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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소나무 숲에서

2020.09.25 18:1909.25

굽이진 것이 조용히 다가오는 뱀처럼 보였다. 아니면 살랑살랑 흔들리는 여우의 꼬리 같기도 했다. 적어도 그의 시선엔 그렇게 보였다. 도로가 자신을 유혹한다는 생각에 빠졌다. 하늘을 적당히 가리고 있는 나무들은 마치 도로 위의 쇳덩이들을 덮치기 위해 뻗친 팔 같았다. 공포심과 경외심을 동시에 선사해 주는 자연은 그에게 이상한 자신감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그런 도로 위에 있으면 자신이 누구든지 유혹할 수 있다는 착각에 빠진 느낌이 들기도 했다. 아니 사실 그렇게 믿고 있었다.

도심 속 도로들은 그러지 못했다. 구역질 나게 딱딱한 것이 생명력에 대한 경외를 주지 못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끔찍하게 평범했다. 어쩔 때는 지나칠 정도로 기계적인 느낌을 주기도 하였다. 도심은 그에게 있어서 죽은 공간이었다. 그 속을 가로지르는 도로들은 죽음의 산물이었다. 산속을 힘겹게 뻗쳐 나가는 그것만큼의 미칠 듯한 매력을 전혀 주지 못했다. 살아 숨 쉬는 질긴 생명력을 경외할 수 있는 공간. 그가 그곳의 도로를 광적으로 좋아하는 이유였다.

햇빛이 쏟아지는 대낮의 거리는 정적으로 차분히 가라앉아 있었다. 정신없는 아침과 피곤에 찌든 저녁 사이에 점심이 있다. 한적한 오후는 폭풍의 눈과 같았다. 한가운데에서 기이한 정적이 맴돌고 있다. 그는 굽이진 도로를 거쳐 쭉 뻗어 있는 도시의 도로에 들어왔다.

원래 낮이 밤보다 무서운 거지. 그는 길을 달리며 이렇게 생각했다. 몰랐던 것이 갑자기 들이닥치는 것보다 알고 있음에도 당하는 것. 그런 것이 무지하고 무서운 것이라고 말이다. 그러니까 보이지 않는, 알 지 못하는 그런 것은 부차적인 핑계거리일 뿐 이였다. 사실 몰랐다는 변명은 그에게 역겨운 것이었다. 스스로가 알려는 노력조차 없었으면서 몰랐다고 통곡해봐야 달라질 바 없지 않은가.

비슷한 맥락에서 비가 쏟아지는 날보다 햇빛이 쏟아지는 날이 더 무서운 것이라 생각했다. 햇빛이 쏟아지는 것은 소름 끼치도록 적막하다. 인공적인 생명의 위대함 보다 자연적인 생명의 거대함이 더 돋보인다. 비 오는 날의 시끄럽게 숨 쉬는 생명력과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그 자신이 화창한 날 대낮에 도로를 달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좋아하기 때문에 낮과 화창한 날이 더 무서울 것이라 생각하였다. 도로 위의 예술가, 혹은 생명의 인도자. 그 스스로를 칭하고 싶은 말은 여럿 있었지만 핵심은 그 작은 세계에서(자연이 아닌 인공적 생명의 세계 속에서) 자신을 가장 드높은 존재로서 또렷이 정립하는 것이었다. 스스로를 낮과 화창한 날씨에 걸맞은 공포적 존재로 정의하였다.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었다.

곧 그가 들어선 동네는 그다지 큰 규모의 것이 아니었다. 도심이라 하기도 민망한 곳이었다. 시골과 도시 그 중간에 있는 듯한 곳이었다. 텅 비어 있다는 인상을 심어주는 그런 터미널이었다. 근처엔 이름 없는 카페 서너 개와 이상하게 커다란 브랜드의 카페가 보였다.

그는 자신의 생각이 타인의 시선에 어떻게 보일지 똑똑히 알고 있었다. 그게 무슨 상관인가. 자신이 존재하는 세계는 자신이 정의하는 거지. 나 자신의 행위 또한 마찬가지야. 그러니 남들이 어떻게 바라보든 상관없어. 윤리적으로 어떤 일로 정의되든 그건 그 자신의 예술을 완성하는 데 있어서 핵심이 되지 못했다. 그에게 있어서 자신의 예술 행위는 하나의 활력이자 필연적인 숙명으로 자리 잡았다.

그는 차 안을 자신만의 작은 세계로 만드는 데 공들여 왔다. 하얀색과 검은색의 조합으로 인테리어를 꾸며 놓았다. 검은색 무광 가죽을 바탕으로 하얀 불빛을 곳곳에 박아 튜닝하였다. 물론 하얀색은 그에게 있어서 불리한 색상이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불편함보다 더 중요한 무언가 있었다. 그는 담배를 피우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차 안을 강한 커피 향으로 뒤덮었다. 처음 향을 맡은 사람은 움찔하나 이내 익숙해진 사람 중 몇몇은 오히려 방향제의 출처를 물어오곤 했다. 하루 종일 차 안에 있었기에 냄새엔 무디어졌다. 그럼에도 나갔다 들어오면 강한 향이 후각을 자극해 오는 것이 기분이 좋았다.

상의에서 꺼낸 주사기를 만지작거리며 잠시 생각에 잠겨 있었다. 주사기를 도로 넣는다. 그리고는 차에서 내렸다. 근처를 둘러보다가 카페로 들어간다.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시켰다. 날씨와 그리 어울리지 않는 온도였다. 그러나 그는 굳이 날씨를 고려할 필요는 없다 생각했다. 진동벨을 받고 잠시 구석에 서서 카페 안을 둘러본다. 사람이 그리 많지 않다. 군인 한두 명이 각자 테이블을 잡고 앉아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고 있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 같다. 창가 쪽으로 시선을 돌린다. 남녀 한 쌍이 앉아 있다. 남녀 간에 대화가 그가 자리한 곳까지 들리진 않았다. 단지 남자 쪽에서 일방적으로 여자에게 매달리는 것 같았다. 여자가 뭐가 좋다고 저렇게 매달리는 건지.

그는 차 안에 앉아 밖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커피를 홀짝거리며 생각했다. 이런 쓴 콩 물을 다들 왜 그리 좋아하는지 모르겠다. 비싸기만 하고 말이야. 그런데도 이상하게 꼭 마시게 된다. 왜 마시는지는 모르겠다. 꼭 이런 곳에 프랜차이즈들이 자리해 있다는 것이 항상 의아했다. 이런 곳에 차려도 돈이 벌리나 싶은 작은 의문이 들었다. 터미널 바로 옆엔 군장점이 작게 들어서 있다. 근처엔 꼭 은행이 있다. 몇 분만 벗어나면 시골의 풍경만 가득한 그런 장소였다.

똑똑

옆을 본다. 누군가 바라보고 있다. 그는 조수석 쪽 창문을 내리고 누군지 확인해 보았다. 캐주얼한 복장의 하얀색 와이셔츠를 입고 있다. 나이는 40대 중후반으로 보인다. 직업은 아마 사업가 내지는 세일즈 맨일 것이다. 그가 보기엔 세일즈 맨이었다. 잘나가는 사업가라면 택시를 이용할 리 없다. 차를 이용한 자기 허영을 드러내야 되기 때문이다.

“아저씨, 그 일천 빌라 가려는데”

꽤 먼 곳이었다.

“네, 갑니다”

“그 짐이 있어서 그런데 뒤에 좀 열어주소"

세일즈의 손엔 캐리어가 쥐어져 있었다.

"뒷좌석에 넣으셔야 될 거 같은데, 트렁크엔 짐이 있어서 말입니다.”

“그 짐 얼마나 된다고 그냥 뒤에 좀 열어주소”

말투에서 서열을 잡으려는 듯한 자존심이 느껴졌다. 세일즈는 지금 그를 무시하고 있는 것이었다.

“다른 차 타시던가 뒷자리에 싣던지 고르십쇼.”

그는 세일즈가 던진 미끼를 물지 않았다.

“그 짐 도대체 뭐라고 그러는 거요! 거참 사람 기분 나쁘게 하네!”

“다른 차 타. 당신 안 받아”

그는 눈을 부릅 뜨고는 세일즈를 죽일 듯이 쳐다보았다.

살의가 가득하다. 세일즈는 그와 마주친 눈에서 약간의 겁을 먹었는지 말문이 막혔다. 본능적으로 그와의 대화를 피해야 된다고 느낀 것이었다.

“하 시발 지.. 진짜, 영업 그렇게 하지 마쇼. 재수가 없으려니. 쯧.”

남자는 이내 캐리어를 끌고 구시렁거리면 뒤편으로 사라졌다.

그는 백미러를 통해 멀어지는 세일즈를 보며 실소를 터트린 뒤 주변을 둘러보았다. 의외로 사람이 많은 곳이다. 그러나 그에겐 이런 곳조차도 역겨움이 가득한 공간이었다. 그는 이 공간에서 얼른 벗어나고 싶었다. 사람들은 어째서 이런 죽음의 냄새만이 술렁이는 도심을 좋아하는 걸까? 이해가 안 된다. 모든 창작엔 고통이 따른다 그랬던가. 그래 이건 그 과정의 일부야. 그는 운전대를 꽉 부여잡은 채 가만히 앉아 되뇌고 있었다. 운전대의 가죽 질감이 신경 쓰인다. 매일을 함께 하는 운전대의 질감이 오늘은 유독 도드라지게 느껴진다.

처음 운전대를 잡은 날을 떠 올렸다. 그때나 지금이나 체구는 똑같은데 처음 잡았던 운전대는 굉장히 거대하게 느껴졌다. 차량 자체 보다 운전대가 더 거대한 위협으로 다가왔다. 그 거대함 자체만으로 자신을 억누르는 공포감. 바로 앞에 자리한 운전대는 그를 도망칠 수도 없게 만들었다. 어렸을 적 마주한 교통사고에서 에어백이 터지는 모습이 그의 머릿속에 공포스럽게 뒤틀리며 각인된 결과였다. 운전대에서 하얀 무언가 튀어나와 사람을 뒤덮는다. 얼마나 기괴한 일 인가. 이것을 정복해야만 이 거대한 쇳덩이를 정복할 수 있어. 그것을 자신보다 약한 존재로 만들기 위해 애썼던 당시를 떠올린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식은땀이 난다.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왜 그게 그리 기괴하게 느껴졌던 건지. 지금은 신경조차 쓰이지 않는다. 그저 눈앞의 안경 같은 존재였다.

"아저씨?"

무슨 소리지?

“아저씨? 목적지 말씀드렸잖아요.”

옛 추억에서 꺼내 온 것은 뒷자리에 앉은 누군가였다. 꺼내진 느낌보다는 끌려져 나온 듯한 느낌이 더 정확할 것이다. 언제부터 뒤에 앉아있던 거지? 그렇게 깊이 생각에 빠져 있었던가. 그 정도는 아니었던 거 같은데. 여러 생각이 빠르게 오가다가 다시 처음으로 돌아온다.

그는 이 일을 해오며 스스로에 대해 깨달은 게 있었다. 목소리만으로 상대의 성격 대부분을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스스로가 이 부분에 있어서 굉장히 특출나다고 생각했다. 상대가 겸손한지, 오만한지, 악 한 존재인지, 선한 존재인지, 그에게 목소리란 상대방의 약점이었다. 카드게임으로 치면 이건 상대 플레이어의 패를 다 보고 시작하는 셈 이였다. 오래 해 온 일에서 찾는 소소한 재미 중 하나로 손쉽게 파악하고 빠르게 장악해버리는 자신만의 방식이라 여겼다.

이제 이 도심에서 한시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다는 욕구에 사로잡혔다. 마침 목적지는 이 구역질 나는 곳 밖에 있다. 미터기를 킨다. 악셀을 밟는다.

방금 들은 목소리를 곱씹어 보았다. 그 목소리는 충분히 매력적이었다. 또 듣고 싶다는 약간의 욕정을 불러오는 목소리였다. 중 저음에 적당히 성깔 있다. 겁 없는 듯한 묵직한 목소리에 남성의 몸에 가져다 놔도 그리 이상할 게 없는 듯한 묘한 중성적 느낌을 준다. (그러나 여성의 몸에 있기에 더욱 매력적이었다.) 심지어는 은연중에 관능적으로 다가왔다. 말하는 것을 별로 좋아할 것 같지 않은 목소리였다. 그렇기에 더욱 말을 걸고 싶다는 느낌이 그를 사로잡았다.

몇 분 달렸던가, 신호등이 빨간 불로 바뀐다. 살며시 속도를 줄인다. 이내 차가 완전히 멈춘 뒤에 컵을 들어 커피를 한 모금 더 마신다. 커피가 식었다. 이상하게도 식은 커피가 더 맛있었다. 그냥 더 맛있었다는 거지 굳이 커피를 식혀 먹지는 않았다. 다 마신 뒤에 남는 가루가 바닥에 고여 있었다. 그 바닥에 고인 가루들은 삶의 그림자를 보는 듯한 인상을 심어 주기도 하였다. 컵을 멍하니 바라보면 여러 기분이 느껴졌다. 자신이 식은 커피를 더 선호한다는 사실이 스스로에게 있어서도 이상했다.

사람 몇몇이 지나간다. 그는 지나치는 사람들을 관찰한다. 보행자 신호임에도 그저 가만히 서 있는 사람이 보였다. 20대 정도로 보이는 남성이었다. 머리는 덥수룩하고 후줄근한 흰 셔츠에 청바지를 입고 신발은 흔한 시장 브랜드였다. 시선은 휴대폰에 있으며 귀엔 이어폰이 꽂혀 있다. 그저 열심히 휴대폰만 바라보고 있다. 자신이 건널 신호임에도 건너지 못하고 있는 자였다.

다 똑같다. 공장에서 찍어낸 기계에 사로잡혀 스스로가 기계가 되는 거지. 그저 자리에 앉아 소통 없이 귀를 막는다. 시선을 좁은 기계로 옮긴다. 그러니 자신들이 향해야 할 방향조차 모르고 있을 수밖에. 자신의 주관 없이 스스로의 운명을 남에게 손쉽게 넘기고 마는 것이다. 뒷자리에 앉은 저 사람도 다를 바 없어. 그는 속으로 한탄했다.

바깥의 복잡한 도심 속 풍경은 점점 희미해지고 있었다. 지은 지 십여 년은 지났을 다리를 건넌다. 그리고 지은 지 반세기는 지났을 초등학교를 지나친다. 옆으론 논밭이 보이기 시작한다. 옛 것들이 속속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그는 곧이어 해방감을 느꼈다. 죽음의 악취에서 벗어났다. 이제는 생명력이 넘쳐나는 공간이다. 자연이 자신을 축복하고 있다. 환한 대낮은 그 스스로에게 환희를 주기엔 충분했다. 두려움과 경외가 동시에 그의 몸을 휘감았다. 그 환희를 이 운전대처럼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싶다는 욕심마저 들었다.

“도시 싫어하시죠?”

“네?”

반사적인 반응이었다.

“도시 싫어하지 않냐구요”

그는 갑작스러운 질문에 당황스러웠다. 대화 안 좋아할 거 같은 목소리였는데. 오죽하면 여성이 통화하는 줄 알았을까. 그러나 자신의 추측을 비집고 들어와 여성이 먼저 말을 걸어왔다. 자신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저 존재가 무엇인지 궁금했다. 그는 조심스럽게 룸 미러 너머로 시선을 옮겼다.

덜컹

과속방지턱을 지나는 찰나였다. 여성이 시선에 들어왔다. 그녀는 보기 드물게도 등을 절반쯤 덮는 듯한 장발을 하고 있었다. 눈매는 날렵한 고양이 같았다. 백옥에 가까운 피부색과 그에 어울리는 흰 셔츠. 몇 분 전과는 다른 장난기 가득한 말투에서 인간미가 느껴졌다. 20대 중후반으로 보임에도 이상하게 옛 것의 느낌이 물씬 났다. 왜 그런 지는 알 수 없었다. 가장 중요한 점은 미칠 듯이 아름다웠다는 것이다. 바라보기만 해도 홀리는 듯한 기분이 든다. 아름답다는 남발되어 선 안되는 표현이다. 그러나 이 존재는 진짜 아름다움이다. 그가 정리한 생각이 아니었다. 그냥 무의식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녀는 그 자체만으로 누군가를 홀리는 존재였다.

“좋아하진 않습니다.”

그녀를 어디서 본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저씨는 왜 싫어요. 도시가?”

도시가 왜 싫냐니. 복잡한 풍경과 달리 단순한 감정만 느껴지는 곳, 이상한 냄새가 가득한 곳, 생기가 없는 곳 등등 도시가 싫은 이유를 말하라면 그는 수천 가지는 더 댈 수 있었다. 물론 도시가 싫은 가장 큰 이유는 시골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외의 이유들은 그저 동어반복에 불과할 뿐이었다. 그나저나 어디서 봤더라.

“그냥 생기가 없습니다.”

그는 자신의 뒤엉킨 생각 중 아무 말이나 내뱉었다.

“아 진짜요?”

“아가씨는 어떻습니까?”

“난 그냥 싫어요. 막 정신도 없구, 그러니까 도시에는 오래 못 있겠어”

그냥 싫다니. 정말 단순하다. 그는 속으로 피식했다. 특출난 것들은 많이 봐 왔다. 그러나 조화로운 것들은 보기 힘들다. 말투와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마력과 외모에서 느껴지는 아름다움은 전혀 다른 끌림 임에도 한 곳에 조화롭게 모여 있다. 이렇게 조화로운 존재는 처음 본다. 그런 의미에서 그녀는 훌륭한 예술적 창작물이자 기적적인 영감이 되어줄 터였다.

“난 콘크리트? 그런 거 보다 나무가 꽉 꽉 채워져 있는 거 그게 더 좋아요.”

나무가 더 좋긴 하지.

“아가씨는 무슨 나무 좋아합니까?”

“소나무 좋아해요. 묵직하면서 시원한 게 여름 같은 느낌이라 좋아, 아저씨는 무슨 나무 좋아해요?”

“옛 느낌 나는 게 저도 소나무가 오래 살아서 좋습니다. ”

그는 소나무 숲이 근처엔 없다는 사실이 너무 안타까웠다. 소나무 숲을 보려면 적어도 몇 시간은 달려야 했다. 그 몇 시간을 달린 끝에 만끽하는 숲은 가히 절정에 가까웠다. 삽질을 한 뒤에 소나무 아래 누워 하늘을 바라본다. 솔 잎들에 찔려 등이 따갑긴 해도 그 고통이 경치를 감상하는 데 방해되지 않았다.

“소나무의 그 은은한 향이 되게 좋지 않아요?”

“소나무 향을 유심히 맡아 본 적이 없습니다.”

“엥 진짜요? 신기하네.”

그다지 신기할 것도 없다. 시각적인 것만 기억이 날 뿐이다.

“아저씨도 막 기술 발달 이런 거 싫어요?”

“시대가 너무 빠르게 흘러가니 따라잡기 힘들긴 합니다.”

“옛날엔 그랬잖아요. 스마트폰? 그런 것도 없어서 서로 약속하고 만나고. 난 아직도 이런 현대적이라 부르는 것들 어려워. 폰도 갖고는 있지만 뭐 하고 싶은 게 없더라고요. 뭘 해야 하는 지도 모르겠구. 옛날엔 진짜 단순해서 좋았는데. 편지니 뭐니 하는 게 이제는 로망이 됐어. 논밭도 보기 힘들고”

이상한 여자다. 외적으로는 젊어 보이는데 내적인 부분에서 드러나는 것은 시대 타령이다. 여러 구석에서 잘 맞는다. 점점 좋아진다.

“그건 그렇죠. 시대가 편리해지고 있는 거 같습니다.”

“아까도 봤죠? 어떤 아저씨가 폰 본다고 신호 못 건너는 거. 그런 거 보면 다들 너무 잡혀 사는 거 아닌가 싶어”

“그러다 차에 치이고 그러는 거죠.”

그는 진짜로 그러길 바랐다. 그런 자들은 시체가 되어야 한다는 건 그에게 있어서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다. 생명이란 것의 소중함을 모르는 배은망덕한 자들이라 생각했다. 예전에 그런 이유로 살인자가 된 사람이 생각났다. 스마트폰을 만지느라 앞을 보지 못하고 아이를 친 사람에 대한 이야기였다. 아이를 친 직후 전봇대를 들이 받아 그 채로 두 명 다 즉사했다. 치인 아이가 불쌍하다는 생각은 없었다. 그는 단지 멍청하게 앞을 보지 못한 운전자가 한심하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사실 난 자동차도 그래요. 인력거는 재밌는데. 자동차는 재미없어.”

인력거. 김첨지가 끄는 그 것 말하는 건가. 마지막으로 쓰인 때가 언제였더라.

“난 그래도 아저씨 차는 좋은 거 같아. 냄새가 내가 좋아하는 냄새야.”

내가 좋아하는 냄새를 가리기 위해 커피 냄새를 뿌렸다.

“하하 감사합니다.”

“아저씨는 사람 치이는 거 본 적 있어요?”

“겉 보기엔 별다를 게 없습니다. 튕겨 오를 때 저렇게 날아가는구나 싶은 정도죠”

“어떤 식으로 날아갔는데요?”

“자유 자재로 날아갔죠.”

“누가 그렇게 날아갔는데요?”

보통 나이 많은 사람들 이였다. 노인들은 신호등이란 게 뭔 지 모른다. 6차선 도로조차 칠 테면 쳐 보라는 식으로 느릿느릿 걸어간다. 세월이 흐를수록 생명은 이성을 잃고 한심하게 변한다. 그에게 있어 이는 그저 당연한 사실에 불과했다.

“길 잘못 건넌 사람이 날아갔습니다.”

굳이 자신의 생각을 입 밖으로 내뱉지 않았다.

“날아가? 얼마나 날아갔어요?”

“4미터 정도 날아갔습니다. 그대로 죽었을 겁니다.”

“어우 그 정도면 죽었겠다. 4미터라. 그러고 보니 아저씨는 그런 시체 보면 안 무서워요? 되게 담담하게 말하네”

트렁크에 가방이 있다.

“사람 죽은 거 다 무섭지 않겠습니까?”

애써 태연한 척 대답한다.

“난 예전에 말에 치여 죽은 사람 본 적 있어요. 가만히 누워 있던 사람인데, 술 퍼마시고 바닥에 나자빠진 사람. 갑자기 말 탄 사람이 지나가는데 그걸 못 본 거야. 그 머리가 밟혔나? 그래서 사람이 눈깔이 튀어나오고 그런데 바로 안 죽으니까 막 ‘끄억 끄억’ 거리고 그러더라구요. 꽤 된 기억인데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나”

“꽤 충격적네요. 괜찮았나요?”

“그저 그랬어요”

굽이진 언덕을 지나고 있었다. 차는 코너를 돌며 자연스레 옆으로 기운다. 끄억끄억, 굉장히 많이 들어본 소리다. 어떤 느낌인지 생생하게 들린다. 말에 짓밟힌 사람의 얼굴을 상상한다. 실제로 보면 어떨지 궁금했다.

덜컥.

차 뒤 편에서 희미한 소리가 들렸다.

“뒤에 뭐 있어요? 무슨 소리 들리는데”

“아 스포츠 용품 몇 개 사 놨는데 그걸 겁니다.”

딱히 틀린 말은 아니다. 스포츠 용품이 트렁크에 있긴 있다.

“스포츠 용품? 뭐 운동하세요?”

“골프를 좀 칩니다.”

휘두르는 건 잘한다.

“골프 되게 비싼 취미 아닌가? 아저씨 돈 많아요?”

“골프 칠 정도는 있습니다.”

겉보기와 다르게 그는 운동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매일 쉬지 않고 팔 굽혀 펴기와 턱걸이를 하고 윗몸 일으키기를 하며 하루 4km씩 러닝까지 한다. 의외로 자기 관리가 철저한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힘도 나이대에 비해 센 편에 속했다. 힘을 길러 단단하게 운전대를 잡는다. 운전대가 마치 골프채를 쥘 때와 비슷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꽉 쥔다. 그리고 있는 힘껏 내려친다.

골프채의 색이 변했다. 골프채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참 요상하게 생겼다. 골프채를 선호하는 별다른 이유가 없었다. 그저 골프채가 주는 짜릿함이 마음에 들어서 그랬다.

“끄억..끄억..”

감정이 섞이지 못한 순수하게 고통만을 내뿜는 목소리다. 골프채를 바라보던 시선을 아래로 떨군다. 아직이다.

깔끔한 맛은 덜하지만 그래도 이 타격감이 마음에 든다. 원래 아날로그는 불편한 맛에 쓰는 거라 하지 않았던가.

산속으로 가는 길에서 샛길로 빠진다. 깊숙한 곳으로 들어간다. 그곳에 폐가가 있다. 그 만 알고 있는 비밀 장소였다. 사실 그 조차도 그런 장소를 찾는데 꽤나 진 빠지는 짓을 했다. 그곳은 누구 하나 아는 이 없고 누구 하나 오는 이 없는 은밀한 장소였다. 그는 이곳에서의 일들을 자신이 하는 예술적 의식 행위라 생각하고 있었다. 항상 낮에 벌어진다. 따뜻할 때도 있고 뜨거울 때도 있는 햇빛이 자신의 왼뺨을 감싼다. 낮은 그를 항상 위로하고 축복해 준다. 잘했어. 오늘도 훌륭하네. 고생 많았어.

“아저씨 뭐가 그렇게 재밌어요? 아저씨 웃는 모습 신기하네, 되게 무뚝뚝한 사람 같은데”

그녀가 또다시 그를 몽상에서 끌어냈다.

“재밌는 추억이 떠올랐습니다. 그러고 보니 아가씨는 사람 죽는 거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그녀에 대한 흥미가 점점 올라간다. 그녀를 소유하고 싶다.

“글쎄, 별생각 없는데. 그냥 죽으면 죽는 거지. 무덤덤해요. 그런 거.”

대부분은 죽음을 무섭다 말한다. 그저 생각 없이 말이다. 막상 죽음을 직면해야만 죽음의 공포가 무엇이고 죽음이 얼마나 인간을 무기력하게 만드는지를 깨닫는다. 정말 어리석은 존재들이 많다. 그는 진짜 죽음의 공포를 스스로가 잘 알고 있다고 믿고 있었다. 무엇보다 죽음과 가까운 자였으며 때론 죽음을 만들어 내기도 했다. 그에게 죽음이 무서운 이유는 조금 남달랐다. 죽음 뒤가 무엇인지는 그에게 있어 중요치 않았다. 그것을 피할 수 없기에 무서운 것이었다. 그에게 있어서 죽음이란 인간을 무력하게 만드는 존재였다. 그는 스스로 외에는 그걸 아는 사람이 없다고 여겼다. 그리고 남들에게 그걸 알리는 게 숙명이자 사명이라 생각했다.

“대부분이 죽음에 대해 별생각이 없습니다. 그저 직면해야만 깨닫는 경우가 많아요.”

그녀와 대화할수록 그는 그녀에게 빠져들고 있었다.

“그런 사람 본 적 있어요?”

“꽤 징그러운데 괜찮으시겠어요?”

“그런 거 한두 번 본 것도 아니구 괜찮아요.”

"어떤 아이가 있었는데 다리가 꺾이고 머리가 깨져서 죽어가더라고요."

그때 아이가 뭐라 했었더라?

“그리고는요?”

아 맞다. 무서워요.

“제가 두 손 꼭 잡아줬습니다. 죽어가는 사람 특유의 숨소리가 있습니다. 입에 피가 끓으면서 숨소리에 액체 같은 게 뒤 섞입니다. 그 아이는 결국 오래 못 버텼죠.”

괜찮아. 슬퍼하지 말렴. 엄마는 안 오실거야. 아니 못 오셔. 그래도 걱정하지 말렴. 네가 대견스러우실 거야. 엄마를 찾는 게 아니라 눈앞의 죽음을 마주하다니. 넌 정말 대견해. 엄마만 부르짖는 다른 아이들과 달라. 훌륭하구나. 넌 무지하지 않아. 너 같은 아이들 덕분에 내가 힘을 찾는 단다.

“좀 슬프네요.”

“그렇죠”

쨍한 햇볕이 내리쬐며 도로 옆으로 커다란 소나무 숲이 보였다. 풍경이 새롭게 느껴진다.

“아저씨 사람 죽는 거 많이 본 거 같네.”

“살아가다 보니 그런 거 같습니다.”

많이 봤지.

"사람 죽는 거 보면 기분 안 이상해요?”

그녀가 공포에 떠는 모습을 보고 싶다.

“무섭죠. 슬프고.”

뿌듯하고 행복하다.

“다 똑같네요.”

그는 점점 그녀를 소유하고 싶다는 집착에 빠졌다. 스스로가 이렇게 광적으로 여성에게 매혹된 적이 있었던가. 스스로가 생각해도 새삼 놀라운 일이었다. 그러나 뒤틀린 욕구에 이미 사로잡혔기에 이성적인 생각을 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자신의 세계로 그녀를 끌어들이고 싶어졌다. 조금은 과격하게 말해서 그녀의 의사와 상관없이 머리 채를 끌고서라도 세계 안으로 들여오고 싶었다.

“저기 좀 엉뚱한 질문 하나 해도 될까요?”

“어떤 질문 말입니까?”

“좀 바보 같은 질문인데”

“괜찮습니다. 어떤 질문이던”

“아저씨, 사람 죽여 본 적 있죠?”

순간 그의 주변을 감싸고 있던 모든 기운이 멈췄다. 세계를 이루고 있는 공기의 흐름과 그리고 그가 달리고 있는 도로 위의 소리들과 그것들을 이루고 있는 배경, 심지어는 자전축까지도 멈춰버린 듯한 기분이었다. 그의 심장 박동만이 격하게 빨라지고 있었다. 다른 사람이 물었다면 그저 웃으며 넘어가는 어이없으면서도 실없는 문제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토록 오만하고 무지한 질문을 내뱉은 자에게 질문과 세계의 연관성, 그리고 생명의 소중함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도록 그에 합당한 설득력을 갖춘 확증적인 무언가를 선사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상황은 전제가 어긋났다. 질문이 그녀의 입을 통해서 나왔기 때문이다. 그녀의 생각을 거치고 그녀의 입을 통해서 세계로 나왔으며 그의 귀로 질문이 전달되었다. 젊은 외모와 상관없는 대화가 오고 가던 와중에 나온 그 질문은 이전에 전개되어 온 모든 대화를 비집고 들어와 중심에 자리 잡고 말았다. 그녀는 왜 이런 질문을 던진 것이란 말인가, 무슨 대답을 원하는 질문이었을까, 아니면 그저 젊은이가 내뱉은 생각 없는 의식적인 질문이었을까. 그는 스스로에게 그녀의 물음에 대답할 의무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그의 일부로서 섞여 있던 거짓말들이 지금은 희미하게 존재하는 것 같았다.

“세상에 사람을 죽여 본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하하 전 누구 죽이고 이런 건 관심이 없어서리.”

“음 이상하네요. 다른 데서 맡을 수 없는 되게 독특한 향이 난단 말이야. 아저씨한테서.”

“커피 향 말하시는 거 아닌가요?”

“음.. 아니에요. 그 냄새. 방향제 냄새가 막 진하게 풍겨오는데도 그 사이에 독특한 냄새가 있어.”

그녀의 질문은 아주 천천히, 그리고 신중하게 그의 목을 죄여 오고 있었다. 숨을 쉬기가 힘들다. 중심을 잃은 채 위태위태하게 버티고 있다. 주도권은 그녀가 쥐고 있다. 분명 커피향을 제외하고는 어떤 냄새도 안 난다. 그녀가 말하는 냄새가 그 냄새라면 이미 말끔하게 지웠다. 그런 쪽으로는 분명히 철저하게 행동해 왔다. 그의 예술 활동에 있어서 이는 중요한 핵심 키워드 중 하나였다. 이야기의 흐름이 그가 원하는 것과 정 반대의 방향, 아니 그가 원치 않는 끔찍한 방향으로 뻗치고 있다. 이야기의 흐름을 바꿔야 한다.

“무슨 냄새 말하시는 지 모르겠네요.”

“지워지지 않는 진한 냄새가 나”

“아가씨, 남의 차에 냄새 어쩌구 하는 건 예의가 아닌 거 같은 데 말야?”

“아저씨한테도 풍기고 있어. 한두 사람의 냄새가 아닌 거 같은데 말야”

도대체 정체가 뭐지. 왜 모든 사실을 알고 있단 말인가. 그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도저히 감을 잡을 수 없었다. 그녀에게 해를 입히기는 싫었기 때문에 흔하디흔한 그 방식은 해결 방안으로는 그다지 설득력이 없었다.

“아저씨 사람 먹어 봤어요?”

도대체 무슨 대화를 하는 건지 모르겠다. 대화가 이상하게 흘러갈수록 가슴팍에 들어 있는 주사기가 떠올랐다. 온 신경이 주사기로 향하고 있었다.

“제일 맛있는 부위가 어딘지 알아요?”

사람을 먹어 본 적은 없다. 사실 사람을 먹는다는 것에 대해서 생각해본 적이 없다. 무슨 맛인지 궁금하긴 하다. 그녀는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그는 이제 더 이상 그녀의 말을 듣고 싶지가 않았다. 브레이크를 세게 밟는다.

끼이익

퍽 소리가 난다. 그녀는 안전벨트를 하고 있지 않았다. 뒷좌석에 앉은 사람은 항상 안전벨트의 존재를 간과한다.

“으윽..아저씨 미쳤어?”

그는 다시 악셀을 밟기 시작했다. 그리고 몇 초 정도 달리다가 다시 브레이크를 세게 밟았다. 다시 퍽 소리가 난다. 뒷자리의 그녀는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관성에 휘둘리고 있었다.

그때 순식간에 뻗친 팔이 그를 덮쳤다. 당황스러운 그 사이에도 그는 잽싸게 주사기를 꺼냈다. 짧은 비명 소리가 들린다. 그런데 사람의 비명 소리가 아니다. 짐승적인 날 것에 가까운 소리였다. 차가 잠시 균형을 잃고 흔들린다.

털썩

그녀가 뒷바닥에 쓰러진다.

차 안의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는 정적을 만끽하며 악셀을 더 힘껏 밟았다. 이렇게 숨 막히는 아름다움을 내가 접한 적이 있었나. 그녀한테서 향기가 나는 거 같다. 한 번도 맡아 본 적 없는 굉장히 매혹적인 향이다. 이건 진정한 아름다움 그 자체야. 이런 게 예술이지.

바깥에는 여전히 소나무 숲이 펼쳐져 있다. 소나무 숲을 보자 그는 마음의 창이 활짝 열린 것 같았다. 소나무의 꽃가루가 흩날리면 세상 구석구석이 노란색으로 물든다. 그것들은 자신들의 방식으로 도시를 상대로 자연의 메시지를 힘차게 보내는 셈이었다. 이런 소나무 숲을 오랜만에 마주했단 사실에 그는 만족스러웠으나…

 

그러고 보니 여긴 도대체 어디지? 이 근처에 소나무 숲이 있었나?

 

몸이 좀 따갑다. 그는 생각을 뒤로하고 자신의 상체로 시선을 돌렸다. 옷이 찢어졌다. 대략 10cm 길이에 3cm 깊이였다. 그녀가 몸을 덮치며 낸 흔적일 것이다. 몸에 피가 선명하게 흘러내리고 있다. 그러나 이건 명백하게 사람의 흔적이 아니다. 짐승의 흔적이지.

그는 자신의 상처를 바라보다가 앞을 본다. 생각해보니 목적지가 어디였지. 목적지를 분명히 들었었던 거 같은데, 까먹었나? 아니면 아예 말을 안 했던가? 도대체 여긴 어디지? 가고 있는 길은 어디란 말인가?

동공이 확장된다. 머리가 약간 어지럽다. 운전대가 마치 뱀처럼 꾸불거린다. 감촉이 이상하다. 차창은 액체 마냥 찰랑거린다. 투명한 것이 아름답다. 허리 밑으로 아무런 감각도 느껴지지 않아서 악셀을 밟고 있는 건지 놓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아가씨는 괜찮은 걸까? 내가 너무 세게 찌르진 않았을까? 바닥이 움직인다. 속이 울렁거린다. 아가씨가 멀미하지는 않을까? 토할 거 같다. 가슴이 따갑다. 온몸에서 식은땀이 난다. 그래도 안심이야. 그녀는 이제 내 거야.

심장박동이 엔진 소리보다 커가는 와중에 운전대 위에 얹힌 그의 손 위에 누군가 손을 살포시 올린다. 고개를 옆으로 돌려본다. 아이가 앉아 있다. 그는 정신없는 와중에도 아이를 알아봤다. 그때 그 아이다. 여전히 오른쪽 머리는 함몰되어 있다. 이마에선 피가 흐르고 있다. 아이가 언제부터 옆에 앉아 있던 거지. 아이가 씨익 웃는다. 안구 한쪽이 없다. 아니 찌그러졌다. 이렇게 다시 만나니 반가워 꼬마야.

“미쳤어?”

목소리가 어디서 들려오는 건지 모르겠다. 가냘프게 힘없는 목소리다. 그녀일까? 분명 주사를 맞았는데 벌써 일어난다고? 생각할 정신이 없다. 온몸에 감각이 없다. 옆에 앉은 아이가 운전대를 꺾었다. 애야 운전하는데 그러는 거 아니야. 아이가 다시 씨익 웃는다. 그 순간 운전대가 꺾인다.

“앞에 봐!”

모든 일은 순식간에 일어났다. 도로가 없다. 가드레일이 그를 맞이한다. 에어백이 터진다. 그의 온몸을 덮는다. 옛 적 운전대에서 느꼈던 공포를 또다시 온몸으로 기억해냈다. 차는 완만하게 경사진 소나무 숲으로 빨려 들어갔다. 유리 파편들이 이상하게 신비스러우면서도 아름답게 느껴졌다. 얼굴을 스치며 베이기도 했지만 그는 고통을 느낄 수 없었다. 차는 계속해서 굴렀다. 에어백이 제 할 일을 마쳤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굴러떨어졌다.

힘겹게 눈을 떴을 때 그를 맞이한 건 소나무였다. 옆자리는 비어 있다. 겨우 고개를 돌려 뒤를 본다. 뒷좌석에 아무도 없다. 혼자만 남아 있었다. 온몸의 감각이 돌아왔다. 고통이 살아 숨 쉬며 그를 감싼다. 숨 쉬는 것조차 아프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고통이 그에게 들어온 것 같았다. 그는 자신이 살아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끔찍했다. 그러나 더 끔찍한 사실은 살아있음에 대한 공포와 동시에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졌다는 것이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 위치하게 된 것에 대한 공포가 엄습해 왔다. 스스로가 왜 죽음에 대한 공포를 느끼는지 몰랐다. 그는 죽음 너머가 무서운 것이 아니다. 그 뒤에 무엇이 존재하던 그것은 중요치 않았다. 그가 무서운 것은 순수하게 죽음 그 자체가 무서운 것이었다.

비명을 지를 힘은 남아있지 않다. 그는 자신이 눈을 뜨고 있는 것조차 기적이라 생각한다. 범퍼는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찌그러져 있었다. 연기가 자욱하다. 겨우 몸을 지탱하며 손을 안전벨트 쪽으로 옮긴다. 침착하자. 괜찮아. 그러나 안전벨트를 풀 손이 없다. 왼손의 손가락은 온통 뒤엉킨 채 꺾여 있다. 오른손은 아예 부러졌다. 손목을 사용하여 가까스로 안전벨트를 풀어낸다. 겨우겨우 손에 손잡이를 문대며 차 문을 열고 나온다.

철퍼덕

갈비뼈가 부러진 듯하다. 상처는 더 심각하게 벌어졌다. 상처 사이로 유리 파편들이 들어갔다. 숨소리에 무언가 섞여 나온다.

끄억..끄억..

무릎뼈가 살을 뚫고 나왔다. 뼈가 하얗다. 바닥에 쓰러진 채 기어간다. 기어가는 것도 불편하다. 바닥이 따가워서 그런 걸까, 무릎뼈가 걸려서 그런 걸까. 온몸이 따갑다. 유리 파편 때문인지 솔 잎 때문인지 모르겠다. 몸에 닿는 모든 것이 그에게 고통으로 다가온다. 조금 기어가다 겨우 뒤를 돌아본다. 차는 하얀 차량이 아닌 하얀 쇳덩이가 되었다. 커피향은 이제 나지 않는다. 땀과 피에 절은 지독한 냄새가 뒤 섞인 채 코를 마비시킬 뿐 이였다. 내가 무슨 죄를 지었다고 이런 상황이 된 거지? 나에게 무슨 벌이라도 내려진 것이란 말인가? 나를 축복해오고 내가 축복해온 나의 세계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두려워하고 존경해온 자연은 날 이렇게 배신했다. 그는 마치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을 거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그건 단지 기분이 그러했을 뿐이다. 그의 작은 세계는 그리도 손쉽게 파괴되었다.

흐윽…흐윽…끅..흐윽..끅..

그는 그 자리에서 파괴된 자신의 작은 세계를 보며 눈물을 흘렸다. 슬픔조차도 그의 온몸을 고통으로 지배하였다. 작은 세계가 무너짐과 동시에 그를 지탱하던 모든 이성도 무너져 내려 버렸다. 눈물을 흘리며 숨을 헐떡일 때마다 부러진 뼈들이 그의 온몸을 파고들었다. 이제는 감정을 느끼는 것조차 내 의지가 아니구나. 나에게는 감정을 지배할 자유의지조차 남아 있지 않구나. 그렇게 그 자리에서 한참을 울며 고통에 젖어 있었다.

몇 분을 기어서 올라갔는지 모르겠다. 아무리 기어가도 도로는 가까워지지 않았다. 도로는 여전히 위에 있었다.

한참을 기어간 그는 트렁크에서 떨어져 나간 가방을 발견했다. 가방의 겉이 약간 찌그러져 있었다. 그리고 살짝 열린 가방 사이로 누군가의 팔이 보였다. 남성으로 추측되는 신체적 특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었다. 골프채는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아저씨 살아 있네. 4미터 넘게 날아간 거 같은데”

목소리가 들린다. 아니 울려온다. 그녀가 날 부른다. 목소리를 들으니 기분이 좋다. 언제 들어도 행복해지는 목소리다.

“어디까지 가려고?”

소리가 가까이서 들린다. 어디서 들리는 걸까? 아 위에서 들리네. 그는 힘겹게 고개를 들었다.

“역시 아저씨도 심상치 않은 사람이었어”

그녀가 소나무 위에 걸터앉아 있다. 굉장히 큰 소나무다. 하늘을 향해 길게 뻗쳐 있는 것이 마치 세상을 지탱하고 있는 모습 같았다. 세상이라는 지붕을 소나무가 기둥 역할을 하며 무너지지 않게 버티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걸터앉은 그녀의 모습이 마치 옛 그림에 나오는 듯한 소녀의 모습을 연상시키고 있다. 세월에 얽매이지 않은 채 자유롭게 살아가는 영혼을 지닌 자가 존재한다면 당연 그녀일 것이다. 그녀가 코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닦아냈다. 지금 그녀의 모습은 택시 안에서의 모습과 조금 다르다. 저 귀는 뭐지?

“아 씨발.. 코 부러진 거 같아”

저 존재는 뭐지? 본 적 있는데, 이름이 기억이 안 난다.

“난 아저씨 냄새 맡고 탄 거였어! 내가 뭘 했다고 이런 식으로 대접하는 거지?”

그녀가 억울하단 듯 화를 낸다. 도대체 무슨 냄새를 말하는 것인가? 냄새는 다 지웠는데.

“그래도 아저씨 좀 맘에 들려 했는데 말야”

소나무의 은은한 향기가 코를 적셔온다. 아 소나무 향이 이런 냄새구나.

“아저씨 때문에 화나”

그녀가 나무 위에서 뛰어내린다. 그의 앞에 깃털처럼 가볍게 가라앉는다. 이제 그녀는 쭈그려 앉아 그의 시선에 눈을 맞춘다. 가까이서 마주 보니 더 아름답다. 역사의 전반이 그녀의 눈 안에 다 담겨 있는 듯하다. 도대체 몇 년을 살아왔길래 이런 눈빛을 가지고 있는 걸까?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느껴진다. 그녀가 슬퍼하고 있다.

그녀가 애써 씨익 웃는다. 송곳니가 돋보인다. 손톱이 날카롭다. 예쁘다. 그러고 보니 원래 저렇게 길었었나, 좀 전까진 안 길었던 거 같은데. 저 정도 손톱은 돼야 옷이 그렇게 찢겨 나가지. 그녀의 뒤로 하얀 무언가 드러난다. 저게 뭐였더라?

그녀가 손을 배에 가져다 댄다. 날카로운 것이 꼭 칼붙이를 배에 갖다 붙인 기분이었다. 그녀와 눈을 맞춘다. 눈물이 나지만 그녀를 보고 있다는 행복감이 동시에 들고 있었다. 이제 그녀가 죽음을 선사할 시간이구나. 이 경계의 고통에서 벗어날 시간이다. 그는 눈을 감으며 그녀의 아름다움에 대한 예찬을 하였다.

그 순간 그녀가 멈칫하며 손을 땐다.

“아저씨, 재밌는 생각이 났어. 그냥 이렇게 죽이는 걸로는 분이 안 풀려”

눈을 다시 뜨자 그녀가 사라졌다. 웃음소리만이 소나무 숲을 지배하며 울려 퍼지고 있었다.

“이곳을 빠져나가면 살려줄게. 한번 최선을 다해봐! 히히히”

그녀의 목소리가 울렸다. 그녀의 목소리는 사악함과 사랑스러움이 공존하고 있었다. 그녀가 사라지자 그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거대한 숲 속에서 텅 빈 공허만이 보였다. 도로는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 그리고 이내 그는 도로를 향해 다시 기어갔다. 숨 막히는 고통이 온몸을 지배하고 있다. 그는 끝없이 숲을 방황하며 자신의 머릿속에 자리해 있는 질문들을 되뇌었다. 저 하얗게 빛나는 건 무얼까? 그나저나 낯이 익은 게 어디서 봤더라? 인력거가 언제까지 쓰였지? 이 근처에 소나무 숲이 있었나? 여긴 어디지? 무슨 고민을 했다는 걸까?

그는 계속해서 도로를 향해 기어갔지만 자신이 향하고 있는 방향이 어디인지조차 가늠이 안되었다. 그를 행복하게 해줄 그녀의 존재조차 사라졌다. 영겁 속에 영영 풀리지 않을 질문들을 계속해서 되뇌며 숲을 방황했다. 간혹가다가 그녀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는 거 같았지만 실제 그녀의 목소리인지 아니면 단지 환청에 불과한지는 구분이 안되었다. 오로지 고통과 풀리지 않는 궁금증만이 그와 함께하고 있었다. 죽음도 삶도 그에게는 찾아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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