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두 베녜라 이야기

2020.12.31 15:0712.31

‘저녁별’과 ‘새벽별’의 지시체는 같지만, 그 뜻은 다르다.

- 고틀롭 프레게, <뜻과 지시체(On Sense and Reference)>에서

 

2017년 1월 12일

피터 메나드. 미겔 데 세르반테스의 명저 <재치있는 이달고 라만차의 돈키호테>의 9장과 38장, 그리고 22장의 일부를 비롯한 여러 소설, 평론, 논문, 연구물, 기고문, 및 기타 저작물의 저자이나 이제는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짧은 회고문에서만 언급되는 소설가 피에르 메나르의 아들도, 손자도, 증손자도, 사촌도, 팔촌도, 그보다 먼 친척도, 사생아도, 입양아도, 신분도용자도 아닌 그는 죽었다.

야밤에 출동한 경찰은 거실에 누워 있는 피터의 시신을 발견했다. 피터의 목에는 셔츠가 묶여 있었고, 그의 머리에서 새어 나온 핏물은 바닥에 굳어 있었다. 피터의 얼굴은 이미 말라붙은 상처로 가득했으며, 깨진 형광등 조각이 온 거실 바닥에 흩어져 있었다. 피터의 노트북은 전원이 켜진 상태로 닫혀 있었다. 그는 끝까지 <나무는 눈을 먹고 자란다>의 도입부를 고쳤다. 유언의 대체물 같지도, 일련의 사건을 향한 한탄 같지도 않은 문장들이었다.

‘동토의 어딘가에는 곰의 노린내를 물씬 머금은 나무도, 순록의 배설물을 뿌리 옆에 모아두고 꽃 피울 해가 드리우길 기다리는 나무도, 심지어는 살얼음 낀 녜바 강의 하구에서 여전히 파도치는 바다를 감상하는 나무도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 어느 나무도 광장에서 외로이 홀로 선 이 나무만큼 피를 맛보지는 못했을 거라고 보리소비치는 생각했다. 나무에 아무렇게나 걸려있는 시체는 냉담자인 그조차도 종교적이고 절대적인 구원의 필요성을 재고하게 할 만큼 처참했다.’

 

2017년 1월 13일

1차 부검의 요지는 이러했다. 두개골, 광대뼈, 경추 및 늑골 골절. 안면 및 양팔에 작은 찰과상 및 자상. 미주 신경 압박에 의한 심정지. 자살을 위해 셔츠를 천장 조명에 묶고 그 끝을 목에 둘렀으며, 사망자가 죽은 이후에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한 조명이 무너져내렸다. 사망자는 예상하지 못했겠지만, 그는 질식의 고통에 몸부림치는 대신 심정지로 사망했으므로, 안타깝게도 몸무게가 조명을 망가뜨려 살아남을 수 있을 만큼의 시간이 충분히 주어지지 않았다. 순식간이었을 거라고, 부검의는 첨언했다.

 

2017년 1월 17일

정 박사는 피터의 뇌가 다행히도 잘 보존되어 있다고 말했다. 머리가 다치면서 손상된 곳도 있었고 이미 며칠 부패가 진행된 곳도 있었지만, 다른 부분에서는 비교적 선명한 기억 이미지를 뽑아낼 수 있을 거라고 했다. 그러나 광반응 검사가 끝났다는 연락을 받고 간 정 박사의 사무실에는 형사 두 명이 먼저 와 있었다. 피터가 죽은 다음 날 나를 찾아온 둘이었다.

정 박사는 한 시간 반에 달하는 영상을 보여줬다. 정 박사의 영상은 희뿌연 액체가 담긴 수조에 든 뇌와 그 뇌가 피터의 것임을 보증하는 라벨을 촬영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정 박사는 피터의 뇌를 투명한 액체가 담긴 실린더로 옮겼다. 그 실린더는 광반응기에 고정되어 있었으며, 내가 읽은 논문에서 보았던 거대한 모습과는 달리 정 박사의 광반응기는 치과에서 사용하는 엑스레이 기기처럼 U자형의 장치가 실린더를 감싸고 있었다. 피터의 뇌는 실린더를 따라서 천천히 내려가다가 어느 지점에서 멈췄다. 정 박사는 피터의 뇌 위치를 확인하고는 장치의 위치를 조정했다. 그리고, 화면은 완전히 어두워졌다. 정 박사가 반응기를 작동시키자, 우리는 밝고 가느다란 붉은색 광선이 장치의 한쪽 끝에서 나와서 피터의 뇌를 지나 장치의 반대쪽 끝에 닿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장치는 회전하기 시작했다.

“이건 커넥톰을 그리는 과정입니다. 두뇌 지도라고 생각하면 돼요. 일단 에너지가 적은 적색광으로 머릿속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를 보는 거죠. 뇌를 구성하는 단위체들이 어떻게 배열되어 있는지, 결합 구조는 또 어떤지. 그게 결국 우리가 하는 생각이고 기억이 되는 거니까.”

장치의 양 날개는 서로 독립적으로 움직였다. 정 박사가 광수신기라고 부른 날개는 액체와 뇌를 만나면서 굴절하고 반사되는 빛의 끝머리를 쫓았다. 두 날개는 겹치기도 하고 처음 그랬던 것처럼 정반대로 벌어지기도 하면서 빠르게 움직였다. 그와 동시에, 정 박사가 띄워놓은 화면에는 무수한 점과 선으로 이루어진 도형이 피터의 뇌와 흡사한 모양을 갖추었다. 그리고 완전히 하나의 뇌라고 부를 만큼의 형태가 완성되자, 광반응기는 파란색 광선을 방출했다. 그러자 뇌가 갖가지 색상으로 환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저건 뇌의 활성도를 보는 겁니다. 일단 각 부위가 얼마나 살아있는지, 그러니까 검사 결과가 법적으로 얼마나 유효할 수 있을지 확인해야 하고, 활성화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도 확인해야 하거든요. 이게 끝나면 나머지는 전부 컴퓨터의 일입니다.”

영상은 겨우 30분 남짓 재생되었을 뿐이었지만, 정 박사는 4시간 정도 걸린 작업이라고 설명했다.

 

2017년 2월 3일

출판사는 끝내 광반응 검사를 실시한 목적은 달성할 수 없었다. 광반응 검사로 복구된 기억 속의 종이에 쓰인 문장들, 그것도 눈으로 훑고 지나가는 문장들은 제대로 확인할 수 없는 수준으로 열화된 것이었다. 정 박사는 오히려 그런 불완전한 상태가 우리의 기억에 가깝다고 설명했다.

“광반응 검사는 만능이 아닙니다. 기껏해야 오감, 그 중에서도 시각과 청각을 재현할 뿐이에요. 촉각이나 후각, 미각은 재현할 기계가 개발되지 않은 탓에 구현되지 않은 것이고, 이건 인간 기술력의 한계죠. 그러나, 설사 그게 가능할지라도 광반응 검사는 우리가 기대하는 수준의 결과를 내놓지 않을 겁니다. 당연한 일이죠. 생각해봐요. 어떤 기억을 떠올릴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우리가 기억을 떠올릴 때는 뇌뿐만 아니라 그 기억과 연결된 감각신경들도 반응해요. 정확하게 말하면, 감각적인 기억을 회상하는 것은 우리에게 신체적인 반응을 일으키고 그 신체적 반응을 재감각해서 사실감을 느끼는 겁니다. 그 뇌의 주인인 본인이 아닌 한, 그런 사실감은 느낄 수 없어요.”

나는 이 말을 그대로 출판사에 전했으나, 출판사는 납득하지 않았다. 피터의 뇌가 이미 많이 부패했으며, 검사를 반복하더라도 더 나아질 가능성은 없을 거라는 정 박사의 촌평으로 메일을 마무리하자 이내 조용해졌다. 그들에게는 소설 텍스트 외에 표절 시비를 가릴 수단은 없다고 말해두었다.

 

2017년 2월 5일

하지만, 컴퓨터가 드러낸 피터의 기억은 사람들을 재판정으로 부를 만큼은 선명했다. 정 박사가 촬영한 영상에서, 컴퓨터와 연결된 모니터는 피터의 뇌에서 추출한 무수한 기억들을 재생했다. 필름을 순식간에 감아버리는 듯한 모습이 법정에 걸린 은막에 펼쳐졌다. 겨우 5년 전에야 법적으로 활용될 수 있는 증거로 채택된 광반응 검사가 실제 재판에 적용되는 첫 사례인 만큼, 기소하는 검사에게도, 판단하는 판사에게도 생경한 상황이었다. 영상은 빛이 희미한 가운데 몸부림을 치는 누군가의 시야를 그대로 송출했다. 그리고 그 이후의 장면은 앞뒤로 선 두 사람의 실루엣과 여전히 휘청거리는 시야, 그리고 버둥거리는 사람의 모습을 담고 있었다. 그리고 컴퓨터가 불완전하게 복구해낸 소리가 결정적이었다. 피고인은 격렬하게 부인했지만, 영상에는 사람의 흐릿한 숨소리와 목소리가 담겨 있었다. 마치 가래가 끓는 듯한 소리였다. 곧 숨이 넘어가기라도 할 것처럼.

 

2017년 2월 11일

한 언론사는 한 면을 전부 사건의 개요와 광반응 검사를 소개하는 데 할애했다. 정 박사의 인터뷰 또한 길게 실렸다. 겨우 두 번 공판이 진행되었을 뿐인데도, 그 기사는 이미 피터 메나드 자살 사건을 피터 메나드 살인 사건으로 소개했다. ‘기술과 과학의 승리’라는 거창한 수식어까지 붙었다. 정 박사는 줄리안 왓슨 박사의 연구를 인용하며 인터뷰를 시작했다.

“재생신경학에서 가장 주안점을 두는 연구 과제는 알츠하이머입니다. 대부분은 거기서 파생되죠. 기억 재생이라거나 삭제 같은 것 말입니다. 신경 손상으로 유발되는 마비 같은 외과적인 문제는 물론이고 PTSD나 조현병 치료법도 재생신경학 연구 덕에 많이 변했어요. 환자에게 잘라낸 뇌 조각을 다시 먹이는 람찬-필립스 요법처럼 간단하면서도 획기적인 방식이 나왔으니까요.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왓슨 박사 같은 경우가 특이하다고 봐야죠. 광신경학은 기껏해야 20년 전에야 다시 주목받기 시작했거든요.”

정 박사는 광반응 검사에 거부감을 표하는 피터에게 왓슨 박사의 강연 동영상을 보여주었다. 왓슨 박사는 로저 스페리의 논문을 인용하면서 50년 사이에 신경과학이 겪은 급진적인 변화를 설명했다. 마이클 가자니가와 조셉 보겐이라는 과학자들이 공동 저자로 올라간 논문은 왓슨 박사의 말대로 뇌량이 절제된 사람의 인지를 연구한 내용의 논문이었다. 왼손으로 물체를 감각한 분할 뇌 환자는 그 물체의 이름을 말하지 못한다. 왼손은 우뇌와 이어져 있고 우뇌는 언어기능을 담당하는 좌뇌와 이어져 있지 않다. 그러므로 환자는 자신이 왼손으로 무엇을 만졌는지 말할 수 없다. 왓슨 박사는 이 연구를 설명하며 편재성이라는 단어를 언급했다. 인지적 능력이 대뇌의 양쪽에 편중되어 기능하는 성질. 마이클 가자니가는 후속 연구를 통해서 그렇게 분할된 우뇌는 스스로 언어적인 처리가 가능하도록 언어를 담당하는 영역을 만드는 것처럼 보였다고 보고했다. 그는 이를 바탕으로 분할 뇌 환자에게는 각 반구가 개별적인 자아를 갖는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자신의 연구성과를 발표하는 그녀는 배로 들떠서 이야기했다. 람찬 필립스 요법으로 치료받은 환자들이 호소하는 이질감이나 운동능력 감퇴, 습관적 행위의 재형성을 광신경학적으로 해소하는 방법이나 광번응기의 원리 같은 학술적인 이야기들이 휙휙 지나갔다. 그러나 그것도 피터의 마음을 돌리지는 못했다. 피터는 표절 논란을 끝낼 수 있는 최후의, 그러나 최고의 수단이 될 수도 있는 도구를 끝내 선택하지 않았다. 자기가 베녜라라고 말할 만큼 심리적으로 몰려있었으면서도.

 

2017년 2월 17일

피터가 자신이 베녜라라고 고백했을 때, 나는 피터에게 도대체 왜 그런 이야기를 이제야 하느냐고 물었다. 피터는 횡설수설했다. 피터는 마치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는 것처럼 두려워했다. 자신이 베녜라라는 것을 한 치의 의심도 없이 확신하면서도, 바로 그 확신이 자신을 죽일 것이라 여기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의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피터는 베녜라의 블로그에 있는 글들을 자신이 안다고 말했다. 그 글들을 자신이 썼다고 했다. 믿을 수 없었다. 문학계에서 피터를 표절 작가라며 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한 지가 벌써 1년이 훌쩍 넘어간 시점이었다. 나는 피터에게 나가서 말하라고 했다. 밝히라고. 사실 자기가 베녜라였고, 그러니 제기된 스물일곱 건의 표절 요소는 사실 같은 사람이 쓴 글이라면 나타날 수밖에 없는 수준의 유사성일 뿐이라고. 피터는 그럴 수 없다고 했다. 베녜라의 블로그에 접속하는 비밀번호를 알고 있느냐는 질문에도 피터는 묵묵부답이었다.

“기억이 안 나요.”

피터의 요구는 명확했다. 자신이 베녜라임을 밝히지 말고 세 권의 소설이 표절이 아니라는 것을 밝혀달라. 나는 도대체 그것이 가능하기는 한 것인지 묻고 싶었다.

 

2017년 2월 24일

피고인은 ‘사죄를 드린다’라고 썼다. 그 사죄는 다섯 장에 달하는 장문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그 가운데 상당한 분량이 자신이 징역형을 받게 되면 홀로 살아가야 할 노모가 걱정된다는 애원과 피터의 집에서 행한 절도를 뉘우친다는 사죄에 할애되어 있었다. 피터의 죽음은 길게 적혀있지 않았다. 사망자의 죽음을 애도하고 유가족들의 고통을 위로한다는 두 문장이 전부였다. 살인을 인정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반성하지 않은 것도 아닌 그 모호함의 정중앙에 그 편지는 자리했다. 편지를 쓰라고 사정하는 변호사를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었다. 유가족에게 보내졌어야 할 선처를 바라는 반성문은 내게 보내졌다. 피터에게는 유가족이 없었다. 고작해야 석 달간 얹혀산 친구가 전부였다. 그마저도 연락이 닿지 않았다. 편지를 전해주면서, 변호사는 대화를 나누고 싶다 했다. 그는 죄송합니다만, 으로 말을 시작했다. 무엇이, 누구에게 죄송한 것인지 그 또한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알겠다고 대답했었다. 날짜를 잡기까지 일주일이나 걸렸다.

 

2017년 2월 28일

변호사는 정 박사가 촬영한 영상을 내게 보여줬다. 나는 그 영상을 보면서 기시감을 느꼈다, 그 기시감의 기원은 피터의 소설이었다. 완전히 똑같은 두 검은 실루엣. 그러나 하나는 살인자이고 하나는 피해자. <총과 총성>이 그려낸 상황은 그 장면과 닮아 있었다. 포툠킨스크에서 연쇄살인이 일어난다. 경찰국의 수사1부 니콜라이 대위는 세 건의 살인을 끝내 막지 못한다. 니콜라이는 소설의 중반부에서야 유일한 목격자의 증언으로 용의자를 찾아내지만, 용의자는 침묵한다. 용의자는 자신이 용의자로 지목된 것 때문에 쌍둥이 형이 일련의 사건을 일으킨 것이라고 짐작한다. 소설은 스스로 미끼를 자청한 용의자가 범인에게 납치되고 결국 니콜라이가 범인을 사살, 그러나 시신은 절벽에서 떨어지고 불어난 강물에 휘말려 수습할 수 없었다는 결말로 마무리된다. 피터의 소설에서 형은 동생을 붙잡고 목에 총을 겨눈다. 똑같은 얼굴이 앞뒤로 겹친다. 동생의 시점과 형의 시점이 거의 한 문장씩 번갈아 가면서 서술된다. 피터는 자신의 죽음을 알았을까. 자신이 그렇게 죽을 거라고 생각했을까. 아니면, 그저 우연일 뿐인가. 경찰은 영상 속에서 나타난 삼인칭 시점의 화면은 피터의 집에 있는 전신 거울에 살해 장면이 비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볼 수 있다는 것도 간단하게 증명해냈다. 피터 메나드는 자살하지 않았다. 살해당했다. 사람들은 그렇게 믿었다.

루트비히 스미스는 총 스물일곱 개의 근거들을 제시하면서 피터가 베녜라의 소설을 표절했다고 주장했다. 고작해야 8편이 실린 단편집에서 스물일곱 개나 뽑아냈다. 친절하게도 러시아어를 모르는 나 같은 사람을 위해서 하나하나 번역까지 해 놓았다. 루트비히 스미스는 예전에 주목했던 작가가 활동을 하지 않아서 의아해하던 차에 통탄할 일이 발생하고야 말았다면서, 누구도 나서지 않기에 자기가 직접 나섰다고 말했다. 베녜라의 유일한 출판물인 <희고 푸른 밤>의 표제작을 평론하면서 기대했던 것들을 전혀 다른 인물의 텍스트에서 발견했을 때, 그는 혐오감을 참을 수 없었다고 했다.

“<희고 푸른 밤에 금성은 어디 있는가>의 서두에서 던진 질문은 단순히 베녜라의 신원과 정체에 대한 궁금증의 발로가 아니었다. ‘도대체 베녜라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제목이 시사하는 바와 같이, 러시아 문학, 나아가서는 텍스트로서의 문학이 디지털과 영상 매체가 범람하는 이 세계에서 이제 어느 위치를 점유하고 있는지를, 그리고 해야 하는지를 확정하는 각성의 과정을 요구하는 선언이었다.”

피터는 그러한 혐오감에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피터는 루트비히 스미스의 감정에는 무관심했다. 나아가서는, 표절 의혹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감정에도 무관심했다. 대신, 피터는 실증적인 문제에 매달렸다. 그 의혹이 얼마나 사실적인지에 관한 문제였다. 피터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뿐이었다. 실제로 베녜라이거나, 아니면 실제로 독자적인 작품을 썼거나. 피터는 어느 쪽도 선택하지 않았다. 그게 아니라면, 어느 쪽도 선택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2017년 3월 1일

“조회해 봤는데요. 류진혁 씨는 2009년 3월 5일에 출국하셨는데요.”

형사는 그렇게 말했다. 피터의 유일한 연고는 피터가 한국에 도착하고 얼마 되지 않아서 사라졌다. 그와 피터가 살던 방에는 이제 다른 누군가가 살고 있었다. 피터는 류진혁을 찾지 않았다.

 

2017년 3월 4일

베녜라는 9년 전 여름을 마지막으로 자신의 블로그를 갱신하지 않았다. 2008년 6월 4일. 피터가 입국한 것은 8년 전 겨울이었다. 2009년 1월 14일. 아무도 그 이전에 피터가 누구였는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몰랐다. 글을 쓰고, 등단하고, 출판하고, 상을 받았지만 아무도 피터를 알지 못했다. 피터는 정말 내게 말한 대로 베녜라가 맞을까. 아니면, 그의 글들을 훔친 것일까. 피터의 독창성과 베녜라의 독창성이 우연하게도 같은 방향을 향했을 가능성은 없는가. 같은 질문을 피터의 기억에도 던질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피터의 뇌에 담긴 교살의 기억은 피터 자신의 죽음인가. 아니면, 다른 누군가의 죽음인가. 전혀 다른 별개의 살인이 피터의 머릿속에 있었을지도 모른다.

 

2017년 3월 27일

류진혁이 탄 비행기는 셰레메티예보 공항에 착륙했다. 피터 또한 셰레메티예보에서 비행기를 탔을 것이다. 류진혁이 책을 뒤졌던 공항 서점의 가판대에는 검은 표지의 책이 쌓여 있었다. A Bleak White Night. <희고 푸른 밤>의 영역본이었다. 피터와 류진혁이 그 앞을 지나쳤을 때는 없었던 책일 거라고 나는 짐작했다.

그곳에서는 어디로든 갈 수 있었다. 그곳에서 한 번 더 비행기를 탈 수도, 차를 빌릴 수도, 기차표를 끊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류진혁은 단 한 곳으로 향했다. 그것만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곳을 가리키는 지도는 하나뿐이었다.

<희고 푸른 밤>의 첫 번째 단편은 노보시비르스크를 가로지르는 오브 강에서 주인공이 자살하면서 시작했다. 노보시비르스크. 그곳은 포툠킨스크와 닮아 있었다.

피터는 녜바 강이 포툠킨스크를 관통하면서 북극해로 흘러든다고 썼다. <붉은 벽의 괴물>의 4장은 녜바 강의 흐름을 따라 강변을 수색하는 경찰들을 묘사하면서 끝난다.

‘제복을 입은 경관들은 해 뜰 녘부터 해 질 녘까지 팔 한 짝, 다리 한 짝을 찾겠다고 강변을 헤집었다. 목줄에 매인 군견들은 자갈들 사이에서 풍겨오는 물비린내에서 인육의 냄새를 구분하려 애썼다. 의무감과 책임감으로 무장한 경관들 수십 명이 강변의 이쪽과 저쪽을 나란히 걷는 모습은 그 자체로 장관이었다. 노을이 지면서 붉게 물드는 강물은 그들의 모습을 한 폭의 인상화처럼 부각했다. 그러나 일몰은 니콜라이에게 경탄은커녕 짜증만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벌써 한밤의 추위가 옷깃을 에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수색을 오래 끌 수는 없었다. 니콜라이는 얼어붙은 하구로 자꾸만 올라가게 되는 이 상황의 이면에 도사리는 섬뜩한 죽음의 기운을 느꼈다. 세계와 역행하여 흐르는 이 강이 어쩌면 도시 전체를 죽음으로 이끄는 것은 아닌가 생각했다.’

 

2017년 3월 29일

‘어젯밤에 보았던 별들도 있을 것이었고, 오늘 새벽녘에 보았던 별들도 있을 것이었다. 수억 년 전에 그 별들이 부서지거나 사라진 것이 아니라면, 그가 지금 보고 있는 하늘에는 낯익은 별들이 무수히 많이 빛나고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사방을 가득 메운 칠흑 같은 어둠은 아무리 눈을 비벼 보아도 가시지 않았다.’

<거꾸로 떨어지는 우주>는 대략 그런 문장들로 시작했다. 나로서는 그 문장들이 피터가 마지막으로 쓴 문장들과 닮았는지 아닌지 확신할 수 없었다. 피터는 죽는 그 시점까지 베녜라를 베끼고 있었을 수도 있다. 그가 정말 베녜라였다면, 예전부터 생각하던 문장이 다시 떠올랐을 수도 있다. 루트비히 스미스가 <나무는 눈을 먹고 자란다>를 읽었다면 스물여덟 번째 유사점을 추가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피터가 의도적으로 그를 비꼬고 있다며 화를 냈을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을 수도 있다.

류진혁은 노보시비르스크에서 차를 빌렸다. 자동차 대여점 주인은 그를 기억하지 못했지만, 서류는 류진혁을 기억하고 있었다. 반납 기한은 열흘. 류진혁은 차를 빌린 지 정확히 9일 후에 직접 차를 반납했다. 그가 차를 타고 정확히 어디에 가려 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류진혁은 동쪽으로 향했다. 노보시비르스크와 케메로보 사이에는 직항 노선이 있다. 그러니 류진혁은 그 둘 사이의 어딘가로 향했다.

 

2017년 4월 7일

사진 속의 피터는 다른 세 명처럼 환하게 웃고 있었다.

이반 쿠즈네초프. 알렉세이 이바노프. 드미트리 자이체프. 그들이 나머지 셋이다. 누가 이반이고, 누가 알렉세이이고, 누가 드미트리인지는 모르겠다.

 

2017년 4월 13일

밤을 새운 피터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도 피로해 보였다. 처음 만났을 때처럼 다리를 많이 떨었다. 한기가 느껴져 잠을 깨니, 피터는 문을 열고 바깥에 나가 새벽을 보고 있었다. 아침을 먹으래도 별 반응이 없더니, 피터는 내게 어려운 부탁이라면서 말을 꺼냈다.

“사람 하나만 찾아줘.”

피터는 베녜라를 찾아달라고 했다.

 

2017년 4월 14일

루트비히 스미스는 <희고 푸른 밤>이 2차 세계 대전을 다루는 방식은 다른 전쟁 소설들과 다르다는 점을 지적했다. ‘다수의 전쟁 소설, 전쟁 영화들은 전쟁의 참상을 직접적으로 묘사하거나 폭력의 여진을 겪는 사람들을 묘사함으로써 전쟁의 비극을 간접적으로 느껴지게끔 한다. 그러나 <희고 푸른 밤>은 전쟁과 전투의 중심에 있어야 할 군인을 화자로 내세우면서도 전쟁의 폭력성은 묘사하지 않는다. 폭음과 총성을 묘사하는 문장은 끊임없이 화자와 전쟁을 떨어뜨려 놓는다. 수십, 수백만 명이 죽은 전쟁의 폭력은 화자와는 완전히 무관한 것처럼 그려진다. 다만, 그것의 극도로 축소되고 추상화된 형태의 폭력이 소설의 말미에 짧게, 그러나 극적으로, 제시될 뿐이다.’

그리고 루트비히 스미스는 <희고 푸른 밤>을 인용했다.

‘그는 몸부림쳤다. 진동으로, 떨림으로 나는 알 수 있었다. 하필 죽기 직전에서야 깨어난 그는 살고자 했다. 살기 위해 몸을 데웠다. 군화가, 단추가 콘크리트 바닥을 내리쳤다. 온 지하실이 무너질 듯이 울렸다. 총성과 폭발음에도 끄떡없던 어둠이 쪼개지고 부서질 것만 같았다. 그래서 나는 그의 얼굴을 더욱 깊이 껴안았다. 아예 베개 위를 몸으로 감쌌다. 심장 근처에서 헐떡이는 그의 숨결이 느껴졌다. 삶을 바라는 뜨거운 호흡이 느껴졌다. 그의 몸부림이 잦아들고 나서야, 나는 질식하는 듯이 넘어가는 숨을 마침내 고를 수 있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이반 쿠즈네초프의 글에서도 등장한다. <분노와 소리>에서 푸른색은 단순히 러시아의 추운 겨울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희고 푸른 밤>에서의 푸른색이 새벽의 하늘빛과 어둠에 익숙해진 미하일 이병의 시야, 그리고 삶과 죽음의 경계, 소련군과 독일군의 경계, 전선이나 포위망 같은 ‘경계선’의 이미지를 포괄적으로 제시한다고 설명한 루트비히 스미스의 말처럼, 푸른색은 <분노와 소리>에서도 유사하게 기능한다. 루트비히 스미스가 <희고 푸른 밤>의 영문 제목으로 정해진 ‘A Bleak White Night’를 비판한 이유도 맥을 같이 한다.

 

2017년 4월 16일

날짜를 쓴다는 걸 깜빡했다. 몇 개는 기억이 났지만, 나머지는 정확하지 않다. 기억이 점점 모호해진다.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이제 절반 조금 덜 남았다.

 

2017년 4월 20일

꿈을 꿨다. 사진 속의 누군가를 죽이고 있었다. 목을 졸랐는데, 그 사람 머리에서는 피가 났다.

알렉세이 이바노프와 드미트리 자이체프는 종적을 감췄고, 이반 쿠즈네초프는 2008년 6월 9일 사망했다. 사인은 사고사. 나는 사진을 보여줬다. 남자는 얼굴은 모른다고 했다. 그런데 어떤 소문을 들은 기억이 있다고 했다.

“살해당한 거래.”

피터의 머릿속에 있던 기억은 이때의 기억이었을지도 모른다.

 

2017년 4월 22일

류도비크 정 박사는 <괴물의 생애주기>가 묘사한 람찬-필립스 요법은 과학적 고증은 충실하나, 소설에 나타난 것과 같은 응용 방식이 실제로 어떠할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

“람찬-필립스 요법은 신경 발생 코드가 개체별로 고유하다는 가정에서 출발합니다. 요법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신경 조직을 물에 용해된 상태로 섭취하는 거지만, 뇌에서 그 기억을 재생하도록 유도하는 것도 필수적이에요. 광반응적인 자극을 주는 게 가장 확실하기는 하지만, 재생시키고자 하는 기억을 반복하는 행위라던가, 유사한 자극을 주는 것도 도움이 됩니다. 물론, 시간이야 걸리겠지만 가만히 둬도 재생이 되긴 해요. 어차피 원래 있던 것을 절단한 것이니 신경 코드 배열 자체는 기존 순서대로 형성되니까요. 하지만, 다른 사람의 뇌는, 글쎄요. 사례가 없어서. 다만, 코드 배열 자체가 섭취자와는 다를 테니, 섭취자의 기존 배열과 섞일 가능성도 있겠죠. 그때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겠네요. 간단하게, 뇌를 도서관으로 비유해보죠. 이 대학 도서관의 책을 전부 다른 도서관으로 옮긴다고 생각해 보세요. 분류체계는 두 도서관이 같을 테니까 책들은 같은 카테고리에 묶이겠죠. 하지만, 책의 순서는 달라지겠죠.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이 원래는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옆에 있었다가, 옮기고 나면 <절망> 옆에 있는 식이죠. 더 세밀한 규칙이 있다면 도스토옙스키의 책이 한 책장에 모일 수는 있겠지만, 여전히 순서는 뒤죽박죽일 겁니다. 그런 상황이 뇌에서 벌어진다면, 최대한 낙관적으로 생각하더라도, 사람 하나가 완전히 바뀌어버릴 겁니다.”

 

2017년 4월 25일

노인은 사진 속 남자를 가리키면서 말했다.

“얘가 드미트리요.”

드미트리가 누군지 알고 있다면, 이반이 누군지, 알렉세이가 누군지도 알고 있겠지. 이제 노인의 이름만 알아내면 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피터 메나드의 이름으로 한국으로 건너간 사람이 누구인가다. 이반 쿠즈네초프인가. 아니면 다른 누군가인가.

 

2017년 5월 3일

루트비히 스미스는 내게 답신을 보냈다. 원고는 아직 검토 중이지만 이반 쿠즈네초프가 베녜라일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타일을 까는 남자>에서 타일에 두 가지 다른 색을 칠하는 것과 <희고 푸른 밤>에서 웃옷은 독일 군복을, 바지는 소련 군복을 입은 부상병은 닮아 있어요. 두 가지 모두 화자에게 불확실성과 모호성으로 인한 공포를 주는 장치로 작용하죠. 그리고 그 공포는 화자를 살인으로 유도해요. 베녜라의 가장 큰 특성이죠. 이중성에 대한 강박적인 수준의 공포. 베녜라의 작업은 두 가능한 상황을 하나로 줄이는 시도로 요약할 수 있어요. 문제는 베녜라 자신도 그것이 가능하지 않다고 여긴다는 점에 있죠. 타일이 빨간색인지 파란색인지, 부상병이 아군인지 적군인지 도무지 구분할 수 없는 거예요. 그걸 구분하려면 지하실을 뛰쳐나가서 다시 폭격과 총탄에 죽을 각오를 해야 하고, 폭행당할 각오를 해야 하죠. 그러나 화자는 그럴 능력도 없고, 용기도 부족해요. 게다가, 그런 위험을 무릅쓰고 무언가를 한다는 건 무의미하다는 허무주의까지 기저에 깔려 있어요. 그렇게 세계를 제한하기 때문에 화자는 두 가능성 가운데 하나를 선뜻 긍정할 수 없어요. 그래서 파괴를 선택하는 거죠. 둘 모두를 없애버리는 거예요.’

 

2017년 5월 15일

피터는 살려달라고 썼다, 자신은 사람을 죽이지 않았다고 썼다. 피터에게 조금은 더 신경을 썼어야 했다. 자신이 베녜라라고 말한 것도 결국 도와달라는 표시였다. 믿어달라는 거였다. 그러나 나는 외면했다. 내가 죽인 것이나 다름없다. 내가 죽인 것이다.

 

2017년 5월 17일

유리 노비코프. 그가 사진을 보면서 드미트리를 짚어냈다.

 

2017년 5월 18일

유리 노비코프는 노보시비르스크의 요양원에 있었다. 파킨슨이었다. 그의 딸은 그가 나와 만나는 것을 불편해했다.

 

2017년 5월 20일

“수요일에 와요. 그날 뵈러 가죠.”

마리나 노비코바 씨는 내키지 않아 했지만, 결국 허락했다.

지갑을 잃어버린 줄 알고 놀랐다. 오른쪽 주머니에 있었다. 왜 거기 넣어둔 건지 기억나지 않는다.

 

2017년 5월 25일

나는 서로 어깨동무하고 웃는 4명 가운데 한 명을 가리키면서 물었다. 누가 피터 메나드냐고. 내가 짚은 사진 속의 그 사람은 다른 누구보다도 내가 여태껏 피터라고 부르던 사람과 닮아 있었다.

“아냐. 그 친구는 바냐. 이반 알렉세예비치.”

노인은 고개를 저으며 다른 하나를 가리켰다.

“얘가 피터요. 미국 놈이었는데, 애들이랑 친했어. 애들은 이반이랑 피터 둘을 묶어서 카료, 카료, 하고 불렀지.”

 

2017년 5월 29일

우리 피댜. 우리 피댜.

걱정하지 마. 내가 널 저녁 하늘로 돌려보내 줄게.

 

후기

이 소설을 처음 구상하기 시작했을 때, 나는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 1부를 읽고 있었지만, 직접적인 동기를 제공한 것은 피에르 메나르의 <돈키호테>를 다룬 평론이었다. <돈키호테>의 9장에 있는 이 문장-‘진리’의 어머니는 역사이자 시간의 적이며, 행위들의 창고이자 과거의 증인이며, 현재에 대한 표본이자 조언자고, 미래에 대한 상담자다.-을 읽는 순간, 언젠가 한 번 읽었던 것만 같은 기시감에 빠진 것이다. 나는 어느 잡지의 홈페이지에 게재된 평론에서 그 문장을 읽었다는 사실을 기억해냈고, 그래서 그 홈페이지의 기고문 카테고리에 있는 모든 글을 뒤졌으나 그 글은 찾지 못했다. 글을 쓴 평론가가 글을 지워버린 것인지, 아니면 홈페이지를 재단장하느라 누락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내 공책에는 그 평론을 읽으면서 베껴 둔 부분과 날짜가 명확하게 쓰여 있었다.

‘그가 원작을 기계적으로 옮겨 쓰는 것을 목표로 삼지 않았다는 사실은 덧붙일 필요가 없다. 그의 경탄스러운 야심은 미겔 데 세르반테스의 작품과 모든 단어와 모든 행이 완전히 일치하는 몇 페이지를 만들어 내는 것이었다.’

이 문장을 다시 곱씹어보고 나서, 나는 내가 이 문장의 의미론적 역을 실현할 수 있는 특수한 위치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요컨대, 하나의 텍스트를 통해서 그 텍스트로부터 분화된 두 창작자, 서로 구분되는 작가들을 만들어 낸다는 계획을 떠올린 것이다.

이 소설을 구상할 때 가장 깊이 생각했던 것은 두 유형(有形)의 작가를 실제로 만들어 내는 방법이었다. 그 두 작가는 소설 속에서 등장하고 이야기를 이끄는 것과 별개로, 독자의 세계에, 그리고 나의 세계에 실존하는 이들로 받아들여져야만 했다. 그것을 실현하려면 내가 기존에 소설을 쓰던 방식 이상의 행위와 작업이 요구된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실제로, 이 소설을 쓰고자 나는 일곱 편의 작품을 미리 써내는 고된 노동을 거쳐야만 했다. 그리고 그 방법은 유효했다. 하나의 개인을 구성하기 위해서는 수십 가지의 복잡한 작업과 머리 아픈 이론이 필요하겠지만, 하나의 작가를 만드는 데는 몇 편의 소설이라면 충분하다.

먼저, 이 텍스트에, 비록 후반부에 부정될지라도, 일기의 형식을 부여한 이유부터 해설하는 것이 독자들의 이해에 도움이 되리라 본다. 가장 큰 이유는 물론 텍스트 전체에 사실성을 부여하는 것이었다. 일기란 기본적으로 주관적이되, 원초적으로는 기록의 형태를 띤다. 일기에 적힌 것이 고차원적인 언어를 형용할 줄 모르는 유아의 단순한 감정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사실을 적시한 것은 아니라고 비판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그것이 거짓된 텍스트이건 그렇지 않건 그 형식 때문에 필연적으로, 그리고 선제적으로 사실성에 대한 검증이 요구된다. 그리고 그것을 검증할 수 없는 위치에 있는, 이 글을 처음 읽는 독자는 그것을 무턱대고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읽어가면서 천천히 검토하게 된다. 말하자면, 독자는 허구적인 텍스트를 읽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기록물이나 역사서를 보듯이 이 소설을 읽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 이유는 다소 사소하지만 여전히 중요하다. 앞서 언급한 효과, 즉, 독자가 이 텍스트 전체를 사실적인 기록물로 읽게 되는 효과를 완전히 뒤집을 수 있는 것 또한 이 기록을 도대체 믿을 수 없는 의심 요소가 등장할 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요소는 당연하게도, 기록물로써의 형식을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록물로써의 형식에 그 어떤 문장보다도 충실한 것이어야 했다. 그럼으로써, 그 사소한 문장 하나가 어디에서부터가 사실을 기록한 것이고 어디서부터가 거짓된 것인지, 무엇이 먼저 쓰인 것이고 무엇이 나중에 기입된 것인지 독자를 혼란에 빠뜨리는 것이다.

소설의 서두를 고틀롭 프레게의 논문에서 인용한 문구로 시작한 것 또한, 그러니, 그저 허황된 것은 아니었다. 이 인용문은 소설의 구조 전체를 드러내는 것이면서, 또한 숨기는 것이기도 하다. 프레게가 지적한 ‘저녁별’과 ‘새벽별’의 대립점은 결국 단일한 지시체에 대한 상이한 언어표현에서 기인한다. 이러한 뜻과 지시체의 구분은 소설에서 드러나는 것과 같이, 이반 쿠즈네초프와 피터 메나드, 그리고 베녜라의 구분을 비유한다. 그리하여 최종적으로는 베녜라라는, 비의도적이지만, 다분히 장치적인 가명의 지시체가 무엇인지를 질문한다.

그렇기 때문에 피터 메나드라는 가상과 피에르 메나르라는 실존의 무관함은 보르헤스라는 가상의 작가를 내가 읽었지만 지금은 찾을 수 없는 그 평론의 작가로 만드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만 했다. 그리고 이러한 대립 구도가 일기의 서두에-도저히 일기의 일부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문장의 형태로-제시되면서, 역설적이게도, 피에르 메나르와 피터 메나드의 유관함이 암시된다. 세르반테스의 작품을 완벽하게 재현한 피에르 메나르와 베녜라와는 전혀 다른 텍스트를 써냄으로써 베녜라의 표절이라고 비판받는 피터 메나드는 전자는 실존하고 재현한 원본이라는 점에서, 후자는 가상의 독창적인 복제물이라는 점에서 서로의 완벽한 안티테제로 기능한다. 그것은 초반부의 화자가 제시한 <나무는 눈을 먹고 자란다>의 서두가 <거꾸로 떨어지는 우주>의 패러디의 형태로 나타나는 이유이기도 하다. 피터 메나드라는 인물에게 배정된 비실재성, 허구성이 피에르 메나르처럼 실재하는 베녜라라는 가명의 소설가에 의해 지탱됨으로써 베녜라와 그 텍스트가 갖는 실재성으로 치환된다. 이를 통해, 피터 메나드는 오히려 그 무엇보다도 사실적인 것으로 변모한다.

‘이반 쿠즈네초프’라는 이름 또한 상징적이다. 이반 쿠즈네초프는, 어원을 따져본다면 이반이 사도 요한의 변형이고, Кузнец는 러시아어로 대장장이를 의미하니, 영어의 John Smith와 같다. 피터 메나드의 모어로 여겨지는 영어와 베녜라의 모어인 러시아어의 대립은 이 이름에 담긴 두 언어의 대칭성도 함의한다. John은, 이반이 러시아어에서 그렇듯이, 영어에서 가장 흔한 이름 가운데 하나이다. Smith 또한 영어권 사람들에게 가장 흔한 성씨로 인식된다. 쿠즈네초프 또한 가장 빈번하게 나타나는 러시아인의 성씨이다. 소설의 말미에서 화자는 마침내 이반 쿠즈네초프라는 베녜라의 유력한 후보를 발굴해 내지만, 이 이름이 갖는 보편성은 이반 쿠즈네초프를 어떤 특수한 인물이 아니라 평범하고 불특정한 개인으로 상징화한다. 그러므로 이 시점에서, 화자는 다시금 개별성, 특수성을 지닌 피터 메나드로 회귀한다. 모두가 베녜라임을 받아들이는 대신, 가상적인 누군가를 끊임없이 베녜라의 지시체로 상정할 수밖에 없는 상태에 도달해버린 것이다.

그 외에도 이 텍스트에 부여한 장치는 몇 개 더 있다. 특히, 2008년 6월 9일과 2009년 1월 14일, 2009년 3월 5일은 그저 무작위적으로 선택된 우연한 날짜가 아니다. 2008년 6월 9일은 금성이 외합의 자리에 있었던 날이고, 2009년 1월 14일은 동방 최대 이각, 2009년 3월 5일은 역행을 시작하는 날짜이다. 외합에서 동방 최대 이각으로의 이행은 결국 내합으로 가는, 베녜라의 정체가 숨겨지고 오인이 발생하는 순간으로의 이행을 암시하며, 류진혁의 역행은 그러한 위상변화를 뒤집어 내는 단서를 의미하면서도 류진혁의 러시아행은 필연적으로 조금 더 거대한 흐름에서는 무의미하고 무기력해질 것임을 암시한다.

누가 베네라인가. 이 소설을 관통하는 질문에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이 질문에 대답하는 것이야말로 이 소설의 본절적인 창작 동기를 이해하는 것이기도 하다. 혹자는 피터 메나드라고 답할지도 모른다. 다른 누군가는 이반 쿠즈네초프라고 말할 것이다. 자, 이제 피에르 메나르로 돌아가보자. 피에르 메나르의 <돈키호테>는 어떻게 심원한 의미를 가질 수 있는가. 피에르 메나르는 <돈키호테>의 저자이지만, <돈키호테>를 쓰지 않을 수 있었다. 세르반테스가 그러했던 것처럼. 그러므로, 세르반테스는 피에르 메나르가 아닐 수 있고, 실제로도 세르반테스는 피에르 메나르가 아니었다. 둘 다 <돈키호테>의 저자임에도 말이다. 이처럼, 피터 메나드와 이반 쿠즈네초프는 다르다. 피터 메나드는 <붉은 벽의 괴물>, <총과 총성>, <전 인류의 행복>, <나무는 눈을 먹고 자란다>의 저자이고, 이반 쿠즈네초프는 <타일을 까는 남자>, <분노와 소리>를 썼다. 둘은 다르다. 둘 모두 베녜라가 될 수 있다. 그러나, 베녜라는 그 무엇보다도 <희고 푸른 밤>의 저자이다. 그리고 <희고 푸른 밤>의 저자가 아니라면 누구도 베녜라가 아니다. 베녜라와 <희고 푸른 밤>의 저자 사이에 놓인 등호의 필연성은 명확하다. 그러니 누가 베녜라인지도 자명하다.

이 소설을 집필하기까지 도움을 준 사람들을 일일이 열거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그것은 이 후기의 취지와도 맞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그들 모두의 이름은 책의 맨 뒤로 넘긴다. 그러나, 단 한 사람, 베녜라와 피터 메나드라는 두 이름으로 출간된 저작물에서 스물일곱 가지의 유사점을 찾아준 루트비히 스미스 씨에게는 이 후기를 빌어 감사 인사를 전한다.

2019년 1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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