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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인간지네 코리아

2019.10.23 13:4810.23

인간지네 코리아

 

자고 일어나니 방에 아무도 없었다. 오후 6시. 이제 저녁 먹고 슬슬 알바 갈 시간이었다. 진정우는 한 블록만 나가면 있는 세븐일레븐에서 저녁거리로 라면을 살 생각으로 집을 나섰다. 거기서 한 50미터만 더 걸으면 씨유과 GS마트가 마주보고 있었다. 대학가 원룸촌이어서 그런지 엎어지면 코 닿을 곳에 이렇게 많은 편의점들이 열심히 경쟁하고 있었다. 정우는 남산 근처 예술대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이쪽 대학가와는 별 인연이 없었으나, 졸업하고도 같은 원룸에서 계속 지내고 있었다. 친척 중에 부동산을 하는 사람이 있어 어쩌다 싸게 나온 방으로 이사를 온 뒤로, 계속 이곳에 눌러앉고 말았다.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이번에는 여자 친구 혜령까지 합세해 이 비좁은 단칸방에서 둘은 동거생활을 시작했다.

바깥 날씨가 제법 쌀쌀했다. 정우는 엉덩이를 낙낙히 덮은 카키색 짚업 후디를 한번 추어올려 여몄다. 혜령이 작년에 생일선물로 준 유니클로 후디였는데, 원망스럽게도 한 번 빨고 나니까 보풀이 일었다. 특히 주머니 근처에 생긴 보풀은 왠지 커다랗고 울퉁불퉁하니, 가장 잘 눈에 띄는 자리에 의기양양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저녁 여섯 시의 거의 다 스러져간 햇살 속에서, 정우는 한쪽 손으로 양 주머니의 보풀을 번갈아 뜯으며 야간 알바를 하느라 쌓인 피곤을 삼켰다. 세븐일레븐에서 라면 다섯 개들이 한 팩과 강원평창생수 세 통을 사가지고 돌아오는데, 원룸건물 귀퉁이에서 진혜령이 담배를 피우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뭐해, 안 들어가고.” 
정우가 말했다. 
“편의점 갔다 왔어?” 
혜령의 목소리는 잠겨 있었다. 
“응. 얼른 가자.”
“오늘도 스낵면?” 
혜령이 얼른 분위기를 바꾸고 장난스럽게 물었다.
“응.”
“야, 난 너처럼 187이나 되는 거구가 스낵면 먹는 게 되게 귀엽다? 게다가 잘생겼어.”
담배연기가 키득거리는 혜령의 얼굴 위로 뿜어져 나왔다. 저녁바람이 불어오니 가지런하게 빗어 내린 혜령의 갈색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그곳은 학생들이 하도 담배를 피워대는 바람에 주인 할머니가 아예 알루미늄 재떨이를 설치해둔, 대성원룸 학생들의 비공식 흡연구역이었다. 정우는 혜령이 이렇게 놀릴 때마다 이것은 정녕 순도 높은 칭찬인지 의구심이 들었지만, 그래도 혜령이 키가 크다고, 잘생겼다고, 해주어서 최종적으로는 어쨌든 이 농담이 싫지 않았다. 마지막 남은 햇빛이 알루미늄 재떨이 밑동에 떨어졌다.   
“놀리지 말고. 들어가자니까.”
정우가 대꾸했다.
“스낵면에는 아무 죄가 없는데.” 
혜령이 말했다. 그렇지, 왜 이 소리가 안 나오나 했다. 이래봬도 스낵면은 순하고 면이 고운-그래서 라면끼리 경쟁했을 때 덩치는 좀 밀려 보이지만-밥 말아먹기 좋은 라면 1위에 빛난다는 말씀이다. 그러고 보니 밥은 집에 항상 없다시피 하는데, 밥 말아먹기 좋다는 것과 정우의 스낵면 취향과는 과연 그리 상관은 없을 것이다. 
“야.”
정우가 짧게 핀잔 섞인 애교, 혹은 애교 섞인 핀잔을 주었다.
“너 옛날에 너네 집 차 기아모닝 몰고-” 
혜령이 등을 구부리고 거북목을 해보이려는 찰나, 정우가 고개를 돌려 건물정문 비밀번호를 눌렀다. 이 본능적인 외면의 고갯짓으로 말할 것 같으면 바로 이러한 에피소드와 관련이 있다: 대학시절 정우가 새벽 두 시에 혜령의 기숙사 앞으로 기아모닝을 끌고 와 서해안 밤바다를 보러 가자고 한 날, 운전 중 둘 다 졸아 기아모닝이 고속도로 가드레일을 들이받고, 두 사람은 바다는커녕 보험사 트럭을 타고 서울로 돌아왔더라는 이야기. 정우네 집에서는 중고차 한 대 값에 달하는 돈을 내고 차를 수리했다는 웃픈 전설까지. 그런데 진혜령의 저 발언의 요는 그게 아니라, 당시 정우가 덩치에도 안 맞는 차를 탈 때마다 매번 운전석에 앉은 정우의 등과 목이 거북이처럼 구부러지더라는, 혜령이 허구한 날 놀리는 바로 그 정황을 말한다. 스낵면과 기아모닝은 말하자면 한 몸이었다.  
“됐어. 나 먼저 들어간다.” 
비번을 누르자 퉁명스러운 소리를 내며 열린 정문을 정우가 끼이익 하고 밀었다.
“알았어. 안 그래도 다 피웠거든.” 
혜령이 웃으며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껐다.

정우는 방으로 들어오자마자 가스레인지에 물을 올렸다. 혜령은 메고 있던 배낭을 일단 책상 위로 아무렇게나 던진 뒤, 그대로 침대 위로 털썩 쓰러졌다. 그러고는 핸드폰을 양손에 쥐고 모로 누웠다. 잠시 후, 정우가 라면을 뽀로로가 그려진 둥그런 플라스틱 상 위에 얹어 김치와 함께 대령하자, 그제야 혜령이 스르르 침대에서 미끄러져 내려왔다. 책상 위에는 배낭과 함께 자주색 리본으로 여며진 작은 종이봉투가 놓여 있었다. 

“저건 뭐냐?” 
정우가 봉투를 보며 물었다. 
“아, 오늘 리허설 마치고 정미선 선배 만났잖아. 주더라.”
“그래?”
“그 선배 제빵학원 다니더니, 빵집 차렸대. 소라빵이야.” 
“결국, 그 선배도 이 길 접었구나.” 
혜령이 아랑곳 않고 라면을 후루룩 빨아들였다. 
“정우야, 오늘도 짱 맛있다! 너 오늘 좀 쉬었어? 요즘 피곤해보이더라.”
“응. 좀 잤어.”
“잘했어.”
“사실 방금 일어났어. 좀 일찍 일어나서 일 알아보려고 해도, 도저히 몸이 말을 안 들어.” 
“야, 적당히 해. 그게 사람이 할 짓이냐?” 
혜령은 라면을 후룩거리며 고개도 들지 않고 속사포처럼 정우에 대한 걱정을 쏟아내고 있었다. 정우가 피식 웃었다. 혜령이 김치를 동그랗게 말아 입에 넣었다. 
“너, 이파리는 안 먹고 하얀 부분만 먹더라?” 
정우가 말했다.
“이파리 짜고 맵잖아. 김치는 여기가 사이다야. 몰랐어?” 
혜령이 히죽 웃었다.

혜령과 정우는 남산에 있는 예술대학교 연극과 동기동창이었다. 학교 다닐 때부터 오랜 커플이었다. 두 사람 다 성이 진 씨라 ‘진진커플’로 유명했다. 학교 다니는 내내 사이좋은 커플이자, 훤칠한 키에 얼굴이 잘생기고 성격이 수더분한 정우와 단정하고 깨끗한 외모에 성품이 올곧은 혜령은 환상의 커플 내지 불멸의 진진커플로 통했다. 하긴, 졸업하고도 이토록 비좁은 원룹에서 가끔은 아옹다옹할망정 잘 살고 있으니, 여전히 무척 설득력 있는 별명이라 할 수 있겠다. 둘은 그밖에도 공통점이 많았다. 둘 다 시장통 영세상인 집안 출신이었다. 집안은 넉넉지 않아도 욕심이 없고 성격이 소박했다.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성실히 살았다. 두 사람의 궁극적인 꿈은, 화려한 스타는 못 되어도 진실한 배우가 되는 것이었다.

“정 선배, 오늘 좀 재밌는 얘기를 하더라? 
“뭔데?” 
“‘인간지네‘라는 영화 알아? 할리우드 영화. 본 적 있어?”
“아니? 처음 들어보는데?”
예상했던 반응이라는 듯한 표정으로 혜령은 라면국물을 숟가락으로 떠먹으며 말을 이었다.  
“아, 그래? 난 그거 1탄은 봤거든? 우리나라에 개봉했었어. 아주 오래전에. 그게 근데 미국에서는 3탄까지 나왔대, 세상에. 한 독일의 미친 과학자가 한 인간의 똥꼬에 다른 인간의 입을 연결하고, 다시 그 인간의 똥꼬에 또 입을 연결하고, 그래서 인간 지네를 만드는 내용이야. 엽기적이지. 봐봐.” 
혜령이 숟가락을 뽀로로의 배꼽 위로 탁 내려놓고는, 핸드폰 메모장에 손가락으로 그림을 그려보였다. 

centipede.jpg

“앞사람이 음식물을 먹으면, 뒷사람은 그 똥을 먹고, 그 뒷사람은 그 똥이 똥된 걸 먹고. 이렇게.”
“야, 진짜 그런 내용의 영화가 있다고?” 
정우가 웃음을 터트렸다. 정우는 이미 라면 한 그릇을 다 비우고, 혜령이 가져온 소라빵을 뜯고 있었다. 소라빵이야말로 어렸을 때부터 늘 똥처럼 생겼다고 생각했는데, 가장 맛있는 부분은 안에 들어있는 초코잼이어서 빵 밑에 뚫린 구멍으로 빨아먹기 좋았다. 갑자기 정우는 똥을 쪽쪽 빠는 기분이 들었다. 
“그렇다니까. 근데 1탄은 세 명만 연결했는데, 속편에서는 수십 명, 3편에서는 거의 몇 백 명 연결했다나봐.” 
말이 떨어지자마자, 헤령이 신나게 웃었다. 
“그게 실제로 가능해?”  
소라빵을 우물거리며 정우는 아직 웃음기가 완전히 가시지 않은 채 반신반의하는 투였다. 
“몰라. 과학적으로 뭐, 안 될 게 뭐야?” 
혜령이 킥킥거렸다. 
“근데, 그 영화는 왜?”
“아, 선배가 그러는데, 그 영화 4편을 한국에서 만든다는 거야. 할리우드에서 감독이랑 스태프가 다 오고, 한국 배우를 써서 한국을 배경으로. 인간지네 코리아. 거기 지네로 들어갈 배우를 모집 중이라나 봐.”

 

*

 

11월은 시월만큼 운치 있는 가을의 절정도 아니었고, 12월처럼 성탄절이 있어 시끌벅적하지도 않았다. 거리마다 누가 동그랗게 쓸어둔 낙엽들이 바람만 불면 휘휘 날아다녔다. 가끔 ‘임대문의’가 붙은 텅 빈 상가 앞에 쌓인 전단지들과 버려진 비닐봉지가 함께 휩쓸려 다녔다. 정우는 화려하지도 운치 있지도 않은, 아무한테도 주목받지 못하는 11월이, 이대로도 좋다고 생각했다. 

오늘은 동아리모임이 있는 날이었다. 현대극동아리라고는 해도 실제 무대에 극을 올리는 일은 드물었다. 사람들은 생업으로 바빴고, 여남은 이들만 함께 희곡을 읽거나 오래된 호프집에서 비정기적으로 모였다. 호프집에는 벌써 크리스마스 캐럴이 흘러나왔다. 캐럴은 11월만의 쓸쓸한 정서를 해치고 있다 싶다가도, 정우는  벽에 주렁주렁 반짝이는 꼬마알전구들이 왠지 모르게 정겨웠다. 오늘은 혜령과 여기서 저녁을 때우기로 했다. 이번 모임의 화제는 단연 영화판과 연극판에 알음알음 퍼져있던 인간지네 이야기였다. 

“그거 그냥 그 자세로 있기만 하면 된대. 딱히 연기라는 게 필요없는 거지. 게다가 한 사오십 명 뽑는다니까, 나중에 얼굴 팔려서 쪽팔릴 일도 없을 것 같고.” 
“뭐? 50명이나 연결......? 하하하. 돌아버리겠네.”
“CG로 안 하고?”
“사람은 50여명 쓰고 실제 영화에서는 그 이상처럼 보이게 CG처리 한다는 얘기도 있고.”
“그래도 재수 없어서 카메라에 잡히면 얼굴이 나오긴 하겠죠.”
“그러면 평생 이불킥 각이다. 꼭 얼굴 안 나온다 해도, 그런 영화에 나오는 거 자체가 좀 미치지 않았냐? 평생 쪽팔릴 거 같아 나는.” 
“그렇지. 실제로 남의 똥구멍에 직접 대기야 하겠냐만, 남의 똥 받아먹고 내 똥구멍에 다른 사람 연결하고. 오, 미친.”
“아무래도 영화가 그렇다보니까, 배우들 중도 이탈 가능성 때문에 합숙해서 단기에 촬영한다더라. 비공개로 비밀리에. 한번 들어가면, 2개월인가 촬영한다던데, 2개월간 못 나오는 거야. 근데 뭐, 숙식도 제공하고, 엑스트라인데도 400 지급. 2개월 동안 거기서 거의 먹고 자고 놀면서 400 버는 거지. 어, 진정우, 가냐? 벌써?”
“네, 선배. 저 알바 때문에......” 
정우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너 낮에는 오디션 보고, 밤에는 알바 한다며? 몸 생각해라. 그러다 골로 가는 수가 있어.”
“네.”
“너 같은 애가 이런 거 한번 생각 좀 해 봐. 가서 좀 2개월 푹 쉬어라. 쪽팔리는 거 뭐 어때. 그냥 우리끼리 나중에 좋은 안줏거리 하나 생기는 거지.” 
“예, 일현 선배, 고마워요. 그럼 전 먼저.”
“그래, 가. 조심하고.” 
술집을 나서는 정우의 등 뒤로 일현이 말했다. 
“정우야, 이따 집에서 봐.” 
혜령이 말했다.
“야, 저놈 안쓰럽다, 진짜, 눈물 난다, 내가 어디 자리 하나 생기면 당장 해줄 텐데, 내 코가 석자고, 허유. 그건 그렇고 진혜령, 너네 안 헤어지고 그 좁아터진 원룸에서 둘이 잘 살고 있는 거 보면, 참 신기해. 불멸의 진진. 천연기념물이야, 요즘 같은 세상에 이런 애들이 어딨니?”
혼자 뇌까리는 것 같기도 하고 대놓고 비꼬는 것 같기도 한 과장된 어투로 일현이 혜령에게로 화제를 돌렸다. 
“오늘 안주 누가 시켰어? 술은 다 맥주로 시켰는데, 안주는 소주안주 맥주안주 막 다 섞였어. 누구야? 일현 선배, 칭찬이에요, 욕이에요? 듣기에 별로 좋지는 않네.” 
안주를 불평하는 듯한 말투와는 다르게 혜령의 젓가락은 소시지야채볶음으로 계란말이로 누룽지탕으로 메기알탕으로 분주히 옮겨 다니고 있었다.  
“아니, 난 그냥 진심으로 니네가......” 
일현이 얼버무렸다. 
“됐고, 야, 진혜령, 너도 졸업하고 계속 대학로서 단역만 하는 거지?” 
“네. 그렇죠, 뭐.”
“존버하자, 우리, 다들. 존버뿐이야!” 
일현이 담배를 한 모금 빨아들인 뒤 연기를 세차게 내보내며 목소리를 높였다.
“라면에 김치 값밖에 안 주면서 리허설은 꼬박꼬박 나오라 하고. 그지 같아요. 진짜 인간지네나 할까 봐요.” 
혜령이 젓가락질을 멈추고, 맥주를 한참 들이켰다. 

 

*

 

“정우야, 인간지네, 그거 말이야.” 
다음날 아침, 새벽에 들어온 정우가 샤워를 마치고 나오자, 침대에 누워 TV를 보던 혜령이 대뜸 말문을 열었다. 
“어제 너 가고 나서, 한참 더 이야기들 했는데, 영화개봉 후에 연극도 올린대. 연극판권도 팔려가지고.”
“그래?” 
“응. 연극은 단기로 계약하고, 흥행여부에 따라 계속 할지 말지 결정하는. 그런 걸로.”
“그렇구나.” 
정우가 무심히 대꾸했다.
“연극은 조금 더 준대. 노출이 조금 더 있을 수 있어서.”
“그래......”
정우는 얼마나 더 주는지 물으려다 말았다. 얼마를 더 주든, 크게 관심 없는 사항이라고 생각했다. 
“음...... 난 좀 고민된다?” 
혜령이 말했다.
“에이, 무슨. 농담하지 말고.” 
“아니, 진짜.” 
“무슨 소리야?” 
수건으로 머리를 말리던 정우가 고개를 돌렸다. 
“우리 둘이 한다고 쳐봐. 생활비 하나도 안 들고, 400 x 2는 800이지. 연극까지 하면 2-3개월 만에 천만 원이야. 그럼 우리 여기서 나갈 수 있다? 적어도 투룸은 얻을 수 있을 거야.”
“그렇겠지. 처음 몇 달은 월세도 커버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 
말은 이렇게 했지만, 여전히 정우는 혜령의 말이 농담처럼 느껴졌다. 혜령이 자세를 바꾸어 침대에 엎드리고는 베개를 턱 밑에 괴었다. 시선은 여전히 텔레비전에 고정되어 있었다. 텔레비전에서는 6시 뉴스광장 앵커가 전날 불광동 사우나 건물에서 일어난 화재와 양양 고속도로 한계령 구간 8중 추돌사고 소식을 전하고 있었다. 
“어, 고속도로 교통사고 무섭다. 가을단풍 구경 가다 그랬나? 야, 그때 우리는 운이 좋았어. 그지? 정우야, 근데 집도 집이지만, 일단 너무 쪼들리니까, 숨통이 좀 트이지 않겠어?” 
혜령이 또 서해바다 가드레일 사건을 들먹였지만, 정우는 혜령이 이번에는 웃으려고, 또 정우를 웃게 하려고 그 이야기를 한 것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
정우는 망설이듯이 옅게 한숨을 쉬었다. 그 짧은 순간에도 혜령이 그 소리를 들었을까봐 마음이 좋지 않았다.
“생각보다 지원율은 높지 않을 거라고 하더라. 신체 건강하면, 웬만하면 뽑힐 거라고.” 
혜령이 말했다.
“그래...... 그래도 그게...... 너무......”
“그렇긴 해. 너무 좀...... 영화가.”
혜령이 몸을 일으켰다. 이불에서 나와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았다.
“에잇, 몰라. 나 미쳤나 봐.”
“......”
“너, 머리에서 아직도 물이 뚝뚝 흐르네. 수건으로 더 꼭 짜야지. 이리 와봐. 내가 머리 말려줄게.” 
“응? 아니야.”
“얼른.” 
혜령이 몸을 구부려 드라이기의 소켓을 콘센트에 꼽은 뒤, 전원버튼을 ON으로 올렸다. 드라이기가 웅- 소리를 내며 돌아갔다. 정우가 쭈뼛거리면서 혜령 쪽으로 다가가 침대에 등을 대고 앉았다. 후끈한 바람과 함께 젖은 머리카락 사이를 지나다니는 혜령의 손가락이 느껴졌다. 앞머리가 이마를 때려 눈을 감으면, 그 찰나동안 정우는 이대로 영원히 혜령과 함께하는 꿈을 꾸었다. 그곳은 후끈한 드라이기 바람이 불었고, 정우는 금방 감아 말린 머리카락처럼 상쾌하고 가볍게 혜령과 서해바다를 거닐었다. 머리가 충분히 다 말랐을 즈음, 혜령이 리허설 갈 시간이라며 일어섰다. 
“다 된 거 같은데?” 
“응. 고마워.”
후텁지근한 바람이 멈추고 혜령의 손가락이 떠나자, 정우는 서해바다에서 갑자기 똥밭에서 구르는 현실로 돌아온 기분이었다. 그곳에선 그들이 서로의 똥구멍으로 흘러나오는 똥을 받아먹으며 네 발로 기어 다녔다. 자기 꼬리를 물고 있는 우로보로스의 뱀처럼 서로의 똥구멍을 물고 뱅글뱅글 돌았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더니, 그렇다고 정말로 똥밭에서 구를 일인가. 혜령은 샤워하기 귀찮다고 툴툴거리면서도, 살뜰하게 수건과 속옷을 챙겨 화장실로 들어갔다. 그런 혜령의 뒷모습을 정우는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

 

혜령이 하던 연극은 한 달 만에 막을 내렸다. 정우와 혜령은 배우모집공고가 나는 대로 열심히 오디션을 보러 다녔다. 합격하면 하는 대로 좋을 것이고, 떨어지면 나보다 운 좋은 녀석이 있겠거니 했다. 공개오디션이 열리면, 서로의 연기를 보았다. 가끔 같이 연기하기도 했다. 추운 나라에서 온 스파이 혜령이 사랑은 미안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면, 스파이를 사랑한 정우는 당신의 눈동자에 건배를 올리겠다는 따위의 말을 지껄였다. 

계절이 바뀌었다. 정우가 좋아했던 11월이 지나가고 12월, 본격적인 겨울로 접어들었다. 햇볕은 따뜻했지만, 공기는 차가웠다. 가로수는 여위었고, 하늘은 얼어붙은 듯했지만 12월의 방식으로 나름대로 파랬다. 혜령과 정우가 사는 방은 네모나고, 뽀로로 밥상은 둥글었다. 낮은 밝았고, 밤은 어두웠다. 세계는 확실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이들의 육신과 정신을 지치게 하는 모호한 물질은 설명할 수 없었다. 정우는 밤샘 아르바이트를 계속했고, 혜령은 그저께 이번 해 들어 마지막 오디션을 보았다. 어느덧 올해의 마지막 날이 되었다. 혜령과 정우는 덴뿌라 소바 두 그릇, 맥주와 감자샐러드를 시켜놓고 동네 어귀 일식집에서 둘만의 송년파티를 열었다. 

“소바면은 잘 끊어지니까, 올해도 잘 가라.” 
정우는 소바를 따뜻한 국물에 푹 담갔다. 김이 모락모락 올라와 코끝에 맺혔다. 작고 오래된 일식집의 매캐한 먼지 냄새가 음식들 위로 희미하게 떠다녔다. 
“그렇지! 오늘 같은 날마저 면발 질긴 라면을 먹을 순 없지. 그게 아무리 경애하는 스낵면이라 할지라도!” 
또 스낵면 농담인데도 언제나 까다로울 줄 모르고 무던히 웃는 정우의 모습에 혜령 또한 기분 좋은 미소가 입가에 저절로 떠올랐다.  
“정우야, 가끔 난 이런 생각이 들더라. 그거 알지, 우리 옛날에 문학 교과서에 나왔던-달에 천문대가 있는데, 망원 렌즈를 지키는 사람이 필요한데, 아빠가 그곳으로 갈 거라는 소설. 달에는 먼지가 없기 때문에 렌즈 소제 같은 것도 할 필요가 없지. 그래도 렌즈를 지키는 사람은 필요하다, 그걸 내가 하고 싶다! 이런 생각. 이 일 하면서 평생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 매일 같은 시간에 천문대로 출근해서, 하루 종일 망원렌즈를 지키고, 매일 같은 시간에 퇴근하고.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고.”
“취했냐? 나는 왜 그런 거 모르겠지. 문학시간에 안 졸았는데.”
“뜬금없지? 그냥......” 
혜령이 멋쩍은 듯 웃었다. 

동아리 모임에 다녀온 날 이후로도 몇 번 더 인간지네 이야기가 나왔지만, 이 일은 자꾸 흐지부지되었다. 혜령의 제안이 아주 요령부득의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정우는 마음을 정할 수 없었다. 혜령은 그 후로도 여러 번, 한번 해볼까 하다가도 그럴 순 없다며 고개를 젓곤 했다. 꿈은 멀어 보이고 생활은 고된 취준생이니 충분히 정우는 혜령이 그런 마음일 수 있으리라 여겼다. 그러나 혜령의 고민은 취준생이니 꿈이니 하는 원대한 것이라기보다는, 비좁은 원룸과 부실한 삼시세끼 같은 구체적인 것들에 있었다. 아침 일찍 집에 돌아와 혜령의 잠들어있는 모습을 보는 일이 정우는 가장 가슴 아팠다. 가끔 보이는 혜령의 넋이 나간 멍한 표정과, 단역 리허설을 하거나 언제까지 봐야할지 도무지 모르겠는 오디션을 보기 위해 집을 나서는 무거운 뒷모습이 떠올라 가슴을 바윗덩어리처럼 짓눌렀다. 

“정우야, 주인공은 참 피곤할 것 같아. 우리가 만날 엑스트라라서 하는 얘기가 아니라, 생각해 봐. 허구한 날 살인사건에 휘말리지, 대활약해서 그걸 해결해야 하지. 센 놈을 이겼는데, 더 센 놈이 나타나서 또 수련하고 무공을 쌓아야 하지. 요즘 미드 보면 말이야, 시즌마다 새로운 악당이 나타나. 그러면 주인공은 있던 능력보다 더 센 새로운 능력을 또 키워야 돼. 그런 면에서 엑스트라가 좋아. 일단 대사가 없어. 눈코입도 없어. 만화 보면 엑스트라는 이목구비도 안 그려주거든. 나는 내 인생에서 대활약하기도 싫고, 누가 내 능력에 기대는 것도 싫어. 난 딱히 내 인생에서도 주인공이 되고 싶지 않아.” 

 

*

 

이름: 진정우 Jin Jeongwoo
이름: 진혜령 Jin Hyeryeong

“영화제작사인 4889 N. Hollywood Way, Burbank, CA 90750, USA 소재 Six Entertainment(이하 ”제작사“)에서 제작하는 “인간 지네 코리아Human Centipede, Korea”(가제)에 출연하는 OOO배우(이하 “배우”)는 촬영개시일로부터 촬영종료일까지 감독의 지시에 따라 성실히 촬영에 임한다.“
진정우: 체크
진혜령: 체크

“제작사는 특수의상 및 소품 착용을 요구할 수 있으며, 영화의 특성상 2020년 2월 1일부터 2020년 3월 28일까지 대한민국 경기도 양평군 양평읍 약수사길 38-55 소재 특별촬영지와 합숙소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본촬영과 재촬영, 보충촬영, 후시녹음, 합숙생활에 성실히 협조하여야 한다.”
체크.
체크.

“영화의 특성상 신체 노출과 수치심이나 혐오감을 유발할 수 있는 행위에의 요구가 있을 수 있음을 인지하고 있으며, 이때 배우의 안전 수칙 불이행으로 야기되는 각종 사고에 대해서 민형사상 책임은 배우에 있음을 인지한다.” 
체크.
혜령은 순간 멈칫했지만, 체크.

정우와 혜령은 모든 계약서 항목들에 체크했다. 입소일인 오늘, 합숙소 앞은 사람들로 붐볐다. 검은 롱패딩을 입은 한국인 스태프 한 명이 마이크를 켰다. 

“여러분, 지금부터 간단한 신체검사를 받은 후 합숙소로 들어가시겠습니다. 검사는 형식적인 거니까 걱정하지 마시고요. 심각한 질환만 없으면 됩니다. 잘 아시겠지만, 일단 입소를 하면 나오실 수 없습니다. 남자분들은 절 따라오시고, 여자분들은 곧 담당자가 올 겁니다.” 
“혜령아, 잘 해. 잠시 뒤 보자.” 
정우가 말했다. 
“응, 정우야.”

정우는 검사실에서 간단히 구강검사와 항문검사를 받고 합숙소로 들어왔다. 검사는 5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뭐랄까, 결국 올 것이 왔다. 정우는 기왕 이렇게 된 거, 모든 것은 초코소라빵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아까 의사가 항문을 벌렸을 때, 왠지 축축하고 가려운 느낌이 들었던 것은 그냥 느낌적 느낌이겠지. 2개월 후면, 도시빈민들의 인정 없는 구원자인 세븐일레븐과 씨유와 지에스가 다닥다닥 붙어있는 빈민굴을 탈출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한국인 출연자들은 돈독해져 촬영이 끝나고도 ‘인간지네 코리아 연기자회’ 정모를 열고, 이른바 고통스러웠던 기억을 싸구려로 각색해 누가 누구의 똥구멍에 입을 댔고 누가 누구한테 똥을 받아먹는 관계였는지 술잔을 기울이며 즐겁게 떠들고 있을 것이다. 혜령이 보이지 않았다. 여자 출연자들이 속속 들어오고 있었다. 그때 핸드폰이 울렸다.  

“정우야,,,, 나야,,,,,,,,,,,,, 미안해, 정말,,,,.......... 어떤,,, 의사 가운,,, 입은 사람이,,, 입 벌려보라,,, 하고,,, 엉덩이도,,, 검사하고,,, 그러는데,,, 너무 역해서,,, 구역질이 막,,, 내가 지금 뭐하는 짓,,, 인가,,, 싶더라,,, 정우야,,,, 그래서 뛰쳐나왔어,,, 가족들은,,, 친구들은,,,, 어떻게 봐,,, 야,,, 나랑 헤어져도 돼,,, 아니 헤어져,,, 너 정말로,,, 미안해 정우야,,, 내가.”
“뭐?????????????????????? 너, 지금 뭐라고 했어?????? 너 어디라고???!!!!!!!!!?????????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너, 지금!!!! 뭐라는 거야????????????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야!!!! 내가 이거를!!!!! 나땜에 했어? 이걸 나땜에 했냐고! 야! 너! 야! 와, 이 썅년이, 와, 씨발! 헤어지는 게 문제야? 씨발 나는 지금, 여기 하하 씨ㅍ팔, 하...... 나 씨팔...... 하................. 씻팔....... 씨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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