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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고양이를 위한 예의

2003.09.24 02:5009.24

고양이를 위한 예의




아침 아홉 시가 가까운 시각의 신촌 거리는 즐겁다. 어떻게 즐겁냐고 하면 대답하기 곤란하지만 하여튼 즐겁다. 말하자면, 내려다 볼 거리가 많다는 의미다. 지나치게 사람이 많을 시각도 아니고 상점들은 아직 문을 열지 않은 곳이 많아서 추석날 같은 느낌까지 준다. 쓰레기들은 장식품처럼 길바닥에 붙어 있고 사람들은 바쁘게 그 위를 오간다. 가방을 매거나 책을 안거나 하여 학생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일단의 인간들이 시계를 들여다보면서 뛰기 시작하면, 그것은 여덟시 오십 분을 지났다는 의미다. 털을 고르면서 가만히 사람들의 파도를 지켜보던 나는 그 즈음되면 게으르고 느긋한 기지개를 쭉 펴고 몸을 일으킨다.
나는, 고양이다. 신촌에 살고 있는.

"고양이 씨! 안녕! 오늘도 정확하네!"

천천히 걸어 술집과 찻집, 음식점으로 둘러싸인 번쩍번쩍한 간판 사이로 들어선다. 아침이라 네온사인 자리는 텅 비어 있고, 뿌옇게 먼지가 쌓여 있고, 간혹은 깨져 있다. 아침, 문을 닫은 가게 위에 덩그마니 달린 간판은 꽤 초라하지만 고양이들은 그런 것을 결코 비웃는 일이 없다. 간판은 간판인 것이다. 고기를 파는 가게 옆 쪽 좁은 계단을 오르면 비뚤비뚤 어린애가 그린 것 같은 언덕이 나오고 옹기종기 작은 크기의 집들이 붙어 있다. 내가 아침마다 찾아 드는 파란 대문 집은 거기에 있다.

"당연하지, 미도리 여자."
"또, 또, 미도리 여자라고 부르네. 관둬, 그런 것. 나는 엄연히 정희진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단 말야."
"알았어, 미도리 여자."

파란 대문 집의 구석 방에, 미도리 여자가 한 명 살고 있다. 내가 찾아오는 이유도 그녀가 미도리 여자이기 때문이고, 미도리 여자는 언제나 고양이에게 친절하다.

"얼른 먹어. 요 전날에 고양이 키우는 친구 만났거든. 그 집 고양이는 위스카스 거는 절대 안 먹는다더라. 사 놓은 거 아까워서 남 주려구 한 대서 내가 몇 개 달라고 그랬어."

장황하게 늘어놓으면서 큼지막한 캔 하나를 뚝 따서 내 놓는다. 미도리 여자는 고양이에게 친절하다. 그래서 고양이들도 미도리 여자를 좋아한다. 먹을 것을 주면, 고양이에게 사랑 받을 수 있다. 그것은 당연하고 간단한 이치이며 어떤 문제점도 없는 공평한 것이다.

"맛있니?"
"으음. 괜찮은데. 많이 얻어 왔어?"
"서너 개쯤? 그거 닭이래. 연어랑, 또 뭐 있던데. 뭐 있더라? 하여간 고양인 식성이 까다로워서 먹는 것만 먹는다구 그러던데. 다행이다, 잘 먹어서."
"집에서 크는 고양이들이야, 따뜻한 이불에 등 지지고 골골 소리 몇 번 서비스 해 주면 알아서 먹을 걸 가져다 바치니까. 고양이 족속으로는 그렇게 사는 게 그만이긴 한데, 바깥에 난 신세니까 적당히 타협도 해 줘야지. 고양이로서 그 정도 아량은 있어야 세상 산단 말야."

나는 거들먹거렸다. 미도리 여자는 웃었다. 아직도 졸린지, 웃다 말고 하품을 하고 몸을 일으켜 기지개를 편다.

"배꼽."
"...고양이 주제에 별 걸 다 보는군. 나 조모임 있어서 일찍 가 봐야돼."
"무슨 모임을 이렇게 아침에 하는거야?"
"낸들 아나. 워낙들 바쁘거든, 요즘은."

미도리 여자는 집 안으로 들어가면서 중얼거린다. 나는 캔을 다 비우고 입맛을 다셨다. 하지만 더 주지는 않을 거다.

"오늘도 이름 안 가르쳐 주는 거야, 고양이 씨?"
"고양인 이름 가르쳐 주지 않아. 미도리 여자랑 달라."
"피이. 그래도 벌써 일 년짼데. 고양이 씬 나한테 빚이 있잖아."
"빚이라니?"
"일 년 전에, 고양이 씨가 나타나지만 않았어도 난 내가 미도리 여자란 거 모르고 살 수 있었어."
"알아서 나빠?"
"나쁜 건 아니지만."

미도리 여자는 화장을 하지 않는다. 물 같은 것을 바르고 끈적한 것을 또 바르고 뺨을 탁탁 쳐 보이고는 그냥 바깥으로 나온다. 머리는 아직도 산발이다. 긴 검정색 면 바지에 몸을 부벼 주려다 멀찍이 물러서고 만다. 흰 털로 범벅이 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라, 부비려고 다가서면 가차없이 걷어차기 때문이다.

"미도리 여자라는 게 고양일 걷어차고. 자격 없어."
"응, 자격 없으면 와서 몰수 해 가라. 누가 미도리 여자 한댔나?"
"미도리 여잔 하기 싫어도 해야 돼. 고양이 하기 싫어도 고양이 하는 것처럼."
"흥흥. 몰라, 미도리 여자 같은 거. 고양이들 말이 다 들리는 거 빼고 달라진 것도 없잖아. 괜히 아침마다 엉뚱하게 고양이 밥이나 차리고 말야."
"되게 투덜거리네. 그렇게 나오면 얘기 안 해줄 거야."
"무슨 얘기?"

미도리 여자가 걸음을 늦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큰길로 나서면 따라 다니기 곤란해지기 때문에 골목을 돌 때쯤 나는 내 갈 길을 가곤 했다.

"어, 나와도 괜찮아?"
"......상관없어."
"그런데 무슨 얘기?"
"미도리 여자, 곧 미도리 여자의 담당이 바뀔 거야."
"내 담당?"

미도리 여자는 인상을 써 보였다. 오렌지 색으로 염색한 곱슬머리가 갸웃거리는 이마를 타고 아래로 찰랑거린다. 나는 고개를 들고 냐옹, 소리를 냈다.

"담당이 바뀌다니, 고양이 주제에 그런 귀찮고 체계적인 일 따윌 한단 말야? 말도 안 돼."
"어쩔 수 없어. 나는 시간이 다 되어 버렸으니까. 비가 오면-"
"......비가 오면?"

나는 잠시 주저한다. 고양이는 이런 일에 본디 주저하는 족속은 아니다. 다만 미도리 여자나 희라기의 앞에서, 고양이는 이따금 부끄럼을 타는 충성스러운 강아지 같이 굴 때가 있다.

"비가 오면, 무지개가 뜨잖아."
"오고 나면 뜨는 거지. 바보 고양이."
"하여튼 뜨잖아. 무지개 뜨면 담당이 바뀐단 말야. 알았어?"
"그런 법이 있는 줄은 몰랐네. 그치만 비 온다고 다 무지개 뜨나? 그거 어떻게 알고 미리 말하는 거야?"
"그거야-"

나는 말을 끊고, 냐옹 소리를 낸다. 돌아서서 살래살래 꼬리를 흔들어 주었다.

"고양이한테 너무 많은 걸 물으면 못써. 그러다 고양이한테 버림받는단 말이지, 바보 미도리 여자."
"버림받긴, 고양이 씨 같은 바보 고양이한테 버림받는 미도리 여자가 어디에 있어? 당장 나 아니면 고양이 씨 아침은 누가 챙겨 줄까나?"
"위스카스 캔, 몇 개 남았다고 했지?"

미도리 여자는 생각할 여유 없이, 두 개, 하고 말했다.

"음, 그럼 그걸 다 먹고 담당 바뀌겠네."

하늘을 한 번 보고 말했다. 미도리 여자가 재차 물었다. 그러니까, 담당이, 왜 바뀌는 거야, 하고. 나는 냐옹냐옹, 사뿐하게 뛰어 건물 옆 쓰레기통을 타고 올랐다. 바지런히 발을 놀려 편한 자리를 찾아낸다.

"자꾸 캐물으면 못써, 고양이에게. 아무리 미도리 여자라고 해도 안 된다구. 알았어?"
"모르겠어. 흥."
"......지각일텐데, 미도리 여자."
"아!"

뭐가 아, 냐? 하고 궁시렁대며 놀려 주려는데 미도리 여자는 정신 없이 달린다. 군청색 책가방이 여자의 등에서 덜렁거린다.

"저 여자야? 내가 맡을 미도리 여자."
"언제 온 거야?"
"오긴 누가 와. 쭉 이 자리에 있었다구."
"흐음."

후임 녀석은 이제 두 살 된 암컷이다. 삼색의 털을 가지고 있는데 어울림이 그만이라 누구라도 감탄을 할 만큼 멋있다. 저 미도리 여자라면 보는 즉시 두 팔을 뻗고 괴성을 지르면서 달려들고 말 게 뻔하다. 우와 멋있어, 우와 굉장해, 우와아아 정말 예쁜 삼색 냥이 마마다, 하면서.

"이봐 삼색, 수칙은 알지?"
"삼색이라니. 나도 어엿하게 이름이 있어."
"따지고 들지 마. 내게 알려 줘 봤자잖아."
"뭐야, 그 태도는. 고양이답지 못하군."
"뭐가 고양이답지 못하다는 거야. 어차피 난 고양이니까, 개다울 수는 없잖아."
"기껏 무지개 같은 걸 무서워하는 거야? 그런 걸로 해서 허무주의에 빠지다니, 너 따위가 담당한 미도리 여자가 불쌍해. 그런 식이면 후임 넘기기 전에 희라기한테 여잘 뺏기고 말 거야."

삼색의 목소리는 새되고, 직설적이고, 강했다. 듣고 있는 것만으로도 목덜미 털이 오싹하다. 좋은 기백이야, 하고 칭찬해 줬더니 캬르릉거린다.

"대체 어떻게 살아온 거야? 바보. 숙녀에게 함부로 칭찬 따윌 하다니 멍청이! 쪼다! 강아지들이나 듣고 좋아할 칭찬을!"
"...아, 미안. 본의가 아니었어. 강아지나 듣고 좋아할 말이라니 그렇게 모욕적일 거라고는......"
"됐어. 여하간에 수칙 같은 거 나도 잘 아니까 노파심 부릴 필요 없어. 고양이답지 않아 보이니까."

삼색이 부루퉁하니 답하고 몸을 일으켰다. 날이 맑고 깨끗해서 흰 구름이 뭉쳐 다녔다. 푸른 하늘을 바탕으로 크레파스를 문질러 놓은 것 같다.

".....크레파스?"
"본 적 없어? 저쪽 음식점 앞에 붙은 포스터 색감 같은 건데, 보러 갈까?"
"멀지 않으면 가지. 멀면 안 가."
"멀지않아. 가깝다구."

나는 삼색의 앞으로 껑충 뛰어 내렸다. 삼색은 주저하며 따라 뛰었다. 붉은 보도블록만을 밟고 달려 건물들을 지나쳤다. 삼색은 푸른 보도블록만을 밟으며 따라 달렸다. 웃었다. 재미있잖아, 이런 것. 나는 냐옹 소리를 내었다.
하루가 지나갔다.
이틀이 지나가고, 사흘이 지나가겠지. 고양이에게 시간은 인간과는 다른 무게와 속도로 지나친다. 하루와 이틀 같은 건 바람의 정수리에 얹혀 지나는 나뭇잎처럼 아름답고 하찮다.
하지만 비가 오고, 젖은 바닥 위로 설익은 태양이 무지개를 바라보는 때가 오면, 그러면 고양이들의 시간은 길게 기지개를 펴면서 아주 천천히-




                        * * *




"......어디에 갔어?"

미도리 여자는 마침내 물었다. 미도리 여자들의 질긴 인내심도 거기까지였던 듯, 그녀의 얼굴은 고통스럽게 일그러져 있었다. 삼색은 뭘? 하는 표정으로 그녀를 올려다 보았다. 둥그스름한 엉덩이에 매달린 꼬리가 바람을 쳐냈다.

"모르는 척 하지 말아. 전에 날 담당했던 녀석 말이야. 고양이 씨."
"고양이 씨라니. 나는 당신을 그렇게 부르지 않아, 정희진. 이름도 알아두지 않았으면서 그립다느니 보고 싶다느니 그런 낯간지러운 소릴 하진 않겠지?"
"알아두고 싶지 않았던 거 아니야! 알려 달라고 했는데, 알려주지 않았어. 알려주지도 않고 치사하게 사라져 버리다니, 미도리 여자로 살게 만든 게 누군데, 이런 식으로-"
"고양이는 원래 작별 인사를 하지 않아."

삼색이 말했다.

"알고 있잖아? 미도리 여자."

미도리 여자, 정희진은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분노한 표정으로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수채 물감으로 흐릿하게 칠 해 놓은 것처럼 투명한 푸른빛 하늘이었다. 구름은 물에 풀린 것처럼 깔려 하늘 빛깔을 방해하지 않았다. 바람은 없다. 머리카락이 얼굴 위로 날리는 일도 없다. 희진은 잠옷바람으로 방문 앞에 서 있었다. 하늘을 보면서, 발에는 흰색 줄무늬가 세 개 있는 '쓰레빠'를 신고, 머리는 빗지 않았다. 삼색 고양이는 희진이 내민 스테인리스 그릇에 든 우유를 꼭 한 입만 핥았다.

전임은 뚱뚱하고, 흰털을 가진, 커다란 고양이였다. 꼬리는 둔해 보여도 우아하게 움직이며 바람을 가를 줄 알고 걸음걸이는 사랑스러웠다. 특히 아름다운 것은 두 개의 눈동자, 한 개는 요요히 초록빛을 띄고 있는데 다른 쪽은 새파란 색이었다. 눈을 깜박이며 희진을 올려다볼 때 희진은 자신이 미도리 여자가 된 것이 기쁘다고 생각하곤 했다. 그런데 그는, 이제 오지 않는다. 담당이 바뀐다는 말을 하고 사흘 뒤에는 사라져서, 다시는 오지 않는다.

"하지만 일 주일이나 되었는데."

힘없이 중얼거렸다. 삼색은 몸을 길게 뻗었다가,

"오늘이나 내일쯤, 무지개가 뜰테니까."

킁킁, 냄새를 맡는 시늉을 하면서 말했다. 무심한 목소리였다. 희진은 돌아서려는 삼색을 냉큼 안아 올렸다. 삼색이 버둥댔다.

"무슨 짓이야! 정희진! 고양이를 허락 없이 안아 올리다니, 어떻게 미도리 여자가 이런 짓을 하는 거야!"
"무지개가 뭔데, 무슨 의미인데! 말해 줘. 알려 줘. 그러면 내려 줄게."
"싫어. 안 돼. 누구도 고양이에게 행동을 강요할 수 없어. 그건 고양이에게 폭력이야. 고문이야. 알고 있으면서 왜 이러는 거야, 정희진!"

삼색이 냉엄하게 세 번 불렀다.
정희진 정희진 정희진
희진은 삼색을 꼭 끌어안았다. 전임 고양이도 이렇게 안아 준 적이 없다. 터키석 색으로 빛나는 파랑 눈과 물 오른 개나리 이파리처럼 진초록을 띄운 오드 아이, 꿈에도 이따금씩 들여다보고 있었던 그 눈동자를 보면 충동처럼 안아주고 싶었다. 두 눈동자를 들여다보면서 안아 올려 입을 맞춰 보고 싶었다. 하염없이 들여다보면 쓸쓸하게 가슴이 막혀 와서, 안아 올려 담뿍 사랑하고 싶었다. 하지만 한 번도 그런 적은 없다. 허락 없이 안아 드는 것은 고양이에게는 큰 실례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희진은 중얼거렸다.
알려줘.
라고 말하며, 풍성하게 털이 돋은 삼색의 등에 볼을 파묻고 숨을 멈추었다.

"알려 줘. 미도리 여자란 걸 알고 싶지도 않은데, 찾아와서 덜컥 생각나게 해 버린 건 너희였잖아. 그러니까 이번에는 알려 줘야 해. 무지개가 뜨면, 어떻게 되는 거지? 응? 나는 어떻게 되는 거야?"
"너는."

삼색이 말했다.

"너는 달라지지 않아. 네게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으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모든 건 그에게 일어날 거야."
"그라면."
"그는 그. 그에게는 무지개가 손을 내밀 거야."

체념한 듯이, 삼색은 그렇게 말했다. 희진이 다시 의미를 물었지만 삼색은 고개를 휘휘 저어 대답하지 않았다.

"더 알려 주는 것은 예의에 어긋나."
"예의라니, 어째서."
"고양이에 대한 예의. 이건 중요한 일이야. 정중하게 그를 배려해 주고 싶다면, 정희진, 더 알고 싶어하지 말아 줘. 물론 너는 인간이니까 그럴 수 없을 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미도리 여자라면......"

희진은 삼색을 품에서 풀어놓았다. 삼색은 몸을 털어 내고 사뿐사뿐 뛰어 사라졌다.

수업에 들어가기엔 너무 늦은 시각이었다.
방 안으로 들어서서 발도 닦지 않고, 손도 씻지 않고, 곰팡내가 나는 이불 속으로 기어 들어 갔다. 분홍색 꽃이 커다랗게 서너 송이 그려진 연한 붉은 빛 이불에는 여러 가지 자욱이 남아 있었다. 누른 자국 검은 자국 푸른 자국이 남아 있었다. 희진은 머리카락 한 올도 바깥으로 내 놓지 않고 이불을 돌돌 감았다. 고치처럼 몸을 구부리고 오랫동안 잠들었다.
열이 났다.
스스로 피어 난 것처럼 깊은 곳에서 열이 올라 온 몸을 태워 놓았다. 희진은 아파서 울다가 잠에서 깼다. 꿈 속에서 아팠던 거라고 생각하며 몸을 꾸물거리는데 옴쭉달싹도 할 수 없을 만큼 아팠다. 희진은 큰 소리로 다시 울었다. 눈이 퉁퉁 부을 때까지 손으로 닦아 내지도 않고 울었다. 서럽고 괴로워서 울었다. 책상 위에 놓은 휴대전화가 몇 번 소리를 내었지만 받지 않았다.
바깥이 완전히 어두워진 다음에, 친구가 찾아와서 잠기지 않은 문을 열었다.

"병원에 가야지."

친구가 말했다.

"내일이면 나아."
"내일은 토요일이야."
"그러니까 괜찮아. 일요일이 지나면 나을 거야."
"약이라도 먹어야 해. 저녁은 먹은 거야?"

희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친구가 이불을 들췄다. 억지로 손을 잡아 당겼다.

"무지개가."
"응?"
"무지개가 떴어?"

친구가 눈을 허공에 두었다. 그리고 잠시 후에, 응답했다.
응. 떴어.
희진은 다시 이불을 뒤집어썼다.
알아 버렸어.

"뭘 알았다는 거야?"
"왜 아픈지 알아 버렸어. 괜찮아. 이제 곧 나을 테니까."
"......그래."
"...하지만 나빠. 나은 후에도 나는 괴롭고 슬플 거야. 정말로 나빠."
"뭐가 그렇게 나쁘다는 거야, 희진아."

희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친구는 희진이 다시 숨을 죽여가며 울기 시작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불 위로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 부분을 쓰다듬었다. 들먹들먹 하면서 울음을 흘리고 있었다.

다음 날, 삼색이 찾아왔다가 희진의 방문 앞을 어슬렁대다 돌아갔다.
느지막이 몸을 일으킨 희진이 문을 열고 슬리퍼에 발을 꿰었을 때, 하늘에서 빛나는 것이 떨어졌다. 희진은 빛나는 것에 손을 대었다. 한 움큼의 햇살처럼, 그것은 산산이 부서져 사방으로 흩어졌다. 겨울도 아닌데 숨을 불자 흰 숨이 솟았다. 희고 너울대는 숨이 하늘로 흐트러지고 그 끝을 찾아보느라 고개를 들었을 때 하늘 가득히 한 떼의 구름이 헤엄쳐 나갔다. 등이 푸른 생선 색으로 꿈틀대는 거대한 구름이었다. 희진은 손을 뻗었다. 아무도 그 광경을 보지 못했다. 푸른 생선 색 구름과 그 위에 올라탄 한 마리의 고양이를, 오직, 희진만이 보았다. 바다를 닮은 푸른 빛과, 그 심연 안에서도 결코 색을 잃지 않는 초록 빛의, 두 개 고운 보석이 하늘을 질러 날아가고 있었다. 바다 위로 몸을 솟구치는 고래처럼 진중하고 깊고 슬프고 오래된 울음소리가 나는 큰 구름 위에서 고양이는, 오드 아이의 눈을 달고, 영롱하게, 서 쪽으로 날아갔다. 무지개 다리를 건너 서 쪽으로.

무지개 다리를 건너 지평선의 끝으로 고양이는 떠난다.
비가 내리고, 개고, 무지개가 걸리는 날에.
결코 알지 못하도록 떠나는 것이, 죽는 것이, 사라지는 것이, 작별하는 것이, 그것이 고양이의 자존. 그리고 한 모금의 숨으로 향을 피우는 것이 미도리 여자의, 고양이를 위한 예의.

희진은 손을 하늘로 향한 채 오래도록 서 있었다.
아무 것도 잡히지 않았다. 청량한 한 줄기의 바람 뿐.
바야흐로 한 개의 계절이 시든다.



---------------

슬쩍 올려봅니다.
...뭐, 어차피 이상한 글이기는 하군요;_;
문장도 좀 엉망이고.
쓰는 사람도 대단히 덤덤했더랬습니다.
............
댓글 3
  • No Profile
    명비 03.09.24 03:18 댓글 수정 삭제
    깜짝 놀랐어요! 거울에서 미로냥 님 글을 읽게 되었네요.>.</
    읽는 내내 두근두근하고, 다 읽곤 무언가 아릿하고.
    정말이지 미로냥 님 글 읽을 때마다, 위로 받곤 한답니다. >.<;;
  • No Profile
    yunn 03.10.01 12:02 댓글 수정 삭제
    잘 먹었습니다 ^^
  • No Profile
    아무 10.03.30 10:22 댓글 수정 삭제
    우와 사랑스러워; 저도 어렸을 적부터 누군가 소원을 들어준다면 한 가지, '동물 식물과 내가 원할 때 대화가 가능했으면'이었습니다.
    ('내가 원할 때'라는 건, 그렇지 않다면 풀을 밟지도, 개미라도 밟을까 걸어다니지도 못할 테니까. 바퀴벌레 소리가 시끄러워 살 수도 없을테고.)
    부럽네요 미도리 여자와 고양이의 유대가. 잘 봤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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