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어제로 향하는 습관

2021.01.24 04:2201.24

만약 우리가 그러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엉성하게 접힌 종이의 내면에는 그렇게 한 줄의 문장만이 적혀 있었다. 찢어진 노트에 이제는 희미해진 녹색으로 쓰인 짤막한 글귀였지만, 현은 노트를 펼쳐두고 밤을 지새우며 번민하는 유의 모습을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었다. 짧은 문장에 들어간 길고 긴 감정. 얼마나 많은 문장을 머릿속으로 만졌을지 현으로서는 가늠할 길이 없었다. 현은 편지를 도로 서류철에 끼우는 손을 바라보았다. 서류철의 표지에는 유의 일련번호와 이름이 큼지막하게 쓰여 있었다. 서류의 두께는 얇았다. 유가 자주 찾아오지 않은 탓이었다. 전화를 걸어도 받지 않을 때가 많았고, 이따금 찾아올 때도 퉁명스러웠다. 그러나 그 짧지 않은 만남에서도 알 수 있을 만큼, 그리고 그것 이상으로는 알아내지 못할 만큼, 유의 병은 복잡했다.

시간이동 관리청의 대기실은 만원이었다. 정확하게는, 현이 있는 곳은 대기실의 대기실의 대기실이었다. 대기실마다 서류작업과 자료 신청을 위한 정보검색실이 딸려 있었다. 그리고 그곳도 현이 앉아 있는 대기실처럼 사람들로 가득했다. 서류 신청을 끝낸 사람들은 직원이 나눠주는 번호표를 받아들고 초조한 마음을 억누르며 기다렸다. 현의 번호표에는 300이 넘는 숫자가 찍혀 있었다. 아침 아홉 시 반에 비교적 빨리 신청을 끝냈는데도, 현 앞에는 300명이 있었다. 그러나 현이 이미 거쳐온 대기실에서 기다리는 사람들은 400, 500, 아니면 600이 찍힌 번호를 보고 한숨을 내쉬고 있을 터였다. 현은 실랑이를 벌이는 남자와 직원을 바라보았다. 번호표를 사려는 사람이라고, 현은 생각했다. 아니, 번호표를 되파는 사람일 수도 있었다. 억지로 밀려나가면서도 남자는 계속 직원에게 뭐라고 말했다. 사람들은 모두 아무런 반응 없이 그저 문 바깥을 나서는 그의 모습을 시선으로 쫓았다. 그가 나가자, 대기실에는 적막과 타이핑 소리만이 가득했다. 현은 소매로 땀을 훔쳤다. 냉방기를 아무리 틀어놓아도, 사람들의 몸이 내뿜는 열기를 식힐 수는 없었다.

천은 책상 앞에 멍하니 앉아서 다음 민원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천의 등 뒤로 난 창문을 관통하는 노을빛은 하얀 벽을 누렇게 물들였다. 항상 그랬지만, 저녁이 다가오면 대기실을 가득 메우던 민원인들은 각자의 사정으로 관리청을 떠났다. 주로 일 때문이었다. 그래서 번호를 부르는 안내판은 벌써 열 개가 넘는 숫자를 뛰어넘었다. 천은 바뀌는 숫자를 바라보면서 기지개를 켰다. 612. 평소보다는 적은 수치였지만, 겨우 열네 명이 모두 관리하기에는 턱없이 많은 사람이었다.

천은 언제나 시간이동 관리청의 공무원이었다. 공시를 준비할 때도 시간이동 관리청만을 지망했고, 합격 후에도 시간이동 관리청에서만 근무했다. 그리고 그건 금지령 이후에도 바뀌지 않았다. 그러나, 모든 것이 바뀌었다는 걸 천은 피부로 느꼈다. 시간이동이 금지되면서 시간이동 관리청은 완전히 무의미한 기관으로 전락했다. 1년이 채 지나지 않아서 시간이동 관리청은 시간이동이 상용화되기 이전에 사용하던 건물로 이전했다. 옮길 물건도 하나 없어서 직원들 각자 서류함 하나씩 들고 몸만 움직였다. 천을 비롯한 열네 명은 컴퓨터를 다루는 법부터 다시 배워야 했다. 금지령 이전에 사용하던 업무 도구들을 쓸 수 없었던 탓이었다. 천은 건물을 옮긴 그날 동료들의 표정이 어땠는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다들 올 것이 왔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남은 절차는 관리청 폐지뿐이었다. 하나둘씩 사직하는 고참들 사이에서 공시에 합격한 지 겨우 1년 반이 조금 넘은 신입은 불안해했다. 그래서 그 신입은 오히려 민원인들을 받는 일에 더 열성적이었다. 그러나 관리청 내에 만연한 비관주의를 돌이킬 수는 없었다.

“신분증이랑 준비해오신 서류 주시겠어요?”

천은 준비된 멘트를 던지고 뻔한 대답을 기다렸다. 벌써 몇십, 몇백 번이나 반복된 절차였다. 그러나 천의 앞에 놓인 의자를 빼 앉은 선은 그 과정이 익숙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모든 것이 처음이었다.

빈은 눈을 감았다. 한참을 모니터만 들여다보고 있자니 눈이 경기를 일으켰다. 일평생 컴퓨터를 써 본 건 초등학교도 가기 전의 일이었다. 무엇 때문에 쓴 건지도 기억할 수 없었다. 지금까지 남아있는 그때의 기억은 화면에서 점멸하는 그림들을 보고 느꼈던 기쁨 말고는 없었다. 시간이 꽤 흘렀지만, 그때도 마우스를 사용하지는 않았다. 도대체 왜 컴퓨터를 교체하지 않은 건지 속에서 화가 일었다.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빈은 생각했다.

“꾹 누르고 해 봐요.”

현은 빈의 등 뒤에서 그렇게 말했다. 빈은 고개를 돌렸고, 현을 알아보았다.

“안녕하셨어요?”

빈은 무의식적으로 건넨 인사에 너무도 많은 반가움이 묻어 있다는 걸 깨달았다. 기억 때문이었다. 빈은 현이 너무도 가깝게 느껴졌다.

“꾹 누르고 당기면 전부 한 번에 선택이 될 겁니다.”

빈은 현이 시키는 대로 했다. 그리고 멋쩍게 웃었다.

현은 대기실에서 빈을 만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빈 역시 그랬다. 빈은 또 다른 대기실에서 현을 우연히 마주친 날을 떠올렸다. 그때 현이 닫은 문은 병원 초음파 검사실의 입구였고, 빈은 그의 아버지인 성과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성은 현을 보자마자 반가워했다.

“얘가 제 아들입니다.”

으레 그렇듯이, 빈과 현은 어색한 악수를 나눴다. 앞의 환자가 검사를 마칠 때까지, 그리고 성의 차례가 될 때까지, 셋은 잠시 이야기했다. 어떻게 지냈는지를 묻는 안부와 어떻게 사는지를 묻는 일상의 대화였다. 성의 마음은 한층 가벼워 보였다. 늙어가는, 그리하여 죽음과 가까워지는 노인의 정신이 매일 맑기만 할 수는 없다는 것을 빈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자식을 앞에 두고도 꺼림 없이 현에게 빈의 흉을 보는 그 모습을 보면서 빈은 안도했다. 정신과 전문의가 아니더라도 노인은 우울증이 완연히 가신 기색을 보이고 있었다. 아마도 성이 여전히 현의 환자였다면, 성은 가장 치료하기 쉬운 환자였을 것이 분명했다. 의사가 묻지도 않았는데 여러 이야기를 스스로 쏟아내고 있었으니까. 성의 실없는 농담에, 빈과 현은 웃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현은 언젠가 검사실 바깥에서 성을 만났다. 성은 현이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보다 두 배는 말라 있었다. 시간상실성 우울증으로 한참을 고통받던 성이 오래도록 상담실에 오지 않은 이유를 현은 그때 알게 되었다. 성은 아팠다. 죽을 만큼. 그의 가슴에 맥동하는 심장이 역설적이게도 성의 수명을 단축시키고 있었다. 현의 기억 속에서도 성은 그를 반갑게 맞았다. 그러나, 서로의 근황을 묻는 짧은 대화도, 일상을 묻는 간단한 물음도 그 만남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안녕하냐는 인사가 서로에게 던질 수 있는 유일한 질문이자 답변이었다. 현이 지나온 초음파 검사실의 문턱은 성이 넘어가고 나서는 그 너머를 가렸다. 성 홀로 앉아 있던 대기실에는 현 혼자 남아있었다.

빈은 성의 영정사진을 떠올렸다. 그의 기억 속에서 영정사진은 오른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아니, 온 세상이 오른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이상하게 그날따라 왼쪽으로 몸이 비틀렸던 탓이었다. 무언가가 잡아당기는 듯이 왼쪽으로 몸이 허물어졌다. 몸을 그래도 제대로 붙잡고 있으려면 고개라도, 목이라도 자꾸 우측으로 당기는 것 말고는 다른 길이 없었다. 빈은 관을 묻은 날, 왼쪽 어깨가 단단히 뭉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참을 두드렸는데도 한 번 뭉친 근육은 다시 풀리지 않았다. 아무리 허리를 똑바로 펴고 목을 곧게 세우려 해도 이질감은 여전했다. 빈은 그날 밤에 울었다. 장례식 당일에도 딱딱하던 얼굴이, 사망 당일에도 멀쩡하기만 하던 눈알이, 그 야밤에 심히 떨렸다. 빈은 성의 병을 겨우 사망 이틀 전에야 알았다. 병원의 전화를 받고 연차를 쓴 그 날부터 뇌출혈은 죽을 때까지 성을 재웠다.

유는 방어적이었다. 유는 정신과 전문의를 찾아오는 다른 환자들은 모두 다 말을 들어주는 이가 있다고 감격하면서 자신의 내면을 모두 털어놓을 것이라고 믿는 눈치였다. 그래서 그는 다른 환자들처럼 침묵했다. 이따금 입을 열 때도 속 깊은 곳에 진 응어리를 이야기하거나 당장에 느끼는 내밀한 감정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의 말 대부분은 사실을 교정하거나 현상을 묘사하는 것이었다. 그런 환자들에게 현은 무척이나 익숙했다. 그러나 그 익숙함도 의자에 앉은 나무와 대화하는 것 같다는 느낌을 지우지는 못했다. 현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아무리 무의미한 이야기라도 이어나가면서 유가 대화에 참여하기를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현은 그것이 유를 구원하는 길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현이 시간이동 관리청에서 그 더위를 견디면서도 300명이 넘는 사람들 뒤에서 차례를 기다리는 이유는 그저 오래된 실패의 기억을 되돌리고 싶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서류함을 정리하려다가 우연히 찾아든 과거에 매달릴 만큼 노망이 든 것도 아니었다. 한 달 전에 방문한 준의 말이 그날 내내 어딘가에 묻혀 있다가 퇴근할 시간이 다 되어서야 무의식적으로 유의 파일에 그의 손을 갖다 대었기 때문이었다. 서류철을 뽑아 펼치고, 그 속의 종이를 꺼내어 또 펼치는 것은 이미 어딘가에 그대로 적혀 있는 것처럼 예정되어 있었다. 현은 편지를 써 오라는 그의 말에 난감해하던 유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 당혹감의 뒷면에는 왠지 모를 기쁨이 어려 있었다. 배출의 가능성. 속에 있는 것을 어떻게든 내어놓을 가능성만으로도 마음이 아픈 사람들은 들뜨는 법이었다. 현은 보지 않을 테니, 읽지 않을 테니, 하고 싶은 말을 마음껏 쓰라고 말해 두었다. 그리고 실제로 그는 오늘 저녁까지도 그 편지를 펼치지 않았다. 그리고 편지를 펼친 지금, 현은 이십 년 전에 도착한 편지와 이십 년이나 유예된 그 의미를 생각했다. 이십 년 전은, 생각보다 가까이 있었다.

준은 상담실의 책장에서 유의 소설집을 발견했다. 준은 소설집을 펼쳐 읽으면서 그 소설들이 쓰이는 과정을 옆에서 봤다고 했다. 유가 상념에 잠기고, 구상하고, 메모하고, 검색하고, 취재하고, 타이핑하고, 수정하고, 때로는 문장을 만들지 못해서, 이야기가 엉켜서 머리를 싸매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봤다고 했다.

“하루는 심한 감기에 걸렸었어요. 저는 병원엘 가라고 했죠. 싫다고, 투정을 부리더군요. 그런 데 가면 글이 안 나온다고. 약이라도 지어올까 물었더니 그것도 싫다더군요. 약 먹으면 몽롱해져서 글이 이상해진다고. 그렇게 3일을 끙끙 앓으면서 글을 썼어요. 한두 시간마다 자고 깨고를 반복하면서. 그리고 3일째 되던 날 사라진 거예요. 말도 없이. 병원에 간 거죠. 퇴고까지 다 마쳐놓고 말이에요. 병원에서는 왜 이제 왔느냐고 그렇게 화를 냈대요.”

말을 끝내는 준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입은 분명히 웃고 있는데, 머리는 적당히 재밌는 일화였다고 생각하는데, 그렇게 눈물이 났다. 왜냐하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천은 유의 사진 위로 책을 덮었다. 얇은 페이지들이 서로 겹치며 두꺼워지는 소리는 꽤 둔탁했다. 책날개에 선명히 박힌 유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천은 손을 모으고 현을 보는 척 현 뒤의 문 위에 달린 시계를 보았다. 현이 들어온 지는 겨우 2분 남짓한 시간이 지나 있었다. 규정에 쓰인 대로 하자면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었다. 천은 신분증과 진료기록부와 책을 돌려줘야 하는지 고민했다.

“걱정은 말게나. 하나 더 있으니까.”

현은 다른 파일을 천에게 내밀었다. 서너 장의 종이가 한 묶음으로 찍힌, 유의 책보다도, 유의 진료기록부보다도 얇은, 빈의 가족관계 증명서였다.

“직접 와서 접수해야 하는 거 아시잖아요.”

“요즘 워낙 어려운 거 자네도 알지 않는가. 젊은 친구들한테는 시간이 없어. 일단 받아두고 따로 연락이라도 해 주면 안 될까?”

천은 한숨을 쉬었다.

“저도 규정대로 하는 거예요. 최소 면담 시간, 점심시간 교대 수칙은 물론이고 화장실 가는 시간도 여기 적혀 있다고요.”

현은 천이 펜으로 꾹꾹 눌러대는 규정집을 빤히 보았다. 규정집 또한 진료기록부와 가족관계 증명서처럼 얄팍했다. 현은 마치 이 세상이 두꺼운 텍스트는 거부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렇게 생각하자니 유의 책이 비정상적으로 부풀어 있는 것도 같았다. 그런 책을 썼으니, 이 얄팍한 세상에서는 견딜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고 현은 생각했다.

“그게 글쓰기와 그림 그리기의 공통점이에요. 차이점은, 그림은 한 눈에 볼 수 있지만, 글은 그렇지 못하다는 거죠. 항상 순서대로 써야 해요. 첫 페이지부터 마지막 페이지까지. 그리고 한 번 쓴 글은 바뀌지 않죠. 다시 앞으로 넘겨도 똑같은 글을 읽을 수밖에 없어요.”

유는 자신의 소설을 소설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블로그에서도, 인터뷰의 소개글에서도 그는 소설가가 아니었다. 그는 소설집의 표지에 ‘짧은 글 모음집’이라는 꼬리표를 달았을 뿐, ‘소설’이라는 단어는 쓰지 않았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자꾸 소설가라고 부를 때마다, 유는 난감해했다. 유는 차라리 작가로, 되도록 글쟁이로 불러달라고 했다. 유는 자신의 소설 또한 여러 이름으로 불렀다. 가장 많이 쓴 단어는 ‘책’이었다. 표지의 색깔을 따서 ‘파란 책’이나 ‘검은 책’으로 부르는 식이었다. 아니면, ‘두꺼운 책’, ‘얇은 책’으로 부를 때도 있었다. 자신의 소설을 전반적으로 지칭할 때는 ‘텍스트’라는 단어를 쓰기도 했다. ‘제 텍스트가’, ‘제가 쓴 텍스트는’, ‘제가 텍스트로 전달하려는 것은’. 그러나 그가 가장 아끼고 사랑해마지않는 단어는 그저 ‘글’이었다.

그러니, 유의 표현을 빌리자면, 현이 처음 읽은 그의 글은 검은 책의 첫 번째 글이었다. 유를 만나기도 한참 전에 책을 샀으니, 현은 말보다는 글을 통해서 유를 먼저 만난 셈이었다. 유가 ‘검은 책’이라고 불렀던 것과는 달리, 그 책의 표지는 일곱 가지 색종이들이 그 속의 이야기들을 포장하기라도 한 것처럼 화려했다. 마치 무지개라도 잘라서 오려 붙인 듯했다. 붉은색, 연두색, 파란색, 노란색, 자주색, 주황색, 흰색. 그 수많은 색채의 향연 속에서도, 정작 책 제목 하나만 검은색이었다. 그리고 유가 ‘검은 책’이라고 불렀던 이유도 결국 그 때문이었다.

빈이 아내의 전화를 받으러 잠시 사라진 사이, 명은 빈의 시간이동 허가 신청서를 인쇄하던 현의 어깨를 두드렸다. 명은 다소 미안해하는 얼굴로,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는 얼굴로 현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는 컴퓨터로 뭘 어떻게 하라는 건지 도저히 알 수 없다고 했다. 겨우 스물이 갓 넘은 청년에게 컴퓨터와 마우스는 너무 낡은 물건이었다.

“누구 때문인가요?”

“친구요.”

명은 잠시 끊었다가 말했다.

“사람을 죽였거든요.”

명은 교도소의 면회자 대기실에서 한참을 앉아 있었다. 그늘진 곳에 자리한 의자에 앉아 바라본 햇살에는 교도소의 칠이 벗겨진 벽과 대비되는 안온함이 있었다. 교도소의 정문으로 통하는 외길을 따라 운전하는 내내 느꼈던 안온함이었다. 그 따스함은 길섶의 가로수와 들꽃과 가드레일에도 스미어 있었으나, 교도소의 정문을 넘어 발을 내딛는 순간 모두 소멸했다. 태양에게는 얇고도 얇을 철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두 세계가 충돌하는 느낌이었다.

“왼쪽 마우스를 클릭해보게. 아니야. 왼쪽에 마우스가 있다는 게 아니라, 여기 이걸 클릭해보라는 뜻이었어. 이게 오른쪽, 이건 왼쪽. 이제 홈페이지에 접속하게.”

방탄유리 하나를 두고 윤을 마주했을 때, 명은 뭐라 말할 수 없는 감정을 느꼈다. 살인이라는 죄로 15년 형을 구형받고 복역하는 죄수를 만나고 위안과 기쁨 따위의 감정이 일기를 바란 것도 아니었고 머릿속에서 계속 맴도는 기억이 사실은 일어나지 않은 것들이라고 끊임없이 되뇌기도 했지만, 윤의 눈을 보는 순간 명은 둘 사이에 놓인 것이 한낱 방탄유리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윤의 눈에는 생전 처음 보는 인간이 보내는 관심을 향해 되쏘는 의아함으로 가득했다. 어렵사리, 명은 먼 과거에서 자신이 윤과 친구였다고 말했다. 명은 어떻게 윤과 친해졌으며 함께 무엇을 했는지 이야기했다. 반목과 잘못도 기억나는 것들은 빠짐없이 이야기했다. 그러나, 윤은 무관심했다. 명이 말한 그 어떤 기억도 일어나지 않은 일들이었기 때문이었다. 윤은 전혀 다른 것들에 관심이 있었다. 이를테면, 출소나 영치금 같은. 윤은 명이 보는 것보다 멀리 있었다. 그 원인이 윤이든 명이든, 원근감은 철저하게 배반당했다.

“오른쪽으로 클릭해봐. 그렇지. 옆에 뭐가 주르륵 뜨지? 꾹 누를 필요는 없어. 이제 ‘복사하기’를 누르면 그 파일이 복사되는 거지. 그럼 이제 폴더를 클릭해보게. 오른쪽으로.”

교도소의 바깥에서 교도소의 창살로는 드리우지 않는 안온한 햇살을 받으며 명은 윤과의 대화를 곱씹었다. 실은 대화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그저 분절된 문장들의 집합체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지만, 명은 30분을 차 안에서 가만히 앉아 있었다. 윤에게는 모든 살인범이 그렇듯이 살인범이 아닌 적이 있었다. 그리고 명의 기억 속에서, 그는 살인범이 아니었던 마지막 날 이후에도 살인범이 아니었다. 명은 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쫓았던 과거에서의 기억이 되살아난 날부터 면회 당일까지를 세세히 회상했다. 명이 없는 6년 전에 사람을 죽였던 윤은 명이 있었던 6년 전에는 살해 현장에 있지조차 않았다. 심지어 명은 지난밤에 그 사건의 피해자와 같이 저녁을 먹은 기억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그 친구는 만나는 봤고?”

명의 미소는 허무했다.

“제가 누군지 모르겠다더군요.”

“다들 그래. 다들.”

명은 교도소 면회실에서 만난 윤을 ‘살인자의 전형’이라고 묘사했다. 실제로 살인자의 전형적인 모습이란 존재하지 않을 터였고, 살해당한 사람만큼이나 살해한 사람도 다양할 것이었지만, 현은 왠지 그 표현을 이해할 것도 같았다. 현은 자신 나름대로 인간들의 전형에서 일부를 뜯어내어 재조립함으로써 그 친구의 몰골을 구성했다. 흐릿한 눈과 피로한 표정, 그리고 늘어진 몸. 혹은, 맑은 눈과 생기있는 얼굴, 그리고 단단한 육체. 현은 두 대비되는 특질을 동시에 가진 인물을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었다. 사실, 누구나 그런 모습을 가지고 있었던 탓이었다.

“이제 인쇄만 하면 끝이야.”

마지막 버튼은 현이 눌렀다. 그의 손에는 빈의 가족관계 증명서가 들려 있었다. 빈은 하교하는 아이들을 태우러 가야 했다. 아침에 한 약속은 저녁이 다가올 때면 지켜지지 않는 법이었다. 특히 더는 과거로 돌아갈 수 없는 세상에서는 더더욱. 한사코 괜찮다는 빈에게 현은 성이 자신의 환자기도 했다는 핑계를 댔다.

“이제는 친구의 친구인 건가요?”

“사정이 딱하잖아.”

천은 현의 말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내저었다.

“누누이 말씀드리지만, 본인 일이나 가족, 친지 때문이 아니면 애초에 허가가 안 된다니까요? 이건 당사자가 와도 허가가 안 나요.”

“그럼 나는 왜 받아주나?”

“의사시잖아요. 의사가 환자 챙기는 게 일이 아니면 뭔데요?”

현은 팔짱을 꼈다.

“선생님. 저희도 미치겠어요. 저도 미치겠다구요. 지금이 21세기도 아니고, 서류작업을 컴퓨터로 한다는 게 말이나 되냐고요. 그 와중에 또 예산이 잘린대요. 정부에서는 아예 부서를 폐지하자고 그러고요. 지금 저쪽 방에서 일하는 친구는 공시 합격한 지 이제 5년 차에요. 그런데 1년 만에 가장 좋은 데서 지금 여기로 튕겨나왔죠. ‘시간이동을 금지합니다.’, 한마디만 하면 만사가 다 해결될 줄 알았나 본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거 선생님이 더 잘 아시잖아요.”

현은 천의 말에서 사실 아닌 것을 지적하기가 어려웠다. 기껏해야 천 스스로가 진단한 자신의 광증 정도가 신빙성이 부족했다. 시간이동에 거액이 들 때나 필요했던 허가청을 이름만 관리청으로 바꿔 놓고, 시간이동 관리청에서 일하던 공무원들을 모두 시간이동 허가청의 업무에 배정한다는 건 헛짓이었다. 시간이동 관리직의 최전선에서 일하던 인재들은 한순간에 대체가능한 단순 기능직으로 밀려났다. 아니, 밀려났다고 할 수도 없었다. 부서 이름도, 소속된 관청의 이름도 똑같았으니까. 오전 9시에서 오후 8시까지의 근무가 끝나고 나면, 천은 언제나 광장으로 갔다. 그곳에는 관리청의 공무원들, 천의 동료들이 장사진을 치고 모여 있었다. 그들의 요구는 간단명료했다. 자르지만 말아 달라. 그들 대다수와 마찬가지로, 천에게는 먹여야 할 식구가 있었다.

“시간이동은 그냥 우리 욕심이었던 거예요. 우리 깜냥으로는 어떻게 감당할 수 없는 기술이었던 거죠. 이게 그 증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증거와 욕망, 현은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시간이동이 금지되면서 경제 체계는 물론이고 일상의 패턴도 모조리 무너졌다. 일하면서 육아하고, 운동하면서 친구들과 만나고, 자면서 먹는 행위들은 모두 불가능해졌다. 일 하나만으로도 하루가 다 갈 만큼 시간이 부족했다. 시간이동 금지령은 여태껏 국가가 시행한 그 어떤 행정명령보다도 광범위하고 세세하게 영향을 미쳤다. 그것 하나만으로 온 세계가 좁아져 버렸다. 그러나 현은 이렇게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는 그 증거 하나가 없어서 여기 오는 거야. 머릿속 기억이 사실이었던 때가 있었다는 증거 하나가 없어서.”

그러나, 세상의 협소함은 현 또한 벗어날 수 없는 한계였다. 그날 상담을 다 마치고도, 유가 뛰어내린 병원의 옥상에 오를 때까지 현은 다섯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그리고 나서 마침내 도달한 그 자리는 많이 높았다. 모든 것이 내려다보였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읠 담은 세상은 협소하기 그지없었다. 20년이라는 세월이 지난 만큼 유가 그때 눈으로 본 풍경과 현이 본 풍경이 많이 다를 것이었지만, 현은 그곳에서 내려다보이는 환한 도심의 조명과 좁은 만큼이나 바삐 움직이지 않을 수 없는 사람들을 한참이고 바라보는 유를 상상했다. 유와 같은 성격이라면 무작정 앞뒤 재지 않고 뛰어내리지는 않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현은 위태한 난간에 마침내 직립한 유를 상상했다. 현에게는 두 가지 가능성이 있었다. 부재하는 유서는 두 이중적이고 대랍적인 상황을 상징한다. 하나는 할 말이 너무 많았기에 겨우 종이 한 장을 빌려서 다할 수 없는 언해불능의 가능성이요, 다른 하나는 할 말 따위는 없기에 그 무엇도 남길 이유가 없다는 언해무능의 가능성이었다.

병원의 CCTV는 입원실 문 앞에서 한참을 서성이던 유의 모습을 선명하게 담고 있었다. 감시카메라의 흐릿한 화질로는 유의 표정이나 세세한 몸짓을 모두 파악할 수 없었다. 그의 목소리조차 녹음되어 있지 않았다. 현이 알 수 있었던 것이라고는 고작해야 유가 그 문 앞에 머무른 시간이었다. 기껏해야 2분도 되지 않는 시간. 유는 아주 짧은 간격으로 그 문 앞에서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길 반복했다. 그러기를 서너 번. 유는 다섯 번째로 문 앞에서 사라진 다음에는 다시는 카메라에 잡히지 않았다. 몇 분 뒤, 유는 허공을 날고 있었다.

“어떤 느낌이었을까요?”

“저야 모르죠. 죽어본 적이 없으니까.”

천은 선을 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천의 손에는 391번 번호표가 들려 있었다. 14의 배수보다 하나가 작은 수. 원래대로라면 네 칸 건너에 있는 진이 받았어야 하는 번호표였다. 가로로 한 번, 세로로 한 번 접힌 그 얇은 종이는 겨우 하루가 지났는데도 맞물린 가운데에 작은 구멍이 나 있었다. 천은 그 구멍을 엄지손가락으로 막아보았다. 손의 떨림이, 혹은 방 안의 기온 차이가 만들어내는 희미한 바람이 그 구멍 사이로 삐져나온 뭉툭한 살점을 훑고 지나가는 것 같았다. 면담실 안은 바람 한 점 없는데, 그 구멍 너머에는 아주 작디작은 바람의 세상이 존재했다. 선은 뒤를 돌아보았다.

“얼마나 있어야 한다고 했죠?”

“15분이요.”

선은 뒤로 기댔다. 그리고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불 꺼진 형광등은 무의미했다. 분명 언젠가는 켜질 테고, 그때가 되면 방 안의 그 무엇보다도 유의미한 것이 될 수도 있을 테지만, 선은 그 언젠가를 살고 있지 않았다. 지금 형광등은 꺼져 있었고, 켜질 필요도 없었다. 그리고 그 사실조차도 선에게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시간이동을 다시 할 수 있다면, 언제로 갈 건가요?”

선은 물었다. 천은 그와 비슷한 질문을 수십 번도 더 들었다. 대개는 당신도 바꾸고 싶은 과거가 있지 않으냐는 애절한 호소나 빨리 허가증을 내어놓으라는 분노 섞인 협박을 동반했다. 그래서 그 무엇도 동반하지 않은 그 질문은 이전의 것들과 전혀 다른 것처럼 느껴졌다. 천은 번호표를 소중한 편지를 다루듯이 접었다. 가로로 한 번, 다시 이번에는 세로로 한 번.

“저는 시간이동을 허가하는 사람입니다. 시간이동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래도 한 번 정도는 생각해본 적 있을 것 아닌가요?”

천은 문 위의 시계를 바라보았다. 시간은 그가 망설이는 지금도 여전히 흐르고 있었다.

“이 모든 일이 일어나기 전으로요.”

“금지령 전으로요?”

“아뇨. 더 전으로요. 우리가 시간여행 같은 것에는 관심도 없던 때로.”

선은 파일을 덮고 그 위에 번호표를 올려놓는 천의 손을 바라보았다.

“차라리 그때가 더 행복했을까요?”

천은 소리 없이 웃었다. 선은 그 웃음에서 느껴진 씁쓸함이 자신의 마음에서 비롯된 것인지, 아니면 천이 담은 것인지 확실하게 알지 못했다.

“여기서 사람들 얘기를 들으면서 깨달은 게 뭔지 알아요? 사람들은 종종 이미 답을 알고 있는 질문을 던진다는 거죠. 그 답을 다른 사람 목소리로 듣고 싶은 거예요.”

선은 그런 시간이 존재했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연은 스스로 잘 지치지 않는 체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시간이동이 금지된 이후에도 매일 거르지 않을 만큼 철저히 운동한 덕분이었다. 일정한 시각을 정하고 일정한 시간을 습관적으로 투자한다는 것은 시간이동이 금지된 직후의 뒤섞인 시간관념으로는 지켜지기 어려운 일이었지만, 연의 몸은 마치 태생적으로 그러한 시간을 살아갔던 것처럼 적응해갔다. 그래서 겨우 한 번 밤을 새웠다고 깜빡 졸아버린 연은 의자에 앉아 있으면서도 완전히 허물어지려는 몸 때문에 화들짝 놀라야 했다. 연의 몸이 평시의 상태였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었다. 연은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았다. 평생토록 느껴본 적 없는 크기의 피로감이 요새 자꾸만 연을 덮쳐왔다. 존재하지 않았던 기억들과 함께.

연은 무덤 앞에 묘비처럼 서 있었다. 볕이 잘 드는 산자락에 솟은 무덤에 난 잡풀은 그 높이가 가지런했다. 당장 어제 가족들이 와서 성묘하고 가기라도 한 듯했다. 그 아래에 누워 있었을 정의 몸은 이미 그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썩고 분해되었을 터였다. 그러나, 연은 그 아래 파묻힌 정의 육신을 드러냈다. 그 상상 속에서, 정은 연의 기억에서만큼 젊었다.

안은 연을 특히 반기지도, 그렇다고 매정하게 내치지도 않았다. 그는 담담하게 제 형의 이야기를 털어놓을 뿐이었다. 안이 연에게 건넨 정의 사진에는 정의 가족들과 그의 가족들이 복제한 듯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안은 사진 속 인물들을 하나하나 짚어가며 이야기했다. 정과 정의 아내와 정의 두 아들과 두 며느리와 세 손주들까지. 안이 마지막으로 보여준 사진은 노쇠해 죽음을 맞기 이전에 정이 마지막으로 정정했을 때의 모습이었다. 그 사진은 정의 영정사진으로도 쓰였다. 연은 주름살과 검버섯을 지워보면서 그녀가 기억하는 정의 모습을 찾았다. 아무 사진이든 한 장만 복사해줄 수라도 있냐는 연의 말에 안은 측은한 미소를 띠며 고개를 저었다.

“어려운 일이겠지만, 잊어요. 겪어본 일이라서 말하는 거예요.”

정이 임종을 맞이한 병원은 연의 기억 속에도 존재하는 곳이었다. 시절이 바뀔 동안 병원의 외벽은 새로 칠을 했고, 그 뒤에는 또 다른 건물이 세워졌으며, 황량하던 옥상에는 작은 뜰이라고 할 만한 정원이 조성됐다. 그러나 전체적인 외관은 연의 기억 속에 있던 그대로였다. 연은 바뀌지 않은 안내 데스크, 그리고 각 분과 진료실의 위치와 입원실로 이르는 복도를 기억하고 있었다. 생전 처음 오는 곳이었지만, 연은 헤매지 않고 정과 만났던 그곳으로 갈 수 있었다. 넓은 복도를 따라 승강기를 타고 7층에서 내려 계단을 올라서 왼쪽으로 또 긴 복도를 따라가면 도착하는 그곳은 정이 환자들을 돌봤던 호스피스 병동이었다. 연은 그곳의 현실에서 나는 죽음의 냄새와 그곳의 상상에서 나는 웃음의 냄새를 뒤섞어 맡았다. 그 복도는 기억과 현실이 혼재된 공간이었다. 연은 그곳에 도착해서야 정이 죽었다는 사실과 안의 주소, 그리고 연락처를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정과 그녀가 물리적으로 얼마나 많이 떨어진 존재였는지도 확실히 깨달아버렸다.

<글쓰기란 글자로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천에게서 돌려받아 책을 펼친 현은 그 문장을 눈으로 담담히 읽었다. 책의 서두에 서문이나 작가의 말 대신 당당히 인쇄된 그 글귀는 유가 가장 좋아하는 문장이었다. 유는 그 문장이 나오는 영화를 열 번도 넘게 봤다고 했다. 유가 매료된 이유는 영화의 이야기와 배우들의 연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그를 사로잡은 것은 역시 영화에서 사용된 색채였다. 녹색과 적색, 백색이 끊임없이 순환하면서 영화 전체의 넓은 밑그림을 채색하는 과정이 강렬하게 다가왔다고 말했다. 그 과정이 유의 마음에 찍은 방점이 바로 그 문장이었다. 글쓰기란 글자로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글쓰기에는 흑백 이외의 색이 필요하지 않았지만, 유는 감독이 말하려고 했던 바를 완벽히 이해한다고 생각했다. 더불어서 자신이 글쓰기로 하고자 하는 것도 명료해졌다고 말했다.

“새하얀 글을 쓰고 싶어요. 그게 글쟁이로서 제 목표이자 꿈입니다.”

정말 유다운 말이라고 현은 생각했었다.

“처음 시간상실성 우울증 환자가 찾아왔을 때, 그때는 정말 당황했었네.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어. 기억이 난다니. 있지도 않은 기억이 갑자기 떠오른다니. 그리고 그게 당장 겪는 것처럼 생생하다니. 금지령이 내려질 때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지.”

“지금은요?”

천이 물었다.

“점점 익숙해졌어. 환자들을 보는 것도.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듣는 것도. 돌이킬 수 없는 일들이 있다는 것에도. 시간은 정말 흘러가는 것이었어. 그저 투박한 비유라고만 생각했었는데 말이지. 그걸 받아들이고 나니까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되더군. 내일도 환자들의 과거와 고통을 듣는 나를 상상하고, 그들에게 치료랍시고 여러 좋은 이야기를 하는 나를 상상했네. 아주 먼 미래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기억에 시달릴까 생각했고, 미래에 언젠가는 다시 시간이동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도 생각했지. 그럴 일은 없겠지만. 그런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그걸 생각할 수 있다는 것. 그것도 어쩌면 금지령이 가져온 변화의 일부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네. 그리고 내게도 그런 기억이 언젠가는 닥쳐오리라고도.”

현은 머릿속에 스친 잔여시간에 대한 걱정은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시간만큼은 현도, 천도 어쩔 수 없었으니까.

“내가 직접 겪으면서 환자들을 조금은 이해하게 됐네. 지금도 생생해. 여전히 그 친구가 그 자리에 앉아서 말을 하는 것 같아. 아마도 평생 여기에서 벗어날 수 없겠지. 그걸 깨닫고 나니까 이제는 그런 생각이 들더군.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서는 나도 모르는 누군가가 나를 찾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매일같이 번호표를 뽑아가면서. 내가 하는 것처럼. 여기 모두가 하는 것처럼.”

연이 불러주는 대로 받아적던 현은 갑자기 입을 꾹 닫아버린 연을 돌아보았다.

“서류는요?”

입력란의 커서는 메트로놈처럼 깜빡거렸다. 필수 기입 항목. 뭐라도 적어넣지 않으면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없었다. 그러나, 연은 고개를 저었다. 연의 기억을 증명해 줄 서류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연은 사실상 정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람이었다.

“그 사람은 떡볶이를 먹을 때면 항상 어묵만 집어먹었어요. 라면은 꼬들꼬들한 것보다는 푹 퍼진 것을 좋아했죠. 파는 꼭 넣었고, 계란은 그때그때 달랐어요. 쌈을 싸먹을 때는 상추보다는 깻잎을 좋아했고 크림파스타는 싫어했어요. 크림이 들어간 음식은 거의 다 싫어했죠. 생크림 케익이라든지. 그런데 우유는 또 열심히 마셨어요. 몸에 좋다면서. 주량은 작았어요. 술을 거의 안 먹다시피 했죠. 원래 잘 안 받는 것도 있었지만, 워낙 바빴거든요.”

연은 정의 식습관뿐만 아니라 옷 입는 맵시와 말투, 취미와 성격까지 정의 모든 것을 이야기할 수 있었다. 정의 일터에서 일어났던 일들도 모조리 읊을 수 있었다. 간암 4기 할아버지의 농담, 대장암 4기 플로리스트가 만든 꽃꽂이, 폐암 말기 환자의 불평, 에이즈 환자의 눈물, 그리고 그들의 희로애락에 관한, 삶에 관한 이야기. 연 또한 그들 옆에서 함께 웃고 함께 울었다.

“암에 걸린 여자 환자가 있었어요. 제 나이 또래라서 잘 맞았죠. 그분한테는 남자 보호자가 하나 있었어요. 좋아한다고. 서로 좋아한다고. 하루도 안 빠지고 찾아왔죠. 그분 돌아가실 때도 같이 있었어요. 그때, 병원에 찾아갔을 때, 그분 기록도 찾아봐달라고 했었죠. 그런 남자 보호자는 없었다고 했어요. 아예 보호자가 없었다고. 그 사람도 시간이동을 했던 거예요. 그때는 그게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는데.”

연은 꽤 오랜 시간을 이야기했다. 후텁지근한 대기실은 어느새 현의 상담실이 되어 있었다. 현은 습관처럼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 이야기를 모두 들었다. 그리고 그는 연이 말하고 싶은 것을 이해했다. 연의 말은 증언이었다. 그렇게 무수한 말들을 쏟아냄으로써 연은 정과 자ㅓ신 사이에 있는 간극을 메우고 싶어 했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했다. 연이 그 누구보다도 정확하게 정과 정의 과거를 묘사하고 기술할 수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유효하지 않았다. 현은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알면서도 증빙서류란에 유의 진료기록부를 적어넣었다.

“일단 들어가요. 들어가서 설명해 줘요. 어쩔 수 없었다고. 그런 서류가 없어서 도움을 받았다고.”

연은 현에게 물었다.

“왜 절 도와주시는 거예요?”

현은 얼굴을 뒤덮는 차가운 기운이 뼛속까지 스미는 것을 느꼈다. 관리청 화장실의 물이 차가운 것인지, 아니면 그만큼 대기실의 기온이 높았던 것인지 현은 딱 잘라 말할 수 없었다. 현의 헛돌던 심장은 서서히 제 박자를 찾아갔다. 거울 속의 얼굴은 깊게 파인 주름살을 펴기라도 할 것처럼 발갛게 물들어 있었다. 현은 소변기 앞에 서 있는 선을 보았다. 현은 어제의 난동을 떠올렸다. 궁금증이 일었다. 선은 바지 단추도 끄르지 않고 변기 안에 무언가 있기라도 한 것처럼 한 곳을 멍하니 응시하고 있었다.

“거기엔 아무것도 없어요.”

현은 툭 던지듯 말했다. 선이 돌아보았다.

“그렇네요.”

“어제는 무슨 일이었죠?”

“어제도 계셨나요, 여기?”

“여기는 한 번만 오고 말 수 있는 곳이 아니에요. 곧 알게 될 겁니다.”

선은 고개를 저었다.

“오늘은 700번이 넘어가요. 최대한 빨리 오는데도 이 모양이죠. 아마 오늘도 얘기도 못 꺼낼 겁니다.”

“일 때문에?”

선은 고개를 끄덕였다.

“500번 이하로 받지 않으면 엄두도 못 내겠더라고요.”

“누구 때문인데요?”

선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딸이요. 죽었거든요. 10년쯤 전에. 교통사고였죠.”

시간이동이 금지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선은 딸의 죽음이 갖는 함의를 깨닫지 못했다. 모두가 그랬다. 죽음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당장 내일 죽는다고 할지라도 여전히 돌이켜 갈 수 있는 유구한 과거가 있었다. 당장 내일 아끼고 사랑하는 누군가가 죽는다고 하더라도 그가 살아있는 오늘이 있고 어제가 있고 그 이전의 나날들이 있었다. 그때는 아무도 ‘할지라도’나 ‘하더라도’라는 부사어를 사용해서 죽음을 수식하려고 하지 않았다. 죽음은 일상적인 것, 누구나 겪는 필연적인 것일 뿐이었다. 태어날 때 외치는 울음처럼. 하루하루 자라가는 키처럼. 그러나 시간이동이 금지된 지금, 모두 말 그대로 죽음에 둘러싸여 갇혀버렸다.

“그때 뭐라도 해야 했어요.”

현은 그렇게 말하는 선의 눈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선의 눈은 유의 눈처럼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그 눈은 지금 여기가 아니라 그때 거기를 보는 눈이었다.

현은 주머니에서 번호표를 꺼냈다. 그리고 선에게 건넸다.

“자네 걸 나를 줘.”

“무슨 말씀이세요?”

“자네 걸 날 달라고. 바꾸자는 얘기야.”

“안 돼요. 선생님은 사람이 많으시잖아요.”

“그만큼 시간도 많아. 적어도 자네보다는.”

현은 613번이 적힌 자신의 번호표와 현의 번호표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어서 받아. 마음 바뀌기 전에.”

선은 대기실 의자에서 번호표를 펼쳤다. 그는 선명하게 적인 391이라는 숫자를 몇 번이고 확인했다. 이 정도 숫자라면. 이 숫자라면. 선은 생각했다. 그는 신청서와 서류를 손에 꽉 쥐었다. 입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심장은 바짝 긴장해서 조급하게 뛰었다. 선은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그리고 가만히 눈을 감았다. 그때 맞은편 의자에 앉아 있던 연이 일어섰다. 그녀의 차례였다.

연은 면담실의 문을 닫았다. 의자에 앉은 진은 선량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신분증이랑 신청서부터 주시겠어요?”

연은 의자에 앉아 주민등록증과 신청서를 건넸다. 신청서를 확인하는 진의 얼굴을 보면서 연은 왼쪽 손목을 꽉 쥐었다. 연은 진이 어떻게 반응할지 가늠할 수 없었다. 이해할 수 있을까, 연은 생각했다. 그리고 이해받을 만한 것일까, 연은 생각했다. 그 질문에는 진만이 대답할 수 있었다.

“서류도 주실래요?”

연은 고개를 저었다.

“없어요.”

진은 눈을 동그렇게 떴다.

“여기는 하나 적혀 있는데요?”

“어떤 분 도움을 받았어요.”

“도움이요?”

“네. 그걸 안 쓰면 신청서를 못 쓴다고 했더니…….”

“그럼 가족도, 친척도 아닌 건가요?”

“네. 그렇지만 그렇게 됐을 수도 있었어요.”

진은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었다.

“죄송하지만, 가족이나 본인 일이 아니면 저희는 대기명단에도 올려드릴 수 없어요.”

“하지만 전 분명히 그 사람을 만난 걸요.”

“알아요. 그러셨을 거란 것 믿어요. 하지만 제 생각대로 일을 처리할 수는 없어요. 이런저런 사정을 봐 드리기 시작하면 여기 일이 진행이…….”

연은 바깥에서 나는 웅성거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건 진도 마찬가지였다. 누군가가 고함을 치는 소리가 꽉 닫힌 문틈으로 새어들었다.

“잠시만요.”

진은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었다. 다른 면담실 직원들도 문을 열고 무슨 일인지 살피고 있었다. 민원인들도 문 바깥에 서 있었다. 그들은 모두 한 곳을 응시했다. 연 또한 진을 따라 바깥으로 나왔다. 그리고 진이 바라보는 곳을 바라보았다.

먼 쪽 대기실 가운데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목소리와 목소리가 너무 많이 겹쳐서 도대체 무슨 일인지 연으로서는 짐작할 수 없었다. 무슨 일이 나기는 한 것 같았다.

“무슨 일인가요?”

연이 물었다.

“저도 잘 모르겠네요.”

진이 대답했다. 그리고 옆 방의 직원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그 직원이 대답하려는 찰나, 겹겹이 쌓인 군중의 무의미한 목소리를 뚫고 단호한 한 문장이 들려왔다.

“구급차 불러요, 빨리!”

현은 정신이 아득해지는 와중에도 그 목소리는 똑똑히 들었다.

“보통 환자들이 몇 번 상담하러 오나요?”

현이 천을 처음 만난 날, 천은 물었다.

“보통은 한 달에 두세 번 봅니다. 상황이 어려운 분들은 일주일에 두 번도 뵙고요.”

“그런데 이분은 겨우 다섯 번 만나셨네요?”

현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도 여기 오셨고요.”

“그렇습니다. 안됩니까?”

“아니에요. 규정상 문제가 있는 건 아니니까요. 다만, 궁금해서요. 의사들은 이런 환자들한테도 신경을 쓰는 건가 싶어서.”

“언제나 그렇지는 않아요. 모두 그렇지도 않고요.”

“그럼 왜 오신 거죠? 사실상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인데.”

현은 창문으로 비스듬히 들어오는 햇살을 직시했다. 다른 모든 외부의 것들은 감히 침입할 수 없는 면담실에 오직 햇살 하나만이 바깥에서 유래했다. 무엇도 광선의 직진을 막지 못했다.

“왜 이러고 있냐고요? 글쎄요. 잘 모르겠더군요. 여기서 이러는 것 말고 뭘 할 수 있는지. 신청서 쓰고 서류 챙기고. 그리고 기다리는 것 말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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