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게시물의 무단 전재, 복사, 배포를 금합니다.

김청귤 찌찌레이저 커맨드

2022.03.01 11:5503.01

 

찌찌레이저 커맨드

 

김청귤

수를 비롯한 사람들이 모여 훈련을 하고 있었다. 복도를 뛰어다니고 계단을 기어 올라갔다. 두 명씩 짝을 지어 주먹질이나 발차기를 하고, 상대방을 메쳐 넘겼다. 때로는 다수가 한 명을 둘러싸고 공격하기도 했다. 한쪽에서 강주가 그 모습을 보고 이얍이얍 소리를 내며 어설프게 주먹을 내지르고 있었다.

“하다야 일어났어?”
“응…. 오늘도 다들 훈련하느라 바쁘네.”

“곧 파더컴의 소재지를 알아낼 수 있다니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 준비하는 거지.”
다들 훈련하는데 나만 늦게 일어나서 하품을 하는 게 눈치 보이긴 했다. 그러나 나는 저들과 함께 훈련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됐다. 내 가슴에서는 레이저가 나가기 때문이었다.

K-파더컴은 언제 태어났는지 모를 고대 사람이었다. 몇백 년 전의 사람이 자신을 전뇌화시켜서 계속 자료를 수집하고 백업해서 결국에는 유교 망령이 되었다는 게 가장 그럴듯한 추측이었다. 그러지 않고서야 남자들이 미세한 무게를 알아서 요리가 편해지는 손에서 악력이 강한 손으로 교체하고, 구취를 없애주는 스프레이가 나오는 혀에서 백태가 끼지 않은 붉은 혀로 패션처럼 갈아 끼울 때 ‘여자는 아기를 낳을 수 있는 신성하고 중요한 존재다. 여자가 뱃속에서 열 달 동안 품고 나온 인간만이 순수혈통 인간이다. 발전한 과학기술로 여자가 아기를 더 잘 키울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는 말을 하겠는가.

게다가 순수 혈통에 미친 유교 망령은 아기를 생산할 수 없는 것들은 모조리 틀어막았다. 대표적인 게 인공자궁과 동성결혼, 생활동반자법이었다. 사람의 존재 이유는 오로지 순수혈통 인간 생산에만 있다는 태도였다. 외국으로 도피하고 싶어도 불임이라는 판정을 받거나 완경을 하지 않으면 해외여행도 금지였다. 결혼은 강제하지 않았으나 사회적인 압박이 있었다. 아기는 무조건 두 명 이상 낳아야 했고, 정상가정을 꾸려 아기를 낳으면 많은 혜택이 주어졌다.

그리고 이 아기를 위해서 여자라면 누구나 만 20살이 되면 모두 인공 가슴 수술을 받아야 했다. 아기에게 모유를 원활히 수유할 수 있도록 하는 목적이었다. 수도꼭지처럼 아기가 배고파서 울면 콸콸 나오고 원하지 않으면 한 방울의 낭비도 없게 했다. 미리 젖을 짜서 보관하는 것도 안 됐다. 순수혈통 아기에게는 갓 나온 모유가 최고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와 제일 친한 세희가 인공 가슴 수술에 반항해 도망가려다가 붙잡혀 생일이 지난 후가 아니라 만 20살이 되려는 해에 바로 수술을 받고, 세희와 가장 가깝던 나도 도주 시도가 있을 수 있다며 계속 감시당하다가 만 20살이 되는 날 바로 수술을 받았다. 자기 때문이라며 우는 세희를 달랜 후 안드로이드 의사가 집도하는 수술을 받고 돌아왔다.

집에 와서 물기 있는 손으로 화장실 불을 끄자 찌릿거리는 느낌이 나면서 쓰러지고 말았다. 얼마나 앓았는지 온몸이 땀으로 젖어 있어서 샤워를 하던 중에 가슴을 문지르는데… 찌찌에서 레이저가 나왔다. 왼쪽 가슴을 닦는데 벽에 구멍이 뚫었다. 멍한 정신으로 오른쪽 가슴을 닦자 벽에 구멍이 또 생겼다. 왼쪽 구멍이 약간 내려간 걸 보니 내 가슴이 짝가슴이라는 것도 알았다. 불법 개조를 한 사람은 잡혀가는데, 나는 나라에서 한 수술을 받았는데도 잡혀가나?
노브라로 다니다가 인공 가슴 수술 후 처음으로 브래지어를 하려 했는데 착용하자마자 레이저가 발사돼서 속옷도 못 입고 넋을 놓았다. 어쩔 줄 몰랐던 차에 세희에게 연락을 받고 도망가고, 파더컴에 반항하는 사람들을 만나 여기까지 왔다.

여자의 가슴에 자유를! 인공 가슴 수술에 반대하고 노브라에 찬성하는 사람들이었다. 처음에는 이렇게 시작했으나 활동을 하다 보니 점차 뜻이 맞는 사람이 늘어나서 사랑에도 자유를! 원하는 사람만 아기를 낳을 수 있는 자유를! 하며 외치기 시작했다.
실제로 외치면 잡혀가니까 알음알음 점조직처럼 모여 대화하고 도울 뿐이었지만, 그것만 해도 많은 도움이 됐다. 자유를 원하는 사람이 많을수록 우리가 하는 일이 잘못된 게 아니라는 안도감이 생겼으니까.

그중에서도 찌찌레이저를 쏠 수 있는 나는 안드로이드 경찰도 썰고 건물도 무너뜨리는, 즉시 전력감이었다. 저렇게 사람을 상대하는 운동을 하면 상대방이 죽을 수도 있어서, 해봤자 체력증진을 위해 달리기나 약간의 근력운동 말고는 없었다.

“점심시간에 동구 여자행복센터를 습격할 거야.”
“아침 든든하게 먹어야겠네. 오늘 메뉴 뭐야?”
“해물순두부찌개일 걸?”
“한 뚝배기 하러 가야겠구만. 가자.”

남들이 훈련할 때 나와 세희는 먼저 아침식사를 하고 멍때렸다. 정확히는 나만 멍을 때리고 세희는 동구 여자행복센터와 그 주변을 야금야금 해킹하기 시작했다. CCTV 영상에 찍히지 않도록 하거나 우리가 게릴라를 하는 시간에 아무 일도 없는 영상을 내보내기 위한 작업이었다.

세희는 천재였다. 컴퓨터와 인터넷을 이용하면 누구라도 파더컴에 걸릴 텐데, 세희는 사람들이 만든 중계기를 중심으로 신호를 잡고 우회해 주변 건물들의 아이피를 빌려오는 작업을 몇십 단계로 걸쳐 위치를 절대 들키지 않게 했다. 어떨 때는 살아있는 인터넷 중계기, 파더칩을 심은 남자를 이용하기도 했다. 나는 세희가 하는 일을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세희가 일하는 옆에 가만히 앉아 세희를 바라보거나 책을 읽거나 낮잠을 잤다.
지금도 깜빡 잠들었는지 세희가 날 흔들어 깨웠다.

“얼른 일어나!”
“어, 어어 일어났어….”

잠은 왜 자도 자도 졸릴까. 하품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세희가 준 냉수를 마시고 정신을 차린 후 내 방으로 돌아왔다. 노브라 상태로 다니긴 해도 옷에 구멍이 뚫리면 찌찌만 보이는 건 부끄러웠다. 그래서 출동할 때는 겨울에는 사방에 흑진주가 달린 옷을 입고 여름에는 탈부착 가능한 가슴가리개가 달린 옷을 입었다. 가슴 부분에 나뭇잎이나 조개 모양의 천을 덧대어 팔랑팔랑 흩날리다가 전투를 할 때는 목 뒤로 묶어 고정이 가능한 스타일이었다.

우리를 응원하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안심이 되는 건 이런 이유도 있었다. 흑진주 달린 옷을 입으면 누가 봐도 나라는 걸 알 수 있었는데, 나를 못 찾게 하려고 자발적으로 흑진주 달린 옷을 입을 사람들이 늘어났다. 조개옷, 나뭇잎옷도 마찬가지였다. 그 틈에 브래지어를 벗는 사람들이 늘어났다고도 들었다.

나와 함께 여자행복센터로 갈 사람들도 모두 가지각색의 가슴가리개 옷을 입었다. 사슴이나 고래 무늬인 가리개도 있었는데 꽤 예뻤다. 가는 동안 어디 쇼핑몰에서 샀느니, 어디 브랜드는 자체 로고를 사용해 만들었는데 깔끔해서 좋았다느니 하는 수다를 떨었다. 나는 구석에 앉아서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책장에 있는 아무 책이나 뽑아 책을 읽었다. 사람들은 시간차를 두고 아지트를 나섰다. 나는 마지막의 마지막에 나가야 해서 늘 혼자 남았다. 무슨 내용인지 하나도 이해되지 않는 책을 대충대충 넘기다가 얼추 시간이 됐을 무렵 아지트를 나섰다.

아지트는 지하도로 사방으로 연결된 백화점에 있었는데, 하도 오고 가는 사람이 많아 누가 불순분자이고 누가 평범한 시민인지 알 수 없을 정도였다. 지금 나간 사람들도 다 백화점 손님인 것처럼 매장을 구경하다가 하나둘 행복센터로 이동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다른 사람이 실수로 가슴 부근을 치기만 해도 레이저가 나가기 때문에 사람이 너무 많으면 위험했다. 내가 갈 수 있는 곳은 지하주차장과 연결된 뒷문이었다.

오늘의 차는 H4라인에 있었다. 근처로 가자 그 라인 중 한 차가 라이트를 깜빡이고 클락슨을 가볍게 빵 눌렀다. 나는 자연스럽게 뒷좌석에 앉았다. 원칙상 안전벨트는 전 좌석 모두 해야 하지만, 운전석과 조수석을 신경 쓰지 뒷좌석까지 했는지는 신경 쓰지 않았다. 나라고 안전벨트를 안 하고 싶은 건 아니었으나 까딱하면 레이저가 발사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라디오에서는 지나간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속으로 흥얼거리다 보니까 어느새 동구 여자행복센터 근처였다. 차는 나만 내려주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천천히 걸어서 안으로 들어가자 안드로이드 직원이 창구에 앉아 사람을 응대하고 있었다. 안드로이드는 사람과 다르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이목구비가 없는 동그란 구형을 달고 있었다. 이마 부분에 달린 카메라로 상대방을 보고 목에 달린 스피커로 대화를 했다.
눈에 익은 사람이 군데군데 보였다. 신호를 주면 아마 각자 근처에 있는 안드로이드를 향해 돌진할 것이다. 나도 번호표를 뽑고 의자에 앉았다.

여자행복센터는 생리대, 소개팅, 결혼, 임신, 육아 등 여자에 관련된 일이라면 뭐든지 담당하는 곳이었다. 지원금을 주기도 하고 도우미를 보내기도 했다. 이런 기관이 있어서 좋기는 하지만, 글쎄. 아기를 낳게 하기 위해 존재하는 곳이라는 걸 알려주듯 완경을 겪으며 괴로워하는 여성들은 전혀 돕지 않았다. 임신과 육아로 인해 몸이 망가져도 병원비의 일부분 혹은 전체를 도와주긴 해도 인공신체로 교체해주진 않았다. 완경하기 전까지는 또 아기를 낳을 수도 있으니까.
안 그래도 30대로 보이는 여성이 직원 앞에서 사정을 하고 있었다.

“제발 수술 날짜 좀 잡아주세요. 가슴에 있는 것 좀 빼달라고!”
“수술은 완벽합니다.”
“스치기만 해도 아파 미치겠다고! 너희들이 수술한 가슴이 불로 지진 것처럼 뜨겁다가도 냉수에 처박힌 것처럼 시려 온단 말이에요!”
“수술은 완벽합니다. 처리 불가능한 일을 계속 요청하신다면 보안요원을 부르겠습니다.”

안드로이드는 틀리지 않는다. 실패하지 않는다. 그러나 간혹 이물감을 느끼는 사람도, 고통을 느끼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파더컴은 책임지지 않는다. 그건 개인의 아주 사소한 일이기 때문이다. 나는 신호가 오기 전에 가슴을 가리는 천을 들어 목 뒤에 묶고 여자에게 다가가는 안드로이드 보안요원을 향해 가슴을 툭 쳤다. 그러자 하얀색 레이저가 시원하게 발사되며 보안요원의 가슴에 구멍을 냈고, 보안요원은 작동을 멈췄다.

“찌찌레이저다! 다들 잡아!”

삐삐삐 하는 경보음이 울리며 안전차단문이 내려가기 시작했다. 우리가 한 짓에 대해 뉴스나 라디오로 떠들지 않는다고 해도 알음알음 알려지는 게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놀라지 않고 차분하게 한쪽으로 대피했다.

“이제는 사람 이름도 안 부르냐? 나는 강하다다!”

파팡! 가슴을 두 번 두드려서 다가오는 보안요원들을 공격했다. VR 총게임으로 거리 감각과 공격 방향을 익힌 게 아주 많은 도움이 되었다. 동지들은 각자 안드로이드를 공격했다. 총 같은 무기는 어차피 양쪽 다 없었다. 팔목에 철판을 덧대 방어하는 사람, 강화한 비비탄으로 카메라를 깨는 사람, 뾰족한 송곳으로 관절 부위를 찍어 회로를 파괴하는 사람 등 각자의 방식으로 싸우고 있었다. 창구직원도 안드로이드라 숨는 게 아니라 공격을 위해 데스크를 넘었는데 갑자기 움직임을 멈추고 가만히 서 있었다.

“해킹 성공이다!”

수지가 동구 여자행복센터의 중앙 시스템 컴퓨터에 세트롬을 꽂는 걸 보고 멈춰 있는 안드로이드에 가까이 다가가서 하나하나 파괴했다. 일시적인 해킹은 가능해도 파더컴이 원하는 대로 프로그래밍 되어 있는 안드로이드를 온전한 우리편으로 만드는 건 아직 불가능했다. 그래서 지금은 파괴하는 게 최선이었다. 내려갔던 차단문도 다시 올라가고 있었다. 얼른 다 파괴하고 빠져나가지 않으면 경찰들이 몰려와서 일이 귀찮아졌다.
나는 재수술을 원하던 여자 근처에 있던 안드로이드까지 파괴하고 다음으로 넘어가려고 했는데, 여자가 날 불렀다.

“강하다님… 맞죠?”
“아, 네.”
“정말… 정말 파더컴을 없앨 수 있어요?”
“그러려고 노력 중이에요.”
“꼭 그럴 수 있을 거예요. 그렇게 해주세요. 제발 부탁드려요.”

여자는 몸에 달라붙지 않는 펑퍼짐한 티에 아주 얇은 천으로 만든 꽃잎 모양의 가슴 가리개가 달린 옷을 입고 있었다.

“이름이랑 주민등록번호 알려줄 수 있어요? 이상한 걸 하려는 게 아니라….”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여자가 이름과 주민등록번호를 말했다. 나는 이유를 더 말하기보다는 여자의 말을 스마트시계에 기록했다.

“다 끝났다! 철수!”
“내일이면 약국에서 진통제를 살 수 있을 거예요. 병명은 손가락 미세골절. 진통제 없이는 일을 못 하겠다고 해둘 테니까.”
“고마워요….”
“꼭 제거 수술할 수 있게 해드릴게요.”

눈물을 뚝뚝 흘리는 여자를 뒤로 한 채 재빨리 빠져나갔다. 여자행복센터에 있던 사람들도 우리를 숨겨주기 위해 다 함께 우르르 나가서 사방으로 흩어졌다.
나는 버스정류장으로 가서 곧 도착한다는 버스를 기다렸다. 동구 여자행복센터를 중심으로 있는 버스정류장에서도 나처럼 옷을 입은 사람들이 버스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몇 번 환승하고 지하철 화장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다시 돌아다니다 아지트로 돌아가면 된다.

버스에는 사람이 많았으나 최대한 등을 말아서 혹시라도 가슴에 어떠한 접촉도 있지 않도록 했다. 그 바람에 뒤에 있는 사람의 가슴에 내 등이 닿기는 했는데 어쩔 수 없었다. 똑바로 서 있다가 버스가 갑자기 출발하거나 멈춘다면 레이저가 발사될 수도 있었다.

그런데 이 변태 새끼는 이걸 어떤 신호로 알아들었는지 내 등에 손을 올렸다. 브래지어를 착용하고 있으면 등을 가로지르는 무언가가 있어야 하는데 아무것도 만져지지 않으니 등짝을 더듬거렸다. 하지 말라는 듯 가볍게 등을 털자 손이 떨어졌다. 아무래도 다음 정거장에서 내려 다른 버스를 타야 할 것 같았다. 다행히 창가에 서 있던 사람이 내리면서 앞에 아무것도 없었다. 의자에 앉아 있는 할머니와 눈이 마주쳐서 살짝 웃었는데 변태 새끼가 내 가슴에 손을 올렸다. 당연히 레이저가 발사되면서 변태 새끼 손에는 구멍이 뚫렸고, 버스 창문에도 구멍이 뚫렸다.

“으아아아!”

할머니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재빨리 내림 버튼을 눌렀다. 때마침 버스정류장이었던 터라 문이 열렸다. 한 남자가 내 손을 잡아당기고, 다른 사람들은 나를 밀어내며 뒷문으로 우르르 내렸다. 남자는 자신의 팔에 팔짱을 끼게 하고 포니테일로 묶은 내 머리를 풀고 머리카락으로 가슴을 가려주었다. 내 몸에 닿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머리카락만 정돈해주는 손길에서 왠지 모를 서글픔이 느껴졌다. 흰머리가 희끗희끗해서 남들이 부녀처럼 보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가리개에 구멍이 났습니다. 옷부터 사서 갈아입죠.”

우리는 옷가게로 들어갔다. 전면유리창 너머로 경찰차가 출동하는 게 보였지만 여유롭게 이 옷 저 옷 대보며 쇼핑을 했다. 내가 사려고 했으나 남자는 기어코 자신이 계산했다. 가게를 나와서 버스정류장을 향해 걸어가는데 스마트워치에 알람이 왔다. 소동이 일어난 걸 알았는지 근처에 차를 준비했다는 연락이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세희가 알려준 차량 번호를 단 하얀색 차가 서 있었다.

“도와줘서 고맙습니다.”
“꼭, 꼭 승리해주세요. 내 딸을 찾을 수 있도록….”
“네…. 꼭 승리할게요.”
이름 모를 남자의, 아비의 배웅을 뒤로 한 채 차를 타고 아지트로 향했다.


오늘 함께 행동한 동지들이 아직 돌아오지 않았지만, 다른 곳에서 활동하는 동지들이 모여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미 한바탕 싸웠는지 몇몇 사람의 얼굴이 붉었다. 속이 타는지 물을 벌컥벌컥 마시는 사람도 있었다.

“우리가 왜 싸웠는지 아세요?”
“그….”

서구지부장은 내가 대답하기 전에 말을 이었다.

“제발, 제발 얌전히 있으면 안 돼요? 이제 우리끼리 행복센터 하나쯤은 처리할 수 있어요!”

그 말은 맞았다. 초반에는 내가 유일한 무력담당이라서 혼자 가슴을 타다닥 두드리며 레이저를 쏘며 날뛰었다. 다른 이를 구할 수 있을 만한 능력은 아니라서 혼자 다 때려 부수고 난장판이 된 곳에서 벗어날 때만 다른 사람의 도움으로 숨고 대문으로 들어갔다가 뒷문으로 나오며 피해 다녔다.

동지들이 점점 늘어나고 그 사람들이 수 언니의 도움을 받아 훈련을 한 끝에 무기 없이도 안드로이드에게서 자신을 지킬 수 있게 되었다. 게다가 도와주는 사람들이 나이, 성별 상관없이 늘어나면서 알리바이도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당연하게도 여자가 가장 많은데, 일을 일으키는 모든 여자를 잡아 가둔다면 임신할 여자가 없기 때문에 관련자를 전부 처벌할 수도 없었다.

백화점에 자리를 잡은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백화점 사장님은 본인이 여자라서 우리를 후원하는 것도 있었고, 파더컴도 많은 돈을 벌어들이는 백화점을 확실한 증거 없이 강제로 헤집고 다닐 수는 없었으니까. 사장님도 그 자리까지 올라가기 위해 많은 일이 있었을 터였다. 게다가 비공식적으로는 인공 가슴 수술 때문에 불임이 된 케이스였다. 아기를 가질 수 없자 당연하게도 남자 쪽에서 이혼을 원했고, 지금까지 혼자 지내셨다. 아마 수술이 아니었다면 아기를 가질 수도 있었을 터였다. 그러나 보다 더 건강한 아기를 위해서라면 그 정도 부작용쯤은 덮어버릴 수 있는 게 파더컴이었다. 나라에서 하는 공동 육아를 통해 자라난 사장님은 단란한 가족을 꿈꿨기 때문에 더욱 더 파더컴에 원한이 깊었다.

안드로이드는 사람 손으로 파괴하거나 해킹으로 정지시키는 게 가능했으나 파더컴은 아닐 터였다. 강한 화력이 필요한데 그게 바로 나였다. 파더컴을 찾더라도 내가 잡히면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내가 열쇠이자 희망인 것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내가 안전한 곳에 얌전히 있기를 바랐다. 자신들이 잡히더라도 나만은 무사하기를. 그래야 미래를 도모할 수 있으니까. 파더컴만 없애면 잡혀있던 자신들이 풀려날 수 있었으니까.

이런 의견을 반대하는 사람도 있었다. 내 자유를 옹호하는 사람이 훨씬 더 많았다. 우리가 무엇을 위해 싸우고 있느냐. 대를 위해서 소를 희생하는 건 충분히 당해왔다. 그런 말을 하며 조목조목 반박했다. 둘 다 맞는 말이었으나, 후자의 의견이 더 우세했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정말 파더컴의 위치를 알 수 있는 게 당장 오늘일지, 내일일지 아무도 몰랐다. 이런 순간에 내 정체가 탄로 날 뻔했으니 동지들의 가슴이 철렁한 건 이해할 수 있었다.

“저는….”

그때였다. 닫혀있던 문이 열리며 세희가 들어왔다. 세희는 눈을 부릅뜨고 방 안에 있는 사람들의 눈을 하나하나 바라보다 내 옆에 다가왔다. 들어왔을 때와 달리 내 마음이 상하지 않았을까 살펴보는 눈빛에 애써 웃었다.

“그건 사고였어요. 알아보니 어떤 새끼가 세주의 가슴을 움켜쥐었다고 하더군요.”
“뭐라고? 어떤 새끼야? 세희야, 그 새끼 얼굴 땄어?”
“주소도 알아냈지? 그런 놈은 조져놔야 하는데.”

순식간에 화제가 그놈한테 쏠렸다. 남자들은 자유자재로 신체를 교체할 수 있었는데 꼭 머저리 같은 놈들이 범죄에 이용할 수 없을 법한 걸 장착해 기발하게 사용하고는 했다. 혹은 너무 잦은 교체 때문에 오류가 나서 손이 멋대로 움직였다고 하거나.
내 가슴을 움켜쥔 변태 새끼에서부터 자신들이 지금까지 만난 개새끼들에 대한 성토대회로 변했다. 세희는 나를 잡아당겨 방에서 함께 나왔다. 세희의 방으로 들어가자 거기에는 강주와 수 언니가 있었다.

“하다 이모!”

수 언니의 품에 안겨 있던 강주는 언니에게 내려달라고 한 뒤 나에게 달려왔다. 사람의 품에 안겨 있기 좋아하고, 언제나 안아달라 조르는 강주였지만 나에게만은 하지 않았다. 그저 내 다리에 착 달라붙어 머리를 쓰다듬어 달라고 눈을 반짝였다.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예쁨이라는 걸 아는 듯이 말이다.

침대 위에 앉아 강주가 내 무릎을 베고 눕고 내 손을 자신의 머리에 올려놨다. 나는 웃으면서 강주의 머리를 쓰다듬고 볼을 매만졌다. 아기의 볼은 어쩜 이리 보드랍고 말랑거릴까. 머리카락 한 올 한 올 사랑을 듬뿍 받아 윤이 나는 것 같았다. 볼을 콕 찌르자 강주가 까르르 웃는다. 이 아이는 나를 왜 이렇게 좋아해 주는 걸까. 자신을 낳은 수 언니보다 나를 더 좋아하는 거 같아 신기하기만 하다. 울고 있을 때, 달리다가 넘어졌을 때, 기분이 너무 좋아서 웃을 때도 마주 안아주지 못하는 나인데. 찌찌에서 레이저가 나가는 모습이 만화에서 나오는 주인공같이 보여서 그런가? 킥킥 웃으며 강주를 쓰다듬고 있는데 세희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고개를 들어보니 연희도 수 언니도 내 눈치를 보며 말을 고르고 있었다.

“나 여기 있을게.”
“하다야….”
“강주도 여기 있는데 나라고 왜 못 있겠어. 강주랑 맛있는 것도 먹고 책도 읽고 만화도 봐야지.”

수 언니와 강주는 여기 사람이 아니었다. 수 언니가 임신한 채 웜홀에 빠져 여기로 넘어오고, 임신한 여자를 보호해야 한다는 명목으로 끌고가려는 안드로이드 경찰들과 싸우는 모습을 보고 구해준 뒤로 해방단체에 속해 함께 일하고 있었다. 원래 세계에서 군인이었던 덕분에 훈련 커리큘럼을 짜고 사람들을 봐준 것도 다 수 언니였다. 실제로 싸우지는 않더라도 무력이 있다는 건 여자들에게 큰 자신감을 주었다. 해방단체가 이렇게 커진 건 수 언니 덕분이기도 했다. 수 언니는 아지트 밖을 자유롭게 다닐 수 있었으나 강주는 아니었다.

어린이라면 모두 학교에 입학해야 했다. 특별한 아이라면 파더컴에서 특별관리대상이라며 따로 데려갔다. 보상이 있긴 했지만 보상보다 아이를 돌려달라며 울부짖는 부모가 더 많았다. 데려가서 특별한 일이 없다면 평생 보지 못한다는 것도 있었지만, 기적적으로 돌아온 아이가 자신의 아이가 아닌 것 같다는 말도 있었다.
강주에게는 초능력이 있었다. 노래를 부르면 용기나 활기를 북돋아 주는, 마치 게임 속의 음유시인 같은 능력이었다. 파더컴이 알면 잡아가는 건 정해진 일이었다. 잡아가서 사람들을 선동하는 일에 강주를 쓰겠지.

“진짜? 하다 이모, 강주랑 있을 거야?”
“물론이지!”
“헤헤, 강주는 하다 이모가 제일 좋아!”

자유를 뺏겼다고 생각하지 말자. 이보 전진을 위한 일보 후퇴라고 생각하자. 아니, 이것도 아니다. 파더컴을 파괴하면 그 에너지로 수 언니와 강주를 원래 세계로 보내야 한다. 이건 웃으면서 보내주기 위해 행복을 채우는 시간이다. 강주가 입을 크게 벌리고 웃을 때마다 달콤한 초콜릿 냄새가 방안을 가득 채우고, 강주가 흥얼거리는 노래가 슬픔을 잠재우고 해낼 수 있다는 용기를 채워 넣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위해 싸우지만, 거기에는 수많은 사람이 함께 하고 있었다. 수술의 부작용으로 고통받는 사람도, 나라에 자식을 빼앗긴 사람도, 학교에 마음대로 갈 수 없는 아이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할 수 없는 사람도.
세희가 내 옆에 앉아 내 손을 잡고 쓰다듬다가 손깍지를 꼈다. 빈 곳 하나하나에 얽히는 손가락이 안정감을 줬다. 우리는 성공할 것이다. 내가 그렇게 만들 테니까.


드디어 파더컴의 본체 위치를 찾았다. 강을 끼고 있는 초고가의 아파트 밑에 있는 지하공간이 파더컴의 본거지였다. 누가 자기 아파트 밑에 유교망령이 있다고 생각했을까. 위치를 알자 사람들이 수런거렸다. 그중에는 그 아파트에 거주하는 백화점 사장님도 있었다.

“파더컴을 없앨 수만 있다면, 아무리 비싼 아파트라고 해도 상관없어요. 레이저로 시원하게 무너뜨리죠.”
“거기 사는 사람들도 과연 사장님처럼 생각할까요?”
“노블리스 오블리주. 그동안 많이 벌었으면, 감내해야 할 건 감내해야죠.”

단호한 사장님의 말씀에 모두 감명을 받았는지 박수를 쳤다. 우리는 모두 한마음 한뜻이 되어 아파트로 조심스럽게 향했다. 거리에서 안드로이드 경찰을 만난다면 일반 시민들도 휘말릴 수 있기에 몇 명씩 조를 짜서 이동했지만, 드디어 끝이 보인다는 생각에 흥분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나는 나인 걸 알아차릴 수 없도록 파마를 한 상태였다. 바지만 입고 다니다가, 챙이 넓은 밀집모자를 쓰고 무릎 아래로 내려오는 원피스도 입었다. 가슴가리개라는 티가 나지 않게 가슴에 프릴이 잔뜩 달린 원피스였다. 레이저를 쏠 때마다 프릴을 제끼거나 구멍나는 걸 감수하고 쏴야 했다. 아래가 휑 한 게 허전하긴 했지만, 저번에 버스 사건 이후로 때때로 경찰이 검문을 한다고 하니 어쩔 수 없었다.

백화점에서 아파트까지 20분 거리였다. 나는 혼자서 백화점에서 화장품을 구경하다가 향수를 하나 샀다. 손바닥만 한 종이가방을 달랑달랑 들고서 명품 원피스를 입고 명품 샌들을 신고 걸으니 초고가 아파트 주민이 산책 삼아 백화점까지 왔다가 마음에 드는 걸 사서 돌아가는 모습 같았다.
후덥지근한 여름 바람이 불 때마다 코끝에서 살랑살랑 매장에서 시향한 향수 냄새가 느껴졌다. 시트러스 계열의 향수는 무거운 발걸음을 한층 가볍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렇게 가벼운 발걸음으로 간 아파트에서는 사람들이 대치 중이었다.

“이 아파트가 무너지면, 당신들이 물어낼 거예요? 아니잖아요.”
“아파트 무너질 일 없어요.”
“그 말을 어떻게 믿어요? 대출 갚으려면 한참 남았어요. 전 못 나가요.”

폐쇄적인 아파트 입구를 아파트 주민들이 막고 있었다. 아파트 주민들의 말도 이해는 갔다. 그동안 내가 갔다 하면 이것저것 많이 파괴되긴 했었다. 그렇지만 파더컴 본체가 있는 곳인데 그렇게 쉽게 무너지게 설계했을까? 폭탄이 떨어져서 아파트가 다 무너져도 지하는 멀쩡하게 만들어 놨을 것이다. 그래도 혹시 몰라서 사람들을 대피시키려고 한 건데, 거기서 오해가 발생한 것 같았다.

주위에서 구경하던 몇몇 사람들은 아파트 후문을 향해 슬그머니 이동하고 있었다. 배달 오토바이를 타고 있던 사람이 욕을 하며 비켜달라고 하자, 길을 막고 있던 사람들은 교양 없이 욕을 한다며 화를 내면서도 오토바이만 지나갈 수 있게 공간을 비웠다. 오토바이 뒤를 따라 바로 들어가려던 사람이 가로막는 팔에 나뒹굴고 말았다.

“괜찮아요? 이봐요, 그렇다고 사람을 치면 됩니까?”
“가슴이 아파요….”

넘어진 사람도 가슴 수술의 부작용을 겪고 있는지 넘어질 때 몸이 울리면서 통증이 심해진 것 같았다. 모여있는 사람들이 가해자를 노려봤다. 가해자는 당황하다가 얼굴색을 바꿔서 뻔뻔하게 말했다.

“완벽한 수술인데 뭐가 아프다고 그러는지. 그거 다 정신력이야. 나약하니까 있지도 않는 고통을 호소하는 거지. 솔직히 가슴 수술 그거 뭐 별거야? 하는 김에 가슴도 크게 하면 본인도 예뻐져서 좋고 남편도 좋아할 거 아니야.”
“맞습니다. 집에서 살림하고 애나 보라고 나라에서 돈도 주잖아. 얼마나 좋아? 남자들은 바깥일 하느라 얼마나 고생하는지 댁들이 압니까? 아, 뭐. 사장님은 아시겠지만, 요즘 여자들은 아기만 잘 낳으면 인생 풀리잖아요. 그쵸, 애기 엄마?”

남자 둘이 주거니 받거니 하며 낄낄거리다가 임신한 여자에게 동의를 구했다. 해방단체에 소수의 남자도 있듯이, 현상유지를 원하는 쪽에도 여자가 있긴 했다. 아기를 너무 사랑하거나, 아기를 이용하려고 하거나.

“저도 뭐…. 아기 낳으면 베이비시터 구해서 키운 다음에 개월 수 차면 바로 행복양육센터에 보낼 거예요. 요즘 여자들은 임신 안 하려고 수 써서 큰일이라니까요. 인공 가슴 수술만 해주면 뭐해요, 결혼을 해야지!”
“그래. 아기 키우기 힘들면 나라에서 공동육아로 키워주잖아. 그냥 숨풍숨풍 낳기만 하면 되는 거 가지고 왜들 소란을 피우는 건지. 뭐, 사장님은 아기 낳는 기쁨을 몰라서 거기 있는 건가?”

저런 사람 아래서 자라는 것보다 나라에서 키워주는 게 아기한테 더 나을지, 불행할지 모르는 일이었다. 나는 불행했다. 엄마의 사랑을 원했으나, 엄마는 나를 원하지 않아서 24시간 내내 돌보는 양육센터에 보냈다. 그곳에서 세희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나는 말라비틀어졌을 것이다.

파더컴은 아기의 정서발달을 위해 최소 36개월은 엄마가 하루종일 붙어있어야 한다고 정했다. 그 이후로는 나이에 따라 양육센터에 정해진 시간만 맡길 수 있었다. 그러나 갓난아기일 때도 양육센터에 보낼 수 있는 방법이 있긴 했다. 돈을 내거나 아기에게 해를 끼칠 수 있을 것 같다는 판정을 받거나 다시 임신을 하거나.
그러니까 원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임신하지 않을 자유가 있어야 했다.

“신고하기 전에 그냥 가세요. 아기를 품을 수 있는 몸이니 소중히 해야죠.”
그때였다. 아파트 단지 내에서 요란한 경보음과 함께 사방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불이다!”

비명과 함께 사람들이 도망쳐 나오고 있었다. 불법으로 개조했는지 한 남성이 유리창을 깨고 부스터를 켜 땅으로 하강하고 있었다. 깨진 창문 뒤로 여자가 자기도 데려가 달라며 소리치고 있었다.

“무게 제한 있어서 안 돼! 그러니까 평소에 살 좀 빼라고 했잖아!”

아마 누군가 들어가서 연기만 피운 것 같았다. 동지들끼리 눈이 마주치고 도망 나온 사람들을 거슬러 안으로 들어갔다. 이렇게 소란을 피웠으니 안드로이드 경찰과 소방관들이 밀려올 터였다. 그 전에 해결해야 했다.
미리 알아둔 길을 통해 지하의 지하로 내려갔다. 막혀있는 문은 당연히 내 찌찌레이저로 뚫었다. 파바바박 발사해서 구멍을 마구잡이로 뚫고 힘주어 미니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환한 불이 켜진 긴 통로를 달리자 다른 여러 통로와 이어진 공동이 나왔다.

“세희야, 어디로 가야 해?”
“정면 복도에서 오른쪽으로 두 번째야!”

평소라면 세희는 아지트에서 컴퓨터로 우리를 보조하고 있겠지만, 오늘은 파더컴을 박살내는 날이었다. 본체는 내가, 데이터는 세희가 맡아서 없애야 했다.
그곳으로 달려가려는데 갑자기 다른 통로에서 사람들이 쏟아졌다. 아니, 사람이 맞나…?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는데 생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눈동자에 초점이 없는 사람들이 우리는 둘러싼 채 가만히 서 있었다.

“잠깐만. 저 사람은 10년 전에 천재라고 방송에 나왔던 남자애잖아!”
“수영 금메달리스트도 있어! 병으로 죽었다고 했는데…?”
“진짜 사람이야!”
“그동안 파더컴이 사람들을 납치하고 있던 거야?”

벼락같은 깨달음에 정신이 멍해질 정도였다.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음모론이 있었다. 파더컴이 순수혈통 인간에 집착하는 이유는 기계몸을 벗어던지고 100% 순수한 인간이 되고 싶어서가 아닐까 하는…. 그래서 여자에게 강제로 아기를 낳게 하고, 문제없는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정서가 잘 발달할 수 있도록 엄마와 아기를 밀착시키고, 특별함을 판별하고 잘 키우기 위해 육아센터를 만든 게 아닌가. 그러지 않고서야 엄마의 중요성을 외치는 파더컴이 왜 공동육아 같은 걸 하겠냐. 그런 말들이 있었다.

신빙성이 있는 말이었다. TV에 자주 나오던, 뇌 빼고는 모조리 인공 장기, 배양한 인공 피부, 인공 뼈로 교체한 국회의원이 자리에서 물러나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 대신 그 국회의원의 아들이 아주 활발하게 활동했는데, 국회의원과 같은 말투나 버릇이 무의식적으로 나온다는 말이 돌고 있었다. 본인 DNA를 바탕으로 외모를 커스텀한 건지 외양도 그 국회의원의 상위 버전이었다. 어쩌면 정말로 파더컴이 본인을 위해 많은 이들로 실험을 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까지 오다니 대단하군.”

천장에 달린 스피커를 통해 파더컴이 우리에게 말을 걸었다. 안드로이드는 명령이 내리기 전까지는 가만히 있겠다는 듯 차렷 자세를 유지했다.

본체는 컴퓨터일 게 분명한데 목소리는 아주 깊은 동굴 속에서 말하는 듯한 매력적인 저음이었다. 듣기만 해도 임신할 것 같은 목소리라며 뿌듯해할 것 같다는 생각에 소름이 끼쳤다. 어떠한 생체반응까지 일으키는지 심약한 사람이었다면 정말 몸이 저릿저릿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여기까지 온 우리는 정예 중의 정예였다. 그것과 별개로 듣자마자 짜증 나서 찌찌레이저를 쏠 뻔했다. 세희가 말리지 않았다면 발사됐을 것이다.

손가락을 척 뻗어서 사방을 가리켰다. 스피커에서 비웃는 소리가 나왔지만 상관없었다. 결국 이기는 건 우리가 될 테니까.

“K-파더컴. 아니, 유교망령.”
“망, 망령?!”
“그래, 이 유교망령야. 네가 여유를 부릴 수 있는 것도 이제 끝이다.”
“하, 그동안 너희 같은 것들이 없는 줄 알았나? 그동안 수많은 것들이 자유를 달라며 소리쳤지. 자유, 자유! 내가 너희들에게 많은 걸 바랬나? 너희들은 일하지 않아도 먹고 살 수 있다. 그저 임신을 하고 건강한 아기를 낳고 잘 키우기만 하면 되는데 왜 싫다고 하는 거지? 여자는 아기를 낳기 위해 태어났잖아!”

그러자 뒤에 있던 할머니가 벼락처럼 소리쳤다. 아기를 임신하는 동안 건강이 급격히 안 좋아졌지만 악으로 이겨내고, 아기가 등을 바닥에 대려고 하지 않아 늘 업고 다니면서도 온마음을 다해 아기를 사랑했던 분이라고 들었다.

“그럼 키우는 기쁨을 느끼게 했어야지, 다 자란 아이를 볼 수 있게 해줘야지. 내 아기를 돌려줘!”

예전에는 파더컴이 짝지어주는 사람과 결혼했다고 한다. 원하는 인간상을 얻기 위해 실험한 것 같았다. 그리고 그렇게 태어난 자식은 파더컴이 내민 선택지 중에 한 명을 골라 결혼하고 출산을 하다가 죽었다. 남편은 아내를 살리고 싶어 했으나 안드로이드 의사는 아기를 선택했다.

“우리는 단일민족국가였으나 피가 너무 흐려졌다. 그걸 다시 원상복구 하지 않으면 조상님은 어찌 보겠어. 게다가 내가 좋은 혈통을 만든 덕분에 훌륭한 인재들이 많이 나와 나라도 더 부강하게 발전했다. 해외에서도 제발 우리나라 사람을 파견 보내달라고 성화지. 이게 다 누구 덕이지? 다 내 덕이야! 나는 국가와 민족을 위해 헌신하고 있다고!”
“그럼 저 사람들은 뭐지? 무슨 짓을 한 건데?”
“사람이 무작정 헌신하게만 해서는 안 돼. 마땅한 보상이 있어야지.”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할머니가 소리를 지르며 달려들었다. 그러자 초점 없이 가만히 서 있던 것들이 눈을 빛내며 다가왔다. 이들은 사람인가 안드로이드인가. 확연히 인간과는 다른 모습을 한 안드로이드들은 아무렇지 않게 레이저로 공격했는데, 사람의 모습을 한 것만으로도 공격하는 걸 망설이게 되었다. 안드로이드가 아니라 세뇌당한 사람이라면? 그것만 풀어주면 돌아오는 건 아닐까? 결국 피해 다니기 급급했다.

“명치에 스위치가 있다!”

소리친 사람 앞에는 작동을 멈춘 안드로이드가 있었다. 그 말을 듣고 너도나도 명치를 공격하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스위치가 있으니 안드로이드라는 걸 알고 나도 찌찌레이저를 쏘기 시작했다. 아주 약하게, 아주 짧게 가슴을 끊어져서 코앞에 있는 안드로이드를 공격했다.
이곳까지 온 사람들은 일당백의 능력이 있었으나, 적들이 너무 많았다. 게다가 저들은 고통을 느끼지 않았다. 스위치를 제대로 끄지 않으면 역공을 당했다.

“강하다 가! 여긴 우리가 상대할 테니까 빨리 가서 파더컴을 없애!”
“길을 뚫어줄게!”

사람들이 기합을 넣더니 파더컴으로 향하는 길이 열렸다. 내 주위에서 날 보호하며 싸우던 세희가 내 손목을 잡고 달렸다. 우리는 사람들의 희생으로 나아갔다.

“이 새끼야, 여자는 아기를 낳는 소중한 몸이라며. 쳐 봐, 쳐 봐!”
“유교보이, 나 노브라인데 눈 안 돌려?”

몸으로도 부족해서 말로 싸우고 있었다. 그런데 유교망령 K-파더컴이 만든 거라 그런지 오히려 저 말을 듣고 잠깐씩 움직임을 멈췄다. 음성이 나왔다면 “바른 몸가짐을 해야 임신이 잘 되고 건강한 아이를 낳을 수 있다!”라고 하거나 “모유가 나올 가슴을 방치하는 건 좋지 않습니다. 속옷을 착용해주십시오.”라고 했겠지. 그러나 지금 저것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남사스러운 말이 들릴 때마다 렉이 걸린 듯 정지했다.

그걸 보고 사방에서 임신과 출산, 육아, 하다못해 생리에 대한 이야기도 나왔다. 한 사람이 생리 중이라고 크게 말하자 여기저기서 자신도 생리중이다, 나는 갱년기라 죽겠다, 왜 나라에서는 갱년기 여성에 관한 지원을 안 해주냐 외쳤다.

그 소리를 뒤로 한 채 파더컴을 향해 달렸다. 어느새 통로에는 나와 세희 둘뿐이었다. 통로는 왜 이리 긴지, 연희가 손을 잡고 앞서나가지 않았더라면 도중에 포기하고 걸었을 것 같다.

이때 하얗기만 한 텅 빈 벽에 온화한 표정을 한 여자가 부른 배를 쓰다듬으며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보고 있는 영상이 떠올랐다. 남자의 어깨에 기대어 아기를 보는 모습, 걸음마 하는 아기를 보며 감격하는 모습, 아기와 남편을 위해 주방에서 정성스럽게 요리하는 모습, 손바닥보다 작은 아기 신발을 보며 귀여워하는 모습…. 전부 아기를 사랑하는 여자의 모습이었다.

“파, 더컴, 바보, 야? 왜, 이렇게, 하는, 건지도, 몰, 라?”

숨이 차서 제대로 된 문장을 구사하는 게 힘들었지만,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세희가 웃음을 터뜨렸다. 아 진짜, 컴퓨터 앞에만 앉아 있어서 체력이 형편없는 줄 알았는데 나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잘 뛰네.

“감히 나보고 바보라고 하다니!”
“생각 좀, 해라. 저거 싫, 어서 이러는 건, 데!”

앞에 있는 문을 향해 레이저를 마구 흩뿌렸다. 몸을 좌우로 흔들고 점프도 하면서 마구잡이로 발사하자 문이 박살 났다. 그 너머로 아주 거대하고 거대한 기계가 보였다. 저게 바로 파더컴의 본체였다. 이렇게 발전한 시대에서 저렇게 거대한 기계 속에 있으니, 얼마나 많은 것을 끌어안고 살아온 걸까.

세희가 자리에 앉아서 파더컴을 해킹하는 동안 나는 찌찌레이저를 쏘아댔다. 그러나 도대체 어떻게 생겨 먹은 건지 아무리 레이저를 쏘아대도 파더컴이 망가지지 않았다. 아니, 쏘는 부분이 망가지는 것 같긴 한데 너무 거대해서 티도 나지 않았다. 파더컴은 여전히 잘 작동되고 있었다.

“자식은 아비를 이길 수 없는 법이지.”
“닥쳐!”

약점이 따로 있나 싶어서 사방을 둘러가며 짧게 끊어 쏴도, 한 자리에 서서 오랫동안 강하게 쏴도 소용없었다. 통로를 뛰어오는 소리가 점점 크게 들리고 있었다. 동지들이 다 당한 건가? 찌찌레이저도 결국 소용없었나?

“네 능력은 아무리 봐도 신기하군. 내 실험체가 되는 영광을 주지.”

세희에게 해킹을 성공했냐는 눈짓을 했는데 고개를 내젓는다. 힘이 빠지려고 하는데 여기서 들리면 안 될 목소리가 들렸다.

“하다 이모 이겨라!”

뒤를 돌아보니 수 언니와 강주가 발을 두 번 구르고 박수를 한 번 짝! 쳤다. 쿵 쿵 짝, 쿵 쿵 짝. 반복되는 리듬은 알 수 없는 힘을 불어넣었다. 나도 모르게 둘을 따라 발을 구르고 손뼉을 쳤다. 그러면 그럴수록 가라앉았던 기분이 점점 위로 올라왔다. 동지들이 우리처럼 발을 구르고 손뼉을 치는 소리가 통로를 타고 전달되었다. 안드로이드들보다 빠르게, 더 빠르게!

쿵 쿵 짝! 쿵 쿵 짝!

박자에 맞춰서 강주가 알 수 없는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이쪽 세상에는 없는, 처음 듣는 노래인데도 흥이 났다.

“뭐 하는 거지? 어차피 소용없어. 백업하면 그만이다!”

 쿵 쿵 짝! 그럴수록 몸이 점점 뜨거워지면서 에너지가 몸에 쌓이는 게 느껴졌다. 발을 크게 두 번 구르고 박수를 치고 가슴을 두드렸으나 레이저가 나오지 않았다. 아직 멀었다는 듯이!

쿵 쿵 짝! 팡! 쿵 쿵 짝! 팡!

아기라고 생각했던 강주가 힘 있는 목소리로 클라이맥스를 부를 때, 내 찌찌에서 오색빛깔 찬란히 빛나는 레이저가 발사되었다. 레이저가 파더컴에 닿자 아까와는 다르게 구멍이 뚫리며 폭발까지 했다. 손을 뗐는데도 레이저가 계속 나오고 있었다. 내 걸음걸음마다 에너지가 모이고 박수를 칠 때마다 거대한 에너지에 더 강한 힘이 생기는 것 같았다.
온몸이 흔들릴 정도로 강하게 바닥을 차고 손이 부서질 정도로 손뼉을 치고, 가슴팍을 멍이 들 정도로 강하게 두드리자 더 강한 레이저가 쏟아졌다!

“안 돼, 안 돼!”
“이게 바로 신기술, 찌찌레이저 커맨드다!”

절대 무너지지 않을 것 같은 파더컴이 무너지고 있었다. 어느새 달려오던 소리는 사라지고 동지들이 쿵 쿵 짝! 하는 소리만 들리고 있었다.

“이게 끝이 아니다…. 이 순간에도 내 파일들이 어딘가로 전송되고 있지. 나는 다시 시작할….”
“해킹 성공! 바이러스 투입 완료!”
“뭐?”
“넌 이제 끝이라는 소리지!”
“웃기지―.”

파더컴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본체에 가득 들어와 있던 불이 꺼졌다. 파더컴의 본체가 파괴된 것이다. 정말, 정말 파괴된 건가? 의심쩍어서 쿵 쿵 짝! 팡! 하고 레이저를 쐈더니 화려하게 폭발했다. 도망가려는데 수 언니와 강주는 오히려 폭발의 근원지를 향해 달렸다.

“언니! 강주야!”
“이모들! 엄마랑 나는 이제 돌아갈게요!”
“뭐? 어떻게!”
“이 폭발에너지로! 안녕!”

콰아앙 소리와 함께 불꽃이 두 사람을 휘감았다. 레이저에서 나온 빛보다 더 강한 빛에 놀라 눈을 감았다. 눈을 감았지만 환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빛이 사라진 걸 느끼고 천천히 눈을 뜨자, 거대한 파더컴의 본체도 수 언니와 강주도 보이지 않았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힘이 빠졌으나 사람들이 쿵 쿵 짝! 하는 소리가 이어지고 있었다. 두 사람은 갔지만, 두 사람이 남기고 간 힘이 있었다.
모든 게 끝났다. 이제 새로운 시작이다.

새로 프로그래밍한, 안전하고 인간친화적인 안드로이드 의사가 곧 재수술을 할 예정이었다. 이제 인공 가슴 수술도, 남자들의 수명을 깎는 무분별한 신체 교체 수술도 사라졌다. 원치 않는 임신도, 엄마에게만 요구하는 가혹한 희생도 사라지겠지. 사랑받는 아이들이, 행복한 사람들이 많아지면 좋겠다.

“레이저 제거한 다음 뭐 할 거야?”

침대에 누워 세희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손을 내밀었다. 세희가 바로 내 손을 잡아주었다. 그 손을 힘주어 잡고 환하게 웃었다.

“포옹.”


 

댓글 0
분류 제목 날짜
곽재식 치트키 2023.02.01
노말시티 이번 이월의 이별 2023.02.01
박희종 The animal government 2023.02.01
곽재식 한산북책 2023.01.01
박희종 선택 2023.01.01
곽재식 백투 유령여기 X2 - 자주 묻는 질문(FAQ) 2022.12.01
해도연 우주항로표지관리원의 어느날 30분 2022.12.01
해도연 랄로랑이안 모뉴먼트 2022.12.01
해도연 병범 씨의 인생 계획 2022.12.01
pilza2 허약 드래곤2 2022.12.01
빗물 근처의 꿈 2022.12.01
아밀 그리고 노래하기 시작했다 2022.12.01
박희종 동자신과의 대결 2022.12.01
서계수 종막의 사사 2022.12.01
아이 머리끈 2022.11.30
갈원경 하루의 선택 2022.11.01
박희종 마이클 잭슨이 돌아왔다 2022.11.01
서계수 그렇게 전사는 뻐꾸기를 구하고 2022.11.01
박도은 입맞춤 퍼레이드 2022.11.01
곽재식 우주선 유지 장치 특별 프로그램2 2022.10.31
Prev 1 2 3 4 5 6 7 8 9 10 ... 52 Next

게시물의 무단 전재, 복사, 배포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