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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말시티 안 본 눈 팝니다

2022.01.01 00:0001.01

안 본 눈 팝니다

노말시티

 

예전에 유행했던 말 중에 ‘안 본 눈 삽니다’라는 말이 있다. 주로 어떤 콘텐츠를 본 기억을 잊고 싶다는 뜻인데 정반대의 맥락으로 동시에 쓰인다는 점이 재미있다. 하나는 정말 안 보고 싶은 걸 본 경우고 다른 하나는 너무 재미있게 봐서 그 감동을 온전히 다시 느끼고 싶은 경우다. 최근에 이 말이 다시 등장했다. 둘 중 후자의 의미다.

과거와 달라진 점이라면 이번에는 단순히 작품의 감동을 과장되게 표현하려고 이 말을 쓰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지난주 한 콘텐츠 업체에서 ‘안 본 눈 팝니다’라는 광고 문구를 내걸었다. 이 업체는 실제로 안 본 눈을 팔고 있다고 주장한다. 자신들이 제공하는 콘텐츠를 즐긴 뒤 일정 시간이 지나면 콘텐츠의 세부 사항을 모두 잊을 수 있다고 한다. ‘안 본 눈’이 되는 셈이다. 그럼 다시 처음 보는 것처럼 새로운 마음으로 콘텐츠를 즐기면 된다.

기억을 지우거나 조작하는 것이 과연 가능한지에 관한 연구는 역사가 깊다. 지금으로부터 거의 백 년 전 미국에서 MK울트라라는 계획이 극비리에 수행되었다. 극심하던 냉전 상황에서 적국의 포로를 세뇌하고 기억을 조작하기 위해 추진되었던 이 계획은 한때 근거가 없는 음모론으로 치부되었으나 결국 광범위한 인체 실험을 벌였다는 사실이 밝혀져 대통령이 사과하기까지 했다. 다만 당시의 실험으로는 어떤 소득도 얻지 못했다는 게 공식적인 입장이다.

긍정적인 방향에서의 연구는 주로 트라우마를 겪는 사람을 치료하려는 목적으로 진행되었다. 최근에는 인간을 대상으로 한 실험에서도 유의미한 효과가 관측되기도 했다. 한국과학기술원의 양세민 교수가 이끄는 연구팀은 공포와 관련된 기억을 억제하기 위한 연구를 꾸준히 수행해 왔으며 임상실험을 통해 인간의 공포 기억을 효율적으로 제거하였다는 논문이 최근 네이처지에 게재되었다.

신경세포에 작용하는 효소를 이용한 이 연구 결과는 조만간 트라우마 치료에 실제로 활용될 예정이다. 하지만 이 방법은 공포와 관련된 기억을 전반적으로 억제하는 것이지 특정한 기억만을 선별하여 지우지는 못한다. 뇌의 기억 능력에 관한 필사적인 연구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직 기억이 저장되는 방식에 대해 구체적으로 아는 바가 없다. 뇌의 특정 부위가 아니라 수많은 뇌세포가 종합적으로 연결되어 사건이 기억된다는 정도만 확실히 말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럼 ‘안 본 눈’을 판다는 업체는 거짓말을 하고 있을까. 쉽게 단정 짓기는 어렵다. 이 업체 역시 아무 기억이나 지워줄 수 있는 건 아니다. 이들이 제공하는 방식으로 소비한 콘텐츠만 선택적으로 지워줄 수 있다. 현재는 전자책만 서비스되고 있는데 방법은 이렇다. 읽는 도중에는 뷰어 네 귀퉁이에 작품마다 고유한 패턴의 무늬가 표시된다. 책을 다 읽은 뒤 기억을 지우고 싶으면 해당 책에 맞는 패턴이 깜빡이는 화면을 일정 시간 동안 응시해야 한다. 책을 읽은 지 일주일 안에 시작하여 서너 번 정도 이 과정을 반복하면 책의 세부 내용을 90% 이상 잊을 수 있다고 한다. ‘안 본 눈’이 되는 셈이다.

업체는 해당 기술에 대한 특허를 취득하였으며 임상실험도 마쳤다고 주장한다. 특허 심사에서는 기술의 실현성을 제한적으로만 평가하기 때문에 특허를 취득했다고 해서 효과가 입증되었다고는 볼 수 없다. 이들이 통과한 임상실험은 인체에 대한 안전성 평가다. 부작용이 없다는 뜻이지 효과가 있다는 뜻은 아니다. 효과가 엄밀히 증명된 적은 없다고 봐야 한다.

이들이 내세우는 것은 체험기다. 실제 서비스를 사용해 본 사람들의 성공담이 줄을 잇고 있다. 효과를 보지 못했다는 악평도 적지 않지만 업체는 개인에 따라 최적의 사용 환경이 다르기 때문이며 불만이 있는 사용자는 전액 환불해 주고 있으니 문제 될 것이 없다는 입장이다.

학계의 반응은 회의적이다. 대조군이 설정되지 않은 실험 결과는 믿을 수 없으며 플라시보 효과가 작용했을 수도 있다고 의심하고 있다. 다만 이들의 기술적 접근 방식 자체에 대해서는 근거가 있다고 보며 실제로 비슷한 연구를 수행하고 있기도 하다. 기억이 생성되는 과정에서 특정한 패턴을 주입하고 이 패턴을 이용해 기억을 추적하는 방식을 PEMT(pattern embedded memory tracing)라고 하며 동물 실험에서는 이미 효과가 입증되었다. 설령 이 업체의 서비스가 과장된 것이어도 조만간 다른 방식으로 실용화될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다.

실제 콘텐츠를 생산하는 창작자들은 당혹해하고 있다. 안 본 눈을 판다는 말은 같은 작품의 반복 소비를 유도한다는 것이고 이는 결국 일부 베스트셀러를 제외한 다른 작품들이 팔리지 않게 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뛰어난 작품이 등장하여 인기를 얻으면 그와 유사한 작품들이 쏟아져 나온다. 비판적인 시선도 있지만 그러한 작품들로 인해 콘텐츠가 풍부해지며 새로운 장르가 나타나기도 한다. 그런 시도 가운데 다시 뛰어난 작품이 나타나 변화의 흐름을 이끄는 경우도 적지 않다.

어떤 작품이 뛰어나다고 하여 독자들이 그 작품만 반복적으로 소비한다면 이러한 발전의 흐름이 끊길 것이라고 사람들은 우려한다. 모든 사람이 셰익스피어만 읽는 세계라면 어떨까. 그것도 셰익스피어의 작품 중 가장 뛰어난 것 하나만. 관객들이 한 가지 연극만 반복해서 계속 봤다면 과연 셰익스피어가 그렇게 많은 작품을 우리에게 남겨 주었을까.

물론 어떤 작품을 읽는지는 독자의 자유다. 기억을 지우지 않고도 같은 작품을 몇 번이고 다시 읽는 사람도 있다. 안 본 눈을 판다고 해도 새로운 작품에서 새로운 경험을 얻고 싶어 하는 독자들이 모두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콘텐츠 시장에 기억 삭제 기술을 도입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안을 만들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더 재미있는 글을 쓰면 되지 뭐가 문제냐며 이런 움직임을 대수롭지 않게 보는 사람도 적지 않은 이유다.

보다 근본적으로 이 문제에 접근해야 한다고 지적하는 목소리도 있다. 이런 서비스가 출시되는 배경에는 결국 비슷비슷한 작품들을 반복적으로 소비하는 독자들의 비율이 계속 늘어나는 현실이 반영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왜 책을 읽는가. 책을 통해 얻은 새로운 정보로 자신을 변화시키고 싶은 사람이 있는 반면에 그냥 읽는 시간 동안 즐거움을 느끼고 싶은 사람도 있다. 어느 쪽이 낫다고 할 수는 없다. 다만 독서 경험이 자신을 변화시키지 않기를 분명히 원하는 경향이 있으며 이런 경향성이 점점 강화되고 있다는 문제는 이미 많은 사람이 지적하고 있다. 베스트셀러가 되고 싶다면 독자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아야 한다. 독자를 변화시키고 싶어 하는 작가는 오만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 극단에 ‘안 본 눈’이라는 욕구가 있다. 책을 읽은 경험이 너무나도 만족스러워서 그 책을 읽기 전의 자신으로 돌아가고 싶어 한다. 책을 통한 변화를 완전히 부정하는 것이다. 과거의 ‘안 본 눈 삽니다’는 뛰어난 작품에 대한 과장된 찬사로 웃어넘길 수 있었지만 현재의 ‘안 본 눈 팝니다’는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다.

어쩌면 인류는 이미 정점에 와 있는지도 모른다. 유전자의 변화를 통한 진화는 오래전에 끝났다. 우수한 형질의 유전자를 지녔다고 해서 더 많은 후손을 만들지는 않는다. 심지어 그런 시도는 도덕적으로 비난받는다. 우리는 유전자의 우열과 관계없이 인간이라면 누구나 동등한 권리를 보장받는 세상을 추구한다.

문화의 진보는 어떤가. 우리는 인류의 문화를 더 고상한 수준으로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가. 고상하다는 단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각자 원하는 단어를 넣어도 좋다. 그게 무엇이든 우리는 우리의 문화가 어떤 방향을 향해 나아가기를 원하는가 아니면 지금 이 상태로 유지되기를 원하는가.

물론 책이라는 영역 하나를 놓고 이렇게 의미를 확장하는 건 과도할 수 있다. 우리가 반드시 독서를 통해 변화할 필요는 없으니까. 문화의 진보는 다른 분야에서 충분히 일어나고 있으며 책은 혹은 소설은 수동적으로 그 진보를 반영하기만 하면 되는 취미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실제로 ‘안 본 눈’에 등록된 전자책은 대부분 소설이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소설이 인간을 변화시킬 수 있으며 더 나아가 그런 변화에 동력을 공급하는 중요한 매체라고 믿는다. 한 권의 책을 반복해서 읽더라도 그 모든 독서를 통해 인간은 조금씩 계속 변화한다. ‘안 본 눈’은 현실성 없는 농담이어야 한다. 짜릿했던 독서의 경험을 찾아 미지의 이야기로 가득한 바다를 항해하는 독자들이 더 많아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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