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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ica & D.yohan
part 1.

[두 하늘을 날다]
side by D.yohan
to unica


1.목소리를 듣다.



목소리는 처절하게 들려왔다.
그래. 매우 처절하게 들려왔다. 어떤 내용이었든, 그것은 목 졸린 소리처럼 매우 가늘었지만 내용은 분명했다.

"꼭 그래야만 하나요……."

목소리는 한참이나 침묵하다가, 결국엔 조용히 긍정을 말한다. 그래야만 한다. 마치 연인의 헤어짐처럼. 그래야만 한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한참이나 붉은 불꽃을 바라보다가 나는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그 동작이 평소와는 다른 무게로 다가왔다.

그도 같은 내용을 들었겠지. 라고 생각하면 두려워진다. 아련해진다. 눈앞이 아득해지고 만다. 그리고 점점 소리가 멀어져간다. 화르륵 타오르는 불꽃의 속삭임도, 끝없는 밤을 휘감는 장막의 비척거림도, 조용해진다. 어느 순간 나는 깨달았다. 아무것도 들을 수가 없다는 사실을…….


*

빛이 있다고 해서 꼭 밝은 것은 아니란다. 조용히 속삭였다.

   "네? 빛이 있으면 밝아지는 게 아닌 건가요?"

금갈빛 머리카락의 아이는 놀라며 묻는다. 나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리고 손바닥을 펴 하나의 영상을 그려내었다. 밤의 안개와 낮의 노래를 닮은 환각이었다. 한 개의 촛불은 어두운 곳에서 작지만 밝게 빛나고 있었다. 그 작은 촛불은 바람결에 위태롭게 흔들렸다. 아이의 얼굴에 불빛이 빛난다. 아니는 그 촛불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다.
그러나 곧 저편에서 새로운 빛이 나타난다.
그 불빛은 태양 같은 밝음으로 영상을 물들였다.
촛불은 차츰 그 빛의 밝기를 잃어갔다. 아이는 깜짝 놀라며 묻는다.

  "어째서 어두워지는 거죠?"

반드시 빛이 있다고 해서 밝은 것만은 아니란다. 더 밝은 것이 떠오르면 이전 것은 어두워지게 되는 것이지. 나는 쓴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그럼 어떤 것이 밝은 것이죠?"

아이는 총명하게 묻는다. 아이의 금갈빛 눈동자가 마음을 흔들리게 했다. 아. 그의 눈동자도 저렇게 분명했었다. 그 분명함은 날 안온하게 했었다. 멀리 있어도 그와 나 사이에 연결된 긴 끈을 통해 그 분명함이 전해져온다. 하지만 이성이라 불리는 것들은 나를 그에게서 멀어지게 한다. 나는 그와 달랐다. 좋은 것들을 골라내야 해. 유니카. 나는 고개를 가로젓는다. 절대적으로 좋은 것은 없어요. 요한. 단지,

   더 좋은 것이 있을 뿐이야. 절대적인 것은 없는 거란다. 그것을 기억하렴.

   "그렇군요. 절대적인 것은 없는 거군요……."

아이는 수긍한다. 그러나 나 자신은 정작 수긍하고 있는 것인가 의문이 든다. 절대적인 것은 없어. 하지만 그는 절대적이라고 말한다. 이 밝은 하늘 아래 그는 분명히 말한다. 하늘과 땅은 분리되어 있다고, 그래서 날수 없다고 말한다. 그리고 하나하나 아름다운 것들의 이름을 나열하면서 그 것들의 가치를 이야기한다. 나는 그의 이야기를 유심히 들었다. 그러나 곧 드는 생각은 정말 그럴까? 하는 것이었다. 하늘의 구름들이 하나 하나 구분이 불가능한 것처럼, 어쩌면 우리도 너무 불분명한 것들 속에 살고 있지 않을까?

나는 불확실했다. 아직까지도 이 세상을 버려야 한다는 그 목소리를 이해하지 못했다. 내 눈에 들어오는 모든 것들은 모두 아름다웠고, 그 어느 것 하나 버리기 아까운-아니 힘겨운- 필요들이 존재했다. 모든 것들에게 그 가치를 매기는 보석이 담겨있다면, 그 보석들은 하나의 왕관을 장식하고 있는 것이다. 어느 하나 빠져버리면 그 왕관은 전설이 될 뿐이다. 레몬왕의 왕관처럼.

*

레몬왕의 왕관을 장식하던 흰색 호박은 벌써 100여년 전에 사라졌다. 어떤 경이적인 마법사의 노력에 의해 노란색이었던 싸구려 보석 호박은 곧 흰빛으로 변했다. 그래서 그 보석은 갑자기 가치가 상승했다. 절대적인 것은 없었다. 마법사의 옷 단추를 장식하던 호박은 얼마 뒤 레몬왕의 왕관을 장식하게 되었다. 그리고 어느날 사라졌다.

가장 아름다웠던 레몬왕의 왕관은 한번도 레몬왕의 머리에 쓰여지지 못했지.

"왜요?"

너무 무거웠거든. 보석하나가 사라져서 아름답지 않다는 핑계를 대긴 했지만.

까르륵. 아이는 머리를 흩날리며 웃었다. 나 역시 그 아이의 맑은 미소에 자연스럽게 웃었다. 그 아이의 웃음을 보고 있으면, 세상이 멸망한다거나. 하는 생각은 잊을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항상 아이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로 웃음을 만들었다. 그래서 레몬왕이 결국은 그 아들에 의해 죽었다는 사실을, 그 왕관은 아들의 머리에 쓰여졌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그 아들 역시 형제의 칼에 맞아 죽었다는 사실도.
어쩌면 목소리의 말은 맞을 지도 모른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한참 웃던 아이는 갑자기 생경하게 고개를 든다. 마치 목소리를 듣는 듯하다. 약간의 떨림. 그 아이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리고 천천히 일어섰다. 하얀빛 석주가 그 아이를 버텨주었다. 떠날 시간인 듯 했다. 순간 그 아이를 잡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아이가 유일하게 내 귀가 되어주었다. 멀어버린 소리였지만, 그 아이의 목소리만은 뚜렷하게 들렸다. 유일한 귀의 즐거움이었다.

가는 거니?

"네. 그가 불러요."

지금 어떤 소리가 나고 있지?

"바람이 불어요. 빗소리도 들리 구요. 밖에 벽을 때리는 빗방울 소리가 요란하게 들리네요. 그리고, 그의 목소리가 들리고 있어요."

그가 뭐라고 하니?

"……말해줄 수 없어요. 그건 '약속'된 거에요."

나는 아이를 바라보았다. 아이의 금갈빛 눈은 그를 닮아있었다. 아이는 흐려졌다.

*

기억 저편에서나 맡아보던 흙냄새였다. 이토록 발악적으로 맡아지리라곤 상상도 못했다. 숲 속은 온통 어두웠고, 그나마 달빛에 의지한 채 걸음을 옮기는 게 가능한 정도였다. 내가 왜 이렇게 급하게 달아나야 할까. 신복(神服)은 여기저기 찢겨져 상처투성이가 되었다. 혼란에 물든 머리끝은 어둔 밤 안개가 스며 더욱 차가웠다. 달아나기 싫었다. 하지만 버려진 신전에 있던 그녀를 선량한 나무꾼이 발견했다. 창을 빗겨든 신전 병사들을 멀리서 바라본 그녀는 달아날 수밖에 없었다. 목소리가 알려주었기에 알 수 있었다. 목소리는 결코 나를 죽이지 않을 것이다. 그럴 것이다.

  //인간의 병사들이 가고 있단다.//

무엇을 위해서 이러시는 거죠?

//인간의 병사들이 가고 있단다.//

목소리는 나를 위해서 대답하지 않았다. 단지 나에게 말할 뿐이었다. 그때도 나에게 말했을 뿐이었다. 그 내용이 얼마나 충격적이든, 얼마나 고통스럽든 간에. 목소리는 나에게 말해주었다.

  세상은 더 이상 유지될 수 없다고, 그래서 멸망할 수밖에 없다고

견딜 수 없이 괴롭고, 견딜 수 없이 고통스러웠다. 그 고통 와중에 그가 찾아왔다. 나에게 희망을 준 그가 찾아왔다. 눈물 범벅이 되었던 나에게 그는 상쾌함으로, 청량함으로, 말해주었다.

세상을 구하자고.

그리고 우리에게 아이가 찾아왔다.

목소리는 그 아이를 통해 알고자 했다. 세상은 유지 될 만한 것인지를. 무서웠지만 그가 있어 견딜 수 있었다. 그러나 곧 그도 사라졌다. 그의 세계로 떠나갔다. 나 역시 나의 세계로 떨어졌다. 두려웠다.

순간적으로 새가 날아올랐다.

털썩. 나는 넘어져버리고 말았다. 바닥에 엎어진 채 숨을 몰아쉬었다. 나의 귀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기에 새의 소리도 듣지 못했다. 그리고 신전 병사들이 얼마나 다가왔는지, 역시 알지 못했다. 두려웠다. 어느 순간 아까 같은 새가 날아들어 나를 놀라게 할지 몰랐다. 두려웠다. 눈물이 나왔다.

세상이 불명확하게 흐려져갔다. 눈물 속에서 바라본 세상은 일그러지고 낯설었다. 아래에서 바라본 위는 너무나도 달랐다. 문득 깨달았다. 나는 아직도 세상을 모른다, 라는 사실을. 고작 아래에서 올려다보았을 뿐인데도, 나는 다른 것을 보았다. 일어나야 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세상을 그저 망하게 할 수는 없었다. 내가 모르는 가치들이 모든 곳에서 숨겨져 있을 것이다. 숲 속 나무들 틈을 비집고 스며든 저 밝은 달빛처럼. 어느 순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나 역시 세상의 아름다움을 알게 될 것이다. 사라지기 전에 알아야 했다. 시간이 없었다.

힘겹게 일어나 걸음을 옮겼다. 한 밤을 모조리 헤매고야 숲을 벗어날 수 있었다. 언덕 위에서 바라본 하늘은 힘겨운 몸부림을 치고 있었다. 새로 떠오르는 새벽의 소년과, 밤의 소녀는 서로의 손을 맞잡은 채 서쪽으로 달려갔다. 그들의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는 저 새벽성이다.

우리 힘내요. 요한. 아름다운 것들을 찾아내요.

비록 세상이 힘겹게 할지라도.

언덕 저편의 나무로 지어진 작은 신전이 햇살에 생동감 있게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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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합니다. 음흉한 뭉게뭉게 프로젝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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