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채유정

2019.02.20 12:4602.20

  바람이 불었다. 차가운 겨울바람은 이제 불지 않았다. 이것은 단순히 봄이 와서가 아닐 것이었다. 아직도 곤히 자는 그는 며칠 전 마침내 나에게 반지를 끼워주면서 말했다.

  “오래 걸려서 미안해. 나랑 결혼해 줄래?”

  사실 나는 4년이라는 짧지 않은 시간 동안 그와 같이 살면서 결혼해 달라는 그 한마디를 기다렸다. 내가 먼저 해도 이상할 것은 없었지만 왠지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같은 공간에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굳이 결혼식을 올리고 통합기간전산망에 혼인 사실을 업데이트하는 형식적인 일들을 할 필요는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나는 그가 청혼해 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잠에서 깬 그가 나를 불렀다.

  “유정아, 안아줘.”

  그는 항상 내 이름을 불러 주었다. 자기야, 라는 애칭으로도 부르긴 했지만 나는 내 이름을 그의 목소리로 듣는 것이 더 좋았다. 이것은 나에게 생기를 불어넣었다.

  달콤한 키스를 나누고 그가 부엌으로 간 지 한참이 지났다.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요란했지만 나는 잠깐 선잠을 잤다. 진한 커피 향이 침실까지 퍼지고 있었다. 식탁에는 블루베리를 얹은 노릇한 팬케이크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스크램블 에그와 구운 소시지가 놓여 있었다. 눈을 비비는 나를 보고 그가 웃었다. 식탁에 마주 앉으면서 이대로 내내 주말이었으면, 하고 생각했다.

  배가 고파 허겁지겁 먹다가 나만 보고 있는 그를 보았다.

  “오빠, 속이 안 좋아? 왜 이렇게 못 먹어.”

  “응? 사실 팬케이크 몇 개나 망쳤지 뭐야. 그거 내가 다 먹었어.”

  나는 미련하다고 놀리면서 이번 주말에 가볼 웨딩홀에 관해 이야기했다. 그가 찾은 곳은 무려 열 군데가 넘었다. 모두 옛날 스타일인 데다 식 진행 방식은 말할 것도 없었다. 게다가 그는 평소처럼 신중하기보다는 서두르는 모습이었다. 나는 낯설지만 싫지는 않았다. 싫을 이유가 없었다. 청혼을 받은 뒤부터는 긍정의 기운만이 나를 감싸고 있었다.

  우리는 식사를 마치고 외출 준비를 했다. 창문 밖으로 보이는 하늘은 파랗디파랬다. 봄이 오면 입으려고 했던 빨간색 원피스를 꺼내 입었다. 그는 몇 번이나 예쁘다고 말했다. 그날 결혼식 날에 나는 더 멋진 옷을 입고 그의 옆에 서기에 지금보다 훨씬 아름다울 것이라는 기분 좋은 느낌이 들었다.

  그가 개인용 랜드크래프트인 ILC 주행 모드를 수동으로 바꾸지 않았다. 그는 이것을 주말에만 썼다. 평소에는 대중교통인 랜드라인이나 에어라인에 몸만 싣기 때문에 ILC를 모는 주말만큼은 직접 운전하는 손맛을 느끼고 싶어 했다. 그러나 오늘은 달랐다. 그는 그저 결혼식 준비에 관해 할 이야기가 너무 많아서 그렇다고 말했다.

  그가 미소 짓자 마음이 두근거렸다. 곧 치를 결혼식이 촉매제가 되어 우리를 더 단단하게 만들 거야, 이렇게 되뇌는 내가 그것을 형식적인 일이라 치부한 것은 엄청난 모순이었다.

  H-사인포스트가 여기서부터가 개성광역시라고 알려 주었다. 개성에는 예부터 온전히 보존된 한옥마을이 있는데 우리가 처음으로 가보기로 한 한옥 웨딩홀 ‘일생을’은 마을 북서쪽 호수 언저리에 있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한복을 입은 내 모습을 상상했다.

  “그러고 보니 나, 한복을 입어본 기억이 없네.”

  “아무래도 입을 일이 없으니까. 오늘 한번 입어 보자. 진짜 잘 어울릴 거야.”

  나는 언젠가부터 가끔 기억이 나지 않는 때가 있었다. 한 번쯤은 가보거나 먹거나 입어 봤을 법도 한데 생각이 나지 않았다. 시대가 시대이지만 한복은 어릴 적 못해도 한두 번은 입었을 것이었다. 이럴 때마다 그는 아무 일 아니라는 듯 넘어가고는 했다. 나는 그런 태도가 무척이나 서운했다. 이것은 나의 건강 문제일 수도 있는데 걱정되지 않는다는 건가. 그는 유독 이런 경우에만 그랬다.

  혼자서 메디컬 센터에 가볼까, 생각도 했었다. 하지만 솔직히 자주 생기는 현상은 아니었고 센터 예약하기는 불가능에 가까웠다. 첨단 의료 기술을 가지고 있음에도 이용하지 못하는 지금의 현실이 답답하게 느껴졌다.

  “다 왔어.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가끔 기억 안 나는 거. 스트레스 때문인지 뭔지. 아무튼 오빠가 신경 안 쓰면 나 혼자라도 갈 거니까 그렇게 알아.”

  “서운했어? 미안해. 날짜 맞춰서 같이 가보자. 너무 걱정 말고.”

  사과는 빨리하는 그였다. ILC가 기와지붕으로 덮인 주차장 건물로 들어섰다. 주차장은 지하 5층으로 우리를 인도했다. 그와 나는 지상으로 올라가 정원을 거쳐 가는 길을 택했다. 큰 자작나무 사이 저편으로 웨딩홀이 보였다. 걸음을 재촉했다.

  아름답다는 말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것은 고즈넉한 호숫가에 옛 한옥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채 서 있었다. 세 동의 건물은 ㄷ자형으로 배치되어 마치 물 위에 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중간에 있는 마당 스테이지는 특히나 더 그랬다.

  약속 시각에 맞춰 왼쪽에 있는 건물 입구에서 웨딩 매니저가 나오고 있었다. 난 그제야 그가 한참 전에 화장실에 간 게 생각났다. 들뜬 마음으로 구경하느라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그의 컨택터가 응답하지 않았다. 무슨 일일까. 곧장 화장실 앞으로 가서 그의 이름을 불렀다. 한 남자가 심하게 구토하는 소리가 들렸다. 순간 그곳이 남자 화장실임을 잊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였다.

  그는 여기까지 온 김에 다 둘러봐야 한다고 고집을 부렸다. 집에 가서 쉬자는 내 말은 듣지 않았다. 가끔씩 부리는 엄청난 고집이었다. 웨딩 매니저가 상비약을 건넸지만 그는 ILC에 있는 것을 먹겠다며 굳이 거기까지 갔다 왔다. 돌아온 그의 얼굴빛은 다시 생기가 도는 듯했다.

  매니저의 안내에 따라 왼쪽 건물을 통해 가운데 건물로 들어왔다. 모든 건물은 마당과 함께 서로 연결되어 있었다.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는 괜찮다는 의미인 듯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매니저의 설명을 들으며 식장을 보다가 그를 보다가, 정신이 없었다.

  우리는 연회장이 있는 오른쪽 건물을 지나 중간 마당 스테이지에 이르렀다. 아까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것 같았는데 오늘 식이 있었던 것이었다. 곧장 오늘의 신부가 눈에 들어왔다. 아름다웠다. 그녀 주위만 반짝이는 이유는 아마도 그녀가 햇빛을 독식했기 때문일 거야. 나도 그럴 거야, 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빠. 만약에 웨딩홀을 여기로 정한다면 말이야. 이 야외 스테이지에서 하고 싶어.”

  “응, 여기 괜찮지? 날씨가 좋아야 할 텐데⋯⋯.”

  벌써부터 쓸데없는 걱정을 하는 그를 달래면서 매니저와 상담실로 향했다. 나는 약간 흥분한 상태로 질문을 퍼부었다. 한복도 계약 전에는 보통 한두 벌 입어보는 것을 일곱 벌인가 여덟 벌인가까지 입어 보았다. 이내 매니저와 그의 표정에서 나만 빼고 모두 지쳤다는 걸 알았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그는 잠이 들었다. 컨디션이 좋지 않아 보이는 사람을 오래도 끌고 다닌 것 같아 뒤늦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날의 설렘이 벌써부터 나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

 

  그는 어제 하루 종일 쉬었는데도 피곤한 기색이었다. 나 대신 ILC를 타고 출근하라고 몇 번이나 말했지만 그놈의 고집이 문제였다. 연천시에 있는 그의 직장까지는 언제나처럼 대중교통을 이용하면 되지만 랜드라인에서 에어라인으로 갈아타야 하니 아무래도 ILC에 자동 주행 모드를 걸어 놓고 집 주차장에서부터 출발하는 게 훨씬 편할 터였다.

  동작대교를 건너면서 한강을 바라보다가 의사 진료는 내가 아니라 일단 오빠부터 받아야 하는 거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평소에는 집이며 ILC며 사무실에 각종 상비약과 영양제를 쌓아두고 감기 한 번 안 걸리는 그였다. 그러나 지난 주말에 그는 감기에 걸린 것보다 분명히 더 아팠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메디컬 센터 예약 현황을 확인했다. 서울에 있는 센터 50군데 모두 다음 달 말까지는 어림도 없었다. 급한 대로 온라인을 뒤져서 기력 회복에 좋다는 음식을 주문했다. 자연산 장어즙은 어느 푸드 마켓에 딱 한 세트가 남아 있었는데 컨택터보다 가격이 비싸 살 수 없었다.

  비즈니스 콤플렉스가 눈에 들어왔다. 오늘은 한 주의 시작이라 바쁜 날로 스트레스 때문인지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결혼식 준비로 이것저것 찾아볼 시간은 거의 없을 것이었다.

  콤플렉스 중앙 지하에 있는 주차장으로 ILC가 진입하고 있을 때 그들은 변함없이 그곳 상부 메인 광장에서 시위 중이었다. ‘우리는 치료받을 권리가 있다’라는 시위 표어를 내세우면서 오래전 존재했던 주치 로봇(AR)을 재도입하자고 외치고 있었다. 나는 그들 아니, 그것들로부터 시작된 전쟁에 관해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현재를 사는 아픈 우리에게 그것들은 필요한 존재일지도 몰랐다.

  오늘도 팀장은 팀원들에게 업무 시간이 되기도 전부터 도대체 고객 대응을 어떻게 하길래 만족도 조사가 이따위로 나오냐며 소리를 질러댔다. 나는 아마도 지금이 월요일 아침인 탓이겠지, 하면서 메시지로 그에게 아침 인사를 건넸다.

  ‘몸은 좀 어때? 이번 주도 많이 바빠?’

  한참 후에 답장이 왔다.

  ‘미안. 아침부터 회의 또 회의. 오늘도 힘내고 이따 만나자.’

  혼자 바쁜 척을 했다. 나도 월요일은 주말 동안 밀린 문의에 답해야 해서 정신없었다. 사실 우리 회사가 만드는 의수나 의족은 뉴-티타늄과 그래핀 3로 만들기 때문에 값이 비싸 고객이 많은 편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내가 바쁜 이유는 문의가 유독 나한테 몰리기 때문이었다. 우리 제품은 전문성이 깊어 고객대응팀 직원들은 정기적으로 엔지니어와 디자이너들로부터 별도의 추가 교육까지 받았다. 하지만 나를 제외하고는 다들 늘 실수를 빠뜨리지 않았다.

  나는 그저 대응 매뉴얼과 추가 교육 자료를 활용하면서 머릿속에서 생각나는 것을 몇 가지 정도 더 말해주는 것뿐인데 사람들은 매번 거기까지는 생각을 못 했다면서 고맙다고 말하고는 했다. 그럴 때마다 워런티 서비스나 R&D팀으로의 내 부서 이동 건에 대해 말이 나왔는데 관련 학위나 경력이 없다는 이유로 다시 수그러들기를 반복했다. 보란 듯이 학위를 따버릴까 생각도 했다. 하지만 만약에 우리 아이가 생긴다면, 나중으로 미뤄야 하는 것이었다.

  나는 일에 치이고 있으면서도 웃음이 났다. 정식으로 부부가 되고 아이도 갖겠지, 웃음이 멈추지 않았다. 커리어보다 먼저 그의 아내, 아이의 엄마가 되는 것은 내가 항상 꿈꿔 오던 인생이었다.

  정신없이 시간이 지나갔다. 점심도 샐러드를 주문해서 자리에서 대충 먹었다. 바쁜 이유도 있었지만 결국 그날이 다가오기 때문이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살을 빼야 했다. 오늘이라도 스포츠 클럽에 가입해야 하나, 오빠도 같이하면 좋을 텐데,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요사이 늦을 때마다 항상 보내는 H-플라워와 함께였다. 도대체 실물로는 언제 줄 생각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이러다 부케마저 이걸로 들어야 하는 건 아니겠지.

  그의 일복이 아내가 될 나에게도 전해졌는지 퇴근 시각 직전에 문의가 들어왔다. 평범한 건은 아니었다. 문의 대부분이 제품 안내와 사용 중인 제품의 문제 해결을 위한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라면 이번 건은 이런 것이었다. 현재 이식한 모델은 타사보다 월등해 굉장히 만족하면서 쓰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 업그레이드해서 사용하고 싶은데 차세대 모델은 어떻게 개발되고 있는지 궁금하다고 했다.

  개발 동향에 관한 정보나 개인적인 의견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관련 부서의 의견을 참고하면 좋겠다 싶었다. 고객에게 곧 연락하겠다고 한 뒤 R&D팀으로 연결을 시도했다. 하지만 반응이 없었다. 그때 퇴근하던 팀 동료가 자기가 알기로는 R&D팀은 오늘 밤까지 내부 기술 콘퍼런스를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애매하게 일을 내일로 미뤄야 한다니. 짜증이 났다. 그런데 다시 연결한 그 고객은 집요했다. 내가 생각하는 올바른 개발 방향은 무엇이냐고 묻는 것이었다. 나는 먼저 기자냐고 묻고 아니라는 답변을 얻었다. 당연한 말을 그럴듯하게 포장해서 늘어놓고 일을 끝낸 다음 홀가분하게 퇴근하자, 라는 마음이 순간적으로 들었다. 음성 연결이라 부담도 그나마 적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뻔한 대답이라 죄송하지만 더욱더 실제의 팔과 다리 같이 제작해야 할 것입니다. 뉴-티타늄이나 그래핀 3와 같은 소재는 첨단 소재이긴 하나 언제까지나 고가의 의료 부속품일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조심스럽게 AR에서 주치 안드로이드(AA)까지 이르는 과정에 관한 연구를 다시 시작해야 하는지도 모릅니다. 인간의 더 나은 삶을 위해 얻을 것은 얻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나아가 그것을 바탕으로 확실한 제어와 통제가 확보된 AR을 활용한다면 현재 일련의 사태까지 해결할 수 있을 것입니다. 뭐, AA까지는 현재 상황상 힘들겠지만요. 어쨌든 고객님도 메디컬 센터 문제에 대해 알고 계시지 않나요?’

  나는 빨리 끝내고 집으로 가려고 했지만 오히려 역질문까지 하면서 연결 시간을 배로 늘리고 말았다. 왜 그렇게까지 흥분했는지 다시 생각해봐도 모를 일이었다.

  그가 무슨 일이 있는지 나는 집에 들어와서 저녁을 먹고, 정리하고, 씻고, 영화까지 한 편 봤는데도 들어오지 않았다. 심지어 연락도 없었다. 그는 최근 새로운 프로젝트를 또 맡았다고 했다. 그리고 지난주에 그의 연구팀은 합숙까지 했다. 난 그때 도대체 무슨 프로젝트길래 합숙까지 하느냐고 물었는데 그가 대체 에너지의 기원까지 설명하는 탓에 대충 알겠다고 했다.

  H-메신저 알토가 그가 엘리베이터를 탔다고 알려주었다. 나는 늦게까지 고생 많았고 이번 프로젝트가 유난히 버거워 보이는 데 지치지 말고 힘내라고 말해주겠다고 마음먹었다.

  “뭐야 대체. 지금이 몇 시야? 늦으면 연락이라도 해야지. 너무 하잖아.”

  그러나 화를 내고 말았다. 마음속 격려의 말은 하나도 내뱉지 못했다. 게다가 그의 낯빛은 어둡기까지 했다. 그는 지친 표정으로 미안하다고 몇 번이나 말했다. 후회스러운 순간이 지나가면서 침묵을 만들었다. 조금 뒤 그가 적막을 깼다.

  “그리고 있잖아. 우리 웨딩홀 말인데⋯⋯. ‘일생을’로 일단 계약했어. 날짜는 하객이 많지 않으니까 이번 주 토요일로. 다른 곳은 다 거기가 거기인 것 같고 여기는 특별히 전통 방식으로⋯⋯.”

  어이가 없었다. 도무지 무슨 상황인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오빠, 지금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나보고 그걸 어떻게 이해하라는 거야? 이제 한 군데 알아본 데다가 나랑 상의도 안 했잖아. 그리고 뭐? 토요일?”

  “미안⋯⋯. 나는 네가 엄청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아서⋯⋯.”

  “나는 오빠가 유달리 서두르는 게 적응이 안 되긴 해도 기분 되게 좋아. 근데 있지, 이건 이상하잖아. 요즘 프로젝트 말고 또 무슨 일 있어? 컨디션도 회사 일 때문이라 쳐도 계속 바닥이고.”

  일생의 최대 이벤트가 다가오는데 그와 이런 대화를 주고받았다. 다들 결혼 준비할 때 그렇게 싸운다더니. 그래도 내 느낌으로는 우리 상황에 뭔가 다름이 있는 것만 같았다. 그는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말없이 자기 서재로 들어갔다.

 

  사무실은 오늘도 시끄러웠다. 팀장이 여전히 소리를 지르고 있어서였다. 그런데 내 이름이 들렸다.

  “벌써 소문을 들었나. 이제 간다 이거야? 지금이 몇 신데 아직도 자리에 없⋯⋯. 어, 유정 님 왔어요? 나 좀 봐요.”

  뭐지. 여태껏 겉으로만 잘 대해준 건가. 나는 배신감을 느끼면서 팀장실로 따라 들어갔다. 그녀는 평소와는 다른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리고는 내가 당장 오늘부터 R&D팀에서 일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나는 당황해서 얼굴이 시뻘게진 채로 전혀 들은 바가 없다고 대답했다.

  “그래서, 싫어요? 유정 님도 원했던 거로 아는데. 갑작스러운 건 나도 마찬가지예요. 어제 마지막에 문의한 사람. 데이비드인가? 그 사람 누군지 알아요?”

  “저야 모르죠. 특별인은 아니었어요. 다만 내용은 좀 독특하긴 했습니다. 어제 문의 건과 제 부서 이동이 관련이 있나요?”

  “유정 씨. 나도 자세한 건 몰라요. 내가 말해줄 수 있는 건, 어젯밤에 HR팀장이 나한테 갑자기 전화해서 마지막 문의 건 처리자가 유정 씨가 맞는지 확인했다는 것과 오늘 아침에는 겨우 메시지 하나로 부서 이동을 통보했다는 게 다예요.”

  난데없는 부서 이동에 더해 팀장의 본모습까지 보게 되어 무척이나 혼란스러웠다. 나는 팀장이 눈치를 주는 통에 팀원들과 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일단 짐을 싸기 시작했다. 솔직히, 이 상황은 내가 원하던 것이었다. R&D팀에서 일한다는 것은 두 배의 연봉에다 훨씬 더 생산적이고 보람 있는 일을 한다는 의미이고 나아가 내가 특별인이 될 수 있다는 작은 희망이 생긴다는 뜻이었다. 부부 중 한 명이라도 특별인의 지위를 얻으면 그 후에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살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에게 연락하기를 머뭇거렸다. 오늘 새벽에 일어났을 때 그는 벌써 나가고 없었다. 아침 인사도 없었다. 문득 외로워졌다. 만약 내 옆에 그가 없다면 이런 기쁨은 누구와 나눠야 하나, 이게 다 같이 행복해지자는 것인데 부질없지 않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모른 척 그에게 오늘도 늦느냐고 메시지를 보냈다. 말도 없이 웨딩홀을 계약한 행동은 아직도 이해가 안 가고 먼저 연락하는 것이 조금은 자존심이 상하지만 냉기는 없애고 싶었다.

  벌써 세 시간째였다. 나는 R&D팀이 있는 옆 건물 로비에서 보안 검색대를 통과하는 다른 직원들을 바라보면서 하염없이 기다리는 중이었다. HR팀 직원 말로는 보안상의 이유로 통합기간전산망에 내 변경 정보를 업데이트하기 전에 특별 신원 조회를 실시해야 하는데 자꾸 오류가 난다고 했다. 원래 이렇게까지 오래 걸리는 일이 아니라고도 덧붙였다. 그는 갑작스러운 인사이동 건 처리에 크게 스트레스를 받는 듯했다. 나도 정신없는데 그는 오죽할까.

  게다가 그, 남편 될 사람인 박진혁 씨는 아예 반응이 없었다. 이 정도로 연락을 안 하고 있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여러 가지로 정신이 없고, 답답하며, 기쁘지만 기쁘지 않은 이상한 감정이 나를 휘감고 있었다. 그때 로비로 나를 찾아온 HR팀과 R&D팀 직원이 각각 말했다.

  “기다리시게 해서 대단히 죄송합니다. 사실 지금 어떤 문제가 발생한 건지 파악을 못 하고 있어서요⋯⋯.”

  “그래서 오늘은 일찍 퇴근하시고 내일 뵙는 거로 하죠. 마침 내일 아침에 팀 전체 미팅이 있으니까 그때 인사하면 될 것 같아요.”

  이제 그와 푸는 일만 남았다. 나는 그의 회사로 찾아갈 셈이었다. ILC를 집으로 보내고 에어라인을 탔다. 같이 저녁 먹으면서 차분히 그의 이야기를 들어 봐야지, 라고 혼잣말을 하면서 다시 메시지를 남겼다.

  ‘나 일찍 끝나서 연천 가는 길이야. 회사 정문 앞 쇼핑 센터 23층에 그 카페 알지? 거기 있을게. 오늘도 늦을 거 같으면 잠깐이라도 와서 나 보고 가.’

  잠시 후 곧바로 답장이 왔다.

  ‘알았어. 오늘은 일찍 나갈 거야.’

  뭔가 꼬인 게 풀리려는 모양이었다. 그를 기다리는 동안 컨택터로 여러 한복 스타일을 찾아 홀로그램으로 띄워 살펴보았다. 그러나 이것은 그의 결정을 무조건 따른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나는 그날을 인생에서 절대 잊지 못할 순간으로 만들고 싶었다. 그렇게 해야만 평생 후회가 없을 터였다. 카페 입구에서 나를 찾는 그가 보였다. 여전히 안색은 어두워 보였다.

  나는 분위기도 밝게 할 겸 부서 이동에 대해 먼저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는 자기 일인 것처럼 좋아하면서 웃었다. 그러다가 순간 굳은 표정으로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특별 신원 조회? 결과는, 결과는 어떻게 나왔어?”

  “깜짝이야. 살살 얘기해. 다 쳐다보잖아.”

  “어떻게 됐냐니까?”

  “몰라 나도. 무슨 자꾸 오류가 난다고 그랬어. 그래서 오늘 일찍 퇴근한 거야. 근데 왜 이렇게 놀라?”

  그의 얼굴이 조금 전 피로에 찌든 모습으로 돌아갔다. 약간은 일그러진 표정으로 배를 어루만지기도 했다. 게다가 불안해 보이기까지 했다. 나는 웨딩홀 예약에 관해 말하려던 것을 그만두고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진짜 이상하네. 이런 적이 없었는데⋯⋯. 오빠, 사설 의원이라도 아는 데 없어? 불법이든 아니든 어디라도 가봐야 할 것 같은데. 내 얘기 듣고 있어?”

  그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멍하게 있었다. 내가 손으로 테이블을 여러 번 쳤다.

  “어? 아니 뭐, 굳이 불법으로 하는 데를 찾아갈 필요가 있나. 합법 의원이야 예약 안 되는 건 마찬가지고. 걱정 마. 약 먹으면 돼.”

  나는 그와 아래층 식당으로 자리를 옮겨 저녁을 먹으면서 못 했던 이야기를 하려고 시도했지만 잘 먹지도 못하는 그를 보니 일단 집으로 가야겠다 싶었다.

  에어라인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반대편 좌석에 앉은 그가 중간에 서 있는 사람들 사이로 나에게 손짓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자신의 컨택터를 가리키며 벗겨내는 시늉을 했다. 벗어, 라고 입 모양으로도 외치는 것 같았다.

  설마 컨택터를 벗으라는 건가. 컨택터는 온몸의 신경계와 연결되기에 다시 착용하는 게 여간 번거로운 일이 아니었다. 나는 그가 이상한 수신호를 써가면서까지 벗으라고 하는 이유가 궁금하기는 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 메디컬 센터도 다시 확인해야 하고 할 게 많았다. 그래서 그냥 왜 그러냐고 메시지로 묻고 센터 홈페이지에 접속했다.

  그 순간 에어크래프트 안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몇몇은 소리를 질렀다. 저편에서 그가 구토한 채 쓰러져 있었다.

 

  앰뷸런스크래프트가 곧바로 응급 환자 수용이 가능한 메디컬 센터를 찾아 헤맨 지도 한 시간이 다 되어 갔다. 그는 아직도 의식이 없었고 나는 내내 센터든 어디든 상관없으니 데려만 달라고 소리를 질러댔기에 목소리가 거의 나오지 않았다.

  아까부터 계속 나를 곁눈질하는 한 구급대원이 있었다. 그녀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500크론이면 사설 의원에 모셔다드릴 수 있습니다. 불법이고, 당연히 신고 안 하는 조건입니다.”

  거의 ILC 한 대의 반값에 맞먹는 돈이지만 고민할 이유는 없었다. 곧 H-사인포스트 하나 없는 구석진 동네로 진입했다. 저 멀리 골목길 입구에서 누군가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구급대원들과는 잘 아는 사이인 것 같았다. 우리는 어느 허름한 건물로 진입해 지하로 한참을 내려갔다. 나는 잿빛 벽으로 둘러싸인 밀실에서 혼자 기다려야만 했다. 잠시 후 그가 나타났다.

  “호전기가 끝나가는 것으로 보이네요. 이제부터 꽤 고통스러울 겁니다.”

  머리가 멍하고 어지러움이 느껴졌다. 오빠는 왜 고통스러울 것이며 호전기는 또 무슨 말일까. 나는 그의 옷가지를 붙잡고 나오지도 않는 목소리를 끌어올려 물었다. 그는 나를 진정시키고 입을 열었다.

  “급성방사선증후군입니다. 쉽게 말해 방사능에 피폭된 거예요. 우리 쪽 네트워크로 확인한 바로는 지난주 월요일에 노출돼 임시 치료를 받은 거로 나와 있어요. 보통 노출 후 메스꺼움이나 구토 같은 증세가 하루에서 이틀 정도 지속됩니다. 그 후 1주일에서 2주일가량 호전기가 따르죠. 오늘이 화요일 그러니까, 1주일 정도의 호전기가 지났는데 환자 상태로 봐선 호전기가 끝난 것 같습니다. 의식은 곧 돌아오겠지만 이제부터 집중 치료를 받아야 합니다.”

  “⋯⋯선생님이 계속 봐주실 수 있나요? 임시 치료받은 곳으로 갈까요? 저는 뭘 하면 되죠? 선생님?”

  “저보다는 처음 간 곳이 더 낫지만 그쪽도 낡은 장비밖에 없을 거고 무엇보다 치료비가 감당이 안 될 겁니다. 이건 부르는 게 값이라. 센터로 가야 합니다.”

  “아니 무슨 말씀하시는 거예요. 센터로 갈 수 없어서 지금 여기 있는 거잖아요. 선생님이 도와주세요, 제발요⋯⋯.”

  그는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곧 그의 컨택터가 울렸다.

  “남편분이 깨어나셨네요. 금방 돌아오겠습니다.”

  남편⋯⋯. 이 바보 같고 멍청한 사람. 그렇게 위험한 일이면 어떤 핑계를 대서라도 못 한다고 말했어야지. 아프면, 아프다고 나한테 말했어야지. 나보고 이제 어떡하라고⋯⋯.

  그렇다면.

  지난주 월요일 이틀간의 합숙은 사고를 당하고 의원을 전전한 것이었나.

  지난주 수요일 저녁 갑작스러웠던 청혼은 호전기라는 게 시작될 때 맞춰서 한 것이었나.

  어제 급했던 웨딩홀 계약은 고통이 찾아오기 전에 결혼식을 치르려고 한 것이었나. 결국 아픔을 맞닥뜨려야 한다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호전기가 이 정도였다면 그전에는 얼마나 아팠을까. 이제부터는 얼마나 괴로울까.

  이내 그가 다시 나타나 나를 또 다른 밀실로 안내하고 자리를 비켜 주었다. 그곳에는 힘없이 누워 기침하는 그, 평생을 함께할 내 사람이 있었다. 그는 나를 보자마자 온몸을 꿈틀거리며 말했다.

  “컨택터⋯⋯.”

  그를 살펴볼 틈도 없이 나는 일단 컨택터를 벗었다. 그가 자신의 것도 벗겨달라고 하여 그렇게 해주었다. 당장에 이유 따위는 궁금하지 않았다. 그의 팔이 빨갛게 물들어 있었고 기침 소리는 더 깊어져만 갔다.

  “오빠. 이게 다 무슨 일이야⋯⋯.”

  그가 내 쉰 목소리를 듣고 어디 아프냐고 물었다. 기가 막혔다. 목이 메었다.

  “유정아. 나중에, 나중에 전부 말해줄게. 회사에서 연락 없었어?”

  “무슨 연락. 신원 조회 결과? 제정신이야? 지금 그게 뭐가 중요해?”

  그가 머뭇거렸다. 그리고 말했다.

  “그들이, 올지 몰라.”

  나는 그게 무슨 소리냐고 몇 번이나 되물었다. 그는 나에게 해줄 말이 많아 보였다. 그러나 쉽게 입을 떼지 못했다. 생각을 정리하는 것 같았다.

  밖에서부터 여러 발자국 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내가 의사라고 생각하고 있는 그 사람 말고도 다른 사람들이 있는 건가. 문을 부술 듯 열고 들어온 사람은 그가 아니었다. 가슴팍에 ‘SECRET SERVICE’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는 처음 보는 사람들이었다.

  그중 한 명이 곧바로 총 같이 생긴 장비를 내 얼굴 앞에 들이밀었다. 순간 눈앞이 번쩍거렸다.

  “확인 완료. 맞습니다.”

  “연행해.”

  이번에는 눈앞이 어두워졌다.

 

  나는 벽과 천장과 바닥이 모두 불투명한 유리로 되어 있는 방 안 나무 의자에 앉혀져 있었다. 아까 그들은 누구인지, 여기는 어디인지, 왜 내가 이곳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가 고통을 어디서 어떻게 견디고 있나, 생각했다. 전방의 벽에 스크린이 띄워지고 방 안 전체가 차가운 음성으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불렸던 이름은 무엇입니까.’

  “여긴 어디예요? 누구세요? 저한테 왜 그러시는 거예요? 오빠 그러니까, 박진혁 씨는 어딨어요?”

  ‘정확한 답변이 아닙니다. 불렸던 이름은 무엇입니까.’

  “채유정⋯⋯.”

  ‘사용했던 국가보장번호는 무엇입니까.’

  불렸던, 사용했던 이라니. 저것은 왜 과거형을 쓰고 있을까. 어쨌든 나는 잘못한 것이 없었다. 그저 그와 함께 소소한 일상을 사는 사람이었다. 사방의 벽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미친 척 의자를 들어 스크린을 향해 던졌다. 이내 그 벽면에서 스크린이 사라지고 유리벽이 투명하게 변했다. 한 여자가 있었다.

  “저기요, 들리세요? 무슨 오해가 있나 본데⋯⋯. 아. 그 의원 때문에 이러시는 거예요? 그건 어쩔 수가 없었어요⋯⋯. 제 남편 될 사람이 많이 아프거든요. 빨리 치료를 받아야 한대요. 저기요, 제 말 듣고 계세요?”

  표정 변화가 없는 그녀는 아마도 컨택터로 무엇을 확인하고 있는 듯했다. 곧 여자가 입을 열었다.

  “박진혁 씨는, 수감자 신분으로 특별 치료 조치를 받았어요. 집중치료실에 있죠. 하지만 더 중요한 문제가 있는 것 같군요. 당신 아니, ‘NHGXXI-537EONGZ34오’와 관련한.”

  “수감자요? 그깟 의원 한 번 간 걸 갖고⋯⋯. 어디 집중치료실이죠? 상태는 어때요?”

  그녀가 대답하지 않았다.

  “근데 더 중요한 문제가 뭐죠? 저도 같이 의원 간 거밖에 없어요. NHG인지 뭔지 그건 대체 무슨 말이에요?”

  “⋯⋯그쪽 네오-휴먼 21세대 모델들은 1세대 모델 즉, AR이 우리 인간에게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알고 있나요? 기억나는 게 전혀 없나요?”

  전쟁? 그쪽? 미친 사람이 틀림없다. 그가 치료실에 있다는 사실도 믿을 수 없다. 당장 여기서 나가야 한다. 젠장. 어떻게 나가지, 여러 생각을 하는데 여자가 말을 이었다.

  “지금 가지고 있는 기억은 그쪽 게 아니에요. 누군가의 기억들을 어설프게 조합한 것뿐이죠. 우리는 박진혁 씨가 휴먼 테리토리로 탈출한 그쪽을 패치한 사실을 확인했어요. 아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저쪽 네오-휴먼 테리토리에선 30세대 이상 신모델들이 구모델들을 잡아다 패치해 노예로 부리고 있다죠. 그래요. 이해해요. 혼란스러운 게 당연하죠.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우리와 네오-휴먼이 맺은 휴전 협정에 따라 그쪽을 네오-휴먼 테리토리로 24시간 내에 인도해야 해요. 그전에 탈출 전 상태로 다시 바이오닉 패치를 실시할 거고요. 기억만, ‘채유정’이라는 기억만 지우는 거예요.”

  앞쪽 벽 한편이 녹는 듯이 뚫리면서 통로가 생겼다. 그녀가 한 사람을 더 데리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이들을 밀쳐내더라도 통로는 처음 같이 사라지고 있기에 나갈 수 없을 것 같았다. 모든 면이 투명해졌다. 주위엔 아무도, 아무것도 없었다. 여자가 데려온 사람이 이번에는 좀 더 큰 총 같이 생긴 장비를 내 앞에 들이밀었다.

  번쩍거렸다.

  그러나 아까와는 달랐다. 내가 아닌 그 둘이 쓰러져 있고 방 내부는 모조리 금이 갔으며 곳곳이 부서져 있었다. 일단 여기서 나가야 했다. 나는 바닥에 널브러진 장비를 집어 들었다. 곧 컨택터처럼 나와 연결되었다. 이것이 나에게 물었다.

  ‘장애물을 제거하시겠습니까?’

  방에서 나왔을 때 내가 새로이 본 것은 유리방을 품고 있는 또 다른 새하얀 방과 내 왼손 네 번째 손가락에서 빛나고 있는 반지였다. 금색 빛은 반지의 원을 따라 계속 돌고 있었다. 이 반지 때문인가, 라고 생각했다. 그가 보고 싶었다.

  방 한 귀퉁이의 바닥이 수직으로 들어 올려지면서 둥근 유리관이 따라 올라왔다. 다섯 명의 시크릿 서비스 사람들이 거기서 나와 그들의 장비를 들고 나를 조준했다. 그중 한 명이 반짝이는 내 손을 보고 나머지 사람들에게 대기하라고 명령했다. 내가 든 장비가 몸집을 부풀려 나에게 또 물었다.

  ‘위협이 감지되었습니다. 대응하시겠습니까?’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지금의 나는 약하지 않다고 느꼈다. 그가 나를 지켜주고 있었다. 나도 그를 보호해야 할 것이었다. 아내로서. 아픔과 두려움으로부터. 그리고 마음 저편에서 여자의 말이 맴돌았다.

  “그 사람과 제가 뭘 그렇게 잘못했길래 이렇게까지 하세요? 박진혁 씨에게 데려다주세요. 이건 부탁이 아니에요. 당신들 오빠가 어딨는지 알잖아요.”

  명령을 내리던 사람이 다른 사람들을 데리고 물러선 후 자신의 컨택터를 만졌다. 곧 방 전체가 흔들리면서 에어크래프트가 이륙할 때 느낌이 났다.

 

  그들을 따라 밖으로 나왔다. 서울 전경이 한눈에 보이는 높은 건물 옥상이었다. 내가 있던 곳은 방이 아니라 에어크래프트 그 자체였다.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나는 그들에게 들은 대로 수감자 집중치료실이 있는 52층으로 내려와 ‘A CLASS’라고 적힌 곳 앞에 섰다. 문을 열자 그가 있었다.

  그는 기침을 멈추지 못했다. 머리는 상당량이 빠져 있고 눈썹도 마찬가지였다. 마스크처럼 생긴 것을 벗고 내 이름을 부르는데 이가 군데군데 빠진 것 같았다. 이제는 팔 뿐만 아니라 몸 전체가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더는 지켜볼 수 없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다. 우리에게 왜 이런 일이 생긴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애꿎은 흰 바닥을 내려다보면서 나는 말했다.

  “오빠, 나 왔어⋯⋯. 괜찮아? 나? 난 괜찮아. 처음 보는 사람들이 날 가두고 이상한 소리를 하긴 했는데⋯⋯. 하나도 안 다쳤어. 근데 이 반지 말이야.”

  그가 기침을 가까스로 참으면서 대답하기 시작했다.

  “미안해. 전부 다, 말해, 주려고 했, 는데⋯⋯.”

  “무슨 일이 생길지 알고 있었어? 의원에 갔다가 들키면, 그들이 이렇게까지 하는 걸 알고 있었어?”

  “⋯⋯난, 혼인, 신고로 널, 더, 감추, 려고⋯⋯. 네오, 테리토⋯⋯. 거기로, 가면 안 돼, 절대. 다른 것들이 널⋯⋯.”

  그 여자의 정신 나간 소리가 다시 내 귓가에 맴돌았다. 네오-휴먼. 그가 피를 토하기 시작했다. 하얀 가운을 입은 남자가 뛰어 들어왔다. 순간 열린 문 밖으로 상당수의 시크릿 서비스 무리가 보였다. 그들은 인원을 늘려 계속 우리를 아니, 어쩌면 나를 감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왼손의 반지는 여전히 빛을 머금고 있었다.

  그가 경기를 일으켰다. 하얀 가운의 남자가 컨택터로 여러 명의 이름을 불렀다. 그들이 응답하지 않는지 남자가 밖으로 나갔다. 그가 뭔가 말하려는 듯하여 가까이 다가갔다.

  “유, 정⋯⋯.”

  잠시 뒤 그가 누운 베드 양쪽 가장자리에서 뭔가 튀어나와 그를 감쌌다. 나는 이것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는 내 이름을 다시 한 번 부르고 그렇게 떠났다.

  밖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문이 들썩거렸다. 그럴 때마다 내 오른손의 장비가 꿈틀거렸다.

  내 존재에 관해 생각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인가. 그러나 이제 이것은 논할 가치가 없었다. 내가 어떤 존재이든 간에 그 없이는 의미가 없을 터였다. 나는 조금 전과는 달리 어떻게 해야 할지 바로 알 수 있었다.

  나는 반지를 빼고 내 오른손에 장착된 이것을 관자놀이에 갖다 댄 뒤 말했다.

  “나를 제거해.”

  ‘‘NHGXXI-537EONGZ34오’로부터의 위협은 감지되지 않았습니다. 실행하면 호스트 생체 반응 지수가 ‘0’으로 떨어집니다. 실행하시겠습니까?’

  문이 부서지고 전신 무장한 그들이 뛰어오기 시작했다.

  “가서 잡아! 죽으면 안 돼!”

  나는 그와 함께 행복했다. 그를 사랑했고 그도 나를 사랑했을 것이다.

  우리는 곧 만나서 못 했던 이야기를 나눌 것이다.

  “⋯⋯실행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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