 품에서 완전히 새로운 노래가 탄생하는 순간을 상상한다. 교실에 도사린다. 안전하게 묶어 둔 책가방이 웅크린 내 곁으로 굴러들고, 그림자를 늘리고, 세파와 함께 우당탕 굴러다니다 탕탕 내 가슴을 두 번, 치고 갔다. 교실이 끊임없이 요동질 친다. 나는 진이 다 빠지고 정신이 혼란스럽고 감각마저 무뎌진다. 꿈꾸는 것도 손가락을 씹는 것도 다 지겹다. 내 귀는 기형적으로 길어진다. 교실을 둘러싼 모든 노래가, 변용하고 있다, 학습으로 길러진, 싸우고 약탈하고 추격하고픈 모든 욕망이 스러져 간다. 불안이 숙면의 씨앗을 뿌리고 있다. 무감각할 수 있다니? 무엇이 우스운지도 모른 채 나는 웃는다. 운다. 웃었다.
  너는 까북 존다. 씨앗에서 싹이 터오른다. 너는 까북까북 존다.
  사나운 고양이, 긴 혀 늘어뜨린 개 또 현란한 날개를 펄럭이는 새가, 온갖 종류의 다족동물이, 다지류와 홍학과 강철 갈고리의 덫, 새까만 칠판에 타오르는 창백한 불꽃이 너를 위협한다. 그들은 너를 추격하고 있었다. 너는 여전히 신을 모르느냐!
금방, 정신이 퍼뜩 든다. 긴 여행의 준비가 나를 녹초로 만들고 잠을 빼앗아 갔다.
책상 곁에서, 이리저리 뒤척이며 다시 잠을 기다린다.
  꿈을 꾼다.
  굶주린 선도자들이 너를 엿본다. 그들의 손톱이 네 등을 긁어댄다. 너는 소스라치며, 소리치며 도망쳤다. 그러나 선도자들이 사방에서 너를 둘러싸고, 습격하여 배를 가르고 내장을 빨아먹는다. 너는 빠져나올 수 없다, 구출의 희망은 없다. 속이 빈 너는 다시 지네와 노래기와 비둘기 떼가 우글거리는 수돗가에서 몸을 말린다. 꿈이다.
나는 힘겹게 눈뜬다. 천천히, 교실 문이 열리고 있었다.
  교실이 한 번 더, 심하게 흔들리고, 책가방이 다시 재주를 넘고 교실은 세파 켠을 미끄러지며 신음한다. 삐이꺽, 꿈이 열리고, 닫힌다. 나는 교실 밖으로 뛰쳐나가고 싶다! 될 수 있는대로 어서 빨리, 교실 밖으로 나가자! 한낮의 태양이 서울 앞에 선 나를 그슬리기 시작한다. 나는 말라붙는 머리카락 아래 물이 고이는 것을 느낀다. 멀리, 멀리, 교문이 바라다보인다. 그곳은 플랫폼이다. 봄, 소리가 나리고 있다. 누군가 또 멀리 떠났다. 이번에는 내 차례다! 짐 꾸리는 기형아들 틈을 이리저리 종종거리며 연방 성적표를 훑어보는 선도자의 눈을 피해 교문 앞에 서서 바람을 삼킨다. 기형아들은 빨간 리본을 매고 교문 앞에 늘어선다. 나는 다리를 절기 시작한다. 책 더미나 쌓아 올린 분필 상자 곁을 탐험하고, 포장된 또 다른 학생들 틈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다 틈서리 없고 구멍 없는 벽에 다다르고, 다시 뒤돌아 절뚝이다 교문 옆 제일 좁은 문을 빠져나왔다. 교실을 떠나는 자에게 주어진 최초의 기회다.
  너는 좁은 길을 따라 걸었다.
  너는 반쯤 파먹힌 학생을 발견한다.
  같은 길을 먼저 걸었던 학생이다. 교문 켠에 버려진 이 학생은 목이 반쯤 잘렸고 창자가 비죽 튀어나와 있다. 어딘가에, 이 좁은 길 어느 구석에 쥐덫이 있을 것이다. 그는 좁은 길을 걸어 교문을 나서다 살해당한 것이다. 불량아는 교문 앞에서 죽는다.
  혹은 교문을 빠져나가 어느 거리에서, 죽는다.
  나는 다시 좁은 길을 걷는다. 기필코 교문을 빠져나갈 작정이다, 다시 교실로 돌아갈 기회는 이제 없다! 그곳에는 이미 내 자리가 없다. 다시는 그런 기회가 없을 것이다. 길을 걸어 교문을 빠져나가 거리를 걸으며 서울의 노래를 따라 불러야 한다. 교실 천장에 일렁이던 거리의 그림자, 울음소리를 도시 한가운데로 끌어들여, 서울의 꿈에 물을 뿌리는 시민이 되어야 한다. 물은 소금기가 짙고, 한 모금 핥은 누군가는 갈증에 시달리다 파르스레 빛 바랜 태양을 그리워하게 될 것이다.
  교실로부터 영혼이, 소리를 서울로 밀어넣고 있다.
  갑자기 네 몸의 두 배나 되는 커다란 남자가 너를 덥친다! 네 목을 자르려 한다!
  너는 주먹으로 그의 코를 때린다. 그가 움찔 물러섰다, 코 아래로 연한 빛의 피가 한 오리 흘렀다. 너는 멈춰 선 대형 승합 자동차 옆으로 뛰어올라 창턱을 움켜잡고, 다시 승합차 지붕에서 승합차 지붕으로 건너뛴다. 먼지 투성이인 자동차 위로 뛰어내려 몸을 숨겼다. 늘어선 자동차들 틈에서 몸을 옹크리고, 살짝 머리만 내밀어 주위를 살핀다.
  머리 위에 비둘기 한 마리, 선회하고 있었다. 비둘기 한 마리 너를 지켜본다.
  무섭고, 피곤하고 굶주린 나는 자동차와 자동차 틈에서 숨은 채 떤다. 허술한 은신처에서 저녁이 될 때까지 더위에 시달린다. 덥다. 봄인데 덥다. 옴츠러든 가슴에서 물이 새어 나왔다. 짓무른 가슴에서 물이 새어 나왔다. 연기에 쏘인 듯 눈이 맵다. 갈증!
  이것은 네가 바란 여행이다. 이것은 네가 뛰어 온 길이다.
  돌아보면 교실로 이어진 길이 있다. 교실은 더 이상 안전한 수용소가 아니었다.
  저녁놀이 주차장을 적셔 간다. 어스름이 자동차 켠에 스며든다. 주차장에 늘어선 자동차들이 눈을 치켜뜨기 시작한다! 여러 줄기 빛이 사방을 노려본다.
  나는 더 깊은 밤은 기다리고 있다.
  나는 멈춰선 자동차 곁에서 천천히 기어나온다. 충분히 주의를 기울이며 살금살금 기어나왔다. 다리에도 배에도 먼지가 엉겁해 있다. 얼굴에는 기름이 번들거리고 그 위에 다시 먼지가 한 웅큼, 들러붙는다.
  선도자들이 너를 쫓고 있다. 너는 아직도 신을 믿지 않는다.
  선도자들을 피해 도망치며 너는 교실을 잊는다, 너는 저 어둠 너머 도시에, 서울에, 그 교차로 얽힌 거리에는 선도자들이 없으리라 믿는다. 지금 막 너는 선도자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죽음을 모면했다. 또 그 직전에는 어느 남자의 손톱이 네 얼굴을 할퀴려는 찰나에 그를 밀쳐내고 소리치고, 도망쳤다. 부스러진 벽돌이 엉기고 바스러진 아스팔트와 말라붙은 피딱지를 얼굴에 잔뜩 묻힌 너는 골목 어느 지하도에 몸을 숨긴다. 수비 지역과 무방비 구역 사이에 무섭도록 정확히 경계선을 긋던 유년기는 이미 끝장났다. 너는 이제 서울에 섞여 드는 젊은 시민이다. 교실은 이미 잊어버렸다. 선도자들의 웅성임이 사그라들고, 이제 너를 추적하는 사람은 없다.
  나는 머리 위를 비추는 가로등을 치어다봤다. 무너지듯 주저앉는다. 걸음이 멈춰졌다. 하수구 어느 켠에서 어느 벽 아래서 송그린다. 그때 나는 벽 위에서 밑으로 흘러내리는 소리 없는 그림자를 봤다. 큰 쥐 만한 바퀴벌레다. 그는 나와 마주치자마자 서둘러 도망치려 했다, 나는 손을 휘둘러 그를 움켰다. 맞은 편 벽에서도 옴츠러드는 그림자가 보인다. 팔을 일곱 번 휘둘러 네 마리의 거미를 잡았다. 다리를 음미하고, 몸통을 씹으며 힘을 되찾는다. 그제서야 나는 골목 바닥에 배를 파먹힌 고양이, 머리부터 앞다리까지만 남은 개, 새의 꼬리깃털, 온갖 종류 다족류의 잔해, 탈출 동지들의 껍데기가 흩어져 있는 걸 발견했다. 나는 소스라쳐 밖으로 뛰어나가며 털이 숭숭 돋은 바퀴벌레의 다리를 씹는다. 나는 나중에야 서울 어느 거리에서, 몸집이 큰 시민들이 내 뒤를 따라나선 어린 시민을 잡아먹는 것을 봤다. 비슷한 누군가, 에게 잡아먹힌 동지는 그 일이 있기 전 하수입구 근처에서 나와 마주치곤 교차로 어귀까지 쫓아왔다. 뜨거운 햇볕이 달궈 둔 아스팔트 위에서 그 소녀는 내게 이빨을 드러냈다. 덤벼들려 했던 걸까. 그 애 나름의 인사를 하려 했던 걸까. 햇발 꽂히던 교차로를 기억한다. 그때 커다랗고 사나운 시민들이 나타나 그 소녀를 바닥에 짓눌러 온몸을 쥐어뜯고 토막낸 살점을 서로 나눠 가슴 깊숙히 묻은 채 서울 어딘가 숨겨진 자신들의 집으로 가져갔다.
  너는 그들이 팔을 단 한 번 휘둘러 소녀의 머리를 부수고, 다시 목을 끊고, 아스팔트 위에 그 애의 잔해를 펼쳐 두던 걸 기억한다. 성숙한 시민들은 송골송골 피가 돋는 여자애의 몸뚱이를 서로 잡아 찢으며 제 몫을 주장하고, 끊고 잘라 나누어 가졌다. 가져갔다.
  교실이 그립다.
  너는 결코, 돌아갈 수 없다. 교실은 더 이상 너를 안아 주지 않는다.
  나는 여전히 신을 믿지 않는다.
  너는 다시 서울 속으로 스며든다.
  나는 거대한 학벌의 도표 어딘가에 표시된 성적을 한 순간도 맛보지 않았다. 영원히 낙원에 들어가지 못해도 좋다. 이렇게 서울에서 살음을 관찰한 나는 생애에 기억될 모든 것들에 궁극의 목표가 맺히는 것을 확인한다. 영원한 낙원은 한층 끔직하게 변했다. 파르스레 빛 바랜 그림자 일렁이던 천장을 기억한다. 영원한 낙원을 기억한다.
  너는 햇발 꽂히는 교차로를 피해 건물과 건물 틈의 그림자만 골라 밟는다. 알 수 없는 위험과 덫을 피해, 격분한 시민들이 우글거리는 교차로를 훔쳐보며, 도시를 만끽한다.
  나는 작열하는 서울에 새로운 노래를 그 울음소리 위에, 꽃씨처럼, 뿌려야 한다.
  교실에서 태어난 꿈을 서울에, 퍼뜨려야 한다.




명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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