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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우리는 마지막 사람이 되었다.

- ‘베를린 천사의 시(1987)’에 부쳐

 

갈원경


우리는 둘이나 하나가 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마지막 사람이 되었다.

 

마류의 마지막 편지를 읽고, 바모와 다언은 전령사를 쳐다보았다.

“이게 다예요?”

“네.”

전령사가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가자 바모와 다언은 서로를 쳐다보았다. 구름의 파편으로 편지를 남기는 건 마류의 특기였으므로 장문의 글을 기대했던 바모와 다언은 서운한 마음으로 마류의 마지막 구름을 날려 보냈다.

“너무 기뻐서 그랬나봐. 길게 편지를 쓸 수 없을 정도로 들떠서.”

다언이 바모의 어깨를 토닥였다.

“불합격한 우리를 배려한 걸지도 몰라. 편지를 받고 우리가 마음이 상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그래도… 약속했잖아. 문 앞에서 알게 되는 것들을 편지에 다 써 주겠다고.”

사령이 인간이 되려고 하는 경우가 모두 같은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은 인간들의 삶을 동경해서였다. 매일 같은 시간에 사령들이 내려다보는 세상은 끊임없이 변해가는데 자신들만이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견딜 수 없게 되면, 사령들은 인간이 되는 시험을 쳤다. 시험에 통과한 이들이 어떻게 되는지는 누구도 몰랐다. 인간의 삶을 향한 문 앞에서 그들은 아주 잠깐, 자신이 살게 될 인간의 삶을 볼 수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남아있는 사령들에게 짧은 글을 남기고는 했다.

“출발 시간이 지났어, 서둘러야겠다.”

다언의 뒤를 따라서 바모는 중얼거리며 호수로 들어갔다. 호수의 물결이 옷자락을 조금 스치고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바모는 63빌딩의 꼭대기 전망대 바로 앞에 서서 흑백의 풍경을 내려다보았다. 다언이 어느새 옆에 다가와 있었다.

“우리가 마류를 만나도 마류는 못 알아보겠지?”

“지금은 우리가 옆에 있어도 모르겠지. 지금까지 우릴 알아보는 사람을 만난 적은 없잖아. …하지만 나중에 우리가 인간이 되면 알아볼 수 있을지도 몰라.”

“…그러면 좋겠다.”

바모는 어린 사령들 중에서 제일 먼저 인간을 동경한 사령이었다. 그가 인간이 되고 싶다고 노래하는 동안 가까운 넷은 그 마음을 닮아갔다. 그렇게 친한 넷은 함께 시험을 치렀고, 나령이 제일 먼저 시험에 통과했다.

 


마류, 꼭 찾아와, 날.

나령이 문 앞에서 남긴 구름에는 그렇게 적혀 있었다. 인간이 된 마류는 제대로 나령을 만났을까.

“이 하늘을 사람들은 무슨 색이라 부를까?”

“구름이 많으니까 흐리다고 하겠지. 잿빛이라거나.”

다언은 하늘을 바라보며 그렇게 말했다. 잿빛이 무슨 빛깔인지는 알 수 없지만. 다언은 마치 추운 듯이 두루마기를 여미고 어깨를 세우는 바모를 쳐다보았다. 그의 행동이 거의 그들이 길에서 내려다보는 인간들의 흉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오래전부터 사령의 장長이 그런 바모에게 몇 번 꾸중을 한 적이 있었다는 것도.

“그럼, 먼저 내려간다.”

바모는 가볍게 발을 구르고 땅으로 내려갔다.

 

다언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이 많다고 생각했더니 정말로 비가 오기 시작하는지, 후두둑 물방울들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다언은 물방울을 손에 받으려는 듯 손을 뻗었다. 빗방울이 다언의 손을 통과해 월드타워 꼭대기에 부딪혔다. 투명한 유리창 위로 빗물이 흘러 내려갔지만 다언의 옷에는 변화가 없었다. 다언은 하얀 두루마기를 여미고 땅으로 뛰어내렸다. 공중에 멈추어 서서 건물 안의 사람들을 들여다보니 사람들은 갑작스러운 소나기에 놀란 듯이 우산이 있는지 서로에게 묻느라 번잡했다.

 

사람들은 긴소매 셔츠 위에 사령들이 입는 두루마기보다 두터운 옷을 덧입고 목에는 머플러를 두르고 있었다. 그가 종종 지나치는 건물 2층 은행의 직원들도 복장이 바뀌었다. 계절의 변화를 아는 것은 언제나 이런 것들이었다. 사람들이 입고 다니는 옷차림이나 복장, 머리 위에 쓴 모자 같은 것들. 다언과 바모가 시험을 치르고 있는 동안에 짧은 이 나라의 가을은 이미 지나가 버린 후다.

다언은 바닥으로 완전히 내려섰다. 길가에 지나가는 사람들은 가방을 머리 위로 들고 바쁘게 뛰어가기도 하고 느긋하게 준비한 우산을 펼치기도 했다. 길거리엔 중고우산을 헐값에 파는 노인이 어디선가 나타나 자리를 잡았다. 다언은 그 사람들의 인파 속을 조용히 걸었다. 하얀 두루마기가 나풀거리고 새하얀 가죽신이 어울리지 않는 이 2019년의 도시를 활보하더라도, 사람들은 쳐다보지 않았다. 그것이 사령使靈이다. 수천년 전부터 그저 지켜보며 사람들 사이를 지나 다니는 자들.

크리스마스 트리가 커다랗게 자리잡은 백화점을 지났다. 다언은 트리의 꼭대기에 달린 별이 은색일지 금색일지 궁금했다. 수염을 달고 길거리에서 풍선을 나누고 있는 청년의 옷은 아마도 붉은색일 것이다. 백화점에 길게 늘어진 휘장은 아마도 초록에다 붉은 리본을 단 것이고. 백화점 앞에서 약속이 있는지 기다리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일행을 만나 웃으며 어디론가로 가버리는 것을 다언은 가만히 쳐다보았다.

“여기엔 오시지 않는 게 좋아요.”

다언은 자신의 앞에서 서서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는 한 여자를 보았다. 그 시선의 끝을 찾아 뒤를, 옆을 돌아보았다. 시선을 마주치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전 당신을 보고 있어요.”

“…예?”

여자가 웃었다. 요즘의 사람들은 통 입지 않는 담요 같은 코트를 입고서 여자는 잠자코 손짓하곤 앞서 걷기 시작했다. 한참을 그렇게 아무 말도 없이 쫓아간 여자는 시내에서 조금 벗어난 건물로 들어가더니 그대로 계속해서 계단을 올라 꼭대기 옥상에서 멈추어 돌아섰다.

“정말 내가 보이는 거예요?”

“네, 저한테는 아주 잘 보여요, 천사님.”

“천사?”

다언은 멍하니 여자를 보았다. 인간들이 종종 천사라고 믿는 존재들이 어떠한 것인지는 알고 있었다. 성당의 벽화 같은 것에 그려져 있는 희고 커다란 날개를 달고 있는 긴 머리의 사람들을 그들은 천사라 불렀다. 때로는 그 천사들이 사람들의 소원을 들어준다고 믿는 것도 알고 있었고. 그러나 날개를 달고 있지도 않고 옷차림도 전혀 다른 자신을 왜 천사라고 부르는지는 의문이었다. 자신의 얼굴이 어떤 모양인지는 모르지만 최소한 다른 사령들을 보면, 그들이 말하는 천사 같은 얼굴은 아닌 것 같으니까.

“왜 천사라고 보르죠? 나는 그런 게 아니고… 겉으로도 전혀 다를 텐데.”

“조금 다르긴 하지만, 그냥 그렇게 부를게요.”

또 여자가 웃었다. 여자는 동글동글한 얼굴에 곱슬머리였다. 고집스러워 보이는 입술을 앙다물고 걸을 때, 다언이 한 번도 그를 추월하거나 다른 쪽으로 가버리지 않았던 것은 이 여자가 바로 바모를 닮았기 때문이었다. 말을 많이 하지는 않았지만, 항상 어딘가를 보고 있는 고집스러운 바모를.

“아까 거기는 왜 오면 안 된다고 했던 거죠?”

“거긴 독毒이 가득 차 있거든요.”

“독…?”

바람이 정적을 깨며 돌연 세차게 불어 두루마기를 날렸다. 두루마기가 바람에 나풀거리는 건 신기한 일이었다. 비도, 구름도 뚫고 지나가는데 바람은 사령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설사 그것이 어떠한 바람인지 느낄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어머니가 그러셨거든요. 그런 곳에는 천사들을 죽이는 독이 흐르고 있다구요. …아, 돌아가신 어머니가 전직 천사셨거든요.”

…거든요, 라는 것이 그의 습관인 모양이었다.

“어머니가, 천사셨다고요?”

어머니, 여성. 당연한 일인데도 다언은 그 말에 놀랐다. 사령이 인간이 되면 당연히 성별을 갖게 될 텐데도, 사령이었던 사람이 여성이 되었다는 것은 놀라웠다. 그리고는 문득, 다언은 제일 먼저 그들 가운데 인간이 되었던 나령이 여자가 되었을지 남자가 되었을지 궁금해졌다.

“역시 믿기 어렵나봐요. 내가 이렇게 당신을 보고 있는데도.”

여자가 즐거운 듯 소리내 웃으며 다언에게 손을 내밀었다. 다언은 자신도 모르게 손을 내밀었다. 만져질 리 없는 그 손에 여자는 악수하듯이 손을 가져다 대곤 또 가볍게 웃었다.

“나는 라한. 어머니가 지어주신 이름이에요.”

그것은 사령들의 이름이었다. 이 나라를 내려다보고 있는 사령들의 이름자는 항상 그런 식으로 지어졌다. 가지고 "태어난" 능력에 따라. 인간의 것 같으나 또 아닌 것 같은 그 이름에 다언은 그의 어머니가 사령이라는 것을 확신했다.

“그런데 아까 그 독이란 건.”

머뭇거리며 다언이 물었다. 거긴 다른 사령들…, 특히 바모가 좋아하는 곳이었다. 지금은 인간이 된 나령도 줄곧 그곳에서 오가는 사람들을 보고 있곤 했었다. 독이 흐르는 곳이라면 그들에게, 거기 가지 말라고 해 줄 필요가 있었다.

“네, 천사들에겐 아주 치명적인 독이거든요. [삶의 희망]라는 이름의.”

 

라한의 집은 도시의 가장자리, 꽤 높은 산의 꼭대기가 보이는 높은 곳이었다. 가끔 다언이 내려다보곤 하는 산에 빼곡하게 들어찬 집 중 하나. 형식적으로는 방이 두 개인 단독주택이었지만 금방이라도 내려앉을 것 같은 슬레이트 지붕은 불안하기 그지없었다. 다언은 무언가 지붕에 조치를 하려다가 그만두었다. 인간에게 도움을 주는 것은 일부의 사령들에게만 허락된 일이었고, 다언은 그저 관찰자로서 존재해야 했다. 이 세계의 주관자主管者인 감께서는 그들의 눈으로 세계를 보고, 또 다른 전령사들의 손으로 세상을 돕는다. 사령이 인간이 되는 것이 어려운 것은 그러한 이유 때문이다.

“누구 왔소?”

쉬고 거친 목소리가 구석방에서 들렸다.

“저예요 아빠.”

쿨럭, 굵은 기침 소리가 대답처럼 들리고는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다언은 라한을 따라 나머지 한 방으로 들어갔다. 낡은 서랍장 하나와 작은 좌식 책상 하나가 그 방의 유일한 가구였다.

“거기 앉으세요. 여기 방석이 없거든요.”

라한이 방바닥에 무릎을 세우고 앉았다. 사령들은 피로를 느끼지 않기 때문에 굳이 앉거나 누울 이유가 없다. 그러나 라한이 자리에 앉아 있는데 자신만이 서 있으면 불편할 듯 했으므로 다언은 라한의 행동을 흉내 내며 앉았다.

“엄마는 사람들이 추위에 깃을 세우는 게 제일 부러웠대요. 그래서 계속해서 시험을 봤다나. 알죠? 천사들이 인간이 되도록 해 주는 시험.”

다언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재작년에, 그러니까 내가 스물세 살 때 돌아가셨어요. 다시 천사가 될 수 있다면 좋겠냐고 물으니까, 아니라고 그러시긴 하던데요.”

“천사라는 말은 어머니에게 들었습니까?”

“진짜 이름은 말할 수 없었나 봐요. 천사일 때의 이름을 물으면 똑같이 슬픈 얼굴로 고개를 저으셨죠. 그래도 천사였던 것은 맞을 거예요.”

라한이 책상 서랍을 뒤적이더니 작은 은색 체인을 꺼냈다. 다언은 체인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자신이, 그리고 모든 사령들과 전령사들이 가지고 있는 체인이었다. 그러나 다언은 자신의 왼 팔에 감겨 있는 체인을 그에게 보여주지는 않았다. 자신의 팔에 감겨 있는 것은 가느다란 한 줄, 인간이 만들 수 없는 모양의 그것. 라한의 것은 바로 그런 줄 두 개가 얽혀 있는 모습이었다.

“평생 소중하게 이걸 간직하셨죠. 엄마 돌아가시고 돈이 없어서 금은방에 가지고 갔거든요. 그런데 깜짝 놀라면서 당장 팔라던데요. 그러니까 더 못 팔았죠.”

“이건 이 세계의 것이 아니니까…….”

“역시 그렇죠?”

라한은 환하게 웃었다. 그가 다언을 발견하고 여기까지 데리고 온 것은 아마도 그 물건의 출처를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던 듯하다.

그때, 옆방에서 굵은 기침소리가 연이어 들렸다. 급히 라한이 방을 건너가고 다언은 방안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묘한 곳이었다. 사령들의 흔적 같은, 사령들이 머무는 곳만 가지고 있는 느낌이 가득했다. 단순히 라한의 어머니가 사령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기엔 그 느낌이 너무나도 짙었다.

다언은 일어나 옆방으로 갔다. 라한의 기척이 없다 싶었더니 라한은 급히 어딘가에 나가버린 듯, 급하게 열어젖힌 서랍장은 아직 완전히 닫혀 있지 않았다. 이 방도 마찬가지였다. 옆방보다도 더 강하게 사령의 기운이 남아 있었다. 사령이었던 사람에게서 태어난 라헌이 자라온 곳이라서 그랬을지도 모르지만.

누워있는 사내는 말 그대로 '노인'이었다. 라한의 나이가 스물다섯인 걸 생각하면 사내는 차라리 라한의 조부 정도로 보였다. 깊이 팬 주름에 검게 마른 얼굴은 미라를 보는 것 같았다. 다언은 언제 기침을 해댔느냐는 듯이 눈을 감고 있는 사내가 정말로 살아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돌연 사내가 눈을 뜨더니 다언을 흐릿하게 쳐다보았다.

“…누구… 맙소사, 너… 다…?”

노인의 말은 다시 시작한 기침소리에 묻혔다. 다언은 주춤 물러났다. 자신을 본 것뿐만 아니라 분명히 자신을 ‘알아’보았다. 인간이 사령을 볼 수 있는 순간은 일생에 딱 한 번, 죽음이 가까운 순간뿐이었다. 다언은 급히 집 밖을 빠져나왔다. 그는 인간의 죽음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다언… 가지 마….”

집안에서 허깨비처럼, 영화 속 유령처럼 거칠고 음산한 목소리가 쥐어짜듯이 흘러나왔다. 다언은 공중으로 뛰어올랐다. …사령이었던 건 라한의 어머니가 아니라 아버지였던가.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는 그 누가, 저렇게 초췌한 모습으로 죽음을 앞두고 있을까.

 


바모는 시내 한복판을 지나 사람들의 물결을 따라 걷고 있었다. 연말의 대학로에는 사람들이 평소보다 훨씬 붐볐다. 여기저기에서 공연을 알리는 포스터가 평소보다 더 눈에 띄었다. 사람들의 손에 꽃다발이며 선물 꾸러미가 들려 있기도 하고 똑같은 옷을 입은 사람이 무리 지어 우루루 뛰어가기도 했다.

“야, 공연 시작할 때 다 됐어!”

“지정좌석이잖아! 왜 뛰는거야!”

두 사람이 바삐 뛰어가는 곳은 대학로에서도 가수들의 콘서트장으로 가장 잘 활용되는 곳이었다. "GI-Hyun 13th Concert"라고 쓰여 있는 커다란 간판 아래로 사람들이 줄지어 들어가고 있었다. 바모는 사람들 곁을 태연하게 지나 콘서트장 안으로 들어갔다. 아직 조명은 평범한 백열등이고 사람들도 자리에 앉아 있더니 곧 웅웅거리는 마이크 소리와 함께 불이 꺼졌다. 바모는 사람들이 일제히 일어나 외치는 함성 소리를 들으며 서 있었다. 어두운 무대 한가운데에 일직선의 빛이 들어오며 그 자리에 서 있는 새하얀 트랜치코트의 인영人影이 드러났다.

“기,현! 기,현!”

“다들, 거기 있습니까?”

남자의 것 같기도 하고 여자의 것 같기도 한 중성적인 목소리가 느리고 나직하게 들리자 좌중은 순간 조용하게 정적에 휩싸였다. 기현은 바모도 이름을 알 만큼 유명한 사람이었다. 대중적으로 TV에 자주 나오거나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심야 프로그램에 가끔 출연하기도 했고, 그의 라이브 공연은 항상 매니악한 팬들 덕분에 예매 시작 첫날에 매진되곤 했다. 그런 그가 돌아서고 무대에 현란한 빛이 비칠 때까지, 공연장은 침묵으로 조용했다. 말 그대로 무언가 아주 작은 것이 바닥에 떨어지더라도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을 만큼.

“처음입니다. 98년 동안 살아온 중에 가장 멋진 밤…, 자 시작할까요?”

와, 하고 공연장이 떠날 듯이 울렸다. 나이나 고향이나 학력이나 철저하게 비밀로 한, 베일에 싸여 있는 사람이 기현이었다. 짐짓 진지한 얼굴을 하고 있다가 그 표정에 미동도 없이, 자기 나이는 98살이고 조만간 100살이 된다고 너스레를 떨곤 했다. 바모는 공연장의 통로를 따라서 무대로 가까이 걸어갔다. 말로 설명할 수 없을만큼 압도적인 사람이다. 이 인원이 모두 기현의 동작 하나, 표정 하나를 보고 열광하고 있었다. 이 나라에 드물게도 비주얼 락이라는 장르를 성공시키고 있는 사람답지 않은 저 느릿한 말투에.

“이런, 귀한 손님이 오셨군요.”

한참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사람들을 휘어잡던 기현이 돌연 그렇게 말하며 바모를 보았다. 바모 주변의 사람들이 모두 열광하며 함성을 질러댔다. 기현이 가볍게 손짓했다. 다시금 사람들이 조용해졌다.

“바로 여기, 천사님이 오셨습니다. 천사님, 꼭 공연 후에…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대기실로 오세요! 부탁합니다.”

바모는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다른 곳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기현은 바로 바모를 똑바로 쳐다보며 웃고 있었다. 다른 이들은 그 동작에 크게 웃음을 터뜨렸고.

 

공연이 끝나자 기현은 처음 등장했을 때처럼 조용히 무대의 불이 꺼지며 사라졌다. 바모가 대기실로 들어가자 대기실에는 항상 붐비고 있어야 할 팬들도, 스탭들도 없이 기현 혼자만 무대분장을 지우고 앉아 있었다.

“오셨군요.”

“…날, 봤군요.”

기현이 돌아앉았다.

“천사, 아 이렇게 부르는 건…, 우리들은 그, 정식 이름을 입에 올릴 수 없게 되어서….”

“당신은 왜 우릴 볼 수 있는 거죠?”

바모가 물었다. 기현이 웃었다.

“천사들을 볼 수 있는 건 죽기 직전의 인간. 그리고 천사의 존재를 믿는 사람. 그리고….”

“…당신같은?”

“멋대로 문門을 통과해온…, 전직 천사들.”

기현이 긴 머리를 쓸어올렸다. 바모는 그 머리빛이 바로 사령들의 빛이라는 것을 그제야 알았다. 색깔을 알 수 없는 사령들의 눈으로도 사령의 머리색은 짙은 밤하늘의 검정으로 보였다.

“여기, 연예계라는 곳은 재미있어서, 98년을 살았다고 해도, 농담으로 웃거든요. 신비주의라면서. 아무리 추적해도 정체를 모른다고 해도 그저 재미있어하죠. 그런데, 어린 천사님이 여기 오신 건…, 여기, 보통 천사들이 돌아봐야 하는 곳은 아니잖아요? 동경해서? 인간들이 살아가는 걸?”

위에서 관찰하라. 인간 안으로 섞여 들어가도 되지만 절대로 그들과 오래 같은 공간에 있지 마라. 그들 중에 누군가가 너희에게 어떤 영향을 줄지 모르니까. 너희는 감의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아이들, 누구보다 소중한 경계의 아이들, 감의 눈目. 그럼에도 수많은 사령들은 인간을 동경하고 그들의 눈높이에서 세상을 보고, 그들과 같은 곳을 보고 싶어서 시험을 치렀다.

“그러면 안되나요?”

바모가 말했다.

“아뇨, 그 판단은 제 것이 아닙니다. 다만, 조언이라고 할까. 해도 될지는 모르겠지만. 당신과 같이 색이 없는 세계에서 있던 이가 해 주고 싶은 말이 있어서요.”

바모는 기현을 보았다. 색이 넘치는 세계에 있을 그가 사령의 세계를 알고 있다. 그가 바모의 눈을 보고 말하고, 바모의 세계를 이야기한다.

“정말 98년을 인간의 세계에서 살았다고요? 그런데 어떻게 그런, 모습인 거죠?”

처음 정장을 입기 시작하는 나이처럼, 혹은 긴장한 표정으로 결혼식장에 턱시도를 입고 서 있을 법한 나이처럼, 그는 20대의 초입 혹은 말엽 어딘가에 있을 모습으로 보였다.

“불완전하니까, 멋대로 문을 지났으니까, 중간인 겁니다. 인간과 …당신들의.”

“그런 건 불가능해요, 문을 열 줄 아는 건 감의 허락을 받은 이들 뿐이니까.”

바모의 말에 기현이 돌연 웃음을 터뜨렸다. 바모가 두루마기의 앞섶을 여미며 그를 노려보았다.

“불가능하다고 말해야죠. 모두 문으로 달리면 안 되니까. …나도 비슷한 사람은 만나지 못했고.”

기현이 벌떡 일어나 바모는 기현을 올려다보았다.

“인간이 되십시오. 시험을 통과해서, 이렇게는 말고. 꼭, 통과해서… 내가 이루지 못한 걸, 이루세요.”

“뭘 말이죠?”

기현이 바모를 똑바로 응시했다.

“둘이나 하나가 되는 것.”

 


사령의 장에게 물어서 바모는 기현의 원래 이름을 알아낼 수 있었다. 바모가 '태어나'기도 전에 몰래 문으로 숨어 들어가 아래로 가 버렸던 사령이 하나 있었다. '가흰'. 이름을 보면 그는 그 대代의 사령들 가운데에서 가장 뛰어난 자질을 가졌다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그는 시험에 통과하지 못했고, 그날 사령들의 출입이 금지된 때 몰래 그 안으로 숨어들어갔던 것이다.

가흰이라는 사령의 이야기는 젊은 사령들에게는 낯선 것이었지만 사령의 장長이나 전령사, 성원사成願使들에게는 유명했다. 사령들과는 달리 성원사들은 인간을 동경하는 법이 없었고, 따라서 시험도 치르지 않았다. 그들에게서 바모는 가흰의 이야기들을 가장 객관적으로 들을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그러나 그들에게선 가흰에 대한 경멸만을 읽을 수 있을 뿐이었다.

 

바모가 가흰에 대해 묻고 다니는 것을 알게 된 사령의 장長이 바모를 부른 것은 며칠이 지난 후였다.

“무엇을 알고 싶은 거냐, 아이야.”

“그가 왜 문을 그렇게 통과하고 싶어했는지 알고 싶습니다.”

호기심은 사령에게만 허락되었다. 감의 눈으로서의 역할을 더 잘 수행하기 위해서. 사령의 장 하가는 잠시의 침묵을 견디지 못하고 옷섶을 다시 여미는, 인간의 버릇이 배어있는 어린 사령을 묘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바모, 너는 왜 인간이 되려고 하지?”

“…예?”

하가가 보고 있는 것은 바모가 아니라, 훌쩍 문을 뛰어넘어버린 가흰이었다.

“그 아이는, 가흰은, 인간과 함께 죽기를 원했단다.”

바모는 자신도 모르게 흠칫 몸을 떨었다.

“생각해 보았니, 인간이 되는 것이 어떤 것인지? 상처 입고, 피를 흘리고, 배고파하고, 나이를 먹고 늙어서 죽어가는 거야. 하늘을 날 수도 없고 구름을 가지고 편지를 쓸 수도 없지. 지금껏 언제나 알 수 있었던, 당연하게 느껴지던 네 친구들의 마음을 더 이상 느낄 수 없어. 점점 찌들어가는 공기로 힘겹게 호흡하고 독이 섞인 음식을 먹고…,”

“하지만,”

바모는 입술을 깨물었다.

“노을의 색은 어떤 빛인지, 다 익은 보리밭의 빛깔은 어떤지, 흐르는 냇물이 손을 간질이는 건 어떤 느낌인지 알고 싶어요. 밤이면 하나씩 켜지는 창의 불빛을, 아침이면 동녘에서 떠오르는 태양의 따사로움을 느끼고 싶어요.”

하가는 씁쓸하게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그것만이 아니란다, 바모. 인간의 삶은 그보다 더 복잡하고 어려운 것이지. 너는 그 아이가 행복해하는 것 같더냐?”

하가, 사령의 마지막이자 시작인 그는 바모에게 물었다.

“그 아이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 지 얼마나 되었더냐? 언제까지 인간들을 그렇게 둘 수 있을까. 자신들은 늙어가는데 변함없이 그대로인 그 아이를. 아니 그 전에 변덕스러운 인간들은 그 아이를 잊어버릴지도 모르지. 그걸 그 아이는 견딜 수 있을까? 너마저 그렇게 되도록 둘 수는 없어.”

 

하가는 바모를 말릴 생각이었겠지만 바모는 곧장 기현, 가흰을 찾아갔다. 기현은 바모가 찾아올 것을 알기라도 하는 듯 대기실을 비워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화장을 지운 가흰은 더욱 더 나이를 알아보기 힘든 얼굴이었다.

“그 사람 만났어요?”

대뜸 바모가 물었다. 기현은 무표정하게 바모를 쳐다보았다.

“그 사람 만났냐고요, 같이 죽고 싶었던 그 사람 만났냐고요.”

“하가입니까. 그분은 여전히 말씀이 많으시군요.”

“그분을 알아요? 아, 아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 그 사람, 만났냐구요!”

“…영이라면 50년 전에 죽었습니다.”

기현은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마지막까지도 나를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온 동네가 나를 악귀라고…, 영도…. 50년 전의 전쟁에 영은… 핏빛에 물들어서, 내가 찾았을 땐 이미….”

기현이 갑자기 리모컨을 들어서 미니콤포를 켰다. CD가 제 위치를 찾는 소리가 들리더니 거친 파열음의 전주가 들렸다. 기현의 데뷔곡이었다. 붉은 바다.

< 꿈 속에서 당신은 언제나 붉은 바다에 있었다.

당신을 똑바로 응시하기 힘든 건

방금 떠오른 저 태양이 눈이 부시기 때문이야.

곧은 나무를 닮은 당신의 눈동자는 잠긴 채로…>

“이 파도가 당신을 삼키고 나는 여기에 고독으로 서서

먼 길을 따라 당신에게로 온 나는 여기에 홀로

당신의 얼굴을 적시는 붉은 비 아래에 서 있다.”

기현이 읖조리듯 노래하기 시작했다. 기현의 노래는 늘 특이했다. 노랫말같지 않은 노랫말이 그랬고, 읖조리는 듯한 곡조가 그랬다. 언제나 사랑 노래를 부르면서도 사랑한다거나 그립다거나 하는 말을 직접적으로 하지는 않는 그 은유들에 사람들은 열광하거나, 혹은 철저히 외면했다.

사실은 은유가 아니었다. 정말로 전쟁 중에 죽어간 연인의 노래를 부를 수 없었을 뿐이다. 바모는 100여 년을 그대로 인간들 사이에서 살아간 기현의 기분이 어떨지 생각해 보았지만, 그것은 사령인 자신은 알 수 없었다. 자신이 그저 변화하는 인간들을 바라보면서 느끼는 것보다 그 안에서 자신만이 변하지 않고 멈춰져 있는 쪽이 더 힘들 거라는 생각은 들었지만.

“힘들게 하려던 건 아니었어요.”

기현은 예의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100여년의 시간을 인간 가운데에 있었어도 기현은 여전히 가흰이었다. 인간을 동경해서 내려갔던 나령이나 마류, 남아있는 다언과 바모 자신과 똑같이 인간의 행동을 흉내내고 있을 뿐 그는 여전히 사령이었다. 그러나 바모는 그에게 그런 말을 할 수는 없었다.

“모르겠습니다. 영과 손을 잡고 싶고 같이 죽음을 맞고 싶었지만… 그게 사랑이었을까. 나는 정말로 인간의 사랑을 느낄 수 있는 걸까. 나는, 인간이 된 것일까.”

“다시 돌아가고 싶은가요?”

바모가 물었다. 기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바모는 그 침묵 속에서 기현의 대답을 들었다.

 


바모와 다언은 매일 서로의 생각을 ‘공유’했다. 그리고 그들은 매일매일 다른 곳에서 마류를 찾아다녔다. 인간이 된 마류가 어린아이로 새로이 태어난다면 아직 다른 나쁜 것에 물들지 않았을 것이고, 그렇다면 당연히 자신들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마류가 자신들을 알아보지는 못한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마류를 한 번 더 만나기를 원했다. 그러나 서울 시내 어디에도 마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마음에서 가장 먼저 허락된 것은 호기심이지만, 인간의 시험을 시도한 사령들에게는 조금씩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인간의 풍경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둘은 다언과 라한이 만난 그 거리에 종종 서 있었다. 그 뒤로 라한을 다시 만날 수는 없었지만, 둘은 라한이 이 거리에 와선 안된다고 말했던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눈은 그들의 옷은 뚫고 지나갔지만 사람들의 어깨 위에는 소담스럽게 쌓였다. 몇몇 사람들이 전화기를 꺼내 그리운 이름에게 전화를 걸고 메시지를 보냈다. 자신의 사진을 찍어서 친구들이 볼 수 있는 공간에 올렸다. 홍조 띈 얼굴에 급한 약속을 정하는 사람들은 두 사람을 지나 눈에 잘 띄는 장소로 이동했다.

그렇게 그 거리에 서서 바모는 사람들이 자신을 스쳐 지날 때마다 추위를 느끼는 사람처럼 몸을 떨었다. 다언은 그런 바모의 옆에 서 있었다. 그는 인간을 보는 것이 아니라 바모를 보고 있었다. 처음 바모가 인간이 되고싶다는 말을 했을 때 다언은 바모에게 동조한 첫 사령이었다. 그는 단지 인간을 바라보는 것 외에 더 이상의 아쉬움이 없던 자신이 어째서 바모에게 동조했는지 지금껏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바모와 같은 순간에 태어난 14명의 사령 가운데 유독 바모와 자주 마주쳤고, 같이 서울을 바라보는 것을 좋아했고, 바모와 생각을 공유하는 순간은 편안하고 행복했다. 불경스럽게도 감의 앞에 서 있을 때만큼이나.

서서히 독에 중독되듯이 다언은 깨달았다. 자신이 어째서 인간이 되고 싶어했는지. 자신이 언제나 이 서울의 거리에서 찾고 있었던 것은 바로 바모의 흔적이었다. 인간이 되고 싶었던 것은 바모가 인간이 되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인간이 된 바모의 어깨를, 추워하는 떨림을, 저 거리의 연인들이 그러하듯 따뜻하게 감싸주고 싶었다.

문으로 숨어들 수는 없었다. 그와 함께가 아니라면 아무런 의미도 없었으므로. 먼저 떠난 나령이 마류에게 어서 찾아오라고 메시지를 남긴 것처럼, 이 세상에는 둘이 함께여야만 하는 영혼이 있는 것이다.

다언은 바모를 거리에 둔 채 다시 하늘로 올라가 사령의 장을 찾아갔다. 하가는 열어두었던 창을 급히 닫고는 다언을 쳐다보았다.

“마류를 볼 수 있게 해 주세요.”

“인간의 삶에는 개입할 수 없어, 너도 바모를 닮아가는 거냐 다언.”

“아니, 단지 보고 싶을 뿐이에요, 마류가 남긴 편지가 무슨 뜻인지 꼭 알아야겠어요.”

하가의 얼굴이 떨렸다.

“그 애가 무슨 편지를 남겼길래?”

“우리는 둘이나 하나가 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마지막 사람이 되었다.”

하가는 씁쓸한 얼굴로 잠시 생각하다가, 다언이 들어올 때 닫았던 창을 열었다. 창은 각각 서로 다른 풍경을 비추어 주고 있었다.

“결국 너도 알게 될 일이니 하는 말이지만, 이 '하늘'은 모든 시간의 흐름 가운데 있단다. 사령들은 그 한 흐름밖에 보지 못해. 너는… 그래, 너희 대代는 1980년부터를 보고 있구나. 다른 대의 사령들과는 만날 수 없지. 그 사이를 오갈 수 있는 건 나와 전령사들 뿐이지만, 전령사들은 사령에게 자신의 의견이나 생각을 말할 수 없고.”

다언은 놀라지 않았다. 그것은 다언이 조심스럽게 생각해왔던 내용과 일치하는 것이었다. 그는 라한의 아버지가 자신을 알아보았던 이유를 확인하기 위해 하가에게 다시 물었다.

“인간이 될 때는, 자신이 보던 그 흐름 속으로만 가는 게 아닌거고요.”

“그래, 그걸 택하는 건 사령 자신이지.”

하가는 창 하나를 가리켰다. 황폐한 풍경이었다. 나무도 풀도 보이지 않고 무너진 건물의 잔해 사이로 모래돌풍이 수시로 불어댔다. 앞을 볼 수 없는 듯이 먼지안개가 자욱한 그 풍경은 낮인데도 무겁도록 어두웠다.

“저기가, 둘이 있는 곳이다. 네가 보는 흐름에서 200년 후에 있지.”

마지막 사람. 다언은 그 황폐한 거리에서 두 손을 쥐고 걸어가는 두 사람을 보았다. 키가 작은 여자는 서른 정도의 나이로 보였지만 키가 큰 여자는 40이 넘어 보였다. 서로를 보는 시선이 너무나 따뜻했기 때문에 다언은 마지막인 세계에서 둘만이 남은 그들이 안되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바모와 이 생각을 공유할거냐?”

“아니오.”

다언은 고개를 저었다.

“단지, 그들은 행복해 보였다고만 말해 주겠어요. 모든 것을 가진 듯이 환하게 웃더라고.”

하가가 창을 닫았다.

“여전히 인간이 되고 싶으냐, 아이야.”

“저는 인간이 돼요. 이미 보셨겠지만.”

다언은 인간이 된 바모와, 바모를 닮은 아이를 떠올렸다. 그 죽음이 두려웠던 것은 마지막의 순간에 자신이 이미 그의 곁에 있지 않다는, 죽어가는 그 사람이 혼자 맞을 고통에 대한 연민 때문이었다.

“왜 인간이 되고 싶은건지 말해 주겠니?”

“…둘이지만 하나가 되기 위해서요. 그와 함께.”

 

바모는 다음날 아침에 다언이 문을 통과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 마류와 나령을 봤어. 행복해 보이더라.

바모, 인간이 되어줘, 그리고… 나를 기다려줘.

다언이 남긴 편지에는 이렇게 씌어 있었다.

바모는 인간이 되려 한 그 의 첫 번째 사령이자 마지막 사령이 되었다. 매일 보는 세상의 풍경은 더 이상 아름다워 보이지 않았다. 회색빛의 세계는 너무나 권태로웠고, 사람들의 다정한 동작들은 절망으로 다가왔다. 바모는 구석진 골목에 기대어 서서 하늘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인간이 되기도 전에 인간의 절망을 모두 느껴버린 듯이, 사령의 흰 두루마기가 거추장스럽게 느껴졌다.

“여기서 왜…?”

“…아.”

기현, 가흰이 바모를 보고 서 있었다. 무대분장이 없이 야구모자를 눌러 쓰고 색안경을 쓴 가흰은 꼭 기현을 흉내낸 어설픈 팬처럼 보여서 오히려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한 모양이었다.

“한참 보이지 않아서, 인간이 되었나보다… 생각했습니다만.”

“왜, 안되는 거죠, 나는.”

기현은 주변을 한 번 둘러보곤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입니까, 인간이 되지 못해서. 전에는 이렇게 슬퍼보이진 않았는데.”

바모는 가만히 기현의 말을 들었다. 그게 아니다. 다르다고, 마음 속에서 위화감이 일었다.

“…아니에요.”

“예?”

바모는 기현을 보았다. 불완전하게 이 땅으로 와버린 사령을. 98년을 머물렀으나 인간이 되지 못했던.

“다언을 보고 싶어요, 다언을…, 한 번이라도.”

기현이 엷게 웃었다.

“내가 지금의 당신이라면, 문을 몰래 통과하지 않아도 되었을텐데.”

기현이 이 세상에 있으면서도 불완전해 보였던 이유는, 인간이 되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곁에 없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계속해서 끝없는 고독과 그리움을 노래한 것이다. 함께이고자 하였으나 혼자였던 까닭에. 바모는 기현의 손을 잡았다. 인간을 잡을 수는 없었지만 기현은 아니었다. 그는 중간이므로.

“돌아가요, 가흰.”

스르륵, 기현의 옷이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눈부신 빛이 잠시 비추이고 바모는 긴 머리를 늘어뜨리고 흰 두루마기를 걸친 가흰을 보았다. 그것이 그가 침묵으로 바모에게 부탁한 내용이었다. 바모는 가흰에게 다시 기회를 주고 싶었다. 진정으로 인간이 되는 기회, 혼자가 아닐 수 있는 기회, 다시 그 사람과 시작할 기회.

 

하가는 가흰을 가볍게 포옹하여 맞았고, 바모에게 문을 열어 주었다. 편지를 남기는 대신에 바모는 사령의 체인을 문 안으로 던졌다. 다시는 사령으로 돌아오지 않겠다고, 마지막까지 그의 손을 놓지 않겠다고 마음을 다잡으며 바모는 문 너머의 풍경을 보았다.

한 사내아이가 있었다. 가난하지만 꿈이 있었고, 고아지만 두려움이 없었다. 아이는 자라 청년이 되어, 나무 위로 떨어진 흰 옷의 한 사람을 만났다. 눈처럼 흰 피부와 칠흙같은 머리카락의 그 소녀는 첫눈에 청년을 알아보았다. 둘은 운명처럼 사랑에 빠지고 아버지를 꼭 닮은 곱슬머리의 딸을 낳았다. 바모는 자신이 사령이었던 사실을 잊어버리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상관없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다시 그를 만날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어서 날 찾아와, 다언.”

그는 문 안으로 걸어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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