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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말명귀

2019.08.27 21:3808.27

     아무리 멀리 달아나도 전쟁은 쌍둥이를 쫓아왔다. 밤에도 지평선은 붉게 물들었고, 자나깨나 폭음이 들려왔다. 무수히 많은 피난민을 지나치면서 친구들과도 모두 헤어져야 했다. 그러다 길들이 끊어지는 땅끝에 닿았다. 더 갈 곳이 없었다. 전쟁을 피하려면 이제는 사람이 살지 않는 국경지대를 건너야 했다.

도화는 길도 닦여있지 않은 국경지대를 가로지르는 데 회의적이다. [바다로 가자. 피난선이 남았을지도 몰라.] 도원은 바닷길이야말로 저승길이라는 생각이다. [바다에 있는 배는 전부 군함 아니면 해적일 거야.] 만에 하나 피난선에 탄다 하더라도, 잠수함 따위의 공격을 받아 가라앉거나 해적에게 붙잡혀 팔려갈 수도 있다.

[사람이 살 수 없는 땅이잖아.] 국경을 넘어간 사람이 돌아왔다거나 반대편에서 사람이 왔다는 소문조차 들은 적 없다. 도로도 집도 없이 숲과 계곡이 끝없이 이어지는 산맥이다. 과거엔 전쟁터가 된 적도 있다고 하지만 그 흔적조차도 모두 나무뿌리에 침식되었을 것이다.

[여기 산 속에서 살자는 게 아니잖아? 산을 넘어가서 새 터전을 찾자는 거지.] 도원은 자기가 설득하려는 게 도화인지 스스로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산맥을 넘어가면 전쟁에서도 벗어날 수 있을 거야.] [건너편에 갔는데 아무것도 없다면? 저쪽에도 누가 산다면 이쪽으로 넘어온 사람이 한명쯤은 있어야 할 거 아냐. 산을 넘어갔는데 황무지거나, 더 나쁘게는 저편에서도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면.]

[어쩌면 이 땅으로 건너올 필요를 못 느껴서일 수도 있지. 아주 살기 좋고 평화로운 땅이라서. 그래서 아무도 굳이 돌아오지 않는 거야.] 도화는 어이없다는 듯 혀를 찬다. [허무맹랑한 소리 말고. 나도 별다른 선택지가 없는 건 알아. 바다로 가면 안되는 이유를 하나만 대 봐.] [우리가 지나온 강기슭마다 피난민이 우글우글했지? 바다 쪽에서 강 상류로 쪽배를 타고 올라온 거였어. 그게 무슨 뜻이겠어? 바다엔 갈 곳이 없다는 거야. 차라리 내륙이 안전하다고 판단될 정도로.]

도화는 한숨을 쉬지만 대답은 하지 않는다. 도원은 계속한다. [국경 너머에 살기 좋은 땅이 없을 수도 있고 황무지일 수도 있지. 근데 적어도 저편에서 전쟁이 일어났다면 우리처럼 피난민이 넘어오지 않았겠어? 산 너머에선 전쟁이 일어나지는 않은 거야. 저쪽 소식이 전해지는 건 아니지만서도.]

 

근방에서 발견한 시냇물을 따라가니 곧 낙엽으로 뒤덮인 계곡에 도달한다. 껍질이 시커먼 나무들은 제멋대로 뒤틀렸는데, 먼발치서 보니 분간이 안된다. 땅에는 썩어가는 낙엽이 층층이 쌓여 발이 푹푹 빠진다. 새나 짐승이 울지도 않고 발소리마저 축축한 낙엽에 묻힌다. 오직 초라한 냇물이 흘러가는 소리뿐.

낙엽 쌓인 계곡은 완만한 오르막으로, 걸어도 걸어도 풍경이 변하질 않는다. 해가 머리 위를 점점 지나가는 것으로만 시간이 흐르는 것을 알 수 있다. 산줄기에 둘러쌓인 계곡이다보디 금방 어두워질 터. 게다가 산등성이를 타고 안개가 흘러내리기 시작한다.

여전히 숲은 끝날 기미가 안 보인다. 온 사방이 뒤틀린 고목으로만 가득하다. 한참을 올라왔더니 어느새 냇물도 끊겼다. 이러다가는 축축한 낙엽바닥에서 밤을 보내야 할 노릇이다. 온종일 걸었는데도 어디에도 닿지 못했으니까. 물론 국경을 넘자고 한 사람은 도원이니까 불평할 수도 없다. 

[오늘은 어디서 자려고?] 도화는 배낭을 고쳐 매며 도원을 돌아본다. 도원은 땅바닥을 내려다보고 인상을 찌푸린다. [노숙은 상관없는데 여긴 좀 그러네.] 썩은 낙엽층 밑엔 살았거나 죽은 벌레가 우글댈 것이 분명하다. 도원은 몸서리친다. [벌레가 그리 무서우면 나무 위에 올라가서 자.] 도화는 킥킥대지만 도원은 웃을 기분이 아니다. [나무에 벌레가 얼마나 많은지 몰라서 그래?]

노을 질 새도 없이 어둠이 찾아온다. 거기에 안개가 고여 계곡을 가득 채운다. 산중에서 달빛조차 비치지 않으니 완벽한 암흑이다. 쌍둥이는 양팔을 내밀고 허우적대며 겨우 나무 한 그루를 찾아 멈춰선다. 벌레 울음도 희미하게 들리는 듯 마는 듯. 쌍둥이 자신들의 기척도 낙엽과 안개에 먹혀버린다. 앞이 전혀 안 보이는데 소리마저 꽉 막힌 듯 답답하니 무간에 떨어진 느낌이다.

 

[라이터 좀 줘 봐.] 도화는 도원의 팔을 더듬어 라이터를 건네받아서는 어느새 주운 나뭇가지 끝에 불을 붙이려 시도한다. 물기를 가득 흡수한 나뭇가지에선 가느다란 연기가 피어오를 뿐이다. 껍데기나 좀 그을렸을까. [집어치자.]

문명의 혜택이라 할 만한 물건 중 쌍둥이에게 남은 것은 많지 않았는데, 그 중 오래된 철제 라이터가 제일 귀중했다. 전쟁이 발발하며 전기는 건전지 하나까지 싹 징발당했고, 가스도 끊겼다. 떠날 당시엔 태엽으로 작동하는 라디오도 챙겼으나 피난길에 식량과 교환해버렸고, 멈춘 지 오래인 손목시계는 배낭 구석에 쳐박혀 있다.

전쟁이 일어났다는 소식이 들려온 후 이틀 지나기도 전에 우리편 군인이 몰려왔다. 군대에서 쓸만한 자원을 전부 수거해갔기 때문에 고향 사람들은 전선 반대편으로 떠났다. 쌍둥이도 살던 집을 등져야 했다. 그 때만 해도 끝내 갈 곳을 찾지 못해 국경지대까지 내몰릴 줄은 몰랐지만.

[우리 먹을 거 뭐 있지?] 도화의 질문에 배낭 앞주머니를 뒤적인다. 손끝으로 종이 상자 하나를 찾아 끄집어내는 도원. 안에는 밀봉된 군용 비상식량이 들었다. 도원은 곡물 스틱 하나를 꺼내 도화의 팔을 두드려 쥐어주고는 자신의 몫도 조심스레 뜯는다. 합성수지로 된 포장재는 쓸 데가 있을지도 모르니 아껴둔다.

건식 골물 스틱은 한 입에 넣기엔 조금 길고 딱딱하니 반으로 부러뜨려서는 두 조각 모두 입에 넣고 삼킬 수 있을 만큼 부드러워질 때까지 우물거린다. 식사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식사를 끝마치고 앉아있자니 먹먹한 정적이 내려앉는다. 도화의 새근대는 숨소리가 들린다. 나무 둥치에 기대어 앉아있던 그대로 잠든 모양이다. 속편하게도. 

도원은 정말 나무 위에 올라가서 자야 하나 망설이다가, 라이터를 켜고 주위를 서성거린다. 문득 도화에게서 너무 멀어지면 곤란하다는 생각이 든다. 어쩔 수 없이 외투를 벗어 바깥면이 땅으로 가도록 펼치고는 그 위에 쪼그려 눕는다. 얼굴에 와닿는 습기로 봐서는 여전히 안개가 짙을 것이다.

 

도원은 몸을 덜덜 떨다가 눈을 뜬다. 나쁜 꿈을 꾼 것도 아닌데 마음이 섬뜩해서 식은땀이 흘러내린다. 낌새가 이상하다. 그냥 안개 때문에 척척한 게 아니라, 무언가 직접적으로 음산한 기운이 느껴진다. 도원은 호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내 불을 밝힌다. 찰칵 소리가 나자 웅크리고 있던 그것이 돌아본다.

검은 덩어리 같은 몸통에서 거미 다리처럼 가늘고 긴 팔이 뻗어나와 도화를 움켜쥐고 있다. 크기는 자동차만하고, 거죽이 얇은 건지 투명한 건지 부풀어오른 뱃속에 꿈틀대는 시커먼 내장이 보인다. 말처럼 길게 튀어나온 모가지 위엔, 사람 얼굴 형상이 보인다.

눈코입은 없다. 그러나 윤곽은 분명 사람 얼굴의 그것이다. 눈도 없으면서 도원을 노려본다. 도원이 얼어붙어 있는 사이, 도화가 깨어나서 소스라친다. [뭐야 이게?!!] 도화가 버둥대는 바람에 손아귀에서 놓칠 뻔하자 괴물은 세 개나 더 있는 팔을 뻗어서 꽉 붙잡는다. 도원이 당황해서 휘청이자 라이터 불꽃도 흔들린다. 라이터 불빛이 흔들리니 괴물은 움찔하며 몸을 사린다..

도원이 라이터를 들이밀고 천천히 다가가자 그림자 괴물은 눈에 띄게 질겁하며 뒤로 물러난다. 하지만 그래봐야 라이터다. 팔만 조금 세게 흔들어도 꺼지는 불씨다. 괴물을 겁주거나 쫓아내기에는 분명 무리다. 머릿속이 새하얘진 도원이 머뭇대는 사이, 도화가 먼저 움직인다. 손에 잡힌 돌덩어리로 괴물의 길다란 손가락 마디를 냅다 찍은 것이다. 검은 그림자는 펄쩍 뛰며 도화를 집어던지고, 도화는 낙엽 더미 위를 뒹군다.

괴물의 윤곽 뿐인 얼굴이 도화를 찾아 어둠 속을 헤집자 도원은 다리에 힘이 탁 풀려 넘어질 뻔한다. 문득 방법이 하나 떠오른다. 배낭을 뒤져서 음식 재료를 손질하거나 할 때 쓰는 큼지막한 주머니칼을 꺼낸다. 도원은 라이터를 치켜들고 주머니칼을 부여쥔 채 도화의 비명소리를 향해 달려간다.

안개와 어둠 속에서 간신히 쌍둥이 동생을 찾아낸다. 도화는 돌이며 낙엽을 집어던지며 발버둥치는 중이다. 도화가 헛발질로 빈틈을 보이자 냉큼 팔을 뻗치는 괴물. 도화는 네 개나 되는 팔을 전부 밀어내지 못하고 또 붙잡혀버린다. 사냥감을 확보한 괴물이 도원도 마저 붙잡기 위해서인지 또는 거처로 돌아가기 위해서인지 고개를 돌리는 순간, 도원이 달려든다. 목덜미에 주머니칼을 꽂아넣으니 괴물은 몸을 튕기며 도화를 놓친 채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도원은 날이 새도록 도화를 부둥켜안고 있으면서, 쌍둥이 동생의 체온이 떨어지는 것 같다는 느낌을 떨쳐내지 못한다. 도화는 호흡이 고르지 않은 데다 정신도 제대로 못 차린다. 눈물이 멈추지 않는다. 날이 밝으며 숲 천정을 뚫고 쌍둥이에게도 아침햇살이 비친다. 얼굴에 햇볕을 받은 도화는 다행히도 눈을 뜬다. 쌍둥이는 엉엉 울면서 서로 어디를 다쳤는지 확인한다. 도원은 멀쩡하지만 도화는 몸을 일으키려다 헉 하며 주저앉는다.

너덜너덜해진 상의를 걷어보니, 팔뚝과 몸통에 타박상이 가득하고 무엇보다 왼편 갈빗대를 가로질러 두 줄로 크게 긁혀나간 상처가 눈에 띈다. [이거 봤어? 딱딱한 물건으로 부욱 긁은 것 같은데.] 그림자 괴물에게 손톱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달리 이런 상처가 생길 까닭이 없다.

[뭐야, 많이 심해? 아픈지 안 아픈지 모르겠어. 그냥 멍해.] [옷이 두꺼워서 살 속까지 베이지는 않은 것 같아. 그래도 상처가 넓어. 피도 배어 나오고. 푸르죽죽하게 부었어. 멍이 크게 들었나 봐.] [자다 깨서 굴렀더니 나도 내가 어딜 다쳤는지 모르겠네.] 도원은 배낭 옆주머니에서 절반쯤 쓴 튜브형 연고를 꺼낸다. [분명 그게 손톱 같은 걸로 할퀸 상처일 거야. 그리고 너 몸이 엄청 차가워.] 도화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다. [무슨 소리야. 나 열 나는 거 안 보여?]

과연 도화는 흥건하게 식은땀을 흘리고 있지만 이마며 팔뚝을 만져봐도 도원 손에는 차갑기만 하다. [열이 나는 몸이 아니야. 엄청 차다고. 내 손 뜨겁지 않아?] 고개를 젓는 도화. [몸이 맛이 갔나? 설마 죽는 건 아니겠지.] 도원은 부정의 고갯짓을 해보인다. [봐, 죽을 상처는 아니야. 감염만 조심하면.] 도원은 남은 연고를 전부 짜내고는 상처부위를 따라 손가락 끝으로 살살 문질러 펴바른다. 도화는 별 반응이 없다. [괜찮아? 따갑거나 하진 않고?] [둔하게 느낌은 있는데 아프진 않아. 마취라도 된 것 같네.]

 

도화는 도원의 부축을 받아 일어서서는 주변을 둘러본다. [여기가 어디쯤이려나.] 한밤중에 괴물에게 쫓겨다녔으니 분명 처음 잠들었던 장소에서는 상당히 멀어졌을 것이다. 지형을 유심히 살피던 도화는 어깨너머를 가리키며 영문 모를 소리를 한다. [저 방향으로 언덕을 넘어가면 숲이 끝나. 능선을 넘어서 내리막길이 나올 거야.]

[그걸 어떻게 알아?] 도화는 대답을 망설인다. [일단 저쪽으로 가본 다음 내 말이 맞는지 보자.] 난데없지만 도원이라고 별다른 대안이 있지는 않으므로 도화의 말대로 언덕을 오르기로 한다. 도화는 처음 몇 걸음은 비틀거리더니 곧잘 걷는다.

젖은 낙엽 더미에서 몇 번이나 미끄러질 뻔하며 능선 위에 오르니, 정말 도화 말대로 숲이 끝나고 개활지가 나온다. 완만한 산등성이에는 듬성듬성 바윗돌이 박혀 있을 뿐, 거치적대는 것 없는 풀밭이다. 반대편 산과 만나는 계곡 중앙에는 개울이 흐르고, 개울 건너편엔 관목지대가 펼쳐진다.

[어떻게 알았어?] 도원의 물음에 도화는 어깨를 으쓱한다. [그냥 이 방향에서 볕이 들었거든. 이쪽이 높은 곳이니까. 높이 오르면 전망이 좋겠거니 했어.] 도화 말마따나 전날의 두터운 안개는 온데간데없고 햇볕이 쨍하다. 높은 데서 내려다보니 그야말로 첩첩산중임을 알 수 있다. 관목림이 들어선 계곡도 얼마 가지 못해 다른 산줄기에 묻히는 형세다. 

그 너머엔 보다 높은 봉우리들이 경쟁하듯 솟아올라 하늘을 찌른다. [오가는 사람이 없을만 하네.] 도원의 탄식. [사람은 있어.] 도화는 먼 곳을 살피듯 이마에 손을 대고 말한다. [있었어. 지금도 누가 사는지는 모르겠지만.] 도원은 도화의 시선을 따라가지만 특이한 점이 눈에 띄지는 않는다. [뭐가 보여서 하는 말이야?]

[뭔가를 봤었어. 계곡을 건너서 작은 폭포를 찾아야 해. 폭포 근처에 피신처로 삼을 만한 장소가 있을 거야.]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도원. [폭포 같은 건 보이지도 않는데? 그렇게 눈이 좋은 줄은 몰랐어.] 도화는 입을 비죽 내민다. [다른 제안이 없으면 일단 산을 내려가서 폭포를 찾아보는 게 어떨까? 한시라도 빨리 이 숲에서 멀어지고 싶거든.]

 

수풀을 헤치며 나아가니 어디선가  물소리가 들린다. 깊숙한 골짜기에 과연 물줄기가  흘러내린다. 폭포라기엔 상당히 자그마하지만 어쨌든 도화 말이 맞은 셈이다. 폭포 아래엔 웅덩이가 형성되어 있고, 쌍둥이는 허겁지겁 물을 떠마신다. 그러다 뭔가를 발견한 도원이 도화를 툭툭 친다. [왜?] [저길 봐.]

제멋대로 자라난 숲 언저리를 따라 밭이 일구어져 있다. 도원과 도화는 서로를 쳐다본 후 밭에 다가간다. [여기에 콩밭이 있는 줄은 몰랐는데] [아니, 그건 나도 몰랐거든? 왜 자꾸 여기 와본 적 있는 사람처럼 말하는 거야? 네 말이 다 맞으니까 신기하긴 한데, 무슨 원리인지 모르겠어. 너 내 동생 맞아? 어젯밤에 괴물이랑 바뀐 거 아냐?] 도화는 뾰루퉁한 표정을 짓는다. [와본 적 있어. 꿈에서.] [무슨 소리야.] 

그 때 숲 안쪽에서 인기척이 들려오며 도원의 말이 끊긴다. 다 떨어진 옷가지에 벙거지를 뒤집어쓰고 양손에 호미와 자루를 든 여성이다. 쌍둥이는 펄쩍 뛴다. [누구세요?!] 그러자 숲에서 나온 사람도 기겁한다. [뭐여?!] 

 

나이가 좀 되어보이는 여성은 자리를 펴서 쌍둥이를 앉힌 후 누군가를 소리쳐 부른다. 그러자 폭포 근처에 설치된 콘크리트 구조물 입구가 열리며 수염 덥수룩한 남성이 걸어나온다. 폭포 근처에 밭을 일구며 사는 사람들인 모양이다. 쌍둥이는 경계하는 기색을 숨기지 않지만, 숲 주민들은 어색하게 웃어보인다.

곧 나무 그릇에 담긴 음식이 나온다. 여러 잡곡을 한꺼번에 넣어 끓인 후 말린 향초를 뿌린 죽이다. 숲 주민들은 나무 숟가락을 들어 퍼먹는데 쌍둥이는 뜨겁기도 하거니와 먹어도 되는지 의문이 들어 선뜻 손을 대지 못한다.

[아가들 이리 비쩍 말라서 어떻게 해. 좀 먹어.] 배는 고프지만 받아들여도 되는 걸까. 도원이 우선 질문을 해보기로 한다. [두 분은 여기 사시는 건가요?] 우물거리며 시선을 교환하는 숲의 주민들. [꽤 오래 됐지. 살던 고향 떠나서. 원래 산 속에서 살 생각은 없었어. 근데 와보니까 집도 있고 흐르는 물도 있더라고.]

실제로 폭포 근처에 콘크리트 구조물이 있지만 어딜 봐도 민가는 아니다. 되려 군사용 시설의 숨겨진 입구처럼 보인다. [저 안에서 사시나요?] [옛날에 군인들이 쓰려고 만들었나 봐. 그렇긴 할텐데 어차피 지금은 주인도 없으니까 말이야. 처음엔 아주 먼지구덩이더라고. 그래도 조용히 살 집을 찾았으니 눌러앉기로 했지.]

[근데 아가들 이런 질문은 싫을지도 모르지만 쌍둥이 맞지? 아주 똑같이 생겼네.] 도화와 도원의 멋쩍은 표정. [맞아요. 자주 듣는 얘기에요.] [그런데 이쪽 아가는 얼굴이 하얗게 질렸구나. 어디 아프니?] 여성이 도화의 손을 잡아보려고 하자 도화는 흠칫하며 물러난다. 도원이 대신 대답한다. [그냥 피곤해서 그래요. 어젯밤엔 거의 못 잤거든요.] 그 말에 숲 주민들의 표정이 굳는다.

[밤에 밖에 있었니? 안개가 엄청 심했는데.] [네, 어쩌다보니.] [산에 들어온 지는 얼마나 지났니? 어디로 가는 거야?] [그렇게 물어보셔도요. 산을 건너가려는 거에요. 어제는 노숙했지만 뭐, 노숙이야 익숙하죠. 전쟁이 났거든요.] 전쟁 소식에도 숲 주민들은 그다지 놀라는 기색은 아니다.

[그럼 혹시 밤에 뭔가를 보거나 무서운 일이 있지는 않았니.] 도원은 침을 꿀꺽 삼킨다. 도화도 숨을 죽인다. [무서운 일이요? 예를 들면 어떤 거죠. 뭐가 보이기엔 안개가 너무 심해서 달빛도 가렸고, 아무것도 안 보였어요. 습기 때문에 으스스하기만 하고.]

[둘이 같이 있었던 거라면 괜찮지 않을까?] 수염난 남성이 조심스레 말하자 숲 주민들은 서로 쑥덕댄다.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 거죠?] 도원의 질문. [그게, 안개 낀 밤은 위험하거든. 허튼소리 같겠지만 이 땅엔 사람도 짐승도 아닌 게 산단다.]

도원과 도화는 불안한 눈빛을 교환하지만 밤에 겪은 일을 털어놓는 것은 망설여진다. 숲 주민들의 의도를 알지 못하는 이상 불필요한 정보를 누설해서는 안될 것이다. 숲 주민은 도원과 도화가 놀랐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안개 낀 밤에 나타나서 혼자 있는 먹잇감을 쫓아온다고 해. 먹잇감이란 다름아닌 사람이고.]

도화가 나선다. [사람을 잡아먹는다고요? 무슨 괴물이죠?] 수염난 남성이 낮은 목소리로 대답한다. [옛날부터 이 땅에 사는 터주라고 들었어. 우리는 본 적도 없지만. 낮이라도 안개가 끼면 무조건 숨거든.] [그런 얘기를 누구한테 들으셨나요.] [누구겠니. 이 땅엔 우리 말고도 사는 사람들이 있단다. 어디에 사는지까진 모르지만. 가끔 우릴 찾아와서 그네들이 가져온 도구를 밭작물과 교환하곤 해.] 



 

     벽면에 설치된 비상용품함에서 손전등을 꺼낸다. 놀랍게도 작동한다. 가느다란 빛줄기 덕에 어둡기만 하던 시설 내부가 조금이나마 엿보인다. 꽤나 오랫동안 아무도 드나들지 않은 듯하다. 벽재는 뜯겨나와 철골이 보이고, 천장은 군데군데 내려앉은 데다 어디서 물 새는 듯한 소리도 들린다. 한 걸음을 뗄 때마다 먼지구름이 피어오른다.

[확신할 수 있어?] 도원은 소매로 호흡기 주변을 가리며 도화를 돌아본다. 어둠 속에서 손전등으로 비춰본 도화의 얼굴은 한결 더 창백하다. [이 복도가 시설 입구 부분이야. 꿈에서 본 방 번호를 기억해 뒀으니 출구를 찾아갈 수 있어.] 도화는 말을 마치자마자 먼지 때문인지 콜록거린다.

비좁은 복도엔 굳게 닫힌 철문이 줄줄이 늘어서 있다. 철문엔 저마다 번호판이 붙어 있고, 안쪽으로 갈수록 숫자가 점점 높아진다. [우리가 지나가면 무너질 것 같은데? 매몰되면 어떡할래.] [군사시설이니까 튼튼하게 지었겠지. 무너질 만큼 오래되지는 않았을 거야, 아마도.] 도원은 영 못미더운 표정이다. [그 꿈이란 거 자세히 좀 말해줄래? 위험을 감수하려면 뭘 믿고 가는 건지는 알아야지.]

도화는 눈썹을 찌푸리고 입을 비죽 내밀며 양손을 벌려보인다. 설명하기가 어렵다는 뜻인 듯하다. [그냥, 그냥 꾸는 거야. 잠을 자면 뭔가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은 장면들을 봐. 장소는 바로 여기지만, 시점은 달라. 과거에 일어난 일 같아. 꿈 속에선 이 시설에 군인이 가득했거든. 나는 복도를 한참 걸어서 반대편에 있는 출구로 나섰고...]

[그럼 요전에 폭포를 찾아야 한다거나 했을 때도 다 꿈에서 보고 한 말이란 거야?] [맞아. 그 날 밤부터 꿈을 꿨어. 처음엔 숲에서 행군하는 꿈, 다음엔 폭포 앞에서 노역하던 꿈. 그래서 폭포 곁에 시설이 설치된 것도 미리 알고 있었어. 그 다음으로 헤매던 밤에는 이 지하시설 꿈을 꿨어.] 

숲의 주민과 조우한 후, 그들이 자고 가라고 권하는데도 쌍둥이는 서둘러 그 자리를 벗어나서는 한참을 목적지도 없이 걸었다. 도화의 상태가 좋지는 않았지만 이름도 모르는 사람들을 믿을 수 없다는 불안 때문이었다. 혹시라도 따라올까봐 계속 뒤를 돌아보거나 멈춰서서 귀를 기울이기도 했다.

그러다 밤이 되고 나서야 바위 밑에서 휴식을 취했다. 다행히 안개는 없었고, 달빛도 넉넉했다. 도화는 엉덩이를 붙이자마자 잠들었다. 동생의 체온이 낮을뿐더러 상처부위에서 푸른 빛이 희미하게 비친다는 얘기는 하지 않았다. 도원도 이해하지 못하는 일을 어떻게 납득시키겠는가. 분명 달빛 때문에 착각했을 것이다.

아침햇살과 함께 깨어난 도화는 바위를 기어올라가 주변을 둘러보더니 나아갈 방향을 정했다. 바위투성이 구릉을 오르다보니 잘 숨겨진 출입구가 나오지 뭔가. 문은 잠겨있지 않았고, 도원은 망설임 없이 발을 들이는 도화를 보며 당황해 따라들어왔다. 벌레 한 마리 없고 먼지만 켜켜이 쌓인 죽은 공간이었다.

[그럼 밤에는 앞으로 가야 할 장소에 대한 꿈을 꾸고 아침에 깨면 어디로 가야 할지 알게 됐다, 그런 말이야?] [영문은 모르겠지만 그렇게 됐네.] 도원은 팔짱을 끼고 한참을 생각한다. [실제로 여기 와 있으니까 믿을게. 하지만 어떻게?] [나도 몰라. 나도 알고 싶어.]

 

[이 먼지를 다 마시다보면 출구를 찾기 전에 죽겠지.] 도원은 소매로 입을 가린 채 우물대며 말한다. 도화는 숨이 아까운 듯 입을 열지 않은 지 한참이다. 복도는 격자형으로 얽혀 있어 도무지 현재 위치를 가늠할 수가 없다. 도화가 기억하는 방 번호를 따라가는 것만이 유일한 해법이다. 

쌍둥이가 지나온 복도 뒤쪽은 먼지구름이 피어올라 적어도 지나온 길을 헷갈릴 염려는 없다. 격자형 구조 속에서 제자리를 맴돌다가 먼지가 자욱한 복도가 나오면 이미 왔던 곳인 것. 지루해진 도원은 몇몇 방문을 열어보려고도 했지만 전부 굳게 잠겨 꿈쩍도 않는다. 안에 뭐가 들었을지 모르므로 오히려 안 열려서 다행일까. 

앞서 가던 도화가 놀란 듯 숨을 들이쉬며 멈춰선다. 도원이 황급히 따라잡아 보니, 손전등 빛이 닿는 지점에 불길한 물건이 보인다. [시체잖아!] 사람 해골이다. 한두 개가 아니다. 넓은 방에 쌓여 있는 해골 무더기. 방은 이제까지 지나온 복도와는 구조나 양식이 판이하다.

[전투가 벌어진 걸까?] 도원의 물음에 도화는 고개를 젓는다. [여기서 싸움이 났으면 이렇게 가지런히 쌓아놓을 틈은 없지 않았을까.] [그럼 누군가 해골을 주워다가 일부러 만들어놨다는 뜻이잖아.] [해골이 저절로 굴러왔을 리는 없을 테니 아마 그렇겠지.] [누가?] [그 사람이 말했잖아. 자기들 말고도 숲에 사는 사람들이 더 있다고.]

해골 더미를 쌓은 자가 아직도 지하시설 안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자 도원은 다급해진다. [출구를 빨리 찾는 게 낫지 않을까 해.] [아직 한참 남았어. 그리고 이 방을 지나가야 해.] [다른 길은 없어?] [여기가 중심부야. 봐.] 도화가 가리킨 벽에는 먼지가 뽀얗게 덮인 약도가 붙어 있다. 과연 지도 위치를 표시하는 붉은 점이 시설 중앙에 찍혀 있다.

다른 복도 역시 이 방으로 모이는 구조였고, 시설 반대편 출입구에 닿으려면 여기처럼 큰 방을 몇 개나 통과해야 하는 모양이다. [만약 앞으로 지나는 방에 누가 살고 있다면.] [이런 데 누가 살겠어?] [저 해골은 뭔데. 니 입으로 한 말이잖아.] [여기에 살 거였으면 해골은 어디 다른 데 묻어주거나 했겠지. 집 안에 해골탑을 쌓았겠어?] 사람이라면 그렇겠지만 이미 이질적인 존재를 목격한 바 있다. 그래도 굳이 거론하지 않는 게 좋겠다 싶어 도원은 입을 다문다. 

해골 더미를 지나 구겨진 철문 사이를 비집고 다음 방으로 들어선다. 첫 번째 방에는 간이 침상처럼 보이는 가구가 어지럽게 널려 있다. 벽에는 유리로 된 찬장이 가득한데 꺠졌거나 내용물이 엎어진 상태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침상이고 바닥이고 할 것 없이 백골 시체가 빼곡하다. 어떤 골격은 팔다리가 일부 없어졌거나, 갈비뼈가 여러 대 부러졌거나, 두개골에 구멍이 난 것도 있다.

두 번째 방으로 진입하기가 쉽지 않다. 철문에 빗장을 몇 겹이나 걸어서 단단히 봉해놓았기  때문이다. 다행히 도원과 도화는 문을 잠그는 쪽에 있었고, 한참을 낑낑댄 끝에 어두컴컴한 다음 방으로 나온다. 점점 더  전투의 흔적이 선명해진다. 벽에는 총탄이 박힌 자국이, 바닥엔 그을음이. 군데군데 피웅덩이가 말라붙은 듯 얼룩져 있다. 뼛조각도 눈에 띈다. [바람소리 아냐?] 도화의 말에 도원도 귀를 기울이더니 고개를 끄덕인다.

세 번째 방으로 통하는 문은 완전히 박살나 있기 때문에 열 필요가 없다. 게다가 벽면이 완전히 허물어져 밖에서 빛이 든다. 무너진 구조물이 가로막지만 둘은  회심의 미소를 짓는다. [내가 뭐랬어.] [예언자 님으로 모셔야겠어.] 

그 때 쌍둥이의 등 뒤에서 두 번째 방의 철문이 쾅 닫힌다. 화들짝 놀라 돌아보는 도원과 도화. [바람 때문인가?] [저 철문이 바람 때문에 닫힌다고?] 의문에 답하듯, 철문 뒤에서 여러 개의 빗장을 차례차례 걸어닫는 소리가 들려온다. 쌍둥이는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고는 누가 뭐라고 할 새도 없이 잔해를 기어올라 달아난다.

 

쌍둥이 앞에 펼쳐진 광경은 예상치 못한 것이다. 산맥을 통째로 깎아 세운 콘크리트 절벽이 끝도 없이 뻗어나갔다. 콘크리트 장벽은 낮은 부분도 높이가 오십 미터는 되어 보였고, 봉우리와 봉우리 사이의 골짜기도 빈틈없이 틀어막고 있다. 장벽 꼭대기엔 자동차도 너끈히 지날 수 있는 통로가 뚫려 있고 산과 접한 안쪽에는 계단과 경사로가 설치되어 장벽 위로 오를 수 있게 해두었다. 쌍둥이가 방금 도망쳐나온 시설은 장벽 위에서도 더 높은 지대에 설치된 군사 건물이었고, 주변은 포탄 구덩이와 화재 흔적으로 엉망이다.

장벽 너머엔 광활한 저지대가 펼쳐져 있다. 숲과 늪, 돌밭과 진창이다. [이런 벽 얘기는 소문으로도 들은 적이 없지?] [정말로 지나간 사람이 하나도 없었나 봐. 벽은 대체 왜 세운 거지.] [건너편을 봐.] 저지대 너머, 지평선 가까운 곳에 벽이 또 있다. 절벽 모양의 흰 구조물이 산맥을 따라 시야가 닿는 한계까지 뻗친다. [진짜 국경은 여기였군. 서로를 상대로 벽을 세운 거네.] [대포를 쏴대기도 했고, 지하 깊은 곳까지 굴을 파놨고, 아주 확실하게 전쟁터잖아.] 

[이제 어떡하지?] 도화는 어깨를 으쓱한다. [왜 나한테 물어? 어디 갈 곳이라도 있어?] 도원은 짐짓 도화의 눈치를 보며 대답한다. [벽을 넘어서 건너가야겠지? 벽이 두 개나 되는데,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봐야지. 근데 그 전에 일단 좀 쉬기도 하고 뭐라도 먹자.] 도화는 끄덕인다. [맞는 말이긴 한데 일단은 여기서 최대한 멀어지자.]

 

통로를 따라 걷다 보니 일정한 간격으로 장벽 내부로 들어갈 수 있는 출입구를 지나치게 된다. 물론 쌍둥이는 어두운 시설 속에 다시 들어갈 생각은 전혀 없다. 무거운 철문들이 움직이지 않고 계속 닫혀있으면 좋겠다는 입장이다. 또한 걷다 보니 해가 서산을 넘어간다. 날이 어두워지며 차고 건조한 바람이 불어온다. 밤을 지낼 장소를 찾아야 하는데, 삭막하기만 한 콘크리트 구조물에 그런 게 어디 있겠는가.

결국 쌍둥이는 돌출된 환기통 사이의 공간에 자리잡고 웅크리며 서로를 끌어안는다. 배낭에서 곡물 스틱을 꺼내 우적우적 씹어먹는다. 산 위에서 부는 바람은 그 소리만으로도 산을 깎아낼 것 같다. 철로 된 환기통은 바람을 맞아 미친듯이 떨며 덜컹거린다.

[내일은 사냥이라도 해볼까?] 도원의 말에 비웃음을 흘리는 도화. [한번도 성공한 적 없잖아.] [성공해본 적이 없다고 앞으로도 성공 못하리란 법은 없지. 실패에서 배우는 거야.] [근데 사냥을 뭘로 할 거야. 새총 하나 있던 것도 고무줄 끊어져서 버렸잖아.] 도원은 아찔한 표정을 짓는다. [아, 그랬었지. 젠장!]

어중간하게 차오른 달과 맑은 하늘을 가득 메운 별. 우주를 가로지르는 은하수. 쌍둥이의 피난길에서 서로를 제외하면 언제나 함께 해온 존재들이다. 별자리에 대해선 어린 시절 교과서에서 읽은 것을 빼면 배운 바가 없다. 계절에 따른 별자리를 외우고 다닐 만큼의 여유는 없었다. 북두칠성이나 사냥꾼 정도라면 알아보겠지만.

환기통이 진동하는 소음과 냉기를 머금은 바람이 방해해도 결국 잠은 찾아온다. 도화가 먼저 골아떨어지고 나서 한참이 지난 후에야 도원의 눈도 조금씩 감긴다. 쌍둥이 동생의 체온과 차가운 밤공기가 별반 다르게 느껴지지 않는다. 도화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걸까.

 

도원이 눈을 떴을 때 도화는 이미 일어나서 체조 비스무리한 걸 하고 있었다. [언제 일어났어?] 잠이 덜 깬 도원이 묻자 도화가 빙글 돌아선다. [어쩐지 몸이 가볍네. 열도 내린 것 같고.] 그러나 도원은 눈이 휘둥그레진다. [너, 얼굴이 왜 그래?] 도화의 얼굴은 목에서부터 타오른 푸른 얼룩으로 물들었다. [내 얼굴이 뭐가 어때서?] 물에 잉크가 번지듯 왼편 목덜미로부터 번진 자국.

도화를 앉혀서 상의를 들춰보니 과연 갈비뼈를 가로지른 상처부위에서 푸른 자국이 퍼져나와 도화의 몸을 물들였다. 얼굴만이 아니라 팔꿈치와 허벅다리까지 닿았다. [차가워.] 푸른 자국에선 사람의 체온일 수 없는 냉기가 느껴진다. 정작 도화 본인은 당황하거나 불안해하는 기색이 없다. [근데 아무 느낌도 없어. 사실 되려 몸상태가 좋은걸.]

[그게 말이 돼? 척 봐도 중독된 거잖아. 상처에 균이 들어갔거나, 아님 처음부터 그게 독을 주입했거나.] [그랬다면 아파야 할텐데 전혀 안 아파. 나도 왜 이렇게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통증이 없으면 다행이지만 그렇다고 끝이 아냐. 해독해야 돼. 안 그러면.] [무슨 수로? 근처에 병원이 있어, 뭐가 있어. 난 멀쩡해. 적어도 지금은. 꿈이 점점 요란스러워지는 것만 빼면.]

[또 꿈 꿨어?] [꿈 말인데, 안 좋은 소식이 있어. 들어 봐.] 도화가 도원의 손을 잡아끌자 도원은 쌍둥이 동생의 곁에 쪼그리고 앉는다. [이번엔 꿈에서 진짜 전투를 겪었어. 어디였냐면, 저 아래서.] 도화는 장벽 너머 숲이 우거진 저지대를 가리킨다. [꿈에서 알게 됐어. 저 아래는 절대 못 지나가. 지뢰밭이던가 아니면 바닥 없는 늪이야. 그리고 맹수가 살아.] 도원은 숨을 삼킨다. [맹수라면, 설마?] 고개를 젓는 도화. [아냐, 그거 말고. 그냥 맹수. 범이나 이리 같은 것들. 완전히 야생의 땅이야. 거기에 지뢰까지 묻어놓은 거지.]

[그럼 어떻게 해? 저지대를 건너야 반대편에 닿는 거잖아.] [그러니까 그게 문제야. 이제 와서 돌아갈 수도 없고.] 도화는 가만히 앉아서 해뜨는 지평선을 응시한다. [우선은 벽을 따라가자.] [그럼 뭐가 나와?] [아니. 몰라. 근데 지금 갈 수 있는 길은 이것밖에 없잖아.]



 

     해가 머리 꼭대기에 오도록 마냥 걷는다. 산꼭대기 바람에 실려온 가루 때문에 간혹 재채기도 나온다. 공기는 차지만 햇살은 따갑다. 도원도 도화도 말 없이 몇 시간을 걷다 보니 점점 잠이 온다. 똑같은 풍경이 계속되고, 장벽은 문자 그대로 끝이 없었으니까.

저녁 때가 다 됐는데, 앞서 가던 도화가 도원의 가슴팍을 탁 친다. 무슨 일인가 싶어 봤더니 모르는 사람들이 쌍둥이를 둘러싸고 있다. 정신이 번쩍 든다. [누구세요?!] 어디선가 갑자기 나타난 사람들은 허름한 옷차림에 다들 두건을 푹 눌러 쓰고 얼굴을 가렸다. 게다가 무기를 들고 있다. 낡아빠진 소총이다.

양손 들고 살려달라고 빌어야 하나 싶은데 그 중 한 명이 총구를 들이대며 걸어나온다. [사람이냐?] 도원은 세차게 고개를 끄덕인다. 괴한은 총을 돌려 도화 쪽을 가리키며 묻는다. [이 친구는 얼굴이 왜 이래? 귀신인가?] 도원이 동생 대신 대답한다. [이상한 짐승에게 습격받았어요. 상처에서 독이 퍼진 게 틀림없어요. 제발 도와주세요. 저는 상관없으니까 제 동생을 해독할 방법이.]

괴한은 손을 들어 도원의 말을 막는다. [설마 안개가 낀 날에 습격받았나?] 도원은 울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뭐가 습격했지? 이상한 짐승이라면.] [몸은 검은 덩어리 같고, 머리는 있는데 얼굴이 없었어요.] [그게 공격했는데 어떻게 살았지?] [동생을 잡아먹으려고 했는데 제가 칼로 찔렀어요. 그랬더니 도망갔죠.] 쌍둥이를 포위한 사람들이 서로를 쳐다보며 소근거린다. 앞서 나온 이가 말한다. [네 동생, 이대로 두면 큰일 난다. 따라와라.]

 

총 든 사람들을 따라 장벽을 내려와 숲을 걷는다. 어느새 밤이 찾아와 주위를 분간할 수 없지만 숲사람들은 잘만 나아간다. 어둠을 틈타 도망칠까 하여도 도화의 상태가 걱정될 뿐더러 최악의 경우 눈먼 총알에 맞을 수 있다. 잡아먹히지만 않기를 바랄 수밖에. [무슨 큰일이 난다는 건가요?] 도원의 물음에 어둠 속에서 대답이 들려온다. [곧 직접 보게 될 거야.] 마치 도화에게 큰일이 일어나는 것을 직접 보라는 것처럼 들리지만 도원은 되묻지 않는다. 무기를 가진 사람에겐 되묻는 게 아니다.

하늘의 별이 가려지는 것으로 큰 구조물에 접근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바깥에서 보기엔 새까맣기만 하다. 어디서 절그럭대는 소리가 나고, 구조물의 하단부가 열리며 희미한 빛이 새어나온다. 안에 들어서서 보니 곧바로 밑으로 내려가는 나선형 계단통이다. 쌍둥이 뒤에서 숲사람이 문을 걸어잠근다.

계단을 내려가다 보니 소음이 들려온다. 다름아닌 사람 사는 소리다. 웅성대는 말소리, 걸어다니는 발소리, 아기 우는 소리. 빛이 점점 밝아지며 넓은 지하 공간이 나온다. 절반은 콘크리트 구조물이고 절반은 땅을 파낸 후 버팀목을 대어 놓은 형태다. 구조물에 난 구멍이나 천막에서 나온 사람들이 쌍둥이와 일행을 쳐다본다. 도화는 몸을 돌리며 얼굴을 가린다.

[우리가 사는 곳이다. 하지만 먼저 봐야 할 사람이 있어.] 숲사람 일행은 쌍둥이를 데리고 계단을 더 내려간다. 빛과 소음이 멀어지며 다시 차가운 어둠 속으로. 일행의 발걸음만 울려퍼지는 가운데, 난데없이 쿵 하는 굉음이 들려온다. 철판을 내려치는 것 같은 큰 소리가 계단 밑쪽에서부터 연달아 올라와 어둠을 뒤흔든다. 도원은 뭐라고 물어보지도 못하고 도화의 손을 꽉 잡은 채 따라갈 뿐이다.

계단이 끝나고도 얼마를 더 걸었을까. 발소리의 울림으로 판단하건데 비좁은 복도를 지나는 중이다. 굉음은 이제 앞쪽에서 들려오는 데다가 점점 더 가까워진다. 짐승 따위에게 먹이로 던져주기라도 하려는 것일까. 불길한 생각은 끝없이 가지를 뻗친다. 

이제 굉음의 근원에 도달한 듯하다. 철문이 지근거리는 것이 느껴진다. 누군가 전원을 조작해 천장에 붙은 전등을 켠다. 뒤로는 어두운 복도, 앞으로는 쾅쾅 울리며 덜컹대는 철문. 숲사람 한명이 철문에 달린 쪽창을 연다. 두들기는 소리가 멈추고, 쪽창에 둥근 형상이 나타난다. 잘 보니 사람 머리다. 두 눈은 형형하게 푸른 빛을 발한다.

[너는 나와 같구나.] 대뜸 내뱉는 수감인. 목소리는 갈라지고 쉬었으나 오싹할 정도로 차갑다. 이제까지 움츠리고 숨어있던 도화가 한발짝 앞으로 나선다. [나도 그렇게 되나요?] [언젠가는. 머지않았다. 순식간이지.] [도망치거나 숨을 수는 없나요?] [나를 봐라. 난 스스로 이 안에 갇혔다. 열쇠를 먹어버렸지. 끌려가지 않기 위해.] 

도화는 한참을 말 없이 서 있는다. 도원이 나선다. [무슨 얘기들을 하는 거죠? 동생이 어떻게 된다는 거에요.] 숲사람이 대답한다. 목소리로 봐서는 처음 총을 들이대며 나섰던 그 남자다. [이 사람도 그 짐승에게 공격받았다. 가까스로 살아남았지만 몸에 독이 퍼져서 사람의 형상이 아니게 됐지. 게다가 광기가 들어서 지하에 유폐된 거다. 또한 어느 정도는 스스로의 의지로.]

[그 짐승의 독이 퍼지면, 미치는 건가요?] [확실히는 누구도 몰라. 짐승에게 공격받고 살아돌아온 사람은 내가 아는 한 지금 여기 있는 두 명 뿐이다.] 철문 안에서 소름끼치는 목소리가 대답한다. [푸른 독이 온몸으로 퍼질 거다. 살갗은 얼룩지고 온기조차 잃게 되지. 그게 다가 아니야. 귀신이 끊임없이 찾아온다.]

[어떻게 치료할 수 있죠? 동생을 가둬버릴 순 없어요. 우린 국경을 건너야 한다고요.] 한숨 쉬는 숲사람. [이 땅을 건너가려고 찾아왔나? 잊을만 하면 바보들이 나타나는군. 너희가 걷고 있던 방벽이 사람이 닿을 수 있는 한계선이다. 그 너머로는 죽음의 땅이지. 들어간 이는 아무도 돌아오지 않았다. 반대편에서 건너온 사람도 없고.]

철문 안에서 킬킬 웃는 소리가 들린다. [치료법은 나도 알고 싶구만. 하지만 동생을 가둬두던가 죽이지 않으면 언젠가 큰일이 생길 거다. 귀신들린 미치광이가 될 테니까.] 이에 도화는 나머지 일행을 돌아보며 단호한 목소리로 말한다. [우리 둘이서만 얘기하게 해줘요. 묻고 싶은 게 많아요.] 또 킬킬대는 웃음소리. [나도 궁금한 게 있으니까 그렇게 해줘.]

 

소란스럽던 지하 거주민들도 잠자리에 들 시간이 되자 불을 끄고 천막과 구멍으로 기어들어간다. 도원은 지하 광장 한구석의 모닥불 가에 앉아서 끓는 솥을 바라본다. 짐승의 고기와 향초를 되는 대로 집어넣고 푹 끓인 국이다. 쌍둥이를 여기로 데려온 숲사람 중 총을 들고 나섰던 남자가 다가와 앉으며 두건을 벗는다. 머리가 자그마하고 머리카락이 길다.

[이 땅에선 사람끼리는 해치지 않아. 하지만 짐승 귀신이 들리면 더 이상 사람이 아니게 된다.] [그래서 지하에 가둬둔 건가요.] [말했지만 스스로도 원했던 일이야. 그렇게 영원히 갇히거나, 아니면 숲으로 달려나가서 짐승의 식사거리가 되거나 둘 중 하나였지.] [대체 무슨 괴물이죠.]

[따로 이름은 없지만, 노인들은 명귀라고도 부르더군. 사람을 잡아먹고 혼을 부리는 괴물이다. 그게 있는 한 이 땅 사람들은 서로 도와야만 해.] [숲에 처음 들어왔을 때 만난 사람들은 그걸 터주라고 부르더군요. 아주 오래된 괴물이라고.] [그 부부를 만났나? 착한 사람들이지. 농사도 지을 줄 알고. 그게 언제부터 있었는지는 아무도 몰라.]

[괴물이 사람을 잡아먹는 일이 자주 일어나나요.] [잊을만 하면 한명씩 떠나더군. 늘 예방하거나 추적하려고 시도해봤지만 성공한 적도 없고. 안개 낀 날이나 밤에만 나타났다가 사라지는데, 사람 힘으로 안개를 어떻게 할 수도 없잖아. 자취도 흔적도 남기지를 않더군.]

[살아남은 사람들의 피부가 왜 푸르게 얼룩지는지도 모르는 건가요? 귀신들린다는 건 무슨 뜻이죠.] [독이 올라서 그렇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겠지. 자세한 건 직접 물어보는 게 나을 거야. 뭐라도 좀 먹도록.] 도원에겐 아직도 남은 질문이 많지만 남자는 툭툭 털고 일어나서 어둠 속으로 사라져버린다.

도화가 올 때까지 기다리려고 했으나 허기에 주린 몸이 멋대로 움직인다. 고깃국은 기름지고 걸쭉하다. 헌데 간이 안 되어 있다. 풀냄새로 비린내를 참아가며 고깃조각을 잘근잘근 씹어 음미한다. 소금을 한 됫박은 넣어야 하겠다만 지금 맛을 가릴 때가 아니다. 국물 한 방울까지 다 마신 후 또 국자를 잡는다.

어느새 다가온 도화가 옆자리에 앉는다. 불에 비친 도화의 얼굴은 더욱 창백하다. 푸른 얼룩은 이제 광대까지 올라왔다. [이것 좀 먹어. 맛은 없지만 진짜 살코기야.] 도화는 말 없이 도원에게서 그릇을 받아들고 국물을 마신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표정이 얼어 있다. 도원은 도화가 식사를 마칠 때까지 조용히 기다린다.

[무슨 얘기 했어?] 도원이 조심스럽게 묻는다. [귀신에 대해서.] [귀신? 진짜로?] 도화는 말을 가다듬는 듯 한참을 허공을 바라보며 입을 오물거린다. [이 독의 정체가 바로 귀신인 것 같아. 정확히는, 죽은 사람의 기억. 괴물이 남긴 상처를 통해 괴물의 몸에 갇혀 있던 혼들이 내 몸으로 타고들어온 게 아닐까? 그 사람은 그렇게 말하더라고.]

[무슨 어이없는 소리야. 죽은 사람의 기억이 어떻게 남아있으며 그게 상처를 통해 전해진다니.] [내가 꿈을 꾸는 건 알지.] [응.] [그 사람도 꿈을 꾼대. 항상. 끔찍하게 끝나는 꿈을. 그리고 내 꿈도 마찬가지야.] [길을 알려주는 예지몽 같은 게 아니었어?] [죽은 사람의 기억이 내 꿈에 나타나는 거야. 이 땅에서 살았었고 또 전쟁을 치렀던 사람들.]

도화는 잠시 숨을 가다듬은 후 이어간다. [그 꿈들이 어떻게 끝나는지는 말 안 했지. 늘 같은 결말이야. 홀로 떨어져서 길을 잃고 헤매다가, 안개가 내려앉고, 그 괴물이 나타나서는 나를 잡아먹어. 기억은 거기서 끝나.]

 

도화가 새벽부터 어딜 가고 없길래, 고요한 지하 마을을 돌아다니며 찾는다. 사람들을 깨울까봐 발소리를 죽이며 고개를 빼꼼히 내밀어 구석진 곳과 골목을 살핀다. 어디에도 없다. 그러다 문득 어제 일이 생각나 계단을 내려간다. 철문을 두드리는 소음은 없고, 대화하는 소리가 조금씩 가까워진다. 도화는 철문 앞에 앉아 있다.

도원이 다가가자 쪽창에서 성마른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이렇게 보니까 정말 쌍둥이가 맞구나. 그 덕에 살았는지도 모르지.] [무슨 뜻이죠?] [고립된 사냥감만 노리거든. 나도 혼자 있을 때 당했고.] [혼자서 어떻게 살아남았나요?] [벽 위에서 일어난 일이다. 갑자기 안개가 끼는 걸 보고 급하게 아무 입구나 열고 숨으려는 순간에 뒤에서 덮치더군. 상처는 입었지만 간신히 문은 닫았지.]

[그 때 입은 상처로 지금처럼 된 거군요.] [처음엔 이 정도까지 될 줄은 몰랐다. 상처 입고 살아돌아온 사람은 나밖에 없었으니까. 이 불쌍한 친구처럼, 나도 꿈을 꾸기 시작했지. 지금은 깨어있어도 귀신들이 찾아와.] [상처를 통해 전해진 기억인가요.] [더 심하다. 귀신들은 나도 자기들처럼 명귀에게 잡아먹히길 원해. 명귀에게 이끄는 거다.]

[그래서 독방에 갇히기로?] [맞아. 움직일 수 있으면 내 발로 명귀의 영역에 걸어들어갔을 테니까.] [명귀는 어디에 살죠.] [안개가 낀 곳이라면 어디든. 그게 안개를 불러온다고 해야 맞을 거다. 뜬금없이 안개가 내려앉고 나면 늘 사람이 사라졌으니. 하지만 어딘가에 눌러앉은 둥지도 있다.]

[우리 둘이 함께라면 습격받지 않을 수도 있어요. 둥지에서 최대한 먼 길로 돌아가면 되지 않을까요.] [어딜 간다는 말이냐. 벽을 넘어서?] 킬킬 웃는 소리가 들려온다. [죽는다. 둘로는 택도 없어. 너희도 여기 눌러앉는 건 어떠냐. 못된 인간들은 아니야. 잡아먹을 짐승도 많고.] [그럼 도화는 어떡하고요.] 

[뭐하면 옆방에 자리를 마련해주지.] 소름끼치는 웃음소리. 도원은 벌떡 일어나 도화의 어깨를 붙잡는다. [가자.] 도화는 머뭇대며 일어선다. 웃음이 뚝 그치더니 음산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여기서 하루를 걸으면 벽이 무너진 곳이 나온다. 무시무시한 폭발이 일어났던 장소지. 하지만 거길 지나갈 순 없을 거야. 안개가 걷히지 않는 땅이니까.] 도원은 쪽창을 닫아버린다.

 

도화가 사람들 앞에서 얼굴 보이는 걸 꺼려했기에 쌍둥이는 조용히 시간 보낼 곳을 찾는다. 들어온 입구의 계단 말고도 시설 여기저기에 계단이며 사다리가 있었고, 그 중 망루라는 표지판이 달려있는 계단을 오른다. 헌데 끝이 없다. 계단 수로 미루어보아 지상 위로 한참 높이 솟아있을 터이다.

꼭대기에 다다르니 바람소리가 들린다. 서너 사람이 겨우 들어올 법한 공간에 쌍안경 하나가 놓여 있다. 창 밖을 보니 나무 꼭대기가 내려다보인다. 바로 아래쪽엔 시설의 지상부가 보이는데 나뭇가지와 흙으로 덮어 위장해 놓았다. 숲은 넓고 모든 방향이 산으로 둘러쌓였다. 

도원과 도화는 벽에 기대어 앉아 서로를 바라본다. 그 후로 만 하루가 지났더니 도화의 얼굴 왼편이 온통 푸르게 물들었다. 손을 뻗어 만져보니 역시 차갑다. [아프지는 않아?] [아무 느낌 없어.] [꿈은?] [잠을 자기가 싫어.] 고개를 숙이는 도화. [그 사람 말이 맞아. 단순히 죽은 사람의 기억만 보이는 게 아냐. 그 기억들이 항상 내가 괴물에게 잡아먹히는 걸 보여준다고.]

[잡아먹힌 건 과거의 사람들이지 네가 아냐.] [나도 언젠가 그렇게 되겠지.] [아주 멀리 달아나면 어떨까?] [어디로? 이미 도망쳐왔잖아. 막다른 길이잖아.] [더 갈 수 있어. 벽을 넘어가면.] [그 땅에선 아주 확실하게 죽을 거야.] [여기서 기다리는 것보단 낫잖아? 스스로 죽으러 가거나 미쳐버리기 전에 시도라도 해보자고.]

[평생 지하에 갇혀 사는 것보다 사지에 걸어들어가는 게 더 좋은 선택인 이유를 하나만 대 봐.] [나는 너 갇혀있는 꼴은 못 봐. 죽으러 가면 적어도 같이 죽겠지.] 도화는 고개를 든다. [넌 살 수 있잖아. 여기에 정착해.] [내 동생 죽으라고 내버려두고 혼자 살라고? 차라리 명귀를 내 손으로 죽이러 가겠다.]

도화는 어이없다는 듯 웃는다. 허나 도원은 자기가 한 말에서 깨달음을 얻은 모양이다. [그래. 그걸 죽이면 되잖아. 우리가 먼저 죽이면 잡아먹힐 일도 없고.] [어떻게 죽일 건데?] [넌 못 봤을 수도 있지만 칼이 박힌 채 도망쳤어. 칼이 박힌다는 건 상처를 입는단 뜻이지. 죽을 때까지 총으로 쏘면.]

남자 목소리가 대화를 중단시킨다. [헛수고다.] 망루 밑 계단에서 머리 작은 남자가 올라온다. [우리 얘기를 엿들었나요?] [방금 전 그것만. 너희가 망루로 올라갔다는 얘기를 듣고 찾아왔다. 혹시 바보짓 할까 해서.] [어떤 바보짓이요.] [이 땅에선 죽음에 이르는 길이 아주 많지. 괴물을 잡겠다고 나서는 일도 그 중 하나다.]

[당신들은 총도 있고 인원도 많잖아요. 단체로 사냥에 나선 적은 없나요?] [왜 없겠어. 내가 기억하는 것만 해도 세 번 출정했다. 아무도 돌아오지 않았지만.] 도원은 침을 꿀꺽 삼킨다. [전부 죽은 건가요.] [죽었는지 뭔지도 몰라. 그냥 사라졌으니까. 사람이 여럿이더라도 명귀의 둥지에 들어가면 잡아먹히는 거다.]

[지하에 있던 사람한테서 벽이 무너진 곳 얘기를 들었어요.] [거기가 바로 둥지야. 늘 안개가 껴있고, 안개 속으로 들어가면 나오지 못해. 인원이 많아도 별 수 없지.] [난 내 손으로 그걸 찔렀어요. 형체가 있는 뭔가를 찌르는 느낌이 들었다고요. 총을 쏘면 더 확실하게 죽일 수 있을 거에요.]

머리 작은 남자는 한숨을 내쉰다. [총이 어디서 나서? 누가 같이 가준다고 했나?] [당신이 가진 총을 빌려줘요. 명귀를 죽이고 나면 거기 두고 떠날게요.] [허세 부리지 마라. 죽으러 가는 건 자유다만 내 총을 그냥 줘버릴 순 없다.] 그러자 도원은 호주머니를 뒤져 뭔가를 꺼낸다. [이거랑 바꿔요.]

남자는 눈을 가늘게 뜬다. [그거, 작동하나?] 도원은 라이터를 열어 찰칵 하고 불을 붙인다. [아주 멀쩡한 물건이에요. 가스는 알아서 하고요.] 남자가 손을 뻗자 도원은 팔을 휙 빼버린다. 남자는 잠시 생각하는 듯 말이 없더니. [좋아. 그걸로 총을 사는 거라면 불만은 없다. 내려와라.]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철그럭대는 소리가 울려퍼진다. 라이터 한개와 낡아빠져서 발사가 될지도 불확실한 총을 다섯 자루나 교환했다. 두 자루와 세 자루씩 나눠서 들었다. 도원이 전부 들려고 했으나 빼앗긴 것이다. 숲사람에게서 나눠받은 육포를 씹으며 쌍둥이는 장벽을 따라 걷는다. 채집순찰대와 작별인사를 나누고 헤어진 지 한나절이 지났다.

[이 경우는 나 혼자 가야 맞는데.] 도화는 맥없이 중얼거린다. [왜?] [시도하다 죽을 게 뻔한 일이라면, 어차피 죽을 예정인 사람이 해야, 도의적으로다가.] [헛소리 할래. 나만 두고 너 혼자 죽는 건 도의적으로 맞는 일이야?] [살 수 있는 사람은 살아야지.] [산다 해도 어디 갈 곳도 없이 너 죽은 땅에서 평생 살라는 소린데 그게 사는 거니.]

[살면 살아지는 거지. 이제까지는 뭐 좋아서 살아있었나. 계속 도망만 쳤는데 결국 도망칠 곳이 없어서 총을 들게 됐잖아.] 이에 도원은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과장되게 한숨 쉬는 동작을 해보인다. [도망치는 건 나쁜 짓이 아냐. 전쟁이 나쁜 짓이지. 그리고 적어도 지금은 우리가 살려고 총을 든 거잖아?] [흠. 긍정적이라서 좋겠다.]

 

검게 그을린 대지가 가까워진다. 저지대를 가로지르는 거대한 구덩이가 시야에 들어온다. 장벽을 무너뜨릴 정도의 폭발이 일어났다는 얘기가 정말인지, 집채만한 콘크리트 더미가 무너진 채 쌓여 있다. 그을린 대지의 중심부엔 들었던 것처럼 안개가 내려앉아 있다. 내부는 보이지 않는다. 

잔해 더미를 기어내려가야 했다. 도원과 도화는 각자의 총과 배낭을 한데 묶어서 먼저 내려간 사람에게 던져주는 식으로 짐을 옮긴다. 폭발 구덩이는 깊고 흙과 돌마저 타버렸다. 풀도 자라지 않는다. 안개지대 언저리에서 총을 점검하며 마음을 가다듬는 쌍둥이. [안개 속에서 제일 위험한 건 서로를 놓치는 거겠지.] [그러네.] [그러니까 끈으로 묶자.] 몇 발자국 정도의 거리를 띄워서 밧줄로 서로의 몸을 묶은 쌍둥이는 안개 속으로 나아간다. 

모든 기척이 안개에 파묻혀 버린다. 안개는 짙고 질감마저 있어서 손으로 움켜쥐면 뭉쳐질 것만 같다. 이 안개 속에 분명 괴물이 기다릴 터이다. 상처입은 사냥감이 제발로 둥지에 걸어들어왔으니 기뻐하지 않을까. 어디쯤 왔는지,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전혀 감도 잡을 수 없다. 

그러다가 참방 하는 소리에 밑을 내려다본다. 구덩이 중심에 물이 고여 연못 내지는 호수가 형성된 듯하다. 검은 수면에 파장이 퍼져나간다. 얼마나 깊은지 알 수 없으므로 돌아가야 할 터. 좌우를 둘러보는데, 안개 저편에서 쌍둥이가 있는 방향으로 파장이 전해져온다.

길다란 다리로 철벅대며 걸어오는 짐승. 거대한 거미와도 같은 형상이다. 몸통은 검은 고름을 뭉쳐놓은 듯하고 돌출된 머리엔 이목구비 없는 얼굴의 윤곽. 텅 빈 얼굴이 쌍둥이를 응시한다. 도원은 망설이지 않고 총을 들어 방아쇠를 당긴다. 다만 낡은 총은 딸깍 하고 부품이 걸리는 소리를 내며 불발한다.

짐승은 앞다리를 휘둘러 도원을 후려친다. 도원을 저 멀리 날려보내고 도화에게 달려드는 짐승이지만, 도화는 번개처럼 짐승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간다. 몸을 서로 밧줄로 묶은 덕에 도원이 날아가자 도화도 덩달아 나뒹군 것이다. 몸을 추스른 쌍둥이가 총을 겨눴을 땐 짐승은 이미 안개 속으로 사라지고 없다.

안개 속에서 그림자가 늘어난다. 검은 덩어리 여럿이 쌍둥이를 포위한다. 쌍둥이는 기어서 서로에게 다가가 등을 맞대고는, 다가오는 그림자를 향해 총을 쏴댄다. 총알에 맞은 그림자 덩어리는 연기처럼 산산히 흩어진다. 짐승의 형상을 그대로 갖춘 그림자가 코앞까지 달려왔지만 역시 총을 쏘니 증발해 버린다.

도화는 진작에 총알을 다 써버렸고, 도원에겐 고장나서 불발된 총 한 자루가 남았을 뿐이다. 노리쇠를 미친듯이 당겨대지만 뭐가 단단히 걸렸는지 나올 생각을 안 한다. 남은 그림자는 둘. 도화와 도원을 각각 노리고 짐승이 접근한다. [허깨비로 총알을 낭비하게 할 줄이야.] 도화는 질렸다는 듯 허탈한 웃음을 흘린다.

[여럿이 와도 승산이 없다는 까닭이 이거였군.] 도화의 목소리엔 포기한 기색이 역력하지만 도원은 땅에 총을 내리치는 참이다. 깡 하는 소리와 함께 약실에 걸렸던 총알이 튕겨져 나오고, 도원은 노리쇠를 밀어 다음 총알을 장전한다. 두 짐승은 팔을 뻗으면 닿을 거리까지 다가왔다.

짐승을 노려보던 도원은, 몸을 일으켜 반대 방향으로 총을 겨눈다. 드러누워 눈을 감은 도화. 검은 손아귀가 도원의 몸통을 휘감지만 아랑곳하지 않는다. 도화 쪽에서 덮쳐오던 짐승의 목덜미 안쪽엔 도원 자신의 주머니칼이 여전히 그대로 꽂혀 있다. 도원은 실체를 향해 방아쇠를 당긴다.

짐승은 상처에서 검은 기운을 뿜어내며 몸부림친다. 땅바닥에 고인 짐승의 체액에서 뭔가 보인다. 괴로워하는 표정의 얼굴들이 흙 속으로 스며든다. 몸에서 검은 기운이 흘러나올수록 짐승의 몸집도 작아지고, 그 안에 갇혀있던 혼들이 탈출하며 대신 비명을 지른다. 혼에도 목소리가 있다는 사실을 누가 알았겠는가. 여지껏 집어삼켰던 혼을 질질 흘리며 안개 속으로 사라져간다. 

도원은 도화의 얼굴을 양손으로 부여잡는다. 푸른 얼룩은 그대로다. [왜?] 도화가 묻지만 도원은 무시한다. [괜찮아? 괜찮은 거 맞아?] [그런 것 같아.] [뭔가 달라진 건 없어? 몸에서 독이 빠져나간다던가.] 도화는 스스로의 몸을 여기저기 짚어보더니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다. [나한테는 똑같은 것 같아. 꿈이 계속되는지는 봐야겠지만.]

 

안개가 걷히자 검은 대지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폭발 구덩이의 중심엔 검은 호수가 자리잡고 있다. 호수 표면엔 잔물결만이. 쌍둥이는 서로를 부축해 일어나 호수 너머를 바라본다. 건너편의 장벽은 폭발로 무너지지는 않았지만, 분명 길은 있을 것이다. 검은 대지를 통하면 지뢰나 맹수의 위협도 피할 수 있을 터.

[그거 죽었을까?] 도원의 물음에 도화는 눈을 가늘게 뜨고 주위를 둘러본다. [아닌 것 같아. 물 속으로 숨었거나 했겠지. 그치만 물 속에 숨은 걸 무슨 수로 찾아? 그냥 가자.] [괜찮겠어? 마무리를 확실히 해두지 않으면.] [난 내 식대로 마무리 지으려고 했어. 누가 방해하는 바람에 계속 살아있게 됐지만.]

도원은 지팡이 삼아 짚고 있던 총을 물 속으로 내던진다. [고맙다는 인사는 못할 망정. 아니면 앞으로 날 미워할 거야?] [분명 그 사람처럼 되겠지. 내 몸에 퍼진 독까지 없어진 건 아니니까.] [그래도 넌 계속 내 동생이야. 절대 가두거나 버리지 않아.] [당연한 거 아냐? 멋대로 살려놨으면 책임을 져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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