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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원경 상사화(相思花)

2021.02.01 00:00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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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사화(相思花)

   갈원경

 

유난히 바람이 많이 불던 늦은 봄날이었다. 단단하게 봇짐을 바투 메고 마을에 두 사람이 들어왔다. 북방과 국경을 이루는 황강이 바다와 하나가 되는 고장이라 오고 가는 이들이 많은 마을이었다. 막 머리를 틀어 올린 것 같은 젊은 청년들이 흘러 들어왔다가 또 나가는 건 흔한 일이라 그저 뜨내기 두 사람이 들어왔구나 여겼다. 하나는 키는 삐죽이 커도 품이 좁고 가늘어 떠돌아다니면 밥벌이라도 하겠나 싶었고, 하나는 아직 소년이라 부르는 것이 어울릴 나이에 가무잡잡한 얼굴이 다부져 보여 나름 둘이 다니는 것이 어울리는 듯도 싶었다. 

두 사람은 객점에서 첫 끼니를 때우고는 곧 일할 자리가 있는지를 물었다. 강나루나 항구까지 짐을 실어다 주고 실어 오는 일은 늘 손이 모자랐고 강에 드리울 통발이나 그물을 손볼 줄 알면 그 일도 한 입을 버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마을에서 나름 이름이 난 의원은 이미 고희를 앞두고 있어서 약초를 구별하는 눈이 있으면 그것도 밥벌이가 됐다. 객주는 손 매워 보이는 소년과 눈 매워 보이는 청년이 할 수 있을 법한 일들을 이것저것 알려주었다. 도읍은 아니어도 사방팔방 강으로 바다로 오가는 이들이 마주치는 번화한 고장에 일거리를 찾는 이들도 적지 않았으므로.  

객주에 방을 빌린 채로 처음엔 짐꾼 일을 했다. 이름을 말하지 않는 두 사람을 부르는 말은 어느새 ‘크니’ ‘자그니’가 되었다. 사람들이 염려했던 대로 크니는 힘이 약했지만 혼자 짐을 들기 버거워하는 이들을 귀신같이 찾아내 말을 걸었고 자그니는 몸집은 작았지만, 힘이 좋아서 크니가 물어온 일들을 꺼리지 않고 맡아서 했다. 나이로 보면 일가 같기도 했지만, 서로서로 존대를 하는 데다 풍기는 분위기가 워낙 달라서 그 둘이 어떻게 같이 다니게 되었는지 궁금해하는 이들도 많았다.  

   

“두 사람, 다른 데로는 언제 가려오?”  

그들이 마을에 들어온 지 보름이 지났을 때, 객점을 나서려는 두 사람에게 주인이 물었다.  

“정해둔 날짜가 있는 건 아닙니다만, 왜 그러십니까?”  

“나야 두 분이 계속 여기 묵으면 좋긴 한데, 마을 일 하는 사람에게 계속 방값을 받자니 마음이 안 편하기도 해서. 쌍둥이네 옆집이 반년 전에 바다 건너 대륙으로 가서 계속 빈 집인데, 사람 손은 한참 안 갔어도 두 사람 머물기에는 괜찮을 것 같으니 말이지요.”  

주인이 말을 이었다.  

“손이 없어 농사를 못 짓는 땅도 있고. 알아봐 드릴까?”  

“형은 어때요? 짐 나르는 것보다 농사짓는 게 형은 더 나으려나?”  

자그니가 말했고, 크니가 조금 웃었다.  

“이 계절이면 이것저것 심기에 좋겠네요. 아우님이 괜찮으면 그렇게 합시다.”  

주인은 보름간 두 사람을 보았어도 서로 이름을 부르는 건 물론이고 서로의 옛이야기를 짐작할 말조차 한마디도 나누는 것을 보지 못했다. 어떻게 같이 다니게 되었느냐 물어도 그저 웃을 뿐이고 잠자리에 들기 직전까지 자리옷 차림이 흐트러지는 것도 보지 못했다. 그들의 봇짐이 처음 왔던 매듭과 다른 것은 분명한데 그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도 보인 적이 없다. 도읍에서 나라님을 피해 나온 사람들일까 싶다가도 그렇다면 저렇게 사람 많은 곳에서 얼굴도 가리지 않고 낯선 이들을 만나는 일을 할까 싶어지는 것이다. 보름달이 뜨던 날 객점에 처음 나타난 두 사람이 달이 완전히 사라지는 지금까지 있는 동안에 매일 객점에서 내는 끼니를 남긴 적도 없고 자신들이 묵는 방에 주인의 손이 가도록 하지도 않았다. 입은 옷의 색이나 머리 길이만 아니었다면 탁발승이라 해도 믿었을 것이다.  

“그럼 알아보겠으니, 오늘은 해 저물기 전에 돌아오시오. 기왕이면 해 있을 때 그 집에 살만한지도 봐야 할 테니.”  

“저희가 일부러 보지 않아도 괜찮겠지만, 그렇게 하지요. 마음을 써 주셔서 고맙습니다.”  

크니가 엷게 웃으며 나루터로 향했다. 

크니와 자그니가 농사를 지으면서 여기 살겠다고 한다고 전하자 옆집 쌍둥이네는 반색하며 오래 사람 손이 안 간 집이니 자신이 손을 보겠다고 나섰다. 달이 완전히 저무는 동안 마을 안에서 두 사람을 유심히 본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뜨내기들이 금방 사라져버리는 험한 일을 얼굴 찌푸리지 않고 계속한 것도 그렇고 처음 보는 이들에게도 다시 보는 이들에게도 늘 진중해서 두 사람이 마을에서 머물러도 좋겠다고 다들 생각하게 된 것이었다. 해가 떠 있는 동안이면 수레가 쉼 없이 지나는 큰길가 오일장 장사치들은 두 사람이 마을에 온 것이 겨우 보름밖에 되지 않았다는 것에 더 놀랄 정도였다. 

전 주인이 쓰던 이불이 볕에 널렸다. 새 이불을 만들 여유는 없었지만 묵은 이불이라도 볕이 좋아 보송보송 따뜻한 감촉이 남았다. 쌍둥이네 두 아이가 조금씩 거들며 사람 떠난 집의 스산함이 조금씩 거둬질 때, 객점의 주인도 땅 주인의 허락을 받아 기분 좋게 객점으로 돌아갔다.  

크니와 자그니가 객점 주인과 함께 짐을 꾸려 초가로 오자 쌍둥이네의 식구들이 모두 두 사람을 기다리며 앉아 있다가 반갑게 일어났다.  

“사람이 없던 곳이었다더니,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네요. 신세를 졌습니다.”  

크니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쌍둥이네 아버지가 손사래를 쳤다.  

“무슨 말을, 집이 작아서 손도 별로 안 갔소. 원래 네 가족이 살기에는 조금 좁았던 집이니까 두 분께는 딱 좋을 겁니다.”  

“아궁이도 이 이가 손질을 해 놨으니까 겨울이 와도 끄떡없을 거예요.”  

“문풍지도 새로 붙이려고 했는데 다 멀쩡해서 문고리만 우리가 고쳤어요.”  

아이들도 한마디씩 거들었다. 둘은 아이들이 손봤다고 하는, 어딜 고친 건지 알 수 없이 멀쩡한 문고리를 만지작거렸다.  

“정말 뭐라고 감사드려야 할지.”  

“정말 고마우시면, 부탁 하나만 들어주세요.”  

쌍둥이 중 작은 아이가 대뜸 말했다. 아비가 놀라 아들을 말렸다.  

“얘, 강현아!” 

“무슨 부탁인지 모르겠지만 내가 들어줄 수 있는 거면 들어드리지요.”  

“이름 가르쳐주세요. 크니 자그니 말고 두 사람 진짜 이름이요.”  

강현의 말에 부모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지만, 크니는 소령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빙긋 웃었다.  

“강현이 네 이름이구나. 그래, 마을에 신세를 지면서 우리가 누군지 말씀도 안 드렸으니 결례도 이런 결례가 없지. 아무도 묻지 않아 주셔서 감사하고, 크니 자그니로 불리는 것도 나쁘지 않아서 그냥 있었어. 고맙구나. 나는 지운이라고 해. 여기 자그니는….”  

“나는… 소강. 우리는 저 동북쪽 첨산에서 왔어. 지진으로 산이 허물어져서 마을에서 우리 둘만 남아서, 먹고 살 수 있는 곳을 찾아서 계속 내려와서 여기 온 거야.”  

“아이가 괜한 걸 물어서…….”  

아낙이 얼굴을 붉혔다. 크니, 지운이 엷게 웃었다.  

“어딜 가든 사람들이 어디서 왔냐고 물어서요. 첨산에서 왔다고 하면 없어진 고장에서 온 사람은 어디서도 반기질 않아서. 그래서 계속 서쪽으로 남쪽으로 강을 따라 내려왔네요.”  

“혹시나 말 안 하고 있으면 하루라도 더 있지 않을까 해서 입 다물고 있었어요. 지운 형은 숨길 생각이 아니었는데, 제가 그러자고 했어요. 죄송합니다. 여기서도 나가라는 분들이 계시면 나가겠습니다.”  

“아유 무슨 그런 말씀들을…….”  

아낙이, 객점의 주인이 손사래를 쳤다.  

“여긴 사람들이 늘 들고 나는 곳이어서 한 대만 거슬러 가면 죄다 사연 있는 사람일 거에요. 그래서 남의 사연을 굳이 묻지 않죠. 이름 안 들은 걸로 할까요?”  

“그래요, 그래도 돼요. 그럴 수 있지 현아?”  

아이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지운은 소령의 눈높이에 맞춰 몸을 낮춰 앉아서는 빙긋 웃음 지었다.  

“괜찮아 강현아. 언제 우리 이름을 말씀드릴까 계속 눈치를 보고 있었는데 너 덕분이야.”  

“그래, 괜찮아. 자, 불러 봐, 소강 형. 너랑 한 자가 같네.”  

두 사람의 이름이 사람들의 입에서 입을 타고 전해졌다. 그들이 어디서 왔는지 묻지 않았으므로 그들의 고향은 전해지지 않았다. 이 고장에 두 사람이 살게 되었다고, 나루터 짐꾼을 하던 청년과 소년이 과수원 일과 밭일을 하게 되었다고 하는 이야기에 사람들은 서툴러도 제 맡은 일 열심히 하던 두 사람이 마을에서 살게 되어 다행이라는 말을 더했다.  

첨산 너머 황강 건너 북방에는 척박한 땅에 농사를 지을 수 없는 사람들이 짐승 가죽을 이어 붙여 지붕을 올리고 언제든 떠날 수 있는 집을 짓는다 했다. 그곳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말에 오르는 법을 배우고 손이 여물어지면 말을 타고 활을 쏘는 법을 배운다 했다. 짐승들을 먹이며 그 짐승들을 이끌고 여기저기 땅을 떠돌며 사는데 물이 귀해 쌀이 자라지 않아서 커다란 바퀴 같은 밀떡을 구워서 몇 날 며칠을 나누어 먹는다고. 무리가 하나가 아니라 풍습도 같지 않지만 집을 짓는 모양은 달라도 언제든 허물 수 있는 집을 짓는 것이 같고 짐승을 먹이며 먹이가 있는 곳으로 떠돌며 사는 것은 같았다.  

북방에 살지 않는 이들은 두려워하며 말했다. 그들이 물 많고 샘 솟는 이 땅을 탐내면 어쩔까. 그들이 그 매선 활을 우리에게 겨누면 어쩔까. 사람들은 겨울에 황강이 얼어붙게 되는 때를 가장 경계했다. 어떤 이들은 황강을 건너 첨산을 넘어 그들에게 우리의 힘을 보여 주어야 한다고도 했다. 그래야 그들이 남쪽 땅을 엿보지 않을 거라고.  

첨산의 지진은 남쪽으로 전해지면서 이상한 사연이 덧붙여졌다. 첨산이 무너진 자리에 커다란 못이 생겼다 했다. 마을이 있었던 자리를 그 못이 다 덮었다 했다. 첨산의 산신이 노해서 산에 물을 부른 거라고. 마른 땅에 물이 생겼으니 곧 황강에도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고 두려워하며 말했다. 산속에는 벼를 심을 수 없어 단을 만들어 밭을 만들고 쌀 대신 토란과 감자를 심어온 마을 사람들이, 산에 불이 옮겨붙을까 불씨를 제일 염려하며 지켰던 사람들이 산신을 노하게 했을 리 없었지만,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는 일에는 자신들 나름의 이유를 만들고 싶어 했다. 무엇이 산신을 노하게 했을까, 궁금증은 날로 험해지면서 이미 없는 마을에 죄의 이름을 더했다.  

오래된 기록에 따르면 야트막한 언덕이 있던 땅이 갑자기 흔들리더니 생겨난 것이 첨산이 라 했지만, 사람들은 갑자기 높이 솟은 산에 갑자기 물이 생길 수도 있다고 믿기보다는 그 산에 깃들인 무엇인가가 사람들의 죄를 물은 것이라 믿으려 했다.  

   

어느 날 한 무리의 말 탄 사람들이 왔다. 가죽을 두껍게 덧댄 갑옷까지 입은 남자를 선두에 세우고 무리는 곧장 관청으로 향했다. 향리가 놀라 객을 맞았다. 도읍에서 보낸 서신과 함께 선두의 남자는 관청에서 향리가 불러온 수장과 독대하며 한참을 이야기하다가 오랫동안 쓴 적이 없는 숙소를 정리해서 함께 온 이들과 묵게 되었다. 

첨산을 이대로 둘 수 없다는 관리들이 산 아래에 진을 지어 군사들을 두자고 청했다 했다. 황강의 시류가 첨산에 있는데 황강에 해코지라도 하면 어떻게 하겠냐고 두려워하며 청하는 이들에게 북방의 사람들은 이미 이 땅을 탐내는 오랑캐들이 되어 있었다. 이곳에 온 무리의 곱절만큼의 병사들이 첨산으로 향했다 했다. 군사 외에 진을 쌓고 방비를 할 일꾼들이 또 그만큼 함께했다고 했다. 지진이 있었던 소식보다 빨리 전해진 소식은 그랬다. 장수가 나타났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 고장에 원래 군사들이 머무는 곳이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멀지 않은 거리에 이미 병영이 있어서 사실상 오랫동안 쓰지 않았던 곳이었다.  

장수는 병사들을 데리고 늘 주변을 순찰했다. 북방에서 강을 건너 넘어오는 이가 없는지 바다에서 강으로 넘어오는 이들은 없는지 해가 저문 뒤에 은밀하게 오가는 이가 없는지. 사람들은 장수와 병사들이 오가는 길을 피해 다녔고 늘 번화하던 길에는 오가는 이를 보기 힘들어졌다. 사람들이 어디서 태어나서 어떤 경위로 이 고장에 머물게 되었는지 조사하기 시작했고 이 고장에서 태어나지 않은 이들은 어린 시절에 잘 기억나지도 않는 일들을 더듬어가며 자신의 뿌리를 이야기해야 했다.  

장수가 고장에 들어온 지 달포쯤 되었을 때, 지운과 소강이 뿌린 씨앗이 싹이 돋아 자라기 시작했을 무렵에 두 사람은 향리에게 불려갔다. 그날도 강 주변을 순찰한다며 빙 둘러보고 돌아온 장수는 관청의 가운데 관리의 자리에 앉아서 둘을 맞아 출신을 물었다. 소강은 북서쪽 산허리 고장에서 태어났다는 호패가 있는데 지운은 갖고 있지 않은 것이 문제였다.  

“과수원에서 일하는 이들입니다. 이곳에 와서 한 번도 문제가 된 적이 없습니다. 일을 바지런하게 하고 사람들에게도 정중한 이라….”  

몇 번이나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들은 향리가 두둔하며 말했다.  

“숨길 것이 있는 이들도 그리하지 않겠소? 들키지 않고 사람들 안에 묻혀 지내려면.”  

장수가 말했다.  

“둘 다 없는 것도 아니고 함께 들어온 둘 중에 한 사람은 갖고 있으니….”  

“지진으로 마을이 다 무너져내렸습니다. 호패를 챙길 겨를이 없었으니 혜량해 주십시오.”  

지운이 말했다. 장수가 눈살을 찌푸렸다.  

“지진으로 마을이 무너졌다? 두 사람, 첨산에서 왔나?”  

“그렇습니다, 나리.”  

“첨산에 있던 이들 중에 국경을 넘어온 오랑캐들이 섞여 있다는 말이 전부터 있었다. 첨산 사람들에게 친근하게 섞여들어서 길을 틔우려고 한다고. 첨산에서 왔다니 더욱 수상하지 않은가.”  

“헛소문입니다 나리. 저는 첨산에서 태어나서 평생을 살았습니다만 북쪽에서 넘어온 이는 한 사람도 보질 못했습니다. 외진 고장이라 사람들이 말을 보탰을지 모르지만 맹세코.”  

“이미 죄를 받아 무너진 산이니 그 말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밝혀줄 사람도 남지 않았지. 걱정하지 말게 소년. 자네는 호패가 그 핏줄을 증명하고 있으니 자네에게 죄를 묻지는 않을 것이네.”  

“나리, 이 사람은 제 동료입니다, 핏줄과 같은 사람입니다, 부디 살피시어…!”  

당황한 소강이 머리를 조아렸다. 장수는 아랑곳않고 말을 이었다.  

“황강을 넘어 북쪽으로 지금이라도 떠난다면 죄는 묻지 않겠네. 물론 청년 자네 혼자만일세. 이 나라의 피를 받은 사람을 북쪽으로 쫓을 수는 없으니.”  

장수가 엄중히 말했다.  

“호패를 찾아오든지 청년이 이 땅의 피를 받았음을 증명해 줄 것을 찾든지, 그리하지 않으면 내일 해가 저물 때까지 강을 건너야 할 걸세. 강을 건너면 그 뒤는 따르지 않겠네.”  

“…그리하겠습니다.”  

지운이 일어나 예를 표하고 관청을 나서자, 소강이 뒤쫓아와 지운의 옷자락을 붙들었다.  

“뭘 그리하겠다는 겁니까, 저 말대로 강이라도 넘을 생각입니까?”  

“아우님이 혼자 남는 게 염려되어 계속 옆에 있었습니다만, 이 고장 사람들이 이미 아우님을 이웃으로 생각하고 있으니 이제는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겠지요.”  

“아니, 아니 됩니다. 제가 왜 이곳에 왔는데요. 형이 안 계셨으면 제가 여기 왔을 리가 없지 않습니까. 그 산허리에서 저는 벌써 죽었습니다. 형이 계셔서 지금까지 살았는데 왜 저를 혼자 두고 가시겠다는 겁니까?”  

지운이 웃으며 소강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강현이가 아우님을 많이 따르고, 그 부모님들도 아우님을 미덥게 여기지요. 괜찮을 겁니다. 이곳에 와서도 힘에 부치는 저를 거두느라 아우님이 애쓴 것을 알고 있어요. 믿을만한 사람을 만나면 안심하고 떠나려고 했는데 제 욕심으로 오래 머물렀습니다.”  

소강이 뭐라고 말하려고 하는데 지운이 웃으며 소강의 입술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소강은 뭔가가 입을 막기라도 한 듯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잘 있어요. 우리 귀한 아우님. 그 이름을 잘 아껴 주어요. 그것 하나만 들어주면 돼요.”  

소강을 두고 지운이 돌아서서 바삐 걷기 시작했다. 소강은 몸을 움직이지 못한 듯이 멈춰서서 지운의 뒷모습만 눈으로 좇다가, 한참 후에 털썩 주저앉았다.  

지운이 어디로 간 것인지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비쭉하게 큰 키도 그렇고 마을 일을 여기저기 도와주던 사람이라 그 얼굴을 익힌 이들이 많을 텐데도, 자신이 가져온 봇짐도 챙기지 않고 떠난 걸음이어서인지 누구도 그가 어디로 갔는지 보지 못했다 했다. 소강은 말을 잊어버린 사람처럼 먼저 말을 건네던 버릇도 어디 갔는지 사라지고 어두운 얼굴로 한참 더워지는 과수원에서 오늘만이 날인 것처럼 일했다. 과수원에 일이 적으면 둘이 살피던 밭에 있었다. 지운이 떠난 걸 아는 사람 몇몇이 향리에게 가서 마을에 든 이를 내쫓는 법이 어디 있냐고 읍소했지만, 향리 역시 관리조차 맞서지 못하는 도읍에서 온 장수에게 말을 낼 수는 없었다.  

마을 곳곳에서 잡초처럼 올라왔던 이파리들이 사라지고 삐죽삐죽 꽃대가 올라오더니 노란 꽃이 피기 시작했다. 완연한 여름, 7월이었다. 마을에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꽃이었다. 어디서 씨앗이 날아왔는지, 풀숲만 있을 때는 사람들 눈길도 끌지 못할 정도로 여느 풀처럼 평범하더니 꽃대에 피어난 꽃은 햇빛처럼 노랗게 밝았다. 꽃은 사람들이 걸어가는 길가를 따라서 일부러 씨를 뿌리기라도 한 듯이 피어 소강의 과수원 입구까지 피었다. 강나루에서 과수원까지, 가는 길을 안내라도 하듯이 노란 꽃길이 피었다.  

꽃이 필 때쯤 마을에 새 얼굴이 나타났다. 두 사람이 왔을 때처럼 봇짐을 단단히 여민, 사내의 옷을 입고 있긴 해도 소녀의 얼굴이 분명한 이가 배에서 내려, 노란 햇살 같은 꽃을 보고 몸을 숙여 꽃을 살폈다.  

“……소강이 여기 있었구나.”  

소녀는 꽃길을 따라서 더운 햇살 아래를 땀 한 방울 흘리지 않고 걸었다. 나이에 비해서도 큰 키에 뱃멀미는 물론이고 더위도 못 느끼는 이처럼 그 주변만 봄바람이 불기라도 한 듯이 꽃길을 따라서 과수원까지 걸어가, 나무가 우거진 과수원 안에서 자신이 갈 길을 아는 사람처럼 거침없이 걸어서 나무를 살피는 소강 옆으로 갔다. 소강이 놀라 소녀를 보았다.  

“……누이……, 아니, 지운 형, 아니…….”  

소강의 말에 소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언니가 아니에요, 당신도 소강이 아니군요.”  

“……누이의 가족인가요? 누이는……, 떠났습니다.”  

“그건 알아요. 그 사람의 꽃이 피었기에 온 거죠. 혹시나 했는데. 그래요. 마을로 갔더니 마을 자리에는 호수가 생겼고 그 사람의 꽃이 호숫가에 가득해서. 꽃이 이끄는 대로 왔어요. 혹시나 그 사람이 있을까 해서.”  

소강은, 자그니는 소녀를 이끌어 두 사람이 함께 살던 집으로 왔다. 과수원으로 이어진 꽃길 하나가 집으로 연결되어 있어서 누가 보아도 꽃이 집과 과수원과 나루터를 이어주는 것으로 보였다.  

소녀는 머릿두건을 풀고 마루에 걸터앉아 노란 꽃을 바라보고 있었다. 소강은, 소년은 그 옆에 엉거주춤 서 있다가 조금 떨어져 앉았다.  

“소강을 많이 닮았네요. 동생인가요?”  

소년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를 지운 형, 이라고 불렀죠. 언니가 그 이름을 썼나요?”  

소년은 오래전에 그 이름으로 불렸던 것이 자신임을 떠올렸다.  

   

어느 날, 숲속에서 창백한 얼굴의 여자가 쓰러져 있는 것을 형이 마을까지 업어왔다. 형은 첨산 아래에서 태어났지만, 아버지를 피해서 어머니의 등에 업혀 산으로 온 사람이었다. 어머니는 몇 달 후 자신을 낳다가 숨을 거두었고 마을은 절대 아이를 산 아래로 보내지 말아 달라는 어머니의 유언에 따라 두 아이를 산의 아이로 거둬 키웠다. 자신은 태어나지 않은 사람이었다. 마을에서는 누구도 막지 않았기 때문에 둘은 마을에서 공동의 아이처럼 자랐고 한몫하는 청년으로 자랐다. 기억도 하지 못할 과거의 일이었지만 자신이 산이 거둬준 사람이라는 것을 듣고 자랐기 때문인지 숲속에 쓰러진 여자를 형은 그냥 둘 수 없었다 했다. 열흘을 앓고 깨어난 여자는 과거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형과 여자는 당연한 듯이 부부가 되었다.  

“…지진이 일어난 날, 누이가 형을 구했고, 형이 나를 구하러 도로 뛰어갔어요.”  

소년이, 지운이 말을 이었다.  

아주 조금 땅울림이 있었을까. 아니, 되새겨보면 그렇게 느껴졌을 뿐 천지는 그냥 보통과 같았다. 누이가 갑자기 일어나 빨리 이곳을 떠야 한다고 했다. 아무도 듣지 못한 목소리를 듣기라도 한 사람처럼, 급히 앞장섰다. 형과 누이 뒤를 자신이 쫓아갔다. 마을을 거의 다 빠져나갔나 싶었을 때 발아래가 무너져내리고 자신은 정신을 잃었었다.  

“집이 무너진 자리를 계속 파헤쳤는데, 형은 누이를 보고 숨을 거뒀고…… 형이 지탱한 아래에 제가 있었다고 해요. 저는 정신을 잃고 있어서, 누이가 저를 업고 나왔는데……, 제가 형의 저고리를 입고 있었죠. 그 소매 안에 형의 호패가 있었어요.” 

산이, 마을이 무너져 나무가 땅이 뒤덮인 폐허의 자리에 누이가 어떻게 자신을 구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순식간에 바닥이 흔들리다 내려앉고 끝없이 떨어지다 정신을 잃었던 것만 기억에 남아 있었다. 누구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누구도 구할 수 없을 일이었다. 그런데 누이는 그 흙무덤을 다 헤치고 자신과 형을 꺼냈다고, 형의 마지막을 보았다고 했다.  

“…소강을 만난 적이 있어요. 당신의 형.”  

소녀가 말했다.  

“언니가 소강을 소개해줬어요. 산에서 살 거라고. 그러니까 우리와 함께 있을 수 없다고. 미안하다고 하면서.”  

“…누이는 북쪽 사람이었던 건가요? 그래서…… 누이는, 당신과 함께 있는 건가요?”  

소녀가 쓸쓸하게 웃었다.  

“둘 다 아니에요. 우리는… 그보다 더 먼 곳에서 왔어요. 당신이 아는 방식으로 설명할 수가 없네요. 언니는……, 글쎄요. 소강의 꽃이 이렇게 핀 걸 보면. 소강에게 간 것도 아니겠지요.”  

소녀가 일어났다.  

“누이를 찾으러 가시는 건가요? 전, 저도…….”  

소강이, 지운이 일어났다. 소녀가 소년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 앉혔다.  

“사람들은 항상 낯선 걸 무서워하니까, 저도 여기 오래 있을 순 없어요. 저 꽃에 누군가 이상한 의미를 붙일지도 모르고요. 더 오래 머물다가는 저도 위험해질지 모르니까, 다른 사람들에게 말이 퍼지기 전에 갈게요.”  

소녀는 주변을 조금 둘러보고는 소년의 머리에 손을 뻗다가 망설이듯 거두었다.  

“……잊는 것이 당신에게 좋은 일일까, 기억하는 게 좋은 일일까.”  

소녀가 중얼거렸다.  

“잘 있어요, 소강.”  

소녀가 돌아섰다. 소년, 소강은 따라 일어서려 했지만,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지운이, 누이가 떠날 때와 마찬가지로 소강은 소녀가 떠나는 것을 보고만 있었다. 소녀의 걸음을 따르듯이 노란 꽃이 흔들렸다. 한여름에 그 길만 봄인 듯, 가을인 듯 선선한 바람이 꽃잎을 흔들었다. 소녀가 떠나고 한참 후 소년이 황급히 그 길을 따라가 보았지만, 소녀의 발자국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다음 날, 노란 상사화꽃이 모두 하나같이 시드나 싶더니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이파리가 사라지고 피었던 노란 꽃은 그 이후로 한 번도 다시 피지 않았다. 더위가 저물고 남쪽보다 빨리 겨울이 찾아올 때쯤 진을 세우던 병사들이 추위에 쓰러지고 마을에 머물던 장수와 병사들도 함께 도읍으로 돌아갔다. 마을에 피었던 노란 꽃은 다음 해에도 그다음 해에도 피지 않았지만 첨산 꼭대기의 호숫가에는 매년 노란 꽃이 피어난다 했다. 풀숲처럼 잡초처럼 잎이 푸르렀다 저물고 삐죽 솟구친 꽃대 위에 노란꽃이 쓸쓸하게 핀다 했다.  

소강은 그 이름을 지키며 계속 마을에서 살았다. 이 고장에 피었던 노란 꽃을 기억하는 이는 소강뿐이었다. 소강은 언젠가 누이를 닮은 누군가가, 혹은 누이가 마을로 나타나지 않을까 기다렸다. 그러나 꽃이 돌아오지 않듯이 누이도, 누이를 닮은 이도 오지 않았고 어느 날 산이 무너지는 지진에서 무너진 집을 다 헤집으며 사람을 구한 이의 이야기도 소강 혼자만이 기억했다. 어느 해 여름, 첨산에 다시 지진이 왔을 때 사람들은 무언가가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보았다고 했지만, 산신이 노해 다시 산이 울었다는 이야기가 그 소문을 묻었다. 그날 이후 첨산에도 노란 꽃은 피지 않았지만, 누구도 그 사실을 기억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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