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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여름 산책

2020.06.04 15:4906.04

-N에게



어제 나 진짜 피곤했었어. 잠을 얼마 못 잤거든. 원래 핸드폰으로 새벽 두 시까지 이런저런 이야기를 읽었는데 도저히 안되겠더라. 거의 눕자마자 잠든 것 같아. 근데도 그 피곤함이 끈질기게 붙어 떨어지질 않더라. 어제 바로 산책도 못 시켜줘서 미안했는데 아침에도 일어나기가 너무 싫어서 느지막이 산책을 갔어.

 

그래도 막상 몸을 일으키고 약 먹으니까 잠깐 다녀올 순 있을 것 같더라고. 그래서 얼른 다녀와서 자야겠다 하고 나갔지.

 

너무 더워서 날벌레들이 우글거리는 오솔길로 걸었어. 너라면 딱 질색하겠지만 나는 더운 것보단 차라리 날벌레가 낫겠다 싶었거든. 한적한 오솔길을 걷는 것도 좋아하고. 나무가 우거지고 옆에 시냇가가 있어서 좋아하는 길이야. 사람도 차도 별로 안 다니고.

 

바로랑 천천히 걸으면서 주변을 둘러봤는데 유난히 하얀 꽃들이 많았어. 여름엔 하얀 꽃이 많이 피나? 나무마다 핀 꽃들이 작고 하얀 꽃 들이었어. 촌에 살아도 나무나 풀로만 둘러싸인 곳은 별로 없어서 신기했어. 계절마다 색도 다른가 해서. 봄엔 화사한 노란색이었는데 여름은 의외로 하얀색이네.

 

또, 여름 꽃은 하얀 꽃들이 조그맣게 뭉쳐서 여러 송이가 피더라. 너무 작아서 약한지 후드득 떨어져 바닥에 카펫처럼 수북이 꽃이 쌓였어.

 

나를 닮았다는 생각이 드네. 이렇게 써놓고 보니까. 요새는 내 잘못 하나 인정하기 힘들어하는 약한 사람이라는 걸 느꼈어. 내 잘못을 두고 그렇구나. 하고 넘어가기가 힘들었어. 내가 왜 그랬을까부터 시작해 나중엔 기어이 내 잘못을 부정하고 상대방의 잘못을 찾기 시작하더라.

 

그래놓고선 종일 그 생각에 붙잡혀 잠도 못 자고 죄책과 남 탓을 반복했어. 정말 찌질하고 바보 같은 생각인데. ‘그렇구나’가 왜 이렇게 힘들까. 상대방을 이해 못 한다고 해서 틀린 게 아니라 다른 건데 그것마저 진심으로 받아들이기가 힘들었지.

 

결국, 우울에 빠져 망망대해를 둥둥 떠다녔어. 우울은 시커먼 밤바다가 아닐까? 우울에 빠지면 마치 물속에 빠진 느낌이 들어. 멍해지고.

 

그러다 갑자기 생각이 났어. 아직 살날이 많이 남았다는걸. 언젠가는, 정말 느리면 늙어서라도 나는 지금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왜 지금 이 순간에 사로잡혀 전전긍긍하고 있을까, 하고 말이야.

 

당장 받아들이지 못해도 괜찮은 거야. 언젠가 좀 더 실수하고 좀 더 성장하면 그때 받아들일 수 있을 거야.

 

너는 어때? 부끄럽지만 어쩌면 난 다시 실수할지도 몰라. 심하게는 똑같은 실수를 말이야. 이기적이지만 조금 힘들면 천천히 하려고. 실수를 받아들이는 것 말이야.

아직 실수를 인정하고 고쳐나가는 방법을 잘 모르겠어. 좀 더 성숙해지면 그땐 ‘내가 그랬구나. 바보같이.’ 하고 어쩌면 웃으면서 돌아볼 수도 있을 거야.

 

여름 더위에 하얀 꽃송이를 힘들게 틔우고서도 작은 바람에, 비에, 시간에 허무하게 꽃을 보내는 슬픔을 견디며 서서히 자라는 나무처럼.

 

날이 많이 더워졌는데 몸 건강 잘 챙겼으면 좋겠다. 냉방병도 조심하고. 다음에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보자.

 

늘 고마워.

-I가

il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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