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친애하는 오영에게

2020.07.18 14:2607.18

그 날, 오영은 샐러드를 먹고 있었다. 새싹 채소와 한입 크기로 썬 양상추, 방울토마토와 과일 몇 조각, 그리고 오리엔탈 드레싱이 뿌려진 평범한 샐러드였다. 새로 구한 집 근처의 샐러드 가게는 저렴한 가격에 질 좋은 야채를 사용한 샐러드만을 판매한다는 전략을 내세우고 있었다. 덕분에 근처에 사는 자취생들이 많이 애용하는 곳이었다. 평소처럼 오영은 3,200원 짜리 기본 샐러드를 먹고 있었다. 적금이 만료되어 금전 사정이 나아지면 6,000원 어치 치킨 텐더 샐러드에 500원을 추가해 파마산 치즈도 뿌려 먹겠다는 생각도 하던 차였다. 그 때 마침 가게 사장님은 텔레비전 채널을 돌리다 문득 모 공영방송을 틀었다. 드라마가 할 시간이었지만 그 대신 뉴스 속보가 나오고 있었다. 검은 머리에 흰 가운을 입은 남자가 단상 앞에 서서 터지는 카메라 플래시를 맞으며 목 놓아 소리치고 있었다.


“이것은 단순히 금전적 목적이 있는 기자회견이 아닙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속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십년 연속 전 세계 판매율 일위, 세계 구십오 퍼센트 이상의 농가가 쓰는 친환경 비료와 자연친화 약품이, 그 유명한 '와일드 마일드 업이'! 사실 금속과 발암물질에 찌들었음을 아셔야 합니다!”


오영은 문득 가게 벽으로 시선을 돌렸다. ‘저희 가게는 마일드 와일드 업을 사용한 친환경 야채만을 사용합니다!’ 라 적힌 포스터를 보는 순간, 그는 당장 화장실로 달려가 방금 전까지 씹고 뱃속으로 밀어 넣었던 모든 야채와 과일들을 변기 안에 토해냈다.

 


상황은 빠르게 돌아갔다. 물가가 폭등하고 채소를 직접 재배해 먹는 것이 유행처럼 번졌다. 곧 각 나라들은 안전한 곳으로 사람들을 이주 시켰고 그 ‘안전한 곳’의 대부분은 그린벨트 지역이었다. 이주 과정에서도 순위가 붙었다. 한국은 생산성과 미래를 재건할 수 있는 노동력을 기준으로 삼았다. 때문에 아이가 두 명 이상 있는 가정이 1순위로 올랐다. 그 다음은 아이가 한 명 있는 가정, 아이가 없는 가정, 고정적인 직장을 가지고 있어 생산 능력이 있는 것으로 파악되는 1인 가구 순으로 순위가 매겨졌다. 그 외의 존재들은 가장 마지막으로 밀려났다. 마지막 순위의 사람들이 항의하기도 전에 대규모 이주가 시작되었다. 가족 관계를 증명할 수 있는 서류나 고지서 등을 제출하고 그린벨트 지역으로 들어가면 되는 방식이었다. 전산망이 진작 붕괴된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확인 절차였다.

 


4‧5순위를 배정받은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냥 늘 하던 대로 회사에 출근해 자신이 맡은 업무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전부였다. 간간히 이주를 위해 관두는 사람이 생겼지만 그렇다 해서 그들이 정규직 직원이 되는 일은 없었다. 생각보다 4‧5순위를 배정 받은 이들이 많았다. 멸망 직전에 이르렀어도 대체 인력은 충분히 넘쳐났다. 그들이 없어져도 세상은 어쨌든 돌아갔다. 주는 것은 유감이라는 말 한 마디로 정리될 일이다.

 


오영은 5순위였다. 그는 자신이 극도로 운이 없는 경우라 생각했다.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믿었던 친구가 배신하고, 직장에서 쫓겨나고, 가족들은 그를 의절했다. 그것만 가지고 있어도 충분히 속이 쓰리고 아렸는데 하필 이주 순위 책정 기간이 그 직후였다. 그동안 자신이 회사에 충성했던 시간은 물거품이 되어 사라졌다. 남은 것은 반강제로 회사를 나올 때 받은 소량의 위로금이 전부였다. 그마저도 머무를 조그만 방 하나를 구하니 금세 반이 날아갔다. 그래서 그는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아무도 오지 않는 청과물 가게의 계산대에 서서 손님을 기다렸다. 1순위에 포함된 이전 아르바이트생이 떠난 자리를 타이밍 좋게 잡은 경우였다. 고용주는 시급을 돈 약간과 반쯤 말라 비틀어진 과일로 제공했다. 돈도 아끼고 썩어갈 재고를 처분할 목적이 다분했다. 오영은 돈만 받은 뒤 과일은 집 앞 쓰레기통에 버렸다. 어쨌든 최대한 살아보겠다는 발악이었다.

 


‘재난 발생 650일 차, 그린벨트 지역으로 이주하는 사람들이 점차 늘고 있습니다. 현재까지 전국에서 약 350만 명의 사람들이 각 지역의 그린벨트로 이주를 마무리했다 추산되며, 정부는 최대한 많은 수의 사람을 이주시키는 방향으로…….’


“아가씨, 계산 좀 해 줘.”

잡음과 깨진 화면 사이로 들려오는 앵커의 목소리를 듣던 오영이 퍼뜩 고개를 돌렸다. 김 씨였다. 오영과 똑같이 5순위를 받은 인물이지만 그와 달리 살아보려는 시도를 포기한 인물이었다. 가게에 하도 오는 사람이 없다보니 오영은 그를 어렵지 않게 외울 수 있었다. 매일 점심 무렵 과일 대량 매입을 위해 오는 사람이었다.


“4,850원입니다.”

김 씨가 잔뜩 구겨진 지폐와 녹이 슨 동전을 계산대 위에 놓았다.


“학생은 저기, 뭐, 그린벨트 그런 곳으로 안 가나? 내 주변 사람들은 벌써 다 거기로 간다고 난리야. 내 이웃집에 사는 그, 박스 주워서 파는 고물상 최 씨 놈도 지 부인이랑 애들이랑 내일 간다고 오늘까지만 오라고 하지 뭐야.”


“…….”


오영은 별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고 지폐를 펴서 포스기에 넣었다.


“쯧, 나라가 어쩌다가 이 모양이 된 건지……. 그래도 과일이랑 싸서 좋긴 좋아. 예전에는 라면만 사도 돈이 다 떨어졌는데 요새는 사과 열 개가 라면 한 봉지보다 싸잖아. 어차피 내 아들놈은 진작 나 버리고 지 가족 살겠다고 갔을 게 뻔하고, 어차피 죽을 몸뚱아리인 거 못 먹어 본거 많이 먹고 죽는 것이 낫지. 먹고 죽은 귀신이 때깔도 곱다잖어, 안 그래?”


“…….”


“학생은 뭐, 정말로 같이 갈 그런 사람 없는가? 젊은 나이인 것 같은데 이왕 살아있는 거 살만큼 살아봐야지. 아니면, 그, 정 사람 없으면 요새 서류 좀 만지는 사람한테 가서 돈 주고 이래저래 하면 들어갈 수 있게 만져준다는 소리가 있던데……혹시 뭐, 생각 있으면 나랑.”


“박스 값 포함해서 총 4900원 받았고 박스에 다 넣어드렸습니다. 잘 가세요.”


김 씨가 인상을 찡그리며 가게 로고가 박혀있는 박스를 안아 들었다.


“쯧, 같은 처지끼리 잘 좀 해보자는 건데 젊은 애가 저렇게 성격이 모나서 어디 쓰겠냐……쯧, 쯧…….”

대놓고 들으라는 수준으로 혼잣말을 하며 나가는 김 씨를 굳이 안녕히 가라는 말로 보내지 않았다. 대신 여전히 잡음이 가득한 뉴스로 다시 눈을 돌렸다.


‘정부는 오는 30일부터 각지의 이주 구역 경비 체제를 강화 하겠다 발표했습니다. 청와대 대변인은 ’서류 위조 및 각종 불법 행위를 통해 정당하게 입주하려는 사람들이 들어가지 못하고 있다‘면서 오는 29일에서 30일로 넘어가는 자정부터 단순히 서류 검사가 아닌…….’


저 앵커는 이주를 마친 사람인 걸까. 아니면 뉴스를 전달해야 한다는 사명 하에 이주를 포기한 것일까. 사실 저 사람도 나와 같은 처지인 것이 아닐까. 그린벨트를 지키는 사라들의 가족은 이주 대상에 포함되는 걸까. 이미 이주한 사람들 중 서류를 조작한 이들이 있다면 그들은 거르지 않는 것일까. 오영이 실없는 생각을 하며 텔레비전을 보는 사이 바깥에서는 해가 저물고 있었다.


평소 하던 것처럼 시급 대체품으로 받은 과일을 집 앞 공동 쓰레기통에 버린 오영은 집에 들어오기 무섭게 침대에 대(大)자로 뻗었다. 배가 그렇게 고프지 않았다. 찬장 위에 컵라면이 있었지만 크게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때문에 오영은 괜한 식량을 축내는 대신 휴대폰을 켰다. 실없이 통화 내역으로 들어가 리스트를 쭉 내리자 늘 그렇듯 같은 이름이 같은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엄마, 엄마, 내 동생, 아빠, 아빠, 아빠, 아빠, 베프 민지, 아빠, 그리고 선. ‘선’과의 마지막 통화일은 550일 전이었다. 의절 당한 직후이자 국가에서 이주 계획을 발표하기 직전이었다. 괜히 화면 속 ‘선’을 꾹 눌러본 오영은 이내 창을 닫았다. 괜한 짓이었다.


언제 끊길지 모르는 불안한 데이터 통신망으로 할 수 있는 것은 몇 되지 않았다. 오영은 인터넷에 들어가 ‘비(非) 청정구역 생존자들의 모임’ 에 접속했다. 그와 마찬가지로 4‧5순위를 배정 받은 이들이 만든 비밀 카페였다. 불안정한 통신 상태 임에도 카페는 언제나 붐볐다. 사람들은 그곳에서 같은 지역에 사는 사람들을 찾기도, 자신의 일상을 공유하기도, 혹은 같이 서류를 위조해 이주할 사람을 찾기도 했다. 주제만 달라졌을 뿐 살아가는 것은 똑같았다.


오영은 자유게시판에 접속했다. 그곳에는 긍정을 잃지 않으려는 사람과 이미 모든 것을 포기하고 해탈한 상태로 살아가는 사람이 뒤섞여 붐비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글쓰기’ 버튼을 누른 오영은 익숙하게 자판을 눌렀다. 오늘 웬 이상한 늙은이가 저에게 치근거리는데……. 별것 없는 내용이었다. 기나긴 글의 끝은 언제나 똑같았다. 언젠가 저 너머로 갈 수 있겠죠? 글을 올린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댓글이 달렸다. 아직 희망이 있는 사람들이 남긴 글이었다. 그렇죠, 당연하죠, 우리도 나갈 수 있을 겁니다. 천편일률적인 내용이었다. 오영이 한숨을 푹 쉬고서 카페에서 나왔다. 하루를 마무리할 시간이었다.

 


잠들려던 오영을 붙잡은 것은 알림이었다. 댓글 알림을 끈 상태니 누군가가 개인적으로 쪽지 따위를 보낸 것이었다. 별 의미 없는 광고 따위일 것이라는 생각에 오영은 자기 전 마지막으로 확인할 심산으로 휴대폰을 다시 켰다.


카페 글 보고 연락드립니다. 혹시 같이 서류 위조 한 번 해보실 계획 있으신가요?


별 것 아닌 것이 아니었다. 오영이 두 눈을 크게 떴다. 다시 몇 번을 읽어보아도 내용은 여전히 똑같았다. 심장이 갑자기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자리에서 일어난 오영은 즉시 답장을 보냈다. 어떻게요? 기다렸다는 듯 답장이 왔다.


제가 4순위 배정 받았는데 이대로는 못 살 것 같아서 이주 계획을 짜다가 님 글을 보고 저와 지역도 같고 맞는 분인 것 같아서 연락을 드렸습니다. 일단 아는 지인이 고아원을 운영하는데 미리 얘기를 해놔서 괜찮은 애 둘 정도는 보내줄 수 있다고 확답을 받았습니다. 저랑 님이랑 그 애들이랑 가족 사이인 걸로 서류 조작하고 가는 걸로 하고 싶은 데 괜찮으신가요?


말처럼 쉬운 일인가 고민하던 찰나 또 다른 쪽지가 도착했다.


님 다른 글 보니까 5순위 쯤 되는 거 같은데 이런 기회 진짜 흔한 거 아닙니다. 며칠 지나면 확인절차도 더 까다로워지니 30일 지나면 못 넘어가게 될 가능성 높고요. 잘 생각해보세요. 다른 사람들은 3순위 정도로만 올려주는데 저는 1순위로 바로 올려드리는 겁니다. 서류 위조 금액은 반반 정도 생각중이고요. 솔직히 같이 살아남는 건데 후회하지 않을 선택하시길 바랍니다.


살아남는다. 오영이 지금까지 아르바이트를 해 가면서 살아있는 지옥이라 불리던 도시에서 버티는 궁극적인 이유였다. 얼굴도, 나이도 모르는 사람이었지만 확실히 매력적인 조건임을 맞았다. 지금은 무엇이든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얼마인가요. 돌아온 금액은 오영이 모아둔 돈과 얼추 아슬아슬하게 비슷했다. 알겠습니다. 오영이 답장을 보내자 몇 분 뒤 쪽지가 도착했다.


일단 제가 먼저 서류 위조 해주는 곳에 연락을 해야 되니까 내일 밤에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내일부터 본격적으로 서류 작업 시작하는 걸로 알 테니까 주변 정리 미리미리 해두시고요.


그 쪽지를 끝으로 데이터 표시는 ‘데이터 수신 불가’ 표시로 바뀌었다. 불안하던 데이터가 결국 끊겼다. 아마 빨라도 내일 아침까지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었다. 화면이 꺼질 때까지 멍하니 바라보던 오영이 자리에 누웠다. 심장은 여전히 빠르게 뛰고 있었다. 알 수 없는 찝찝함이 한 구석으로 밀려들어왔지만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는 알 수 없었다. 오영은 자신이 정리해야 할 주변 상황에 대해 떠올려보았다. 그렇게 많은 것이 있진 않았다. 방은 빼면 되는 것이고 아르바이트는 그만 두면 끝이었다. 돈은 현금으로 인출해둔 것이 있었으며 문득 자신이 알고 지내던 사람들이 떠올랐다. 과거 가족들과 의절한 시기 즈음에 연락이 끊긴 사람도 있었지만 세상이 몰락하면서 연락이 끊어진 사람도 있었다. 아빠, 엄마, 동생, 단짝 친구, 동창, 후배들, 직장동기, 그리고.


“…아.”


오영이 이불을 꽉 움켜쥐었다. 그리고 머리를 다 덮을 정도로 끝까지 덮었다. 눌러 놓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밤이 길어질 것 같았다.

 


오영의 주변 정리는 역시나 별 것이 없었다. 우선 아침에 일어나 묵고 있는 집 주인에게 이번 달까지만 묵겠다 말했다. 날이 갈수록 수척해지는 집 주인은 입을 쩍쩍 벌려 하품을 하며 그러라고 말했다. 아르바이트는 바로 그만 두겠다 말했다. 청과점 주인은 아쉽다며 본인 가게에 한 가득 쌓여있던 반쯤 썩은 사과를 한 박스 건네줬다. 면전에서 거절하기도 뭣해 결국 집까지 그것을 들고 와야 했다. 데이터가 터지지 않아 직접 가야 했던 것이 죄라며 오영은 괜히 투덜거렸다. 김 씨는 웬일인지 보이지 않았다. 오영은 그것이 뭔가 잘 풀리려는 징조라고 생각했다. 그것이 주변 정리의 끝이었다.


이후에 할 일은 짐 정리였다. 쓰레기통에 버리기엔 너무 커서 집안까지 들고 온 상자를 구석에 처박은 오영은 옷장에 걸려 있던 모든 옷들과 한쪽에 몰아넣었던 잡동사니 상자를 모조리 꺼냈다. 처음 집에 들어 올 때 쓴 커다란 캐리어 가방을 열어 대충 필요한 옷만을 담으니 얼추 짐이 꾸려졌다. 묵직한 옷가지를 정리한 오영이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다. 무언가 찝찝한 기분은 남아 있었지만 크게 중요한 사항은 아니라 생각했다. 오영은 마지막으로 상자를 열었다. 집에 둘 구석이 없는 물건들을 모아놓은 종이 상자는 오랜 시간 연 사람이 없음을 증명하듯 뚜껑이 들리기 무섭게 먼지가 풀풀 휘날렸다.


“콜록.”


손을 휘휘 저으며 기침을 몇 번 한 오영이 상자 안을 뒤적였다. 필요 없는 물건은 모조리 버릴 셈이었다. 고장 난 시계, 낡은 물병, 한 때 인기 있었던 캐릭터가 그려진 노트 등 다양한 물건이 상자 안에서 나왔다. 거의 다 필요 없는 물품이었다. 필요한 것과 아닌 것을 분류하며 물품을 분류하자 금세 바닥이 보였다. 오영은 대충 마무리하고 상자를 닫으려 했다.


“어?”


그리고 그 순간, 그가 마지막으로 꺼낸 것은 불투명한 색상에 무늬 없는 표지의 파일이었다. 꽤 두툼한 두께의 파일은 조용히 주인이 오길 기다렸다는 듯 먼지를 뒤집어 쓴 채였다. 오영이 천천히 표지를 넘겼다. 그러자 그 안에 있던 것은 파일 안에 꽂혀 있던, 누군가 인위로 찢고 구긴 편지를 테이프로 얼기설기 붙여놓은 편지였다.


친애하는 오영에게


아. 파일을 들고 있던 오영의 손이 살짝 떨렸다. 그동안 묻어두었던 모든 기억이 한 번에 터져 나오는 것 같았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자신을 덮치는 과거는 그를 혼란스럽게 만들기 충분했다. 숨을 살짝 가쁘게 내쉰 오영이 다시 천천히 편지로 시선을 돌렸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임에도 이렇게 편지로 이야기를 주고받으니 우리가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떨어지는 것 같아 재밌어. 너도 나처럼 재미를 느꼈으면 좋겠는데……. 그건 너무 무리한 바람일까? 이렇게 편지를 주고받는 것도 다 내 의견이었고 네 생각은 안 들어갔잖아. 만약 편지가 싫다면 언제든 말해줘.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이메일도 괜찮아. 사실 내가 경험을 직접 겪어보려는 것도 있지만 너와 이야기를 나눈다는 사실이 의미 있는 거거든.


그나저나, 지난번에 ‘친애하다’라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물어봤었지? ‘친밀하게 사랑하다’라는 뜻이야. ‘친밀하다’는 ‘지내는 사이가 매우 가깝다’라는 뜻이고. 사실 우리 사이가 ‘친애하다’라는 단어로 정의되는 것은 조금 속상해. 나쁜 말이 아닌데 왜 그러냐고? 너도 알다시피 우리는


뒷부분은 찢어져서 보이지 않았다. 오영은 그 편지를 읽었다. 읽고, 읽고, 또 읽었다. 정리해야할 짐도 잊은 채 편지를 읽던 오영은 어렵지 않게 한 사람을 떠올렸다.


“선.”


이름을 한 번 입에 담았을 뿐인데 뱃속이 울렁거렸다. 호흡이 불규칙하게 입 밖으로 새어나왔다. 오랜 시간 잊고 지냈던 사람들 다시 떠올리려 하니 사고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오늘 밤 역시 식사는 어려울 것 같았다.

 


선은 오영의 친구였다. 부유한 사업가인 부모님 아래서 자라 소설가를 꿈꾸던 밝은 청춘이었다. 중학교 시절 같은 반이었던 것을 계기로 친해진 두 사람은 꽤 자주 붙어 다녔다. 유독 몸이 약했던 선이 대학을 포기하고 집에만 있을 시기에 오영이 직접 집으로 찾아간 적도, 오영이 아플 때 선이 문병을 온 적도 있어서 서로의 가족 역시 그들 서로를 알고 있었다. 편지를 주고받자는 것은 선의 의견이었다. 자신이 로맨스 소설을 쓰고 싶은데 편지를 기다리는 주인공의 감정을 알지 못하니 직접 체험해보겠다는 의도였다. 오영은 흔쾌히 그러자고 했다. 선이 진짜로 소설을 썼는지 알 수 없었지만 첫 번째 편지를 받은 이후 꽤 오랜 시간 수십 통의 편지가 오갔다. 다만 가족들과 분열되던 시기 즈음에 기나긴 편지도 결국 막을 내렸다. 그 이후 오영은 선에게 연락을 하지 않았다. 집 주소를 알면서도, 이메일이나 문자를 할 수 있었음에도 하지 않았다. 마지막 연락은 오영이 새롭게 머물 방을 구한 직후였다. 짧은 통화를 끝으로 오영이 선에게 연락하는 일도, 선측에서 먼저 연락하는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사실 할 수 없던 것인지, 아니면 하지 않은 것인지는 오영 본인조차 확답을 내릴 수 없었다.

 


그날 밤 데이터가 잡히고 쪽지가 도착했다. 어제 쪽지를 보낸 그 사람이었다. 자신이 유능한 전문 서류 위조 경력자를 구해놨으니 돈을 가지고 모레 즈음 만나서 바로 일을 진행하자는 내용이었다. 오영은 쪽지를 읽기만 할 뿐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 아무렇지 않게 답을 보내기엔 불안정한 호흡과 머릿속이 그를 방해했다. 그날, 결국 오영은 잠들지 못하고 뜬 눈으로 아침을 맞이했다.

 


날이 밝자 오영은 다시 파일을 열어 편지를 읽어 보았다. 파일 하나를 꽉 메운 편지들은 구겨지고 찢어진 것을 다시 이어 붙인 것도, 손때가 탄 것도, 글씨를 알아보기 힘든 것도 있었다. 모든 편지들에는 당시의 감정이 고스란히 묻어 있었다. 해가 중천에 떠오를 때까지 편지를 말없이 읽던 오영은 파일을 덮으며 문득 생각했다. 선이 보고 싶다. 오랜 시간 묻어둔 감정이 그제와 터져 나왔다. 선의 집 주소는 자신이 잘 알았다. 잊고 살려 해도 잊을 수 없었다. 지하철을 타고 10 정거장을 간 뒤 몇 분 정도 걸으면 선의 집이 나왔다. 하지만 무작정 가는 것은 애매했다. 만약 선이 이미 이사를 갔으면 별 다른 수가 없었다. 어차피 찾아갈 거 전화라도 미리 하고 가야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번호 역시 바뀌었을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꽤 난감했다. 한숨을 푹 내쉬며 이도 저도 하지 못하던 오영은 결국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선의 집으로 갈 생각이었다. 이제 서류를 위조하고 그린벨트 지역으로 넘어간다면 다시는 보지 못할 확률이 컸다. 마지막으로라도 보고 싶었다. 오영이 파일을 챙긴 뒤 현관문을 열었다. 머릿속에서 선의 집만 들린 뒤 만약 자신을 맞아준다면 안부만 묻고 돌아와 마저 못 챙긴 짐을 챙길 것이라는 계획을 세웠다. 방 한 구석에서 슬슬 썩어가 파리가 날리는 사과를 버리는 것도 계획의 일부로 집어넣는 것 역시 잊지 않았다.

 


인구가 줄어들면서 지하철 운행 역시 횟수가 줄어든 탓에 오영이 선의 집이 있는 동네에 도착했을 땐 슬슬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을 시간이었다. 조용한 것을 넘어 고요하기까지 한 거리를 걸으며 오영은 그제야 선이 자신을 받아주지 않을 확률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왜 자신은 선이 자신을 밀어낼 경우를 고려하지 않은 것인지, 만약 정말로 그렇게 된다면 어떻게 반응을 해야 맞을지, 그렇게 오랜 시간 지하철을 타고 오면서도 생각을 하지 않은 예상치 못한 난관이었다. 슬슬 다시금 긴장감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영이 머릿속으로 선에게 문전박대 당하는 상황을 다섯 번 즈음 생각했을 때 어느새 그의 앞에 보인 것은 선의 집이었다.


“아.”


오영은 자신이 선의 부모님이 있을 경우 역시 생각하지 않았음을 그 순간에 깨달았다. 시간이 시간인 만큼 퇴근 후 집에 계실 확률 역시 적지 않았다. 돌아가기엔 너무 늦은 타임이었다. 결국 숨을 한 번 크게 들이마신 뒤 뱉은 오영이 그대로 초인종을 눌렀다. 딩동. 오랜 시간 듣지 않았어도 익숙한 느낌의 소리가 들렸다. 현관문은 열리지 않았다. 정말로 이사를 간 것 같아 오영은 묘한 불안감에 휩싸였다. 다시 한 번 초인종을 눌렀지만 나오는 사람은 없었다. 가만히 문을 쳐다보던 오영이 그대로 발길을 돌렸다. 더 이상 기다려봐야 얻는 것은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 그때였다. 안쪽에서 무언가 달그락 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그대로 두꺼운 철문이 젖혀졌다.


“…어.”


“어…….”


선이었다. 시간이 흘러 키도 약간 크고 나이 먹은 티가 났지만 분명히 오영 자신이 기억하는 얼굴이었다. 어색한 적막이 흘렀다. 선은 예상치 못한 사람이 등장했다는 사실에 조금은 놀라움과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안녕.”


결국 인사를 먼저 건넨 것은 오영이었다.


“…안녕.”


선 역시 뒤따라 인사를 건넸다. 입 꼬리를 살짝 올려 웃는 그 웃음이 기억 속에 남아있는 잔재와 똑같아 오영은 아주 잠시지만 울렁이던 뱃속이 가라앉는 신기한 기분을 경함할 수 있었다.

 


집 안 구조 역시 오영이 기억하던 구조와 동일했다. 원목 가구, 가죽 소파, 고급스러운 조명까지 모든 것이 이전과 똑같았다. 손님용 소파에 앉아있던 오영의 앞에 선이 서툴게 깎인 사과가 놓인 접시를 놓았다. 힐끔 옆을 보니 부엌에 사과가 가득 쌓인 상자가 보였다. 사과의 연노란 과육이 보기만 해도 달고 신선해보였지만 오염된 과육일터라 들지는 않았다.


“어떻게 지냈어?”


뻔한 질문이었지만 가장 최선의 물음이었다.


“…그냥, 지냈어. 밥 먹고, 가끔 밖에 나가서 산책하고, 원래는 출판사랑 계약도 했는데 거기 사장이랑 직원이 대규모로 죽어서……. 왜 죽었는지는 따로 말 안 할게.”


사실 특별한 부연 설명 없이도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부모님은, 잘 계셔?”

“…….”


“…아, 미안. 내가 괜한 걸 물어봤구나.”

“도망가셨어, 나 두고.”

“어?”


오히려 체념한 모양새에 더 당황한 것은 오영이었다. 선은 무덤덤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요약하자면, 선의 부모님은 사업을 넓힐 겸 잘 모르던 농업 분야에도 손을 뻗기 시작했는데 하필 손을 뻗은 대상이 ‘그 비료’였다. 그 이전까지만 해도 전 세계적으로 잘 나가던 제품이라 아무 문제없을 것이라 생각한 것이 화근이었다. 세상이 무너지고 오영과의 연락이 끊긴지 얼마 안 됐을 무렵 정부는 이주 정책을 발표했고 그 즈음을 기점으로 투자자들이 선의 집을 찾아오기 시작했다. 아마 세상이 혼란스럽지 않았다면 드라마처럼 온 집안에 빨간 딱지가 붙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자신의 돈을 내놓으라는 사람들을 버티지 못한 선의 부모님은 결국 도망을 선택했고 어느 날 새벽 그대로 실행에 옮겼다. 문제는 그들의 계획 속에 선은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어떻게 그래?”

오영이 할 말을 잃은 표정으로 선을 바라보았다. 선은 말없이 오영의 얼굴만 바라보았다.


“창피한 자식을 굳이 데려갈 필요는 없으셨나 보지.”


“아니, 아무리 그래도……!”


“괜찮아, 그래도 더 이상 돈 받으러 오는 사람은 안 와서 지금은 그러려니 하고 살아. 부모님이 돈 다 들고 가셨다고 하니 더 이상 안 오더라고.”


선이 문득 시선을 돌리다 오영의 옆에 놓여 있던 파일을 발견했다.


“그거, 뭐야? 봐도 돼?”


오영이 파일을 건네주자 선이 표지를 펼쳤다. 그리고 이내 화색을 띄었다.


“편지 가지고 있었네!”


“으응, 가지고 있었어.”


“나도 내 방에 네 편지 모아뒀는데! 근데 너처럼 이렇게 많이는 없어, 엄마가 그거를 다 버려서……. 쓰레기장 뒤져서 일부 찾아내긴 했는데 다는 못 찾았거든.”


“괜찮아……. 그럴 수 있지.”


파일을 한 장씩 넘기며 내용을 읽어보던 선이 문득 아련한 표정을 지었다.


“우리도 이렇게 평화로울 때가 있었는데 말야. 그 때가 좋았어, 아무 걱정 없고 모든 게 다 좋았는데.”


“…그러게.”


“나, 사실 지금에서야 말하는 건데 사실 그 때 소설 안 썼어. 그 때는 엄마나 일단 공부하라고 그렇게 감시를 해대니 영 쉽지가 않더라. 근데 그 와중에도 너한테 편지 쓰는 건 첩보 작전 못지않게 열심히 숨겨 가면서 썼다? 편지지도 뭐가 제일 괜찮을지 30분 씩 고민하기도 하고, 펜도 일부러 비싸고 잘 써지는 걸로 사고…….”


말을 조용히 듣고 있던 오영이 표정이 살짝 모호하게 일그러졌다. 선은 그 모습을 보지 못한 듯 여전히 파일을 들여다보며 감상에 젖어 있었다.


“…너는 이주 안 해? 부모님이 도망가긴 했어도 일단 3인 가족이니 2순위 정도는 들어갈 거 아냐. 아니, 요새 그렇게 서류 위조가 판을 친다는데 차라리 너도 위조해서 넘어가자. 부모님이 그래도 돈 어느 정도 남겨주신 거 있지 않아? 응?”


선이 고개를 들어 작게 웃어보였다.


“처음에는 나도 나가보려고 했지. 집에 있는 서류 들고 가봤는데 이미 접수된 서류 중에 부모님 이름이 적힌 서류가 있어서 실패했어. 우리 엄마, 아빠가 나를 서류에서 지운 거야. 그 들고 간 돈을 주고. 그래서 남은 돈으로 위조도 알아봤는데…….”


“…….”

“사기였을 줄은 몰랐지. 그래서 돈 다 날렸어. 처음에는 충격이 꽤 커서 죽을까, 생각도 했을 정도야. 그래도……지금은 살만해. 죽을 용기도 없고, 과일도 싼값에 먹고, 지금 이렇게 너를 볼 수 있는 것도 다 살아있어서 가능한 거잖아, 안 그래?”


“…뭘 먹어?”


오영은 그 순간이 돼서야 선이 앉아있는 소파 너머 부엌의 사과 상자가 눈에 들어왔다. 수북하게 쌓여있는 사과, 상자에 찍혀있는 익숙한 로고, 그리고 그것을 대량으로 매입해 가던 남자.


“과일. 어쩔 수 없어, 돈은 없는데 그나마 싼 값에 많이 구할 수 있는 식량이 과일이나 채소니까. 처음에는 먹기 싫어서 굶어보기도 했는데 결국에는 먹게 되더라. 부모님 지인 분이 자기가 아는 신선한 과일 대량으로 구해올 수 있대서 그 분께 돈 드리고 받아서 먹고 있어. 조금 지출이 크지만 그래도 남는 돈 이렇게라도 써야지. 그런데 얼마 전부터 연락이 없으시네. 이 상황에선 어떤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지만....”


“...잠시만.”


“어차피 나는 못 가. 그러니 지금 이렇게 버티다가 자연스럽게 죽는 것도…….”

선이 사과가 담긴 접시로 손을 뻗었다. 그리고 그 순간, 오영은 그대로 일어나 다급하게 접시를 쳐냈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조각난 접시와 사과 조각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잠시 적막이 흘렀다. 곧 파일을 내려놓은 선이 자리에서 일어나 사과와 접시 파편을 주웠다.


“…오영아.”


“…응.”


“너는, 몇 순위야?”


“…1순위.”


거짓말이었다. 오영은 다시금 뱃속이 울렁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못 먹게 된 사과와 파편을 모아 쓰레기통에 버린 선이 입 꼬리를 올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다행이네, 그래도 잘 지내는 것 같아서.”


“…….”


“나 매일 기도했거든. 나 때문에 네가 불행해진 거니까 꼭 나를 불행하게 만들고 너는 행복하게 해달라고……. 기도가 안 먹힐 줄 알았는데 그래도 저위에서 들어주시긴 하셨구나.”


“…우리 아빠 목사잖아. 그러니까 어느 정도는 먹힌 거겠지.”


“뭐야, 하나도 연관성 없잖아.”


선이 긴장이 풀린 듯 환하게 웃었다. 오영은 웃지 못했다.


“오영아.”


“…응.”


“나는,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끝까지 살아서 네가 원하는 행복을 얻었으면 좋겠어.”


“…….”

“조금 오글거리는 말이긴 한데, 그게 내가 원하는 거야.”


“…진심이야?”


“…당연하지. 우리는 친애한 사이 그 이상이잖아. 여기까지만 말할게. 그 이상은 내가 품고 갈게.”


오영은 차마 대답하지 못했다.

 


파일을 챙긴 후 집으로 돌아오자 어느덧 달이 떠있는 시간이 되었다. 역시나 허기가 들지 않아 저녁 먹을 생각도 않고 침대에 누운 오영은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데이터 통신만큼이나 들어왔다 나가기를 반복하는 전기 때문에 방 안은 어두웠다. 말없이 하늘만 바라보던 오영은 휴대폰을 켰다. 그새 새 쪽지가 와 있었다.


오늘 서류 위조 전문으로 하는 사람 만나고 왔습니다. 최대한 빨리 끝내고 넘어가야 하니 내일 접선 장소 정해서 만나고 서류 위조 하시는 거 보러가는 건 괜찮으신가요? 보시고 시간 괜찮으시면 고아원도 들리고자 합니다. 적당히 얼굴 비슷한 애들 두 명 정도 직접 고르는 걸로 하죠. 가능하시면 내일 만나실 때 말씀드린 금액을 가지고 나와 주셨으면 합니다. 불안하시면 반만 주시고, 나머지는 그린벨트 넘어가서 주셔도 됩니다.


오영은 말없이 쪽지를 바라보았다. 쪽지 위로 선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예전에 비해 많이 컸지만 야윈 티가 나는, 자신이 없는 사이에 수많은 일들을 겪은, 결국 자신의 행복을 빌어준 선. 과연 자신은 무엇을 선택해야 행복할 수 있을까. 한숨을 푹 쉰 오영은 결국 결심했다는 듯 답장을 보냈다. 몇 분 뒤, 다시 쪽지가 도착했다.


진심이세요?


네. 단 한 글자의 답장이었다.

이거 흔한 기회 아닌 거 아실텐데요. 당신 아니어도 이 자리 필요한 사람 많고요, 곧 있으면 그린벨트 단속 강화 될거고 우리 같은 4‧5순위는 들어가는 거 사실상 꿈도 못 꿉니다. 잘 생각해보세요. 저는 당신을 위해 말하는 겁니다.

 

오영은 꽤 오랜 시간 자판을 두들겼다. 그리고 전송 버튼을 눌렀다. 이후 다시 데이터 통신망 표시가 ‘데이터 수신 불가’ 표시로 바뀔 때까지 답장은 오지 않았다. 오영이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갑자기 가슴 한 쪽의 찝찝한 무언가가 사라지는 기분이 들었다. 이상하게 실없는 웃음이 나왔다. 왜 갑자기 이러는지 자신조차 알지 못했다. 확실한 것은 슬퍼서 그런 것이 아니라는 사실 정도였다.

 

갑자기 뱃속에 허기가 돌았다. 꼬르륵거리는 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졌다. 자리에서 일어난 오영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찬장 안에 컵라면이 있지만 갑자기 신선한 것이 먹고 싶어졌다. 느릿하게 걸음을 옮긴 오영은 방구석에 박아두었던 사과박스를 열었다. 썩은 것이 대부분이라 악취가 풍겼다. 달빛에 의존해 그나마 멀쩡해 보이는 것 한 알 집어든 오영이 다시 침대로 돌아와 천장을 바라보는 자세로 누웠다.

 

내일 다시 선의 집으로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짐을 마저 챙긴 뒤 날이 밝으면 지하철을 타고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통신망이 언제 다시 원래대로 돌아올지 모르기에 연락은 포기했다. 아마도 집을 예정보다 며칠 더 빠르게 비우게 될 것 같았다.

 

오영이 손에 들고 있던 사과를 그대로 깨물었다. 과육이 반쯤 물러진 사과가 즙을 흘리며 힘없이 조각 나 바스라졌다.

 

나쁘지 않은 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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