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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ica & D.yohan
part 1.

[두 하늘을 날다]
side by unica
to D.yohan


저 멀리- 아득한 시공 속에서 전해져오는 목소리들 가운데에는 귀를 기울여야 할 목소리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것들도 있단다. 아이야.  

        “어떤 것들이지요?”

아이는 신중하게 물었다. 아마도 아이의 옅은 금발이 어둠 가운데에서도 희미한 광채를 내면서 빛이 나고 있겠지. 아니 빛을 반사시키고 있겠지. 우리들은 빛을 결코 낼 수는 없다. 빛을 받아 반사시키는 것이면 모를까.

        “좋은 것들과 나쁜 것들을 분별하고 골라내는 것이지.”

        “그럼, 좋은 것들과 나쁜 것들이 무엇인지 어찌 알 수 있지요?”

그녀와 같이 있다오니 그녀의 화법을 많이 닮지 않았느냐. 난 그리 말하면서 웃었다. 한동안 웃는 날 바라보다가 아이 역시 내 웃음을 흉내 내면서 웃기 시작했다.

        “이곳의 불은 푸른 색이여서 매우 이상합니다. 그 곳의 불은 붉은 색이어서 이상했고요.”

짙은 보랏빛의 어둠이 밀려오면서 푸른 모닥불의 불빛은 주위를 더욱 옅은 푸름으로 감싸 안고 있나 보다. 등 뒤의 기운이 서늘해짐과 동시에 앞의 모닥불의 온기가 더 강해진 듯 했으니 말이다. 아이는 신중하게 말을 골라서 내었다. 고르는 방법은 그녀의 신중함 그대로이다. 분명 나와 이리 있다가 가면 그녀에게서 이런 말을 들을 터이다.

        “이번에 제게 주실 선물은 어떤 것인지요?”

난 손가락을 움직여서 류트의 선을 한 아름 쥐었다가 놓았다. 그와 동시에, 맑은 음색이 울려 퍼졌다.

        “좋은 것이지. 좋은 것.”

그래. 좋은 것이란다. 아이야. 좋은 것들로만 가득가득 채우려야 하니까 말이다. 비록 내 한 몸 망신창이가 되더라도-. 들려온 목소리를 제대로 설득시키지 못한 예언자가 되더라도 말이다.

좋고 아름다운 것들, 향기가 나는 것들. 그래 선한 것들로 많이 가져간다면. 그러한 것들로 가득 채운다면-. 아니 그러한 것들로 지금 이곳이 채워져 있는 것이라면. 그리했다면. 그 목소리도 내게 이런 결정을 하지 않게 해 주었을까. 조각조각 갈라지고 터지고 곪고 악취가 나는 하지만 쉬쉬- 조용히 그러면서 적당히 얼버무린 이 세계를-. 이 세상을 -. 이 하늘을. 버리지 않을 거라고 말해주었을까.

        “이번에 내가 말해주는 것은 새하얀 말에 대한 것이란다. 이 말은 말이지. 이마에는 성스러운 사람들을 분별하는 투명하게 반짝이는 뿔을 가지고 있고, 등 뒤에는 새하얀 날개가 있단다. 그들은 영웅들만을 등 뒤에 태우며, 고귀한 숙녀들에게만 경의를 표하지. 순진한 어린이와 처녀들에게는 특히 다정하며-.”

이미 무너져가는 세상- 겉으로 보기에는 더없이 화려하고 아름다우며 고고하더라도 안에는 악취가 나고 썩어간다 하더라도. 이런 세상 내 두 눈 안에 담는 거 감사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이제는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하늘이 어떤 색이었고, 땅의 부드러움이 어떤 색이었는지. 커다란 말썽꾸러기 쉬암의 색이 어떤 색이었는지. 광폭하고 난폭한 테암의 색이 어떤 색이었는지. 그래. 내게 있어서 두 번째로 소중한 그녀-. 그녀의 외모가 어떤 색으로 이루어져 있었는지 도저히 기억이 안 난다. 단 한번. 단 한번 안아보았던 그날의 기억만이 남을 뿐. 하긴 그녀는 내 세계에 속해있던 이가 아니었다. 문이-. 거울이 열렸을 때 마주쳤을 뿐. 그 때만 해도 이 두 눈 안에 시력이라는 것이 머물러 있었을 때였다.

        “좋은 친구인가요? 그것은?”

아이의 질문에 난 내 생각의 방황을 잠시 멈추고서 상냥하게 대답해주었다.

        “좋은 친구가 될 수 있단다. 자 이제 선율로 이동시켜 줄 수 있겠니?”

아이의 작고 부드러운 손가락이 헐어버린 내 손 끝에 와 닿는다. 부드러운 꽃잎의 감촉이다. 그녀의 입술도 부드러운 꽃잎의 감촉이었던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더 나위할 바 없이 그녀는 신중했고, 부드러웠다.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하지만 지금 내 모습만큼이나 그녀 또한 많이 변했겠지. 뒤틀려버린 내 왼쪽 다리와 팔. 그리고 얼굴. 두 눈의 시력은 이미 잃어버린 지 오래.

하지만 후회하지 않는다. 아이의 부드러운 손가락이 내 류트 위에 와 닿아서 천상의 선율을 연주해낸다. 류트의 또 하나의 줄이 아이의 손길이 떠남과 동시에 끊어져서 날카로운 음을 내면서 내 손등 위에 와 닿았다. 비릿한 혈향이 감돈다. 하지만 난 웃었다. 씩씩한 천마의 울음소리가 거울 저편으로 걸어 들어가는 듯한 기운을 느꼈기에.

후회하지 않는다. 속삭이고 또 속삭인다. 노래하고 또 노래한다. 연주하고 또 연주한다. 그녀도 이러할까?

목소리를 듣는다. 목소리를 내어 답한다. 그것이 내가 해야 할 일이다. 요한이라는 이름을 가진 내가 해야 할 일이다.

        “배신자를 처단하라. 신의 뜻을 저버린 예언자를 처단하라.”

절대로 용서치 않겠다. 그것이 지금 내 뒤를 가장 열혈하게 쫒으면서 그가 그날 내뱉은 말이다. 그는 나의 형이다. 그리고 신국의 황제이기도 하다. 그 날.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목소리를 듣고 나온 내게 형은 빙글빙글 그의 검을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휘두르면서 내게 환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여-. 예언자 동생. 이번에는 뭐라 하시었는가? 이 잘난 형님께 어여쁜 형수감이라도 점지해 두지 않으시더냐?”

검 수련장에서 바로 나온 티를 역력히 내면서 시녀에게서 수건을 받아서 땀을 닦아내던 형은, 아니 요나함은 농담을 지껄여대다가 말을 멈추었다. 요나함의 자안(紫眼) 안에 비친 내 적안(赤眼)은 묘한 빛이 되어서 투영이 되고 있었다.

적안(赤眼)의 황자는 묘한 존재이다. 황가의 피를 이어받은 주제에, 예언가의 눈을 가지고 태어났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절대적인 평화이다. 그렇지 않은가. 예언가 즉, 신관의 지위란 평생 동안 아이를 가질 수 없고, 황제를 위한 예언만을 할 수 있도록 운명이 지워진 그런 의미이니까. 반란이라던가, 권력 다툼이라던가. 그런 것은 절대로 없다. 즉 절대적인 안정.

        “무슨 일이 있던가?”

절대적인 안정 따위 쉬암에게나 주어버리라지. 난 그런 말을 절규하면서 아마, 쓰러졌던 듯싶다. 눈을 다시 떴을 때에는 더 이상 내 앞에 빛 따윈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말이다. 그저 목소리들만이 들려왔다.

        “요한? 어의는 무엇 하는 게요? 왜 황자가!”

태후의 목소리가 들렸고, 옆에서는 요나함의 당황스러운 듯이 수선을 피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들을 버리라는 것입니까. 적안이건 자안이건 신경을 쓰지 않고서 날 한 사람으로 대해준 저들을? 이제야, 요나함 녀석이 황제가 되었는데? 온 나라와 만백이 요나함 저 녀석에게, 나의 주군에게 충성을 바치고 평화로운데? 이런 평화를 깨뜨리라는 것인가. 내게 하여금 이 세계를, 이들을 없애라는 것인가! 간신히 이룬 이 조화를 깨뜨리라고?

빌어먹을! 절대로 그 따위 짓 할까보냐. 나 아니어도 예언자는 많다. 그들에게 맡기면 되는 일. 난 그저 못들은 척 할 테다. 난 그저 못 본 척 할 테다. 하지만 목소리는 여전히 이죽거리면서 내 머릿속에서 울려 퍼지고 있다.

        //보지 않겠다면 보지 마렴.//
  
이 따위 소리와 함께 내 눈앞에 보이던 태후, 나의 어머니의 얼굴, 요나함 녀석의 얼굴이 사라졌다. 아니 주변 전부가 침침한 어둠 속으로 잠식해 들어갔다.

        //보지 않는 것이 아이야, 네게는 더 편할 수도 있겠구나. 어찌 하겠느냐? 물론, 너 이외에도 많다. 내 목소리를 듣고 이행할 자가. 아이야, 네가 키워야 할 ::그 아이::는 다른 이에게서 이곳의 좋음과 나쁨을 배워서 나가겠지. 네가 하건 안 하건 이곳은 이미 낡은 곳이다. 언젠가는 무너지기 마련이다. 이 곳의 좋음을 좀 더 정확히 잘 알려줄 이는 너라고 생각했다.//

        “배 째시오! 제길! 안 해! 못 해!”

        “황자? 왜 그러시오? 여봐라, 정신이 혼미한 듯하니, 약을! 어서 약을 지어 오거라!”

요나함 녀석이 보기 싫다는 이유만으로 그 녀석에게 반항하던 무리들이 있었다. 지금은 깨끗하게 처리가 되었지만 말이다. 그 녀석들이 날 요나함 녀석 대신 황제 자리에 앉히려고 쫒아 다닐 때 난 죽어라고 도망을 다녔다. 간신히 요나함 녀석이 황제 자리에 앉았을 때야 비로소 안도를 하고서 황궁에 들어설 수 있었다지만 말이다. 물론, 왜 좀더 빨리 자리 차지하지 않았느냐고 한방 먹여주기는 했지만.

        “어마마마. 절대로 못 합니다. 안 할 겁니다. 제길. 제 정신인지!”

        //제 정신으로 널 만들었단다. 아이야.//

농담 아니야. 그래도 저번에는 적어도 인간이었다. 잘 기억은 안 나지만, 아마 그 날 불쌍하신 내 모후께서는 혼절하셨던 듯싶다. 요나함 녀석의 황당한 목소리가 들리면서 턱에 엄청난 충격이 느껴지긴 했지만.

        “정신 차리라고. 이 녀석아. 대체 뭘 듣고 왔기에 이 난리더냐. 모후께서 기겁을 하시지 않더냐.”

나중에 진정을 한 듯 보이자 요나함 녀석이 내게 찾아와서 말을 걸었지만. 이미 요나함 녀석의 얼굴은 안 보였다. 아니, 존재 자체가 어둠 그 자체였다.

        “낡았답니다.”

요나함 녀석이 뭐라고 말하는 듯했으나 난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어둠 속에서 유일하게 보이는 그것을 노려보면서 말이다. 확실히 그것은 갓난아이의 형상을 띄우고 있었다.

        “//목소리//께서 이 곳이 낡았으니, 페기 처분 하셔야 된답니다. 그래서 이 곳의 좋은 것들을 이 녀석에게 전해주랍니다. 할 것 같습니까? 제길! 절대로 안 해! 왜 네 녀석은 보이는 거냐 이 말이다!”

다시 한번 턱에 강한 충격이 느껴지면서 기절한 것은 요나함 녀석의 “진정해!” 단어를 들은 그 다음이었다. 무어, 대략 이런 순서가 반복이 되고나니 치료와 안정이라는 명목 아래에 유폐되는 것은 순식간이더군. 다 네 녀석 탓이다. 하도 시끄럽게 울어대는 네 녀석-. 다른 이들에게는 보이지도 않는 네 녀석을 어르면서, 허공에 우유를 부어대는 것도-. 대략 미친 놈 취급받기 쉬웠지.

        “그 곳의 그녀는 제가 매우 조용했다고 하던걸요.”

아이의 목소리가 난감한 듯 흘러나왔다. 뒤에서 나를 쫒는 형님의 눈에는 아마도 아무것도 없는 옆구리에 뭔가를 끼는 듯한 흉내를 내고서 정신없이 도망치는 미친 동생이 보이겠지. 그것도, 위험한 테암의 봉인석을 훔쳐서 달아나는 동생. 요나함이 즉위하기 전까지 그 힘들게 도망을 다니던 시절에도 평안할 수 있었던 이유는 요나함 녀석의 믿음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토록 불안한 이유는, 절망스럽고 고독한 이유는 요나함의 믿음을 내가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옆으로 돌면 되요. 신전입니다.”

아니, 요나함은 날 애초부터 믿고 있지 않았던 것일까. 목소리를 듣는 것만큼 평소에도 내 주위 이들의 목소리를 들었더라면 좀 더 날 이해해 주기 쉬웠을까. 모르겠다. 그저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니 하고 싶은 것은.

        “저주를 받아 시력을 잃어버린 예언자여- 어찌 감히 신전에 들어올 생각을 하시오.”

        “호오- 요나함 녀석. 아예 내 후임을 멋대로 정했군. 시끄럽다. 선대의 예언자가 아직도 당당하게 있는데 왜 내 앞을 가로막는 게냐. 신전 안에도 들어가지 못 하고 내침을 당하는 주제에-. 네 녀석이 누군지 알바 아니고, 보이지도 않는다만-. 비켜라! 신전 안에서 생명을 해하게 할 터이냐.”

믿기 싫고 듣기는 싫지만. 그래도 변하지 않는 존재를 믿고 보는 것. 그리고 듣는 것. 그것  뿐이다. 적안을 가진 황가의 예언자 요한. 이 내가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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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테암 : 난폭한 이무기 정도? 색은 은청빛. 능히 사람을 잡아먹는다.
쉬암 : 테암과 비슷하게 생겼으나, 색은 금청빛 온순하고 사람을 잘 따르나, 매우 장난꾸러기이다.
un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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