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게시물의 무단 전재, 복사, 배포를 금합니다.

갈원경 돌아보는 고개

2021.11.01 00:0011.01

돌아보는 고개

갈원경

 


온전히 산으로 둘러싸인 마을이 있었다. 겉으로 보면 높은 열 개의 봉우리가 무리를 지어 있는 것 뿐으로 그 안에 마을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지역, 외부로 나가기 위해서도 바깥에서 들어오기 위해서도 높은 돌산 봉우리를 넘어야 하는 곳. 열 봉우리의 벽으로 둘러싸인 마을은 완전히 바깥과 단절되어 있었다.

그 근처 지역에서 사는 사람들에게도 그 마을은 생경한 곳이었다. 수 백년간 산속에서 바깥으로 나온 사람들은 매년 한 명 있을까 말까, 바깥에서 그 마을 안으로 들어갔던 사람들도 마을을 나오는 순간 그 마을에 대해서 결코 입을 열지 않았다. 그래서 외부 사람들은 그 마을을 가리켜 안개 마을이라 불렀다. 흘러 들어갔다가 살아나오지 못한 사람도 있다는 뜬소문을 증폭시켜 주는 것은 밤늦게 혹은 새벽 무렵에 그 마을에서 처음으로 바깥 구경을 하게 된 몇 명이 결코 그 마을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높은 산으로 둘러싸인 안개 마을에서 해는 산에서 뜨고 산에서 졌지만, 마을 중턱에는 과수원이 있고 한쪽에는 꽤 큰 호수가 있고 개울이 흘러 마을 안에 바다에서 나는 것 외에 부족한 것은 없었다. 태어나서부터 바다를 보지 못하고 자란 사람들에게는 그 역시 그리 아쉬울 것도 없는 일이었다.

나는 그 마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조난사고를 당해 그 마을로 흘러들어온 사람이었다. 지금은 쉰이 훌쩍 넘은 아버지는 마을에 들어왔을 땐 아직 피 끓는 청년이었고, 자신을 구해준 여자를 사랑하게 되었다 했다. 그 사람은 내 어머니가 아니다. 아버지는 처음으로 사랑했던 여자에 대해서 이야기해주지 않았다. 내 어머니가 세상을 뜰 때 했던 말을 나는 생생히 기억한다. 당신을 붙잡아서 미안해, 고개에 같이 갈 수 없게 해서 미안해…. 어머니는 평생 아버지에게 미안해했고, 아버지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어머니를 용서하지 않았다.

당신은 궁금해질 것이다. 왜 마을 사람들은 밖으로 나오지 않는 것인지, 왜 내 아버지는 어머니를 용서하지 않았는지, 그리고 나는 어떻게 그 마을 밖에 나와서 당신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인지 말이다.

마을에서 유일하게 외부와 연결될 수 있는 곳은 다른 산에 비해서 조금 완만한 산 하나 뿐이다. 나머지 산들은 정상 가까이 갈수록 완전히 돌산인데다 마을 바깥 방향은 깎아지른 절벽이라 도저히 내려갈 수가 없다. 사람들은 산의 완만한 면, 흙이 있는 면에 과수원을 만들고 계단식으로 밭을 만들었다. 절벽이 내려다보이는 정상의 바위에는 누구도 올라가지 않는다. 산은 우리에겐 세상을 둘러싼 벽과 같았다. 유일하게 밖으로 내려갈 수 있고, 또 밖에서 사람들이 넘어올 수 있는 것은 열 개의 봉우리 중 하나뿐이다.

사람들은 그 산을 '돌아보는 고개'라고 불렀다. 마을에서 산에 조금만 가까이 오면 숲으로 우거진 산 군데군데 회색 기둥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어떤 것은 크고 어떤 것은 작지만 큰 것도 2m를 넘지 않았다. 사람들은 말했다. 돌아보는 고개에는 못된 도깨비가 살고 있단다. 마을 밖을 벗어나려면 사악한 목소리로 꾀기 시작하지. 어떠한 일이 있어도 마을로 돌아보면 안돼. 마을을 빠져나가면 큰 소리로 소원을 빌 수 있어. 도깨비는 패배를 인정하고 그 소원을 들어주지. 그렇지만 그 사람은 결코 이곳으로 다시 돌아올 수 없어. 다시 그 고개를 넘을 수 없기 때문에. 그러니까 너희는 절대 그곳에 오르면 안 돼. 장난으로라도 거기 오르면 도깨비의 목소리가 너희를 홀리기 시작할 테니.

아버지는 가끔 내 손을 잡고 그 산의 입구에 갔다. 내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그때마다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뭐라고 뭐라고 소리지르며 울음을 터뜨렸지만, 당신은 그저 창밖을 내다보며 깊이 한숨을 쉬었을 뿐이었다. 사랑하지 않았던 여자와 결혼해서 아들을 낳고, 자신이 태어난 곳도, 살고 싶었던 곳도 아닌 마을에 붙박여 있는 삶을 아버지는 시일이 지나도 적응해내지 못한 것이다. 그 산에 드문드문 서 있는, 뒤를 돌아본 사람들의 흔적, 이제는 세월에 씻겨 얼굴의 구체적인 모습은 알아볼 수가 없는 그 소금기둥들처럼.

내가 스무 살이 되던 해, 어머니가 돌아가신 그해 가을이었다. 아버지는 가방에 짐을 꾸리고 계시다가 내가 방으로 들어오자 나를 당신의 앞에 앉혔다. 나는 놀라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막연히 당신은 떠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처음 보는 모자와 처음 보는 옷을 입고 처음 보는 가방을 앞에 놓은 당신의 차림이, 말은 하지 않았지만 이 마을에 들어왔을 때의 차림과 같다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꼭 가셔야 하나요?"

붙잡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내 입에서 나온 첫 말은 그것이었다.

"너는 좋을 대로 해라. 이 마을에서 남아서 이 마을의 누군가와 결혼하고, 그 사람의 아이를 낳고, 나아지는 것도 나빠지는 것도 없이 평생을 사는 것도 나쁘진 않아."

"하지만 아버지는 떠나시려고 하잖아요."

누군가의 아이를 낳을 생각은 한 번도 한 적이 없던 나지만, 그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아버지는 한숨을 내쉬고 다시 바깥을 쳐다보았다. 소금기둥이 서 있는 '돌아보는 고개'를.

"내가 사랑한 사람은 저기에 있다."

"…끝내 어머니를 용서하지 못하시겠어요? 평생을 아버지한테 헌신하셨다는 거 아시잖아요. 저한테도 아버지 말을 거스르면 안 된다고 당신보다 아버지 눈치만 보고 사셨고요. 그런데 어째서…"

아버지는 슬픈 눈으로 나를 보았다.

"…너한테는, 네가 태어난 이야기를 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나이 스물이었다. 대학 합격 발표를 보고 곧바로 산행에 올랐지. 너는 대학이 뭔지 모르겠구나. 바깥 사람들은 말이다, 8살부터 19살까지 학교를 다니지. 스무살이 되면 어떤 사람들은 대학이라는 더 큰 학교에 가서 공부를 계속하고 어떤 사람들은 일을 하게 돼. 나는 대학을 가는 쪽을 택했다. 여동생이 있었지만 아들이 귀한 집안의 3대 독자였으니까 좋은 대학을 나와서 좋은 직장을 가지고 좋은 여자를 만나 결혼을 하고 그렇게 살려고 했었어.

지도에도 나오지 않는 마을이 있다는 이야기를 산 아래에서 들었지. 젊은 혈기라는 게 무섭지. 오래 머물 짐을 챙겨온 것도 아닌데 나는 무작정 사람들이 가리키는 안쪽으로 들어갔다. 이상하지. 분명 지도에서는 바로 앞에 계곡이 있어야 하는데 더 높은 절벽으로 막혀 있더란 말이야. 그래서 알았지, 아 여기가 바로 안개마을이구나 하고 말이다. 배낭에서 밧줄과 장비를 꺼내서 그 절벽을 올랐다. 끝도 없이 올라가는 꼭대기가 안개로 가려서 보지지 않을 정도로 높았는데 무슨 생각으로 거길 올랐는지.

몇 번이나 미끄러질 뻔했는지 모른다. 정상에 도착하니까 눈앞에 마을이 보이더구나.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이런 곳에 숨어있었구나 하고 감동한 것도 잠깐이고 나는 금방 정신을 잃어버렸다. 다리에 아무 감각이 없었지.

내가 발견되어서 마을은 발칵 뒤집혔나보더라. 일 년에 한 두명 정도가 이 마을로 그런 식으로 들어온다고 했지. 마을 사람들은 나를 촌장에게 데리고 갔다가 촌장의 이웃집인 박씨네에다 데려다 놓았어. 절벽을 오르면서 꽤 많이 부딪히고 긁혔다고만 생각했는데 인대가 늘어나 있었다더구나. 그래, 의원이신 어르신, 강의원께서 오셔서는 진맥을 하고 살뜰히 살펴 주라 하고 가셨다지.

이틀을 내쳐 잤다. 깨어나보니 이건 생전 처음 보는 집안 풍경인 거야. 머리맡에 머리를 곱게 땋아 내린 아가씨가 앉아 있다가 나를 보곤 웃더구나. 나는 내가 죽은 줄로만 알았다. 적어도 300년은 전의 옷차림 같은 그런 옛날 풍경이 내 눈앞에 있었으니 어떻게 그게 현실이라고 생각했겠니.

"정신이 드셨습니까? 이틀을 꼬박 주무셨습니다."

나이는 열다섯, 열여섯쯤 되었을까. 나중에 알고 보니 열여덟이었더구나. 여기 사람들이 바깥의 사람들보다 어려 보이는 거였다. 음식도 풍경도 습관도 다르니 당연했겠지. 내 소개를 하고 나서 그쪽의 이름을 물었더니 수줍게 얼굴을 붉히며 '선향'이라 그랬다.

다시 걸을 수 있을 때까지 그 집에서 머무는 동안에 나는 이 마을이 온전히 바깥과 다른 시간을 살아왔다는 걸 알게 되었지. 내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살았을 시대 그대로 여긴 멈춰 있었다. 바깥이 어떻게 변하건 상관없이.

매일 나는 선향에게 바깥의 이야기를 들려주었지. 가지고 왔던 물건들도 선향에겐 하나같이 신기한 것들 뿐이었어. 종이에다 바깥세상의 물건들을 그려 보여주면서 설명을 해주면 선향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내 이야기를 들었지. 아름다웠다. 스무 살 청년의 혈기 때문도 아니었고 낯선 곳에 고립되어서 느끼는 단순한 생존의 욕구도 아니었어. 진심으로 사랑하고 사랑했다.

이곳 사람들은 내가 선향과 혼인을 해서 여기에서 뿌리를 내려주기를 바라는 것 같았다. 내가 아는 작은 지식들이 이 마을에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었을지도 몰라. 지식이라야 별것도 없었지만, 내가 가지고 왔던 산행용 지팡이나 배낭을 본따 이곳 사람들이 물건을 만들어 쓰는 걸 보곤 묘한 우월의식까지 느껴지곤 했었지.

그래 그냥 그렇게 뿌리를 내렸으면 좋았을지도 몰라. 혼자서 나를 기다리고 계실 어머님에 대해서는 잊어버릴 수 있었다면. 내 사랑스러운 연인을 어머니께 보여드리고 싶다는 생각이나, 그 사람에게 바깥 풍경을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면.

"나갑시다. 나가서, 우리 어머니랑 셋이서 삽시다."

그 말을 처음으로 꺼내는 순간, 선향은 얼굴이 하얗게 질렸지. 나는 그때까지 왜 이 사람들이 이렇게 고립되어서 살아가는지 알지 못했는데, 선향이 방을 뛰쳐 나가고 선향의 아버님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들어오셔서 나를 자리에 앉혔지. 그래, 그때 이 마을의 '돌아보는 고개'에 대해서 처음 들었다. 왜 이 마을에서 바깥으로 나가는 사람이 없는지도.

이해할 수 없었어, 믿을 수 없었어. 한 번 결심을 하고 나니 이 마을의 모든 것이 너무나 견딜 수 없어져 버린 후였기 때문에. 맑은 공기와 푸른 하늘과 서늘한 바람조차도 따분하고 나른했다. 선향은 처음으로 아버지에게 반항했다가 더 이상 나를 만나지 말라고 엄명을 들었고, 갑자기 촌장의 딸이 나한테 친근하게 굴기 시작하더구나. …맞아, 그것이 네 어머니였다.

촌장과 마을 사람들은 내가 선향에게 안 좋은 영향을 주고 있다고 했어. 네 어머니가 왜 갑자기 나한테 친근하게 굴까 했더니 마을 사람들이 나와 그 사람을 결혼시키려고 하는 거였어.

가을밤이었다. 오늘 같은. 몰래 선향에게 쪽지를 주었지. 그날 밤 '돌아보는 고개'의 입구에서 달이 중천에 뜰 때 만나자고. 나는 몰래 짐을 꾸려서 내 방을 빠져나갔어. 선향이 거기에 있을 거라는 건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막 고개 쪽으로 몰래 걸어가는 중에… 네 어머니를 만났지. 내 옷차림, 내 얼굴, 그 모습이 달빛에 훤히 비쳤기 때문이었을까 네 어머니는 펑펑 울기 시작했어. 떠나지 말라고, 떠나면 당신도 소금기둥이 되어 버릴 거라고. 우는 모습이 왜 그렇게 안쓰러웠던지. 달이 중천에 뜨려면 아직 시간이 있다 싶어서 그 사람을 다독이는데 이거 울음을 그쳐야 말이지. 옷고름이 다 젖고 내가 건넨 손수건이 다 젖어버린 후에도 계속 울더구나. 달은 어느새 중천에서 훨씬 넘어 있었고.

퍼뜩 선향 생각이 나서 네 어머니를 뿌리치고 달렸다. 선향이 기다려주었을까, 못 기다리고 돌아가 버리진 않았을까, 아예 안 나왔다면 어쩌나 불안해지기 시작했지만 걸음은 더욱 빨라져서 고개 입구까지 도착하는 데 그렇게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어.

옷자락이 보였다. 선향이 입고 있었던 연분홍 저고리, 빛바랜 진달래 색같은 빛깔이 구름 사이로 비치는 좁은 달빛에 보여서, 나는 한숨에 내달리면서 그녀를 불렀지.

"나 왔어요, 선향!"

"기다려요, 제발!"

내 외침과, 네 어머니의 외침이 거의 동시였다. 선향의 모습이 또렷히 구름을 벗어난 달빛에 드러났다. 그리고 그 순간에 나는.... 뭐라고 외쳤는지 기억나지도 않는다. 그 모습.... 어느새 치마 아래는 흰색으로 변해 있었고 움직이지 못하는 듯이 굳어 있었어. 서서히 그 연분홍 저고리가 희게 변하고… 그리고 선향의 얼굴이 희게 굳어가고….

선향은… 내 목소리를 듣고 등을 돌린 거였다. 이미 고개의 중턱에 올랐으면서 내 목소리를 듣고 뒤를 돌아 내달린 거였어. 다리가 소금으로 변하고 옷자락이 굳어가는 동안에도.

네 어머니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서 있었지. …미친 듯이 네 어머니 위에 올라탔다. 당신이 나의 선향을 저렇게 만들었다고, 당신 때문에 내 손으로 선향을 죽인 거라고. 당신이 거기 서 있지 않았다면, 나를 붙잡지 않았다면 선향은 그대로 고개를 넘었을 거라고. 당신이 모든 걸 다 망쳤다고. 

네가 태어났고, 나는 혼인을 했다. 바깥의 풍경도 이제는 희미해질 만큼 늙어 버렸지. 하지만 말이다, 아직도 바람결에서 나는 선향의 목소리를 듣는다. 낮고 조심스러웠던 작은 목소리가 나에게, 나 기다리고 있어요 라고 말하는 소리를 나는 20년 동안이나 들었어.

 

"제가 태어나서, 어머니를 떠나지 않으셨다는 말씀인가요."

나는 아버지에게 물었다. 아버지는 대답하지 않았다. 한 번의 폭행으로 태어나버린 아이. 당신에게 가정은 떠남을 막는 굴레에 지나지 않았다.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까지 허깨비처럼이나마 남아 있었던 것은 어머니에 대한 아버지의 최소한의 속죄였을지도 모른다.

"미안하다."

아버지는 집을 나갔다. 얼마 후에 창밖으로 고개를 오르는 아버지의 뒷모습이 멀리 보였다. 이내 숲과 소금기둥 사이로 아버지의 모습은 사라졌다. 나는 아버지가 고개를 넘어 자신의 진짜 가족들을 찾아갔을지, 혹은 고개에서 등을 돌려 소금기둥으로 변했을지 의심하지 않았다. 고개 위의 소금기둥은 변함없이 그 개수대로였다. 아버지 당신이 고개를 돌려볼 만큼 이 곳에 미련이 있었을 리도 없다.

 


다음날 쌀 뒤주의 바닥에서 아버지가 남겨놓은 물건을 찾아냈다. 공단으로 곱게 싸 놓은 뭉치를 꺼내 풀러 보니 종이묶음이었다. 이곳에서 보지 못한 종이에 이 곳에서 보지 못한 무언가로 잔뜩 쓰여져 있는 것이, 아버지가 바깥에서 들고 들어와 쓴 것이 분명했다.

컴퓨터. 글을 쓰는 곳. 글이 보이는 곳.

자동차. 사람이 타는 문. 석유.

비행기. 사람이 타는 곳. 새.

그림에는 내가 한 번도 보지 못한 것이 잔뜩 있었다. 당신이 선향을 옆에 앉히고 들려 주었을 바깥의 이야기를 정확히는 알 수 없었지만 나는 마치 그 자리에 있는 사람처럼 종이묶음을 보고 또 보았다. 그리고 나는 며칠을 내리 앓았다. 꿈 속에서 나는 아버지였고 또 아버지의 누이였다. 고통에서 깨어 처음 본 사람과 사랑에 빠지고, 그 사람의 체온을 느끼고, 그리고 그 사람과 같이 미래를 이야기했다.

달이 이즈러지기 전에 나는 짐을 꾸렸다. 마을 사람들이 아무도 모르게, 아버지의 가방을 본따 만든 천가방에 아버지의 종이묶음을 넣고 나는 '돌아보는 고개'에 올랐다. 입구에는 짠 내음이 바람에 실려왔다. 마을에 소금을 주는 곳. 누군가가 실패한 소금 기둥은 오랜 시간이 지나면 혼자 무너져내려 고개의 입구에 소복하게 쌓인다. 그 소금을 가져다가 보물처럼 나누어 먹는다. 누군가의 꿈이 실패한 흔적, 누군가의 생명. 마을은 그렇게 유지되고 있었다.

고개 안으로 들어섰다. 바람소리 끝에서 누군가의 목소리를 기다리다가 어느새 정상에 가까워졌다. 그 때였다.

- 어떤 소리가 나도 뒤돌아보지 않을 수 있으신가요?

열여덟 열 아홉 정도가 되었을까 싶은 음성. 나는 피식 웃었다.

"역시 당신이었군요, 선향 아가씨죠?"

- ……예?

당황하는 목소리. 그래. 아버지가 무사히 빠져나간 이유를 알겠다.

- 내가 누군지 궁금하면… 뒤를 돌아보세요.

"아뇨, 그럼 당신과 더 이상 이야기할 수 없잖아요."

단지 추측이었을 뿐이지만 내 추측은 비교적 사실에 근접한 모양이다. 목소리는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나는 정상에 올라 나무 등치에 기대어 앉았다.

- 왜 가지 않죠, 이제 금방인데.

"보여 주고 싶은 게 있어요."

나는 가방에서 종이묶음을 꺼냈다. 아버지의 그림. 선향에게 보여주었던.

- 그 그림 그린 사람은 벌써 산을 내려갔어요.

"아버지예요. 내려가신 건 알고 있어요. 당신이 보내줬을 테니까."

어릴 때부터 의심이 많았던 나는 도깨비 이야기를 진심으로 믿지 않았다. 만약 도깨비가 그 고개를 지키고 있다면, 왜 도깨비는 사람들을 소금기둥으로 만드는 것일까. 늘 고개를 지키고 있다면 분명 외로울텐데, 사람들을 소금기둥으로 만들어버려도 외로움은 사라지지 않을텐데. 그래서 내가 내린 결론은 이것이었다. 도깨비는 고개를 넘지 못해 소금기둥이 되어버린 사람들의 영혼일 거라고. 그들은 아마도 다음 사람이 소금기둥이 되어야만 자유로워 질 수 있을 거라고. 그래서 그들은 계속 다음 사람을 소금 기둥으로 만들기 위해서 유혹하고 있는 거라고.

선향의 일이 있은 뒤로는 아무도 고개에 오르지 않았다. 어머니가 그 장면을 너무나 열심히 설명해 주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산 채로 서서히 소금으로 굳어져 가는 모습을 듣고 나선 누구도 그 모험을 시도하지 않았다. 그러니 내 결론이 맞았다면 선향은 20년 동안 이 고개를 혼자 떠돌고 있었을 것이다.

- 가세요, 당신 아버지는 이미 가셨으니까. 잡지 않을게요.

"고개를 넘으려고 온 게 아니에요."

나는 뒤돌아보지 않은 채로 종이 묶음을 바닥에 펼쳤다. 서늘한 느낌이 등 뒤에 있었다. 가까이 다가와 내 등 너머로 그 그림들을 보고 있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며칠을 나는 그 나무에 등을 기대어 있었다. 가방 가득히 준비해온 먹거리들로 매일 허기만을 달래면 시간은 충분했다. 선향은 늘 가까이에서 맴돌고 있다가 몇 마디 말을 걸었다가, 그 그림들을 보았다가 했다. 눈에 보이지는 않았지만 나는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선향의 기척이 항상 내 주변을 맴돌고 있다는 것을.

"그때, 왜 먼저 출발하셨어요? 아버지를 그대로 기다리지 않고."

사흘째 되던 날, 선향에게 물었다.

- 입구에서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어서 올라오라고, 가까이에 있다고.

그때 있던 '도깨비'는 선향보다는 요령이 좋았던 사람이었나보다. 그리고 이 사람은, 그 요령좋은 ‘도깨비’의 목소리를 믿었다. 고개에 올라서면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것을 알면서도 이 사람은 목소리만으로 겁 없이 그 속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 고개를 걸어 올라오는 동안엔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습니다. 계속해서 앞으로 걸어가면 그 분을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고 믿고 걷는데…

"아버지 목소리가 뒤에서 들렸군요."

선향은 대답하지 않았다. 고개를 돌리는 데 아무런 두려움도 없었을까. 어떤 고개인지 어렸을 때부터 줄곧 들어왔을 텐데도. 나는 아버지가 눈시울을 적히며 이야기하던 그 장면을 떠올렸다. 이미 치맛자락은 소금으로 변했는데도 당신을 만나려 내달려왔을 모습이 눈에 선했다.

- 마지막으로 본 그분의 얼굴이 너무 슬퍼 보여서…, 괜찮다고 이제 다 내려왔다고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말을 할 수가… 없었어요.

그땐 이미 입도 굳어져 가고 있었을 것이다. 눈앞의 아버지에게 웃음을 지어 줄 수도 없고, 손을 뻗어서 눈앞에 있는 아버지를 잡을 수도 없고.

- 당신 얼굴에 그 분 얼굴이 있어요. ...아니, 그 분이 말한 그 분의 누이 얼굴일까요.... 

나는 짐을 꾸리고 터덜터덜 고개를 내려가기 시작했다. 선향은 내 뒤에서 계속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따라왔다. 나는 선향이 어떤 방법으로든 내가 뒤를 돌아보게 만들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언덕을 모두 내려왔다. 시야를 가리고 있던 안개는 거의 느낄 수 없을 만큼 옅어졌고 공기에서 느껴지는 소금기도 없었다. 마지막 한 걸음을 내디뎌 온전히 바깥으로 나왔다. 그리고 외쳤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살려줘, 바로 여기에."

나는 눈앞에서 서서히 형체를 잡혀가는 사람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짙은 감색의 치마, 연분홍 진달래 빛 저고리에 곱게 다린 옷고름, 조그만 보퉁이를 소중히 가슴에 안고 있는 사람이 영문을 모르는 얼굴로 나를 보았다.

나는 그 사람을 끌어안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고개를 뒤덮었던 안개는 이미 없었다. 멀리서 파사삭 하고 소금기둥이 한꺼번에 무너져 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혼자서 그 고개를 지키는 고독감을 견디지 못하고 다른 이들에게 그 고독을 넘겨버렸던 약한 영혼들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다. …어머니가 늘 말씀하셨듯이, 남에게 한 모든 행동은 자신에게 오롯이 돌아오는 법이니까.

 


여기까지가 내가 살았던 마을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 마을은 이제 더 이상 막혀있지 않다. 그렇지만 나는 그 뒤로도 그 마을에 갔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는 없었다. 처음에 무엇 때문에 그 고개를 지키는 도깨비가 생겨난 것인지 나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결국 그 곳을 막고 있었던 것은 고독감과 공포심뿐이었다. 고독감은 사라졌어도 공포심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여전히 보이지 않는 벽 속에서 살아갈 것이다. 외지인이 찾아오면 내 아버지가 그랬듯이 어떻게든 그 마을에 붙박고 살아가게 하려고 애쓰며. 소금기둥이 모두 사라져버린 현상에 대해서 마을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지 나는 조금 궁금해졌지만, 상관없었다. 새로운 전설이 생겨나 그 고개를 막고 있다고 하더라도, 이미 나는 그곳을 떠난 사람이니까.

아버지는 얼마 전에 내 손을 잡고 세상을 뜨셨다. 겉으로 속마음을 잘 이야기하지 않으시는 당신이므로 끝내 많은 말씀은 하지 않으셨지만, 당신이 내게 가지고 있는 미안한 감정에 대해서 모를 만큼 철없지는 않다. 당신이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 당신의 가족은 모두 세상을 뜨고 없었다는 것을, 그럼에도 당신은 마을로 돌아갈 생각은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아버지로부터 들었다. 그리고 선향과 함께 아버지를 찾아낸 내가 마을을 떠나온 이야기를 한 뒤로 아버지는 우리에게 늘 미안해하다가 돌아가셨다. 나는 이제 마을을 떠났던 당신의 나이에 가까워진다. 그리고 갓난아기 때 우리가 데려온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내 딸 재선이는 그때의 내 나이에 가까워지고 있다.

재선이는 얼마 전 혼자서 여행을 떠났다. 꽤 긴 여행이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릴 때부터 우리의 이야기를 들어온 재선이니까, 별로 걱정은 하지 않는다. 어쩌면 오래지 않아, 재선이가 우리에게 왔던 것처럼 그렇게 선물처럼, 동향의 가족을 얻게 될지도 모르겠다. 

 

 
댓글 0
분류 제목 날짜
곽재식 좋은 정책이란 무엇인가4 2021.12.31
김청귤 하얀색 음모 2021.12.01
노말시티 라만 케부는 누구인가2 2021.12.01
갈원경 그래서 우리는 마지막 사람이 되었다 2021.12.01
김산하 커튼콜 2021.12.01
전삼혜 치질세(hemorrhodocene)의 끝 2021.12.01
곽재식 기 승 전, 그리고, 아, 그러니까2 2021.11.30
김청귤 찌찌 레이저1 2021.11.02
노말시티 알약 하나로 얻는 깨달음6 2021.11.01
갈원경 돌아보는 고개 2021.11.01
곽재식 공수처 대 흡혈귀5 2021.10.31
정도경 대게 - П...4 2021.10.01
노말시티 일인용 냄비에 라면을 끓였다 2021.10.01
갈원경 우주로 2021.10.01
유이립 이기적이다 2021.10.01
곽재식 하늘의 뜻2 2021.09.30
돌로레스 클레이븐 천국의 벌레들 2021.09.13
갈원경 마지막의 아이 2021.09.01
노말시티 안테로스 2021.09.01
곽재식 최후의 기술9 2021.08.31
Prev 1 2 3 4 5 6 7 8 9 10 ... 49 Next

게시물의 무단 전재, 복사, 배포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