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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지우개와의 담화

2021.02.17 10:2602.17

지우개와의 담화

 

 

며칠 째지? 잠을 못 잔 게.

근 세 달째 새벽 4시까지 잠을 이루지 못하다가 잠든 지 세 시간을 채우지 못하고 깨는 생활이 반복되고 있었다. 몇 년 동안 제대로 된 글을 쓰지 못해서 인가? 잠이 안 오는데 자리에 누워있으려니 허리는 왜 그리 아프고 목은 또 왜 그리 불편하던지. 깨어있을 때는 또 어찌나 눈이 침침하고 머리가 아프던지.

“그게 다 하는 일이 없어서 그래. 하루 종일 바쁘게 움직이면 잠도 잘 와요.”

마누라가 종종 하는 말이다. 맞는 말이겠지만 동의하기는 싫어서 나는 괜스레 딴청을 피우곤 했다.

지금은 새벽 3시. 마누라의 규칙적이고 평화로운 숨소리가 자장가 같건만, 나는 왜 잠을 이루지 못하는가? 누워있기만 하는 것도 지겨워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시간이 새벽 2시쯤이었을 것이다.

이후로는 한 시간째 내 앞의 원고지만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요즘 사람들은 글을 쓸 때 컴퓨터 자판을 훨씬 선호한다지만, 나는 원고지 위로 사각대는 연필 소리와 부드럽게 말리는 지우개똥을 선호하는 쪽이다. 원고지를 들고 서재에 들어온 뒤 작은 스탠드를 켰다. 빈 종이가 쓸쓸한 낯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누라가 사다 준 연필과 지우개가 한쪽에 놓여있었지만 나는 연필도, 지우개도 사용하지 못하고 한정 없이 종이만 노려보고 있었다. 어둠의 소리가 원래 이렇게 컸던가? 연필은 원래 이렇게 길었던가? 지우개는 원래 이렇게 작았던가? 좀 더 컸던 거 같은데... 온갖 잡생각이 현실 위를 둥둥 떠다녔다. 어지러운 잡생각이 잠을 부추기기 시작했다. 드디어 때 이른(?) 잠이 살포시 찾아오던 참이었다.

어라? 단정히 놓여 있던 지우개가 내 앞으로 퉁퉁 튕겨져 나온 것은 그때였다. 지진이라도 난 것인가? 그렇다면 연필과 원고지는 왜 그대로 있는 것일까? 나는 수면욕으로 가득 차 무거운 머리를 억지로 회전시키면서 침을 꿀꺽 삼켰다. 에이, 잘못 본거겠지.

그런데, 지우개가 이번엔 저 혼자 뒤집혔다가 바로서는 것이 아닌가? 마치 젊은 춤꾼이라도 되는 양. 이것은 꿈인가? 현실인가? 허벅지 안쪽을 꼬집어보았다. 비명을 지를 정도는 아니지만 아프긴 아팠다.

지우개는 어느새 내 손등 위로 올라와 있었다. 콩콩콩. 허리 높이쯤 되어 보이는 지우개의 중간 부분을 기준으로 지우개가 굽어졌다. 인사라도 하는 것 같았다. 예의 바른 녀석. 나는 다시 한번 침을 꿀꺽 삼키고 지우개를 향해 소리를 내뱉었다.

“뭐야, 너?”

소리라기에는 길지만, 한밤중에 지우개에게 말을 걸었다고 하기는 또 좀 쑥스럽지 않겠는가? 다소 예민하긴 하지만, 나는 미친 사람은 아니다. 그런데 일초 뒤, 나는 내가 미친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됐다. 지우개가 하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보면 모르오? 지우개요.”

귀신은 아니었구나. 아주 목소리도 명랑한 노란 지우개 같으니라고. 아니, 지우개면 지우개답게 지우는 일이나 할 것이지, 왜 한밤중에 움직이고 말을 하고 사람을 심란하게 하는 것인가?

“나한테 왜 이러는 거냐?”

“지울 것 좀 주시오.”

아하. 지우개는 요구사항이 있었던 것이다. 내가 한 글자도 끄적거리지 못하고 있으니 저도 꽤나 답답했던 모양이었다.

“미안하지만 쓴 게 있어야 지우지.”

“그러니 뭐라도 쓰던지 하시오.”

“생각이 나야 쓰지.”

“그럼 뭐 다른 거라도 지울 건 없소?”

“그럼 내 이마의 주름살이나 좀 지워보련?”

지우개는 툭하고 도약을 딛더니만 내 이마로 올라와 주름살을 쓱쓱 지웠다. 너무 빡빡 문대서 조금 아프긴 했지만 화장실로 달려가 거울을 보니 정말 주름살이 지워져 있었다. 조준을 잘못해서 눈썹을 살짝 지운 거 말고는 꽤 괜찮은 실력이었다. 잠을 못 자는 대신 이런 횡재도 생기는 군. 나는 얼른 다시 지우개에게 달려갔다.

“이마 말고 입가랑 눈가도 좀 지워주련?”

“그러죠, 뭐”

지우개는 또 별거 아니라는 둥 입가랑 눈가를 쓱쓱 문대 주었다.

“또 지울 건 없소?”

어느새 잠은 달아난 지 오래였다. 나는 신이 나서 벽 한쪽을 차지하던 바둑판을 가리켰다.

“저것도 좀 지워주련?”

지우개는 바둑판 쪽으로 가더니 열심히 바둑판을 지웠다. 바둑판을 지우는 데는 좀 힘들었는지 지우개의 일부가 닳아 없어져 있었다. 그래서 남은 바둑알은 그냥 갖다 버리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폐기물 쓰레기 스티커 한 장 사면 해결될 일을, 쓸데없이 지우개를 낭비한 것이다. 영 아쉬웠다. 그 날, 나는 발뒤꿈치의 굳은살과 등 뒤의 점을 몇 개 지워달라고 하고는 까무룩 잠이 들었다.

“아니, 당신 왜 이렇게 젊어졌수?”

다음날 아침 마누라가 말했다. 눈이 나쁜 그녀는 안경을 끼지 않으면 앞을 잘 보지 못한다. 그런 마누라도 내가 달라진 것을 눈치챘을 정도면 실력이 좋은 지우개다. 무엇보다, 어제의 일이 꿈이 아니었다는 점이 몹시도 기뻤다. 나는 하루 종일 지우개를 가슴에 품은 채 무엇을 지워달라고 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밤이 왔다. 나는 마누라가 잠들기를 기다려 작은 방의 책상으로 향했다. 책상에 앉아 윗도리 호주머니에 넣어놨던 지우개를 슬며시 꺼냈다.

“이봐. 지우개.”

“......”

“이봐?”

“왜요?”

겁이 더럭 나려던 순간 지우개가 대꾸를 해왔다. 아, 녀석. 살아있었구나.

“내가 온종일 생각을 해봤는데 말이지.”

“네.”

“혹시 대출 빚 같은 것도 지워줄 수 있나?”

“네?

“동생 녀석 도와주느라 마누라 몰래 대출을 받은 게 좀 있는데 말이지.”

“그래도 돼요?”

“안 돼지. 그러니까 지워달라고 하는 거 아니냐?”

“미안한데, 저는 제 앞에 있는 것 밖에 못 지웁니다.”

아. 은행에 있는 서류까지는 어찌할 수 없단 뜻이로군. 나는 꽤나 실망을 했다. 그래도 여전히 지우고 싶은 것은 많았다.

“그러면 지나간 사건 같은 건?”

“사고 치신 게 또 있어요?”

“뭐, 사고랄 것까진 아니고. 내가 마누라 몰래 바람을 피운 적이 있거든.”

그랬다. 뭐 남자라면 한번쯤 있는 일이겠지만, 나한테 더없이 잘하는 마누라를 볼 때마다 나는 죄책감이 들었다. 이상하게도 그때 그 여자 얼굴은 처음부터 없었던 것 마냥 이제 기억도 안 나는데, 마누라도 그 일은 마치 없었던 일인 양 말 한마디 꺼내지 않는데도 말이다. 마치 어제 죄를 지은 사람처럼 마누라 앞에서 고개를 못 들게 될 때가 가끔 있단 말이지. 물론 그럴수록 큰소리를 치긴 했다. 뭐 낀 놈이 성낸다고 하지 않던가?

“그러니까 눈앞에 있는 거밖에 못 지운다니까요?”

그럴 거면 처음부터 못한다고 말을 하던지. 내가 짜증이 나는 상황인데 오히려 지우개가 큰 소리를 쳤다.

사람의 마음은 참 간사하다. 갑자기 지우개가 하등 쓸모없어 보이는 것은 또 왜인가? 오늘 하루 종일 기대를 했던 마음이 축 가라앉았다. 차라리 지우개 말고 연필이나 볼펜 같은 것이 말을 걸었다면 좋았을 걸,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러면 집을 한 채 만들어 달라거나, 요술 항아리라도 그려달라거나 했을 텐데. 어쨌든 지우는 것보다는 무언가를 만들어 내는 것이 세상 사는데 더 이롭지 않겠는가?

“할 말 더 없으시면 전 좀 자도 될까요?”

지우개가 하품을 했다.

“안 돼.”

“왜요?”

“내가 잠이 안 오니까.”

지우개는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나는 어떻게든 요 범상치 않은 지우개를 활용해 보고 싶었다. 고심한 끝에, 지우개의 다른 용도를 찾았다. 다른 사람에게 그저 지우개일 뿐인 ‘지우개’는 나의 속 얘기를 털어놓기에 그만이었다. 지우개에게 말을 한들 지가 소문을 낼 수나 있겠는가? 나는 지우개에게 그동안 살아온 나의 인생역정이며 앞날의 고민이며 신세 한탄을 잔뜩 늘어놓았다. 마누라는 자야 하고, 자식들도 자야 하고 형제들도 자야 하고 친구들도 자야 하니까.

사실 낮에도 내 얘기를 들어줄 사람은 없었다. 작가를 가장한 한심한 백수로 찍혀 있기도 했고 다른 사람의 말은 쥐뿔도 안 듣던 젊은 날의 대가이기도 했다. 그렇지 않더라도 어차피 그들은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기도 벅찼으니까, 그래서 늘 지쳐 있었으니까 내가 그들의 중한 시간을 뺏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보기보다 친절한 지우개는 다행히 나의 말을 참을성 있게 끝까지 들어주었다. 이따금 고개까지 꾸벅 끄덕여주었다. 말을 터놓는 사이에 잠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나는 또 지우개를 꼭 쥔 채 잠이 들었다.

다음날이었다. 몸이 제법 개운한 느낌이 들었다. 삼시세끼 밥도 잘 먹었다. 마누라는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냐며 나를 신기하게 쳐다봤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음식 투정을 하지 않은 날은 손에 꼽을 정도였기 때문이다. 나는 마누라의 얼굴을 보며 지우개에게 마누라 얼굴에 다닥다닥 붙어있는 저 주름살들도 좀 지워달라고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지우는 김에 마누라의 뱃살도 좀 지워달라고 해야지. 잠을 제대로 자니까 세상이 달라 보이고 마누라가 예뻐 보이는 신비가 펼쳐졌다.

활기차게 움직여서인지, 그날은 잠이 잘 왔다. 결혼하고 처음으로 마누라보다 먼저 잠이 들었을 정도이니까. 자면서 ‘지우개를 불러 소원을 빌어야 하는데…’라고 중얼거린 것도 같다. 그러나 무거운 눈꺼풀은 좀처럼 올라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어느새 마누라가 일어날 시간이 된 것인지, 옆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의식은 반쯤 깨어있었으나 며칠 째 못 잔 몸이 움직여주지 않아 나는 다소곳이 누워있었다. 그런데,

“지우개야아.”

이건 또 무슨 영문인가? 마누라가 낮은 목소리로 지우개를 부르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다정하게.

“왜요?”

지우개가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어제는 왜 안 지웠니?”

“뭘요?”

“이 노친네의 잠 말이다.”

“저도 깜빡 졸았어요.”

“얘야. 내가 간곡히 부탁했잖니.”

“저도 피곤해요. 그동안 주름살이며 점이며 지워 달라는 게 한두 개였어야 말이죠. 말은 또 어찌나 많던지. 꾸벅꾸벅 조는데도 모르더라니까요.”

“그러니까 다 들어주지 말라니까.”

“저도 지우개로서의 체면이 있죠, 다 안 된다고는 못하죠. 그래도 빚이나 기억 같은 건 못 지운다고 했다고요.”

뭐? 그러니까 사실은 다 지울 수 있었단 말이냐?

“아휴. 쿨쿨 자는 모양새 보라지.”

그녀는 나를 툭툭 쳤다. 감촉으로 보아 발로 치는 것 같았다. 버릇없는 여편네일세.

“나는 아직도 바람피운 그년만 생각하면 속에서 천불이 나.”

분노를 담은 그녀의 목소리가 덜덜 떨렸다. 아... 그렇게 된 것이었군.

“그런데 그 년,”

마누라가 쿡쿡 웃었다.

“얼굴 없이 잘 사나 몰라.”

!

마누라는 지우개에게 오늘은 꼭 내 ‘잠’을 못해도 반 이상은 지워달라며 신신당부를 했다. 미친 사람처럼 지우개에 대고 나에게는 직접 못할 저주를 퍼부어대는 마누라. 그녀의 목소리가 지나치게 밝고 건강했다. 나는 죽은 듯 자는 척하며 좋은 쪽으로 생각하려고 애썼다. 그래도 나를 지워버리지 않은 것이 어디인가?

 
차영

모두 행복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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