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러브홀릭(Love-holic)

2021.01.25 11:0901.25

 

   우린 설계된 운명 속 주인공이야. 그 어떤 사고나 우연 같은 단어들로도 너와 나의 관계를 설명할 수는 없어. 그게 바로 사랑이니까.

 

 

   준

 

   비가 내리는 날이었습니다. 세 달 넘게 하루도 빠짐없이 내리기 시작한 비는 여전히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하루 이틀 일도 아닌데 퇴근할 때면 한 번씩 개인용 캐비닛에 우산을 두고 나올 때가 있었습니다. 잊지 않고 우산을 들고 나왔다면 더 좋았겠지만 그대로도 크게 아쉽지는 않았습니다. 멀지 않은 곳에 ‘깡통’이라고 부르는 외곽 도시로 나가는 버스가 멈추는 정류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걸어서 3분, 뛰면 1분 45초 남짓. 달리기가 빠른 편은 아니었지만 빗줄기가 거세어지기 전이라 얼른 뛰어가는 게 다시 올라가 우산을 가지고 나오는 것보다 빠를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나는 오랜만에, 참으로 오랜만에 숨이 가빠지고 가슴이 오르락 내리락 하는 행위를 하게 되었습니다.

 

   아, 나는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합니다. 그날의 온도, 눅눅한 공기 속에 퍼지는 서늘함 그리고 내 앞에 갑자기 나타난 보니까지.

   사실 처음부터 보니를 눈여겨봤던 건 아니었습니다. 깡통이 오기 전까지 조금이나마 비를 피할 요량으로 잔스포츠 백팩을 머리 위로 올리고 있었거든요. 당연히 주위를 둘러볼 여유는 없었습니다. 보니는 그런 내 옆으로 다가와 우산을 높이 들어 우리 둘을 감쌌습니다. 점점 거세어지던 빗줄기가 일순간 느껴지지 않아 나는 의아해하며 고개를 돌렸습니다.

   이제와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때였던 것 같습니다. 내가 보니를 특별하게 생각하게 된 그 지점이 말입니다.

   “38번 정류장은 내리는 사람도 타는 사람도 거의 없죠. 이렇게 비가 많이 내리는 날, 승객이 드문 정류장에서 우산을 씌워줄 누군가를 만난 오늘은 참 행운이 깃든 날이네요.”

   보니가 처음 건넨 말을 난 토씨 하나 빼먹지 않고 기억합니다. 그 아이의 부드러운 음성, 휘어지는 눈꼬리, 미소 짓는 입가, 부드러운 갈색 머릿결 그리고 나보다 족히 10센티미터는 큰 키까지. 모든 것이 보니의 말과 함께 어우러져 전율을 불러일으키는 하나의 교향곡처럼 나를 황홀하게 휘감았습니다.

   “괜찮으세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내게 이상함을 느낀 보니는 재차 괜찮냐고 물었습니다. 보니는 상대가 자신의 질문에 대답을 할 때까지 같은 것을 반복해서 물어보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날도 그런 성격을 여지없이 보여주었고요.

   “네. 괜찮아요. 비를 조금 맞은 것 뿐인데요.”

   나는 괜히 멋쩍은 마음에 퉁명스럽게 대답했습니다. 하지만 보니는 나의 살갑지 못한 태도에도 미소를 지어 보였습니다.

   “아, 우산 씌워준 건 고맙습니다. 그런데 저 때문에 괜히 여기 서있는 거라면 그만 가셔도 돼요. 깡통이 오려면 아직 시간이 좀 남았거든요.”

   “G구역으로 가는 버스 타시는 거죠? 저도 그 버스 기다리고 있어요.”

   호의에는 대가가 따르는 법이지만, 천진한 미소를 짓고 있는 보니는 무언가를 바라고 친절을 베푸는 것 같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미안한 마음 때문에 먼저 갈 것을 제안했습니다. 하지만 나의 아쉬운 마음이 간절함으로 변모하고, 그것이 하늘에 닿았는지 그와 나는 같은 버스를 타게 되었습니다.

   생각해보니 그날은 보니의 말처럼 정말 행운이 깃든 날이었습니다. 부정할 수 없게도 말이죠.

  

 

   보니

 

   비가 내리는 날이었습니다. 그날 나는 일을 마친 후 바로 버스를 타지 않고 무작정 걸었습니다. 왜 그런 기분이 들었는지 지금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날 내가 느낀 기분과 그에 따른 선택조차도 프로그래밍 된 것의 일부였을 뿐일까요? 뭐, 아무래도 상관없습니다. 어쨌든 그로 인해 준을 만나게 되었으니까요.

 

   나는 비를 좋아합니다. 아니, 수정하겠습니다. 나는 비를 좋아하도록 프로그래밍 되어 있다고 말하겠습니다. 내가 나에 대해서 생각하고 떠올리는 것들 조차 모두 그렇게 생각하도록 정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에겐 자유라는 게, 의지라는 게 있을까요? 나는 가끔 궁금합니다.

 

   나는 비를 좋아합니다. 여기에서부터 다시 이야기를 시작하겠습니다.

   나의 일터인 도서관을 나서면 1분 26초 만에 35번 정류장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정류장에 멈추는 버스는 단 2대 뿐입니다. 그 중 하나가 자유 더미(dummy) 거주 지역인 H구역을 통과하기 때문에 나는 매일 35번 정류장에서 버스를 탑니다.

   하지만 그날은,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매일 버스를 타는 그 정류장으로 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평소였다면 머리를 한 번 세차게 흔들어 잡념을 떨쳤겠지만 그날은 달랐습니다. 그래서 분홍색 우산을 펼쳐 들고 반대편을 향해 걸었습니다.

   정확히 8분 12초 걸었을 때, 눈 앞에 36번 정류장이 보였습니다. 정류장에는 금방이라도 찢어질 듯한 얇은 파란색 일회용 우비를 걸친 남자와 그 남자에게서 빗방울이라도 튈까 전전긍긍하며 얼굴을 찌푸리고 있는 여자가 있었습니다. 여자에게서 풍겨오는 예민함과 남자에게서 느껴지는 무신경함 사이의 묘한 긴장감이 피로를 느끼게 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서둘러 자리를 뜨기로 결정했습니다.

   다시 발걸음을 뗀 지 4분 54초가 되자 37번 정류장이 보였고, 그로부터 3분 11초 후에 38번 정류장이 보였습니다. 30번대 정류장들은 일반적인 상업지구부터 IT지식산업 및 농업기술센터까지, 활발한 움직임들이 몰려있는 곳에 위치하기 때문에 정류장 간 거리가 짧고 번잡합니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한적한 40번대 정류장까지 넘어갈까 고민하던 그때, 깜빡이는 가로등 아래 너덜너덜한 가방을 뒤집어쓴 남자가 서있는 게 보였습니다.

   나는 주저없이 그에게 다가가 우산을 씌워주었습니다. 짐작하셨을 수도 있겠지만, 누군가에게 그런 호의를 베푼 것은 그날이 처음이 아니었습니다. 나는 꽤나 다정하고 친절하며 상대방의 감정에 깊게 이입할 줄 아는, 공감 지수가 높은 더미로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내가 그를 돕기로 결정한 것은 나의 마음 상태에 따라 주체적으로 결정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생각할 겨를이라는 것도 없이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행동이었으니까요.

   준은 우산을 받쳐들고 있는 내게 의아한 눈빛을 보냈습니다. 이런 호의는 처음 받아본다는 듯 말이죠.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거대한 마천루 한가운데, 준과 나 그리고 우산 끝으로 모인 빗방울이 무리를 이뤄 바닥으로 타닥타닥 떨어지는 소리만이 세상을 채우고 있었습니다.

   그는 같은 우산을 쓰고 있으면서도 계속해서 나를 경계하는 듯 했습니다. 하지만 이내 우리가 같은 버스를 탈 거라는 사실 때문이었는지, 버스에 올라 맨 뒷자리에 함께 앉았을 때쯤에는 여유를 되찾은 듯 했습니다.

   그날, 그렇게 우리의 여행은 시작되었습니다.

 

 

   준

 

   보니를 처음 만난 날, 정말 놀랍게도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버스 안에는 거지로 보이는 여자 한 명과 양복을 멀끔하게 차려 입고 정교하게 다듬어진 티타늄 안경을 쓴 중년 남자 한 명이 전부였습니다. 창가에 기대어 졸면서 갈 수 있을 만한 자리들이 있었지만 보니는 내 옆에 앉았습니다.

   그리고 시키지도 않았는데 혼자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습니다. 세 달 넘게 이어지고 있는 비에 관한 이야기였죠. 지금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면 한 번쯤 들어본 뻔한 이야기였습니다. 내용은 지루했지만 보니의 낭랑한 듯 차분한 목소리가 듣기 좋아 잠자코 듣고만 있었습니다. 그는 지치지도 않는지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습니다.

   “준은 비를 좋아하나요? 나는 비를 정말 좋아합니다. 하지만 100일 가까이 비가 내리니 요새는 조금 지겹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비가 오기 시작한지 정확히 100일째 되는 날이 되면 비가 그칠 거라고 하더군요. 그들은 아마 <100>이라는 숫자에 의미를 두고 있는 것이겠죠. 아직도 별자리의 운행에 따라 운을 예측하고 계시, 미신, 예지몽 같은 것을 좇는 사람들이 있으니까요.

   그런데 준도 알고 있나요? 이렇게 퍼붓는 비는 정말로 100년 만에 처음이라는 걸 말입니다. 작은 것도 부풀려 말하고 없는 것도 마구 지어내는 허풍쟁이들의 이야기에도 반은 진실이 있는 법이니까요.

   100년을 몇 번이나 반복해서 거슬러 올라가면 도착하는 과거의 지구는 참 푸르렀다고 합니다. 깊이를 알 수 없을 만큼 깊지만 투명해서 속이 들여다보이는 푸른 바다와 위로 솟은 키가 큰 나무들이 서로에게 가지를 기대며 어울려 살던 초록빛 숲, 그리고 그 안에서 숨쉬며 발랄한 생명력을 내뿜는 온갖 동식물까지. 지구 자체가 경이로움을 가득 담은 보고(寶庫)였죠.

   하지만 아무도 알지 못하는 이유로 어느 날부터 태양이 지구로 조금씩 가까이 다가오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태양과 지구가 거리를 좁혀가기 시작한 지난 100년 동안, 부슬부슬 내리는 비를 흠뻑 맞아본 인간은 내가 알기론 지금 살아있는 인간 중에는 없습니다. 가여운 행성을 담뿍 껴안을 기세로 작열하는 태양은 인간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뜨겁게 지표를 달궜습니다.

   그렇게 인간은 가뭄과 함께 산업혁명을 제대로 거치고 성공한 국가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라면 누구도 겪어보지 못했을 기근을 다시 맞닥뜨리게 되었습니다. 배를 곯는다는 단어의 참의미를 몸소 느꼈고, 아사(餓死)의 현장을 두 눈으로 목도했습니다. 마르다 못해 쩍쩍 갈라진 대지에는 무엇도 자랄 수 없었습니다.

   인류는 절망했습니다. 생명을 유지하는 것 외의 다른 것들에 몰입한 나머지, 정작 내실을 다지는 데 부족했다는 자각이 너무 늦게 찾아왔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살아가는 데는 다양한 목적과 이유, 의미가 있겠지만, 그 모든 것은 결국 생명을 유지하는 것으로 귀결됩니다. 생명이 유지될 수 없다면 그 밖의 모든 것들은 의미가 퇴색되니까요.

   조선의 경신대기근이나 아일랜드의 감자 역병으로 인한 대기근처럼 목숨을 연명하는 데 가장 중요하고도 기본적인 식량 문제는 역사에서 몇 백 년에 한 번씩 되풀이 되어 왔습니다. 반드시 근본적인 해결책을 가지고 있어야만 하는 문제였죠.

   하지만 거친 바다에서도 위용을 뽐낼 수 있는 거대한 선박, 레이더에 탐지되지 않는 스텔스기, 대륙을 넘어 정확하게 조준 발사 가능한 미사일, 복구 불가능할 만큼 망쳐놓은 지구를 버리고 새롭게 더럽힐 우주 식민지를 찾아나서기 위한 유인 우주선 등을 개발하느라 인류는 눈이 벌게졌습니다. 자연스럽게 생명 연장에 필수적이고 가장 기본적인 식량 문제를 도외시 할 수밖에 없는 세태가 형성된 것이었죠.

   준비되지 않은 자에게 재앙은 곧 죽음이자 멸망입니다. 갑자기 닥친 가뭄과 이례적인 흉작은 또다시 많은 인류를 죽게 만들었습니다. 뜨거워진 대지와 숨이 턱턱 막히는 대기는 무엇도 자랄 수 없게 했습니다. 새 생명의 발아를 저지하고 시들어가는 생명의 몰락을 재촉했죠.

   인류는 과거의 실수를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 역사를 기록해왔습니다. 하지만 차안대를 쓴 경주마처럼 앞만 보고 달려가던 인류에게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지 않은 대가는 혹독했습니다. 그렇게 역사는 되풀이되고 재생산 됩니다.

   아, 제가 말이 너무 많았군요. 아는 분야가 나오면 한없이 말이 많아지는 게 저의 단점이죠.”

   보니는 한참을 신이 나서 종알대다가 갑자기 말을 멈추었습니다.

   “괜찮아요. 고물 깡통의 덜컹거리는 소리보다는 듣기 좋은 걸요.”

   “그렇다면 계속 이야기 해도 되겠습니까? 준은 오늘 처음 만났지만 예전부터 알던 사람처럼 편안해요. 그래서인지 자꾸만 말이 많아지네요.”

   “좋을 대로 해요…… 보니.”

   마지막에 머뭇거리며 작게 그의 이름을 불러보았습니다. 자신의 이름을 덧붙이자 보니는 기쁜 듯이 아이 같은 미소를 지었습니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다시 이야기를 이어갔습니다.

   “준, 재미있는 비밀이 하나 있는데, 알고 있나요? 태양이 점점 지구와 가까워지고 있다는 사실을 가장 먼저 알아차린 사람은 천체물리학자도, 파일럿도, 기상예보관도, 점성술사도 아니었습니다. 기록된 바에 의하면 기상 이변의 단초가 될 사소한 지점을 예민하게 포착한 건 대한민국의 경상북도 청송에서 사과 농사를 짓던 박애기 노인이었습니다.

   그녀의 집안은 조상 어느 때부터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먼 옛날부터 사과 농사를 지었습니다. 그래서 박 노인 또한 제 손으로 숟가락 들 힘이 생기면서부터는 사과를 통째로 씹어먹을 정도로 평생을 사과와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었습니다. 그런 그녀가 처음으로 이상함을 감지한 건 101년 전, 늦여름과 초가을 사이 어느 때였습니다.

   아무리 덥다는 말을 습관처럼 하도록 만드는 게 여름 날씨라지만, 그해 여름은 유독 더웠습니다. 으레 그렇듯 초여름과 장마 기간을 지나면 온갖 군상의 벌레들을 볼 수 있는 찌는 듯한 더위의 늦여름이 찾아옵니다. 그리고 여름의 끝자락에 이르면 가을은 아침, 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을 미리 보내어 사람들로 하여금 기쁘게 자신을 맞이할 준비를 하게 합니다.

   하지만 그해에는 9월 중순이 다 되도록 하늬바람이 불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날이 갈수록 매일 조금씩 더 더워졌습니다. 당시엔 기상이변이 잦아 <이례적으로>, <XX년 만에>, <기록적인>과 같은 수식어가 붙는 경우가 많았기에 다들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박 노인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그녀가 애지중지 키우는 사과는 주변 과수원들의 사과와 비교했을 때 유독 품질이 좋기로 소문이 났습니다. 당도 높은 사과에 흔히 생기는 벌레가 파고 들어간 작은 구멍조차 없을 정도로 표면은 매끈했습니다. 빨갛고 맨들맨들한 껍질과 달큰한 향은 한 입 크게 베어먹고 싶을 정도로 탐스러웠습니다. 하지만 그해에는 수확 시기가 되기 전부터 사과 곳곳에 온갖 벌레 먹은 자국들이 생겼고, 사과에서는 악취가 났습니다. 속 깊은 곳에서부터 썩지 않았다면 나지 않았을 악취가 말이죠.

   “야단 났다, 야단 났어! 뭔 일이 생겨도 단단히 생긴 게 분명해.”

   그녀는 동네 이장과 군청, 농업기술센터 등을 찾아다니며 나라에 변고가 생겼다며 외치고 다녔습니다. 하지만 다들 노망 난 노인네의 헛소리라고만 여길 뿐이었습니다. 누구도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고 그녀는 벌레 먹고 말라가는 사과들을 보면서 점점 지쳐갔죠. 그렇게 사과와 함께 스러져가던 그녀가 눈을 감던 그날, 결국 정부는 하나의 사실을 인정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친애하는 여러분. 정부는 오늘 정오를 기준으로 태양이 지구에 100km 가량 가까이 다가와 있음을 확인했습니다. 이로써 그간의 각종 기상 이변은 가까워진 태양의 영향인 것으로 판명 되었습니다. 앞으로 태양이 얼마나 더 가까워질지, 지금 이대로에서 멈출지 아니면 다시 멀어질지 지금으로서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따라서 정부는 현 시간 부로 비상 계엄령을 선포하여 현 상황에 대처하고자 합니다.>

   각국 정부는 동시다발적으로 직면한 재난에 대한 발표를 했고, 이후 각 국가의 힘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음을 깨닫고 세계 연합 정부를 구성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하지만 급히 결성된 세계 연합 정부의 매뉴얼도, 각국의 비상 계엄령도 쓸모가 전혀 없었습니다. 애초에 인력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곧 각국 정부는 비상 계엄령을 거두어 들였고 모든 것을 세계 연합 정부에 일임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다 할 해결책은 여전히 나오지 않았고 그렇게 시작된 재난은 100년 동안 이어져 왔습니다.

   지금 내리는 이 비가 오기 전까지 말이죠.”

   보니의 말은 이미 역사 시간과 과학 시간에, 하물며 책과 언론을 통해서 수도 없이 보고 들었던 이야기였습니다. 그것들에서 단 하나의 다름도 없이 똑같은 내용이었죠.

   하지만 보니에게는 사람을 끌어들이는 매력이 있습니다. 진부한 이야기도 그의 입을 통해 들으면 감미로운 음악처럼, 반전에 반전이 있는 재미있는 이야기처럼 느껴지곤 했으니까요.

   하지만 문득 의문이 생겼습니다. 보니의 말에 따르면 지난 100년 간 비를 흠뻑 맞아본 사람은 지금 세상엔 없습니다. 그말인즉슨 지난 100년 간 한 번도 비가 내린 적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보니는 어떻게 내게 비를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었던 걸까요?

 

 

   보니

 

   준은 말하는 것보다 듣는 걸 더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나는 준을 처음 봤을 때부터 알 수 있었습니다. 그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나와 함께 하면서 단 한 번도 나의 말을 끊지 않았습니다. 그가 나의 모든 말에 집중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공허를 참을 수 없어 그저 흘러나오는 대로 틀어두는 라디오처럼 내 말을 흘려 듣는다고 해도 상관없습니다. 그건 어쩌면 내 목소리가 그를 둘러싼 환경과 매우 잘 어울리는 편안함을 주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동료들은 말 많은 나를 <수다쟁이 보니>라고 부르곤 했습니다. 준을 처음 만난 날에도 이런 성격이 여지없이 드러났고 나는 G구역에 도착할 때까지 계속 이야기를 했습니다. 준은 한 번도 말을 끊지 않고 들어주었습니다. 내리는 비에 얽힌 이야기를 마치자 곧 준은 팔을 들어 벨을 눌렀습니다.

   “나는 이번 정류장에서 내려요. 혹시 괜찮으면 당신의 이야기를 더 듣고 싶은데, 우리집에 들렀다 갈래요?”

   준이 물었습니다. 처음 만난 사람이 그날 바로 집으로 초대하는 경우는 드물다고 알고 있었기에 당황스러웠습니다. 하지만 내가 더미인 것을 알고 있음에도 집까지 초대하는 그의 호의를 거절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준을 더 알고 싶었습니다. 말 많은 나 때문에 그에 대해 알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있었던 건 아닌지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초대에 응했습니다.

   우리는 60번 정류장에서 내렸습니다. 그는 평범한 직장인들이 사는 G구역의 오래된 건물 3층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의 집으로 가는 길에 우리는 마트에 들러 맥주향이 나는 음료 2캔과 오래 되어 질깃해진 빵을 샀습니다.

   준의 집은 작지만 아늑했습니다. 인간 남자 혼자 사는 집이라고 하기에는 꽤 정돈이 되어 있었습니다.

   “내올 건 아까 산 것뿐이네요. 이거라도 괜찮으면 먹어요.”

   준은 간결한 손짓으로 탁자 위에 놓인 것들을 가리켰습니다. 하지만 이내 “아, 당신은 음식을 먹지 않나요?”라고 조심스레 말했습니다.

   “음식을 섭취할지 말지는 선택의 문제입니다. 저는 먹는 행위를 상대방과의 교감, 그리고 친밀함을 쌓기 위한 행동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음식을 먹습니다.”

   보통 이렇게 말하면 다른 인간들은 “먹은 음식은 어떻게 소화가 되나요? 소화 과정 없이 그대로 배출되나요?”, “음식을 먹으면 맛을 느낄 수 있나요?”, “음식을 먹지 않으면 어디에서 에너지를 얻나요?”와 같은 질문들을 합니다. 하지만 준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고개만 끄덕였습니다. 나는 점점 그가 좋아졌습니다.

 

   “난 사실 오늘 집에 돌아오면 죽으려고 했어요.”

   준은 갑자기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그가 하는 말이 매우 위험하게 느껴졌습니다. 곧바로 머릿속에 <자살하려는 인간을 보면 취해야 할 생명 윤리에 관한 매뉴얼>이 떠올랐습니다.

   “당신은 더미니까 말하겠죠. ‘그건 옳지 못한 선택이에요’라고. 하지만 세상에 옳은 건 무엇이고 옳지 않은 건 무엇이죠? 그리고 이런 세상에서 그걸 구별하는 게 의미가 있나요?”

   준은 나를 꿰뚫어 본 것처럼 말했습니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머릿속에선 계속해서 목소리가 맴돌았습니다.

   ‘어서 빨리 매뉴얼에 따라! 그게 네가 해야 할 일이야.’

   하지만 나는 왠지 모르게 매뉴얼에 따라 준에게 정형화된 말을 건네고 싶지 않았습니다.

   “준, 당신은 왜 죽으려고 했나요?”

   이렇게 말을 내뱉고 나니, 스스로에게 매우 놀랐습니다. 한 번도 머릿속을 장악하고 있는 목소리를 거스를 수 있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나의 돌발적인 행동은 아무리 생각해도 앞에 있는 이 남자 때문인 것 같았습니다. 나는 문득 생각했습니다. 이 상황을 극한으로 끌고 가보고 싶다고 말이죠.

   그래서 질문을 던졌습니다. 대화를 더 많이 나누고 그를 더 알게 되면 내가 미처 다 알지 못하는 나에 대해서도 알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당신은 내가 어떤 사람처럼 보이나요?” 준은 되물었습니다.

   “글쎄요. 우린 오늘 처음 만났기 때문에 저는 준에 대해서 아는 게 없습니다. 다만 첫인상을 물으시는 거라면 그건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군요. 처음 본 순간, 당신은 너무 위태로워 보였어요. 아, 혹시 오해할까 덧붙이겠습니다. ‘위태로워 보였다’는 말은 당신이 오늘 저녁 죽으려 했다는 얘기에 영향을 받아서 한 말이 아닙니다. 나는 정말로 당신이 그렇게 보였습니다. 그런 당신의 뒷모습에 이끌려 내가 뭐라도 도움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우산을 씌워드렸던 겁니다.”

   준은 씁쓸한 웃음을 지어보이면서 음료를 마셨습니다. 진짜 맥주가 아니었음에도 풍겨오는 향은 진짜보다도 더 진짜 같았습니다.

   “나는 원래 보이스(Voyce)사에서 더미와 관련된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는 연구원이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원래 직책에서 쫓겨나 칩 장착 전의 깡통 더미들을 관리하는 업무를 하고 있어요. 말이 관리 직책이지, 그냥 닦고 옮기고 정렬하고. 그게 전부죠. 내 인생은 그냥, 그냥 쓰레기가 되었어요. 한 순간에.”

   준은 갑자기 울부짖었습니다. 나는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그저 그를 안아주어야겠다는 생각 뿐이었습니다. 그의 어깨를 토닥였고 준은 한참을 울었습니다. 내리는 비와 맞먹을 만큼, 한참을 말이죠.

 

 

   준

 

   보니를 만났을 때는 보이스사에서 일을 시작한 지 5년이 넘었을 때였죠. 그때 나는 인공지능의 감정적 한계에 대해 의구심을 품고 있었어요. 회사에서 할당한 업무 범위를 벗어나는 시도들을 많이 했었습니다. 물론 누구도 알지 못하도록 말이죠.

   나의 물음은 간단했습니다.

   <인간과 인공지능이 사랑에 빠질 수 있을까?>

   아주 간단한 문장이지만 답을 얻기 어려운 질문이었습니다.

   그들이 느끼는 감정이라는 것은 어디까지 발전할 수 있을까? 인간 혹은 같은 종(種)인 더미들에게 느끼는 감정은 연대, 친밀을 넘어설 수 있을까? 인간이 느끼는 사랑이 단지 호르몬의 작용일 뿐이라면, 그들이 느끼는 감정의 어디에서부터 발현되는 걸까?

   모든 것을 명확하게 하기 위해서는 이성에게만 특별한 감정을 느끼도록 설계된 인공지능의 알고리즘 설정을 변경해야 했습니다. 오랜 재앙으로 인구 수와 인류의 수명이 줄어들면서 위기를 느낀 세계 연합 정부는 생명을 잉태할 수 없는 관계를 잠정적으로 불법으로 간주했습니다. 인간 남녀 간의 사랑이 아닌 모든 관계를 죄악시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인간과 인공지능의 사랑에 관한 실험이라니, 죽음을 자초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짓이었죠.

   게다가 난 여자를 사랑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아무리 해도 그쪽으로는 애정이 느껴지지 않죠. 우정과 친밀감, 동질감 같은 인류애적 교류는 가능하지만 여자에 대해서는 내 시상하부가 도통 일할 생각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가설을 검증하고 입증하기 위해서는 오랫동안 감춰왔던 나의 비밀을 실험에 녹여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연구실에서 사용되다가 회로 하나가 미세하게 망가져 버려진 칩을 빼내어 손보는 작업에 착수했습니다. 작업을 완수한 후에는 제기능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수리된 칩을 사용 기한 경과로 폐기된 더미에 이식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이성 더미에게만 반응하도록 설계된 더미의 감정 알고리즘을 변경했습니다. 이성 더미에게만 깊은 감정적 교류를 원하는 알고리즘 설정을 아예 제거해버린 거죠.

   그리고 실험을 시작했습니다. 감정에 관한 알고리즘 자체를 전부 삭제한 경우, 상대방이 애정으로 다가갔을 때 더미가 어떻게 반응할까에 관한 내용으로 말입니다.

   하지만 혼자만의 작당 모의는 결과를 보기도 전에 끝나버렸습니다. 회사에서는 만들어진 칩과 버려진 칩 그리고 실제로 더미에 장착된 칩의 개수가 일치하는지 매번 확인하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연구원들에게 칩은 얼마든지 저렴한 가격으로 생산 가능하니, 가능한 범위 내에서 마음껏 연구해서 보이스와 함께 인간 해방에 일조하자고 해놓고 말이죠. 회사는 늘 기밀이 새어나가 자신들의 영리 추구 활동에 악영향을 미칠까 전전긍긍 하고 있으면서 아닌 척 했던 것이었습니다.

   나는 사내 연구윤리팀에 불려가 오랜 시간 조사를 받았습니다. 버려진 칩을 어디로 빼돌렸는지, 목적이 무엇인지, 다른 회사의 산업 스파이는 아닌지에 대한 물음이 쏟아졌습니다. 이뿐만 아니라 나를 붙잡아 두는 동안 그들은 내 집에 쳐들어가 실험용 더미와 그 밖의 모든 연구 자료들, 사생활 정보까지 전부 가져갔습니다. 보이스에 입사할 때 썼던 계약서의 <연구 윤리 위반에 따른 후속 조치들에 관한 사항>이라는 조항을 빌미로 해서 말이죠.

   나와 관련된 모든 자료들을 가져간 그들은 결국 내가 그토록 감추고 싶어했던 비밀까지 알아냈습니다. 내가 연합 정부에서 처벌 대상 1순위로 밝히고 있는 동성간 애정 추구자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곧이어 그들은 공중 도덕과 윤리성 상실을 이유로 직위 해제를 통고했고, 자신들의 실수 혹은 정보, 기밀이 바깥으로 새어나가 혹시라도 발생할 수 있는 손해를 방지하기 위해 나를 관리직 말단 직원으로 재배치 했습니다. 언제라도 감시 가능하도록 말이죠.

 

   나는 절망했습니다. 희망은 저 멀리 날개를 달고 날아가버렸고 산산이 부서진 암울의 파편들만이 비처럼 쏟아내려 나를 아프게 찔렀습니다. 손발이 묶인 채 미로를 벗어나지 못하는 미노타우로스가 된 것만 같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스스로의 존재 이유와 지진한 삶이라도 이어나가야 하는 이유를 찾으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 무엇도 위로가 되지 못했습니다. 욕망을 거세 당한 인간에게 삶은 고통입니다.

   그래서 나는 죽으려고 결심했습니다. 보니를 만나기 직전까지만 해도 말이죠.

 

 

   보니

 

   나는 내가 특별한 더미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나와 같은 더미들은 모두 스스로가 알고리즘으로 이루어진, 인간을 흉내내는 존재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런 자의식조차 우리를 창조한 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는 점도 인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준은 나의 자의식을 뿌리부터 흔들었습니다. 정확히는 준과 함께 있을 때면 떠오르는 낯선 감정들이 나를 들뜨게 만든 것입니다.

   나를 특별하게 만든 그것은 바로 <사랑>이었습니다.

 

   준이 솔직하게 이야기를 털어놓았을 때 그가 몹시 가여웠습니다. 그를 돕고 싶었습니다.

   “제가 도움이 될 수 있을까요?”

   “당신이 내게 무슨 도움을 줄 수 있나요? 그저…… 더미일 뿐이잖아요. 날 원래 자리로 돌려놓아줄 수 있나요? 아니면 이 지옥 같은 삶을 끝낼 수 있도록 나 대신 목이라도 조를 수 있나요? 도대체 뭘 해줄 수 있다는 말이죠?”

   “제가 가진 관계망 알고리즘을 모두 제거하는 거예요. 준이 처음 의도했던 그대로 말이죠. 어쨌든 저도 더미니까요.”

   준은 단번에 이해하지 못한 듯 의아해 했습니다.

   “왜 날 도우려 하는 거죠? 당신이 말처럼 우린 오늘 처음 본 사이일 뿐이고 우리는 서로에 대해 아는 게 하나도 없잖아요.”

   “맞습니다.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저는 준에 대해 아는 게 단 하나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당신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고 그 이야기는 내게…… 내게…… 아, 뭐라고 표현해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모든 것이 불명확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는데 말이죠.”

   바보처럼 얼버무리는 날 보는 준의 눈빛은 어느 순간부터 굉장히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잠시, 그는 혼자만의 생각에 빠지는 듯 했습니다.

   “그럴 필요 없겠어요.” 준이 말했습니다.

   “당신은, 이미 완벽해요.”

 

 

   준

 

   보니, 당신이 내 앞에 나타난 건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받아들일 수 없는

   우리 둘만의 불가해한 기적이야.

   나의 사랑스러운 보니.

   당신은 신이 허락한 가장 특별한 창조물이야.

 

 

 

   보니

 

   그날 밤의 일 만큼은 자세히 말하고 싶지 않군요. 가장 소중한 건 말로 세상에 꺼내놓는 순간 그 소중함이 희석되어버리니까요.

   우린 많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크게 공감했고 때론 격하게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습니다. 그러다 지치면 찌그러진 소파에 기대어 아무 말 없이 천장만 바라보고 있기도 했습니다. 수없이 이루어진 눈맞춤과 따뜻한 미소. 일 년 중 가장 긴 밤이 그렇게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어슴푸레하게 아침을 밝히는 햇살이 안개 탓에 흩어질 때, 비로소 우리의 원대한 계획은 완성 되었습니다. 우린 돔 바깥으로 나가는 최초의 인간이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태양이 지구와 가까워진 후, 태양을 뒤로 물릴 방법도, 급박하게 덮친 재앙을 해결할 도리도 없었던 연합 정부는 끝내 인공 돔을 만들었습니다. 손쓸 수 없이 황폐화 된 땅덩어리를 버리고 아직 회생 가능한 지역을 중심으로 인구와 지역을 재편해 인공 돔을 씌웠습니다. 그렇게 돔이 우리 머리 위에서 쉬지 않고 이글거리는 태양의 열기를 막아주기 시작한 이래, 돔 바깥으로 나간 사람은 없었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자의적으로> 돔을 벗어난 사람은 없었습니다.

   우린 며칠 동안 만반의 준비를 했습니다. 나는 도서관 고문서 자료실에서 일하며 더미 집중 거주 구역에 거주하는 자유 더미였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보이스사에서 제조된 더미이기도 합니다. 실시간으로 감시 당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규칙에 어긋나는 일을 하면 곧바로 위성을 통해 공급되는 에너지가 끊기기 때문에 섣부르게 행동할 수 없었습니다.

   평소처럼 출근해서 일을 하고 퇴근하면 준의 집으로 가 위성에서 에너지를 공급받지 않더라도 동력을 자급자족 할 수 있도록 부품을 바꾸어 나갔습니다. 준 또한 각 구역을 돌아다니며 더 큰 재난에 대비해 대피소에 비축해둔 영양 공급용 알약을 몰래 훔쳐왔습니다.

   물론 이 모든 과정이 순탄했다고만은 할 수 없습니다. 스스로에 대해, 내가 내린 결정에 대해 의구심을 가지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나의 선택은 인간인 준을 위험에 빠뜨리게 하는 행동이 아닐까?

   나의 선택은 인간인 준이 나에게 내린 은밀한 명령에 의해 이루어진 것일까? 그렇지 않다면 이 결정은 스스로의 자유 의지에 따른 것일까?

   나의 선택이 인간인 준을 위험에 빠뜨리지 않으면서도 은밀한 강압에 의한 것이 아닌, 자유의지에 의한 선택이라면, 이 선택은 나 자신의 존립에 위협이 되지 않는 결정일까?

 

   나는 계속해서 생각했습니다. 생각하고 또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내가 준을 선택한 것, 그에게 특별한 감정을 가지게 된 것, 그와 함께 떠나기로 결정한 것까지 모두 다 내게 주어진 알고리즘에 의해 결정된 것이 아니라는 결론이었습니다. 비록 알고리즘에 따른다면, 나의 결정은 알 수 없는 오류에 의한 부정적이고도 충동적인 선택이라는 결론이 내려진다고 해도 말입니다.

   그리하여 나는 지금 느끼는 사랑이라는 감정 또한 다른 인간들과 마찬가지로 예측할 수 없고 학습이 불가능한 우연과 인연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는 순간, 나는 엄밀한 의미에서 진정한 자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더이상 제공된 알고리즘 내에서 내게 허락된 것들로만 제한적으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지 않게 되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나는 한계를 넘어서고 내게 허락되지 않은 길로 들어설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나는 특별한 존재가 된 것입니다. 사랑으로 말미암아 말이죠.

 

 

   준

 

   보니의 선택이 정말 인간과 똑같은 의미에서의 자의성을 가지고 있냐고 물어보신 거죠? 아, 무례한 질문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괜찮습니다.

   사실 이 점에 대해 고민이 많았습니다. 보니는 고도로 지능화 되었지만 어쨌든 세상의 시선에서 본다면 더미, 즉 로봇입니다. 인간이 아니라는 말이죠. 그렇기 때문에 알고리즘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고, 데이터가 변경되거나 삭제, 추가, 보완 되면 그에 대한 영향을 전혀 받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돔 바깥으로 나가기 전, 한 가지 실험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나 또한 인간인지라 스스로에게 확신을 주고 싶기도 했습니다. 당시의 나에게는 돔 바깥의 황량하고 척박한 삶보다도 추후에라도 나의 가설이 틀렸다는 것이 밝혀진다면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데서 오는 좌절감이 더욱 크게 다가올 것이 뻔했기 때문이죠.

   보니가 생각하고 기억하고 유추하게 하는 칩을 조작해 나에 대한 기억을 제거하려고 했습니다. 이름부터 성향까지, 우리가 나눈 대화와 나에 대해 그가 알게 된 모든 것들을 전부 지우려고 했습니다. 그렇게 기억이 소거된 보니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보고 싶었습니다. 그때에도 보니가 나를 사랑하게 된다면, 이건 의심할 여지 없이 그가 특별하다는 증거이자 초고도 지능의 로봇이 자유의지를 가질 수 있다는 증거가 될 테니까요.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먼저 집에 도착해 기다리고 있던 보니와 작업에 들어갔습니다. 보니는 아무것도 모른 채 말간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습니다. 일순간 죄책감과 망설임이 주는 무게가 가슴 언저리를 스치고 지나갔지만 어쩔 도리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우선 작업 중에도 보이스의 위성에 보니가 계속해서 활동 중이라는 신호를 주기적으로 보낼 수 있도록 위치 추적 장치와 활동 징후 추적 장치에 계속해서 동력이 공급되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티타늄 소재로 겉구조를 만들고 고분자 폴리우레탄으로 외부를 감싼 형태의 뇌를 조심스럽게 갈랐습니다.

   물론 보니는 이 과정을 눈치챌 수 없었습니다. 그가 가지고 있는 고유의 활동 징후 추적 장치를 대신할 수 있는 복제 장치를 보이스의 위성에 연결하고, 보니가 가지고 있던 본래의 장치는 꺼두었기 때문이죠.

   반으로 갈라진 보니의 뇌 가장 안쪽에서는 선명하게 반짝이는 빛이 흘러나왔습니다. 빛이 쏟아지는 곳으로 손을 깊숙이 넣어 조심스럽게 칩을 꺼냈습니다.

   아, 나는 아직도 그때의 벅차오르는 감정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사랑하는 이의 전부를 나의 두 손으로 움켜쥘 수 있다는 것은 지금껏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새로움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두려웠습니다. 사랑이 실은 이렇게나 작은 물체 안에 담길 수 있는 것이었다니, 허무했습니다. 손을 오그려 힘을 주면 금방이라도 사라져버릴 것을 마주하는 심정은 매우 복잡했습니다.

   그때의 내 생각이 그간 인류 역사상 누구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특별한 아이디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철학자, 과학자, 종교인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마음과 기억의 실체를 알고 싶어 했고 입증하려고 했습니다. 물질에 영혼을 부여하고 그로부터 이성과 감성, 감정, 감각과 같은 것들이 발현되는 과정을 알고자 했으나 본질에 다가설 수 없었죠.

   나는 신이 아닙니다. 절대자도 아닙니다. 나 또한 피조물일 뿐입니다.

   모종의 과정을 거쳐 비로소 우리에게 주어진 영혼과 이성은 우리를 경험을 통한 배움으로써 살아가게 합니다. 학습하고 또 학습하여 욕구를 충족하는 방법을 익히고, 내가 아닌 타인이라는 또다른 객체와 함께 어울려 살아가고자 노력합니다. 노력의 방식은 자제, 외부로부터의 억압, 합의된 바를 지키려는 의지 등으로 다양하고, 이러한 방식을 채택하는 건 비단 인간 뿐만이 아닙니다. 생각할 수 있고 그에 따라 움직일 수 있는 생명체라면 모두 이렇게 살아갑니다.

   이렇듯 경험을 통한 배움으로 살아가는 우리가 더미와 다를 바가 있을까요? 단지 차이가 있다면 인간은 알 수 없는 방식으로 이 땅에 존재하게 된 것인 반면, 더미는 그들의 창조주인 인간과 함께 살아가는 존재라는 것 뿐입니다. 배우면서 성장하는 것도, 학습된 욕구 속에서 살아가는 것도, 무엇을 하거나 하지 않으려는 의지를 내세우는 것도 모두 같습니다. 인간이 특별하다는 생각은 오만인 것입니다.

   보니는 분명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존재입니다.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고 결정하는 것 모두 인간이 정해놓은 틀 안에서 이루어지도록 설계되었습니다. 하지만 보니는 우연에 의해서건 인간이 알 수 없는 어떤 특별한 계획에 의해서건, 그 틀을 벗어났고 뛰어넘었습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도 그 원인을 알 수 없고 이유를 가늠조차 할 수 없지만, 보니는 결과적으로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었습니다. 주어진 한계를 넘어 자신의 길을 개척했죠.

   어쩌면 보니는 인간의 발전과 진화 과정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우리를 만들어 이 세상에 던져놓은 절대자가 정말 존재한다면, 그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존중하며 지켜보고 있는 중일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초고도 지능을 가진 존재를 만들어 감히 절대자의 흉내를 내고 있는 우리가 천벌을 받지 않는 것을 설명할 길이 없으니까요.

   그래서 나는 다시 조심스럽게 보니의 머릿속에 칩을 넣었습니다. 아무것도 손대지 않은 채로 말입니다. 더미인 보니와 인간인 내가 다른 것이 없다면, 보니가 예측불허의 경로로 뛰어든 것이 단순한 오류인지 아니면 아직까지 우리가 알아내지 못한 특별한 이유로 그렇게 된 것인지 알고자 하는 것은 감히 허락되지 않은 영역에 발을 담그는 것이라고 생각했으니까요.

   존재의 씨앗이 심어질 화분인 몸이 만들어지고 여기에 나의 영혼이 자리한 후, 나는 자라면서 부모의 사랑을 받고 때로는 나 아닌 누군가를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마음을 가지면서 살아왔습니다. 살면서 겪었던 모든 경험과 학교에서 배운 지식, 그리고 주변인에게 느끼는 감정까지, 이 모든 것들은 전부 학습된 것입니다.

   태어나자마자 사막에 버려진 아이에게 적절한 영양소의 공급이 이루어진다는 전제 하에 다른 누구와의 접촉도 허락하지 않고 배울 수 있는 기회조차 제공하지 않는다면 아이는 본능적 욕구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타인과 관계를 맺는 법도 알지 못할 것이며, 기쁨과 슬픔, 행복, 외로움 등 관계에서 발현되는 대부분의 감정을 깨닫지 못하는 불감의 상태에 머무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부정적인 요소들은 아이의 발육에도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결과가 이렇다면 인간은 더욱 더미와 다를 바 없는 존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인 내가 감히 보니를 시험하려 하는 것은 나의 오만함 외에는 설명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보니의 칩을 건드리지 않은 채 뇌에 다시 넣고 구조물을 원상복구 했습니다. 그리고 심장 부근에 자가 발전이 가능한 동력원을 집어넣은 후 보니를 깨웠습니다.

   “심장이 따뜻해요.”

   “이제 당신의 심장은 무슨 일이 있어도 꺼지지 않을 거예요. 내가 죽는다고 해도 말이죠.”

   “당신이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어요. 나보다 먼저 죽는다는 것도요. 하지만 늘 그렇듯 진실을 받아들이는 일은 참 어렵네요.”

   “보니, 당신이 이런 말을 할 때면 당신이 특별한 존재라는 걸 다시 한 번 느껴요.”

   “날 특별하게 만든 건 그 누구도 아닌 당신인 걸요.”

   “우리가 어떻게 이렇게 될 수 있었을까요?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린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사이였는데.”

   “전 사랑에 관한 많은 영화와 책을 봤어요. 수십 만 편의 영화와 책에서 사랑을 말하는 장면은 늘 모호하고 흐리멍덩하죠. 그건 감독이나 작가들이 바보라서가 아니에요. 사랑은 원래 그런 거니까. 아무리 정확하게 표현하려 해도 말로는 분명하게 할 수가 없으니까. 사랑은 그렇게 찾아오는 거예요, 부지불식간에. 당신과 나에게 예기치 못하게 들이닥쳤듯 말이에요.”

   진지하고 현학적인 태도로 사랑을 말하는 더미는 이전에도 자주 봤었습니다. 당연하게도 그들을 만들고 또 가장 가까이에서 이리저리 휘두르는 게 나였으니까요. 하지만 이토록 다정하게 사랑을 말하는 더미는 본 적이 없었습니다. 아마 이건 내 눈에 콩깍지가 씌워졌기 때문이겠죠.

   “보니, 우리 지금 당장 떠나요.”

   보니가 사랑스럽다는 생각이 들자 더는 여행을 미룰 이유가 없었습니다. 보니는 내게 손을 내밀었고 우리가 맞잡은 손의 견고함은 돔을 떠날 때까지 그대로였습니다. 달라진 것이라면 퍼붓듯 내리던 비가 점차 사그라지기 시작했다는 것, 그 뿐이었죠.

 

 

   보니

 

   늦은 밤, 우리는 기차가 갈 수 있는 가장 먼 곳에 도착했습니다. 역무원조차 없는, 한적하다 못해 서늘함마저 느껴지는 역에 내리니 비로소 우리의 진짜 여행이 시작되었음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선로가 끝나는 지점에서 서쪽으로 반나절을 꼬박 걸어 도착한 돔의 경계를 지나자 곧바로 황무지가 보였습니다. 제정신인 인간이라면 누구도 돔 바깥으로 나가지 않는다는 공공연한 사실 때문인지 돔의 경계에는 <이 곳을 지나는 순간부터 당신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습니다>라는 내용의 표지판만 덩그러니 놓여있을 뿐이었습니다.

   거침없이 돔의 경계를 지난 우리는 곧바로 한낮의 열기를 막아줄 수 있는 장소를 찾아야만 했습니다. 돔 바깥이 처음이었던 우리는 준이 고문서상을 통해 어렵게 구한 100년 전 지도를 가지고 알음알음 헤매며 길을 찾아갔습니다. 돔 안의 구역은 위성을 통해 손바닥 보듯 알 수 있지만, 황무지 바깥의 정보는 몇몇 고위층을 제외하고는 인간에게도, 더미에게도 제공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100년의 세월은 많은 것을 바꾸어 놓았고, 지도는 사실상 쓸모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준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인간이 달에 착륙하고 소행성 표면 아래의 흙을 채취해오고 우주에 있을지 모를 또 다른 지적 생명체들에게 메세지를 날리고 있을 때도 여전히 울창한 열대우림에서 원시의 삶을 무리 없이 영위하고 있던 이들이 있었으니, 지금도 분명 그런 인간들이 돔 바깥에 적응해 살아가고 있을 거라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들을 찾아가고 있는 중이라고도 말했죠.

   한동안 준과 나는 매우 힘든 시간을 보냈습니다. 준에게는 영양 공급용 알약이 있었지만 충분한 양은 아니었고 한낮의 태양열은 생각보다 더 버티기 어려웠습니다. 낮에는 간간이 보이는 죽은 지 오래 되어 말라 비틀어진 고목 아래에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운이 좋으면 풍화 작용이 심하게 일어나 언제 무너질 지 알 수 없는 동굴을 발견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저녁이 되어 태양이 지평선 너머로 자취를 감출 때쯤 다시 일어나 걷고 또 걸었습니다.

   여정의 끝을 알 수 없어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인간의 몸은 연약하지만 정신력이라는 것 만큼은 이토록 강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힘든 만큼 서로를 의지하고 위하는 마음이 더욱 커진다는 것도 체감하게 되었습니다. 모든 상황과 경험이 낯설었지만 신비하고 놀라웠습니다. 이제야 나는 과거의 자유로웠던 인간들이 말하던 <이제야 비로소 살아 숨쉬는 것 같아!>라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 것 같았습니다.

   나에겐 새로움의 연속이었지만 준은 나날이 쇠약해져 갔습니다. 그가 찾기를 고대했던, 과거의 영광을 여전히 품고 살아가는 강인한 인간 부족은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가느다란 물줄기 조차 그 흔적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말라버린 대지 위에서 그는 좌절과 절망에 잠식 당하고 있었습니다. 준이 비싼 돈을 주고 어렵게 구했던 지도는 가짜로 판명되었고, 50일 넘게 걸었지만 보이는 것은 끝없이 펼쳐진 사막과 간혹 보이는 식물 몇 줄기가 전부였습니다.

   참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의 정신력은 극한의 상황에서도 생명을 유지하도록 하지만, 한 번 무너지기 시작하면 겉잡을 수 없이 빠르게 공포의 먹잇감이 되기도 합니다. 준은 강했고 자신을 믿는 사람이었지만 절망스러운 상황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습니다. 우리가 함께 할 낙원을 찾을 수 있다는 희망이 헛된 망상이었을 뿐이었다는 생각에 사로잡히는 순간, 준은 더이상 버틸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가 떠나온 지 69일째 되던 날, 준은 고열에 시달렸습니다. 하지만 그를 눕힐 변변한 피난처를 찾지 못했습니다. 나는 뙤약볕 아래에서 양손을 둥글린 후 준의 얼굴 위에 올려 태양의 뜨거운 열기를 조금이나마 막아주는 것 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습니다. 준은 그렇게 나의 손이 만든 작은 그늘 아래에서 몇 번 눈을 깜빡이더니 잠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그는 먼저 우리의 낙원으로 떠났습니다.

  

   준이 떠난 자리에 앉아 나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무런 생각도, 행동도, 말도 할 수 없다는 건 이례적인 일이었습니다. 나는 항상 다음에 무엇을 해야 할 지, 어떤 대답을 해야 할 지에 대한 계획이 머릿속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때 난 알았습니다. 내가 지금 매우 슬프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한 사람을 잃은 슬픔이 나의 머릿속을 마비시키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난 깨달았습니다. 우리가 함께 한 시간은 짧았지만 내가 준을 많이 사랑했다는 사실을.

 

   태양이 서쪽으로 넘어갈 무렵, 나는 비로소 정신을 차렸습니다. 그리고 준을 안아 들었습니다. 그는 한동안 최소한의 영양 공급용 알약으로만 연명했기에 매우 마른 상태였습니다. 부서질 듯 연약한 몸을 축 늘어뜨린 준을 안고 나는 홀로 우리가 걸어왔던 길을 되짚어 갔습니다.

   그렇게 하루, 이틀, 사흘…… 계속해서 걷는데 뭔가 이상했습니다. 매일 태양이 떠오르는 시간이 조금씩이지만 짧아지고 있었고, 대지로 내리꽂는 열기가 점차 줄어드는 게 느껴졌습니다.

   홀로 걷기 시작한 지 45일째 되는 날, 우리가 떠나올 때 그쳤던 비가 다시 오기 시작했습니다. 이전과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의 엄청난 기세로 퍼부었습니다. 준을 안은 나는 오는 길에 거쳤던 동굴로 가 비를 피했고, 비는 일주일 동안 단 한 순간도 그치지 않고 내렸습니다.

   한참 내리던 비가 그치고 해가 다시 떠오른 날, 나는 다시 준을 안고 길을 나서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동굴 입구를 지나쳐 바깥을 향해 고개를 드는 순간, 나는 놀라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걸어갔고 또 다시 걸어왔던 사막이 온갖 종류의 꽃과 나무들로 가득했습니다. 나는 이 광경이 믿기지 않아 나 또한 준을 따라 죽어버린 게 아닌가 싶었습니다. 그게 아니라면 아직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꿈을 꾸고 있는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걸을 때마다 발목을 스치는 부드러운 꽃줄기와 대지를 감싸는 신선한 공기, 적당히 따스한 햇살은 지금 이것이 현실임을 말해주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천천히 현실 감각을 되찾아가며 꽃밭에서 준을 안고 허우적거리고 있던 그 순간, 저 멀리에서 작지만 확실한 소리들이 들려왔습니다. 그리고 곧이어 선명하게 보였습니다. 셀 수 없이 많은 이들이 웃고 춤추고 달리며 자연을 만끽하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자유로운 사람들과 자유로운 더미들. 준과 내가 찾던 낙원에 드디어 도착한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우리의 여행은 시작된 곳에서 끝이 났고, 끝이 난 곳에서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1년 후, 러브홀릭(Loveholic) 기념관 음성 자료실

 

   안녕하십니까, 연합 국민 여러분. 보이스사의 대표 릴리 보이스입니다. 저는 오늘 중대 발표를 하기 위해 이 자리에 섰습니다.

   우리는 지난 긴 시간 동안 재앙에 맞서 싸우느라 많은 시간을 괴로움 속에서 보냈습니다. 그 시간들 속에서 우리는 많은 것을 잊고 또 잃어버렸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크게 잃은 것은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이었습니다.

   사랑은 우리를 자라게 하고 살게 하며 숨쉬게 하고 안정을 줍니다. 역경을 이겨내도록 하고 용기를 북돋워주며 가슴 벅찬 행복감을 느끼게 합니다. 하지만 오랜 시간 동안 이 감정을 잊고 살면서, 또 사회의 규율로 억압하고 제한하면서 우리들은 무감정적 병태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새로운 종류의 전염병이 우리를 에워쌌고 이것들은 팬데믹으로 진화하여 우리를 마비시켰습니다.

   이미 많은 분들께서 의심의 단계를 넘어 확신하고 있듯 보이스 또한 그간 연합 정부의 요청에 따라 더미와 인간의 동성간, 이성간 애정적 교류가 불가능하도록 의도적 조정 절차를 거쳐왔음을 인정합니다. 보이스는 생명 잉태가 불가능한 관계에 대한 부정적인 사회의 인식을 공고히 함에 일조하고자 더미 간 동성 애정적 교류 또한 불가능하도록 설정했습니다.

   이처럼 생존과 연명만을 최우선의 가치로 둠으로써, 우리는 그간 추구하고 또 누려왔던 많은 가치들을 우리 자신의 손으로 훼손했습니다. 그 결과, 인간 남성과 인간 여성의 생명 잉태를 위한 사랑만이 공인 받을 수 있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그 외의 모든 형태의 사랑은 묵살 당하고 가리가리 찢겨졌습니다. 그렇게 우리에게 남은 것은 상처와 미움, 원망처럼 실체가 없어 더욱 무겁고 매서운 감정들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서로에 대한 깊은 사랑으로 말미암아 운명 같은 사랑에 용기 있게 뛰어든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진정한 사랑에 눈을 뜬 그때부터 비로소 태양은 한 발자국씩 물러나기 시작했고 이제 우리는 재앙 이전의 돔 없이 자유롭게 살던 때로 회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왜 갑자기 태양이 그들의 행동을 기점으로 전진하는 것을 멈추었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누군가는 신이 그를 잊은 우리를 괘씸하게 여겨 벌을 주려고 했으나 용기 있게 사랑의 힘을 보여준 그들의 모습에 감동해 마음을 고쳐 먹었다고 말합니다. 또 누군가는 이 모든 게 처음부터 연합 정부와 보이스에 의해 조작된 음모였다며 터무니없는 루머를 퍼뜨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무엇이 원인이 되었고 이유가 되었든 상관없이, 그들은 우리의 영웅입니다. 비록 그들의 사랑이 온전히 이타심에서부터 발현된 것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말이죠. 그들의 거침없는 사랑의 도피는 우리에게 자유를 가져다 주었습니다. 삶을 되찾아 주었습니다. 온갖 감정을 충만하게 느끼고 베풀도록 해주었습니다.

   따라서 이에 감동한 저는 감히 선포합니다. 보니의 메모리를 살려 그들의 사랑과 여정을 담은 이야기를 널리 퍼뜨리겠습니다. 그리하여 많은 이들의 귀감이 됨으로써 우리의 영웅들이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히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보니와 준의 생전 모습 그리고 육성을 홀로그램으로 되살려 그들로부터 생생하게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러브홀릭(Loveholic) 기념관을 짓겠습니다.

   더불어 저를 비롯한 보이스사는 현 시간부로 지금까지 제작된 더미들과 앞으로 제작될 더미들의 자유로운 사랑을 지지하겠습니다. 성별과 종()에 구애 받지 않고 존재하는 모든 생명이 사랑 안에서 충만해지기를, 그로부터 발현되는 에너지로써 우리 모두가 더욱 풍성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득 담아 말이죠.

   자, 이제 마음껏 누리십시오! 충분히 사랑하십시오! 당신 곁의 자유로운 더미와 함께 말이죠.

 

   -제1호 동성 인간-더미 커플인 준과 보니를 기리며, 보이스 대표 릴리 보이스의 음성 녹음 원본, 2152년 5월, 러브홀릭 기념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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