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장기휴가

2019.10.29 20:4810.29

 

 

장기휴가

 

김현진

 

1

 

아이들과 나는 계곡에 있었습니다. 5월의 맑은 날이었습니다. 계곡에는 물이끼가 많아서 미끄러웠어요. 아이들은 맨발로 계곡에 들어갔습니다. 물 밑의 돌에 발이 베일지 모르는데도 아이들은 물속에 들어갔어요. 아이들은 근처에 물이 있으면 몇 시간이고 자기들끼리 잘 놀거든요? 그래서 저는 아이들과 계곡에 가는 걸 좋아했어요. 계곡 근처 풀밭에는 토끼풀이 한창 피어나 있었습니다. 저는 아이들에게 토끼풀을 엮어 왕관을 만들어주었어요. 아이들이 토끼풀 엮는 방법을 알려달라고 해서 저는 아이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배우고 싶은 사람은 지금 오라고요. 물에 젖은 아이들이 저를 둘러쌌습니다. 아이들은 계곡 물에 젖어도 좋은 냄새가 나요. 왜 그럴까요? 아이들은 새로운 걸 배울 때마다 숨을 멈추고 침을 삼킵니다. 그 날도 그랬습니다. 토끼풀의 줄기를 찢는 소리만 들릴 정도로 고요한 정적이 우리를 감싸고 있었어요.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우리는 한 아이가 없는 걸 알아차렸어요. 그 아이를 찾기 위해 함께 계곡 주변을 돌아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없어졌던 아이는 계곡의 가장 깊은 물 근처에 서 있었습니다. 그곳은 너무 깊어서 바닥이 녹색으로 보이는 곳이었어요. 아이들이 들어가지 못하게 빨간 줄로 막아 놓은 지점이었습니다. 아이는 그 앞에서 무언가를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나비였어요. 하얀 나비 한 마리가 가장 깊은 물의 중앙에 떠 있었습니다.

 

죽은 나비 아닐까?”

 

아니야, 안나 날개가 가끔씩 움직여.”

 

아이들은 일제히 저를 바라보았습니다. 물이 얼마나 깊은지는 저도 알지 못했습니다. 제 키를 넘어설 지도 모르는 일이었어요. 저는 샌들을 벗었습니다. 그날 신고 있던 샌들이 선명히 기억나요. 흰색 가죽 끈으로 만들어진 샌들이었습니다. 잠그는 부분에 하늘색 네모난 보석이 박혀 있었어요. 아이들에게 따라오지 말라고 했습니다. 제가 물속으로 걸어 들어가자 아이들은 제 샌들을 바위 곁에 가지런히 정리해 두었습니다. 날카로운 돌 때문에 발이 아팠어요. 언제 미끄러질지 몰랐죠. 물이 너무 차가워서 숨을 멈추고 걸어야 했습니다. 제가 비명을 지르면 아이들이 놀랄 테니까요. 나비가 있는 곳까지 가자 발이 닿을 듯 말 듯 했습니다. 저는 손가락 끝을 뻗어서 나비를 건져 올렸습니다. 나비는 제 손바닥 위에서 날개에 묻은 물을 털어내고 아주 천천히 날개를 움직이더니 날아올랐습니다. 나비는 잠시 제 머리 위를 날아다니다가 숲속으로 날아서 사라졌습니다. 저는 아이들에게 돌아갔고, 아이들은 기뻐했습니다.

 

안나 하얀 나비는 영혼이래.”

 

안나는 영혼을 구해준 거야.”

 

해가 지고 있었습니다. 저는 물에 젖은 아이들에게 담요를 둘러 씌웠습니다. 금세 추워질 테니 학교로 돌아가자고 이야기했어요. 그날 저녁에는 아이들을 위해 우유가 많이 들어간 코코아를 끓여야 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아이들을 데리고 계곡을 떠났습니다.

 

2

 

관리인은 평온한 얼굴이었다. 그는 늘 그림 속에서 걸어 나온 남자 같았다. 안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그는 가만히 찻잔을 손에 쥐고 창밖의 햇살이 바람에 흔들리는 모양을 바라볼 뿐이었다. 투명한 주전자 안에는 장미꽃송이가 떠다니고 있었다. 안나는 조금 조바심이 나서 말했다.

 

제가 나비를 구한 게 잘한 일일까요?”

 

관리인은 안나의 커다란 갈색 눈동자를 가만히 들여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당신에게는 그게 그렇게 중요한가요?”

 

나비를 구한 것 때문에 나쁜 평가를 받지는 않을까요?”

 

거기에 아이들이 몇 명 정도 있었나요?”

 

열 명? 열두 명? 그 정도 되었던 것 같아요.”

 

안나는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부드러운 갈색 머리칼을 감싸 쥐었다. 관리인은 안나의 찻잔에 장미차를 따라 주었다. 황금빛 찻물이 찻잔을 가득 채웠다.

 

안나 이 장미차를 좀 마셔보는 게 어때요? 마음이 불안할 때 효과가 있대요.”

 

안나는 장미차를 한 모금 마셨다. 과연 진정되는 데 효과가 있었다.

 

안나, 제 생각에는 조금 쉬는 게 좋겠어요. 침실로 돌아가는 게 어떨까요? 앨런을 불러드릴까요?”

 

, 부탁드려요. 앨런을 불러주세요.”

 

관리인은 식탁 위의 은색 종을 흔들었다. 잠시 후 앨런이 복도를 달려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앨런은 늘 걷지 않고 뛰었다. 잠시 후 문이 열리고 곱슬머리를 한 자그마한 소년이 달려와 안나에게 안겼다. 어찌나 세게 안기는지 안나는 그만 넘어질 뻔하였다.

 

안나, 이제 나쁜 생각은 그만하고 우리 방에 가자.”

 

앨런, 나 나쁜 생각 안 했어.”

 

웃지 않잖아. 그럼 나쁜 생각 하고 있는 거야.”

 

안나는 관리인에게 인사를 하고 앨런과 함께 집으로 돌아갔다.

 

3

 

안나는 눈을 감은 채로 잠에서 깨어났다. 창밖으로 파도 소리가 들렸다. 안나는 앨런과 함께 휴가를 와 있었다. 안나와 앨런이 묵고 있는 호텔은 한적한 바닷가에 있었는데 겨울이어서 그런지 손님이 많지 않았다. 안나가 휴가 동안 할 일은 앨런을 돌보는 일 하나 뿐이었다. 앨런은 가끔씩 심술을 부렸지만 착한 아이였다. 호텔에는 관리인이 있었다. 관리인은 안나와 앨런에게 필요한 것들을 가져다주었다. 안나는 아마도 이 휴가가 끝나는 날이 되기 전에 관리인이 퇴소날짜를 공지할 것이라 짐작하고 있었다. 관리인에게 묻고 싶은 것이 많았지만 관리인은 안나가 질문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안나는 앨런과 자신에게 제공되고 있는 방, 음식들, 물건들이 끊길까봐 늘 불안해했다. 신기하게도 그것들은 아무런 대가없이 계속 지급되었다. 관리인의 기분을 잘 맞춰주기만 한다면 이것들이 계속 유지되지 않을까? 경솔한 질문 때문에 기분이 상한 관리인이 어느 날 갑자기 방을 빼달라고 하면 어떡하지? 안나는 지금의 생활이 계속 유지되기를 원했기 때문에 관리인에게 많은 것을 묻지 않았다. 질문에 대답해주지 않는 대신 관리인은 안나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매주 한 번씩 차 모임이 있었다.

 

안나는 눈을 떴다. 새하얀 이불을 걷어내자마자 복도를 달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앨런이 문을 열고 뛰어 들어와 안겼다.

 

앨런, 오늘 아침 인사도 무척이나 요란스럽구나.”

 

잘 잤어, 안나? 오늘도 사랑해.”

 

안나는 앨런을 품에 안고 앨런의 곱슬머리에 키스를 해주었다. 앨런의 몸은 너무 가느다래서 꽉 껴안으면 사라질 것 같았다. 안나는 앨런의 손을 잡고 거울 앞으로 갔다. 거울에 비친 둘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앨런은 작았다. 앨런의 키는 안나의 어깨까지밖에 오지 않았다. 앨런은 누구일까. 내 아들일까. 내 동생일까. 이런 생각은 그만두자. 앨런이 싫어할 거야. 안나는 거울 속의 자신을 바라보았다. 투명한 피부에 갈색 머리칼. 긴 머리는 허리를 넘어서고 있었다.

 

앨런, 우리는 몇 살일까.”

 

안나는 그게 궁금해?”

 

확실한 건 내가 너보다 나이가 많다는 거야.”

 

앨런은 대답하지 않고 밖으로 나갔다. 아마 정원에서 공놀이를 하려는 거겠지. 역시 앨런은 이런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안나는 옷장을 열었다. 옷장에는 안나가 좋아하는 옷이 가득 걸려 있었지만 오늘은 앨런이 좋아하는 옷을 입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나는 얇은 쉬폰 소재로 만들어진 하늘색 원피스를 꺼내 입었다. 원피스의 소매 부분에는 은색 실로 수선화가 섬세하게 수놓아져 있었다. 안나는 이 옷들이 어디에서 왔는지 몰랐다. 이 옷들은 그냥 처음부터 옷장에 있었다. 안나는 머리를 빗었다. 단장을 마친 안나는 부엌으로 향했다. 음식은 늘 부족하지 않았다. 먹고 싶은 것을 목록에 쓰기만 하면 관리인이 재료를 가져다주었다. 호텔의 부엌은 훌륭했다. 찬장은 아름다운 식기들로 가득했고, 요리도구도 잘 갖추어져 있었다. 안나는 앨런을 위해 크림수프를 만들기로 했다. 앨런은 정원에서 황금색 공을 튀기고 있었다. 앨런은 혼자서 몇 시간이고 공놀이를 할 수 있다. 안나는 안심하고 요리를 시작했다. 프라이팬에 버터와 밀가루를 넣고 크림수프 루를 만들며 안나는 오늘 하루에 대해 생각했다. 오늘은 앨런과 함께 바닷가 산책을 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앨런은 달리는 걸 좋아하니까. 자주 외출하는 게 좋겠지. 그리고 바닷가를 산책하다 보면 또 다른 산책자를 만날 지도 모른다. 완성된 루에 우유를 부으며 안나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안나는 산책자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여기서 다른 사람을 만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크림수프가 완성되었고 앨런은 안나가 부르기도 전에 식탁 앞에 와서 앉아 있었다.

 

안나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냄새가 나.”

 

그래 많이 먹어, 앨런.”

 

앨런이 접시 위에 코를 박고 수프를 먹는 동안 안나는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나는 왜 이렇게 앨런을 사랑하는 것일까. 앨런은 또 나를 왜 이렇게 사랑할까. 우리는 도대체 누구일까.

 

 

4

 

아이들은요, 놀이가 재미있어지면 늘 양말을 벗거든요? 그래서 저는 자주 놀이터를 돌며 아이들이 벗어 놓은 양말을 주우러 다녔어요. 양말을 벗은 아이들은 뭐든 올라타길 좋아했어요. 미끄럼틀을 거꾸로 올라가고, 나무 위로 올라가고, 한번은 가로등을 타고 올라가기도 했어요. 아이들이 어딘가에 올라갈 때마다 저는 밑에서 팔을 벌리고 서 있었어요. 아이가 떨어진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정말로 아이가 떨어졌다면 저는 아이를 잘 받아낼 수 있었을까요? 아이들이 양말을 벗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여러 번 들었어요. 어디든 타고 올라가다보면 다칠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저는 아이들이 양말 벗는 걸 늘 허락해 줬어요. 양말을 신고서는 재미있게 놀지 못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거든요. 쉬는 시간이 끝나면 종소리가 들렸어요. 교실에 들어온 아이들 몸에서는 모래가 후드득 떨어졌지요. 저는 매일 모래를 쓸어 담느라 꽤 고생을 해야 했어요.

늘 교실에 들어오지 않는 아이가 하나 있었어요. 그 아이는 종소리를 듣고도 교실에 들어오지 않았어요. 아이는 정말 잘 숨었어요. 그 작은 학교에 숨을 곳이 어찌나 많던지 아이를 찾아서 헤매는 게 제 업무 중 가장 중요한 일이었어요. 일과 중에 아이가 사라지면 학교 책임이니까요. 어느 날은 아무리 찾아도 아이를 찾을 수가 없었어요. 교실의 다른 아이들에게 함께 찾아 달라고 했는데도 찾지 못했어요. 마침내 아이를 찾기는 했는데, 아이는 놀이터 미끄럼틀 지붕 위에 올라가 있었어요. 양말 한쪽만 신고요. 한 걸음이라도 잘못 내딛으면 크게 다칠 수 있는 높이였어요. 우리는 아이에게 내려오라고 소리를 질렀어요. 아이는 아슬아슬한 자세로 지붕 위에 걸터앉으며 말했습니다.

 

난 내려가지 않을 거야. 안나가 여기로 올라와.”

 

미끄럼틀 뒤로 태양이 떠 있어, 아이는 새카맣게 보였습니다. 우리는 아이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5

 

이야기를 끝낸 안나는 관리인의 표정을 살폈다. 오늘 이야기는 어쩌면 관리인의 심기를 건드렸을지도 모른다. 이 호텔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건 늘 환영받지 못했다. 혹시라도 앨런과 안나를 위한 지원이 끊어지지 않을까? 미련하게 왜 이런 이야기를 늘어놓았을까. 안나가 자책하는 동안 관리인은 표정 없이 차를 한 모금 마신 후 탁자에 내려놓았다.

 

그러니까 당신은 아이에게 소리를 질렀군요.”

 

관리인은 두 손을 마주 비볐다. 그 행동은 아주 중요한 것을 고심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안나는 불안했다.

 

안나 우리가 앨런과 당신을 평가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됩니다.”

 

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든 동의한다는 모습을 보이고 싶었다. 관리인은 안나를 바라보면서 싱긋 미소를 지었다.

 

당신과 앨런에 대해 좋지 않은 시선을 가진 평가위원들이 있어요. 하지만 제가 그 사람들을 잘 설득해 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우리의 평가 기준이 무엇인지 궁금하겠지요. 하지만 공정한 평가를 위해 그것은 알려줄 수 없어요. 우리는 다각적인 관점에서 평가를 하거든요. 우리 기준을 알려주면 당신을 제대로 평가할 수 없기도 하고요.”

 

, 당연히 그렇습니다. 맞습니다.”

 

안나 너무 긴장하는 건 건강에 좋지 않아요. 단 것을 좀 먹어보는 게 어때요?”

 

관리인은 탁자 위의 딸기 무스 케이크를 권했다. 안나는 케이크를 먹었다. 과연 긴장이 풀리는 데 도움이 되었다.

 

안나 이제 돌아가서 좀 쉬는 게 좋겠어요. 앨런을 불러 드릴까요?”

 

, 부탁드려요. 앨런을 불러주세요.”

 

관리인이 탁자 위의 황금색 종을 흔들었다. 복도 끝에서 앨런이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잠시 후 문이 열리고 눈물자국으로 얼굴이 더러워진 자그마한 소년 하나가 걸어 들어왔다.

 

안나 자꾸만 어디에 가는 거야. 우리 방으로 돌아가자.”

 

안나는 관리인에게 인사를 하고 앨런과 함께 방으로 돌아갔다.

 

6

 

안나와 앨런은 바닷가로 소풍갈 준비를 했다. 앨런이 좋아하는 도시락을 싸야 해서 안나에게는 시간이 좀 필요했다. 안나는 앨런에게 크레파스와 스케치북을 꺼내 주었다. 앨런은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다. 스케치북과 크레파스가 있으면 혼자서도 잘 놀았다. 정말이지 착한 아이였다. 안나는 돈까스와 계란말이, 그리고 햄 김치볶음밥을 만들기로 했다. 안나는 요리하는 것이 좋았다. 앨런은 안나가 만든 것이라면 무엇이든 잘 먹었기 때문에 요리하는 게 즐거웠다. 안나는 완성된 도시락을 커다란 바구니에 담았다. 앨런과 바닷가에서 오래 놀다올 계획이었기 때문에 돗자리와 담요도 챙겼다. 아마 앨런은 물속에 들어갈 것이다. 아이들은 물을 좋아하니까. 앨런이 갈아입을 옷도 꼭 챙겨야지. 준비를 끝낸 안나가 앨런을 부르자 앨런은 그림 한 장을 들고 뛰어왔다.

 

안나 선물이야.”

 

안나가 요리를 하는 동안 앨런은 정원의 꽃을 그렸다. 앨런은 언제나 안나가 예쁘다고 말한 것들을 기억하고 있다가 그리곤 했다. , , 하늘, 창문, 바다. 안나는 앨런의 그림을 나무로 된 상자 안에 소중하게 보관했다. 짐을 다 챙긴 앨런과 안나는 호텔을 나섰다. 문을 열자 푸른 바다가 보였다.

호텔에서 조금만 걸어 나가면 새하얀 백사장이 끝도 없이 펼쳐져 있었다. 앨런은 바다를 향해 달려갔다. 백사장이 텅 비어 있어서 달리는 앨런은 마치 흰 도화지 위에 찍힌 작은 점 같아 보였다. 안나는 돗자리를 깔고 자리에 앉았다. 아마 앨런은 한참 동안 바다에서 놀 것이다. 물놀이를 하고, 모래놀이를 하고. 안나는 앨런을 잘 지켜보다가, 그가 물에 젖으면 따뜻한 담요로 감싸 주고, 배고파할 때 도시락을 꺼내주면 되었다. 그게 안나의 일이었다. 보통 어른들은 아이들이 노는 것을 오래 지켜보지 못한다. 아이들에게 뭔가를 시키거나, 어른 자신이 뭔가를 하지 않으면 견디지 못한다. 어른들에게는 노는 것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태와 똑같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나는 지켜보는 일의 명수였다. 아이들을 아주 오랫동안 지켜봐야할 때도 어려워하지 않았다. 아이들이 놀다 지쳐서 안나에게 돌아올 때까지, 안나는 매일 매일 아이들을 잘 기다릴 수 있었다. 앨런은 옷을 벗고 바닷물 속으로 들어갔다. 안나는 눈을 감고 바다 바람에서 불어오는 소금 냄새를 맡았다. 앨런이 너무 깊은 곳으로 들어가지는 않았을까. 안나가 다시 눈을 떴을 때 앨런의 곱슬머리가 보이지 않았다. 아이들은 정말 순식간에 사라진다. 눈 깜짝할 새에 없어진다. 앨런이 보이지 않는 그 짧은 순간이 안나에게 얼마나 고통스러운 순간이었는지를 설명하는 것은 어렵다. 안나는 앨런이 바다 속에서 영영 사라질 것만 같았다. 바다 속 물거품들과 함께 저 거대한 물살에 휩쓸려 영원히 돌아오지 못할 캄캄하고 깊은 바다의 밑바닥으로 사라져버릴 것만 같았다. 하지만 짧은 고통의 순간이 지나고, 앨런은 물 밖으로 나왔다. 안나에게 걸어오는 앨런의 두 손에는 소주병 조각이 들려있었다. 바다유리였다.

 

안나, 바다 속에서 보석을 찾았어.”

 

앨런은 안나의 손바닥 위에 바다유리를 올려두고 물기어린 곱슬머리를 털었다. 안나는 앨런의 몸에 담요를 둘러주었다.

 

앨런 이것은 예전에 술을 담았던 병이었단다.”

 

앨런은 수건 아래에서 부르르 떨며 강아지처럼 젖은 눈동자로 바다유리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안나는 앨런이 선물한 바다유리를 소중히 상자 안에 넣었다. 초록색 소주병 조각은 파도 속에서 깨지고 마모되어 부드러운 표면의 녹색 보석이 되어 있었다. 앨런은 점심을 먹고 나서 조금 더 놀고 오겠다고 했다.

 

7

 

아이란, 너무 소중해서 무서운 것입니다. 아이를 돌보는 일은 사실 그 어떤 일보다 무서운 일이에요. 아이들 앞에서는 누구나 자신이 괴물처럼 느껴지지요. 통제할 수 없는 악의로 가득 찬 괴물이요. 제대로 된 인간이라면 아이의 투명한 볼이 자기 얼굴에 닿을 때마다 자기 안에 감춰진 가장 캄캄한 어둠을 발견할 수밖에 없습니다. 끔찍한 죄책감 속에서요. 아이들에겐 체취가 거의 없어요. 아침의 아이들에게서는 로션과 비누 냄새가 납니다. 실컷 놀고 온 아이에게서는 모래와 돌 냄새가 납니다. 아이들을 분류하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아이들은 자라고 있으니까 말입니다. 언제든지 변할 수 있잖아요. 아이들은 유리인형 같아요. 잘못 만지다 깨질까봐 무섭죠. 깨지면 어떡하지. 깨뜨리면 큰일이야. 하지만 이런 생각을 오래 하면 안 됩니다. 깨뜨릴까봐 아이들을 가둬두는 건 나쁜 짓이에요. 가둔 아이들은 녹아버리거든요. 한 번 녹은 아이를 되살리는 일은 어렵습니다. 저는 잘 알아요. 아이들을 지켜보는 게 제 일이었으니까요.

좋은 어른이 되는 것은 어렵습니다. 저는 좋은 어른이 아니었어요. 늘 실수를 했습니다. 미끄럼틀 지붕에 올라간 아이는 아무리 애원해도 밑으로 내려오지 않았어요. 저는 양말을 벗고 미끄럼틀 지붕 위로 올라갔습니다. 아이를 안아서 내려오려고 했어요. 하지만 미끄럼틀 지붕은 너무 좁았어요. 제가 아이를 붙잡으려고 하자 아이는 화를 내며 몸을 뒤로 뺐습니다. 교실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요. 저도 화를 냈어요. 아이에게 위험하니 어서 내려가자고 했습니다. 아이의 옷을 붙잡으려고 한참동안 실랑이를 했습니다. 그러다가 아이가 미끄러졌죠. 놀이터 바닥으로 떨어진 아이는 한 동안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쓰러진 아이의 머리칼 사이로 금빛 햇살이 춤을 췄습니다. 사람들이 모여 들었고 나는 가만히 서 있기만 했습니다.

 

 

 

8

 

이 바다는 이상하다. 바다 위에 배 한척 떠다니지 않는다. 안나는 모래놀이를 하는 앨런 곁에서 생각했다. 휴가가 얼마나 이어질지, 배려가 계속될지에 대한 불안이 안나를 다시 한 번 사로잡았다. 지난번 만남에서 평가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으니, 다음 만남에서는 조금 더 자세한 조사나 감사가 이루어질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때 누군가가 안나의 등을 톡톡 두드렸다. 안나는 너무 놀란 나머지 순간적으로 얼어붙고 말았다. 등 뒤에서 생선 비린내가 났다. 천천히 뒤를 돌아보자 흠뻑 젖은 늙은 여자 한 명이 서 있었다. 그 여자는 다 헤어진 노랑색 원피스를 입고 있었으며 바닷물에 젖은 흰 머리칼이 헝클어져 눈을 다 가리고 있었다. 안나가 오랫동안 기다리던 산책자였다. 여자는 안나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여자의 옷과 머리카락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다.

 

저기 먹을 것 좀 있어요?”

 

안나는 앨런이 남긴 햄 김치볶음밥을 여자에게 주었다. 여자는 숟가락을 들자마자 그것을 허겁지겁 먹어 치웠다.

 

난 먹어도, 먹어도 배가 고파요.”

 

안나는 돈까스와 계란말이도 꺼내서 여자에게 주었다. 여자는 고맙다는 인사도 없이 음식을 다 먹어치웠다.

 

정말 오랜만에 제대로 된 음식을 먹었어요. 몇 년째 바다를 헤매며 먹을 것을 찾고 있었거든요. 먹을 게 없어서 날 생선도 뜯어 먹었고, 죽은 불가사리도 먹었어요. 어떤 날은 갈매기 시체를 뜯어 먹기도 했어요.”

 

당신은 평가에서 떨어졌군요.”

 

네 저는 좋지 못한 평가를 받아서 호텔을 나가야 했어요. 호텔에서 쫓겨난 뒤 다른 마을로 가려고 버스정류장을 찾아봤는데, 아무리 걸어도 버스 정류장이 나오지 않았어요. 그래서 이렇게 바닷가를 떠돌게 된 것입니다.”

 

여자는 안나의 깨끗하고 아름다운 하늘색 쉬폰 원피스를 부러운 듯이 바라보았다.

 

당신은 아직 호텔에 머물고 있군요. 평가는 중요해요. 평가를 잘 받지 않으면 저처럼 되니까요.”

 

제가 관리인에게 부탁해 볼게요. 당신도 호텔로 돌아가게 해 달라고요.”

 

아뇨, 그건 불가능해요. 평가에서 떨어진 사람에게는 호텔이 보이지 않아요. 저는 호텔이 있던 자리로 여러 번 돌아가 봤어요. 하지만 거기엔 아무것도 없었어요. 평가에서 떨어지면 호텔을 볼 수조차 없는 거예요.”

 

그때 모래가 잔뜩 묻은 앨런이 안나에게 달려와 안겼다.

 

안나 이 사람을 우리 호텔로 데리고 가자. 이거 봐. 이 사람 내가 남긴 걸 다 먹었어. 배가 많이 고픈가봐. 호텔에는 방이 많으니까, 이 사람에게도 방을 달라고 하자.”

 

안나는 앨런의 몸에 묻은 모래를 털어내며 생각에 잠겼다. 혹시 이 여자를 데리고 가는 게 평가에 나쁜 영향을 끼치지는 않을까? 하지만 앨런 말대로 호텔에는 방이 아주 많았다. 여자 한 명이 더 산다고 해서 나쁠 일은 없을 것 같았다. 호텔에는 언제나 음식이 가득했고, 깨끗한 새 옷이 잔뜩 걸려 있었다. 어쩌면 여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좋은 평가를 받는 데 도움이 될 지도 모른다. 여자가 안나에게 온 것도 어쩌면 평가의 일부분일지 모른다. 평가 기준은 아무도 모르는 거니까. 뭐든 노력해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래요, 우리 호텔로 같이 가 봐요. 혼자 갔을 때는 보이지 않았지만, 우리와 함께 가면 당신에게도 호텔이 보이지 않을까요? 날생선이나 갈매기 시체를 먹으며 살 순 없어요. 우리랑 같이 가요.”

 

여자는 안나와 앨런을 뒤따라 왔다. 안나가 앨런과 함께 놀던 곳에서 호텔은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다. 호텔이 보이자 안나는 기쁜 얼굴로 여자를 돌아보며 말했다.

 

저기 호텔이 보이죠? 봐요. 이렇게나 가까이 있어요.”

 

하지만 안나가 뒤를 돌아보았을 때 여자는 사라져 있었다. 거기에는 아무도 없었다. 백사장 위로 함께 걸어온 여자의 발자국까지 다 사라져 있었다.

 

9

 

다행히 아이는 그 높이에서 떨어지고도 많이 다치지 않았어요. 많이 놀라긴 했지만, 머리에 혹이 하나 났을 뿐이었습니다. 정말 많이 다치지 않았어요. 하지만 저는 책임을 지게 되었습니다. 자칫했으면 아이가 죽을 수도 있었다는 거죠. 제가 아이를 돌보는 것이 부적절하다는 평가가 이어졌어요. 제가 그 전부터 위험한 행동을 했다는 증언들이 나왔습니다. 아이들을 데리고 깊은 물이 있는 계곡으로 간 것도 정상적인 모습은 아니라는 평가가 있었습니다. 아이들을 절벽 앞에 세워두고 나비를 구하러 물속에 들어갔으니까요. 안전하지는 않았죠. 그래도 전 억울했어요. 저는 아이들을 잘 돌볼 수 있다고 주장했어요. 그게 제가 제일 잘 하는 일이니까요. 저는 그 일 말고 다른 일은 할 줄 몰랐거든요. 한번 위험한 사람으로 낙인찍히면 되돌리는 것은 사실 불가능해요. 제가 저지른 세부적인 잘못의 목록들이 끝도 없이 작성되었습니다. 저는 견디지 못하고 학교를 떠났습니다. 그러고 나서는 집에 계속 있었어요. 제가 아이들을 잘 돌보지 못 한다는 소문이 온통 퍼져서 다른 일을 구할 수도 없었습니다.

저는 아이들을 참 좋아했어요. 사실 아이들을 오래 겪어본 사람이라면 아이를 좋아한다는 말은 참 하기 어렵죠. 아이를 돌보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어렵고 무서운 일이니까요. 아이들은 늘 변하잖아요. 하지만 저는 그래서 아이들을 좋아했던 거였어요. 똑같지 않으니까, 매일 변하니까.

아이들을 만나지 못하게 되자 잠이 왔어요. 저는 집에서 계속 잠을 잤어요. 사실 잠만 자면 안 되는 거였는데. 어느 순간부터 잠에서 깨어날 수가 없었어요. 집에 쌀도 없고, 휴지도 없었는데. 잠에서 깨어나도 돈이 없어서 살 수가 없었거든요. 그래서 깨어나기가 싫었어요. 잠들어 있으면 전화도 안 받아도 되고, 문을 두드리는 사람이 있어도 열지 않을 수 있잖아요. 그래서 저는 계속 잠을 잤어요. 창밖으로 아이들 노는 소리가 가끔씩 들렸어요. 며칠씩 이어서 잠을 자기도 했어요.

어느 날이었어요. 그날도 나는 침대에 누워 잠들어 있었습니다. 창밖에서 누군가가 계속 문을 두드렸지만 저는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창밖으로 하얀 나비 한 마리가 보였어요. 제가 아이들과 함께 구해준 나비와 똑같이 생긴 나비였어요. 나비는 우리 집 창문에 가만히 붙어 있었습니다. 아주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10

 

결국 관리인은 안나 앞에 서류 한 장을 내려놓았다. 그것은 퇴소명령서류였다.

 

저희가 더 노력해 볼 수는 없을까요? 더 좋은 평가를 받도록 해 볼게요. 다시 한 번 생각해 주세요.”

 

안 됩니다. 기한이 지났어요. 안나.”

 

왜 우리가 안 좋은 평가를 받게 되었지요?”

 

전에도 한 번 말씀드렸듯이, 우리는 평가기준을 공개하지 않습니다. 대기자가 많다는 건 알려드릴 수 있겠네요. 대기자가 너무 많아요. 당신들은 충분하지 않았던 거예요. 이곳에 있기에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계속 생활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요? 시험을 친다든지, 자격증을 딴다든지 하는 방법이요.”

 

그렇게 노력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에요, 안나. 호텔에서 나가게 되면 한 번 시도해 보세요. 운이 좋으면 호텔로 돌아올 수 있겠지요. 아시다시피 평가위원들의 수가 많다보니 합의하는 게 어려워요. 평가기준도 너무 다양하고요. 운이 좋아야 합니다. 사실 운이 좋은 게 최고죠.”

 

앨런과 저는 언제 나가야 하나요?”

 

안타깝지만 지금 당장 나가야 합니다. 퇴소명령서류를 받았으니까요.”

 

안나는 자기도 모르게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일그러진 안나의 얼굴은 가면 같아 보였다. 안나는 일그러진 채로 멈춰 서서 오랫동안 관리인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안나, 이제 나가야 할 시간이에요. 앨런을 불러드릴까요?”

 

, 앨런을 불러주세요. 부탁드려요.”

 

관리인은 식탁 위에 놓여 있던 자그마한 종을 흔들었다. 잠시 후 앨런이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왔다. 앨런의 손에는 작은 상자 하나가 들려 있었다. 안나가 앨런의 그림이나 바다유리 같은 것들을 보관하던 상자였다.

 

이것만 가지고 갈 수 있대. 안나.”

 

안나는 앨런의 손을 잡았다. 관리인은 안나와 앨런을 문 쪽으로 안내했다. 관리인은 문을 열어주며 말했다.

 

잘 가요. 나가서 돌아오는 길을 찾아보세요.”

 

안나와 앨런은 두 손을 잡고 문 밖으로 나섰다. 순식간에 백사장을 가득 채운 수천 명의 사람들이 보였다.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호텔로 가는 방법을 찾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알지 못했다. 안나와 앨런은 인파 속에 섞여 들어갔다. 뒤돌아보니 호텔은 사라지고 없었다. 아무리 생각하려고 해도 돌아가는 방법은 알 수가 없었다. 짠 바람에 목이 마르기 시작했다. 주변은 온통 바다였다.

 

 

댓글 0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추천 수
공지 2019년 독자우수단편 심사위원 명단 mirror 2019.02.26 0
공지 단편 ★(필독) 독자단편우수작 심사방식 변경 공지★5 mirror 2015.12.18 0
공지 독자 우수 단편 선정 규정 (3기 심사단 선정)4 mirror 2009.07.01 0
1876 단편 우리 부모가 달라졌어요 mogua 2019.10.29 0
단편 장기휴가 오후 2019.10.29 0
1874 단편 인간지네 코리아 김집사 2019.10.23 0
1873 단편 빛나는 세상 속에 윤도흔 2019.10.11 0
1872 단편 찌찌레이저 김청귤 2019.10.06 1
1871 단편 부활의 서 김초코 2019.09.30 0
1870 단편 컴플레인 돌로레스클레이븐 2019.09.30 0
1869 단편 초상화 젊은할배 2019.09.27 0
1868 단편 화성에서 온 노인 진정현 2019.09.27 1
1867 단편 노인과 노봇 최의택 2019.09.25 0
1866 단편 밤 하늘의 유령 최의택 2019.09.20 0
1865 단편 스토아적 죽음 비나인 2019.09.17 0
1864 단편 나는 좀비를 이렇게 만들었다 비나인 2019.09.17 0
1863 단편 샌디크로스-0-3 비에러 2019.09.10 0
1862 단편 구원자 - 6.활극 알렉스 2019.09.09 0
1861 단편 구원자 - 5.과거 알렉스 2019.09.08 0
1860 단편 구원자 - 4.모험 알렉스 2019.09.06 0
1859 단편 구원자 - 3.도래 알렉스 2019.09.05 0
1858 단편 구원자 - 2.멸망 알렉스 2019.09.05 0
1857 단편 구원자 - 1.가족 알렉스 2019.09.03 0
Prev 1 2 3 4 5 6 7 8 9 10 ... 95 Next
서버에 요청 중입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