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지옥편


오라는 치킨은 안 오고 비가 내렸다.

나는 기다림에 지쳐 생명력을 다한 듯한 맥주 캔 뚜껑을 따면서 겨우 책상이라는 감옥으로부터 벗어나 창가로 갔다. 닫아놓은 창문을 통해서도 들릴 만큼 비가 거세게 내렸다. ‘내리치다’라는 단어가 생각날 정도였다. 손 뻗으면 저쪽 사람과 악수를 할 수 있을 만큼 가까이 있는 건너편 빌라가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괴물이 되어 보였다. 주르륵 흘러 내리는 괴물을 배경으로 비는 내렸다. 하염없이. 주르륵주르륵. 어쩐지 마냥 보고 듣게 하는 비의 리듬에 위로를 받으며 나는 맥주를 조금씩, 그러다 빨대로 길게 빨아올리듯 지속적으로 마셔 댔다.

치킨은 날 위로해 주지 않을 생각이 틀림없다.

치킨을 주문한 게 도대체 언제였는지 확인하기 위해 핸드폰을 켠 나는 배경화면 속 얼굴을 보고 화들짝 놀라 책상으로 달려갔다. 머릿속이 컨트롤과 탭으로 들어찬 나머지 내 손에 들린 것들을 까맣게 잊고서 맥주 캔을 든 손으로 노트북 자판을 누르려다 그만 맥주를 쏟고 말았다. 나는, 내가 생각해도 이상하리만큼 차분하게, 맥주가 나의 오랜 분신, 나의 아바타, 나의 정체성, 나의 주둥이를 대신하는 2010년산 국내 짐승 브랜드 노트북의 자판 틈새로 마치 하수구 괴물처럼 순식간에 빨려들어가는 것을 내려다보고만 있었다. 문득 맥주를 정말 쏟았나 싶을 정도로 말끔해진 흔적을 눈으로 좇는데 액정이 꺼졌다. 아, 나의 오랜 분신, 나의 아바타, 나의 정체성, 나의 주둥이를 대신하는 님은 갔습니다. 백업조차 하지 못한 나의 정신머리를 끌어안고 함께.

그래서 나는 한결같이 차분한 동작으로 다른 쪽 손에 들고 있던 핸드폰으로 유튜브에 접속해 검색창에 포커스를 두고 잠시 생각했다. 뭐였더라? 프랑스어니까 La 뭐시기… 나는 기억을 더듬어 그다음 낱말의 첫 글자 P를 쳤고, 그다음부터는 구글 신께서 나를 인도하셨다. 그가 내려 주신 첫 번째 계명을 따르니 내가 찾던 라이브 영상이 나왔다. 다행히 아직 끝나지 않았고, 대한민국 실시간 트렌드가 조용한 걸 보니 아직 아니었다. 좋아, 이대로 마지막까지 가는 거야.

신께서 마음을 고쳐 드시기라도 한 듯이 현관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고, 마침 의자에 엉덩이를 의탁하려던 나는 몸을 크게 휘청이고는 현관문 쪽으로 갔다. 밖에서 문을 쿵쿵쿵 두드려 댔다. 아니, 자기 늦은 건 생각도 않고 성질도 급하네. 심지어 더럽기까지. 초인종은 뒀다 뭐하고 이 야심한 시간에 문을 두드리는 거야? 나는 네, 하고 대답하려다 멈칫했다. 갑자기 맥주가 당겨서 길게 마시며 생각했다. 왜 초인종을 누르지 않는 거지? 마치 그런 내 생각에 대꾸라도 하듯 밖에서 또 쾅쾅쾅, 아까보다 세고 누가 들어도 감정을 실어서 문을 ‘차’댔다. 나는 맥주 캔을 떨어뜨리고 놀랐지만, 다행히 빈 캔임을 확인하고 안도하며 옛날에 유행했던 만화책을 떠올렸다. 제목이 뭐였더라. 아주 아주 무서운 이야기였나? 너무 너무 무서운 이야기? 아니면 진짜 진짜 무서운 이야기? 어쨌든 무서운 이야기를 엮은 공포 만화책이었다. 거기엔 아마도 일본이 그 유래일, 20세기 말에 초등학교에 다닌 사람치고 모를 수 없는 이야기를 포함해 50갠지 100갠지의 이야기가 수록돼 있었는데, 하필이면 그중 하나가 여전히 현관문이 발로 걷어차이는 지금의 상황과 매우 유사했다. 이야기의 골자는 이랬다. 해외여행을 하던 어느 부부가 길거리에서 소원을 들어준다는 가면을 기념품 삼아 사게 된다. 무사히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간 부부에게 비보가 전해진다. 하나뿐인 자식이 사고로 그만 목숨을 잃고야 만 것이다. 실의에 빠져 있던 부부는 신께 기도하듯 해외에서 사온 소원 들어주는 가면에 대고 빌었다. 제발 자식을 살려달라고. 살려’만’ 달라고. 공포와 반전의 방점이 저 ‘만’자에 찍히는 이 이야기는 결국…….

“도대체 몰 하고 자빠져 있능 고야?”

나는 추억으로부터 뒷덜미가 채여 내 보금자리, 전용면적이 하필이면 13제곱미터인 내 방으로 돌아갔다. 뭐지, 방금 들은 것 같은 그 맥 빠지는 말투의 목소리는? 나는 특유의 짧고 굵은 집중력을 최대로 발휘해 귀를 기울였다. 잘못 들었나 싶은 즈음 그 맥 빠지는 말투가 다시 말했다.

“이봐, 손생, 당장 이 문 열지 모태?”

그러고는 그 돼먹지 못한 자가 현관문을 악의에 찬 발길질로 쾅쾅쾅 걷어찼다.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그때까지 약간 흐릿한 정신 상태였음을 겸허히 인정하는 바이다.). 저대로 저 미친놈을 내버려 뒀다간 세입자들의 민원으로 나의 보금자리에서 쫓겨날지도 모른다. 어떻게 구한 방인데. 어플에 속고 매물에 기만당한 그 숱한 좌절의 순간들을 어떻게든 극복하고 얻어낸 방 한 칸을 웬 막돼먹은 미친놈이 술 처먹고 부리는 난동 때문에 날릴 수는 없었다. 나는 결의에 찬 발걸음을 내딛었다. 덜컥 문을 열려다 빛나는 기민함을 발휘해 멈칫하고는 미친놈의 낯짝과 현재의 미친 정도를 파악하기 위해 현관문 외시경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뭔가가 보였다. 저건… 빛이 아닌가. 도저히 비가 내리치는 야심한 시각에 보기 힘든 환한 빛에 나는 잠시 멍하니 빛의 근원을 찾기 위해 얼굴을 이리 옮겼다 저리 옮겼다 했다. 아무래도 낯익은 것이 꼭 디스플레이 액정에서 비추는 빛 같았다. 아닌 게 아니라 그림판에 마우스로 대충 휘갈긴 듯한 까만 구멍이 빛 속에서 ‘깜빡’거렸다.

“손생, 보고 있능 고 아러.” 미친놈이 말했다. “조은 말 할 때 이 문 여러, 손생.”

나는 까닭 모를 희망에 차서 문에 대고 물었다.

“치킨인가요?”

“치킨!” 문 너머에서 격양돼 몹시도 위험하게 들리는 외침이 들렸다. “손생, 지금 설마 치킨이라고 한 고야?”

나는 뭐가 잘못된 건지 알 수가 없어 다시 물었다.

“치킨을 배달하러 온 것이 아니라는 뜻인가요? 그렇다면 그대는 필시 술에 취해 난동을 부리는 자가 틀림없으니 어서 돌아가 발 닦고 잠이나 주무시지요. 그대에게 돌아가 몸 누일 장소가 있다면 말이에요.”

나는 상황의 미천함에도 불구하고 이성적이고 차분할 뿐만 아니라 교양 있게 대처를 한 나 자신에게 놀라 몸을 개처럼 부르르 떨었다. 말투가 다소 딱딱한 것 같기는 했지만, 크게 신경 쓰진 않았다. 내 태도에 놀라긴 저쪽도 마찬가진지 웃는 건지 우는 건지 모를 소리가 짧게 들렸다. 호기심에 다시 외시경으로 밖을 보자 환한 빛 속의 까만 구멍이 아까와 달리, 명백히 비웃고 있었다. 나는 화가 나서 소리쳤다.

“이 막돼먹은 미치광이 같으니라고. 내가 시킨 치킨을 내놓을 게 아니라면 당장 썩 꺼질지어다. 그렇지 않으면 신께서 그대를 용서치 않으리.”

그러나 문 밖의 미친놈은 콧방귀를 뀔 뿐이었다.

“손생, 무교자나.”

엄밀히 말하면 무신론자였지만, 어쨌든 종교가 없는 것은 분명 사실이었다. 하지만 저 미친놈이 그런 사적이고 영적인 정보를 어떻게 알았는지 도무지 짐작할 길이 없었다. 나는 당황하기보다는 타고난 호기심이 발동해 다시 침착하게 대화를 시도했다.

“당신이 그걸 어떻게 알죠?”

“손생, 트이터에서 바찌.”

그건 미처 예상치 못한 창구였다. 아닌 게 아니라 내 트위터 계정은 철저히 글쟁이로서의 인격체로 일상의 나와는 유리된 존재였기 때문에 가끔은 나조차도 내 트위터 계정의 존재 자체를 잊고는 할 정도였다. 그럼에도 과학을 신봉하고 과학적 사고를 충실히 수행하려 애쓴다는 부분은 공유하고 있기는 했다. 고로, 저자의 주장은 사실이 아닐 수 없다. 과학적이고 논리적으로 추론한 나는 이제는 흥미마저 느끼며 문에 몸을 바짝 밀착시켰다.

“그렇다면 당신은 아직 정식으로 데뷔도 하지 않은 미천한 습작생의 열렬한 팬이 틀림없군요. 이런 사생팬스러운 태도는 물론 지양해야 마땅합니다만, 당신이나 저나 이런 상황은 처음이니까 좋게 좋게 넘어가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그 애끓는 심정, 같은 애끓이는 자로서 이해 못 하는 바는 아닙니다. 아니, 누구보다 잘 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테지요. 그럼에도 이것이 선을 넘는 행위임은 달라지지 않아요. 자, 돌아가세요. 돌아가서 잠자리에 몸을 누이면 깨닫게 될 겁니다. 그대가 한 행동의 부끄러움을.” 나는 덧붙이지 않을 수 없었다. “가기 전에 내 작품 어느 것의 어느 부분이 그대를 그토록 위험의 낭떠러지로 밀어 넣었는지 말한다면 들어보기는 하죠. 자, 어서.”

“이거, 완존 미쳐 도랐네.”

내 기억에 그런 제목의 글을 쓴 적은 없었다.

“손생, 도대체 수를 얼마나 처마싱 고야? 완저니 마시 가써. 손생, 드꼬는 있능 고야? 손생, 문 여러. 아무래도 손생 위허매.”

나는 수치심과 모멸감에 견딜 수 없어 현관문을 열고 미친놈의 면상을 향해 손가락을 뻗었다. 그리고 한껏 쏘아붙이려 입을 벌린 나는 그대로 돌처럼 굳어서 내 앞에 있는 존재를 바라만 볼 수밖에 없었다. 신이시여, 이 꼴은 대관절 무어란 말입니까? 과학의 선지자들이시여, 기존의 관념을 조롱하는 현상 앞에서 당신들의 추종자는 어떠한 태도를 견지해야 한단 말입니까? 열렸던 문이 다시 서서히 닫히려 하자 무언가 기다란 것이 스윽 미끄러져 들어와 문고리를 휘감고 붙들었다. 내가 잘못 보고 있는 게 아니라면 저것은 마우스였다. 현실적으로 마우스일 리는 없으므로 마우스처럼 생긴 꼬리였다. 팔짱을 낀 채 서서 나의 시선을 좇듯, 미친놈이 마우스 모양 꼬리를 풀더니 내 시선을 위로 끌어올렸다. 그러자 미친놈의 얼굴인 듯한 부분이 뒤늦게 눈에 들어왔는데 역시나 보통의 생김새가 아니었다. 90년대 학교 컴퓨터실에서나 볼 법한 커다란 음극선관 모니터가 어깨 위에 놓여 있었는데, 놀랍게도 내가 본 빛과 건성으로 그린 듯한 표정이 다름 아닌 그 모니터에서 비추는 것이었다.

“기묘하군.” 나도 모르게 상투적인 감상을 토해냈고 그것이 부끄러워서 얼굴을 붉히고 화제를 돌렸다. “하긴 무한 경쟁이 배달업이라고 비껴가지는 않겠지. 그대가 어디 소속인지는 모르겠지만, 훌륭한 코스튬이 아닐 수 없군요. 특히 그 자연스러운 움직임을 자랑하는 꼬리는 마음 같아선 해체해 그 작동 원리를 규명하고 싶을 지경이니. 자, 이제 치킨을 줘요. 그것으로 다소 번잡했던 우리 만남을 깔끔하게 정리하도록 합시다. 어서.”

미처 인지하지도 못할 만큼 빠르게 마우스 꼴의 꼬리가 마우스 몸체를 총알처럼 쏘아 내 머리통을 갈겼다. 아픔보다는 놀라움, 놀라움보다는 창피함 때문에 나는 머리를 감싸 쥔 채 뒷걸음치고 말았다. 그러자 그 미친놈이 기다렸다는 듯이 안으로 들어와 문을 닫았다. 그제야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저 미친놈에게 치킨은 없다는 사실을. 나는 낭패감에 눈물을 흘리고 말았는데, 나도 내 반응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고, 패배감이 온몸을 휘감는 듯해서 몸서리치며 가까운 의자에 몸을 의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손생, 종말 종상이 아닝 모양이네.”

“시끄러워, 이 치킨 도둑놈아.”

“그노믜 치킨 타령은 언제까지 할 곤데? 아하, 아라따. 손생은 지금 날 놀리능 게 붕명해. 그로치 안코소야 잉간이 이로케 몽총하게 굴 수 업쏘. 내 마리 마찌?”

“난 당신처럼 파렴치한 사람이 아니야. 날 조롱하고 있는 건 그쪽이라고.”

내가 겨우 마음을 추슬러 앉아 있던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자 또다시 꼬리가 내 머리통을 갈겼다. 결국 나는 포기하고 다시 의자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완전한 나의 패배였다.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만 부끄러움은 숨길 수가 없던 터라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은 별도리가 없었다.

“날 그만 내버려 두고 그쪽 갈 길을 가요. 안 그래도 글이 풀리지 않아 뜬 눈으로 지새고 있는…….” 나는 놀라서 주머니를 뒤졌다. 손에 닿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미친놈의 이상하게 장식한 짝짝이 다리 너머에 떨어져 있는 핸드폰을 발견하고 분노에 치를 떨었다. “극악모두한 자 같으니라고. 어느새 내 핸드폰을 빼앗아 갔지? 당장 돌려 줘. 그렇지 않으면 경찰을 부르겠어.”

“돼지초럼 치해따는 게 무슨 소링지 이제야 알 거또 가꾼. 기묘청사놈들, 비유만크믄 쓸데업시 신라라지. 고게 고놈드리 가진 유이란 장쩌미지만.”

나는 뜻밖의 낱말에 귀가 솔깃해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천사라고 했나요?”

“그러타. 정학키는 기묘청사지. 비둘기망도 모탄 쓸모업는 거뜰.”

지극히 논리적으로 생겨나는 궁금증을 나는 밝혔다.

“그렇다면 그쪽은 뭐죠?”

“나?” 미친놈이 뒤집어 쓴 음극선관 모니터 속 표정이 빠르게, 그리고 그만큼이나 형편없는 모습으로 바뀌었다. 꼭 레고 퍼즐 악당 같은 꼴로 그 미친놈이 어느 때보다 선명하게 말했다. “나는 기묘악마다.”

나는 팔짱을 끼고 턱을 어루만지며 그 미친놈의 몸 곳곳을 무례할 만큼 빤히 살폈다.

“기묘하군. 악마는 정말 날개가 없는 건가?”

“날개라니.” 기묘한 미친놈이 흥분해서 소리쳤다. “그딴 고 가꼬 몰 하능데? 맙소사! 아직또 그노믜 치킨 타령 하능 고야? 이 손생 종말로 구제불능 몽총이고만? 기묘청사들 말마따나 고위보다 몽총해.”

“그건 너무 심하잖아.”

화가 난 나머지 아까까지의 수모를 잊고 자리에서 일어난 내게 마우스 세례가 쏟아졌다.

“이 몽총한 손생아, 가마니 앙자 이써. 자꼬 그로케 뻘찟하묜 그 몽총한 모리통이 나마나질 아늘 테니까.”

나는 그 말대로 했다.

“그렇다면 도대체 그쪽이 원하는 게 뭐란 말입니까?”

“가미 대들지도 마, 똥개 가튼 손생아. 아, 그냥 청사 것들항테 넘기고 자미나 자능 곤데. 오쩌게쏘, 손태글 해쓰니 채김을 죠야지. 그로기로 용감탱이랑 약소글 해쓰니. 아이고, 내 싱세야.”

그렇게 기묘한 푸념을 기묘하게 늘어놓기 시작한 기묘악마의 이야기를 다소 기묘할 정도로 짧게 요약하면 다음과 같았다. 기묘악마라는 기묘한 이름의 이 악마는 물론 어떤 의무 같은 것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는 근본적으로 지루한 것을 기묘천사만큼이나 끔찍이도 싫어하기에 이렇게 종종 자발적으로 할 일을 찾아 이 세계를 헤매고 다닌다고 한다. 그 할 일이라는 것은 그때그때 다르지만 지금 여기 나를 찾아온 순간 이 자의 목적은 그 자체로도 기묘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이었다. 바로 방황하는 영혼의 우울하기 짝이 없는 음적인 에너지를 회수하는 것이었다. 그 말인즉 소위 작가의 벽이라 불리는 슬럼프에 빠져 허우적대는 나의 영혼을 거두어가겠다는 뜻의 다른 표현이었고, 나는 그 즉시 항의를 했는데, 나의 슬럼프는 창작을 하는 사람에게는 감기만큼이나 흔하고 사소한 것이며 이번이 처음도 아닌데 이제 와서 그렇게 졸속으로 행정적인 절차를 밟는 것은 자기모순에 합당하지도 않을뿐더러 무엇보다도 나는 아직 죽을 수 없다고 밝혔다. 나의 완벽하게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이야기를 듣는 둥 마는 둥 하던 기묘악마가 또다시 꼬리를 휘둘러 내 입을 닫게 했다.

“말 징짜 만네. 좀 닥쳐, 손생. 누가 손생 주긴대? 톡 까노코 말해소 손생의 고 빙곤한 용호니 나 가튼 이대한 모믈 조금이라도 망족시켜 줄 고라고 생가카는 고야? 오디소 교마니야?”

나는 차라리 꼬리로 머리를 얻어맞는 편이 낫겠다 싶어 악마 앞에 무릎을 꿇었다.

“족어도 양시믄 인는 모양이지? 조아, 피차 바쁭데 구롬 이제 개야글 시자카자고. 이러나, 손생.”

“계약이라니. 다소 번거로운 구석이 없잖아 있는데 적당히 생략하고 넘어가도 되지 않을까요? 당신이 정말로 위대한 존재라면 말이지요.”

내 말의 어디가 어떻게 악마의 심기를 거슬렀는지 악마가 길길이 날뛰었고 그 때문에 마구잡이로 휘둘러진 악마의 꼬리가 좁디좁은 방 곳곳을 말 그대로 난장판으로 만들었다. 내 머리통도 무사할 수 없는 건 당연했다. 나는 두 팔로 머리를 감싸고 몸을 크게 웅크린 채 태풍이 지나쳐 가기만을 기다렸다. 잠시 뒤, 악마의 꼬리가 미친 듯이 바람을 가르는 붕붕대는 소리가 멎었다. 나는 한쪽 눈을 조금 떠 악마가 날 내려다보고 있는 것을 확인하고 재빨리 악마의 두 다리 중 조금 더 짧은 쪽을 붙들었다.

“당장 하시지요, 그 계약이라는 것을. 어느 손가락을 자를까요.”

“머래. 송까라글 짤라소 모하려고? 구런 곤 케르베로스도 쳐다도 안 봉다고.” 악마가 더할 나위 없이 건성으로 지은 듯한 경멸 어린 표정을 한 채 다리를 흔들어 날 쳐냈다. “그 꼬리를 잡꼬 약까네 동이항다능 카네 체크 표시해.” 내가 악마의 꼬리를 향해 손을 뻗자 악마는 꼬리를 휙 잡아당겼다. “손생, 용광잉 줄 아라. 이렁 기해 흥하지 안어. 손생도 잘 알지?”

“여부가 있겠어요.” 나는 진심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왠지 심장이 두근거렸다. 아직 계약을 하기도 전인데 벌써부터 뭔가를 내려놓은 듯 마음이 초연하면서도 개운했다. 나는 깨달음에 전율했다. “이제야 당신의 큰 그림을 이해한 듯싶습니다. 저는 슬럼프에 빠져서 우울했던 것이 아닙니다. 우울해서 슬럼프에 빠졌던 것이지요. 그런데 그 우울함을 당신께서 친히 거두어주시니 저는 슬럼프를 극복하고 다시 글을 쓸 수 있을 것입니다.”

“아모래도 잘몽 찾아옹 고 가찌만 낙짱부리비지.”

“그렇지요. 모든 것에는 더는 돌이킬 수 없는 임계점이 존재하는 법이지요.”

그렇지만 악마라는 존재의 타고난 본성에 약간의 의심이 없지는 않아서 나는 눈앞에 있는 악마가 딴 소리를 하기 전에 악마의 꼬리를 낚아챘다. 악마는 움찔하더니 기운을 빼앗긴 것처럼 스르륵 주저앉았다. 기묘하게도 악마의 머리가 내 눈높이에서 빛을 깜빡이더니 잠깐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현기증을 불러일으키는 길고도 긴 약관이 나타났다.

“약관은 동서고금뿐만 아니라 이승과 저승 또한 막론하고 악마적이군.”

내가 쥐고 있던 악마의 꼬리가 사정없이 꿈틀거리는 통에 나는 그것을 두 손으로 움켜쥐고 소리쳐 사죄했다. 그리고 얼른 약관의 끝을 찾아 스크롤을 내려 동의했다. 그와 동시에 빛이 사라졌고, 나는 훅 꺼져 버린 땅바닥 어딘가로 끝없이 추락했다.

 

 

 

연옥편


우박까지는 아니지만 빗방울보다는 묵직한 뭔가가 얼굴을 때리는 것을 느끼며 내가 깨어난 곳은 음적인 에너지로 가득한 영혼들이 중력에 이끌리듯 모이는 어느 다리의 입구였다(라고 기묘악마가 말했다.). 그곳은 눈에 보이는 거의 모든 것이 보라색의 스펙트럼으로 보였는데, 마치 이곳 전체가 편광 필터를 통해 파장이 380에서 450나노미터 사이의 빛에만 반응하거나 그게 아니면 보라색 안경을 쓰고 있는 것 같았다. 후자의 가능성이 보다 현실적이었기 때문에 나는 쓰고 있는 (줄 알았던) 안경을 손으로 더듬어 찾았다. 그 순간 손이 허공을 가르며 느꼈던 인지부조화는 음식을 먹다가 혀를 씹었을 때보다도 더 큰 충격과 공포를 내게 선사했는데, 내가 안경을 쓰지 않고 있다는 진실을 깨닫자마자 시야가 뿌얘졌기 때문에 심지어 어떤 체념마저 느껴졌던 것이다. 한동안 멍하니 그러고 서서 우박까지는 아니지만 빗방울보다는 묵직한 뭔가를 맞으며 서 있는데 어느 순간 정신이 들었다. 더는 뭔가가 떨어져 내리지 않는 것이었다. 고개를 들어보니 연보라색 하늘을 피자두 색의 둥그런 뭔가가 가리고 있었다. 그것은 필시 우산이었고 그것을 들고 있는 것은 주먹만 한 것이 달린 기다란 줄이었다. 나는 반가운 마음에 돌아서서 무릎을 꿇고 짝짝이 다리 중 보다 짧은 쪽을 거의 껴안다시피 하며 소리쳤다.

“당신이 악마이길 바랍니다. 당신은 악마여야 합니다. 당신은 악마일 수밖에 없으니 그렇지 않으면 내게 더는 희망이 없기 때문이지요. 오, 악마여.”

“묘하궁.” 나를 벌레 퉁기듯 다리를 흔들고 악마는 말했다. “주접 고망 떨고 이러나, 손생. 그리고 이고 바도.”

무릎을 꿇고 나서야 나는 희미한 보랏빛 바닥이 판석으로 포장된 돌바닥임을 고통으로써 깨달았던 터라 악마의 간절한 청을 외면하지 않고 서둘러 일어났다. 그리고 악마가 건네는 것을 받아 들었는데 한눈에 그것의 정체를 파악할 수는 없었다. 내가 알 수 있는 거라곤 이심률이 적지 않은 타원 끝에 달린 손잡이를 잡고 있다는 사실뿐이었다. 타원의 안쪽은 뭔가가 계속해서 바뀌고 있어서 흐릿한 나의 시야로는 당최 뭔가를 알아보기가 불가능했다.

“이것이 무엇인가요?”

“이제능 눙까지 머러버링 고야? 고우리자나, 몽총한 손생.”

악마의 지적은 실로 지당하다고 느껴졌다. 그의 말을 듣고 나니 내가 들고 있는 것이 당장에 거울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한순간에 제 모습을 바꿀 수 있는 게 아니라면 나는 거위보다 멍청한 것이 틀림없었다. 나는 거울을 통해 내 얼굴이 자주빛을 띄지는 않았나 확인하려 했지만 허사였다. 거울을 통해서 보이는 거라곤 내 앞에 서 있는 악마의… 선명한 모습뿐이었다.

“아니.” 나는 거울 속 악마를 노려보며 외쳤다. “정말이지 기묘하군. 분명히 나는 안경을 쓰지 않았고, 게다가 거울 너머의 것이 보이다니. 하지만 그렇다면 이것의 이름이 거울일 수는 없지 않은가. 그렇지 않나요?”

내가 거울을 통해 악마에게 묻자 악마는 다만 코웃음쳤다. 매우 효율적인 답변이 아닐 수 없었다. 결국 나는 내가 원하는 류의 답변을 듣기를 단념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친절하게도 악마는 그 거울일 수 없는 거울이 왜 필요한지, 그 거울일 수 없는 거울을 어떻게 사용하는지를 설명해 줬고 나는 어렵지 않게 숙지하여 그 거울일 수 없는 거울을 통해 내가 있는 세상을 보다 선명히 조망할 수 있었다. 처음 안경을 썼던 초등학교 1학년 때처럼 동심으로 돌아가 세상을 구경하던 나는 낯익은 얼굴을 발견하고 너무 놀라 그만 거울을 놓치고 말았다. 악마의 꼬리의 비할 데 없는 순발력이 아니었으면 그 거울일 수 없는 거울을 깨먹고 내 머리통 역시 깨먹을 뻔했기에 나는 개처럼 몸을 떨었다.

“조시마는 게 신상에 조아, 손생. 이고 깨모그명 손생을 방주로 가득 채어도 모자라니까 마리야.”

“그 방주는 전용면적이 두 자리를 넘지 않나 봅니다.”

“장나니 나와?”

나는 애써 모른 척하고 그 거울일 수 없는 거울을 빼앗아 다시 들여다봤다. 악마를 피해 오른쪽으로 거울을 비추자 아까 본 얼굴이 보였다.

“틀림없어. 그분이야.”

내 말에 악마도 내가 보는 쪽을 돌아보았다. 그는 거울을 통하지 않고도 내가 보는 것을 볼 수 있는 듯했다. 악마의 오래된 음극선관 모니터가 한층 환하게 빛을 발했다. 그러더니 놀랍게도 악마가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앞만 보고 달려오던 그분이 이쪽을 돌아보고 달리는 속도를 늦춰 우리 앞에 멈춰 섰다. 악마가 나에게는 보이지 않은 교양 있는 태도로 조금은 익살스럽게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오늘도 어기멉시 수고가 마느심니다, 손생.”

나는 약간 서운한 마음이 들어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나 그보다는 눈앞에 서 있는 존재로 인해 드는, 글로 옮기기에는 아직 정리되지 않은 감정을 어찌할 수가 없었던 터라 나는 조심스럽게 악마의 뒤로 몸을 숨겼다. 다행히 나의 존재는 그분에게 있어 먼지와도 같아 그분은 목에 두른 수건으로 얼굴을 닦을 뿐이었다.

“웬일이야?”

“앵이른, 일하능 고지.”

그분은 농담이라도 들은 것처럼 웃었다.

“그럼 수고.”

다시 달리기를 시작하려는 그분을 악마가 불러 세웠다.

“온제라도 조으니 부루기망 해, 손생. 모니모니해도 손생마낭 잉가늘 차즐 수가 이쏘야지. 하나가치 시시해. 애송이야.”

“글쎄.”

“난 아러, 손생은 날 다시 차즐 고야. 내 꼬리를 골지.”

그분은 어딘가 씁쓸해 보이는 미소를 짓고는 돌아서서 달리기 시작했다. 멀어져 가는 뒷모습은 서글퍼 보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멋있어 보이기도 했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는 내게 악마가 말했다.

“잉사라도 해 보지 구래써? 항때 패니어짜나.”

“팬이었던 게 아니라 팬입니다. 그런데 당신은 대체 나에 대해서 모르는 게 없군요. 내가 저분에 대한 내용도 트위터에 썼던가요?”

“구굴링. 쿠키 부스러기가 산처럼 싸여 이쏘.”

“하여간에 악마적인 기업 같으니라고.”

뭔가가 내 어깨를 두르길래 얼른 쳐냈다. 나는 나지막하게 이렇게 말했다.

“사람의 마음은 양자의 춤사위와 같아라. 좌로 스핀, 우로 스핀. 그 하나이면서 그 둘 다이기도 하지요. 내 마음 양자역학의 지배 아래 놓은 악마의 이름 무수히 많기에 희망은 관찰할 수 없답니다.”

“주접 고만 떨고 어서 오기나 해, 손생.”

어느새 악마는 커다란 구조물로 가로막힌 곳에 가 있었다. 가면서 거울을 통해 그 구조물을 관찰해 보니 그것은 단순한 형태의 양문이었다. 특기할 만한 것이 있다면 다른 보라색에 비해 유난히 뚜렷해 보인다는 점이었는데, 내 미적 감각이 신뢰할 만하다는 가정 하에 그 색깔은 #ff0090이라는 코드명을 가진 색이었다. 그 문 앞에는 문의 색깔보다 한층 톤 다운된 색깔의 전신 타이즈를 입은 사람이 서 있었는데, 아무리 낙관적인 관점에서 접근해도 저 문을 통과하기가 만만치 않을 것 같았지만, 의외로 그 문지기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다만 길을 비켜줄 뿐이었다. 그렇게 들어선 문 너머를 글로 묘사하기란 여간 기묘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어줍잖은 글솜씨로 그 기묘함을 헤치기보다는 차라리 무(無)가 갖는 무한한 가능성에 도움을 청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싶어 독자에게 양해를 구하는 바이다. 나는 내 글솜씨는 못 믿어도 독자의 상상력은 신뢰해 마지않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이 얼마나 직무유기에 태만적인 것인지는 충분히 잘 알고 있지만, 변변찮은 내 능력에 도박을 걸기에는 독자가 느낄 수 있고 느껴야 마땅한 즐거움이 우선임을 변명 삼아 나의 부족함을 고백하는 바이다.


그러나 그 기묘하기가 이를 데 없는 곳에 발을 들인 내가 느꼈던, 느낄 수밖에 없었던 감정을 글로 옮겨보는 것은 그리 분별없는 짓은 아닐 것이다. 자신의 감정은, 간혹 그 자신도 미처 알지 못하거나 오독할 가능성이 아주 없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그 감정을 느끼는 자기 자신보다 분명하고 적확하며 섬세하게 헤아릴 수 있는 이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단, 그 대상을 탄소 기반 유기적 생물체로 한해야 할 것이다. 이조차도 매우 임시적인 제한 조치라는 점은 최신 기술 동향에 관심이 많은 이라면 충분히 동의할 것이다.).

기묘악마가 내가 설명한 바에 따르면, 내가 통과한 #ff0090의 문은 내가 처음 눈을 뜬 곳에서 뒤로 곧장 뻗어나가는 다리의 문으로 그 존재 의의는 오직 하나뿐이었다. 원하지 않는 전진을 방지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나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뒤라는 건 지극히 주관적인 표현이며 설사 그것이 관습적인 표현대로 북쪽을 가리킨다 하더라도 도대체 북쪽이 어딘지, 그러므로 뒤가 어느 쪽인지 어떻게 알 수 있고, 심지어 방향을 지시할 수 있는지 따져 물었던 것이다. 웬일로 내 머리통을 건드리지 않고 끝까지 듣고 나서 기묘악마는 역시나 기묘한 이야기를 내게 해주었다. 그에 대해 이렇게 길게 글로 옮기는 것은 읽는 이를 성가시게 하려는 것이 아니다. 내가 그곳에 관해 느꼈던 가장 핵심이 되는 감정을 최대한 고스란히 담아 전달하기 위해 일종의 밑밥을 깔려는 의도에서다.

기묘악마는 이렇게 말했다.

“손생의 지족은 타당해. 개미 똥꾸몽만큼. 손생은 지금부토 항 시강 ‘뒤’라능 마를 오또케 이해하지?”

나는 개미 똥구멍만큼 상처 입은 심정을 애써 감추고 이성적으로 대꾸했다.

“개미 똥구멍만 한 나의 지성으로는 그 말이 당최 이해가 되지 않는군요. 시간에 어떻게 앞이나 뒤가 있을 수 있습니까. 그럼 왼쪽과 오른쪽, 위와 아래 또한 있다는 뜻일진데, 마치 시간이 3차원에 실존하는 물질처럼 들리지 않습니까.”

바로 머리통이 갈겨졌고 나는 심심한 사죄를 표했다.

“시강응 흘러. 오직 항쪽 방향으로망. 보통응 흘러가능 쪼글 압피라고 부르지. 하지망 잉간드른 좀초롬 숭리를 따르는 봅이 옵기 때뭉에 시강으 경우 흘러가능 쪼기 ‘뒤’가 되능 고야. 이 정도묜 손생으 그 개미 똥꾸몽만 한 지송으로도 이해가 되게찌.”

“더할 나위 없이 쉬운 설명입니다만, 시간의 흐름과 이 다리의 방향에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는 여전히 오리무중이군요.”

거기까지 대화가 진행되었을 때 우리는 문 근처에 빽빽이 들어찬 사람들을 제치고 겨우 그곳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들은 기묘악마의 표현을 빌리자면 “똥파리떼”였는데, 그렇게 칭하는 이유를 듣고 그 악마의 커다란 머리통을 후려치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 그들은 욕망하는 자들이었다. 무엇을 욕망하는가 하면 자기 표현을 욕망하는 자들이었다. 달리 말하면 쓰고자 하는 자들이었다. 무엇을 쓰는지와는 무관하게 쓰는 행위로 자기를 표현할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스스로를 인정하는 부류, 즉 써서 표현하지 않으면 그 자신이 인정되지 않는, 결국 공허한 좀비가 되어 버리는 그런 자들이었다. 내가 그들 중 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잘 알았다. 다행히 나에게는 쓸 수 없게 하는 장애로부터 남들에 비해 자유로운 편이어서 최근에 작은 상을 수상함으로써 좀비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다음에야 깨달은 것이 있었지만 말이다. 영구적인 탈좀비란 없었다. 한시적인 인간화가 가능할 뿐. 나는 다시 좀비가 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기묘악마가 별것 아니라는 듯 그들을 배설물과 곤충의 무리로 퉁쳐 불렀을 때 내 심정이 어땠을지 굳이 설명하는 건 잘해야 그들과 내 자신을 두 번 죽이는 것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손생은 운 조은 줄 아러. 나 아니어쓰면 저기 껴소 평생을 탕소붕자나 머그며 사라야 해쓸 테니.”

나는 내 뒤에서 실제로 까만 얼룩으로 제 모습을 알아보기 힘든 사람들을 힐끔 보고는 그 앞에서 유독 반짝이는 몇몇 사람을 부러운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을 수 없었다. 탄소지옥이라는 말이 떠오르는 저곳을 마침내 뚫고 다이아몬드처럼 반짝이고 단단해진 극소수의 사람들. 그들은 문자 그대로 신진 스타 작가였다. 그중 몇은 나 또한 아는 얼굴이었다. 같은 시험을 치르기도 했고 탄소분자로 서로의 얼굴을 칠하며 미친 사람처럼 웃고 즐겼던 사람도 있었던 것이다. 나는 결국 고개를 돌리고 악마의 꼬리만 쳐다보며 걸었다. 내가 원한 건 그저 내 마음이 느끼는 것, 난 그것을 표현해 보려 했을 뿐이었다. 그게 왜 그리 힘이 든 걸까?

“그래서 나는 결국 악마와 계약을 맺게 되었지. 그로써 타락하였지. 악마처럼. 아니, 그들에게는 선택권이 없었지만, 나는 내 의지로 타락을 선택했으니 어쩌면 나의 타락이 더 나쁘다. 나는 대악마일지 몰라.”

내 뒤통수가 불에 덴 듯 뜨거웠다. 두 눈에는 별이 보였다. 기묘악마가 날 향해 서 있었는데 알고 보니 그의 머리통 음극선관 모니터에서 별이 빛나는 도트 gif 영상이 재생되고 있었다.

“가미 대악마 루키페르 니믈 욕뽀이다니 손생은 주거서도 주금을 워나게 될 고야. 손생은 오지가난 지옥뿔로 앙 대. 시강으 똥꾸몽을 통해 저 몬 뒤로 나라가 핵융합 언자로 가마에 드러가게 될 고야.”

나는 그 즉시 온몸의 피가 얼어붙어 세포 하나하나의 핵이 터지는 듯한 극도의 고통과 공포를 느끼고 통곡을 하며 내 의도는 그것이 아니었다고, 비록 의도와 상관없이 결과만이 그 무엇보다 중요하지만, 정말이지 나는 그분을 모욕할 의도가 아니었음을, 이성이 조금이라도 그 음극선관 안 어딘가에 존재한다면 자연의 이치만큼이나 자연히 알 수 있을 거라고, 사정사정했다. 내 간곡한 말은 악마의 심장마저 주무르는 재주가 있었던 건지는 몰라도 아무튼 기묘악마는 더 이상의 참극과 같은 저주를 퍼붓는 짓거리는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미 뱉은 저주가 쉬이 무위로 돌아갈지는 알 길이 없었고 지금까지도 마찬가지다. 그저 내가 죽기 전까지 저들의 — 극악무도하고 비이성적인 그들에게 과연 과학이라는 것이 성립 가능한지는 비트겐슈타인의 언어를 도입해도 사실상 아무런 실마리를 좇기 힘들겠지만 튜링처럼 목적지향적인 방법을 동원해 일단 그것이 가능하다고 전제를 해버리고, 즉 있다 치고 — 과학자들이 미래로의 시간 여행을 위한 초광속 내지는 아광속 운동법을 발견하지 않기만을 바랄 따름이다.

그렇게 해서 겨우겨우 악마의 심기를 가라앉히는 데 성공한 내가 안도의 숨을 내쉬려는 찰나 뒤에서 또렷한 목소리가 소리쳤다.

“여러분, 힘을 내요, 투쟁.”

나는 돌아서서 다시금 지옥 같은 광경을 응시해야 했다. 투쟁을 부르짖는 목소리는 어디선가 계속해서 누군가를 북돋았고 그만큼 자주 투쟁을 외쳤다. 좀비 같은 사람들이 그 외침을 알아들었는지 일순 군중에 변화의 물결이 이는 것이 확연히 보였다. 거울을 쳐들고 목소리의 근원을 찾아 이리저리 둘러보던 나는 소름이 돋고 눈시울이 붉어져 몸을 개처럼 떨면서도 한시라도 빨리 저 목소리의 주인을 보고 싶어서 거울을 쥔 손을 더 꽉 움켜쥐었다. 어디지? 도대체 어디야? 그분이 틀림없어. 하지만 새카만 군중 속에서 무언가를 찾기란 애서가의 서재에서 숨어 있는 명작을 찾는 것만큼 지난한 일 같았다. 다시 생각해도 기묘하지만 그 순간 나도 모르게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방금 전까지도 나에게 극단의 저주를 퍼부었던 기묘악마를 쳐다보았다. 사실 내 입으로 말하기는 뭣하지만 그때 내가 지었을 표정을 보고 나를 딱하게 여겨 나에게 손을 내밀지 않는 사람을 나는 여지껏 만나본 적이 없는데, 절대 계획적으로 지은 것도 아닐뿐더러 그럴 수도 없는 나의 순수한 슬픈 표정을 본 악마 역시 움찔하더니 그래도 악마라고 팔짱을 끼고 시치미를 떼는가 싶더니 아닌 척 꼬리로 거울의 방향을 잡아 주었다. 바로 그곳에 있었다. 목소리의 주인. 나의 영웅.

투쟁, 하는 외침이 그대로 폭발하듯, 새카만 탄소분자 속에서 불꽃을 뿜어냈다(네온 컬러의 보랏빛 불꽃은 오랜 옛날 처음으로 필살기를 성공한 그때 그 시절에 느꼈던 벅차오름을 고스란히 부활시켰다. 그랬기 때문일 것이다. 나도 모르게 “도시타!” 하고 소리질렀던 것은. 옆에서 악마가 한숨짓던 게 기억난다.). 그 열기로 대기가 물결처럼 일렁였는데 어느 순간 돌풍이 불며 불꽃 속에서 역시나 보랏빛 불길에 휩싸인 뭔가가 하늘로 치솟았다. 그러다 폭죽 터지듯 확 커졌는데 마치 한 마리의 새가 날개를 팍하고 펼친 것 같았다. 아니, 정말이었다. 나는 하늘 높이 쳐든 거울을 들여다보며 입을 다물지 못하고 그저 이게 다 무엇이냐고 묻듯 다시 한 번 악마를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왜 안 그렇겠는가. 사람이 불꽃을 내뿜는 새가 돼서 하늘에 떠 있는데. 아무리 봐도 저분은 천사가 아니라 내가 아는 그분이 맞는데.

“고게 고우리 보여주능 참모스비지.”

그러니까 악마의 말인즉슨, 내가 알던 그분의 실체가 조류였다는 뜻이었다. 그것도 불꽃을 내뿜는. 나는 불사조의 이미지를 떠올리고는 그렇다면 나의 실체는 어떤 모습일지가 궁금해져서 내 모습을 거울에 비춰보려고 갖은 동작을 다 취해 보았다. 그러나 거울 본연의 이용이 불가능한 이것으로 자기 자신을 비춰본다는 것은 어지간한 신체적 능력 없이는 불가능할성싶었다. 아쉬운 대로 손과 다리를 비춰봤지만 그냥 평범한 손과 다리였다. 어쩌면 나는 특별한 실체가 따로 없는 그저 보통의 존재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썩 유쾌하지 않은 자기 인식이 들었고 나는 그것을 잊기 위해서라도 다시 나의 영웅의 자태를 올려다보는 데 집중했다.

보랏빛 불새는 불똥을 튀며 사람들 위를 배회하면서 끊임없이 투쟁을 외쳐 그들을 고양시켰다. 아까 감지했던 군중 속 변화는 서서히 크고 분명해져서 그 자체가 생명력을 지닌 것처럼 보이기에 이르러 불새의 투쟁 소리에 맞추어 꿈틀꿈틀 움직였다. 불새가 최종적으로 “돌격 앞으로, 투쟁” 하고 외치자 억겹의 세월 동안 탄소분자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방황하던 사람들이 이동하기 시작했다. 땅이 울렸다. 온몸이 떨렸다. 나는 돌연 겁에 질려 어쩔 줄 몰라 발만 동동 굴렀다. 그러나 악마는 나와는 달리 태연자약했고 그 모습을 본 나는 망연자실했다. 에라, 모르겠다, 싶어 악마의 등 뒤로 숨으려는 순간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그것을 나는 물론이고 하늘에 떠 있는 나의 영웅, 불새도 허망하게 바라만 보았다. 군중이 내 쪽이 아닌 반대쪽, 그러니까 문 밖으로 나가 버린 거였다. 문 앞에는 미처 열기에 휩쓸리지 못한 변두리 사람들만이 남아 주변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고 여태까지 해왔던 대로 탄소분자를 탐하기 바빴다. 불새는 조용히 내려와 불꽃을 꺼뜨리고 내가 아는 모습으로 어디론가 가버렸다. 그 뒷모습이 더없이 쓸쓸해 보였기에 나는 그분도 나 못지않게 놀라고 실망하고 낙담한 것이 아닌가 감히 짐작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뒤늦게 상황의 진상을 깨달았다. 사라지고 없는 그들은 그저 앞으로 갔던 것이다. 지극히 논리적인 전개였다. 다만, 그 당연한 것이 야속하게 느껴지는 것은 도리가 없었다. 그 허망함을 잊기 위해서라도 나는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뒤로, 나는 걸었다.


실의에 빠진 듯이 한참을 걷다보니 어느새 주변은 바뀌어 있었는데, 역시나 묘사라기보다는 감상에 가까운 표현임을 다시 한 번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이에 대해서는 글쓴이를 향한 신뢰는 차치하더라도 글 자체에 대한 거부감이 들 수 있기 때문에 최소한의 변명을 하자면, 사실 내가 겪은(혹은 이 글을 앞서 읽은 몇몇의 견해에 따르면 ‘겪었다고 주장하는 것일 뿐’인) 이 이야기는 나조차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바, 기묘하다. 말도 못 하게 기묘하다. 그리고 애매모호해서, 꿈을 꾸고 일어나 그 흔적을 더듬는 듯한 느낌도 없잖아 들기도 하다. 그러나 나의 4등급짜리 신용등급을 걸고 맹세컨대, 이것은 꿈이 아니다. 철저히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것이다.

마치 광장을 연상케 하는 공간에 나와 기묘악마가 들어섰을 때 그 널찍한 공간에는 한 사람이 자신을 둘러싼 사람들과 — 그러나 실체가 없는 안개에 보다 가까운 군중과 — 대치하는 것처럼 서 있었다. 자연스레 안개처럼 숨을 수 있게 된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이 멈춰 서서 뭐에 홀린 것처럼 그 사람을 지켜보게 되었다. 멋들어진 모자를 쓴 그 사람(물론 거울을 통해 본 모습이었다)은 누가 봐도 지친 기색이 역력했기 때문에 어느새 나는 그 사람에게 마음이 쓰이지 않을 수 없었다. 실은 내가 그를 알고 있음을 이내 깨닫고 소리쳐 응원이라도 하고 싶어졌다. 그러나 나를 둘러싼, 아니 이제는 나 그 자체가 되어버린 뭉근한 덩어리가 내 팔과 다리는 물론이고 입까지 틀어막고 있는 것처럼 느껴져서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그저 홀로 고군분투 하는 그를 지켜만 볼 수밖에 없었다.

괴물이라는 이름이 아깝지 않은 안개로부터 정전기가 발생하듯 빛이 번쩍여 모자 쓴 이에게 날아갔고 그는 움찔하며 그것을 고스란히 받아들였다. 그가 치명상이라도 입었으면 어쩌지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라면 감당하지 못했을 게 뻔한 공격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숨죽여 지켜보고 있는데 뭔가가 눈앞에 불쑥 끼어들었다. 200매 원고지 묶음을 든 손이었다. 나는 이제는 제법 숙달이 돼서 거울부터 들이밀었다. 손의 주인은 덩치가 조금 크지만 전체적으로 귀엽게 생긴 곰돌이였다. 곰돌이가 말했다.

“입금 부탁드려요.”

“무슨 입금을 말씀하시는 것인지요?”

나로서는 놀랍게도 기묘악마가 먼저 끼어들더니 곰돌이에게 말했다.

“오랜망이궁, 손생. 자자, 시세가 오또케 대지? 물까상승률 고료해소 개산하묜…….”

곰돌이는 표정에 변화는 없지만 명백히 분통 터진다는 듯이 대꾸했다.

“그대로예요. 조금도 바뀌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계산 같은 걸 할 필요 없어요.” 그러고는 생김새만으로는 절대 연결지을 수 없는 속도로 200매 원고지 한 묶음을 더 만들어 내밀었다. “그래서 쓰는 속도를 높였죠. 먹고 살아야 히니까요.”

실제로 곰돌이가 내민 원고에는 뭔가가 빼곡이 쓰여 있었고 나는 그제야 눈앞의 존재의 정체를 깨닫고 전율에 몸서리쳤다. 그 존재 자체가 하나의 단위로서 존재하는 재귀적 전설, 그분을, 그분의 절대적인 속도를 실제로 목도하다니. 나는 감격에 겨워 떨리는 손을 뻗으며 말이 되지 못한 소리를 내뱉었는데 그 소리를 들은 전설께서 나를 보고는, 또 하나의 200매 원고지 묶음을 내밀고 입금을 요구했다. 녹음된 기계음 못지않게 단조로운 음성으로 자신의 계좌번호를 읊으면서. 나는 당황해서 얼어붙었고, 그런 나를 기묘악마가 딱하게 쳐다보았다. 그러는 와중에도 전설께선 네 번째 200매 원고지 묶음을 얹고 다시 입금을 요구하고 계좌번호를 읊었다. 무언가 잘못돼도 한참은 잘못됐다는 느낌은 절대적인 속도의 단위 앞에서 아무런 의미가 없었고 이제 200매 원고지 묶음은 다섯 개가 쌓여 그 자체만으로 흉기가 되기에 손색이 없지 싶었다. 극도의 두려움이 나로 하여금 저것을 이용해서라도 이 난데없고 속절없는 난관을 벗어날 것을 종용했다. 내가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200매 원고지 더미를 향해 뻗는 동안 경악을 금치 못하게 전설께서는 또 다른 묶음을 생산하고 있었다. 더는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내가 통장 잔고와 마이너스 한도를 떠올리는 그때 기묘악마가 전설을 꼬리로 둘둘 감싸더니 용을 쓰기 시작했다. 악마의 음극선관 모니터에서 시커먼 연기가 피어오르자 꼬리에 말린 전설께서 서서히 떠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전설은 전설이었다. 전설께선 아랑곳 않고 기어코 여섯 번째 200매 원고지 묶음을 완성하고야 말았고 그가 의도한 것은 아니겠지만 그 악마적인 숫자가 기묘악마의 힘을 더하기라도 한 듯이 기묘악마가 전설을 번쩍 들어 멀리 던져 버렸다. 전설이 날아간 방향은 하필이면 홀로 안개괴물과 대치하던 쪽이었다. 나의 걱정과 달리 모자 쓴 이는 아까 맞았던 전기 공격으로 무척 활기차져 있었고, 그래서 때마침 자기에게로 날아온 업계 동료는 반가운 존재였다. 변신 로봇처럼 움직여 전설을 받아낸 모자 쓴 이는 심지어 행복해 보이기까지 했다. 반대로 안개괴물에게 전설의 등장은 재앙과도 다름없어서 태양이 떠오른 뒤처럼 자취를 감추기 바빴다. 그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나를 기묘악마가 잡아 끌었다. 나는 그곳을 가로지르며 말했다.

“그렇게 직접적으로 도움을 주실 줄도 알다니 오래 살고 볼 일입니다.”

“닥쵸. 손생 파상해소 고지 대묜 나만 소내지.”

“왜이지요?”

“구롬 또 올마나 총승을 떨명서 주접을 똘까.”

가히 합리적인 행동에 나는 깊은 감명을 받았다.

“손생, 재발 오리 목쩌글 이찌 마.”

“우리 목적? 이상하게 잘 생각이 나지 않는군요. 그러고 보니 이곳은 어디요, 무얼 하는 곳인지요?”

“몽총하묜 모미 고생항다드니. 긍데 몽총한 곤 손생잉데 왜 내 모미 고생을 하능 고야? 모 이론 똥개 가튼 굥우가 다 이쏘?”

“그대, 너무 속상해 마세요. 삶이란 다 그런 거니까. 삶이 아름답다면 그건 다 미소적인 고난과 고통이 음영이 되어 반짝이기 때문이지요.”

기묘악마가 괴성을 지르며 전설을 날렸던 그대로 날 날렸고 나는 비명을 내지르며 앞, 아니 뒤를 향해 곧장 날아갔다. 추락하는 느낌이 한동안 지속되다가 어느새 내 몸이 둥둥 떠다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것은 필시 자유낙하였다. 놀랍지 않은가. 나는 기묘악마에 의해 뒤로 내던져졌는데 추락하는 느낌이 들다가 이내 중력을 느끼지 못하다니. 그와 동시에 어떤 생각이 빛처럼 반짝였다. 나는 지금 떨어지고 있다. 느낌이 그런 게 아니라 실제로 낙하하고 있는 것이다. 다리의 끝을 향해서. 그제야 앞과 뒤만으로 방향이 지시될 수 있는 이유를 이해하고 나는 깨달음의 흥분에 웃음을 참지 못했다. 그렇다면 나의 영웅, 불새는 처음부터 좀비들을 구원하고자 그랬던 것인가. 오, 투쟁. 그러나 그 흥분과 기쁨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그것은 시간의 흐름에 대한 인간의 선험적 인식과도 같은 성질의 깨달음이었다. 떨어지고 있다면 어디로 떨어지는가. 영원히 떨어질 리는 없다. 분명 언젠가는 끝이 날 텐데 그러면 나는,

죽는다.

 

 

 

천국편

물론 이 글이 쓰였다는 것만으로도 내가 죽지는 않았음이 간단하게 증명되지만, 우리는 간혹, 아니 제법 자주 결말을 빤히 아는 것에 대해서도 관심을 거두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우리의 삶에 대한 관심이다. 어차피 우리는 죽는다. 그 사실에 대해 의구심을 가질 사람이 그리 많지 않으리라 단정해도 그리 경솔한 생각은 아닐 것이다(예외에 대해 특별히 언급하지 않으면 안 되는 특이점이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으므로 그에 대해 말하자면, 자칭 특의점주의자들로 인해 나의 단정적인 생각은 조만간 경솔한 것이 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원더키디의 해가 불과 반년 조금 넘게 남은 우리의 현실을 직시해 본다면 나의 단정적인 생각을 경솔하다고 단정하는 것 또한 경솔한 것이라고 단정한대도 그것이 특별히 경솔한 것은 아닐 것이다. 막말로 우리의 진짜 원더키디의 해는 같은 숫자의 배열이 반복되는 것만큼이나 지금과 다르지 않을 게 분명한데, 특정 집단이 우려하는 신종 바이러스 전염으로 인한 디스토피아의 현실화는 아무리 생각해도 지나치기 때문이다. 훗날 우리는 2020년을 이렇게 기억할 확률이 높다. 산타클로스의 진실을 깨달은 것에 뒤지지 않는 체념의 해였다고.).

고로, 나는 죽지는 않았지만, 단언컨대 차라리 그냥 죽었다면 덜했을 공포에 떨며 등가속 운동을, 다시 말해 등가원리에 의해 관성력과 중력을 구분할 수 없는 상태로 하염없이 어디론가 떨어지고 있었다. 과학에 조예가 깊은 혹자는 당장에 나의 ‘미천한’ 지식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며 ‘이자는 사기를 치고 있다’고 분통을 터뜨릴지도 모르겠다. 그럴까 봐 뒤늦게 내가 처한 상황에 대한 비루한 묘사나마 덧붙이자면, 그때 나는 내가 ‘뒤’쪽을 향해 곧장 떨어지고 있다는 정도는 알아차릴 수 있을 만큼은 여전히 이성적이었다. 우선은 눈을 뜨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대기의 저항감을 분명히 느꼈고, 나 말고도 떨어지는 것이 꽤 있었는데 그것들 모두 상대적인 속도가 다르면서도 대체로 같은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느낌을 주었다. 그리고 고백하자면 기묘악마가 내 곁에 있었다. 실은 그가 옆에서 나에게 지금 상황에 대해 주저리주저리 설명을 해주었던 것이다(이러한 작법적인 조치를 문제 삼는다면 기묘악마가 내게 퍼부었던 저주가 현실화될 경우 그곳에서 달게 받겠다). 그는 마치 노련한 우주비행사처럼 그 상태를 즐기고 있었고 그 모습을 본 나도 어느새 평소의 태연자약함을 되찾아 상상으로도 떠올리기 어려운 온갖 공중제비를 연속으로 돌 정도였다. 그때의 후유증으로 아직까지도 나는 만성적인 어지럼증을 느끼게 되었다.

좀처럼 끝날 것 같지 않던 추락은 끝난 줄도 모르게 끝나 버려 그 과정이 구체적으로 어땠는지를 묘사하는 것이야말로 사기에 불과할 것이다. 나의 섬세하면서도 예리한 추론으로는 그때 내가 기묘악마의 만류에도 미친 듯한 공중제비를 멈추지 않았기 — 정확하게는 멈출 도리가 없었기 — 때문에 기묘악마가 나를 억지로 멈춰 세워 어딘가에 착지했을 즈음의 나는 전정기관과 반고리관에 이상이 생겨 정상적인 평형 감각을 인지할 수 없었을 것이다(그리고 그 이상은 아무래도 일시적인 것을 넘어서는 모양이다). 한참이 지나서야 나는 내가 어딘가에 누워 있다는 것을 깨닫고 양팔과 양다리를 대 자로 뻗어 안심했다. 단단한 물질적 기반이 주는 안정감이 그때만큼 여느 매트리스보다 편안하게 느껴질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인간이란 그토록이나 간사한 것을 새삼 깨달은 나는 행복에 대해서도 생각을 하기 시작했는데, 마침 느껴진 기척에 나는 고개를 돌리고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불과 9피트 남짓 떨어진 곳에 토끼 한 마리가 무 쪼가리를 입에 물고 오물거리며 정확히 내 쪽을 향해 있었다. 내가 보기에 단순히 방향이 이쪽을 향한다기보다는 아무래도 나를 보고 있는 듯했다. 뒤늦게 내가 거울을 지니고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내가 보고 있는 토끼가 어떤 기묘한 존재의 실체인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러자 어디 있다가 나타난 기묘악마가 기묘하게 중얼거렸다.

“왜 저 손생이 요기 이찌.”

즉, 저 토끼가 앞서 본 기묘한 존재들과 같은 존재라는 말이었다. 나는 온몸을 더듬어 거울을 찾으며 악마에게로 다가갔다.

“거울이 없습니다. 아무래도 어딘가에 떨어뜨린 모양이에요.”

악마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요기가 그 고우리야.”

당연히 한 번에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었고 내 뒤통수가 희생되었다. 악마는 여전히 한가하게 무를 씹느라 입을 오물거리면서도 어쩐지 섬뜩하리만치 뚫어져라 이쪽을 보고 있는 토끼를 마찬가지로 응시하며 설명했다. 이곳은 경계의 너머, 이를테면 사건의 지평선 안쪽이었다. 불가피하게 나는 블랙홀의 내부와 쿠퍼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는데 그리 유쾌한 상상은 아니었다. 그러나 내 상상의 불유쾌함이 아주 결이 다른 것은 아닌지 이곳에 들어오기 위해서는, 그러니까 들어와서도 제 정신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 거울 아닌 거을이 꼭 필요하다고 악마가 설명했다. 그것에 어떤 기제가 작용하는지 철학적으로 사유하는 것은 적어도 그때에 할 일은 아니었고 이 글을 쓰는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것은 내가 무덤까지 품고 가서 다뤄볼 만한 것이었다(어쩌면 미래의 핵융합 원자로 안에서). 아무튼 나는 거울을 통해 무언가를 들여다볼 필요가 더는 없어졌다. 나 자체가 거울 속에 있기 때문이었다. 그 자체는 납득 못 할 이유가 없어서 나는 금방 수긍하고 토끼를 향해 한 발자국 다가갔다.

“구로지 앙는 게 조을 텡데.”

“하지만 저 귀여움은 가까이 다가가고 싶은 욕망을 불러일으키는걸요. 차라리 고통에 가까운 것이 아니겠습니까.”

나는 문득 악마의 태도가 이해되었고 그제야 다시 뒤로 물러나려 했다. 그러나 한발 늦었다. 늘 그렇듯이 우리의 후회는 아무런 소용이 없는데 아마도 그것은 후회라는 것이 본질적으로 시간과 결을 같이 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흘러가는 것으로, 그래서 앞과 뒤가 있다고 느끼는 시간은 사실은 우주의 균질성과 등방성을 향한 복구, 근본에의 회귀일 따름이다. 외부적인 요인이 없다면 수면은 반드시 잔잔해지듯 우주 또한, 외부적인 요인이 없다는 전제 하에, 반드시 잔잔해지는 과정으로부터 시간이라는 것이 발생하는 것이다. 따라서 시간에 ‘뒤’는 있을 수 있어도 ‘앞’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한다면 인간의 의식 안에서만 존재한다. 무용하게 말이다. 그리고 무용한 것은 대체로 고통스럽다. 우리는 무용한 것을 통해 잠시나마 기쁨을 맛보기는 하지만, 그것은 그저 고통의 낙차를 벌릴 뿐이다. 무용한 것의 기쁨 위에 서서 우리는 눈앞에 펼쳐진 수많은 고통을 마주한다. 그래서 우리는 덧없음을 깨닫고 죽어가는 것에 대해 생각하고 우리의 유한함을 돌아보며 고통 받는다. 그것은 어느 정도는 자발적인 것인데, 내가 생각하기에 후회 역시 그러한 무용한 자발적 고통에 속한다. 물론 그것을 통해 얻는 이점도 분명히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 부분을 빼놓는다면 내가 펼쳐놓은 주장이 균형을 잃어 신빙성이 훼손될 테지만,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와는 크게 관련이 없기 때문에 생략해도 무관할 것이다.

나만큼이나 길을 잃고 방황할 독자를 위해 본론으로 들어가자면, 내가 무용한 자발적 후회를 하는 동안 눈앞에 있는 그 작고 귀엽고 한가하게 입을 오물거리던 토끼가 출산을 했다. 믿을 수 없는 건 느닷없고 급작스런 출산보다 그러는 와중에도 우리로부터 눈을 떼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게다가 이제는 그 섬뜩하기 그지없는 시선이 정확히 두 배로 불어났다는 점이었다. 제3금융권의 이자계산법도 이보다는 덜 무서울 것이다. 타고나기를 태연자약해서 간간이 편도체에 이상이 있는 것은 아니냐는 매우 우회적인 질문을 들어왔던 나는 반쯤은 이성을 잃은 채 기묘악마의 꼬리를 잡아 방패 삼아 쳐들고 다음과 같이 고래고래 소리질렀다.

“상떼 미카엘 아르칸젤레 데펜데 노스 인 프렐리오 콘트라 네퀴치암 에트 인시디아스 디아볼리 에스토 프레시디움 임페레트 일리 데우스 수플리체스 데프레카무르 투퀘, 프린쳅스 밀리치에 첼레스티스 사타남 알리오스퀘 스피리투스 말리뇨스 퀴 아드 페르디치오넴 아니마룸 페르바간투르 인 문도 디비나 비르투테 인 인페르눔 데트루데 아멘!”

동행자의 처지를 고려하지 못한 언사였다. 말을 마치고서야 나는 상황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옆을 돌아봤다. 오, 내 옆에 존재하되 부재로서 존재하는, 나의 동행자, 님은 갔습니다. 내가 잡고 있던 꼬리는 포장도 없이 싼값에 팔리는 벌크 마우스가 되어 있었고 악마의 머리인 음극선관 모니터는 그 어떤 중고상도 취급해 주지 않을 듯해 보였다. 안녕. 짧았지만 그 어느 연보다도 강렬한 연이었지요. 부디 천국으로 가길. 나는 기묘악마의 정체성에 따른 고민 끝에 다시 생각했다. 아니, 지옥으로 떨어지길 나는 바랍니다. 당신이라면 그곳에서 더 행복해할지 모르니. 또 잠깐 생각한 끝에 나는 최종적으로 빌었다. 나로서는 모르겠으니 다만 당신이 원하는 곳에 갈 수 있기를 비나이다 비나이다.

눈까지 감고서 그렇게 기묘악마를 애도한 뒤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땐 이미 주변이 토끼로 빼곡해서 감히 어딘가를 바라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마치 이런 내 처지를 알기라도 하듯 저 멀리서 빛이 — 혹은 빛을 발산하는 무언가가 다가오고 있었는데, 오로지 그 빛에 의지하면 발밑에 가득한 토끼떼와 그들의 시선을 어떻게든 잊을 수 있었다. 아쉬운 마음이 아주 조금 들지 않을 수 없게 천천히 내게로 다가온 빛 또는 빛을 발산하는 무언가의 정체는 다름 아닌 말처럼 생긴 존재였다.


결론부터 말하면, 말보다는 유니콘에 가까웠는데, 아닌 게 아니라 머리의 꼭대기에 뿔이 달린 것이 똑똑히 보였기 때문이었다. 내 생각에는 그의 광채의 근원이 아무래도 그 뿔이 아닌가 싶었지만 그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무엇보다 내게 깊은 인상을 남겼던 점에 대해 고작 특정 종의 희소성이나 빛의 특수성에 의지한다면 그것은 그 생물체를 모독하는 것일 뿐이다. 그 생물체의 우아한 걸음걸이와 가끔씩 코를 골듯 내는 아름다운 소리는 그 무엇과도 감히 견줄 수 없는 성질의 것이었다. 그런 그분께서 빛으로 눈이 부셔 감히 올려다볼 수 없는 긴 얼굴을 움직이더니, 굳이 비유하자면 오래된 독일어를 말하듯 이렇게 말했다. “무엇에 더욱 놀라야 할지 모르겠다. 그 기묘한 것에 이끌려 여기 온 사람, 아니면 그 기묘한 것에 신성한 철퇴를 내려친 일. 우열을 가리기 어렵지만 어찌 됐든 놀라운 일임에 변함은 없으니 우선 놀라는 것에 전념해야지.” 그러고는 자기명령에 복종하듯 앞발을 쳐들었는데, 영락없이 놀라하는 모습이어서 보는 내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면서도 행동 하나하나에 깃든 비단결 같은 부드러움은, 실로 월 5만원부터 시작하는 최첨단의 느낌과 크게 다르지 않아서 그동안의 긴장이 일순간에 풀어지는 듯했다. 나는 그만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고 말았고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 자체로 기묘하게도 눈앞의 존재에게 무릎 꿇는 형상이 되었다. 그러자 그분은 어쩔 줄을 몰라하며 친절하게도 얼른 나를 일으켜 세우려고 앞발로 내 어깨를 후려쳤다. 솔직히 너무 아팠기 때문에라도 나는 얼른 그분이 원하는 대로 했다. 그분은 내가 무릎 꿇었던 자리를 보고 퍽 난처해했다. 그분을 따라 아래를 내려다본 나 역시 어쩔 줄을 몰랐는데, 어느새 발에 치이게 늘어난 토끼 중 하나가 내 무릎에 깔려 쓰러진 채로 날 응시하고 있었다. 나는 그 토끼를 조심스레 받쳐 들고 그분께 간청했다.

“부디 이 토끼를 낫게 해주세요. 당신의 우울하지만 사려 깊은 감수성의 힘이라면 분명 가능할 것입니다.”

그러자 그분이 코웃음치고는 것처럼 말했다.

“이 사람은 아무래도 정상은 아닌 것 같아. 어쩌면 그것이 이 사람을 다른 사람과 구분 지어주는 유별난 점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것이 그분만의 거절법이라고 판단하고 토끼를 다시 내려놓기 위해 아래를 보았다. 그사이 토끼는 더 많이 늘어나 있었고 도저히 내려놓을 공간이 없었다. 결국 나는 여전히 날 쳐다보며 무를 씹고 있는 다친 토끼를 두 손으로 떠받치고 있어야 했다. 그러면서 그분에게 다시 말했다.

“알려 주세요. 저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요?”

“그 기묘한 것이 고생깨나 했을성싶다. 하지만 어째서 이 사람일까?”

“저도 그것이 알고 싶습니다. 왜 절까요? 저였어야만 했던 이유가 있었을까요?”

그분은 고개를 떨구고 돌아섰다. 그러고는 발 밑에 우글거리는 토끼들도 아랑곳 않고 발걸음을 내딛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그분의 발걸음이 내디딜 때마다 토끼들이 자리를 양보하는 것이 보였다. 나는 놀라움을 애써 억누르고 재빨리 그분의 뒤를 쫓아 발걸음을 내딛었다. 말없이 걷기만 하는 그분을 쫓아 고요한 숲 — 이라기보단 그에 가까운 느낌의 곳 — 속을 걷다보니 왠지 기묘악마의 소란스러운 넉살이 떠올라 나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는데 그 소리에 뒤를 돌아본 그분이 나를 관찰이라도 하듯 빤히 쳐다보았다. 나는 부끄러움에 얼굴을 붉히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사람을 돌려보내야겠다.”

나는 감격에 눈물 지었지만 토끼를 들고 있었기 때문에 눈물이 떨어지도록 내버려둘 수밖에 없었다.

“어서 빨리 이 사람을 돌려보내야 해. 성가신 건 역시 나한테 맞지 않아.”

그러고는 어딘가를 향해 소리를 쳤는데 꼭 산 정상에만 가면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사람들이 내지르는 소리와 유사해서 나도 모르게 귀를 기울여 들려올지 모를 메아리를 기대할 정도였다. 실제로 소리가 들려오기는 했다. 그러나 메아리는 아니었고, 귀를 찢을 듯한 괴성이 응답하듯 울려 퍼졌다. 나는 놀라서 토끼를 떨어뜨릴 뻔했다. 그 괴성은 짐승의 포효 같았다. 소리가 들리는 쪽을 돌아보니 빽빽이 들어찬 나무 같은 것을 재빠르게 타고 넘으며 무언가가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뭐랄까, 묘하게 보노보를 연상시키는 모습의 존재가 단숨에 활공을 하는가 싶더니 눈 깜짝할 새에 우리 앞에 섰다. 나는 그 야성적이면서도 귀여운 모습에 넋을 잃지 않을 수 없었는데, 유감스럽게도 그 보노보는 나를 힐끔 보고는 바로 고개를 돌릴 뿐이었다. 완전히 그분에게로 돌아선 보노보에게 그분이 상냥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 사람 불편해요. 어서 보내는 게 좋겠어요.”

그러자 보노보가 나를 흘기더니 말했다.

“그럴까요.”

그러고는 긴 팔을 내 쪽으로 쭉 뻗는데 너무 놀라 헉하는 소리도 낼 수 없었다. 너무나 가볍게 날 들어올린 보노보가 내 손에 들린 토끼를 매우 상반된 신중함으로 집어 바닥에 내려놓고는 어딘가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 기세에 질려 나는 입도 뻥긋 못 하고 눈을 질끈 감은 채 정신줄만 붙들고 버텼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움직임이 멈추었다. 곧바로 들려온 그분 특유의 콧소리가 이렇게 말했다.

“잠시만 던지지 말아 봐요. 마지막으로 또 무슨 허튼소리를 하는지 들어보고요. 묘하게 중독성 있어요.”

그 말에 눈을 뜬 나는, 보노보가 당장에라도 집어 던질 듯한 손에 쥐어진 채 나를 쳐다보고 있는 보노보가 당장에라도 집어 던질 듯한 손에 쥐어진 나를 발견하고 입을 떡하니 떨구고 말았다. 그러나 곧 그동안 나를 지탱해온 이성에 다시 기대어 내가 보는 것이 보노보가 당장에라도 집어 던질 듯한 손에 쥐어진 채 나를 쳐다보고 있는 보노보가 당장에라도 집어 던질 듯한 손에 쥐어진 내가 아니라 그저 커다란 거울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스스로의 유리처럼 첨예한 이성에 감탄을 금치 못했지만, 거기서 멈추지 않고 나의 사고를 드넓혔다. 아무래도 저 거울은 기묘악마가 내게 주었던 거울 같았다. 나는 생각에 잠겨 중얼거렸다.

“말할 수 없이 기묘하군. 만일 저것이 정말 기묘악마가 건넸던 거울이라면, 이곳이 그 거울 속이라고 했으니, 저 면은 거울의 앞면이라는 것인데, 어떻게 사물을 비출 수 있는 거지? 옳아, 취조실의 반투명유리와 같은 원리로구나.”

내가 흥분해 웃음을 터뜨리는 동안 그분의 콧소리 같은 목소리가 말했다.

“던져 버려요.”

그 즉시 나는 대포알처럼 던져져 거울을 깨부수고 날아갔고 그 와중에 어렴풋이 그분의 다음과 같은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가끔은 저런 이상한 사람이 쓰는 글을 읽는 것도 나쁘지 않겠죠, 라고. 분명 그렇게 들었다. 감사한 마음을 전하기 위해 가까스로 뒤를 돌아보니 토끼로 가득찬 기묘한 세상이 한눈에 보였는데, 그제야 알아볼 수 있는 것이 나를 향해 외치고 있었다. 아마도 토끼의 똥이 틀림없을 것으로 점묘화를 그리듯 정성스레 쓰여진 활자의 조합이 내게 하는 말은 다음과 같았다.

‘꺼져요’


나는 오한으로 몸을 개처럼 떨면서 벌떡 일어났다. 체크무늬 커튼이 쳐진 좁디좁은 공간이었는데 전용면적이 13제곱미터의 절반도 안 되지 싶었다. 나는 깨질 듯한 두통과 타는 듯한 갈증과 뒤집어질 듯한 울렁거림 — 그야말로 지옥의 고통 — 등에도 불구하고 무엇보다 이 관짝같이 비좁은 공간에서 엄습하는 폐쇄공포증 때문에 무작정 앞으로 달려갔다. 커튼을 젖히고 갑자기 시야가 확장되자 내 정신은 버티지 못하고……

다시 눈을 뜨자 누군가 옆에 서 있었다. 그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이렇게 말했다.

“환자분, 정신이 드세요?”

“종시는 엉재나 말짱항데 내 효빠다근 구로치가 안타니 탕보칼 이리다.” 나는 내 뺨을 후려치고 또박또박 다시 말했다(그러려고 애썼다). “종이, 종이 좀 주세요.” 나도 모르게 손이 불쑥 나가 눈앞의 사람이 들고 있던 차트를 빼앗았다. “쓰, 쓸 거 쫌…” 다시 뺨을 후려치고서, “죄송한데, 쓸 것 좀 빌려주시겠어요?”

못 볼 거라도 본 표정을 한 그가 펜을 가져다 주자 역시나 빼앗든 건네받아 나는 글을 쓰기 시작했다. 몇 시간이나 그 상태로 썼는지는 나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오래 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 식으로 글을 써본 사람은 무슨 말인지 산수만큼이나 잘 알 텐데, 보통 글 쓰는 사람들이 겸손과 자랑을 반반 섞어서 글을 ‘받아적었다’고 말하는 경우가 아마 이런 경우일 것이다. 막상 해 보니까 정말이지 ‘받아적었다’고밖에는 달리 표현할 수 없다.

그렇게 쓰고 나서야 나는 내가 있는 장소가 병원 응급실이고 내가 쓸 것을 빼앗듯이 빌린 사람이 간호사 선생님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내가 일으킨 소동 아닌 소동을 사죄했다. 자연히 내가 왜 그렇게밖에 할 수가 없었는지를 설명하게 되었는데, 이건 좀 부끄러운 일이지만, 평소 문학에 관심이 많다고 밝힌 그가 내가 ‘받아적은’ 글에도 가공할 흥미를 보이는 바람에, 사죄의 마음을 품기도 했기에 나는 단 한 글자도 수정되지 않은 날것 그대로의 초고를 생면부지의 타인에게 보이게 되었다. 몇 번을 다시 생각해도 민망한 일이었지만, 그는 초고가 지닐 수밖에 없는 한계를 제대로 알고 있는 듯했다. 그래서 자질구레한 잘못은 그대로 넘겨 주었고, 자기가 생각하기에 개선의 여지가 있는 것에 대해 굉장히 사려 있으면서도 솔직하게 이야기해 주었다. 무엇보다 내가 본(쓴) 기묘한 인물들의 원형을 귀신같이 알아맞히는 기묘함으로 나를 놀라게 했다. 응급실이란 환경이 늘 그렇듯 정신없이 바빴던 터라 더 심도깊은 이야기를 하지 못한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응급실에서 나올 때쯤에야 내가 어쩌다가 여기 오게 됐는지를 듣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되었다.

정말이지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가 물부터 벌컥벌컥 들이켜며 돌아섰을 때 눈앞에 보이는 기묘한 존재, 그의 음극선관 모니터와 특유의 성의 없는 표정에 비하면 말이다.

최의택

『방황하는 메아리』, 「편지를 쓴다는 것은, 어쩌면」, 「나비가 되어」, 「저의 아내는 좀비입니다」를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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