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모든 것을 알고자 하는 것을 과학이라 하고
      모든 것을 알지 못해도 좋은 것을 기술이라 하고
      모든 것을 알 수 없어도 좋은 것을 신비라고 할 때

      마법은 이 셋 사이에서 숨바꼭질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

                                                -경애의 노트에서-


'수지침 입문' 강의가 있는 시간이었다. 경애는 이 수업을 좋아했기
에 늦고 싶지 않았다. 경애가 서둘러 자리에 앉은 뒤 얼마 되지 않아
수업은 시작되었다. 어느 곳이 얼굴이고 어느 곳이 목, 가슴인지, 어
디에 대장과 소장, 위가 있는지, 이런 기초적인 것은 이미 배운 뒤였
고 이제부턴 팔 다리에 해당되는 네 손가락에 위치하고 있는 좀 더
자세한 혈도의 위치에 대한 강의가 시작되고 있었다. T3 니 P4니 하
는 약어로 분류되는 자세한 위치들은 쉽게 외우기엔 확실히 벅찼다.
일단은 정신없이 불러주시는 대로 기록할 뿐이었다. 모든 강의가 끝
난 뒤 교수님은 늘 하시던 말씀을 다시 들려주며 강의를 끝맺으셨다.

"모든 병은 자가치료가 가능하다는 것을 절대 잊지 마십시오. 학생
여러분이 제 강의를 듣고 잘 배워서 자기 몸을 자기 혼자서 돌볼 수
있게 되기를 바라겠습니다. 오늘은 이상으로 수업을 마칩니다."

  교수님이 교실을 나가심과 동시에 학생들도 웅성대며 하나 둘 씩
자리에서 일어섰다. 경애도 다른 학생들처럼 필기구를 챙기고 일어
서려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그녀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수지침을 마법과 같은 것이라고 볼 수 없을까? 어디를 누르면 신기
하게도 그 아픈 부분이  치료된다는 건 내 경험으로 알고 있어. 하지
만 왜 거길 누르면 아픈 게 낫는지 그 이유에 대해서 제대로 입증된
건 아니지. 마법도 그런 거 아니겠어? 왜 그 주문을 외우면 그런 일
이 일어나는지 이유가 완전히 밝혀진 건 아니지만 어쨌든 그 주문을
외우면 그에 따른 특정한 일이 벌어진다는 건 알고 있잖아.'

  경애는 이 생각을 자기 속에만 담아두지 않고 곧장 옆에서 천천히
일어서던 친구 승민에게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승민은 잠시 곰곰히
생각하는 듯 하더니 이렇게 되물었다.

"그렇게 말할 수만은 없지 않을까? 마법은 일단 모든 사람이 쓸 수
있는 게 아니야. 수지침은 위치만 알면 손을 누를 수 있는 힘 외에 다
른 게 필요치 않지만 마법은 주문을 외우고 실행하는데 주문서나 오랜
숙련이 필요해.  간단히 말해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란 말이야.
무엇보다 도, 수지침은 자기가 타고난 육체를 이용하는 것 뿐이지만
마법은 자기 밖에 있는 외적인 힘을 필요로 해. 그런 의미에서 차라리
마법은 과학과 가깝다고 할 수 있겠지. 과학이 실험과 추론을 통해 이
세계를 이루고 있는 원리를 파악하고 그걸 바탕으로 엄청난 힘을 구
현해내는 것처럼 마법도 이 세상을 이루고 있는 힘을 사용하는 보다
직접적인 방법을 연구하여 그것을 바탕으로 주문서를 만들고 마법약
을 만들어내잖아? 난 그런 점에서 과학이야 말로 가장 마법과 비슷
한 것이라고 생각해."  

승민이 여기까지 말했을 때, 그들의 말을 듣고 있던 또 다른 친구
유정이 또 다른 의견을 제기하며 경애와 승민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글쎄. 너희 둘의 의견을 다 들어 보았는데 내가 보기엔 승민이, 너의
말은 좀 틀린 것 같애. 과학자들은 항상 그 원인과 결과만으로 만족하
는 게 아니라 그 사이의 과정에 작용하는 원리를 찾아내려고 애를 써.
한마디로 말해 모든 것을 알고 입증할 수 있을 때만 만족한다는 말이
야. 단지 주문을 외우면 빵이 나온다는 것 만으로 만족하지 않아. 그
래서 그들은 마법을 인정하지 않고 천시하잖아. 그들이 보기에 마법
사들이란 진정한 탐구정신이 결여된 게으름벵이에 불과해. 그런데도
과연 과학을 마법이랑 비슷하다고 할 수 있을지 난 의심이 가. 그렇
다고 해서 경애 말이  맞다고 생각한다는 것도 아니야. 분명히 어떤
면에서 수지침과 마법은 비슷해. 하지만 수지침 역시 마법과는 달
라. 수지침은 기본적으로 '몸의 어떤 부분이 대응하는 손의 어떤 부
분을 눌렀을 때, 몸의 그 부분이 낫는다' 는 '경험의 축적'에 기초하
고 있어. 즉, '어디를 눌러보니 어디가 낫는다'더라는 경험의 축적
에 의해 거꾸로 '여기를 눌르면 여기가 낫는다'는 식의 지식의 체계
를 갖출 수 있었다는 얘기지. 이건 마법과는 정말 다른 부분이 아닐
수 없어. 마법은 '이런 주문을 외웠더니 이런 일이 일어나더라' 는
경험의 축적에 의해 만들어진 게 아니거든. 주문은 고래로 이미 전
해져 내려 온 것이고 우리는 그것을 갈고 닦기만 하면 되는 거야.
새로운 주문서나 마법약을 만든 다는 것을 승민이는 '연구'라고 표
현했는데 나는 그 표현에 찬성할 수 없어. 마법사의 연구는 '고래로
있어온 주문서와 주문에 대한' 연구일 뿐이야. 그걸 과연 과학자의
연구와 같다고 할 수 있을까? 그건 차라리 장인의 그것과 비슷하다
고 봐야 한다고 생각해. 줄타기를 업으로 삼는 장인은 예로부터 있어
온 줄타기방법을 배우고 익히며 실력을 갈고 닦아. 그리고 그 과정에
있어서 '왜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되는가' 나 '왜 그렇게 했을 때 그
렇게 되는가' 하는 물음은 중요한 게 아니야. 중요한 건 그렇게 했을
때, 내가 줄타기에 능숙하게 되느냐, 아니냐인 거지. 결국 그 과정은
마법사에게 있어 주문을 외우는 것과 비슷하고 결과를 중시하는 것
도 같다고 할 수 있어. 결국 한마디로 말해 마법은 과학이 아닌 기술
과 가장 비슷하다는 게 내 생각이야."

유정의 말이 끝났을 때, 어느새 교실은 우리를 중심으로 학생들로
이루어진 작은 원이 만들어져 있었다. 우리의 이야기가 어느새 개인
적인 사담에서 벗어나 토론하는 것처럼 비추어진 것 같았다. 유정의
말이 끝나자 마자 철우 라는 학생이 유정의 말에 반박해왔다.

  "지금까지 네 말을 잘 들었는데, 내가 보기엔 너도 마법의 본질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 같아. 마법은 기술과 비슷한 것도 아니기
때문이지. 그럼 뭐냐고? 마법은 바로 '신비'야. 기술은 누구나 재능이
있든 없든 그 과정을 통과하면 특정 결과에 가깝게 이를 수 있어. 그
사람의 노력의 문제라고 할 수 있는 거지. 하지만 마법이 과연 노력
의 문제인 걸까? 주문을 한 번 외우는 것만으로, 혹은 주문을 전혀
외우지 않고도 즉시 자신이 원하는 결과를 눈앞에 가져 올 수 있는게
마법이야. 아까 둘 다 '연구'에 대해서 말을 했는데 말이야, 과연 마법
이 연구가 필요한 걸까? 난 그게 의심스러워. 맨 처음 마법을 썼을 사
람을 생각해 봐. 그 사람은 대체 무슨 연구를 했다고 해야 하지?
그 사람의 경우 우리는 '그냥 마법을 쓸 수 있게 되었다' 라고 밖에
말 할 수가 없게 돼. 혹은 '그냥 어쩌다가 알게 되었다' 라고 해도 좋
겠지. 과학이나 기술은 축적된 과거가 없이는 그 뒤의 것이 존재할 수
없는 구조를 가지고 있어. 하지만 마법은  지금 당장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마법이 사라진다고 해도 그게 마법의 종말이라고 말할 수가 없어.
바로 다음 순간 누군가가 '그냥' 주문을 알게 될 수 있기 때문이지.
그리고 어느 순간 모든 사람이 다 주문을 알게 되는 일이 일어나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그런 게 마법인 거야. 이런 마법을 대체 무엇과
비교할 수 있겠어? 오직 신비에 비교할 수 있을 뿐이야. 처음도 끝
도 무엇도 애초에 아는 게 불가능하고 알 필요도 없는 것. 그런 게
바로 신비잖아. 마법은 그런 신비하고 가장 비슷하다고 할 수 있어.
어때, 내 말이 맞는 것 같지 않아?"

철우의 말이 끝나자 또 다른 학생들이 그 이야기에 끼어들고, 거기
에 승민과 유정의 반박이 이어지는 등, 교실 안은 정말 토론장이 되
어 버렸다. 막상 처음 말을 꺼냈던 경애는 이런 분위기를 의도한 것
이 아니었기에 한편으로 괜히 말을 꺼냈다 싶기도 했다. 그래서 누
구도 경애를 신경쓰지 않는 틈을 타서 조용히 혼자 교실을 빠져 나
왔다.  하늘은 어느새 저녁이 되어 새빨갛고 샛노란 노을로 가득했고
저녁햇살이 뿌려진 교정은 무척 아름다웠다. 그런 교정을 걸어나오며
경애는 생각했다.

'과연 마법이란 무엇일까? 모든 사람이 거기에 대해 한마디씩 할
순 있지만 아무도 모두가 납득할 결론은 내리기 쉽지 않은 마법. 마법
이란 건 어쩌면 이럴 수 밖에 없기에 마법인 것은 아닐까? 이런 게
마법의 특성인 건 아닐까? 과학, 기술, 신비, 그밖에 수많은 것 사이
에 걸쳐 있는 그리고 그 모두 이면서 그 어느 것도 아닌, 그런 게
마법의 특성인 건 아닐까?'

결론은 쉽사리 내려지지 않았고 경애는 복잡해진 머리를 좌우로 흔
들며 오늘은 이걸로 그만하자고 다짐했다.

  
쌀과 술로 유명한 나라, 루크레시아 국의 유서 깊은 귀족 가문 중
하나인 '김' 가문의 딸, 경애는 조금 뒤 집에 도착하면 암브로시아
(ambrosia)나 한 잔 마시고 자야겠다고 마음먹으며 자신의 애완동
물인 그리폰(Griffon), 루다(Luda)의 등에 몸을 실었다. 그리고 그러
면서 그녀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아무튼 이런 여러가지 생각을 할 수 있어서 오늘은 나름대로 보람
있는 하루였어. 다 마법 덕분이지. 마법이란 건 참 재밌는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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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번에 처음으로 이곳 게시판에서 완결된 글을 써보고 무척 기뻤
습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꼭 환상소설이 아니더라도 소설을 완
결시킬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감사드립니다.



루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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