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1월에는 금방 녹는 눈이 내린다

 

2014년 마지막 날 할머니 집 거실은 시끌벅적하다. 세미는 휴대폰을 쥐고 아무도 없는 안방으로 들어온다. 벽 너머로 미션 임파서블 4의 헬리콥터 소리가 뭔가를 설명하는 삼촌 목소리에 섞여 들려온다.

휴대폰에 도착한 것은

“1월 27일 새벽 두 시 반. 육교 계단”

이라는 문자와 네이버 맵 링크이다.

다음 문자는 링크를 열어보기도 전에 도착한다.

“작년에 고마웠어. 그 대신이라고 하기는 뭐하지만 작은 선물이야. 이 시간에 여기서 내리는 눈을 맞으면 다음 생에 아주 행복해진대.”

요정이었다. 일 년 전, 세미를 한참 보지 않던 고등학교 동창들과 다시 연결시켜주고, 거의 싸울 뻔 하게 했지만, 결국에는 아주 친해지게 해주었던.

“고마워.”

세미는 할아버지의 책상에 기대 서서 문자를 보낸다. 처음에 만났을 때는 분명 그렇지 않았는데 어느새 요정들에게 반말을 섞어 쓰는 것이 자연스러워져 있었다. 분명 나이 많은 존재들이었고 인간이 아니었는데. 자꾸 고등학생의 모습을 빌려 나타나서 그런지 존댓말이 나오지 않았다.

답장은 조금 시간을 두고 울린다. 일 년 동안 눈치채게 된 사실이었지만 요정은 휴대폰이 아직도 서툴렀다. 네이버 맵 링크를 보낼 줄 아는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친구들한테도 알려줘.”

아, 세미는 생각한다.

“미경이는 우리를 차단한 것 같아. 현우는 문자를 보지 않는 것 같고. 영훈이와 안나한테도 연락이 닿지 않아.”

“현우는 카카오톡만 확인해서. 아마 놓쳤을 거야. 영훈이는 번호를 바꿔서 그래.” 세미는 설명한다. 미경이는.. 미경이다운 일이었다. “내가 전달할게. 다들 좋아할 거야.”

다들 좋아할 거라는 말은 세미의 진심이었다. 다음 생의 행복이란 꽤 괜찮은 새해 선물 같아 보였기 때문이다.

 

그녀는 미경에게 가장 먼저 카카오톡 메시지를 보낸다. 뭐니뭐니 해도 미경은 그녀가 아는 사람 중 행복에 대해 가장 많이 생각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요정들과는 다시 얽히기 싫다고 했던 미경이라도 이 일에만큼은 관심이 있을 것 같았다.

답장은 아빠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기나긴 길의 중간에서 온다.

“다음 생이 존재하는 건 확실해?”

세미는 깜빡 잊고 있었지만 행복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늘 확실한 것을 찾고 있었다.

“우리 모두 다 다시 태어나는 게 확실해? 그게 아니면 아무 의미 없는 선물이잖아.”

세미는 한 번도 그 문제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당연히 다시 태어나는 거라고 믿고 있었으므로. 하지만 한 번 확인해봐서 나쁠 건 없을 것 같았다.

 

요정들의 답문자는 세미가 아직 긴 자동차 여행의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을 때 온다. 동네는 아직 텅 빈 자리들로 가득하고, 공기는 안개 같기도 한 정체 모를 하얀 색에 잠겨 있다. 1월이면 이상하게 세상을 찾아오는 그 하얀 색에. 그 하얀 색 속에 세상은 아직 무엇도 정해지지 않은 것 같기도 하고 전부 정해진 것 같기도 하다. 이번 여름도 또 장마가 짧고 더울까, 세미는 생각한다.

“인간 영혼이 어떻게 되는지는 아무도 몰라.”

라는 것이 요정의 대답이었다.

“영원불멸하면서 환생을 거듭하는지, 죽으면 그대로 바람에 흩어져버리는지, 아니면 사람 따라 다른지. 이렇게 역사가 오래 됐는데도 그게 불분명한 종족은 너희 뿐이야.”

세미는 말을 잃는다.

“그러니까 그건 진짜 작은 선물이야.”

요정은 조금 변명하듯 덧붙인다.

 

“그럴 줄 알았어.” 미경은 수화기 너머로 말한다. “그렇게 좋은 건 아닐 줄 알았지. 그래도 너는 갈 거지?”

“무의미할 것 같기도 한데, 다음 생이 있다고 치면..”

“그런데” 미경은 세미의 말을 끊는다. “다음 생이 있으면 그건 좋은 거야? 생각해보면 그것도 만만치 않게 끔찍해. 그 눈을 맞아서 이 바로 다음 생에는 행복하게 된다고 쳐도 그 다음은? 또 그 다음은? 대체로는 전혀 행복하지 않을 거 아니야. ”

지나치게 맞는 말이 발화된 뒤에 흐르는 일 분 여의 침묵 후 미경은 묻는다.

“너는 그래도 갈 생각이지?”

세미는 미묘하게 남은 할머니 집 방문의 후유증에 시달리며 방에 혼자 누워 있다.

“나는 갈 거 같아.”

세미는 책장 맨 아래 칸들의 책을 만지작거리면서 말한다. 이유는 잘 말할 수 없었다.

“나는,” 미경은 말한다. “어떻게 하면 절대로 다시 태어나지 않는지, 그런 거라면 관심이 있어. 혹시 요정들이 나중에 그런 좀 더 쓸모 있는 선물을 준다고 하면 그때는 꼭 알려줘.”

미경은 그런 일이 없으리라는 걸 마치 이미 알고 있는 사람처럼 말한다.

 

1월 2일 열 시, 일 년은 연락이 없던 고등학교 동창의 전화를 받은 현우는 조금 얼떨떨하다.

“아. 응. 응.”

현우는 요정들과 다른 차원과 영혼이 존재하는 세계관으로 돌아오는 데 시간이 걸리는 것 같다.이번 생을 온전히 충실히 살고 있는 사람 답게 그는 평일 새벽이라는 말에 난색을 표한다.

“그런데 스케쥴 때문에 그때 가봐야 알 것 같아. 내가 요즘 프로젝트 준비 중이라. 웬만하면 갈 수 있긴 할 텐데. 아, 새해 복 많이 받구.”

반반. 세미는 생각한다. 온다고 해도 다음 생 같은 것 때문이 아니라 간만에 친구를 보러 오는 것이었다.

아무도 없는 집에는 지난 12월이 여전히 조금 남아 있다. 전화를 내려놓고 잠시 이불 속에 앉아 그것에 대해 생각하는데, 방금 내려놓은 전화가 다시 울린다. 현우였다.

“세미야. 미안. 아무래도 나는 못갈 것 같아.”

“평일이라서?” 세미는 묻는다.

“아니.”

그는 잠시 생각한 다음에 말한다. 사람이 솔직해질 때만 나오는 조금 작지만 확실한 목소리로.

“나는 어쩐지 다시 태어날 것 같지 않아. 그래서 가도 의미가 없을 것 같아. 새벽 육교 같은 데보다는 낮에 좀 덜 추울 때 좋은 거 먹을 수 있는 데서 보자, 우리. 새 학기 시작하기 전에. 영훈이도 데리고 와.”

 

세미는 영훈이 깰 법한 시간까지 기다렸다가 오후 두 시 무렵 전화를 한다. 그녀도 여전히 집이다. 아직 새해의 무게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은 채였다. 영훈은 전혀 오랜만이 아니었으므로 많은 설명이 필요 없다. 환생 가능 여부의 문제에 대해 – 영훈은 현우의 말에 동의한다.

“나도 모든 사람이 환생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아. 그렇다고 아무도 다시 태어나지 않는 것도 아닐 것 같고.”

“너는 어떤데?”

영훈은 생각에 잠긴다.

“나는 한 번 쯤은 다시 태어나보고 싶어. 계속은 말고 한 번이나 두 번쯤. 그런데 하고 싶다고 시켜주는 건 아닐 것 같아.”

그건 정말 그랬다. 갈림길은 많아도, 그 중에서 고를 수 있는 기회란 살면서 의외로 몇 번 주어지지 않았으니까. 죽은 다음이라고 해서 갑자기 그런 걸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게 될 것 같지는 않았다. 세미의 생각에도.

“1월 27일에는 올 거야?” 세미는 문득 본래 전화의 목적을 생각해내고 묻는다.

“너 가면 갈게.” 영훈은 가볍게 말한다.

그걸로 같이 갈 사람은 구한 셈이었다.

 

그날 저녁 안나는 생각보다 반갑게 세미의 전화를 받는다. 그들은 한 시간 가까이 통화하고 새 학기와 전공과(세미는 안나가 자신과 마찬가지로 심리학과였음을 알게 된다.) 수많은 작은 기다릴 것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하지만 대화는 요정들이나 다른 세상이나 영혼의 화제로는 흘러가지 않고, 세미는 다음 생의 행복의 이야기를 꺼낼 타이밍을 찾지 못한다.


‘누구 또 갈 사람 없으려나.’ 세미는 생각한다. 한 명쯤 더 데리고 간다고 해서 요정들이 특별히 싫어할 것 같지는 않았다.

세미는 엄마 아빠의 내세의 행복을 책임질 의무가 있는가 하는 문제를 그 밤 잠시 고민하지만, 아니라는 결론을 내린다. 영혼이나 다음 생이란 가족끼리는 서로 묻지 않는 것이 예의인, 그런 주제에 속하는 것 같았다. 가족끼리 해야 하는 일은 이번 생의 행복을 찾는 것이며, 그 가장 완성된 형태는 아무래도 토요일 저녁에 같이 OCN을 보는 것 정도가 아닐까, 세미는 생각한다.

세미는 어두운 방에서 카카오톡 친구 목록을 쭉 내리면서 수많은 얼굴들을 본다. 마치 그 프로필 사진들에서 그들의 영혼에 대한 믿음과 다음 생에 대한 생각을 읽어내기라도 할 수 있을 것처럼. 내세의 행복의 약속이란 생각보다 애매하고 의외로 별로 인기가 없는 품목 같았다. 아무도 딱히 내세를 기다리는 것 같지 않았다. 현세의 행복을 더 중요하게 생각해서든 반복될 삶의 고통을 너무 잘 상상할 수 있어서든.

기대와 불안 사이에서 아직 무언가를 기다리는 사람.. 그녀의 손가락이 과 후배 정우의 이름에서 멈춘 것은 정우가 프로필 사진을 걸어두지 않아서였는지도 모른다. 마치 당장은 잡을 수 없는 무언가를 기다리는 것처럼. 어떻게 생긴 애였지, 이상하게도 기억나는 것이라고는 그의 잠들 뿐이었다. 전필 심리실험 시간에 뭔가를 잊어버리기라도 하려는 듯 식은 땀을 흘리며 자던 것. (그녀도 그 거대한 강의실의 기둥 뒤에 숨어 앉는 것을 좋아했기 때문에 알 수 있었다.)

“아주 뜬금없는 초대 하나 해도 돼? 문자 보면 연락 줘.” 세미는 메시지를 보낸다.

 

휴대폰의 진동이 울린 것은 1월 셋째 주 월요일인가 화요일, 새벽 다섯 시 이십 분이다.  

“무슨 초대에요?”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정상적인 시간에 전화한 것 같은, 차분한 목소리이다.

세미는 이게 무슨 말인지 덜 깬 상태로 고민하다가 정우에게 카카오톡 메시지를 보냈던 것을 떠올린다. 매번 그랬지만 1월은 긴 달이었다. 그런 것마저 잊어버리게 만들 정도였으니.

정우는 세미의 설명을 잠자코 듣는다. 수화기 건너편에 사람이 있음을 알려주는 것은 옷소매가 휴대폰에 스치는 소리 뿐이다. 그 너머로 어렴풋이 회색 새벽 도시의 소리들이 들려온다.

“다음 생을 산다는 건 한 번 더 산다는 거죠? 이 세상에서.” 정우는 진지한 목소리로 묻는다. “그런데 만약에 세상이 이대로가 아니라면 행복해질 수 있어요? 그 안에서, 사람이.”

정우가 지구 온난화 얘기를 하고 있다는 걸 알아듣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세상은 점점 더 불행한 곳이 되어가고 있다고 해도..” 세미는 세상이 점점 더 불행한 곳이 되어가고 있다고 인정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가정법으로 말한다. “만약 그렇다면 행복은 점점 더 작고 찾기 어렵게 되겠지만, 찾기 어렵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건 아니잖아. 그렇지 않아..?”

대답이 없는 정우는 아무래도 그런 행복을 믿지도 원하지도 않는 것 같다. 세미는 자신이 그런 종류의 사람의 존재를 잊어버리고 있었다는 걸 깨닫는다. 아직도 더 좋은 세상을 찾고 있는 사람. 찾아야만 하는 사람. 세상의 어느 숨겨진 행복한 구석이 아니라.

“다른 세상이나.. 다른 행성에서 다시 태어날 수도 있지 않을까?” 세미는 생각 끝에 말한다. “내가 한 번 물어볼게. 요정들한테. 만약에 진짜 좋은 세상에서 다시 태어날 수도 있는 거면 관심 있는 거지.” 세미는 다짐을 받으려는 듯이 묻는다.

정우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 같다. 통화는 꿈처럼 끝난다.

 

“우리는 잘 몰라. 우리는 죽지 않기 때문에 환생하지도 않거든. 아마 다른 행성에서는 태어날 수 없을 거야. 영혼이란 별의 아이들이니까.” 요정에게서는 장문의 문자가 온다. “그렇지만 고양이들에게서 들은 얘기가 있는데, 고양이들은 어떤 동네가 마음에 들면 같은 곳 같은 시간으로 수십 번씩 환생을 하기도 한대. 그러니까 너희도 그럴 수 있을지 모르지.”

세미는 1월 27일 전에 정우에게 그 소식을 알려주려고 한다. 그건 정말 좋아할 수도 있을 것 같아서. 솔직히 그녀로서도 어디 우주 정거장이나 다른 행성에서 다시 태어나서 행복해지는 정우를 상상하기는 어려웠으니 말이었다. 세미는 요정의 문자를 캡쳐해서 카카오톡 메시지를 보내고 부재중 전화도 남겨두지만 당일까지도 정우에게서는 답이 없다.


1월 27일로 넘어가는 밤. 영훈은 새벽에 택시를 타고 약속 장소로 향할 생각이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대중교통과 카페와 술집들 사이에서 영원히 떠도는 것이 직업인 대도시 대학생 답게, 세미는 일단 그 동네 맛집이라는 국물 떡볶이 집에서 저녁을 먹고, 역 앞 프랜차이즈 카페 2층에서 과제를 할 계획이다. 가방도 들고 나오지 않은 영훈은 처음에는 심심해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세미의 가방을 베개 삼아 한 잠 자고 나서 기분이 아주 개운해진 듯 하다. 아홉 시쯤 배가 고프다는 영훈의 말에 세미도 과제를 접는다. 그들은 근처 이자카야로 옮겨서 또 먹고(생각해보면 둘이서 그렇게 새벽까지 같이 있었던 것은 처음이었다.), 새벽 두 시쯤 일어나서 지도 어플리케이션을 켜고 육교로 향한다.

낮에는 이상할 정도로 춥지 않았는데, 서울의 겨울은 서울의 겨울이었다. 영훈은 패딩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가 다시 꺼내 입김을 불었다가를 반복한다. 서울의 밤이 그렇듯 두 시는 완전한 어둠 속은 아니다. 빈 사차선 도로를 차들이 엄청난 속도로 스쳐지나간다.

육교가 막 멀리 눈에 들어오기 시작할 즈음 세미는 가슴 아래쪽에서부터 올라오는 막연하고 갈피 모를 두려움을 느낀다. ‘아무도 없거나 전부 속임수면 어떻게 하지.’ 그녀는 아무래도 1월 내내 너무 많이 그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불이 밝혀진 육교에는 기대를 배반하는 어떤 것도 없다.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앉아 뒤휴대폰을 만지며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아무도 없지도 않고, 이상한 것도 없고, 영훈이 걱정했던 만큼 북적이지도 않는다. 요정들은 지난 한 해 동안 수많은 사람들에게 그들에게 했던 것 같은 작은 부탁을 했던 모양이었다. 두꺼운 패딩을 입고 있는, 아무래도 고등학생 같은 아이들도 있었고, 모자까지 완전 무장하고 나온, 세미 엄마 아빠 나잇대는 되어보이는 사람들도 있었다. 세미는 육교 맨 위쪽 구석, 계단 전체가 내려다보이는 자리를 가리킨다.

“음료수 사올 걸 그랬다. 오는 길에 편의점 있었는데.” 영훈은 아쉬운 듯이 말한다.

눈이 내리기까지는 아직 십 분이 넘게 남아 있었다. 그녀는 어깨 너머로 난간의 차가움을 느끼면서 팔에 머리를 파묻고 앉는다. 아무래도 기다리는 것은 거의 항상 기다리지 않는 것보다 좋은 일 같았다. 기다림으로 가득 찬 시간은 다른 시간들과 조금 달랐으니까. (기다림이 이뤄지지 않은 뒤의 시간은 또 다른 얘기였지만 말이었다.) 목도리가 따뜻했고, 사람들은 많았지만 조용했다. 그녀는 그 기다림 속에서 깜빡 잠이 들었던 것도 같다.

영훈이 쿡쿡 찔러서 그녀를 깨우기 전까지는 말이었다. 영훈은 아무 말 없이 아주 중요한 것이 있다는 얼굴로 계단 발판 사이, 육교 아래를 가리킨다. 육교의 그림자 속으로 모여들고 있는 것은 고양이들이었다. 치즈색. 얼룩색. 서울 아파트 단지에서 자라는 고양이들. 아마도 그곳에서 다시 태어나고, 그 행복과 불행을 영원한 집으로 삼을 고양이들. 사람들보다 훨씬 오래오래 말이었다. 사람들과 비슷할 정도로 조용히 모여든 그 고양이들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 모양이다. 기다림이 아닌 다른 무엇도 고양이와 사람들로 하여금 그런 이상한 시간에 그런 이상한 곳에 모여 앉게 할 수는 없었을 테니까.

요정들은 눈이라고 했지만 엄밀히 말하면 눈은 아니었다. 눈부신 빛으로 가려진 겨울 밤의 어둠으로부터 내리는 것은, 일반적으로 눈이라고 불리는 것보다 훨씬 입자가 작고 약하고 섬세한 느낌이다. 반짝이 종이조각 같기도 하고 싸락눈 같기도 했다. 손가락에 스치는 것만으로 반짝이는 물기 같은 걸 남기고 녹아버리는 점을 제외한다면. 빛 속에만 잠깐 존재하고 나비가 되어버리는, 그런 존재와 만날 수 있던 것은 분명 행복이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세 시가 넘어 있었다. 떠나는 사람들도 있고, 고양이들은 소리 없이 조금 늘어나 있고, 손가락은 완전히 꽁꽁 얼어 있다.

편의점에서 음료수를 사고 손을 녹이러 가는 길에 그들은 육교 발치에서 어리둥절하고 있는, 검은 바람막이를 입은 아저씨 둘을 마주친다. 한 사람은 육교 위에만 떨어지는 눈을 뚫어져라 보느라, 그들이 지나가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른 사람은 세미를 멈춰세운다.

“여기 뭐 좋은 거 있어요?”

추위인지 술에 상기된 얼굴, 하지만 진짜 호기심이 담긴 얼굴이다. 영훈도 세미를 본다.

“가서 저기 눈 맞으세요.” 세미는 쿨하게 말한다. “저거 좋은 거에요. 다시 태어났을 때 진짜 행복해진대요.”

“아 그래요?” 아저씨는 의외로 진지하게 받아들인다.

편의점에서 뜨거운 데자와를 두 잔 사서 택시를 잡으러 가는 길에 그들은 육교를 다시 지나친다. 아저씨들은 맨 아래 계단에 앉아서 눈을 올려다보고 있다. 그리고 세미는 또 한 명, 아까는 놓쳤던 사람을 본다. 그는 육교에서 한 발 떨어진 골목의 어둠 속에 서서, 육교 아래의 고양이들을 구경하고 있다. 마치 믿지 않는 내세의 행복을 조금 엿보고 싶은 사람처럼.

 

바쁘게 보낼 예정이었던 남은 겨울을 세미는 결국 영훈이와 공포 영화만 보면서 보낸다. 세상이 더 좋은 곳이었다면, 좋게 변해가는 중이었다면 좋았겠지만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결국 세상의 구석에서 작은 행복을 찾는 정도였으니까. 현세에서든 다음 생에서든. 공포 영화는 영훈의 생각이었다. 불을 다 켜고 줄거리를 미리 알고 보면 무섭기는 커녕, 오히려 아주 안정되고 겨울에 시간 보내기 딱이라는 것이었다. 그들은 영훈의 작은 방에서 그 해 영훈이 새로 산 엄청나게 성능이 좋은 보조 히터를 틀어놓고(조명 기능도 있었다.), 그 빛으로 수많은 공포 영화를 본다. 생각보다 무섭지는 않고, 어떤 것들은 아주 슬프고, 많은 것은 -- 죽어도 다시 태어나서 세상으로 돌아오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였다.

아주 슬픈 것을 두 편 보고 이상한 것을 하나 보고 있던 어느날 세미는 묻는다.

“누구는 다시 태어나고 누구는 다시 태어나지 않는 거면, 어떤 사람들은 이번 생이 지나면 두 번 다시 볼 수 없는 걸까?”

“그렇겠지.” 코코아를 타던 영훈은 지나가는 말처럼 대답한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몇 번을 태어나도 다시 마주칠 것 같지 않아?”

그건 그렇다고 세미는 생각한다. 그리고 어떻게 다시 만나게 될지 조금 궁금했다. 겨울의 끝이 기다려지면서 기다려지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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