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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엿같은 환상소설

2003.08.15 00:1808.15

(뱀다리. 요건 좀 소품같은 글입니다. 습작이라고 해도 무방하겠네요.
안드로이드는 마법사랑 완벽하게 이어지는 글은 아니지만 비슷한
배경으로 쓰여진 글이라고 할수 있겠네요. 일단 클릭하신분은 가볍게
읽어주시길..)

당당한 자세를 보여라, 마스터 리틀리! 우리는 신의 자비로움으로 이 세상
을 밝히는 촛불이 되어야 한다. 이 영국 땅에서 다시는 꺼지지 않는 불꽃으
로 타오를 것을 나는 확신한다!
                                       Fahrenheit 451 - Ray Bradbury

K씨는 잔득 화가 난 눈초리로 창문 넘어 큼직한 포플러나무 아래에 줄지어
늘어선 검은 자동차들을 쏘아보았다. 그의 컴퓨터 모니터는 깜박거렸고 본
체는 열을 식히는 팬들이 돌아가는 소리로 시끄러웠다. 날씨는 당장이라도
비가 쏟아 부을 것처럼 무더웠다. K씨가 일년 전에 산 이름을 지어주지 않
은 소녀는 거실 소파에 앉아 목탄연필을 열심히 깎고 있었다. K씨는 잠시
모니터 앞에 앉아서 깜박이는 커서를 글자와 단어들, 문장들을, 단락들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빌어먹을 문설주에 앉은 엿 같은 까마귀들. 공상과 공상의 사슬을 잇는걸
그냥 쳐다보고 있을 순 없는 거냐?."

K씨는 모니터에 중얼거렸다.
똑똑똑.. 딱딱한 소리, 누군가의 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들렸다.

"환상의 공포가 나의 마음을 가득체우네"

K씨는 또 다시 중얼거리며 문으로 걸어 나갔다. 주저함은 없었다. 삐거덕거
리는 나무문이 열리자 한낮의 더위가 거기 서있었다. 문 크기만한 오후가
서 있었다. 물론 되먹지 못한 한 사내가 회색 양복을 입고 썬그라스를 끼고
같이 있었다. 입에 큼직한 시가만 물고 있었으면 시간을 저축하라고 떠드는
회색사나이와 똑같다고 그는 생각했다.

"K씨인가요?"

K씨 인가요? 네. 빵! 아주 오래된 유치한 영화가 생각났다. 나를 잡으러 온
미래의 로봇은 방문을 열고 이름을 물어본 후 대답하면 총으로 싸 버린다.
하지만 그 사나이는 총을 들고 있지는 않았다. 대신 검은 서류 가방과 문을
두들길 때 사용한 왼손이 전부였다. 그 사나이는 대답을 들어볼 필요도 없
다는 듯 방문을 넘어 거실로 들어 왔다. 뒤에 줄지어 있었던 사내들도 우르
르 몰려 들어왔다. 소파의 소녀는 그들에게 힐끗 한번 시선을 주더니 다시
연필을 깎는 일에 열중했다.

"저는 환상소설 관리국 소속의 이이이입니다. 그리고 이쪽은 아아아씨입니
다."
"방문 통보는 받으셨겠죠?"

뒤에 있는 아아아씨라는 사나이가 거들었다.

"우린 윤리도덕감시단에서 나왔습니다."

옆에 있는 키 큰 사나이가 말했다. 그리고는 자신의 이름이 에에에씨이고
뒤에 뚱뚱한 사나이를 하하하씨라고 소개했다. 동시에 사나이들은 허리춤에
달아놓은 각자의 신분등을 때어 보여주었다. K씨는 그 동작이 너무나 똑같
고 오차 없이 똑같아서 그들이 허리춤에 붙어있는 신분증의 집게에 오른손
을 가져가고 누르고 바로 잡아 앞으로 내미는 연습을 5일간은 합숙 훈련한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포플러나무 아래에서 몇 번 연습하고 방문을 두들기
기 전에 두어 번 더 연습한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요?"

K씨가 대답했다.

"저 소파는 최근에 산 것인가요?"

뒤쪽에 있던 '윤리도덕감시단원'인지 '환상소설 관리국 직원'인지 모를 뚱
뚱한 사내가 파란색 소파를 쏘아보며 물었다. 그러자 약속이라도 한 듯이
회색 양복의 사나이들은 우르르 몰려가 소파에 나란히 안 잤다. 물론 연필
을 깎던 소녀는 그들에게 시선도 주지 않고 커터 칼로 열심히 연필심을 다
듬었다. 소파는 K씨가 가끔씩 잠을 자는곳이었으므로 길었지만 연필을 깎는
일에 열중인 소녀를 가운데 끼고 사나이 4명이 안자 있기에는 매우 비좁았
다. K씨는 주방으로 들어가 유리잔에 소다수를 붓고는 얼음 몇 개를 둥둥
띄어 거실로 가져왔다. 그리곤 맞은편 소파에 안자서 소다수를 한목을 마시
고는 소녀의 앞에 내 놓았다. 소녀는 컵을 눈높이로 들어올려 이리저리 흔
들어 보고는 홀짝홀짝 마시기 시작했다. 사나이들은 그 컵을 눈여겨보았다.

1시를 알리는 벽시계는 새 모양의 모형을 밖으로 내뱉고는 정체를 알 수 없
는 새 울음소리를 흉내 내자. 조금의 오차도 없이 4명의 사내들이 손목에
차고 있던 시계들이 전자음의 알람이 울렸다. 그러자 사내들은 각자가 들고
온 서류가방을 탁자에 올려놓고는 가방을 열었다. 모두 그 안에서 유리컵을
꺼내고는 다시 청량 음료수가 든 캔을 따서 컵 안에 부었다. 얼음은 없었다
. 그리곤 자기 테이블 앞에 올려놓았다.  

"그럼, 업무를 시작할까요?"

누군가 중얼거렸다.

"K씨, 저는 지난 5년 동안 K씨를 유심히 관찰했습니다."
"그렇다고 감시는 아닙니다."

아아아씨가 덧붙였다.

"맞습니다. 우리일은 환상소설 작가들을 관리하는 것입니다."

이 말들은 하나같이 늘상 해대는 말 같았다.

"작년에 출판하신 소설은 인기가 꽤나 있으셨군요."
"그 덕에 이 소파와 소녀를 살수 있었지요."

K씨는 중얼거리듯 대답했다. 소녀가 K씨를 힐긋 쳐다봤다. 사나이들은
소녀를 오랫동안 쳐다봤다.

"밤에도 같이 자나요?"

에에에씨가 야릇한 시선으로 소녀를 보며 혼잣말처럼 말했다.

"글쎄요. 이따금씩  ."
"예를 들면?"

이번엔 오른쪽 끝에 앉아 있는 이이이씨가 질문을 던졌다.

"가끔씩 번개가 치는 밤이나 저 아이가 무서운 영화를 봤을 때 또...
그런데 이런 걸 묻기 위해서 오신건가요?"

K씨의 말에 사나이들은 시선을 소녀에서 K씨로 옮겼다. 이이이씨가 서류가
방에서 얇은 책 한권을 꺼내서 K씨에게 내밀었다. K씨가 받은 책은 회색 표
지에 두께가 0.5 Cm도 안되는 얇은 책이었는데. 표지에는 '환상소설작법 규
정'이라고 써 있었다.

"그런 건 아닙니다. K씨도 이 책을 알고 계실 테죠?"
"물론  ."

K씨는 얼버무렸다.

"물론, 그러시겠죠. 이 책 없이는 환상소설을 쓸 수 없으니깐요."

이번에는 이이이씨 옆에 앉아 있던 아아아씨 거들었다.

"이 책은 이번에 새로 나온 개정판입니다. 전에 저희 관리국에서 보내드린
개정 이전판은 잘 보관하고 계시겠죠?"
"아마도  ."
"제 침대가 삐거덕 거렸어요. 한쪽 다리가 짧았지만 이제는 괜찮아요.
그 다리 밑에 무언가로 고정을 시켰거든요."

K씨가 우물쭈물 하고 있을 때 연필을 깎던 소녀가 사나이들을 둘러보며 큰
소리로 말했다.

'아가씨, 그럴 때는 쓸모없고 성가신 책 한권을 끼어 넣으면 좋을 겁니다."

이이이씨의 말에 나머지 사내들도 '맞아! 맞아!'하고 소리쳤다. 한참이 지
나고 나서 이이이씨는 계속 말을 이었다.

"어째든 이 개정판을 드리죠. 보시면 아시겠지만. 보다 풍부한 소설 작법을
위해 신화와 종족, 마법과 검술, 각종 아이템 등등 그 전보단 훨씬 더 많
아졌답니다."

K씨는 책을 펼쳐 보았다. 흰 백지에 깨알같은 글자들이 가득했다. K씨가 '
동물과 몬스터' 편을 유심히 보다가 이상한 듯 질문을 했다.

"살라만더가 빠졌군요. 전에는 본 것 같은데"
"살라만더는 안됩니다!"

아아아씨가 흥분한 얼굴로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왜 안 된다는 겁니까?"
"당연하지 않소? 그것은 불경한 것이요."
"윤리, 도덕적으로 용납할 수 없는 일이요!"

이번엔 에에에씨가 엉덩이를 들썩이며 소리쳤다.

"K씨, 그 상상 동물은 싸구려 소설에 한번 나온 적이 있습니다만. 정말 엽
겹고 치사하고 구역질나는 소설이었소."
"그래, 불경스럽기 그지없는 글이었어!"
"윤리, 도덕적으로도 문제가 많았지!"
"책을 불태우는 소방수 얘기라니  . 그런 구역질나는 상상력이 가당키나 하
단 말이요!"
  
사나이들은 저마다 한마디씩 했다.

"K씨, 다른 동물은 얼마든지 있소. 그 책을 보시오. 정말로 친절하고 상세
하게 설명되어 있지 않소? 고블린, 흡고블린, 박쥐, 여우, 늑대, 오크, 트
롤... 등등 하지만 살라만더 얘기는 그만 하는 것이 좋겠소. 우리는 그런
얘기를 하려고 온 것은 아니요. 최근에 K씨가 쓰고 있는 소설에 대한 얘기
를 하려고 온 겁니다. 환상 소설 게시판에 올리신지 6주정도 지나셨죠?"
"7주 정도 됐습니다."

K씨는 기억을 더듬으며 대답했다.

"그 소설은 상당히 문제의 소지를 안고 있는 듯 하군요."
"문제라뇨? 위법이란 말입니까?"
"아니요, 그건, 하지만 그럴 가능성이 크다는 겁니다."
"저는 납득 할 수 없군요."

K씨의 말에 이이이씨는 가방에서 K씨가 쓴 소설의 인쇄물을 꺼내서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먼저 배경 문제인데. 정확히 배경을 묘사하지 않으셨더군요."
"글쎄요. 꼭 해야 하나요? 그 소설의 배경은 그냥 다른 행성입니다."
"그냥 다른 행성이라? 위험한 설정이군요."
"도덕적으로 올바른지 살펴봐야 겠군요."

하하하씨가 덧붙였다.

"K씨, 배경은 중요한 겁니다. 환상소설 작법 규정에 명시된 것들을 사용하
셔야 합니다. 왕국도 없고 제국도 없더군요. 그 무슨 배경이 그렇소? 종족
은 또 그게 뭡니까? 엘프나 드워프는 코빼기도 안 보이더군요. 더 진행되
야 나오는 겁니까?"
"아니, 나오지 않습니다. 인간만 나옵니다."
"그것은 확실히 위법이군요. 그것이 어떻게 환상소설입니까?
"게다가 주인공의 나이가 무려 21살이나 되더군요. 그게 말이나 됩니까?"

이번엔 아아아씨였다.

"그리곤 검술도 할 줄 모르고 마법도 쓸 줄 모르더군요. 검이란 아이템조차
등장하지 않던데. 도대체 무슨 소설을 쓰고 있는 겁니까?"
"아저씨는 환상소설을 쓰고 있어요."

아무 말 없이 연필만 깎던 소녀가 소리치듯 말했다. 사나이들은 일제히 소
녀를 쳐다봤다. 이이이씨는 K씨가 썼다는 소설 첫 부분을 모두가 볼 수 있
게 탁자위에 잘 놓았다. 그리고는 첫 문장이 시작되는 부분을 손가락으로
집어서 가리켰다.

"이걸 보시오. K씨, 소설의 첫 시작. '리린은 위도 45도 경도 72도에 앉아
있었다. 이따금씩 창밖으로 곰보 같은 달이 얼굴을 내밀곤 했다.'라고 시
작 되고 있소. 이건 위법의 소지가 큽니다. 어째서 이런 경우 없는 도입부
가 용납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자, '환상소설 작법 규정' 5페이지를 펴
보시오."

언제 준비했는지 사나이들은 각자 환상소설 작법규정을 손에 쥐고 있었다.
소녀에게도 한권 돌아갔다. K씨는 대꾸 없이 책을 폈다.

"자 보시오. '소설의 도입부는 반듯이 신화나 전설, 고대의 책이나 역사서,
혹은 그에 준하는 문장을 인용하고 시작할 것.' 이라고 써있지 않습니까?"

"그렇군요."

K씨는 아무 감정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리고 '소설 중간 중간에 노랫말을 첨가해야한다.' 이 규정도 어길 작정
입니까?"
"글쎄요, 저는 작사를 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K씨는 조금 흥분했는지 얼굴을 붉혔다.

"작사를 하라는 소리가 아닙니다. '나아가자! 나아가자! 넓은 바다로 / 우
리는 바다의 사나이 / 용을 물리친 바다의 사나이들!' 이런 식의 운율 있
는 문장을 삽입하라는 겁니다."
"그건 좋습니다. 앞으로 잘 쓰실 것으로 저희는 믿겠습니다. 하지만 더 큰
문제가 있더군요. 연재를 시작하신지 6주나 되셨던데 아직도 모험을 떠나
시지 않으셨더군요."

"연재한지 7주째요, 하지만 앞으로도 모험은 없소이다. 떠나야할 명분도 없
고 목적도 없으며 필요성도 없습니다."
"그 발언은 어이가 없군요!"

또다시 아아아씨가 엉덩이를 들썩이며 소리쳤다. 흥분한 얼굴로 K씨를 쏘아
보았다.

"당신은 위법을 하겠다는 말입니까? 당돌하기 짝이 없군요."
"윤리 도덕적으로도 납득이 가지 않는군요."

이번에는 에에에씨가 거들었다.

"K씨, 당신의 위험등급이 매우 높은 편입니다. 그런 이유로 우리 '환상소설
관리국'에서 당신 때문에 2명이나 파견한 것이고 윤리도덕감시단에서도 당
신을 주목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지난 3년간 교묘하게 위법적인 행위를 저
질렀고 교묘하게 빠져나갔지만 이번엔 힘들 겁니다. K씨, 당신을 조사해보
니 상당히 흥미롭더군요. 지난 2003년 이후에 당신은 상당수의 금서와 불
법서적, 불경한 소설들을 많이 읽으셨더군요. 전부 싸구려 소설들이었죠.
조잡한 상상력과 위험하고 불경한 이야기들이었죠? 아닌가요?"
"2003년 이전에는 그 소설들을 읽는 것은 불법이 아니었소. 당신은 그 책들
에 대한 내 개인적인 견해를 듣고 싶은 거요? 당신은 글들에 대한 개인적
인 의견을 묻는 것이요? 큰까마귀에 대한 시와 검은고양이나 황금충에 대
한 이야기, 증오스런 친구를 술통을 빌미로 지하에다 가두는 그런 이야기,
책을 불태우는 이야기, 산책하다 체포되는 이야기, 성의 구분이 없는 행성
의 이야기들, 시간을 저축하라고 빈정대는 사나이들 이야기, 기묘하고 괴
상한 이야기에 대한 내가 느낀 감정에 대해 이야기하라는 건가요? 아니면
그런 이야기들을 내 머리 속에 남아 있는 건 불법이고 끄집어내서 모조리
불태워야 한다는 말이요?"

K씨는 몹시 흥분해 있었다. 이 되먹지 못한 사나이들은 지하에 금서들이 있
다고 유인해서는 영원히 가뒀으면 하는 상상을 하고 있었다.
하하하씨가 헛기침을 한번 하면서 이야기를 꺼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K씨, 너무 흥분하진 마시오. 저희는 작가의 상상력이 무고한 시민들에게
끼치는 영향에 대해 우려를 할뿐입니다. 도덕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문제를
구별할 수 있게 미리 선을 긋는 것이 우리의 일입니다. 환상소설은 너무나
제약이 없기 때문에 걱정하고 있을 뿐이랍니다. 그래서 저희는 환상소설
관리국과 함께 윤리적이나 도덕적으로 지탄받지 않고 사람들에게 위험한
상상력이 퍼지지 않게 조심스럽게 소설들을 관리하는 거죠. 당신이 말한
불법 서적들은 너무나 위험하고 불경스런 상상력으로 가득 찬 소설입니다.
단지 K씨가 그런 글을 써서는 안 되겠다고 저희는 생각하고 있을 뿐이죠."
"K씨, 우리는 당신을 계속 주시할겁니다."

이번엔 이이이씨였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K씨의 집안을 한번 훑어보
고는 계속 말을 이었다.

"이번 달 안으로 모험을 떠나도록 협조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불법적
인 등장인물이나 아이템을 등장시켜서는 안 됩니다. 그 환상소설작법규정
을 잘 지켜 주셨으면 합니다. 그러면 아무 문제가 없을 겁니다."

사내들은 자신의 컵을 가방 안에 구겨 넣었다. 그리곤 이이이씨처럼 일어서
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작년에도 잘 협조 하셨듯이 등장인물은 1주일 전에 우리 쪽으로 통보를 해
주셔야 도덕, 윤리 테스트를 할 수 있습니다. 사건도 마찬가지이고 잘 알
고 계시겠지만 소설 속에서 살인은 2주 전에 통보 해주셔야 합니다. 물론
합당한 이유를 적어 주셔야 합니다. 자살은 1주전에 통보하셔도 됩니다."

하하하씨의 말이 끝나자 사나이들은 한손에 가방을 들고 현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K씨가 불만이 가득 찬 얼굴로 현관문을 열자 어느새 내리기 시작한
소낙비가 힘차게 퍼붓고 있었다.

"그럼 좋은 글 쓰십시오."

사내들은 한낮의 짜증과 증오를 남겨두고 비오는 거리를 뛰어갔다. 하나 같
이 가방을 머리위로 들고 검은 자동차까지 뛰어 갔다. 마치 비오는 날은 검
은 가방을 머리위에 얹고 길거리를 뛰어 다녀야 한다는 규정이라도 있는 것
처럼 말이다.  
곧, 부르릉  . 검은 차들은 포플러나무를 빠져나갔다.

K씨는 그들이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았다. 그리곤 소파로 돌아와선 소녀가
마시다 만 소다수를 목안으로 쓸어 넣었다. 소녀는 64개째의 연필을 깎고
있었는데 검은색의 6각형 모양의 연필이었다. 연필꽂이에는 28개의 둥근 연
필과 35개의 6각형 연필들이 검은 이를 드러내며 빽빽이 꽂혀 있었다. 방안
은 싸늘해 졌다. 빗소리가 시끄러웠고 창문이 바람에 흔들이는 소리가 간간
히 들렸다. K씨는 벽난로에 마른장작을 몇 개 넣고 불을 댕겼다. 그리곤 소
녀에게 의자를 가져오라고 명령했다.

"아저씨, 이제 나 뭐해?"

소녀의 질문에 K씨는 벽난로 앞의 의자에 앉도록 명령했다. 소녀는 의자에
앉아서 이글거리는 불꽃을 쳐다봤다. 마른장작은 경쾌한 소릴 내며 타올랐
다. 방안은 금세 따뜻하고 포근했다.

"클라리쎄! 책들은 새처럼 불타오를 것이다."

K씨는 씁쓸한 표정으로 환상소설작법 규정이란 얇고 고약한 회색책을 벽난
로 깊숙이 집어 던졌다. 소녀는 그것을 오랫동안 지켜보았다. 정말로 책이
새처럼 불타는지를 지켜보고 있었다.

"내 이름 클라라쎄로 하면 안돼?"

소녀가 말했다.

"그건 안돼, 지금은 써서는 안 되는 이름이야. 금지된 이름이지."

소녀는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책은 붉은 날갯짓을 하며 검은 잔상들을 남
겨 놓고 있었다. 소녀는 다시 그것을 쳐다봤다. K씨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이제 포플러나무 밑에는 아무도 없었다. 늦은 오후의 소낙비는 늦여름의 더
위를 완전히 몰아내고 있었다.

"정말 엿 같은 환상소설이군."

K씨는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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