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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주황색 절규

2020.08.21 11:2008.21

내가 세상에 태어난 뒤 가장 먼저 한 일은 한 때 나의 집이자 보호막이었던 알껍데기를 갉아먹은 것이다. 정정한다. 애벌레로서 가장 먼저 한 일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내 어머니의 몸에서 나올 때 나는 알의 형태였으므로.

내 어머니는 나와 나의 수많은 형제자매를 낳고 죽었다. 정성스럽게도 풀잎사귀 하나마다 알 하나씩을 낳았다. 자식들이 먹이를 두고 다툴 것을 염려한 까닭이다. 그걸 무려 수백 번을 반복한 뒤 힘이 빠진 어머니는 아득한 저 아래로 떨어져 죽고 말았다. 그 전에 아버지는 자신이 지닌 모든 씨를 어머니에게 제공하고 죽었다.

우리도 어른이 되면 자식들을 낳고 죽을 것이다. 그것이 우리들의 의무이자 운명이다.

오늘 처음 바깥 공기를 맡았지만 나와 형제자매들은 우리의 운명에 대해 잘 안다. 까마득한 오랜 세월 동안 같은 삶을 반복해서 살아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을 명심하고 있다. 그것은 열심히 먹고 잘 자라는 것이다.

나는 내가 붙어 있는 풀잎을 갉아먹기 시작했다. 이제 이곳이 내 집이며 나의 먹이가 될 것이다. 다른 것은 먹지 않는다. 이 잎사귀만 먹는다.

우리의 탄생을 축복하듯 하늘은 티 없이 맑고 새파랗다. 나뭇가지 사이를 맴도는 공기가 싱그럽고 신선하다. 축축한 이끼와 흙의 내음, 막 얼굴을 내미는 꽃봉오리들과 어린잎들의 향기, 그런 것들이 섞여 있다.

바닥에 수북이 쌓인 낙엽 아래에서 겨울잠을 깨고 일어난 만물들의 기지개와 하품이 들려온다. 추운 계절이 끝나가는 참이다. 짝을 찾고 영역을 지키려는 두날개족들의 노랫소리가 숲에 울려 퍼진다.

 

*

 

우리는 먹고, 먹고, 또 먹는다. 잠도 거의 자지 않는다. 눈 뜨고 있는 시간 동안 우리는 먹는다. 심지어 싸면서도 먹는다.

우리는 풀잎을 먹는다. 이곳은 먹이가 풍부하다. 우리는 하루가 다르게 성장한다. 몸이 커지고, 색깔이 바뀌고, 허물을 벗는다.

우리는 오로지 한 가지 목표를 위해서 먹는다. 자라서 변태하고 날개를 얻기 위함이다. 네 개의 크고 아름다운 날개. 그것을 파닥이며 북쪽으로 날아가기 위함이다.

우리는 큰날개여섯다리족 중에서도 특히 수가 많다. 어느 정도냐면 추운 계절 동안 우리의 부모들이 이 숲의 나무에 매달려, 모든 나무들이 주황색 잎사귀를 입은 것처럼 보이게 된다. 어떤 나뭇가지는 우리 부모들의 무게를 못 이기고 부러지기도 한다.

우리가 계속 이 숲에 머무른다면 이곳은 우리의 먹성을 감당하지 못 하고 벌거숭이가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숲은 우리만의 것이 아니다. 그것이 우리가 남과 북을 오가며 사는 이유다.

태어난 지 며칠 되지도 않은 애송이가 그걸 어떻게 아냐고 묻는다면, 모른다. 그냥 안다. 헤아릴 수 없는 긴 시간 동안 몸속깊이 새겨진 본능이다.

우리는 그 본능에 따라 오직 이 풀잎만을 먹는다. 이 풀은 쓴맛이 나는 흰 물을 머금고 있어서 우리 피부는 똑같이 쓴맛이 난다. 다른 종족들이 싫어하는 맛이다.

덕분에 우리는 다른 종족들의 눈에 잘 띄는 노란색과 검은색의 조합이다. 눈에 잘 띄면 쉽게 잡아먹히지 않느냐고?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우리는 일부러 이런 색을 띄고 있다. 이것은 일종의 경고다. 우릴 먹으면 너희는 쓴맛을 보게 될 거라는 경고.

 

*

 

두날개족 한 마리가 우리를 발견하고 다가온다. 어찌나 덩치가 큰지 녀석의 거대한 날갯짓에 잎사귀들이 펄럭일 정도다. 저 커다랗고 뾰족한 주둥이는 한눈에 보기에도 위협적이다.

큰 걱정은 하지 않는다. 이 숲의 두날개족들은 대개 우리를 건드리지 않는다. 하지만 저 녀석은…….

아무런 의심도 경계도 않고 잎사귀만 갉아먹던 내 형제가 두날개족의 공격을 받고 말았다. 노란 줄과 까만 줄이 반복되는 기다란 몸이 녀석의 주둥이 안으로 사라진다. 나와 똑같이 생긴 생명체가 포식자에게 먹히는 장면은 어린 나에게 무척 충격적이다. 나는 풀잎을 갉아먹는 것도 잊고 그 모습을 응시했다.

형제를 꿀꺽 삼킨 두날개족은 두리번거리다 그 다음 타겟을 정했다. 그것은 얼빠진 얼굴로 그쪽을 주시하는 나였다. 눈이 마주친 순간, 녀석은 거대한 부리를 벌리며 달려들었다.

나는 빨리 움직일 수가 없다. 다리는 많지만 길이가 몹시도 짧은 탓이다. 내가 빨리 움직일 수 있는 유일한 부위는 입이다.

내 몸 위로 거대한 부리가 덮치는 그때, 두날개족이 몸을 움찔했다. 녀석은 괴로워하고 있었다. 나를 내버려두고 부리를 벌리며 꺽꺽대더니 아까 잡아먹은 내 형제를 토해내고야 말았다. 쓴맛에도 불구하고 억지로 삼켰더니 속에서 탈이 난 모양이다. 안타깝게도 형제는 세상을 떠난 뒤였다.

그의 희생 덕분에 우리는 포식자 하나를 물리칠 수 있었다. 저 두날개족은 앞으로 다시는 우리를 입에 대지 않을 것이다.

 

*

 

이 숲에서 꽤나 강한 포식자 그룹에 속하는 두날개족이 싫어할 정도라면 우리가 무척 무섭거나 징그러운 종족일 거라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혹시 애벌레가 연약하기만 한 존재인 줄 안다면 오산이다. 우리 친척들 중에는 이런 녀석들도 있으니 말이다.

밤이 되면 나오는 녀석들이다. 녀석들은 밤에 깨어나 숲을 기어 다니는 어느 종족을 사냥한다. 동그란 집을 등에 얹고 돌아다니는 등집족들이다. 다리가 없어 몸 전체로 기는데 항상 끈적끈적한 물을 꽁무니 뒤에 기다랗게 남겨놓는다.

칠흑처럼 캄캄한 밤, 나는 여전히 잎사귀를 갉아먹고 있었다. 밤이면 숲은 새로운 세상이 된다. 낮 동안 코빼기도 비치지 않던, 도무지 어디에 숨어 있었는지 알 길이 없는 생명체들이 어슬렁어슬렁 돌아다니기 시작한다.

친척 녀석 하나가 낙엽 사이를 바스락거리며 기어 나왔다. 하루 종일 그 아래에서 잠만 자던 녀석이다. 마침 그 근처를 등집족 한 마리가 지나가고 있었다.

친척 애벌레는 등집족이 남긴 점액질의 흔적을 따라갔다. 등집족은 누가 쫓아오는지도 모르고 느릿느릿 앞으로만 기었다. 그러다 애벌레가 기회를 잡았다.

녀석은 뾰족하고 기다란 턱으로 먹이의 축축하고 부드러운 살결을 찔렀다. 먹이는 집안으로 도망가 숨기도 하고 거품을 내뿜기도 하면서 방어했지만 결국은 잡히고 말았다.

애벌레의 포식이 시작됐다. 녀석은 날카로운 두 개의 턱으로 먹이의 살덩이를 잘라내 입안으로 가져갔다. 한 조각, 또 한 조각. 그렇게 마지막 한 점까지 철저하게 먹어치웠다. 사냥이 쉽지가 않으므로 먹을 기회가 왔을 때 든든히 먹어두기 위함이다. 등집족은 금세 집만 남게 되었다.

이렇게 무자비한 애벌레 녀석들도 종종 누군가의 먹이가 된다. 나는 아까부터 심상찮은 기운을 느끼고 있었다. 살이 벨 듯 날카로운 살기였다. 그것은 친척 애벌레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었다. 어딜까.

돌멩이인 줄 알았던 거무튀튀한 덩어리가 입을 쩍 벌린다. 축축한네다리족이다. 그것의 입에서 기다란 혀가 순식간에 튀어나왔다 들어갔다. 혀끝이 닿은 곳에 애벌레가 있었다. 아마 녀석은 본인이 잡아먹히는지도 모른 채 네다리족의 뱃속으로 삼켜졌을 것이다.

 

*

 

애벌레들의 운명은 가혹하다. 두날개족이나 네다리족에게 먹히기도 하고 우리의 친척인 날개없는여섯다리족의 땅굴로 납치되기도 한다. 녀석들은 날쌔고 힘이 좋은 데다 늘 무리지어 덤비기 때문에 일단 공격이 시작되면 당하는 쪽은 죽은 목숨이라고 봐야 한다.

하지만 그 녀석들도, 그리고 두날개족이 기피하는 우리도 결코 맞닥뜨리고 싶지 않은 종족이 있다. 괴물 같은 놈들이다. 온 숲의 여섯다리족들이, 심지어 일부의 네다리족조차 그들을 두려워한다.

나는 방금 놈들의 살벌함을 목격했다. 여섯다리족 한 마리가 나뭇가지 사이를 날아가다 별안간 멈추고 말았다. 녀석은 허공에 매달려 있었다. 어찌된 일이었을까.

녀석을 붙잡고 있는 것은 자세히 봐야만 알 수 있는 가느다란 실로 엮인 그물이었다. 녀석이 그물을 벗어나려 몸부림쳤다. 그물이 흔들리자 어디선가 다리 여덟 개를 가진 생명체가 쏜살같이 기어 나왔다.

여덟다리족은 여섯다리족을 하얀 실로 친친 감아 움직이지 못 하게 만든 다음 녀석에게 독침을 꽂아 마비시켰다. 그리고 녀석의 몸속에 입을 처박고 내용물을 죽죽 빨아먹었다. 그 결과 녀석은 피부 겉껍데기만 남고 말았다.

우리가 여덟다리족을 각별히 조심해야 하는 이유다. 녀석들은 몸속의 살만 녹여먹으므로 쓴맛의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 우리가 내는 쓴맛은 주로 피부에 몰려있기 때문이다.

먹고 먹히는 삶. 잔인해 보이면서도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우리가 누군가를 해한다면 그것은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함이다. 내가 살기 위해서는 다른 누군가가 희생돼야 하고(이 잎사귀들조차 우리에게 먹히지 않는가), 누군가가 살기 위해서는 내가 잡아먹힐 수도 있는 것이다. 이 숲의 나무와 풀들을 비롯한 모든 종족들은 그것을 당연한 이치로 받아들이고 있다.

풀과 나무들이 우리에게 자신의 일부를 내어주는 이유는 결국 보상을 노린 것이다. 우리는 풀잎을 갉아먹지만 훗날 우리에게 날개가 생기고 꽃꿀을 빨아먹게 되면 우리는 꽃들이 씨앗을 맺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우리는 태곳적부터 이렇게 서로를 이용하고 도와주기도 하면서 이 세상을 살아왔다.

 

*

 

이 질서정연하고도 유구한 흐름에 문제가 생긴 것은 숲의 수많은 꽃들이 꽃망울을 틔우고 일부는 만발하던 어느 날이었다. 동그랗고 투명한 이슬방울들을 햇살이 비추며 오색빛깔 무지개를 빚어내던 신비롭고 황홀한 아침에 그런 일이 생길 줄 누가 알았을까.

우리가 가장 먼저 느낀 것은 이상한 소리였다. 여섯다리족 중에 꽁무니에 독침이 있는 녀석들이 있는데 그들의 날갯짓과도 비슷하지만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우렁찬 소리였다. 그 소리가 숲 전체를 맹렬히 뒤흔들고 있었다.

저쪽 어딘가에서 종족들의 애처로운 비명이 들려왔다. 그 괴상한 소리와 더불어 비명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두날개족, 네다리족 할 것 없이 모두 괴상한 소리가 나는 쪽으로부터 도망오고 있었다. 그들은 공포에 질려, 우리가 무슨 일이냐 물어봐도 대답 없이 저 멀리 뛰어가거나 날아가고 말았다.

이상한 굉음이 한참 울린 뒤에는 세상이 부서지는 것 같은 큰 소리와 함께 바닥의 육중한 흔들림이 느껴졌다. 하늘을 가릴 정도로 키가 큰 나무들이 속속 쓰러지는 탓이다. 저 멀리에서 나무의 우듬지들이 하나둘 모습을 감추고 있었다.

죽은 지 오래된 나무가 썩어서 제 무게를 감당치 못 하고 이따금씩 쓰러질 때가 있다. 하지만 지금 일어나는 일은 그것과는 다르다. 왜냐면 나무들도 비명을 지르고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무시무시한 이빨로 자기들의 허리를 통째로 잘라내고 있다며 도와달라고 애원한다.

고통이 가득한 그들의 호소가 우리를 두려움에 떨게 했다. 일부 종족들이 그들의 몸통에 구멍을 뚫어 집으로 삼을 때도 의연하게 대처하는 그들이다. 수백 년간 우리에게 집과 양식과 놀이터가 되어준 큰 어른이자 신과 같은 존재들이다. 그런데 그런 존재들이 이렇게 속수무책으로 당하고만 있다니.

불안하고 불길한 기운이 엄습해 왔다. 나는 숨조차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나뿐 아니라 숲의 종족들 모두가 마찬가지였다. 이제껏 우리가 이토록 공포에 떨었던 적이 있었던가.

거센 폭풍이 숲을 휩쓸거나, 폭우가 내려 숲이 물에 잠기거나, 여러 달 동안 비가 한 방울도 오지 않아 숲이 마를 때조차 숲의 종족들은 나무들의 굳센 의지를 믿고 함께 버텨 왔다. 하지만 지금 그 나무들이 두려워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린 누구에게 의지해야 하는가. 세상이 멸망할 것 같은 느낌이다.

나무들이 쓰러지며 일으키는 바닥의 진동이 더욱 거세질 무렵, 이 모든 재앙의 주범이 모습을 드러냈다. 말로만 듣던 두다리족이었다. 두날개족처럼 두 다리로만 땅을 디디며 걷고 있었다.

 

*

 

두다리족은 숲의 웬만한 네다리족보다도 덩치가 컸다. 기이한 생김새였다. 머리가 저렇게 높이 달려 있으면 어지럽지 않을까? 다리 두 개로만 뛰어다니면 기둥처럼 솟은 몸이 휘청대지 않을까?

그들의 다리는 실제로 네 개였으나 머리 아래에 달린 앞다리는 두날개족과 달리 날개가 아니라 한쪽으로 구부러지는 짧은 막대기 같은 것들이었다. 그 끝에 기괴한 굉음을 내는, 나무들이 무시무시한 이빨이라 부르는 것들이 들려 있었다.

일렬로 늘어선 뾰족한 이빨들이 귀청이 찢어질 정도로 거대하고 소름끼치는 소리를 내뿜으며 윙윙 돌아가고 있었다. 그것들이 나무의 몸통에 닿자 나무껍질이 가루가 되어 온 사방에 튀었다. 나무의 속살에서 풍겨 나오는 비린내가 코를 찔렀다. 나무는 손쓸 사이도 없이 고통스런 비명을 지르며 절단되고 말았다.

두다리족들이 저들끼리 뭐라고 외친다. 그들이 어디론가 뛰어가자 반대편으로 나무가 기울기 시작했다. 나무에서 먹고 자는 두날개족들은 달아난 지 오래였다. 그들은 차마 멀리는 못 가고 둥지에 두고 온 제 새끼들 주위를 맴돌며 달아났다 다가오기를 반복했다.

! 거대한 나무와 땅이 충돌하며 온 세상이 묵직하게 진동했다. 나뭇가지와 함께 추락한 두날개족 새끼들의 가녀린 울음, 새끼들을 잃은 부모들의 통곡, 나무의 굵은 몸통 아래에 깔려 단말마를 맞이한 종족들의 비명, 그것을 지켜보는 다른 종족들의 공포 어린 탄식, 그것들은 두다리족의 웃음소리와 그들이 지닌 무시무시한 이빨의 굉음에 묻혀 버렸다.

 

*

 

저들은 나무를 왜 자르는 걸까. 먹으려는 걸까. 나무를 먹을 수 있는 종족은 내가 알기로는 일부 날개없는여섯다리족 뿐인데. 설사 먹을 수 있다 쳐도 왜 저렇게 많이 자르는 걸까.

숲에 나타난 두다리족은 십 여 마리밖에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들이 베어낸 나무는 백 그루가 넘는다. 저장해뒀다 먹으려는 걸까. 하지만 왜? 추워지는 계절도 아닌데. 나무들은 항상 이 자리에 있는데.

먹으려고 잘라낸 건지도 의심스럽다. 그들은 나무에 붙은 잔가지를 모두 잘라내 불태웠다. 남은 몸통은 바닥에 그대로 놓아두었다.

죽은 나무들의 시신 조각들과 그 사이에 섞인 여러 종족들이 타는 매캐한 냄새가 온 숲 구석구석을 파고들었다. 죽음의 냄새였다. 숲의 종족들은 그 역하고 두려운 냄새를 피하지도 못 하고 고스란히 맡고 있어야만 했다.

두다리족들은 그 냄새가 아무렇지도 않은지, 저들끼리 웃으며 오히려 그 불 위에다 무언가를 구워서 먹기 시작했다. 아까 그들에게 덤벼들었다가 사냥당한 털많은네다리족이다.

일부 소형 네다리족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던 그가 두다리족들이 가진 막대기 때문에 죽어버렸다는 사실이 온 숲에 삽시간에 퍼졌다. 두다리족들의 검은 막대기는 천둥 같은 소리와 함께 불을 뿜었다. 그리고 그 불이 향한 생명체는 피를 흘리며 고꾸라져 죽었다.

두다리족들은 자기들이 잡은 네다리족의 가죽과 내장을 먹지 않았다. 그들은 가죽을 어디론가 가져가고 내장은 숲에 버렸다. 내장은 수많은 다리많은족들의 성찬이 되었다.

두다리족들은 엄청나게 먹었다. 털많은네다리족은 물론이고 두날개족, 다리없는족도 가리지 않고 먹었다. 무언가를 먹을 때마다 그들은 불을 피웠고, 숲에는 죽음의 냄새가 퍼져 나갔으며, 다리많은족들은 덩달아 배가 불렀다.

숲의 소형 족종은 바짝 긴장했다. 언제 우리 차례가 돌아올지 몰랐다. 저들이 먹지도 않을 네다리족과 두날개족을 마구잡이로 사냥하는 것을 보면 우리 앞에 어두운 운명이 임박했음을 알 수 있었다.

 

*

 

숲의 상당 부분이 허허벌판이 되었다. 울창한 나무들에 늘 가려져 있던 바닥은 제 몸을 하늘 아래 당당히 드러내기를 괴로워하는 것 같았다. 그곳은 딱딱하게 메말라 부스러지는 황폐한 땅이 되었다. 왜냐면 두다리족은 나무뿐만이 아니라 바닥에 붙은 관목과 풀들도 모두 베어버렸기 때문이다.

두다리족이 빠르게 돌아가는 무시무시한 이빨을 우리 풀을 향해 휘두르던 순간은 이 몸이 몇 번을 죽고 다시 태어나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머리가 아찔해지도록 귀가 먹먹해지고 세찬 공기의 흐름이 너울대는가 싶더니 우리는 잎사귀들과 함께 모두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높이도 가늠할 수 없는 거대한 두다리족들은 바위덩이 같은 두 발로 아무렇지도 않게 우리들을 짓밟고 돌아다녔다. 나는 운 좋게 그들의 궤적에서 벗어나 있었지만 그렇지 못 한 내 형제자매들은 두다리족의 발아래에서 짓이겨져 터지고 말았다. 일부 시신은 두다리족의 발바닥에 들러붙은 바람에 그들이 발을 디딜 때마다 조금씩 으깨어져서 흔적도 없이 사라지기도 했다.

상상할 수 있는가. 내 동족이 처참하게 부서지고 터진 채로 주변에 산재한 모습을. 노란 줄과 검은 줄의 피부 조각들, 저 멀리 떨어져 있는 더듬이와 눈동자들, 여기저기에 흩뿌려진 비릿한 체액들.

시신과 잔해들이 뿜어내는 시큼한 죽음의 냄새는 며칠이 지나도 사그라지지가 않았다. 숨을 쉴 때마다 그것이 느껴져 이루 말할 수 없는 괴로움을 자아냈다. 뱃속이 뒤틀리고 머리가 아득해져 풀잎을 갉아먹기가 힘들 지경이었다.

그것들이 어느 정도 자취를 감춘 것은 온갖 다리많은족들이 몰려와 조각들을 남김없이 먹어치웠을 때였다. 시체를 제거하는 숲의 청소부들, 자연의 순리에 따라 제 도리를 다 할 뿐이지만, 역겹고 게걸스러운 식성을 부끄럼 없이 드러내는 그들이 이번만큼은 밉다. 한편으로는 저 끔찍한 잔해를 더 이상 안 봐도 되니 고마운 마음도 든다.

두다리족들은 우리의 존재를 아는 것 같지 않았다. 알더라도 신경 쓰는 것 같지가 않았다. 그들은 무심해 보이는 모습으로 우리를 밟고 지나가기도 했고, 어떨 때는 다분히 고의적으로 보이는 동작으로 우리를 힘주어 내리치기도 했다.

우리를 먹으려고 그러는가 싶었지만 아니었다. 그들은 내 형제자매들이 죽은 것을 확인하고서도 내버려두거나 재빨리 털어버리기 일쑤였다. 먹으려는 게 아니면 왜 죽인단 말인가. 그 점이 두다리족에 대한 공포를 가중시켰다.

이들은 우리가 상상조차 하지 못 한 종족들이다. 단지 배고픔이 아닌 다른 필요에 의해 혹은 재미로 혹은 아무런 이유도 없이 다른 종족을 죽이는 족속들이다. 이 세상의 것들이 아닌 것 같았다.

 

*

 

두다리족의 공격에서 살아남은 우리 애벌레들은 싱싱한 잎사귀를 찾아내 우리의 식이를 이어갔다. 세상이 어찌 돌아가든, 그 소용돌이에 우리가 언제 어떻게 빨려들든 우리는 우리의 본성을 버릴 수가 없었다. 이것이 세상의 멸망이든 아니든 간에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살아남아 미래를 대비해야 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우리는 두다리족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했다. 우리에게 고마운 보금자리가 되어 준 나무들이 무기력하게 쓰러지는데도 우리가 도와 줄 수 없다는 사실이 개탄스럽기만 했다. 스스로가 비겁하고 나약하게 느껴졌지만, 내가 저 괴물들의 이빨이나 발에 희생당하지 않기를, 그리고 저들이 이 숲에서 강탈하려는 것이 무엇이든 얼른 일을 마치고 돌아가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두다리족들은 이윽고 나무 베기를 멈췄다. 그들이 사용하는 무시무시한 이빨은 바닥에 얌전히 모여 있었다. 이 비참한 재앙이 끝난 걸까. 저들은 이제 이곳을 떠나는 걸까.

안도하는 우리를 비웃듯 숲의 종족 그 누구도 지금까지 듣도 보도 못 한 괴이하고 경악스런 종족이 나타났다. 그들이 등장할 때 우리는 벼락이 치는 줄로만 알았다. 깊은 땅 밑에서 가끔씩 솟구친다는 뜨거운 쇳물이 터져 나오는 줄 알았다. 무시무시한 이빨과 불을 뿜는 막대기와는 차원이 다른 무지막지한 소음과 진동 때문이었다.

숲의 모든 종족들은 까무러칠 듯 놀라며 각자의 은신처로 숨어들었다. 굉음과 흔들림은 계속되었다. 서로의 말조차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로 시끄럽고 땅이 무겁게 울려 우리는 안식을 얻지 못 했다.

폭풍우가 몰려오려는 걸까? 화산이 터지려는 걸까? 하지만 하늘은 새파랗기만 했고 그 어디에서도 뜨거운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 종족은 두다리족 여러 마리를 태울 정도로 거대했다. 발이 정말 이상하게 생겼는데, 커다랗고 둥글고 시커먼 발이 양옆에 여러 개가 달려 돌아가고 있었다. 그 발이 돌아가면서 저 거대한 괴물이 앞뒤로 굴러가게 만드는 것 같았다. 그 발은 깊고 또렷한 발자국을 남기며 땅을 단단하게 다졌다. 저 발에 깔리면 어떻게 될지 상상도 하고 싶지 않았다.

둥근발족들은 여러 종이 존재했다. 등허리가 움푹하게 파인 놈, 기다란 꼬리 끝에 굵은 줄이 달린 놈, 머리에서 솟은 팔 끝에 움푹한 발이 달린 놈, 가슴에 움푹하게 파인 구덩이 같은 것을 달고 있는 놈 등 여러 가지였다.

공통점은 시끄럽다는 것, 지독한 냄새가 나는 연기를 내뿜는다는 것, 둥근 발이 달렸다는 것, 두다리족들을 태우고 다닌다는 점이었다. 그들 혼자 있을 때는 전혀 움직임이 없었다. 두다리족을 태워야만 숲을 돌아다녔다.

저렇게 거대하고 무서운 종족들이 두다리족들의 명령에만 움직이는 것을 보면 두다리족들은 괴물들을 거느리고 부리는, 괴물 중에서도 최상위의 괴물인 것 같았다. 저들은 저 흉물스런 종족들을 가지고 이번에는 뭘 하려는 걸까? 숲은 극심한 두려움에 휩싸였다.

 

*

 

둥근발족들은 여러 가지 일을 했다. 먼저 긴 꼬리 끝에 줄이 달린 놈들은 두다리족들이 바닥에 내버려둔 나무 몸통들을 들어올렸다. 어마어마한 괴력이었다.

나이 많은 나무는 그것 하나만으로도 온전한 하나의 우주를 이룬다. 우듬지까지 층층이 이어지는 나뭇가지에는 얼마나 많은 두날개족들과 소형 털많은네다리족들과 여섯다리족들이 둥지를 틀고 있으며, 그것의 뿌리는 또 얼마나 많은 애벌레들과 다리많은족들과 다리없는족에게 삶의 터전이 되어 주는가.

나무 몸통들은 등허리가 움푹 파인 둥근발족의 그 등허리에 차곡차곡 쌓였다. 한참 뒤 그들이 돌아왔을 때에는 등허리가 텅 비어있었다. 나무 몸통들을 먼 곳으로 옮기는 모양이었다.

저 나무들은 상상이나 했을까. 본인들이 처참한 죽음을 맞이하고 저렇게 기괴하게 토막 난 모습으로 이 숲을 떠나게 될 것이라는 것을.

태어난 곳에 쓰러져 썩어 부서지고 흙이 된 뒤 새로 태어나는 순환의 삶을 살아야 옳은 종족이다. 죽은 후에도 숲의 종족들에게 집과 양분을 제공하다 또 다른 나무로 싹을 틔우는 신성한 종족을 저리도 하찮게 대우하는 두다리족들은 얼마나 파렴치한 족속들인가.

우리가 그들의 파렴치함에 더욱 혀를 내두른 것은 그들이 땅 속 깊이 박힌 나무뿌리마저 몽땅 캐냈을 때였다. 머리에 움푹한 발이 달린 둥근발족들은 밑동만 남은 나무뿌리 주변의 흙을 집요하게 파냈다. 그러다 뿌리가 상당부분 드러나자 그들은 그 이상한 발로 나무뿌리를 잡고 땅속에서 뜯어내기 시작했다. 아아, 내버려뒀으면 다시 새순이 돋고 가지가 자라 오랜 세월 뒤에 나무가 되었을 생명의 근본들이 저 괴물들의 흉악한 발에 통째로 뽑혀 나오는 것이다.

뿌리만이 아니었다. 빛을 싫어해 뿌리 주변에 모여 사는 종족들은 영문도 모르고 맨몸으로 공중에 내던져졌다. 그들은 눈부신 볕과 난생처음 보는 거대 괴물들의 위협에 정신을 못 차리다 비로소 도망갈 길을 찾아 땅을 파헤쳤으나 금세 둥근발족의 육중한 발에 깔려 모두 짓이겨지고 말았다.

두다리족들은 가슴에 움푹한 구덩이가 달린 둥근발족을 이용해 벌판의 마른 풀과 가지들 그리고 조금 전 캐낸 뿌리를 한데 모았다. 그것들의 괴력도 엄청났다. 미처 벌판을 떠나지 못한 종족들은 달아날 틈도 없이 저 움푹한 구덩이의 위력에 밀려 뿌리와 가지들 사이에 갇히고 말았다.

두다리족들은 그렇게 모은 풀과 가지와 뿌리를 모두 불태웠다. 다시금 죽음의 냄새가 숲 전체를 뒤덮었다. 우리는 두려움과 슬픔에 몸을 떨어야 했다.

 

*

 

당할 수만은 없다. 그것이 숲의 종족들 사이에 퍼진 중론이었다. 두다리족들은 무자비한 방법과 속도로 숲을 파괴했다. 파괴된 부분은 이곳만이 아니었다. 숲 곳곳에서 그들은 나무를 베고 옮기고 태우고 있었다. 그들을 향한 숲 종족들의 분노와 증오가 하늘을 찔렀다. 어떻게 저들을 처단하고 내쫓아야 할까.

대형 털많은네다리족들은 이미 두다리족들에게 호되게 당한 기억 때문에 나서기를 주저했다. 그들은 두다리족들의 불 뿜는 막대기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것은 싸워볼 기회조차 주지 않은 채 치명적인 타격을 가했기 때문이다.

두날개족들이 나섰다. 그들은 하늘을 날 수 있는 이점 때문에 두다리족의 막대기를 피하는 요령이 네다리족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좋았다. 특히나 새끼를 잃은 두날개족들은 가만 내버려 둬도 두다리족을 찢어발길 태세였다. 그리하여 그들을 선두로 두날개족들은 일시에 기습을 펼쳤다.

공격은 꽤나 효과적이었다. 두날개족들은 두다리족에게 몰려가 직하강하며 머리와 얼굴을 발톱으로 움켜쥐고 부리로 쪼아댔다. 적들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짧은 앞다리를 허우적거렸다. 일부 두날개족은 어떤 두다리족의 눈알을 파먹는 데도 성공했다.

우리는 두다리족들의 공포를 느낄 수 있었다. 그들은 괴성을 지르며 몸부림치고 있었다. 곧 저 외계 종족들을 이 신성한 땅에서 몰아낼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두다리족의 반격이 만만치 않았다. 그들은 어디선가 납작한 막대기를 꺼내 자신들의 얼굴과 머리에 붙은 두날개족들에게 휘둘렀다. 그 막대기는 햇빛을 반사하며 반짝거렸는데, 엄청나게 날카로워서 그것에 닿은 두날개족들은 날개가 찢어지고 목이 잘리기도 했다.

어떤 막대기는 길이가 훨씬 짧았으나 불을 뿜는 막대기처럼 불을 뿜었다. 몇몇 두다리족이 그 막대 끝을 두날개족의 배에 갖다 대자 두날개족은 굉음과 함께 몸통이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 그들은 내장과 깃털과 붉은 피를 사방에 흩뿌리며 참혹한 죽음을 맞이했다.

전세가 역전되자 남은 두날개족들은 줄행랑을 쳤다. 두다리족들이 그런 두날개족을 향해 막대기를 겨누자, 몇몇 두날개족은 속절없이 피를 쏟으며 바닥에 떨어지고 말았다.

두다리족은 그런 식으로 해치운 두날개족들을 끌어 모아 깃털을 뽑고 목과 발을 자르고 내장을 파내어 불에 구워 먹었다. 구토를 일으키는 악취가 숲의 공기를 더럽혔지만 그들은 즐거워 보였다. 단 하나, 눈이 파 먹힌 두다리족만 비명을 지르고 발광을 해대다 둥근발족에 실려 어디론가 사라졌을 뿐이다.

한참 뒤, 두다리족들이 남긴 깜부기불에는 숯덩이가 된 두날개족의 머리와 발과 뼛조각만이 남았다.

 

*

 

다리없는족들이 모였다. 숲에 사는 다리없는족들 중에서도 가장 덩치가 크고 독니를 가진 종족이다. 그들의 독니는 아무리 거대한 털많은네다리족이라도 금방 마비시켜 쓰러져 죽게 하는 무서운 독을 품고 있다.

다리없는족들은 벌판의 가장자리에서부터 둥근 원을 이루며 두다리족을 포위하고 거리를 좁혀나갔다. 두다리족들은 비명을 지르며 가운데로 모이고 일부는 둥근발족에 올라탔다.

몇몇 다리없는족들이 두다리족 몇 마리를 무는데 성공했다. 그들은 괴성을 지르며 어느 둥근발족을 향해 달려갔다. 나머지 놈들은 다리없는족을 향해 납작하고 반짝거리는 막대기와 불 뿜는 막대기를 휘두르고 겨눴다.

다리없는족들이 그 막대기에 의해 터지고 잘리고 죽어나갔다. 그럼에도 그들이 두다리족 몇 마리를 해치웠다는 사실 자체는 무척 고무적이었다. 저들도 불사의 존재는 아닌 것이다.

두다리족은 처음에 보인 공포를 잊은 듯 점차 일사불란해졌다. 그들은 몇몇 무리로 나뉘어서 어떤 놈들은 무시무시한 이빨과 막대기로 다리없는족을 공격하고 어떤 놈들은 둥근발족을 분주하게 움직이게 했다.

그들은 반격에 최선을 다하면서도 서로를 지켜주고 있었다. 때문에 다리없는족들이 그들을 공격하기가 힘들어졌다. 빈틈을 노리는 순간 반격이 가해졌기 때문이다.

그 결과 상당수의 다리없는족들이 둥근발족의 발아래에서 혹은 그들의 발과 몸통 사이에 엉켜 들어가며 인정사정없이 으스러졌다. 납작하고 반짝거리는 막대기와 무시무시한 이빨 때문에 긴 몸이 두 동강, 세 동강, 네 동강이 나기도 했다. 그들의 머리와 몸통과 꼬리가 두다리족의 발에 차여 이리저리 굴러다니고, 절단면에서 흐른 붉은 피가 땅바닥으로 스며들었다.

그들의 희생 덕에 두다리족 몇 마리를 해치울 수 있었다. 숲의 종족들은 그들에게 깊은 애도와 감사를 표했다. 희망이 보였다. 무적으로만 여겨지던 두다리족을 숲에서 쫓아낼 수 있을 것 같은 조짐이 느껴졌다.

희망적인 분위기는 오래가지 못 했다. 아까 다리없는족의 독니에 물린 두다리족들이 멀쩡한 모습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물린 뒤 어느 둥근발족에 올라타 그 안에서 뾰족한 침으로 자신들의 몸을 찌르더니 그게 그들을 살린 걸까? 그렇다면 다리없는족들은 도대체 무엇을 위해 저렇게 으깨지고 토막 났단 말인가.

전투를 관망하던 여섯다리족들이 나섰다. 꽁무니에 독침이 달린 녀석들이다. 이들 역시 치명적인 독을 가지고 있어, 여덟다리족을 제외한 숲의 종족들이 함부로 건드리지 못 하는 종족이다.

그들이 공격하자 두다리족은 새로운 방법으로 자신들을 지켰다. 불붙은 나뭇가지를 휘두르기도 하고, 정체를 알 수 없는 하얀 물을 뿌려대기도 했다. 몇몇은 녀석들의 독침에 찔리기도 했지만 찔린 자리만 벌겋게 부어오를 뿐 생명에는 지장이 없어 보였다.

그들이 뿌려대는 하얀 물은 지금까지 그 누구도 맡아본 적이 없는 괴상한 냄새가 났다. 그리고 무서운 것은 그 물을 뒤집어쓰면 온몸이 마비되고 뒤틀리며 죽게 된다는 사실이었다. 다리없는족들의 시체 조각들 위로 여섯다리족들의 시신이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그들의 죽음은 허무 그 자체였다. 우리는 끝이 보이지 않는 절망 앞에서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

 

두다리족들과 둥근발족들이 어느 날 갑자기 물러갔다. 어찌된 일일까. 우리는 감히 쾌재를 부르지 못 하고 조마조마하게 무언가를 기다렸다.

아니나 다를까, 지난번과 다른 두다리족과 둥근발족이 나타났다. 그들은 허허벌판이 된 땅을 돌아다니며 흙을 갈아엎고 기다란 둔덕을 줄지어 만들더니 그곳에 뭔가를 뿌리기 시작했다.

몇몇 용감한 두날개족과 여섯다리족들이 그곳을 다녀와 하는 말이 두다리족들이 땅에 뿌리는 것은 씨앗이라고 했다. 여러 종류가 아닌 단 한 종류의 씨앗. 숲에서는 본 적이 없는 씨앗이라고 했다.

저들이 숲을 파괴한 것은 저 오직 저 한 종류의 씨앗을 틔우기 위해서였던가. 도대체 왜? 그 씨앗이 뭐가 그리 중요하기에.

이유야 어찌됐든 씨앗이라는 것은 수많은 종족들의 먹이다. 숲의 많은 종족들이 씨앗을 먹기 위해 허허벌판으로 모여들었다.

하지만 대다수는 성공하지 못 했다. 두다리족들이 또 괴상한 냄새가 나는 하얀 물을 벌판에 뿌려대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리석게도 무모하게 그 안에 들어선 종족들은 그 하얀 물에 의해 목숨을 잃고 말았다. 또 한 가지 무서운 것은 그렇게 죽은 시신들을 먹은 시체 청소부들마저 죽음을 맞이했다는 사실이다.

두날개족들의 경우 두다리족들이 벌판 곳곳에 세워놓은 두다리족의 형상과 기다랗고 팽팽하게 이어놓은 끈 때문에 그곳에 접근하기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곳을 지키는 두다리족이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 게다가 저 끈들은 햇빛을 반사해서 눈이 따갑도록 부셨고 바람이 불 때면 으스스한 소리까지 내고 있었다.

벌판은 죽음의 땅이 되었다. 수많은 종족들의 피와 잔해 위에 만들어진 그곳에서는 두다리족들이 뿌린 씨앗 말고는 아무것도 살지 못 했다.

 

*

 

오로지 한 종류의 풀만 자라는 벌판과 무수히 많은 종류의 생명이 자라는 숲. 세상은 이렇게 두 개로 나뉘어 평화가 유지되어 갔다.

겉보기엔 그래 보였을지 모르지만 숲의 종족들에게는 한 차례의 시련이 휩쓸고 지나간 뒤였다. 땅과 먹이가 줄어들자 종족들 간에 싸움이 벌어지기도 하고 굶어 죽기도 하면서 종족들이 많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다행히 두다리족들은 당분간 숲을 건드리지 않기로 마음먹은 것 같았다. 그들이 관심을 쏟는 것은 자신들이 벌판에 뿌려 싹틔운 그 풀들이었다. 먹음직스러워 보였지만 숲의 종족들은 그곳에 얼씬도 하지 못 했다.

우리는 일상으로 돌아가 각자의 일을 했다. 먹고, 먹히고, 싸고, 자고, 낳고, 죽고, 자라는 일 말이다. 우리 애벌레들은 처음 태어났을 때보다 수천 배나 커졌다. 마침내 변태할 때가 당도했다. 우리는 각자 적당한 잎맥을 골라 차지하고 마지막 허물을 벗은 뒤 그곳에 얌전히 매달려 잠을 잤다.

우리가 잠든 동안 겉껍데기는 고치가 되었다. 우리는 그 안에서 놀라운 변신을 준비했다. 막대처럼 이어진 몸이 머리와 가슴과 배로 분리됐다. 더듬이가 길어지고 대롱 같은 입도 생겼다. 짧디 짧은 다리는 여섯 개의 길고 가는 다리로 바뀌었다.

무엇보다도 극적인 변화는 우리에게 네 개의 넙적하고 우아한 날개가 생겼다는 것이다. 아마도 우리의 생에 대해 무지한 이들이라면 우리 애벌레가 이 큰날개여섯다리족의 새끼라는 사실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을 것이다.

풀잎과 같은 색이던 고치가 무색투명해졌다. 안에서 웅크린 나는 바깥세상을 볼 수 있었다. 이제 나가도 되는 것이다. 나는 투명한 껍데기를 찢고 조심스럽게 머리를 내밀었다. 잠시 뒤 머리와 가슴과 배가 모두 빠져나왔다.

날개는 아직도 쭈글쭈글하다. 나와 형제자매들은 여전히 그 자리에 매달려 날개의 혈관으로 체액을 열심히 보냈다. 날개는 주름이 조금씩 펴지며 차츰 제 모습을 찾아갔다.

우리가 이렇게 형태를 바꾸는 시기는 참으로 위험하다. 우리가 스스로를 방어하거나 달아날 수 없는데 누군가가 공격해오면 우린 그대로 당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른으로 탈바꿈하는 번데기는 극히 적은 수에 불과하다. 우리가 엄청나게 많은 알을 낳는 이유다.

어른이 된 뒤에도 몇몇 운 없는 형제자매들이 포식자에게 잡아먹힌다. 하지만 대부분은 다시 입 밖으로 토해지고 만다. 우리는 여전히 피부에 쓴맛을 머금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날개가 이토록 또렷한 색과 무늬를 지닌 것도 그 때문이다. 우리를 건드리면 너희는 쓴맛을 보게 될 거라는 경고다.

마침내 날개가 평평하고 빳빳해졌다. 나는 날개를 조심스럽게 움직여 보았다. 날개의 위아래에서 일렁이는 공기의 흐름이 상쾌했다. 본능적인 깨달음이 찾아왔다. 연습 따위 필요 없었다. 나는 날개를 힘차게 퍼덕이고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우리는 이제 풀잎을 갉아먹지 않는다. 우리가 먹는 것은 꽃꿀이다. 형형색색의 아름다운 꽃에 살포시 앉아 대롱으로 꿀을 빨아 먹는다. 시원하고 달콤한 액체가 배를 가득 채운다. 온몸에 활력이 넘친다. 우리는 최대한 많은 꿀을 먹어 몸을 불리고 힘을 키웠다.

가자! 북쪽으로! 이동 준비를 마친 우리는 일제히 하늘로 날아올랐다. 하늘은 주황색 날개로 뒤덮였다. 우리가 더 넓은 세상에 첫 발을 디디는 순간이 도래한 것이다.

우리의 몸속에 내재된 시간감각과 태양의 방향이 우리의 이정표가 되어 주었다. 우리는 북쪽을 향해 힘차게 날갯짓했다. 태양을 등진 주황색 물결이 하늘을 굽이치며 가로질렀다.

 

*

 

우리의 최종 목표지는 까마득히 먼 저 북쪽의 어느 숲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곳까지 가지 못 한다. 우리의 자식의 자식의 자식들이 그곳에 도착할 것이다. 우리는 북쪽을 향해 최대한 멀리 날아온 다음 중간의 어느 숲에 둥지를 틀었다. 우리는 이곳에서 다음 여행을 이어갈 자식들을 낳고 죽을 것이다.

처음 와 본 곳이지만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다. 우리의 조상들이 이 긴 여정을 함께할 때 중간 기착지로 머무르던 곳이다. 하지만 그들이 매달려 있었을 나무들은 상당수가 사라지고 몇 그루만이 남아 있었다. 우리는 당황하고 말았다.

더욱 당혹스러운 것은 우리가 알을 낳아야 할, 우리 아이들의 먹이와 집이 되어줄 그 하얀 물을 머금은 풀이 이곳에 많지 않다는 점이다.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 이런, 숲을 둘러보던 우리들은 깨달았다. 이곳에서도 마찬가지 일이 벌어졌던 것이다.

숲은 군데군데 이가 빠진 것처럼 허허벌판이었다. 정확히는 그 벌판에 어떤 풀들이 심어져 있었다. 풀들은 첫 번째 둔덕부터 마지막 둔덕까지 모두 동일한 종류였다. 두다리족들이 벌인 만행이다. 저 풀 말고는 아무것도 살지 못 하는 죽음의 땅, 그것이 여기에도 있었다.

화목하게 풀잎을 나누고 공존하던 우리들 사이에서 경쟁이 벌어지고 말았다. 짝짓기를 마친 후 서로가 잎을 많이 차지하려고 다툼이 일어났다. 다른 자매가 낳은 알을 모두 뜯어내고 제 알을 낳는 자매도 있었다.

나는 한 형제로부터 씨를 받는 내내 우리 앞에 닥친 비참한 운명과 그로 인해 펼쳐질 암울한 미래를 머릿속에 그려 보았다. 두다리족의 등장. 그것은 세상의 멸망이었다. 숲의 파멸, 종족들의 멸종이었다. 나는 알을 낳을 기분이 들지 않았다. 그럼에도 나는 내 소중한 알을 낳을 풀잎사귀를 무의식적으로 찾아다녔다.

이윽고 아무도 차지하지 않은 풀잎들을 발견했다. 나는 그곳에 안착해 각 잎사귀 뒷면마다 알을 하나씩 낳아 붙여놓았다. 고도의 집중력과 에너지를 요하는 작업이었다.

이 모든 노동이 끝나면 나는 저 바닥으로 떨어져 죽음을 맞이하고 썩어 부서져 이 풀들의 양분이 되리라. 나는 풀이 되어 내 자식들에게 먹히고 그리하여 언젠가 다시 이 몸으로 태어나게 될 것이다. 그것이 우리들이 바라는 평화로운 죽음과 순환이다.

하지만 그때 밀어닥친 무거운 진동에 나는 소스라쳐서 알 낳기를 멈추고 말았다. 크고 시커먼 형체가 하늘을 가리며 풀잎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웠다. 두다리족이었다. 크기는 지난번의 두다리족보다 작고 피부색도 달랐지만 분명히 두다리족이었다. 놈은 손에 기다란 막대기를 들고 있었다. 불을 뿜는 막대기일까? 그런데 끝에 푸르스름한 그물 같은 것이 달려 있다.

어쨌든 달아나야 한다. 저들 가까이에 있어서 좋을 게 없다. 나는 날개를 퍼덕이며 날아올랐다. 순간, 시퍼런 그물이 위에서부터 내리 덮치며 시야를 가렸다. 나는 두다리족의 막대기 끝에 달린 그물에 갇히고 말았다.

사방을 아무리 살펴봐도 그 좁디좁은 그물 안에는 탈출구가 없었다. 나는 미친 듯이 날갯짓하며 달아날 틈을 노리다 지치고 말았다. 내 날개에서 떨어진 비늘 가루들이 그물에 촘촘하게 흩뿌려져 은은한 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두다리족은 즐거워 보였다. 그는 나를 그물에서 꺼내 무색투명한 벽 사이에 집어넣었다. 바닥도 하늘도 모두 막혀 있었다.

공포스러운 감각이었다. 바로 눈앞에 숲의 풍경이 고스란히 보이지만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다. 조금만 날아도 보이지 않는 벽에 턱턱 부딪히며 고통을 느껴야 했다.

두다리족은 그 상태로 나를 어디론가 끌고 갔다. 투명한 벽 너머로 숲과 내 동족들이 점점 멀어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그들에게 도와달라며 소리쳤지만 그들은 내 목소리를 듣지 못 했다.

언제부턴가 숲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나는 깨달았다. 나는 이 투명한 곳 안에서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나는 자연으로 돌아갈 권리를 빼앗기고 말았다. 저 혐오스런 두다리족이 내가 응당 누려야 할 순조로운 죽음과 순환을 망쳐 버렸다.

가여운 내 새끼들도……. 내 의지와 관계없이 알들이 밀려나오고 있었다. 어미의 좁은 뱃속에 가득차서 갈 곳을 잃고 분출하는 내 새끼들. 저들이 깨어나도 먹을 것은 제 알껍데기뿐이다. 그들은 이 투명한 벽과 어미의 몸을 먹을 수가 없다. 내 새끼들은 단 며칠밖에 못 살고 죽을 게 틀림없다.

비탄과 증오가 사무친다. 내 절규에 아랑곳없이 두다리족은 이 투명한 벽을 신나게 흔들며 뛰었다. 온 벽이 내 날개에서 떨어진 비늘 가루로 뒤덮여 밖이 희미해졌다.

정신이 아물거리는 가운데 뭔가가 이상했다. 비늘가루가 묻은 벽은 왜 주황색이 아닐까. 나한테서 떨어진 가루인데. 나는 주황색이 보고 싶은데.

나는 비척대며 벽으로 기어갔다. 바닥에 질질 끌리는 내 꽁무니를 따라 하얀 알들이 줄줄이 이어져 나왔다. 나는 남은 힘을 짜내어 날개를 벽에 쳐댔다. 더 많은 가루가 떨어졌지만 그 역시도 주황색은 아니었다. 나는 더욱 거칠게 날개를 파닥였다. 부서진 날개 조각들이 점점이 떨어지며 하얀 알을 덮었다. 나는 비로소 날갯짓을 멈추었다.

더 이상 버틸 힘도 의지도 남지 않았다. 바닥에 이리저리 흩어진 내 소중한 알들. 새끼들을 지키지 못하는 무능력함을 탓하며 나는 축 늘어졌다. 알이 끊임없이 쏟아져 나왔다.

나는 내가 태어난 숲으로 돌아가 있었다. 우리를 낳는 부모들, 막 날개를 얻은 우리들. 나는 그들과 함께 웃었다. 함께 하늘로 날아올랐다. 눈앞이 주황색으로 물들어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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