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게시물의 무단 전재, 복사, 배포를 금합니다.

반발계수가 높은 이 공의 이름은 107, 그 외에는 아무것도 되지 않습니다.

김산하

 

공에는 공의 표준인 제1의 공이 있습니다. 기준은 형상과 질료로 정합니다. 외피는 흰색의 가죽이어야 하며 내부 재료는 코르크와 고무, 모직 실과 면직 실 등 적당한 탄성을 지니는 것을 혼합합니다. 솔기는 붉은 면사로 108 땀을, 반발계수는 0.4034~0.4234 사이, 둘레 229~235mm, 무게 141.7~148.8g, 솔기 폭 9.524mm 이하. 이것에 예외 없이 부합할 경우 1의 공이 됩니다. 그렇지 않은 경우는 모두 아공입니다.

 공은 공을 만듭니다. 공을 만드는 공도 공이 만들었습니다. 만듦과 만듦이 이어져 최초의 공이 있었고, 최초의 공은 어떠한 운동이 만들었다는 게 학계의 정설, 입니다. 공을 만든 운동은 다른 운동이 만들었고 운동을 만든 운동도 운동이 만들었습니다. 운동과 운동이 끝없이 이어지겠으나, 제1 원인이 되는 부동의 원동자가 무엇인지 공은 아직 알 수 없습니다. 어쩌면 공과 같이 시작도 끝도 없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공들은 움직입니다. 운동을 합니다. 운동하는 이유는 기를 저장하기 위함입니다. 기는 공을 보존하고 전승하는 데 필수불가결합니다. 공들은 서로 무리를 이루는 방식으로 오직 공만을 위한 기를 잔뜩 생산해 이제 세계는 공에게 매우 유리합니다. 공은 공 이외의 존재와 세계를 두고 다투지 않습니다. 공의 투쟁 상대는 같은 공이거나 혹은 세계뿐입니다.

여기에 아공이 하나 있습니다. 이 공의 부적합은 여러 개입니다. 우선 솔기가 하나 부족합니다. 107개뿐입니다. 둘레와 무게도 약간씩 모자랍니다. 내부 재료는 타 공에 비교하면 고무의 비율이 높습니다. 이 공이 가진 형상과 질료의 차이는 각자 사소하나 그것이 모여서 초래한 반발계수의 차이는 어마어마합니다. 이 공의 반발계수는 0.6120으로 1의 공과 비교하여 매우 큽니다. 그러므로 아공입니다. 이 공을 107로 명명하겠습니다.


아침입니다. 공들이 구릅니다. 목적지는 빛이 있는 방향입니다. 빛에는 열이 있고 열에는 기가 있습니다. 107도 다른 공과 함께 구릅니다. 경사진 면과 넓은 통로와 좁은 통로를 부지런히 굴러가며 빛에 가까워지도록 노력합니다. 운동에도 역시 기가 필요하므로 오늘 소모한 만큼의 기를 충원해야만 운동이 지속 가능합니다. 그것은 공 스스로 보존함에 있어 중요한 사안입니다. 소모하는 기보다 저장되는 기가 더 많아야 합니다. 이것에 잦게 실패할 경우, 탈락입니다. 107은 구르고 굴러 어느덧 굴 앞에 섭니다. 공들이 굴을 통과하고 있습니다. 이 굴도 공이 만든 것입니다. 공의 기를 소모하여 운동한 결과로서 이 굴이 있습니다. 빛이 있는 방향으로 최단거리의 이동을 실현하기 위해 공들은 굴을 팠습니다. 굴은 어둡고 축축한 통로입니다. 천장은 아주 낮아 공 하나가 겨우 통과할 높이지만, 너비는 넓어 여러 개의 공이 한 줄로 동시에 통과할 수 있습니다. 무수한 공들이 질서 정연히 모여 차례로 열을 맞춰 굴을 통과합니다. 107은 굴의 내부를 모릅니다. 굴을 통과해본 적이 없습니다. 무섭기 때문입니다.

굴의 입구 안쪽에 갈라진 틈이 하나 있습니다.

틈의 너비는 좁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1의 공들이 그 틈을 통과할 때, 그들의 높이는 약 3분의 1만큼 아래로 꺼졌다가 다시 훅 위로 올라옵니다. 그들의 지름이 충분히 넓지 않았다면 그대로 쑥 꺼질지 모를 일입니다. 그리고 107의 지름은 충분히 넓지 않습니다. 틈 아래엔 무엇이 있냐면, 아무도 모릅니다. 아무도 빠졌다가 올라온 적이 없습니다. 107은 탐사대가 되고 싶지 않습니다. 107은 제 몸 일부를 틈 사이로 내어주고 올라오는 다른 공들의 용맹에 탄복하다가 뒤돌아설 뿐입니다. 뒤돌아선 107에게 무언가가 다가옵니다. 또 다른 아공입니다. 이 공의 부적합은 단 하나입니다. 가죽 외피가 흰색이 아닌 청색입니다. 그뿐임에도 아공입니다. 이것을 청색으로 명명하겠습니다. 청색이 107에게 묻습니다. 오늘은 통과할 거냐. 107은 망설입니다. 자신이 저 틈을 통과할 수 있을지, 몸의 부피를 한 번 더 가늠해봅니다. 틈은 균일하지 않습니다. 좁고 긴 형태의 직사각형이 아닙니다. 불균일한 갈라짐이 촘촘하게 이어져 둔각과 예각을 무수히 가지는 지그재그의 면과 지그재그의 면이 마주하는 틈입니다. 어느 곳은 좁고 어느 곳은 넓을 수 있습니다. 107은 꽤 오래도록 그 틈을 관찰했습니다. 폭이 비교적 좁다, 고 여긴 부분도 있습니다. 잘하면 건널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자칫하면, 끼일지도 모릅니다. 나아가지도 못하고 다시 나오지도 못하고, 체증을 일으키는 존재가 될지도 모릅니다. 다른 공들이 107을 싸늘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을 상상하고 나면 107은 포기하게 됩니다. 다음에, 라고 말하게 됩니다.

청색도 굴을 통과하지 않습니다. 굴속에서 다른 공들은 청색을 보지 못합니다. 청색의 자리는 빈 공간처럼 보입니다. 다른 공들이 자꾸만 옆과 뒤에서 굴러와 청색의 자리를 채우려다 청색과 부딪힙니다. 그들에게는 한 번이지만 청색에게는 여러 번이라 차츰 굴을 통과하는 일이 청색에게 위험한 일이 되었습니다. 왜 공들이 당신을 보지 못할까. 107이 청색에게 묻습니다. 청색은 파장 때문일 거라고 답합니다. 파장? 파랑은 파장이 짧아. 파장이 짧은 색이라 어두운 공간에서 잘 안 보일 거야.

107과 청색은 나란히 담을 따라 굴러갑니다. 굴을 통과하지 못한 아공들이 각기 굴러 빛을 향합니다. 담에는 어둠도 없고 틈도 없습니다. 그러나 담이 그 자체로 있습니다. 아주 길게 북쪽으로 나 있어 공들은 빛을 향하기 위해 빛에서 멀어졌다가 다시 빛에 가까워지는 거리를 감내해야 합니다. 운동이 길어집니다. 모퉁이를 향해 갈 때 길은 춥고 멉니다. 공들은 자연히 묵묵하고 우울해집니다. 모퉁이를 돌고 나면 이제 빛을 향하는 길입니다. 여정이 반 정도 지났다는 뜻입니다. 반 왔다. 힘내자. 라는 말이 거기서부터 나오기 시작합니다. 107도 그곳에서부터 환해집니다.

이상한 일이라고 107은 생각합니다.

모퉁이는 언제나 멀고 추움이 지극해지는 공간입니다. 갈 때도 그렇고, 올 때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107은 모퉁이를 가장 좋아합니다. 그곳을 축으로 삼아 회전하고 나면 비로소 따듯하고 가까워지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더 나아지는 일만 남았다는 기대로, 107은 모퉁이에서 환한 감각을 얻습니다. 이를테면, 크리스마스 같은 것입니다.

 

107과 청색은 한 무리의 공과 함께 들판에 도달했습니다. 예정대로 빛이 가득 있습니다. 빛은 들판의 동쪽에서 떠올라 남쪽을 가로질러 서쪽으로 사라집니다. 그간에 들판이 열로 가득합니다. 열이 가득해 공들도 가득히 모였습니다. 들판의 중심에는 거대한 기둥의 군락이 있습니다. 중심부로 갈수록 높고 주변부로 갈수록 낮습니다. 기둥은 수백 개의 공을 동시에 올려놓을 만큼 면적이 넓은 것도 있지만, 겨우 공 하나가 올라갈 수 있을 정도로 협소한 것도 있습니다. 기둥이 기둥 곁에 붙어 있고 기둥이 기둥 곁에 붙어 있습니다. 잠시 이 기둥 군락지의 역사를 설명하겠습니다.

최초의 기둥을 세운 존재는 당연히 공입니다. 최초의 기둥을 세운 공은 본인 이외의 다른 존재와 다투기 위해 기둥을 세웠습니다. 높은 위치는 빛을 쬐는데 많은 이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어서 다른 공들도 앞다투어 이 슬기를 모방합니다. 같은 자원을 두고 다투는 존재 중 이 슬기를 모방할 수 없는 존재들은 자연히 도태되었습니다. 패퇴하여 죽은 존재들의 형체는 공들이 전리품으로 갖습니다. 이들은 다른 존재의 몸을 분해하고 재조립하여 공으로 만듭니다. 자신과 닮은 공을 만들어 공을 전승하도록 합니다. 공 이외의 존재는 적어지고 세상에 공만이 나날이 늘어나므로 자연히 공의 제일 투쟁 상대는 공이 되었습니다. 이들은 유리한 고점을 차지하기 위해 더 높은 기둥을 세우는 경쟁을 끝없이 끝없이 합니다. 하다가 어느 날 깨닫습니다. 너무 끝이 없습니다.

기둥을 만드는 운동이 공 전체의 기를 늘리지 않고 줄이고 있던 것입니다. 공이 다른 존재와 투쟁하여 만든 공은, 공이 공과 투쟁하면서 공이 되지 못하고 기둥이 되어 사라집니다. 이 흐름이 계속될 경우, 공은 없고 기둥만 가득한 세계가 도래합니다. 종료합시다. 사고가 뛰어난 공들이 이를 인지하고 협의함으로써 경쟁은 종식되었습니다. 이제 기둥은 더 건설되지 않습니다. 낡은 것이 보수될 뿐입니다. 위기를 넘긴 공들은 윤리에 탄복합니다. 탐욕을 버리고 연대하는 마음이 승리한 것입니다. 공들은 공을 보존하고 전승하는 것에 성공하여 현재까지 이르렀습니다. 기둥의 군락지는 슬기와 결속의 본보기로서 공들에게 자랑스럽게 있습니다…….

107과 청색은 이 군락지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늘을 만들기 때문입니다. 빛이 동쪽에 있을 땐 서쪽이 가려지고 서쪽에 있을 땐 동쪽이 가려집니다. 기둥의 군락지는 너무나 거대해서 담 바깥의 들판을 3분의 2만큼 차지하고 있습니다. 기둥 위는 이미 주인이 있습니다. 그 기둥을 건설한 공과 후천적으로 권리를 습득한 공 들이 소유하고 있습니다. 후천적인 권리 습득은 양도와 강제 탈취의 사례를 모두 포함합니다. 그러나 협의 이후엔 평화적인 양도만 인정됩니다. 때때로 107과 청색은 기둥 위의 공을 죽이고 그 자리를 점거하고 싶지만, 그런 야만적인 행위는 이제 공에게 용납되지 않습니다. 문명되었기 때문입니다.

107과 청색은 군락지 아래의 사분면을 살핍니다. 남향의 사분면은 이미 굴을 통과한 공들에 의해 점거되었습니다. 동쪽은 당장 빛이 비치지만, 정오를 지나면 빛이 서쪽으로 이동할 것이므로 서쪽에 자리 잡는 것이 영리합니다. 무리는 서쪽으로 이동합니다. 그나마 빛이 잘 들 것으로 예상하는 곳에서 움직임을 멈추고 기를 아낍니다. 그럴 때 그들의 모습은 동면, 혹은 가사와 비슷합니다. 청색이 107에게 오늘도 폐허로 갈 것이냐고 묻습니다. 107은 그럴 셈이라고 답합니다. 107은 거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더 나아갈 준비를 합니다. 아직 107의 여정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107은 가까운 기둥을 향해 구르고 구릅니다. 몇백 번의 회전을 통해 그곳에 다다릅니다. 낮은 기단들을 살피다가, 그 위로 솜씨 좋게 뛰어올라 기둥 위에 안착합니다. 기둥에는 주인이 있지 않으냐, 고 물으신다면 주인이 없는 기둥도 있습니다. 주변의 큰 기둥에 의해 가려져 골짜기처럼 온종일 그늘이 지는 기둥들은 버려졌습니다. 폐허입니다. 사실, 군락지에는 이런 기둥들이 많습니다. 다른 기둥과 경쟁에 밀려 골짜기를 이룬 곳이 하층과 중층 사이에 부분부분 띠를 이루고 있습니다. 지반이 약한 곳의 흔적입니다. 이곳엔 미처 높이지 못한 기둥과 무리하게 높이려다 무너진 기둥만이 남아 있습니다. 107은 알고 있습니다. 이런 골짜기도 태양의 움직임에 따라 곳곳에 틈처럼 양지가 생긴다는 것을. 양지의 틈은 안전한 기둥의 윗면에 발생할 때도 있지만, 무너진 기둥의 잔해 위에 아슬아슬하게 걸칠 때도 있습니다. 가만히 있어서는 열을 얻을 수 없는 셈입니다. 폐허는 도움닫기를 할 만큼의 공간적 여유가 없어 대개 107의 도약은 제자리멀리뛰기입니다. 이때 107의 높은 반발계수가 유용해집니다. 작은 몸집도 유용해집니다. 뛸 때는 신중해야 합니다. 자칫 골짜기의 벼랑 아래로 떨어질 경우, 충격이 너무 커 탈락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높은 반발계수는 뛸 때는 유용하지만 착지할 때는 유용하지 않습니다. 동선을 잘 고려하며 효율적으로 양지를 찾아가야 합니다. 저장하는 기보다 소모하는 기가 많아서는 안 됩니다. 107은 이제 이 일을 잘 합니다. 점점 능숙해지고 있습니다. 곳곳의 자리에서, 빛을 듬뿍 쬐다 돌아옵니다.

 

일몰입니다. 이제 공들은 담 너머로 돌아갑니다. 들판은 일교차가 매우 커 밤이 오면 공의 열을 모두 빼앗아버립니다. 동쪽에서부터 공들은 철수하기 시작합니다. 107과 청색이 속해있는 무리도 일찍 철수합니다. 사양이 지기 전에 담을 넘어가야 합니다. 모퉁이를 향하는 동안 107은 아직 홧홧한 자신의 몸을 느끼며 부지런히 굴러갑니다. 앞서는 청색의 모습은 오늘따라 유난히 더 파래 보입니다. 가까이 가보니 청색이 다른 공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심각하게 주고받고 있습니다. 기를 많이 모았나? 모으지 못했다. 빛이 없었나? 반 토막 밖에. 그늘이 점점 늘어난다. 큰일이다. 이러다가는 탈락이다. 전부 탈락한다. 107이 불쑥 끼어듭니다. 무슨 일이야.

청색이 말없이 107을 응시하다가 알려줍니다. 기둥이 증축되고 있다고. 107은 그렇지는 않을 거라고, 군락지 안에서 기둥이 건설되는 것을 보지는 못했다고 말합니다. 청색은 고개를 젓습니다.

거기서는 안 보이지.

 


집으로 돌아온 107은 담에서 나눴던 대화를 생각합니다. 군락지에서 정말 기둥이 증축되고 있을지. 아주 고요히 진행되고 있다면 낌새를 알아채지 못할 만합니다. 어느 날 그 기둥들이 골짜기 틈에 스며드는 빛까지 막아버린다면 그때는 107도 정말 곤란해집니다. 알아보고 싶어도 당장 알아볼 방법은 없습니다. 심란함이 쌓이고 쌓여 생각을 끊지 못하는 밤입니다. 107은 불면증을 경계하고 있습니다. 빛도 없는 밤에 잠들지 못하면 기의 낭비가 심해지기 때문입니다. 107은 잠들기로 합니다.

107은 비슷한 꿈을 자주 꿉니다. 새가 되는 꿈입니다. 107은 가금류나 맹금류가 되지 않습니다. 새오리나 가창오리처럼 떼 지어 날아다니는 철새만 됩니다. 107은 언제나 날아가고 있습니다. 어딘가, 여정이 끝나는 곳을 향하는 중입니다. 목적지는 알 수 없으나 옆의 새도 가고 있고 뒤의 새도 가고 있으므로 107도 갑니다. 가는 동안엔 응집합니다. 날 때도, 잠시 내려앉아 쉴 때도 반드시 오리떼 내부로 집요하게 파고들어야 합니다. 포식자를 피하기 위한 행동입니다. 포식자는 바깥에서 침투해옵니다. 가장 바깥 부분에 있는 연하고 약한 것을 잡아 배를 불립니다. 배를 불리고 난 다음에는 더 공격해오지 않으므로 새는 다른 새를 밀쳐내고 깊숙한 곳에 위치하는 게 아주 중요합니다. 왜 다른 새와 함께 포식자에게 대항하지 않느냐고 묻는다면, 그 경우 제국이 세워질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107은 공처럼 사는 것보다는 새로 사는 것이 더 낫다고 여기는지라, 꿈속에서는 새의 방식을 따릅니다.

지금 107은 순하고 얌전한 새입니다. 저번에는 시끄럽고 부주의한 새였다가 무리에서 쫓겨나는 바람에 손쉬운 먹잇감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107은 자신 내부에서 시끄럽고 부주의한 기질을 제외하기로 했습니다. 순하고 얌전한 새가 되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순하고 얌전한 새도 녹록지 않은 점이 많습니다. 107은 다른 새들과 볍씨를 나눴다가 만만한 개체로 찍혀 볍씨를 빼앗기게 되었습니다. 어떤 개체는 107이 볍씨를 먹으려고 머리를 들이밀면 부리로 몸을 찍고 배설물을 뿌려 버립니다. 상처와 역한 냄새는 표적처럼 몸에서 사라지지 않습니다. 볍씨를 먹지 못하자 107의 몸은 야위었습니다. 순식간에 가볍고 얇아졌습니다. 응집한 군체에서 107은 수시로 경계면에 내몰립니다. 107은 교대로 경계와 내부를 순환하기 바라지만, 다른 새들이 그것을 양보하지 않아 소용돌이의 거품처럼 가장자리를 배회할 뿐입니다. 마침내, 날카로운 송곳니와 발톱을 가진 식육목 동물 하나가 억새 사이서 뛰쳐나와 107의 숨을 끊어버립니다.

 


107은 굴 앞에 서 있습니다. 그곳, 소란스럽습니다. 몇몇 공들이 굴의 안과 밖을 오가며 굴을 통과하려는 행렬을 어지럽히고 있습니다. 통상 굴을 통과하는 공들의 흐름은 단순합니다. 직선으로, 한 방향으로 흐르기 때문입니다. 낮에는 들판 쪽으로 흐르고 밤에는 담 안쪽으로 흐릅니다. 공이 굴을 통과할 때, 역류의 움직임을 보이는 공이 있으리란 기대는 상식상 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오늘과 같은 행위를 하는 공이 있을 경우 행렬이 극도로 혼잡스럽게 흐트러집니다. 예기치 못한 기의 손실이 광범위하게 발생하는 것입니다. 빛을 향하던 공들은 혼란에 잠시 당황하지만, 더 큰 손실을 감수하지 않기 위해 일단 움직입니다. 어떻게든 다시 굴을 통과하는 흐름을 만들어 들판으로 갑니다.

정체는 점차 잦아들고 공도 머릿수가 줄자 107은 청색을 발견했습니다. 파장이 짧더라도 밝은 곳에서라면 청색은 눈에 띕니다. 청색은 굴의 안과 밖을 끝없이 유영하고 있습니다. 기를 생산하는 데 있어 전혀 불필요한 동작입니다. 오로지 소모하기만 하는 동작입니다. 107은 청색이 걱정되어 다가가 묻습니다. 지금 뭘 하고 있느냐고. 청색은 대답합니다. 이것은 춤이야. 왜 여기서 춤을 추냐고 107이 묻습니다. 청색은 이곳이 춤을 추는 장소이기 때문이라고 답합니다. 107은 이곳은 춤을 추는 곳이 아니고 통과하는 공간이라고 말합니다. 청색이 그 말을 부정합니다. 나에게는 아니라고.

참, 이기적인 마음이라고 107은 생각합니다. 차마 말하지 못하고 생각만 합니다.

같이 하자고 청색이 권유합니다. 107은 동참하고 싶지도 않거니와 틈에 빠질 위험이 있어 이 춤을 함께 할 수 없다고 에둘러 거절합니다. 그래. 그럼. 107은 이렇게 작별인사를 하고 싶지 않지만, 청색의 춤이 너무 열정적이라 방해할 수 없습니다. 그래 그럼. 인사하고 굴에서 벗어나 매양 하던 대로 담을 따라 구르기 시작합니다.

 

항상 보던 아공들은 담길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들은 청색과 함께 굴에서 춤추거나, 아예 집에서 나오기를 포기한 듯합니다. 107은 무리를 잃어 쓸쓸하고 속상합니다. 어쩐지 평소보다 더 멀고 춥게 이 길이 느껴집니다. 혼자 있는 것이 뭉쳐 있을 때보다 더 많은 열을 뺏기는 듯합니다. 107은 일단 모퉁이를 향한다는 마음으로 모퉁이 외에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기로 합니다. 모퉁이를 동력 삼아 가기로 합니다.

부지런히 구르고 구른 길의 어느 지점에서 107은 담을 통과하는 한 무리의 공들을 발견합니다. 107은 알게 모르게 속도를 올려 그들에게 점점 가까이 붙습니다. 거리가 좁혀지자 그들도 107을 의식했는지 속도를 점차 올리기 시작합니다. 거리가 다시 멀어지면서 107은 내심 서운합니다. 어쩌면 자신이 새로운 구성원이 될지도 모르는데 그들이 말 한마디 나누지 않고 벽을 친 것이 못마땅합니다. 무언의 거부 의사를 밝혔으므로 107은 더 다가가지 않고 적당한 거리서 그들을 쫓습니다. 새로운 동력을 장착한 채 갑니다. 어느새 모퉁이가 등장하고, 107이 환한 감각을 받을 차례입니다. 107은 고양되는 마음으로 모퉁이를 향해 한 바퀴씩 굴러갑니다. 그때입니다. 모퉁이를 도는 앞선 무리 가운데 한 공의 솔기가 느슨하게 풀어집니다. 외피가 헐거워지다 아주 잠깐, 공의 속 재료가 사방에 노출됩니다. 107은 순간 당황하여 구르던 몸을 멈췄습니다. 앞선 무리도 당황하여 허둥지둥합니다.

무엇이었나. 107은 자신의 눈을 의심하며 마저 모퉁이를 돕니다. 환한 감각을 느낄 새는 없습니다. 모퉁이를 돌고 나자 앞선 무리가 다시 보입니다. 107은 솔기가 느슨한 공을 슬쩍 쳐다봅니다. 솔기가 느슨한 공도 107의 시선을 눈치챘는지 107이 있는 쪽을 곁눈질합니다. 107은 눈길을 거둬야 한다고, 의식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럴수록 자꾸 의식하고 바라보게 됩니다. 솔기가 느슨한 공도 마찬가지인 듯합니다. 솔기를 단단히 해야 한다고 의식할수록 솔기가 자꾸 풀어집니다. 속 재료를 보이며 외피가 열렸다 닫히기를 반복합니다. 보다 못한 일행들이 솔기가 느슨한 공을 에워쌉니다. 107이 그를 보지 못하도록 몸을 가립니다. 107은 자신이 앞선 무리의 평화를 해치고 있었음을 깨닫습니다. 당혹스러워 어찌할 바를 모릅니다. 시선을 바닥으로 내리고 전력으로 속도를 올려 그들을, 앞선 공들을 아예 지나쳐버립니다. 자신을 보지 못할 만큼 거리를 벌려버립니다.

 

다시 107은 혼자입니다. 주변에 아무도 없습니다. 빛이 가까워지고 있나. 남쪽으로 들판으로 가는 길인데 체감되는 게 없습니다. 107은 또 솔기가 느슨한 공을 떠올리고 맙니다. 사과해야 했나, 싶지만 그것도 이상하기는 매한가지입니다. 왜 이런 슬픈 일이 벌어졌는지 자조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평범한 일은 아니니까. 107은 생각합니다.

누구나 볼 수 있는 길 위에서 외피가 벌어지는 일은 일상적이지 않으므로. 아무도 그 일을 기대하지 않고, 상상력이 뛰어난 이들도 예상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불쾌의 원인은 비일상적인 희소성에 있나. 하지만 우리는 비일상적이고 희소한 어떤 일들에서 기쁨을 느끼기도 하는데. 예를 들면 누군가 갑작스레 보여주는 묘기에서. 묘기와 외피의 벗겨짐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나. 달성하기 까다로운 조건에 있는지도. 묘기란 아무나 할 수 없고 품이 들어야 하는 문제이지만, 외피의 벗겨짐은 누구나 할 수 있는데 아무도 하지 않는 일이니까. 그것은, 그저 드문 것과 희귀함의 차이일까. 아무도 갖기를 바라지 않는 것과 아무나 가질 수 없는 것. 그러므로 오늘의 일은 내가 아닌 누구라도….

복잡합니다. 107은 애초에 이 모든 문제가 자신이 굴을 통과하지 못하는 공인 탓에 벌어진 일인 것만 같습니다. 차라리 그렇게 생각할 때 마음이 편합니다. 그냥 마음이 그렇게 여기도록 내버려 둡니다.

 

조금 늦었습니다. 빛은 이미 남쪽 하늘로 거의 이동한 상태입니다. 107은 늘 그랬듯이 폐허에서 빛을 쫓아 뛰어다니고 있습니다. 균형을 유지하며 안전하게 착지하기 위해선 제 몸의 알짜힘을 잘 가늠해야 합니다. 107이 스스로 낸 힘과 거기에 더해지는 공기저항, 중력, 그리고 몸의 반발력을 헷갈려서는 안 됩니다. 비거리와 도약 높이, 착지할 지면의 넓이를 충분히 파악해야 합니다. 높은 반발계수는 잦은 운동에 유용하지만, 그만큼 안정성이 없습니다. 여기저기 통통 튀는 공의 운명이란 그렇습니다. 공인 반발계수가 0.6120이라 함은 특정한 실험 지면으로부터 높이 1의 지점에서 공을 자유낙하 했을 때 공이 지면과 충돌하고 다시 0.6120의 높이만큼 올라온다는 뜻입니다. 0이라면 조금도 올라오지 않습니다. 반발계수가 1에 가까울수록, 공은 처음 떨어졌던 높이를 회복합니다.

107은 아직도 원거리 도약에 서투릅니다. 착지점에 도달했을 때 되도록 몸에 힘을 남기지 말아야 하는데 그게 잘 안 됩니다. 남은 힘의 0.6120만큼 반동이 생기기에, 운이 나쁘면 골짜기 밑으로 떨어질 수도 있습니다. 107은 되도록 안전히 짧은 거리를 돌아가는 방식을 씁니다. 그러나 언제나 탈락은 도사리고 있습니다. 107은 탈락에서 멀어지기 위해 탈락에 가까워졌다가 다시 멀어지고 있습니다. 이 기질을 107은 용기라고 부를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이 희생정신과 대담함. 아무나 가질 수 없는 것인가. 나의 보존이 정당하다고 말해줄 수 있을까.

107은 제가 쬐고 있는 빛을 바라봅니다. 이 빛은 아주 끈질긴 빛입니다. 섬유조직처럼 성기고, 수 없고, 겹겹이 이어진 기둥 군락의 틈새를 돌파해 비로소 여기에 고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마지막 빛이기도 합니다. 107이 쬐지 않는다면 버려질 빛입니다. 107은 이제 이 빛을 근심스럽게 보고 있습니다. 어쩐지, 전날보다 조금 줄어든 기분입니다. 실제로 줄어든 것인지 청색의 말 때문에 헷갈리는 것인지 알 길은 없습니다. 명확히 자로 재두지 않았습니다. 만일 청색의 말대로 기둥이 새롭게 세워지고 있다면 107은 불안합니다. 이 폐허의 틈이 완전히 닫혀버릴까 두렵습니다.

어느덧 해는 지고 107은 홀로 귀가합니다. 담으로 가던 중 들판 한 곳에 떼로 뭉쳐 있는 공들을 발견합니다. 그곳은 들판 쪽으로 난 굴의 입구입니다. 들판에서 담 안으로 향하려는 공들이 거기에 모두 모여 있습니다. 107은 사정이 궁금해 가까이 굴러갑니다. 공들은 줄을 서서 굴을 통과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지만, 좀처럼 대기열이 줄어들지 않습니다. 체증이 발생했습니다. 107은 아침에 보았던 청색의 춤을 떠올리고 이 사태도 그 춤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직감합니다. 공들의 면면이 모두 어둡습니다. 빛이 점점 사그라지는 마당에, 담 안으로 빨리 들어가지 못하면 열을 뺏겨 위험해집니다.

줄 속에서 낡고 해진 외피를 가진 공 하나가 107의 눈에 띕니다. 부피와 무게는 1의 공에 부합하지만, 몸을 이루는 질료는 잦은 손상 때문에 반발계수를 거의 다 잃은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아공입니다. 손상된 공은 추위에 떨며 공포에 질려 있습니다. 이미 내부에 기를 거의 다 소모한 듯 보입니다. 어쩌면 이 밤을 넘기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107은 손상된 공을 보며 가만히 서 있습니다. 함께 기를 잃어가는 것 외에 해줄 수 있는 일이 없다는 듯이. 그때, 어디선가 다른 충격이 날아와 107의 몸에 강하게 부딪힙니다. 쿵, 하는 울림이 이어지고 107은 멀리 튕겨 나갑니다. 제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의 충격이라서 다른 공과 몇 번 더 부딪힌 다음에야 겨우 정신을 차렸습니다. 107은 당혹스러움을 감추고 주위를 둘러봅니다. 누군가가 자신과 부딪혔습니다. 자신과 부딪힌 공을 찾아보려 하지만 그 공, 찾을 수가 없습니다. 주위의 공들이 너무 똑같습니다.

107은 자리에 가만히 서서 혹시나 사과하러 오는 공이 있지 않은지 기다려 봅니다. 그러나 아무도 오지 않습니다. 107은 차라리 왜 거기에 멀뚱히 서 있었냐고 따지는 공이라도 와주길 바라지만 역시 아무도 오지 않습니다. 문득 주변에서 자신을 보는 시선이 너무 많음을 107은 느낍니다.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확실히 깨닫지도 못한 채, 황급히 굴 앞을 떠나 담벼락으로 구릅니다.

 


107은 집에 돌아와 잠들기 전에야 그것이 공격은 아니었는지 의심해 봅니다. 공이 많이 붐비는 공간이었다지만, 그렇게 강한 속도로 부딪혀놓고 사과 한마디 없이 사라졌으니. 잠시 뒤 107은 너무 예민한 반응이라 생각하고 애써 머리에서 그 사건을 지워버립니다. 떠올리지 않기로 합니다. 하지만 떠올리자 않으려 할 수록 그 충돌과 시선이 생생하게 머릿속에 펼쳐져 쉽게 떠나지 않습니다. 107은 그 풍경과 사투하며 한참 동안 자신을 어르고 달랩니다. 몇 번을 더 뒤척이고 눈을 뜨고 감고 실패하고 실패한 다음에 잠이 드는 데 성공합니다.

107은 다시 새가 되었습니다. 이번엔 사납고 잔인한 새가 되어 돌아왔습니다. 저번처럼 만만하게 보였다간 끝장이란 것을 107은 배웠습니다. 자신의 내부에서 연민과 동정을 전부 청산해버리기로 합니다. 107은 조금이라도 자신의 자리를 탐내는 기미를 보이는 새라면 날갯짓과 부리 쪼기로 응징해 버립니다. 먹이를 두고 다툴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장 순하고 약해 보이는 개체를 목표물로 정한 뒤 과시하듯이, 다른 새들 앞에서 그 새를 괴롭힙니다. 107의 야만성을 확인한 다른 개체는 107과 다투는 것을 꺼립니다. 자신의 심기를 건들지 않았더라도 107은 유약한 개체를 찾아 괴롭히는 짓을 멈추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누군가는 가장자리에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107이 약한 것을 하나 골라 표식을 남기면 나머지는 다른 새들이 알아서 처리합니다. 집요하게 먹이를 빼앗고 표식을 갱신해 야위게 만든 뒤 가장자리로 보내버립니다.

107은 무리의 중심에서, 양껏 먹이를 포식하는 우두머리가 되었습니다. 남들보다 많이 먹어 몸도 불었고 깃털도 반질반질 윤이 납니다. 하지만 통치는 영원하지 않은 법. 곧이어 어디선가 도전자가 나타납니다. 그것이 날개를 펼치고 가슴을 부풀리며 107을 도발합니다. 107은 즉시 달려가 도전자를 쫓아내려 하지만 만만치 않습니다. 똑같이 응수합니다. 107과 도전자는 한데 엉켜 서로의 몸을 부수고 부숩니다. 이 처절한 사투 끝에 도전자는 107의 부리에 머리뼈가 부서져 참혹히 죽어버립니다. 그러나 107의 피해도 적지 않습니다. 107은 도전자의 머리를 부수는 과정에서 자신의 부리도 부러트리고 말았습니다. 윗부리가 부러져 피부에 매달린 채로 대롱거리게 되었습니다. 그간 107을 따르던 새들이 냉랭한 시선으로 107에게서 돌아섭니다.

새떼가 일제히 하늘로 날아오릅니다. 다음 기착지를 향해 갑니다.

107은 몸을 다쳐 합류하지 못하고 홀로 습지에 남겨졌습니다. 이제 중심도 없고 가장자리도 없습니다. 다시 한번, 풀숲에서 포식자가 뛰쳐나와 107의 숨통을 끊어버립니다.

 


그만둬.

107이 청색에게 말합니다. 또다시 굴 앞에서 한바탕 난리가 벌어진 후입니다. 청색은 물론이고 함께 굴에서 춤추던 공들은 모두 충격에 몸이 너덜너덜해졌습니다. 107은 청색도 안타깝고 다른 아공들도 안타까워 볼 수가 없습니다. 그들은 107이 어제 들판의 굴 앞에서 봤던 손상된 공과 상태가 비슷해졌습니다. 청색은 피로에 갈라진 목소리로 답합니다. 왜. 107이 말합니다. 다른 공들이 우릴 싫어해. 우리를? 그래. 공들은 항상 무언가를 싫어해.

107은 그 말이 틀린 말은 아니라고 인정하면서도, 그게 우리가 되면 곤란하지 않겠냐고 청색을 설득합니다. 청색은 상관하지 않는다, 고 답합니다. 갑갑합니다. 107은 탈락을 앞둔 공을 상대하고 싶지 않습니다. 이렇게 비장하고 단순하고 이기적이고 성가신 존재들은 설득이 어렵습니다. 107은 자신이 들판 앞에서 본 풍경을 말하기로 합니다. 반대편에서 공들이 긴 줄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과 그중엔 희미하게 꺼져가는 불쌍한 공이 있다는 것을. 공들이 심한 피해를 보고 있다고 말합니다. 너로 인해. 그러므로 그들의 분노는 정당한 분노라고 말합니다.

청색은 말이 없습니다. 마음이 복잡해 보입니다. 굴을 오랫동안 응시하다가 대뜸 107에게 저 굴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아느냐고 묻습니다. 107에게 굴은 너무 오래된 존재라 자세히 아는 바가 없습니다. 청색이 알려줍니다. 공들이 몸을 부딪쳐서 만들었다고. 각자의 형편에 따라, 기가 많고 적음에 따라 무수한 공이 무수한 부딪힘으로. 나도 거기에 있었다. 나를 만든 공과 나도 부딪쳤다. 이백 번씩. 107은 청색에게 그렇게 긴 역사가 있다는 사실에 새삼 놀랍니다. 돌벽을 깎는 공의 운동을 상상해봅니다. 얼마나 걸렸을까. 들판으로 가고자 하는 공이 거기 모여서.

약속이었다고, 청색은 말합니다. 돌벽을 넘고 싶은 공은 모두 굴 파기에, 굴 파기에 온 공은 모두 돌벽을 넘어서. 함께 팠는데 저들은 가고 우리는 가지 못해. 왜. 나는 이 약속을 오래도록 이야기했다. 이백 번뿐이지만, 그건 약속이었으므로. 답을 듣고자 애쓰던 중에 나를 만든 공이 먼저 탈락했고, 이제 그의 청색을 닮은 내가 남아서 여전히 답을 들으려고 애쓰는데, 이건 정당한 분노가 아닌가.

저들은 정당하고 나는 정당하지 않나. 아니면 어떤 정당함은 다른 정당함보다 더 정당하냐. 누가 그것을 정했냐. 무슨 기준으로.

 

네 사고와 습성엔 우리와 다른 점이 있어.

107은 담길에 서 있습니다. 도망치듯 굴 앞에서 빠져나왔습니다. 청색이 선을 긋듯 던졌던 말을 곱씹어 봅니다. 너는 우리와 다른 점이. 정확히 특정할 순 없지만 107은 그게 모퉁이와 관련 있다고 추측합니다. 모퉁이를 돌며 환했던 107을 107이 기억합니다. 무리 중 다른 누구도 환하지 않고 오직 107만 환했습니다. 그것은, 더 나빠지지 않는 지점을 믿고 있기 때문일까. 세계는 더 나빠지지 않고 나아지고 있는가. 107은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과학을 믿습니다. 어떤 방식으로든, 공에게 더 이로운 것들이 발견되고 발명되므로 장기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세계는 더 나아진다고 믿습니다. 아니라고 볼 이유가 없습니다. 뭐든, 그런 슬기로운 물건들이 생겨났다는 소식을 매일 듣는데.

너는 저들처럼 말하고 행동한다. 107은 청색의 말 속에 담긴 진의가 이것이라고 짐작합니다. 우리가 아니라 저들. 107은 순순히 그 말을 수긍합니다. 그럴 수도. 그럴 때 107의 마음은 차라리 편해서, 107은 마음이 그렇게 여기도록 내버려 둡니다. 자신은 '우리'와 다른 점이 있고 저들과 더 가까워서 저들의 사고와 습성을 가진 저들의 하나라고. 하지만, 이번엔 안정이 찾아오지 않습니다. 대신 기억 저편에서 다른 공과 구분할 수 없는 공 하나가 날아와 쾅, 107에게 부딪친 다음 어딘가로 사라져 버립니다.

107은 발걸음을 돌립니다. 모퉁이로 가지 않습니다.

 

민원.

간판에는 그렇게 쓰여 있습니다. 전면엔 여닫을 수 있는 유리창이 하나 나 있고 문은 없습니다. 107은 이제껏 이 창구에 와 본 적이 없습니다. 효능이 의심스러워서입니다. 시민의 바람民願을 말하는 작은 문. 듣기에 따라 요술 램프처럼 느껴지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요술 램프처럼 편리하고 위력적이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모두의 바람이 한 데 모이고 모여, 한 사람의 바람은 찌꺼기처럼 보일 만큼 거대하게 부풀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알짜힘과 같은 것입니다. 곳곳에서 발생한 바람은 같은 방향이면 합쳐지고 다른 방향이면 서로 상쇄시키기도 하면서, 때로 어떤 바람은 음수로 만들어가면서, 종국에는 하나의 보편 바람만이 남게 됩니다. 107은 보편 바람과 그다지 사이좋게 지내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창구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달리 찾아갈 곳이 없습니다.

107은 창을 두드립니다. 오래지 않아 창 안의 공이 소환되어 말간 얼굴로 107을 응대합니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107은 굴에서 벌어지는 일 때문에 왔다고 말합니다. 창 안의 공은 이미 그 사안은 충분히 인지하고 있는 상태라고 답해줍니다. ‘인지’라는 단어엔 책임이 포함되어 있어 묘하게 권위도 들어가 있습니다. 107은 잠시 얼어붙습니다. 이 사안에 대해 앎을 인정하고 그 앎에 책임지겠다 밝힌 상대에겐 더 할 말이 없습니다. 107은 궁금합니다. 이 공에게 충분히 인지된 상태란 어떤 상태인지. 107이 보기에 창 안의 공은 청색에 관해, 손상된 공에 관해 아무것도 아는 게 없고 아무것도 책임질 수 있는 게 없는데 어떻게 쉽게 인지라고 말할 수 있는지.

더 하실 말씀은 없나요. 창 안의 공이 재차 묻습니다. 107은 환급을 받을 수 있는지 알고 싶다고 말합니다. 청색이 굴에 몸 부딪힌 이백 번의 운동을 설명합니다. 그러나 돌벽을 넘을 수 없는 공을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운동한 기를 다시 돌려줄 수 있냐고. 창 안의 공은 그럼 잠시, 라는 말과 함께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납니다. 나타나서 선고합니다. 환급은 불가합니다. 증명 수단이 없습니다.

그럼 자구自救는 가능합니까?

창 안의 공은 자리를 비우지도 않고 엄정한 목소리로 다그칩니다. 문명된 공에게 자구는 허락되지 않습니다. 107은 이 문제가 공이 공과 다투는 일이 아니고 공과 세계가 다투는 일인데 어떻게 자구행위에 해당하냐고 따집니다. 창 안의 공이 근거는, 이라고 운을 뗀 다음에 이렇게 말합니다. 이 세계는 이미 공의 것이며 공의 것이 아닌 세계의 일부란 없으므로, 공이 세계와 다투는 일은 곧 공이 공의 소유물과 다투는 일이 되어 사유私有에 대한 침해가 되는바, 자구입니다. 107은 동의할 수 없습니다. 이 규칙들, 내게 허락을 구한 적이 없는 규칙들.

모두 무효로 하겠습니다.

무효 말입니까. 창 안의 공은 다시 자리를 비우고 어딘가로 갑니다. 가서 한참 만에 돌아옵니다. 난감하다는 얼굴로 107에게 답합니다. 무효도, 어렵겠습니다.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습니다.

 


107은 상상해봅니다. 청색은 언제까지 그 자리에 있을지. 그 정당함은 어떤 정당함일지. 충분한 인지는 언제쯤 충분한 인지가 되는지 생각합니다. 아마 곧 광풍에 쓸려가는 낙엽처럼 쓸려갈 것이다, 라는 게 107의 예상입니다. 왜냐하면, 그게 보통이니까. 보통의 집행이니까. 공들은 기뻐할까. 야만이 사라진다면. 그러나 그들이 그렇게 할 때, 야만적인 공들에게 물리적 간섭을 해 그들을 옮길 때, 거기에도 야만이 있을 수밖에 없을 텐데. 단지 포장됨과 안 되었음의 차이만 있을 뿐.

107은 오늘 잠들 수 없습니다. 강제로라도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상관없습니다. 107은 뜬 눈으로 꿈을 꿉니다. 이제야 비결을 알았습니다. 107은 살아남는 최종의 형질을 획득한 새가 되었습니다. 기만하는 새가 되었습니다. 먹이를 두고 다툴 때는 요란하게 성을 내다가도 막상 진짜 도전자가 나타나면 한발 물러섭니다. 약한 것 앞에서 강한 체하고 강한 것 앞에서는 순응합니다. 정복자가 나타나고 찬탈자가 나타나고 다시 찬탈자가 나타나지만 107은 누가 지도자가 되든 신경 쓰지 않습니다. 그가 표식을 찍어주는 개체를 찾아 가장자리로 보내는 일에만 충실할 뿐입니다. 이미 주위에는 그런 새들이 천지입니다. 몰락하는 우두머리와 치워지는 개체 사이에 있을 때, 107은 비로소 완벽하게 안전합니다.

새들이 날아오릅니다. 마침내 107도 함께 비상합니다. 그들의 여정이 끝나는 곳을 향해 갑니다. 오래도록 날고 지치거나 배고플 때만 습지에 내려앉습니다. 비슷한 형질을 가진 개체와 함께 새로운 몸을 빚어가며 변주하고 영생합니다. 끝없이 복종하고 끝없이 살해에 가담하며 이 여정을 이어나갑니다. 어디로 가는지는 여전히 알지 못합니다. 그저 앞의 새도 가고 옆이 새도 가고 있으므로 107도 갑니다. 가고 또 갑니다. 그러다가 어느덧 107은 깨닫습니다. 끝이 없습니다.

너무 끝이 없습니다.

107은 날갯짓을 중단합니다. 비행을 멈출 때가 왔습니다. 107의 몸이 순식간에 부패하기 시작합니다. 깃털이 모두 빠지고 살과 뼈가 썩어 반쯤 액화 된 상태로 지상에 떨어집니다. 이때 107의 반발계수는 0, 완전 비탄성 물체가 되어 지면과 충돌하고는 그대로 지면과 하나가 됩니다. 조금도 튀어 오르지 않습니다.

 


아침입니다. 공들이 구릅니다. 목적지는 빛이 있는 방향입니다. 107은 다시 굴 앞에 서 있습니다. 오늘은 흐름이 원활하여 모든 공이 신속하고 효율적으로 운동합니다. 그 가운데 청색이 남긴 흔적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107은 고목 위에 남은 상처처럼 이 공간에 혼란이 새겨지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없습니다. 깔끔하게 흘러가 버렸습니다. 거대하게 흐르는 군중의 흐름을 보며 107은 희한하게도 이것이 마치 폭포와 비슷하다고 느낍니다. 폭포를 이루는 물방울들은 개별의 의지가 없지만, 이 흐름을 이루는 존재들은 개별의 의지가 있습니다. 물방울의 운동은 오로지 단 하나의 힘, 중력에 의해 작용하지만, 이 존재들의 운동은 각자 하나씩 지니는 내부의 동력에 의해 이뤄집니다. 그럼에도 이토록 질서정연하고 세찹니다. 새삼 107에게 경이를 불러옵니다. 얼굴도 모르고 이름도 모르는 공들이 뭉쳐서 매일 아침 강줄기를 이룸에.

107은 몸의 한 귀퉁이를 아슬아슬하게 흐름의 곁까지 붙여봅니다. 흐름이 만들어내는 옅은 바람이 자신의 몸에 살랑하게 닿습니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바람은 조금씩 더 거세게 몸에 불어옵니다. 이제 한 틈, 그리고 반 틈뿐입니다. 흐름에 실려 가지 않도록 몸에 힘을 주고 버티고 있다는 착각마저 듭니다. 틈에는 분명 좁은 부분이 있고 자신이 건너갈 여지도 있습니다. 107은 그저 한참을 버티고 서서 공들의 면면을 바라보다가, 뒤로 굴러 그곳에서 멀어집니다.

동화同化. 문득 107은 그 말이 무섭습니다.

얼마나 더 닮고 닮아야. 어쩌면 세계는 본디 그런 공간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합니다. 제멋대로 펼치고 찢어졌다가, 다시 뭉치고 누벼 이어져 하나의 공으로 돌아가는 순환. 유일한 일자, 완벽하고 거대한 구로부터 파생되어 조각조각 다른 모상으로 나뉜 뒤 다시 하나의 영원한 구로 돌아가는 흐름. 107은 지금 그 흐름을 보고 있습니다. 단지 우연히 발생하여 지속 가능하다는 이유만으로 지속 중인 이 억지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왜 자신이 이 모든 것을 낯설게 느끼고 있는지 의아해하면서. 아무래도, 반발계수가 너무 높은 탓입니다.

 

 

 

 

* 이 글에서 쓰인 '공인 반발계수' 혹은 '반발계수'라는 단어는 체육 경기 종목에서 공인구의 반발계수를 측정하여 속성 부여한 '그' 반발계수를 의미한다. 물리학에서 사용되는 원 용어 반발계수COR는 항상 물체에 부여된 속성이 아니며 물체의 충돌 전후 상대 속도의 비율을 나타내는 것으로 정의된다. 그러나 실업 체육계에선 공인구의 반발계수를 물체에 부여한 속성으로 표현하는 식의 단어 사용이 광범위하게 퍼져 있어 이 글에서도 같은 의미로 사용하였다. 이 경우, 공인된 실험 지면에서 공을 자유낙하하여 튀어오르는 높이를 재는 '지면 반발계수'의 일종 등을 공인구에 속성으로 부여한다. 그러므로 물리학에서 쓰이는 반발계수와 이 글에서 쓰인 반발계수는 동음이의어로 이해하시길 바란다.

댓글 0
분류 제목 날짜
곽재식 치트키 2023.02.01
노말시티 이번 이월의 이별 2023.02.01
박희종 The animal government 2023.02.01
곽재식 한산북책 2023.01.01
박희종 선택 2023.01.01
곽재식 백투 유령여기 X2 - 자주 묻는 질문(FAQ) 2022.12.01
해도연 우주항로표지관리원의 어느날 30분 2022.12.01
해도연 랄로랑이안 모뉴먼트 2022.12.01
해도연 병범 씨의 인생 계획 2022.12.01
pilza2 허약 드래곤2 2022.12.01
빗물 근처의 꿈 2022.12.01
아밀 그리고 노래하기 시작했다 2022.12.01
박희종 동자신과의 대결 2022.12.01
서계수 종막의 사사 2022.12.01
아이 머리끈 2022.11.30
갈원경 하루의 선택 2022.11.01
박희종 마이클 잭슨이 돌아왔다 2022.11.01
서계수 그렇게 전사는 뻐꾸기를 구하고 2022.11.01
박도은 입맞춤 퍼레이드 2022.11.01
곽재식 우주선 유지 장치 특별 프로그램2 2022.10.31
Prev 1 2 3 4 5 6 7 8 9 10 ... 52 Next

게시물의 무단 전재, 복사, 배포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