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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인용 냄비에 라면을 끓였다

노말시티

 

라면을 끓인다. 가스레인지에 물을 올린다. 봉지를 뜯기 전에 양손으로 붙잡고 가볍게 중간을 꺾는다. 라면 하나를 끓일 냄비는 너무 작아 면이 통째로 들어가지 않는다. 면이 끊어지지 않게 결을 따라 꺾는다. 봉지를 뜯고 수프를 꺼낸다. 건더기 수프를 먼저 물에 털어 넣는다. 아직 물이 끓지 않았다.

헤어진 다음 날 일인용 냄비를 샀다. 그 사람과는 라면을 끓이는 방법이 달랐다. 그래서 헤어진 건 아니다. 그래서 헤어진 건 아닌데 헤어진 다음 날 제일 먼저 일인용 냄비를 샀다. 라면이 딱 하나만 들어갈 만큼 작은 냄비를 사서 혼자 라면을 끓여 먹고 싶었다. 내가 좋아하는 대로 제일 먼저 건더기 수프를 넣고 그다음에는.

냄비 바닥에 작은 기포가 보인다. 물을 끓일 때 뚜껑을 닫지 않는다. 조금 늦게 끓는 건 괜찮다. 끓는 모습을 보는 게 좋다. 그러니까 나는 라면을 끓일 때 레인지 앞을 떠나지 않는 사람이다. 그 사람은 달랐다. 그 사람은 물을 올리고 뚜껑을 덮고. 물이 다 끓을 때까지 딴짓을 하다가. 가끔은 물이 삼 분의 일 넘게 날아갈 때까지 딴짓을 하다가. 그제야 라면 봉지를 뜯어 면과 수프를 털어 넣고 다시 뚜껑을 덮었다. 그리고 또 딴짓을 했다.

큼지막한 물방울이. 사실은 공기 방울이지만 꼭 물방울 같다. 방울이 솟아올라 터지며 물이 출렁거린다. 분말 수프를 뜯어 톡톡 털어 넣는다. 올라온 수증기로 금방 눅눅해진 봉지에 빨간 수프 가루가 조금 엉겨 붙는 게 싫다. 수프를 다른 그릇에 먼저 털어놓았다가 끓는 물에 부으면 깔끔하겠다는 생각은 했다. 생각만 하고 그렇게까지 하지는 않았다. 그러면서 엉겨 붙은 수프 가루를 싫어하기만 했다. 그래서 그 사람과 헤어졌는지도 모른다. 수프가 들어가면서 치이익하고 끓어 올랐던 물이 다시 가라앉았다. 이제 면을 넣을 차례다.

그 사람과 내가 유일하게 마음이 맞았던 건 면을 삶는 시간이었다. 둘 다 살짝 덜 익은 면을 좋아했다. 그 사람은 면과 수프를 대충 털어 넣고 뚜껑을 덮은 뒤 딴짓을 하다가 와서 불을 끄면서도 희한할 정도로 시간을 잘 맞췄다. 나는 반으로 잘린 면 덩어리를 하나씩 작은 냄비에 넣었다. 나중에 넣은 면은 물에 완전히 잠기지 않는다. 초시계를 누르고 봉지에 남은 면 조각을 깔끔히 털어 넣은 뒤 밑에 깔린 면을 위로 끄집어낸다. 면이 풀어지며 모든 면이 고르게 끓는 물에 잠기는 걸 보고 나서야 안심하고 뚜껑을 덮는다.

면이 익는 사이 뜯겨 나간 비닐봉지들을 정리한다. 수프가 엉겨 붙은 은색 봉지는 종량제 봉투에 넣고 건더기 봉지는 겉봉지와 함께 재활용 비닐로 모아 둔다. 그 사람이 라면을 끓여도 봉지는 내가 치웠다. 한 번은 내가 안 치우면 언제 치우려나 싶어서 일부러 내버려 두었다. 그 사람은 라면을 먹은 그릇을 싱크대에 갖다 두며 봉지를 치웠다. 별로 느리지도 않았다. 그냥 내가 조금 더 빠른 것뿐이었다. 나는 항상 그 사람보다 참을성이 없었고 조금 빨랐다. 헤어지자는 말도 내가 먼저 했다.

수저와 그릇을 준비한다. 제일 먼저 식탁에 냄비 받침을 깐다. 다이소에서 산 와플 모양의 노란색 실리콘 받침이다. 그 사람은 집에 있는데 왜 또 사냐고 구박했다. 그날 크게 싸웠는데 냄비 받침 때문은 아니다. 그것 때문에 헤어진 것도 아니다. 싸우고 나서 우리는 함께 라면을 끓여 먹기로 했고 그날따라 그 사람은 시간을 못 맞추고 면을 푹 익혀 버렸다. 퉁퉁 분 면발을 입 안에 쑤셔 넣다가 눈이 마주친 우리는 그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문득 생각한다. 만일 우리 둘 다 퉁퉁 분 면을 싫어하지 않았다면. 상대방이 그걸 싫어한다는 걸 몰랐다면. 우린 그때 웃음을 터뜨렸을까.

오목한 사기그릇 하나와 수저를 식탁에 놓는다. 냉장고에서 김치와 물을 꺼낸다. 초시계는 2분을 지나고 있었다. 냄비 뚜껑을 열고 면을 한번 휘젓고 다시 뚜껑을 덮는다. 라면에 달걀을 넣는 걸 싫어한다. 달걀뿐 아니라 파나 콩나물 같은 것도 넣지 않는다. 라면만 먹는 걸 좋아한다. 나는 그게 진짜 라면의 맛이라고 했고 그 사람은 라면 포장지에 그려져 있는 조리 예가 진짜 라면의 맛이라고 했다.

내가 진짜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그 사람이 진짜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달랐을까. 그래서 우리는 헤어진 걸까.

나는 라면에 아무것도 넣지 않았고 그 사람이 끓일 때도 아무것도 넣지 못하게 했다. 다 익은 라면 냄비를 가운데 놓고 그 사람은 자기 그릇에 면발을 담은 뒤 날달걀을 하나 깨 넣고 그 위에 뜨거운 국물을 부었다. 내게도 몇 번 먹어 보라고 권했는데 나는 끝내 먹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헤어진 걸까.

아니. 우리는 그렇게 끓인 라면을 맛있게 먹었다. 내가 끓일 때도 그 사람이 끓일 때도 맛있었다. 우린 똑같이 덜 익은 면을 좋아했고 그거면 충분했다.

어느 날 마트에서 장을 보다가 일인용 냄비를 보았다. 나는 무심코 저런 거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 사람은 그런 걸 뭐하러 사냐고 구박하지 않았다. 그 순간 나는 헤어질 때라는 걸 깨달았다. 며칠 후 나는 그만 만나고 싶다고 말했다. 그 사람도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저 언제나 그랬듯 내가 조금 빨랐을 뿐이라고 믿는다. 초시계가 3분 30초를 지나는 걸 보며 불을 껐다.

일인용 냄비를 실리콘 받침 위에 올려놓고 식탁에 앉았다. 뚜껑을 여니 흰 수증기가 뭉클 솟아올랐다. 딱 일 인분의 꼬들꼬들한 면과 붉은 국물이 작은 냄비에 담겨 있었다. 나는 다시 일어나 냉장고에서 날달걀 하나를 꺼내 왔다. 그릇에 면발을 옮겨 담고 달걀을 깨 넣은 뒤 그 위에 뜨거운 국물을 부었다. 달걀을 휘휘 젓고는 노란 노른자가 묻은 면발을 한 젓가락 집어든 뒤 후후 불어 입속에 넣었다. 딱 오늘 하루만. 이렇게 먹어 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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