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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백수다. 나는 무능한 인간이다. 나는 무엇을 해도 되는 일이 없는
인간이다. 나는 아무것도 특출나게 잘한다고 할 게 없는 인간이다.
나는 무엇에도 자신감을 갖지 못하는 인간이다. 나는 패배감에 젖어
사는 인간이다. 나는 패배자다. 나는 낙오자다. 나는 정말 무엇을 하며
앞으로 살아야 할지 막막하기만 하다...

내가 이렇게 나의 신세를 한탄하고 있을 때 내 앞에 누군가가 나타났
다. 그리고 그는 나에게 말했다.

  "너에게 이 세계가 아닌 다른 세계에서 살 수 있는 기회를 줄까?"

  "다른 세계?"

  "그래, 어떤 세계라도 좋지. 네가 좋아하는 환타지소설 속의 세계
같은 곳이라도 상관없지."

  "환타지소설속의 세계라.."

  "네가 원하기만 한다면, 나는 너를 그곳에서 살 수 있게 해줄 수
있지. 아, 오해하진 말도록. 나는 네가 그 세계에서 별로 만족하지
못한다면 다시 이 세계로 오도록 해줄 수도 있으니까."

  "그래.. 어차피 이 세계에서 이렇게 패배감에 젖어서 사느니 소설
같은 세계속에서 살아 보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그렇게 해줘. 음..
환타지 세계 중에서도 너무 딱딱한 세계 말고 그냥 우리나라에 한 때
유행했던 이계진입물 같은 데 나오는 느슨하고 엉성해 보이는 그런
세계로 해줘. 차라리 그런 세계가 스트레스 풀기엔 딱일 거 같애. 서
비스로 내가 그 세계에 가면 굉장한 힘을 얻는다는 뭐 그런 설정도
첨부되어 있으면 좋겠지."

  "오케이. 네 소원대로 그런 세계로 보내주지. 그리고 서비스로 부
탁한 것도 못 들어줄 것 없지. 이제 눈을 감아. 그리고 내가 셋을
센 다음 눈을 떠. 그러면 네 소원이 이루어져 있을 거야. 하나! 둘!
셋!.........."

나는 '셋'이란 말이 외쳐진 뒤 조심스레 눈을 떴고 과연 내 눈앞에는
다른 세계가 펼쳐져 있었다. 나는 아마도 마법과 검술에 특별한 재능
을 가진 듯했다. 나는 성큼성큼 이 이계의 숲속으로 걸어들어갔다.
그리고..  많은 시간이 흘렀다..

***  
  
내가 처음 이 세계에 도착했던 때로부터 어느덧 10년이 흘렀다.
어느 세계에서의 단위로 10년이냐고? 그런 거로 머리 아파할 필요
는 없다. 어차피 여기는 엉성한 세계니까. 똑같다고 보면 된다.
나는 현재 이 세계에서 마왕을 물리친 영웅으로 융숭한 대접을 받고
있다. 모든 사람들이 날 좋아하고 또 존경한다. 나에겐 생사고락을
함께 해온 동료들과 친구들이 있고 어여쁜 엘프 마누라와 하프엘프
자식들도  있다. 그렇다. 나는 참 행복하다. 나는 이 세계에서 최고로
잘 나가는 엘리트이며 패배감 같은 건 상상할 필요조차 없는 영웅
호걸이다. 나의 앞길에는 거칠 것 하나 없고 꽃길만이 기다리고 있
다...

여기쯤에서 좀 생각있는 독자들이라면 반전을 기대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행복하게 잘 사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 정말 중요
한 것을 잃고 있었다' 라든지 '앞길이 창창하게 보인 순간에 죽음
이나 배신이 찾아왔다'든지. 그래서 힘들어도 현실세계에서 열심
히 사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교훈을 얻는다는 다소 천편일률적이
기도 한 그런 결말을 기대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건 전혀 없다!
나는 너무나 행복하며 나는 내가 죽을 때까지 이 곳에 온 것을 전혀
후회하지 않게 된다. 그리고 내가 원래 살던 현실세계로 돌아가고
싶어하지도 않게 된다. 그리고 나는 눈을 감는다. 가족과 친구와
동료와 만인이 지켜보는 앞에서 성대한 국장이라도 치뤄진다.
그래서 나는 말할 수 있다. 내 생은 너무나 행복했다고. 정말 그 이름
모를 녀석이 내 앞에 나타났을 때, 그렇게 하겠다고 해서 다행이라
고. 그리고 내가 이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마침 그 녀석은 참으로
오랜만에 내 앞에 다시 나타나 이렇게 물었다. 이번엔 저번과 달리
존대말을 써서 말을 걸어왔다.

"참 행복해 보이시는 군요. 여기 오길 잘하셨죠?"

"물론입니다. 참 행복해요. 당신 말을 듣길 너무나 잘했습니다.
정말 당신께 고맙기 그지없어요."

"뭘요. 불행한 분들을 행복하게 해 드리는 일이 제 맡은바 소임일
따름입니다. 그렇게 행복하시다니 저도 기분이 참 좋네요. 앞으로도
계속 행복하시길 빌겠습니다."

  그는 무슨 서비스회사의 직원이라도 되듯 너무나 친절하게 말했고
나에게 이면에 숨겨진 요구같은 것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렇게 너
무나 순순하고 바보같기도 한 그를 보면서 나는 문득 그에게 한가지
묻고 싶어졌다.

"근데.. 말이죠. 대체 당신은 누굽니까? 당신이 처음 나타났을 때
도 묻고 싶었는데 묻지를 못했습니다. 대체 당신은 누구시죠?"

그러자 그는 알 수 없는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언제쯤이면 그걸 물어보실까 저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사실
저는 그냥 보잘 것 없는 식량조달업자라고 할 수 있죠.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식..량 조달업자요?"

  "예, 사실 제가 사는 세계의 사람들은 특수한 종류의 먹을 것을
필요로 합니다. 그 특수한 종류의 먹을 것이란 바로 '행복' 이라는
것이죠. 우리 세계의 사람들은 그 '행복'이란 음식 외에 다른 어떤
것도 먹을 수가 없답니다. 다른 것을 먹으면 곧 죽어버리고 오직
'행복'을 먹어야만 살 수 있죠. 그런데 행복이란 음식을 얻기 위
해선 특정한  절차와 조건이 필요합니다. 일단 '스스로 불행하다고
느끼는 존재'가 있어야 하고 '그 존재가 조금이라도 불행함이 없이
행복만을 느낄 수 있는 상황의 연속' 이 필요한 것이죠.  우리 식량
조달업자들은 오랜 경험과 실험을 통해 '상등품질의 행복'을 얻는
데 있어 거의 완벽에 가까운 시스템을 구축하는데  성공했습니다.
마침내 식량 걱정에서 해방될 수 있었던 것이죠. 제가 당신께 10년
전에 나타나 얘기를 꺼낸 것도 그런 맥락에서였던 것입니다.  이제
이해가 잘 되시죠? 자, 그러니까 걱정마시고 앞으로도 그렇게 너무
너무 행복하게 살아 주시기만 하면 됩니다. 아, 제가 이런 말을 해서
행복하게 살지 못할 것 같다구요? 그건 걱정마십쇼!  제가 한 말에
대한 기억은 조금 뒤에 다 지워 드릴 테니까요. 아무튼 저희에게 10
년동안 '상등품질의 행복'을 제공해 주셔서 정말 감사드리고 앞으로
도 그렇게 해주시길 부탁드리겠습니다. 부디 행복하게 잘 사십시오!"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사라지려 했고 나는 내가 아는 모든  마
법을 써서 그를 붙잡으려 했으나 그 어떤  마법도 그에겐 통하지 않
았다.. 이제 조금 후면 나는 그와 있었던 일을 모두 잊어버릴 것이다.
그리고 나는 다시 행복하게 너무나 행복하게 죽을때까지 살아갈 것
이다. 영. 원. 히!!!
.
루나
댓글 1
  • No Profile
    아이 03.09.28 12:28 댓글 수정 삭제
    누군가 내 행복을 통해 살아갈 수 있다면, 그건 좋은 일이네요. 자신의 생존을 위해 날 행복하게 해준다면, 그건 좋은 일이라고만은 할 수가 없네요. @,@
    소설 잘 읽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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