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피는 물보다 진하다

2020.10.31 15:4710.31

 

피가 섞인 자매가 되고 싶어.

열아홉 살 생일 케이크 촛불을 불면서 그렇게 말했을 때 언니의 얼굴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뭐라고? 언니가 눈을 깜빡거리며 되물었지만 나는 두 번 대답하지 않았다. 야, 너 저번 달에는 아이패드 갖고 싶다며. 재빨리 표정을 푼 언니가 가볍게 장난을 걸어왔다. 나는 입을 꾹 다물고 그녀를 노려보았다. 내 시선을 피해 입술을 깨물고 볼을 부풀리던 언니는 결국 착잡한 표정으로 커튼을 내린 창문을 바라봤다. 혜지야.

정말 그런 걸 소원으로 빌 거야?

 

🩸 🩸

 

“우리 언니 햇빛 알레르기 있어.”

친구들이 왜 언니가 대학 입시를 위한 학부모 참관 수업에 오지 않았냐고 물었을 때 나는 그렇게 대답했다. 언니와 몇 번 마주쳤던 적 있는 친구들은 아쉬운 소리를 했다.

“혜지네 언니 진짜 예쁜데.”

“언니하고만 살아? 부모님은?”

나는 그 질문을 못 들은 척 했다. 슬쩍 내 눈치를 보던 친구가 무신경한 질문을 하는 다른 친구의 옆구리를 쿡 쳤다. 갈비뼈를 문지르던 친구는 내 표정을 살피고는 고개를 푹 숙였다. 사실 나는 상처받지도 않았고 그 애들이 뭐라고 생각하든 상관없었다. 다만 오늘 아침 식탁을 떠올리자 한숨이 나왔다. 시계를 보니 오후 네 시였다. 지금쯤이면 언니가 일어났을 것이다. 식탁 위에 덩그러니 놓인, 빨간 토마토 주스 얼룩이 덕지덕지 붙은 유리컵을 발견했을 것이다.

고등학교를 다니며 삼 년간 숨겨왔던 비밀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단도직입적으로 사실을 밝히자면 나와 언니는 한 배에서 태어났거나 어린 시절을 공유하는 자매 같은 게 아니다. 나는 대한민국 일산에서 나고 자랐다. 엄마는 내가 여덟 살일 때 집을 나갔고 나는 내가 열다섯 살일 때 집을 나왔다. 이유는 같았다. 아빠가 술을 많이 마셨고 자주 물건을 부쉈기 때문이다. 무작정 서울로 올라와서 청소년 쉼터에서 일 년을 살았지만 나는 언제까지나 쉼터에서 살 수는 없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무작정 일을 구했고 나이를 속이고 아르바이트를 했다. 나이를 한 살씩 올리면 할 수 있는 일이 늘어났다.

스무 살이라고 거짓말을 했을 때는 어학원 사무보조 아르바이트에 합격했다. 아마 그 대머리 원장은 내가 미성년자라는 사실을 처음부터 알았을 것이다. 여름방학을 넘어 학교도 며칠 빠지고 일한 지 한 달이 지난 후에, 그는 나이를 속인 미성년자에게는 월급을 줄 수 없다고 했다. 나는 그런 게 어디 있냐고 소리를 지르며 형광등 불빛이 하얀 타일을 환하게 비추는 복도에서 질질 울었다.

언니는 헝가리에서 태어났다. 아고타라는 이름으로 살며 부다페스트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열 살부터 오르간을 연주했고 재능을 인정받아 리스트 음악원에 들어갔다. 스물다섯 살 여름에 언니는 루마니아로 여행을 떠났다. 루마니아는 언니가 전에도 한 번 가본 적이 있던 나라였다. 평범한 여행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곳에서 삶에서 가장 커다란 변화를 겪었다. 언니의 삶은 통째로 뒤바뀌었다. 그녀는 부쿠레슈티에서 삼 년을 머물렀고 그 중 일 년은 집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고 했다. 그리고 단번에 한국으로 건너왔는데, 왜 한국에 왔냐는 질문에 언니는 어이없게도 레드벨벳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유럽에서 케이팝이 그 정도로 영향력이 있다는 사실이 생소했고, 고작 그런 이유로 바다를 몇 개나 건너온 언니가 이상했다. 언니는 어학원에서 헝가리어와 독일어를 가르쳤다. 에스엠 엔터테인먼트에서 레드벨벳을 잇는 신인 걸그룹이 등장했을 때 언니는 한국인으로 귀화했다. 내 성과 자신의 영어 철자를 한국식으로 부드럽게 이어붙여 이아경이라는 이름을 정했다. 나를 만나고 여섯 달이 지난 겨울날이었다.

그때 언니는 지금이 바로 적당한 순간이라고 했다.

“한국에 정착할 거야. 적어도 앞으로 이십 년 동안은. 그 후에는 기술이 발달해서 주민등록이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신분 증명을 하게 될 거라 새 신분을 만들 수 있을 거야. 다들 그렇게 말하더라고.” 대학병원에서 가져온 수혈팩 귀퉁이를 가위로 자르며 언니는 말했다. “기록상 나는 지금 서른둘이야. 보통 한국인들은 내 얼굴을 보고 역시 외국인들은 젊어 보인다고 말하지만, 이제 한국에도 외국인이 늘어서 속이는 게 점점 어려워지고 있어.” 그녀는 덧붙였다. “아시아 태생이면 서유럽이나 미국으로 가는 게 편하대. 거기 사람들은 동얀인이라면 스무 살짜리 얼굴이 쉰 살이라고 해도 믿는다더라, 바보들.” 언니는 고개를 젖히고 한약을 먹듯이 피를 마셨다.

이제는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짐작하겠지.

나는 스물다섯에서 더 늙지 않는 언니와 삼 년 동안 살고 있다. 그리고 두 달 후면 나는 스무 살이 된다. 나는 언니보다 나이가 많아지고 싶지 않다. 매일 아침 토마토 주스를 마시는 걸로 일종의 시위를 하고 있지만, 언니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 🩸 🩸 

  

“이혜지, 너 정말 피 같은 걸 먹고 살고 싶어?”

말이 끝나자마자 침대에 누워 있던 나는 이를 악물고 발을 뻗어 의자에 앉은 영수의 무릎을 힘껏 찼다. 악. 영수는 몸을 동그랗게 말며 쪼그라들었다. 얄밉게도 입은 살아 있었다. “아니, 피자 치킨 탕수육 두고 진짜 그런 걸 먹고 싶냐고. 난 믿을 수가 없어.” 그는 투덜거리며 무릎을 매만졌다.

영수는 영원히 열일곱 살이다. 그래서 키가 나와 비슷했고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3년 전, 내가 막 열일곱 살이었을 적에 만나 동갑내기로 대했던 그는 올해로 열 번째 열일곱을 보내고 있었다.

어학원 복도에서 울음을 그친 나를 자신의 투룸 아파트로 데려왔을 때 언니는 자기가 뱀파이어라는 사실을 숨기려고 했다. 어떻게 숨기려고 했는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언니가 어딘가 수상하다는 건 금세 들켰다. 해가 질쯤에야 겨우 일어나고 밥은 먹지를 않는데 수상하게 여기지 않을 도리도 없었다. 정체가 뭐냐고 캐묻자 언니는 진지한 목소리로 뱀파이어, 하고 털어놓았다. 나는 처음에는 폭소를 터뜨렸는데 언니의 표정을 보고는 천천히 웃음을 멈췄다.

언니와 함께 살기 시작하고 중학교 마지막 학년에 다닐 때까지만 해도 내 주변에는 흡혈귀들이 득실거렸다. 뱀파이어들의 커뮤니티는 지역과 직업, 성별과 나이와 성향 등으로 자잘하게 분류돼 있다. 보통은 인터넷으로 가입 가능하다. 오프라인 모임에 나오려면 인증 절차를 거쳐야 하긴 하지만. 언니는 서울 북부의 젊고 온건한 뱀파이어들이 주류인 오프라인 모임에 매주 나갔다. 모임 인원은 스무 명이 넘지 않았지만 분위기는 좋았다. 몇 날을 졸라댄 끝에 언니는 한 달에 한 번은 나를 모임에 데려가줬고 나는 몇몇 뱀파이어들과 가까워졌다. 그들이 테이블에 둘러앉아 피를 술처럼 마셔대는 꼴을 본 후에 나는 의무감에 한 달에 한 번씩 헌혈을 해댔다. 나중에 그 사실을 알게 된 언니의 새하얀 얼굴은 더더욱 창백해졌던 게 기억난다.

어떤 집단의 존재를 인지하는 것과 그들을 알고 이해하는 것은 천지차이였다. 뱀파이어들 사이에는 보통 얼굴이 어려 보여도 살아온 나이를 계산하고 그에 맞게 대하는 규칙이 있었지만, 그런 룰에 익숙하기에 나는 어렸고 그들을 몰랐다. 그래서 처음부터 나는 영수를 그냥 영수라고 불렀다. 그도 그런 맞먹음을 좋아하는 눈치였다. 영수는 고등학교를 세 번 옮기고 대학을 두 번 다녔지만 내가 야간자율학습을 몰래 빼먹을 때마다 아이스크림을 나란히 들고 PC방에 함께 털레털레 걸어가주는 좋은 녀석이다. 사실상 영수는 내가 사귄 첫 번째 친구였다. 영수를 만나고 나는 친구라는 단어에 대한 기준선을 그었다. 

“출국이 언제랬지?”

“11월 26일. 추수감사절. 시끌벅적할 때가 섞이기 좋대.”

“잘 가라. 가 버려. 백인들 사이에서 잘 살아라.”

내가 돌아눕자 그는 내 어깨를 잡고 말없이 조금 흔들었다. 하지만 그깟 애교로 풀릴 마음이 아니었다.

“거기서 남자친구나 사귀든가. 드디어 퀴어 퍼레이드 가보겠네. 거기선 밤늦게까지 행진한다잖아. 좋겠다. 축하한다.”

“이혜지.”

영수가 나를 돌려눕히려고 했지만 나는 팔을 쳐냈다. 그가 서운함이 배어나오는 말투로 중얼거렸다.

“아경 누나한테 이유가 없을 리가 없잖아.”

영수와 처음으로 나눴던 내밀하고 솔직한 이야기를 지금도 기억한다. 그날의 날씨와 분위기와 아래층에서 들리던 나지막한 웃음소리들도. 내가 열 번도 넘게 모임에 따라갔을 적이었다. 정기 모임 장소인 오래된 지하 클럽에는 작은 다락방이 있었다. 영수는 말하기보다 듣기를 좋아하는 상냥하고 어른스러운 친구였고 나는 무심코 나의 예전 집과 쉼터에서 있었던 개인적인 일들을 털어놓았다. 누군가와 깊게 가까워지기 위한 고통의 등가 교환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걸 나는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영수를 물고 피를 나눈 뱀파이어는 같은 반 여자애였다. 그와 가장 친했던 친구이자 첫 커밍아웃을 했던 사람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 조심스러운 고백 뒤에 영수는 목덜미를 물렸다. 헐떡이는 그를 내려다보면서 그 여자애는 울었다. 울면서 손목에서 피를 내서 영수의 입 속에 뚝뚝 떨어뜨렸다.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경악했다. 영수는 스스로도 납득하지 못하면서 사랑이라는 단어를 발음했다.

그런 걸……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어? 내가 따지듯 그렇게 물었을 때 영수는 건조한 표정으로 입꼬리를 일자로 당길 뿐이었다. 그녀는 겨우 일 년 남짓이 지난, 아주 어린 뱀파이어였다고 했다.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그렇게 이기적이고 멍청하고 무책임할 수 있어? 나는 주먹을 쥐고 파들파들 떨었고 영수는 그런 나를 보며 조금 웃었다. 나보다 십 년을 더 살았다는 걸 잊어버릴 쯤이면 때때로 그는 정말로 오빠처럼 굴었다. 나는 항상 그게 재수없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사실이기 때문이었다.

그 여자 지금은 어디 있어? 영수는 어깨를 으쓱했다. 뱀파이어 커뮤니티에서는 공론화와 투표를 통해 추방했어. 서울을 떠났다는 얘기를 들었던 것 같아.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아. 벌써 십 년 전 일인걸.

너, 그 여자가 느껴져?

나는 열일곱 살이었고 뱀파이어의 존재에 대해 안 지 여섯 달밖에 되지 않았다. 나름의 분노 표출이었지만 본질적으로 무례하고 집요한 나의 질문에 영수는 눈썹을 찌푸렸다. 하지만 화를 내지는 않았다. 그는 눈을 내리깔았다. 하얗다 못해 새파란 눈꺼풀이 꿈틀거렸다. 곰곰이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했고 몸 속을 마구 뛰어다니는 감정을 달래는 것 같기도 했다.

가끔은. 어떤 날에는 아주 생생해. 어디쯤에 있는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두 느껴져.

피로 이어진 뱀파이어들은 다른 한 쪽이 죽지 않는 이상 연결을 끊어낼 수 없다. 절대적이고 불가항력적이며 사적이고 개인적인, 영속적인 연결. 설명을 들어 이론으로는 알고 있었지만 피부로 와닿은 것은 그날이 처음이었다. 영수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목소리가 흐물흐물 무너져 내렸다.

정말 무서워.

나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그는 피곤하고 무력해 보였다.

나도 안다. 영수 앞에서 뱀파이어가 되고 싶다고 떼를 쓰는 건 이기적인 일이다. 다른 뱀파이어 언니 오빠들이 이제 다 지나서 하는 말이지만, 하면서 슬쩍 흘려주는 옛날 이야기 속에서도 영수는 많이 힘들어했다. 부모님에게 거짓말이 적힌 쪽지 하나만 남기고 집을 떠나온 그는 한여름에 햇빛 아래로 나간 적이 있었다. 아무도 그 행위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해주지 않았지만 그게 최악으로 끔찍한 짓이라는 걸 나도 알았다.

영수는 군대를 미룰 수 있는 만큼 미루고 또 미뤘다. 그러나 주민등록상 스물일곱 살 한국 남성이 군대를 가지 않는 방법은 대학원에 진학하는 것뿐이다. 남자 뱀파이어들은 대부분 이민을 선택했고, 부득불 한국에 남고 싶으면 박사가 됐다. 영수는 공부에는 재능이 없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셈이다. 선택의 여지가 없는 삶에 대해서는 그만큼은 아니지만 나도 어느 정도는 안다.

하지만 우리 영수는…… 영어에도 재능이 없었다. 이민을 몇 년간 준비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비행기를 타고 가면 당분간은 미국으로 이주한 한국 뱀파이어 동포들의 도움을 받아 홈스테이부터 차근차근 시작할 테지만, 결국은 혼자 힘으로 자립해야 할 것이다. 아무리 메이크업을 한다 해도 늙지 않는다는 사실을 들킬 위험이 언제든지 있었다. 그들은 보통 십 년이나 이십 년 주기로 터전을 옮겼다. 내가 만난 대부분의 뱀파이어들은 독립적이고 강인했고 시련에 무덤덤했다. 그리고 끊임없이 외로워했다.

“그러니까 난 거의 뱀파이어나 다름없다고.”

“뭐라는 거야. 헛소리 좀 하지 마.”

“피는 안 마시고 언제든지 죽을 수 있다는 점만 빼면.”

“혜지야.”

나는 귀를 막았다. 영수가 그렇게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나를 부를 때마다 서럽고 사무쳤다.

“햇빛 아래에서 살아.”

그 놈의 햇빛.

내가 고등학생이 되자 언니는 더는 모임에 나를 데려가고 싶지 않아했다. 하지만 그 즈음엔 나도 커뮤니티의 일원이나 마찬가지였다. 언니는 나를 섣불리 모임에 데려간 것을 후회하는 것 같았다. 혜지야. 너는 사람이야. 사람은 사람들 틈에서 살아야 해. 신신당부를 들으며 나는 언니가 후회하는 게 싫었다. 후회가 꼬리에 꼬리를 물면 나를 데려온 것부터 후회하게 될까봐 두려웠다.

그래도 화가 아예 안 나지는 않았다. 나더러 어쩌라는 거야. 내가 믿고 의지하고 사랑하는 이들은 다 뱀파이어들인데. 이제 와서 나는 사람이니까 다른 사람들과 부비고 살라고 해도 그게 마음처럼 되는 일이냐고. 애초에 내가 왜 그래야 하는지도 이해가 안 갔다. 나는 화풀이로 영수의 정강이를 양 발로 두들겼다.

“이제 꺼져. 나 모의고사 풀 거야.”

“웃기지 마. 수시 접수 다 했으면서. 수능으로 대학 갈 생각 없잖아.”

“아, 이제 너한테 아무 얘기도 안 할 거야.”

너는 나를 너무 잘 알아. 그리고 네가 떠나면 그런 건 아무 소용도 없게 되겠지. 나는 이어지는 말들을 삼켰다. 그리고 베개를 집어 얼굴을 묻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은 모두 나를 떠나갈 것이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보면 그들은 내가 떠나가는 거라고 생각하겠지만. 나는 종종 캄캄한 새벽에 언니가 내 방에 조용히 들어와 잠든 나의 얼굴을 내려다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게 아주 쓸쓸한 눈길이라는 걸 눈을 뜨지 않고도 알 수 있었다. 언니는 내가 자라는 동안 매일매일 놀라워했고, 기뻐했고, 동시에 슬퍼했다. 나는 나이 든 햄스터를 키워 봐서 알았다. 그건 갑작스러운 이별에 언제나 준비돼 있는 자세였다. 그래서 더더욱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나를 떠나보내지 않고 계속 함께할 수 있는 명확한 방법이 있는데도, 왜 내게 그걸 해주지 않는 거야?

하지만 영수가 옳다. 언니에게 이유가 없을 리가 없다. 뱀파이어가 되고 싶다는 말을 꺼내면 언니는 불에 달군 돌을 손에 쥐고 있는 듯한 태도가 됐다. 나는 그게 뭔지 알았다. 그건 각오였다. 절대로 내게 이 고통을 넘겨주지 않겠다는 태도였다. 단호한 언니가 원망스러울 때마다 나는 그녀와 처음 만났던 날을 떠올렸다. 그러면 왠지 힘이 빠지고 김이 샜다.

그날, 다음 달에는 꼼짝없이 쉼터를 나와야 했기에 한 달 월급에서 생활비를 빼고도 살 수 있는 고시원을 겨우 알아봐뒀던 나는 눈에 뵈는 게 없었다. 법으로 정해져있는 사항이기 때문에 미성년자에게는 월급 지급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원장의 개소리에 나는 부끄러움도 잊고 발을 구르며 소리를 질렀다. 그런 게 어디 있어요!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악을 쓰는 소리에 학원 수강생들이 고개를 빼꼼 내밀고 나를 구경했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게 어디서 큰소리야. 적반하장으로 원장은 위협하듯 주먹 쥔 손을 올려들었다.

그리고 기적이 일어났다. 사무실에서 언니가 나왔다. 상황을 파악한 그녀는 나를 감싸고 아는 사이라고 거짓말을 했다. 한 달 간 근무한 기록이 남아있으니 노동청에 신고하면 어떻게 될 것 같냐고 원장을 협박하기까지 했다. 원장이 주춤하자 언니는 나를 데리고 나가 학원가 밥집에서 따뜻한 설렁탕을 사먹였다. 나는 정신이 없어서 언니가 주는 대로 받았다. 갈 곳이 없는 거라면 자신의 아파트에서 지내도 된다고 하는 말도 의심 없이 받아들었다. 당시 내가 너무 지쳤고 앞날에 대한 기대도 실망도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언니가 왠지 절박해 보여서 더 그랬다.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했지만 알 수 있었다. 언니는 나를 보호하길 원했다. 나를 돌보고 책임지고 안전하게 지낼 수 있게 돕기를 원했다.

언니는 내게 사랑을 주고 싶어했다.

그녀의 집에서 하루를 자고 일어난 후에야 나는 그런 언니가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서서히 깨닫게 됐다. 그녀가 나를 발견했다는 것을. 그녀의 원동력을, 활기를, 햇빛 아래로 몸을 떠밀어 스스로를 불태우지 않을 이유를 찾았고 선택했다는 것을.

나를 만나기 전까지 줄곧 언니의 삶은 그런 질감이었던 것이다. 너무나도 길고 지루해 고작 걸그룹을 보러 머나먼 땅으로 비행기를 타고 오는 삶. 너무나도 의미가 없다고 여겨져서 만난 지 반년밖에 안 된 여자애의 보호자가 되기 위해 낯선 땅에 뿌리를 내린 삶.

 

🩸 🩸 🩸 🩸 

 

“경은 언니랑 지현 언니처럼 사는 거 좋잖아.”

내가 툭 내뱉자 언니가 날 흘겨보았다. 나는 딴청을 부리며 뜨개질에 열중하는 척했다. 엊그제 수시 원서를 몽땅 넣어 버려서 이제 한시름 덜었기 때문에 빈둥거릴 짬이 생긴 터였다. 나는 내 점수에 맞춰 갈 수 있는 모든 독어독문학과와 불어불문학과와 노어노문학과, 그리고 스칸디나비아어과에 원서를 넣었는데, 그 결정을 이야기하자 언니는 나를 의심스럽게 쳐다보았다. 혜지야, 만약 나 때문에 그런 진로를 선택한 거라면…… 수시 철에 한껏 예민해져 있던 나는 언니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핏대를 세워 쏘아붙였다. 완전 자의식 과잉 아냐? 하지만 밤을 새서 자기소개서를 쓴 나를 격려해주려고 언니가 곱창을 시켜주었을 때 나는 솔직하게 말해버렸다. 붙는다면 독일어학과일 거야. 자소서에 언니 얘기를 썼거든. 일주일에 이틀은 독일어로 대화한다고 뻥쳤어.

“안 그래도 경은 씨랑 지현 씨가 수험생 보약 안 필요하냐고 물어보더라. 좋은 한약방 안다고.”

경은 언니와 지현 언니는 커뮤니티에서 가장 오래 살아온 뱀파이어였다. 경은 언니는 조선의 독립을 봤고, 지현 언니는 북쪽에서 남쪽으로 넘어오다가 총에 맞았을 때 경은 언니를 만났다. 경은 언니는 지현 언니와 피를 나눴고 오십 년이 넘게 함께 살아왔다. 내가 교복을 입고 모임에 따라갈 때마다 나를 귀여워하며 근현대사 과외도 해 줬다. 이전 대통령들 욕을 해 가면서.

뱀파이어 세계에 잘 적응하는 뱀파이어들도 많았다. 긴 수명이나 피의 연결을 축복으로 여기는 뱀파이어들도 꽤 있었다. 이상하게도 언니는 그런 부류와 어울리질 못했다. 하지만 경은 언니와 지현 언니와는 친하게 지냈다. 언니는 그 둘 사이에 흐르는 조심스럽고 멈칫거리는 분위기를 좋아했다. 내 눈으로 봐도 그들은 나이 든 노부부나 오래된 모녀, 때때로 이란성 쌍둥이 같았다. 나와 언니는 겨울마다 그들의 집에 놀러가기를 좋아했다. 고양이가 있기 때문이었다. 아담한 전원주택에는 항상 보일러가 세차게 돌아갔다. 새침한 고양이와 놀아주며 수다를 떨다 장판 위에 드러누워 있으면 언니와 경은 언니와 지현 언니의 몸은 나보다 훨씬 따끈따끈해졌다. 파충류 같아. 언니들의 팔다리를 주무르며 나는 키득거렸다.

“경은 언니랑 지현 언니한테 물어달라고 부탁해볼까?”

“얘가 미쳤어. 해줄 것 같니?”

“그럼 나, 다른 뱀파이어한테 물려도 돼?”

언니의 얼굴에는 난처한 기색이 떠올랐다가, 이내 화가 난 표정이 됐다. 내가 알고 지낸 커뮤니티의 뱀파이어들은 죄다 언니나 영수 같은 순둥이들이어서 어림도 없겠지만, 조금만 시야를 넓히면 야만적인 취향이 있는 커뮤니티도 있기는 하다는 걸 나는 알았다. 나는 알겠다는 의사 표현으로 어깨를 으쓱하고 다시 털실을 휘휘 잡아당겼다.

“혜지야. 대체 왜 뱀파이어가 되고 싶어?”

언니는 도무지 납득할 수 없다는 것처럼 머리를 두 손으로 감싸고 울먹거렸다. 이제 정말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나는 식탁 위에 뜨개질 바늘을 탁 내려놓고 말했다.

“언니, 피는 물보다 진하다잖아.”

“그게 뱀파이어랑 무슨 상관이니?”

“아, 우리나라에만 있는 말인가? 헝가리에는 이런 속담 없나?”

“……A vér nem válik vízzé.”

“거 봐. 만국 공통이라니까.”

언니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내가 인용한 속담이 언니 안의 무언가를 건드린 것 같았다. 오랫동안 그녀를 설득해오며 짐작하게 된 것이 있다면, 언니는 단순히 뱀파이어의 삶의 애환 때문에 내 부탁을 거절하는 게 아니었다. 물러서기는 싫지만 나는 이유를 알고 싶었다. 최소한 이유는 알고 싶었다. 만약 내가 언니와 피를 나눈다면 자연스럽게 알게 되겠지만, 나는 어쩐지 그렇게 말고 다른 방식으로 알고 싶었다.

“……생각해볼게.”

“정말?”

“응. 하지만 이건 알아줘.”

언니는 무슨 말을 하려다가 어깨를 붙들린 것처럼 멈췄다. 그건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적절치 못한 말을 고민할 때 하는 행동이다. 때때로 그녀가 이렇게 멈춰설 때 나는 내가 들어본 적 없는 언니의 이야기의 깊이를 가늠해 보았다. 그리고 영수와 내가 서로에게 그랬듯 깊은 물에 한 발을 들여놓는 언젠가를 상상했다. 오늘은 아니더라도, 언젠가.

“피가 이어지지 않았어도 내가 늘 너를 생각한다는 걸.”

언니의 고요한 목소리가 뺨을 쓰다듬는 것 같았다. 나는 모든 전의를 상실하고 언니를 바라봤다. 그래. 사실 뱀파이어가 되는 건 이제 내게 예전만큼 중요하지 않았다. 내 앞에는 두 갈래 길이 있었고, 고등학교에 들어와 입시를 준비하면서 언니 말대로 사람으로 세상을 살아갈 마음은 반쯤 먹어 둔 셈이었다.

내게 중요한 건 언니였다. 항상 그랬다.

 

🩸 

 

이건 네가 모르는 이야기다.

적어도 아직은.

아고타는 부쿠레슈티가 싫었다. 지겨운 올드타운과 채도 낮은 건물들과 정교회 건축물이 싫었다. 관광객들이 싫었고 집시들과 소매치기들도 싫었다. 공항이 가까워서 비행기 소음이 매 시간마다 들려오는 것이 싫었다.

무엇보다도 그녀는 타냐가 싫었다. 삼 년을 함께 살았는데도 아고타는 매순간 타냐를 향한 타오르는 증오를 느꼈다. 화가 치솟을 때마다 그녀에게 물렸던 목덜미가 화상을 입은 것처럼 화끈화끈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이미 말끔하게 아물어 그럴 리가 없는데도.

그날, 아고타의 운명이 산산조각났던 날은 그 달의 마지막 주일이었다. 아고타는 교회에 들러 허락을 받고 저녁 예배 시간에 오르간을 연주했다. 선한 인상의 아주머니들은 음악 전공자를 처음 본다며 박수를 쳤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그레고리안 성가와 바흐에 이끌려 교회 건물 밖에 서 있었던 타냐는 예배를 마치고 야시장으로 향하면서도 춤추던 아고타의 손가락이 정말로 아름다웠다고 했다. 그녀는 언제나 그런 사람과 피를 나누고 싶었다고 했다. 그건 합당하지 않은 이유였다. 그날 이후 아고타는 교회에 들어갈 수 없었다. 두 번 다시 오르간을 연주할 수 없었다. 아고타는 타냐의 집에서 방에 틀어박힌 채 매일 아침마다 다시는 만날 수 없는 헝가리의 가족과 친구들을 생각했다. 신 같은 건 없다고 생각했다. 죽음을 생각했다.

타냐는 그 모든 걸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겠다고 결심했던 순간은 잘 듣지 않았던 팝을 들으면서였다. 아고타는 낯선 리듬에 맞춰 몸을 흔들며 타냐가 구해온 피를 마시고 밤거리를 걸었다. 헤드폰의 음량을 최대로 올리고 이해할 수 없는 노랫말을 어눌하게 흥얼거리며 밤 공기를 마시면 살아있는 기분이 들었다. 살아갈 수도 있을 거라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타냐는 이국의 음악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 어느 날 아고타가 유튜브를 틀어놓고 샤워를 하러 들어갔을 때 그녀는 못 견디겠다는 듯이 음악을 꺼버렸다. 욕실에서 나온 아고타는 말없이 방으로 들어가 짐을 챙겼다. 충동적이었지만 자연스러웠다. 그녀는 납치되어 있던 거나 다름없었으니까.

떠날 채비를 마치고 방문을 열었는데 거실에 타냐가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아고타는 깊은 절망감을 느꼈다. 타냐는 아고타의 모든 것을 느낄 수 있으니까. 그리고 아고타도 타냐를 느낄 수 있었다. 타냐는 포기했다. 이전처럼 앞으로도 혼자가 될 것이고 아무도 자신을 사랑하지 않을 거라고 믿었다. 삶이 의미 없다고 생각했다. 타냐는 불행했다.

아고타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대체 왜 나를 만들었어요?”

아고타는 원망과 비난을 숨기지 않고 물었다. 타냐는 지친 표정으로 식탁을 내려다봤다. 아고타는 문득 그녀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를 들어본 적 없었다는 걸 깨달았다. 혹시 지금이라도 타냐가 뭔가 합당하고 이해할 수 있을 만한 이야기를 해준다면 아고타는 타냐의 앞에 마주앉아 그 말들을 듣겠다고 마음먹었다. 타냐의 메마른 입술에서 신음과도 같은 답이, 드디어, 흘러나왔다.

“원래 이런 거야.”

그건 예상하지 못했던 대답이었다. 아고타는 머리를 한 대 맞은 듯이 현기증이 났다. 빈혈을 일으킨 것처럼 어지러웠다. 자신도 모르게 책장의 모서리를 붙든 아고타는 눈을 질끈 감았다. 타냐는 변명하듯 한 마디를 더 덧붙였다.

“아고타, 뱀파이어들은 다들 이렇게 살아가.”

짧은 시간 동안 아고타는 숨을 쉴 수 없다고 느꼈다. 그녀는 겨우 굳어버린 입을 떼고 질문 아닌 질문을 뱉었다.

“그래서, 타냐, 이렇게 살아보니 어떠세요?”

침묵이 집을 메웠다. 아고타는 기다렸다. 타냐의 소용돌이치는 복잡한 감정이 버거웠지만 가만히 기다렸다. 

“저를 만들고, 행복하셨어요?”

타냐는 한참 후에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미안해.”

아고타는 손끝을 꿈틀거렸다. 미안하다는 말을 듣고 싶었던 걸까? 아니면 미안하다는 말만은 듣고 싶지 않았던 걸까? 분명한 사실 하나는 아고타의 기분이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고타는 이를 갈았다. 가슴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단단히 얼어붙고 결국에는 산산조각 나는 감각을 느끼면서.

“나는 절대로……”

피를 나누지 않을 거야. 두 번 다시 당신을 찾아오지 않을 거야. 이곳에서의 기억을 잊을 수 없을 거야. 누군가를 믿거나 의지할 수 없을 거고 믿음을 주거나 지탱할 수도 없을 거야.

아고타는 수많은 다짐과 제약과 저주를 말하지 않았다. 그녀는 지금도 그걸 다행으로 여긴다. 그 대신 아고타는 미리 챙겨둔 가방을 꽉 붙들고 문을 뛰쳐나갔다. 등 뒤에서 타냐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아고타는 돌아보지 않았다.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고 아고타는 타냐를 동정할 수 있게 되지만, 영원히 용서하지는 못한다.

원래 이렇게 정해진 거라니, 다들 그렇게 살아간다니.

그런 게 어디 있어.

눈물이 흘러내리는 감촉을 느끼며 아고타는 맹렬하게 생각했다.

그런 게 어디 있어.

 

🩸 🩸 🩸 🩸 🩸 🩸 🩸 🩸 🩸 🩸

 

한밤중의 공항에는 의외로 사람이 많았다. 티켓을 받기 위해 줄을 선 사람들을 둘러본 언니는 사분의 일은 뱀파이어일 거라고 했다. 나는 마르고 창백한 사람들을 추려 몰래 얼굴을 훔쳐보았다. 불투명한 텀블러에 피를 담아 홀짝거리던 영수는 태평한 얼굴로 내 등을 두드렸다. 분명 속으로는 아임 프롬 노스 아니 사우스 코리아, 디스 이즈 마이 패스포트를 되뇌이고 있을 것이 뻔했다.

“이혜지, 대학 합격 축하해.”

“아직 발표 안 났거든. 갈지 말지도 안 정했어. 나 뱀파이어 될 수도 있다고.”

나는 입술을 심술궂게 비틀었다. 영수는 고개를 저으며 푸하하 웃었다. 영수의 캐리어는 작고 단출했다. 손잡이를 두 손으로 쥔 그는 어색함과 미안함, 그리고 아쉬움으로 빳빳하게 굳어 있었다. 누가 봐도 떠나고 싶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가 그런 속마음을 소리내어 말하지 않을 건 누구보다도 내가 잘 알았다. 겉모습은 순둥이고 어려 보여도 영수는 어른이니까. 외롭고 덤덤한 뱀파이어니까.

“보고 싶을 거야.”

나는 성큼성큼 걸어가 영수의 목에 2미터가 넘는 무지개색 목도리를 둘러 주었다. 그리고 며칠 동안 고르고 엄선한 대사를 했다.

“영어 못한다고 옷장 속에 들어가진 마. 외롭다고 햇빛 아래로 나가지는 말고.”

영수가 내 말장난을 알아들었는지는 확신할 수 없었지만 옆에서 지켜보던 언니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무래도 나는 어학에 재능이 있는 것 같다. 영수는 또 오빠 같은 표정으로 나를 갸륵하게 바라봤다. 그는 두툼한 목도리를 두 손으로 쓰다듬다 약간 축축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야, 혜지야. 너 정말 깨물어주고 싶다.”

영수의 농담에 언니의 눈이 가늘어졌다. 나는 보란 듯이 머리카락을 걷어 목을 드러내 보였고 그는 킥킥 웃었다. 나는 왠지 그가 완벽한 농담을 던지지는 않았다는 기분이 들었다. 영수가 전에 없이 외로워 보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우리가 피로 이어져 있지 않아도,”

그렇게 말하고 영수는 잠시 말을 멈췄다. 나는 지금껏 영수가 우는 걸 본 적이 없었다.

“우리는 서로를 알 수 있으니까.”

정말로 그랬다.

 

  🩸      🩸 🩸 🩸      🩸 🩸 🩸 🩸      🩸 🩸    

 

“전화해. 도착하자마자. 메시지도. 스카이프도.”

“알겠어. 받아줘야 해. 밤이어도. 새벽이라도.”

“돈 모아서 놀러 갈게. 너도 놀러 와.”

“그럴게. 꼭. 약속할게.”

우리는 공항 직원들이 흘끗거릴 만큼 큰 소리로 인사했다. 영수는 게이트 너머로 천천히 걸어갔다. 나는 그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팔을 흔들었다. 곁에서 언니가 내 어깨를 단단히 잡아주었다. 나는 코를 훌쩍거리며 언니에게 기댔다. 우리는 손을 꼭 잡고 공항을 나섰다.

멀리서 익숙하지만 제목이 기억나지 않는 크리스마스 캐롤이 들렸다. 크리스마스가 한 달이나 남았는데 캐롤이라니. 나는 투덜거렸지만 어쨌든 종소리가 가득한 그 노래는 아름다웠다. 언니가 작게 콧노래를 흥얼거렸고, 나는 한 박자 늦게 노래를 따라갔다. 언니가 피식 웃으며 푸가, 하고 속삭였다. 나는 그게 무슨 뜻인지는 모르지만,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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