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달이 떠올랐다.

  역광에 짙은 그림자가 진 얼굴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사스케는 알고 있었다. 이 남자는 언제나 달을 등지고 앉아 술을 마시는 것만을 유일한 위안으로 삼은 사람이니까.

  3년여 전, 처음 만났을 때도 그랬다.

  “…다녀왔어, 유키무라.”



  <아직 어리구나. 혼자 일어나기엔 힘들어 보이는데, 같이 가겠니?>

  말을 건네는 얼굴이 너무도 다정해 보였기 때문에, 내밀어진 손이 너무나 따스해 보였기 때문에, 정말 손만 내뻗으면 닿을 거리였기 때문에 머뭇거리면서도 덥석 쥐고 말았던 그때. 상냥하게 손을 내밀어 준 이 남자, 사나다 유키무라를 따라온 것을 후회한 적은 없다. 3년이 지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촉망받는 전쟁 영웅, 사나다 10용사의 우두머리 사나다 유키무라.
  그가 주줘온 사스케가 10용사로 받아들여지는 것에 문제는 없었다. 닌자로서의 사스케의 실력은 출중했고, 유키무라를 향한 충정은 절대 꺾일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나이가 어리긴 했지만 마침 사나다 10용사에는 공석이 있었고, 유키무라는 소년이 ‘사루토비 사스케이기 때문에’ 그 공석을 채워주길 바랬다.

  그 이후 그는 술을 마실 때마다 사스케에게 용서를 구했다.

  단 한 번이라도 실수한 적이 있다면, 아니 하다못해 한 번이라도 울었다면 유키무라도 그렇게까지 하지는 않았을 터였다. 하지만 어떤 까다로운 지령에도 불평 하나 없이 일을 해치우고 제 목숨을 던져서라도 명령을 이행하려는 사스케의 태도에 유키무라는 눈물을 보였다. 10대 소년이 머무르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잔혹한 세계에서도 그림자만을 밟고 살아가야 하는 길. 피투성이가 되어 돌아오면서도 주군을 원망치 않고 그렇다고 울지도 않는 아이로 만들었다는 죄책감이 저 깊은 곳에서 유키무라의 발목을 붙잡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는 또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만 마셔. 내일이 개전인데 뭐 하는 짓이야.”

  “사스케에~ 이제 와아~?”

  취한 걸까?
  아니, 사스케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취했을 리가 없다. 그저 취하고 싶은 것일 뿐. 달아날 수 없는 현실로부터 어떻게든 눈 돌리기 위한 자기위로의 수단으로 술이라는 것을 이용하는 것일 뿐이었다. 성공할 리 없는 매일의 도주였지만.

  별 수 없다는 생각인지 사스케도 유키무라의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울지 않기 때문에 심리적 고통도 받지 않는다면 그것은 기계이리라. 불행인지 다행인지 사스케는 살인 인형이 아니라 사람이었고, 술에 취한 주군의 옆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소년은 오랫동안 가슴 속에 품어왔던 질문을 내던졌다.

  “어째서 나였어?”

  난 너무 어렸고 경험도 없었어, 라는 뒷말은 삼켜지고 말았다. 깨지기 쉬운 유리같은 사람이란 걸 알고 있기에 차마 말할 수는 없었다.
  자기 술잔에 술을 따르며 유키무라는 어깨를 으쓱였다.

  “애초에 쓸모있어 보여서 주웠으니까.”

  “거짓말.”

  무의식적으로 유키무라의 말에 대꾸해 버린 사스케가 잠깐 움찔했지만 유키무라는 신경쓰지 않고 소년의 머리를 부볐다.

  “답을 아는 질문은 하는 게 아니야, 사스케.”

  사스케의 입이 부루퉁하게 튀어나왔다. 아직도 그의 주인은 그를 어린아이로만 생각하고 있었다. 억울하달까, 분했다. 주군에게 인정받기 위해서 그 어려운 일들을 모두 해냈는데, 정작 주군에게 자신은 영원한 어린아이였다. 언제까지고.

  “…미안해. 정말, 미안해.”

  울컥, 화가 치솟았다.

  “시끄러워! 맨날 미안하다는 소리밖에 안 하는 유키무라는 필요 없어! 바보 같은 모습이 차라리 보기 좋았지, 이게 무슨 꼴이야? 너답게 굴란 말이야!!”

  한껏 소리를 질렀음에도 그다지 큰 위화감이 들지 않는 건 정작 혼나는 유키무라의 반응이 미소를 띠고 고민하는 자세로 고개를 갸웃거리는 것이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사스케뿐만 아니라 사나다의 다른 용사들도 유키무라의 달라진 모습을 느끼고 있는 건 마찬가지였다. 다만 바라보는 것이 그들의 방식이고, 화를 내면서도 말하는 것이 사스케의 방식이었을 뿐.

  이전의 유키무라는 철혈(鐵血)이었다. 그러면서도 모두에게 도구 취급받는 사나다의 10용사들을 소중하게 아끼고 그들 앞에서만은 항상 웃고 떠들어대던 상냥한 주군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유키무라는 그야말로 나사가 하나 빠진 듯한 상태였다. 사루토비 사스케, 가장 어린 측근의 소년이 자신 때문에 고통받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것이다.

  “저 역시 사스케가 옳다고 생각합니다, 주군. 사스케가 울지 않는다고 해서 주군께서 그 몫의 눈물을 흘리실 필요는 없으니까요.”

  “저도 그렇습니다. 유키무라 님께선 필요 이상으로 무리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유리검지조由利劍之助, 망월육랑望月六郞….”

  하나 둘, 주변에 잠복해 있던 다른 10용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자신이 그렇게나 변했다는 걸 깨닫지 못한 유키무라는 당황해 할 뿐, 어떤 대꾸도 할 수 없었다. 유키무라가 그들을 잘 아는 것처럼 그들도 유키무라를 잘 알고 있다는 걸 알고 있으므로.

  “유키무라 님은 그저 전처럼 술과 여흥을 즐기는 여유로움을 보여주시기만 해도 됩니다. 저흰 그것만으로도 안심할 수 있으니까요. 저희 앞에서만이라도 편하셔야 저희가 죄송하지 않죠.”

  어쩔 줄 모르고 당황해하는 유키무라를 향해 코스케가 조언했다.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또 부하들에게 걱정거리가 되었다니, 오히려 죄송한 쪽은 유키무라였다.

  그리고, 유키무라는 미소를 지으며 술병을 들어올렸다.

  “다들, 한 잔 하지 않을래? 오늘 정도는 사스케도 좀 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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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Page of Pentacles를 맡은 샤나쉬 엘입니다.
으아아, 자정이 가까워오는데 사나다 10용사의 자료를 모으다가 얼결에 원고를 날려버려서 결국 자정이 넘어버렸군요ㅠㅁㅠ 원래 상 받을거란 생각은 하지도 않았지만(일단 급한 마음에 급하게 쓴 글이라) 그래도 기한을 맞추지 못한 게 아쉽네요..

Page of Pentacles는 실용성, 일상 생활에서의 좋은 것들을 즐긴다는 의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단편은 그다지 상관이 없는 주제를 다루고 있는지도? 하지만 언제나 제가 의도한 대로 스토리가 진행되지는 않기 때문에 그 점에 대해서는 오래 전에 포기했답니다. 특히나 이 사나다 유키무라라는 녀석은 오리지널 캐릭터가 아니라 실존인물이기 때문에 더 고생했어요. 오리지널 캐릭터였다면 좀 더 컨트롤할 수도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사나다 유키무라는 일본 전국 시대에 생존했던 전쟁 영웅입니다. 사나다 10용사로 유명한데다 유키무라 본인도 일본 최고의 무사라는 칭송을 받았죠. 하지만 작중에 등장한 이름 중에서 사루토비 사스케는 실존인물인지 아닌지가 불명확하고, 코스케는 모 만화에서 따온 녀석입니다. 아니, 부드럽게 조언하는 여자 캐릭터가 필요했어요... 그런데 10용사 중에서 여자로 보이는 녀석은 없길래 결국 별 수 없이 코스케를 등장시키게 되었습니다. 작가분과 그 모 만화를 아시는 분들께 사죄를.

졸업이다 뭐다 겹쳐서 정신없이 쓰여진 글이고 실력의 모자람도 있고 해서 많이 모자라지만 노력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발전하는 모습 보여드리고 싶네요.

좋은 하루 되세요.
댓글 2
  • No Profile
    자료를 찾으려고 노력하셨다는 것 자체로도 대단하신거에요!
  • No Profile
    저야 그리 말씀해 주시면 감사할 따름이지요- ;ㅁ;
    전에 봐놨던 자료를 저장해놨어야 한다는 후회가 물밀듯이 덮쳐와서 그 딜레마로 늦어진 것도 있습니다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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